『광해군일기』: 가끔은 율곡을 지지한 홍가신


『광해군일기』: 가끔은 율곡을 지지한 홍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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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초본> 26권(광해 2년, 1610년) 3월 5일자로 「영원군 홍가신이 치사(致仕)하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치사(致仕)’란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뜻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가신(洪可臣)은 (문음門蔭이다.) 당초 학문과 행실로 선비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나중에 대관(臺官, 사헌부의 중견관리)이 되어서는 세상의 여론에 붙어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다른 당(동인-필자)이 되었다. 책훈(策勳, 공훈이 있어 문서에 기록됨)으로 벼슬이 정경(正卿, 정이품의 벼슬인 의정부 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홍문관 대제학 등을 지칭함)에 이르렀는데 병이 들어 아산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여 치사하였다.”

홍가신(1541년∼1615년)은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위와 같이 퇴임 요청을 할 때 나이는 만 나이로 69살이었다. 그는 ‘문음(門蔭)’이라고 하였는데 문음이란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어려서 허엽, 민순 그리고 나중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1567년(명종 2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에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임명되어 재임할 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된 뒤, 이어서 형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 1584년에 안산군수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 때 정여립과 평소에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3년에 복권되어 파주목사가 되었다. 다음해 홍주목사가 되었는데 이때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그가 영원군(寧原君)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공훈을 세웠기 때문이다. 1604년에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되고, 다음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인용문 가운데 홍가신이 ‘세상의 여론에 붙어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홍가신이 전적으로 공격만 한 것은 아니었다. 홍가신은 가끔은 율곡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583년(선조 16년)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 등 여러 사람이 이이(李珥)를 탄핵하면서 이이가 불교승려라고 성토하였는데, 그것은 군자가 할 말이 아니라며 오히려 송응개 등을 비판하였다.

또 1587년(선조 20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조헌은 다음과 같이 홍가신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박순·백인걸·김계휘·이이가 개혁을 주장하던 때 송기수가 이조 판서로 있었으나 감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날로 분한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우는 더욱 악하여 특히 청의(淸議, 올바른 논의)를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허봉·김첨과 혼인을 맺어 감히 이이를 모함하는 소장을 올리는 한편, 박순·정철·백인걸·김계휘의 무리도 아울러 언급하여 번번이 모함하였습니다. 송응개·송응형·허봉·김첨이 과연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두 왕조의 강직한 신하를 한결같이 배척하여 내쫓기를 도모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당시 조정 반열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홍가신은 김첨에게 ‘그대는 그대의 처남 송응개가 한 일을 옳다고 보는가? 이이를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자라고 하는 것은 옳거니와 소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謂李珥爲君子而未仁者則可, 謂之小人則不可)’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21권, 선조 20년 9월 1일 정해 8번째기사 「공주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렸는데 감사가 받지 않자 사임하고 귀향하다」)

홍가신은 율곡이 어질지 못하다는 점은 인정하나, 소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완전히 율곡의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이렇게 율곡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 그는 1582년(선조 15년)에 율곡이 올린 상소문에 대해서 임금 앞에서 공개적으로 지지를 하다가 동인의 리더중 한 사람이었던 유성룡에게 다음과 같이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이이가 경연에 참여하여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진달하자, 상이 흔쾌히 수락하여 종일토록 토론하고서 파하였다. 이때부터 이이는 경연에 참가하여 임금을 모실 때마다 앞의 이야기를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채용하여 인재를 얻어 정사를 맡겨 기강을 바로잡고 오랜 폐단을 개혁시키는 데 있어 세속이나 근거 없는 논의에 저지되거나 동요되지 마십시요. 3년간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세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기망한 죄를 내리십시요.’하였다.

임금이 그의 상소문을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우찬성이 전부터 이런 논의를 해왔는데 나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모르겠다만 새롭게 고치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령 홍가신(洪可臣)이 대답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이 궁전은 본시 조종이 창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형편이라면 조종이 창건한 집이라 하여 수리하여 고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필시 재목을 모으고 기술자를 불러들여 썩은 것은 갈아내고 허물어진 데는 보수한 뒤에야 산뜻하게 새로워지는 것인데 경장(更張, 고쳐서 새롭게 하다)시키는 계책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하자,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이 이 말을 듣고 이튿날 글을 올려 이이의 논의가 시의에 적합하지 않다고 극론하자, 그 의논이 끝내 중지되었다. 홍가신이 유성룡에게 가니 유성룡이 그가 이이의 논의에 부회(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춤)하였다고 힐책하였다. 홍가신이 말하기를,

‘공은 과연 경장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유성룡이 이렇게 말했다.

‘경장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선조수정실록』16권, 선조 15년 9월 1일「이이가 네 가지 시폐의 개정을 논한 상소문」)

이렇듯 홍가신은 율곡에 대해서 비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홍가신의 은퇴 요청을 받아들여 임금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영원군 홍가신이 예를 근거하여 은퇴하기를 청하니 내가 매우 섭섭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연초에 주는 봉급은 국가의 재정이 비록 부족하다 하더라도 어찌 마련하지 못하겠는가. 사양하지 말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