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광해군의 역린을 건드린 허성


『광해군일기』 : 광해군의 역린을 건드린

허성.

 

광해군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직후에 이미 사망한 생모 공빈 김씨를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능을 조성하고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광해군은 말하자면 선조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다. 광해군 위에는 친형으로 임해군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일찍 여의고 외할아버지 김희철에 의지하여 살았다.

선조는 뒤늦게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결국 서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궁중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다툼이 있었으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의 지원을 받아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이들 대북파를 중용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대북파 외에도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비롯하여 서인 측 인사들도 폭넓게 등용하기는 하였으나 대북파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허성(1548년∼1612년)은 문신으로 이조참의,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전라도안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으로 아버지는 허엽(許曄)이며,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 그의 배다른 동생들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기도 하다.

그는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으로,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다. 1568년(선조 1)에 생원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15년 뒤인 1583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0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의,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7년에는 선조의 유언을 받는 자리에 참석하여 소위 고명칠신(顧命七臣, 임금이 나라의 뒷일을 부탁한 일곱 대신)이라 불렸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14일)에 「지돈녕부사 허성이 (임금의) 생모 추숭에 대해 반대를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정초본>에도 실려있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광해군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자 마자, 후궁의 신분으로 자신을 낳고 24살의 나이로 사망한 어머니 공빈김씨(1553년∼1577년)를 선조의 왕비로 승격시키고 거기에 어울리는 묘지를 조성하였다. 젊어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조치에 대해서 허성은 ‘고명칠신(顧命七臣)’의 한사람으로서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그는 지돈녕부사의 자리에 있었다. 이러한 직책이 있는 돈녕부는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특히 당시 돈녕부는 왕의 외척이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먼 친척들을 대우하여 직함을 주기 위한 관부에 불과하였으며, 지돈녕부사 역시 직무가 거의 없는 한직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허성으로서는 광해군의 생모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상소문을 시작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공자가 이르기를 ‘살아 있는 사람은 예로써 섬기고 죽은 사람은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내면 효도라고 할 수 있다.’하였습니다. 이렇듯 예란 인도(人道)의 큰 법이고 효도란 백가지 행동의 근원입니다. 예로 행하면 효도이고 예로 행하지 않으면 효도가 아닌 것이니 예를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효도와 불효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성은 예가 중요하지만 예를 잘 알고 법도에 맞게 예를 행해야한다는 뜻으로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후궁이었던 생모를 왕비로 추증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이 추숭하는 은전(恩典,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특혜)으로 보아 성상(임금)의 뜻이 간절하심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엄한 (임금의) 전교가 한번 내려지자 대소 신하가 모두 감히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여기에 대하여 의논을 제기하지 못하고, 참으로 천리(天理)에 당연하고 예법에 마땅히 허락해야 되는 것처럼 여겨져 버렸습니다. 상(임금)께서도 다시 신중을 기하지 않고 한마디로 판결하고 의심치 않아 예(禮)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이 여기고 계십니다.”

잘못된 예로 생모를 추숭한 것에 대해 그 잘못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또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비판하게 된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예에는 두 어른이 없고 가정에는 두 적처(嫡妻, 정식 아내 즉 적실嫡室)가 없습니다. 의인 왕후(懿仁王后, 선조임금의 정비正妃)는 이미 모후(母后)의 높은 이로 선왕(先王, 선조)의 배위(配位, 부부가 모두 죽은 경우, 그 아내를 지칭함)가 되어 왕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우리 성상(광해군)은 선왕이 아들로 삼는다는 명을 받들어 임금의 적통(嫡統)에 올랐으니, 성모(聖母, 광해군의 생모)가 비록 낳아서 기른 은혜가 있으나 분수와 의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감히 왕후(의인 왕후)와 함께 적통을 견주지 못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또 적통(嫡統)을 계승하였으면 그 사친(私親, 서자의 생모)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예(禮)의 큰 법입니다. 사대부 집안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더구나 막중한 임금이겠습니까? 임금의 일신(一身)은 선조와 일체가 됩니다. 비록 자신을 가볍게 하고자 하더라도 종묘사직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어서 허성은 중국의 사례, 예를 들면 한나라 장제(章帝)의 사례를 들어 광해군의 생모 추숭이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지금 성상(광해군)께서는 인덕과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고명(高明)하니, 마땅히 훌륭한 시대에 예를 지키고 의리를 두려워하던 임금을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찌 스스로 쇠퇴하고 무도한 말세에 비교하여 스스로 꺼려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서로 대할 때의 정(情)은 예로써 서로 공경하면 기뻐하여 편안하고, 예가 아닌 것으로 서로 대하면 수치스럽게 여겨 성을 냅니다. 인정이 이미 이와 같으니 신도(神道, 죽은 자의 도)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신은 이번에 거행하는 일이 예인지 예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은 다만 예를 어기는 것이 성상의 효도에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성모(聖母, 광해군의 생모)의 마음도 또한 어두운 지하에서 부끄럽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이어서 그는 사람들이 송나라 인종의 사례를 들어서 광해군 생모의 추숭에 대해서 지지를 표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신이 조정의 의논을 듣건대 이신비(李宸妃, 송나라 인종의 생모) 의 일을 인용하여 말한 자가 있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송 인종(宋仁宗)은 단지 살아 있을 때 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길 줄만 알아 그런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첩모(妾母, 측실인 생모)를 높여 황후라 칭하였으니 (부족한 어머니를) 엄한 아버지와 짝을 만드는 것이 의리에 해가 되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단지 생모(生母)를 높이려 한 것이고 그 아버지가 천(賤)하게 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그 아버지를 낮추면 근본이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대로 하면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지막한 돌은 밟는 자도 낮아진다.’고 하였습니다. 나지막한 돌을 밟아 스스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시인(詩人)도 예를 잃은 것을 희롱하였는데, 자기 아버지를 낮추는 것으로 말하면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송나라 인종(仁宗)의 실덕(失德, 덕을 잃음)입니다. 경계할 일이지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은 못 됩니다.”

이렇게 신랄하게 송나라 인종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광해군의 행동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자신의 상소문을 마쳤다.

“신이 병이 난 이후로는 기력이 약해져 말채찍도 들지 못하는데 다른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오직 국가를 위하는 충성심은 아직 모두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때로는 광기어린 말을 하여도 너그럽게 용서하시니, 신은 참으로 무슨 마음이기에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임금을 해친다는 꾸지람을 앉아서 부르겠습니까? 신은 매우 절박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감히 아룁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서 잘 알았다. 생각한 바가 있으면 다 이야기하는 경의 뜻은 참으로 아름답다. 다만 내가 생모(生母)를 추숭하는 일은 역대의 제왕들이 융성한 예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오직 명나라 효종(孝宗)이 인정과 도리, 그리고 예와 관련된 문장을 참작하여 이미 중도(中道)에 맞는 예를 행하였으니, 나도 이것을 법으로 삼으려고 한다. (중략) 나의 소견이 이와 같으니 경은 잘 알도록 하라.”

광해군은 매우 격식을 차리고 답을 하였으나 사실은 자신의 생모에 대해서 가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허성의 상소문에 대해서 매우 불쾌해 하였다. 이러한 광해군의 심정은 허성의 상소문 아래에 적은 사관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사관은 먼저 다음과 같이 허성을 평가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허성(許筬)은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허엽은 유학자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비록 식견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막혔으나 만년까지 지킨 절의는 법으로 삼을 만하다. 또 그의【도덕과 행위】【평생토록 다져온 학문은】 사림에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허성은 이름난 자의 자식으로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가풍(家風)이 있었는데 청렴하고 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힘쓰지 않고 청렴하지 못하다고 꾸짖음을 받았다.】【탐심이 많아 옳지 않은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였다.】” (【】안의 글은 추가된 글임)

또 사관은 허성이 일본에 간 일, 그리고 허성의 형인 허봉이 율곡 이이를 질투하고 미워한 점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김성일(金誠一)에게 추하게 여김을 당하였고 일생동안 파당(派黨) 심기를 좋아하였다. 어질고 능한 이를 질투하고 【논의가 몹시 편벽되어】 그 무리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아우가 있는데 하나는 허봉(許篈)이고 또 하나는 허균(許筠)이다.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나 경박하고 품행이 없었다. 허봉은 사적인 원망으로 제일 먼저 이이(李珥)를 공박하여 질투하고 미워하는 효시가 되었고, 허균은 간사하고 음탕하여 행동이 금수와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엽은 아들 셋이 있으나 실은 자식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사관의 허봉과 허균에 대한 평은 몹시 신랄하다. 그것은 광해군 초기에 정권을 잡은 그들이 서인과 대립한 북인 강경파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버지 허엽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때 동인의 창당 멤버였다. 허성의 경우는 동인이었지만 서인의 편을 들기도 하였다.

1590년에 왜나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서인 황윤길이 정사, 동인 김성일이 부사였다. 이 당시 허성은 서장관으로 차출되어 일본에 갔다가 1591년 1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일본의 동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하여 ‘일본이 침략해올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동생 허균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사관은 이어서 허성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허성은 능히 진언(進言)하는 의리를 잊지 않아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고 논하고 임금을 비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를 보면) 일에 따라 간하는 풍도가 다소 있으니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상소가 들어가자 왕은 비록 너그럽게 용서하였으나 이때부터 미움을 당하였다. 호사가 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10장의 초피(貂皮, 담비 가죽)가 그를 그르쳤다.’ 이전에 김치원(金致遠)이 귀양을 가게 되자 허성이 상소하여 변론하니, 왕이 크게 칭찬하여 초피 10 장을 주었는데, 허성이 한강 가에 정자를 세우고 현판을 십초(十貂)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관의 말 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

“【허성은 한평생 조정에 있으면서 바른말로 임금을 촉발시킨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풍기가 있어 병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비로소 비분강개하여 국가의 일을 말하였다. 김치원이 귀양을 가게 되자 상소하여 구원해 주면서 논하여 임금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이 때 10장의 초피(貂皮)를 하사받았는데, 허성은 강가에 정자를 짓고 십초(十貂)라 이름 하여 자랑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왕은 ‘나지막한 돌은 밟는 자도 낮아진다.’는 말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가 여러 번 이 말을 드러내니 당시 사람들은 자못 강직하다고 하였다.】”

사관들은 처음에는 허성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행동에 대해서 엄하게 논박하는 허성에 대해서 은근히 칭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성은 위와 같은 상소문을 남기고 2년 뒤에 만 64세로 사망하였다. 그 2년 뒤인 1614년(광해군 6년)에 그는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다. 광해군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623년에 서인과 남인의 손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다.

『광해군일기』: 이준경과 이황의 종묘 배향이 부러운 사관


『광해군일기』: 이준경과 이황의 종묘 배향이 부러운

사관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7일자에 「이준경과 이황을 선조묘의 배향 공신으로 삼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정초본>에도 실려있다.

이날 대신들과 여섯 관청의 관리들이 빈청(賓廳, 궁중의 회의실)에 모여 선조묘(宣祖廟, 선조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배향할 명신(名臣, 휼륭하여 이름이 난 신하)을 의논, 결정하였다. 그 대상은 첫 번째 후보로 이준경(李浚慶)과 이황(李滉)이며, 두 번째 후보로 노수신(盧守愼)과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이를 보고하니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수신과 유성룡은 지난 조정에서 처음과 끝을 잘 보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묘정(廟庭, 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부족할 듯하다. 다른 상신(相臣, 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들도 적지 않은데 하필 그들로 하는가? 부득이하다면 이준경과 이황만을 배향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임금의 생각에 대신들은 모두 찬성하고 그 결론을 따랐다. 사관은 이러한 기사 뒤에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적었다.

“노수신의 만절(晩節, 늙은 시절)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며, 유성룡의 문장과 학문이 훌륭한 면은 있으나 도량이 작고 식견이 얕았다. 그는 10년 간 정승으로 지내면서 오직 남의 비위 맞추기를 일삼고 사사로움에 이끌려 파당을 심고 오로지 자기와 뜻이 같으면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하였으니 정승으로서 칭찬할 만한 업적이 아무 것도 없었으며 ‘또 능히 처음과 끝을 잘 보전하지 못했다.’”

노수신(1515년∼1590년)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라도 광주이다. 이언적(李彦迪)의 제자이며 154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시강원사서(1544년)에 임명되었으며 인종 즉위시에 정언이 되었다가 1545년(명종 즉위년)에 윤원형(尹元衡)의 을사사화로 이조좌랑 직위에서 파직되어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진도로 유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 기간 중에 노수신은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등과 서신을 교환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사림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복권되어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이후 우의정(1573, 선조 6년), 좌의정(1578), 영의정(1585년)영의정에 이르렀다. 1589년 10월에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을 추천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임금(광해군)이 그에 대해서 처음과 끝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뜻은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뜻이다. 특히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된 점을 들어 종묘에 배향하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유성룡(1542년∼1607년)은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안동)이다. 이황의 제자이며 김성일과 동문이다.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대교(1568년), 공조좌랑(1569년), 병조좌랑, 응교 등을 거쳐 사간(1578년)이 되었다. 그리고 부제학(1580년),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 대사헌(1582년)에 올랐다. 1589년에 병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해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스스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선조의 신임을 받아, 우의정(1590년), 이조판서, 좌의정(1591)등에 임명되었다.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는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부터 동인이 유성룡을 중심으로한 남인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란에 대비해 미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추천하여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임명되도록 한 공이 있었으나 영의정 신분으로 임금을 수행하여 평양으로 피난가면서 그곳에서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복권되어 영의정에 올라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1598년에는 명나라 장수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거짓 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북인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명나라에 가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것을 빌미로 유성룡을 탄핵하였는데, 선조는 이 의견에 따라 유성룡의 관작을 박탈했다. 선조는 1600년에 그를 조정으로 다시 불렀으나 그는 다시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력을 염두에 두고 광해군은 그가 처음과 끝이 일정하지 않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준경과 이황에 대해서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이준경의 경우는 고명(顧命, 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함)의 원로로서 정승이 되어 대신의 체통을 지켰고, 이황은 우리나라 종유(宗儒, 우두머리가 되는 유학자)로서 선왕(先王, 선조)의 초기에 보필하는 도움을 많이 주었으니, 이 두 사람을 묘정(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이이(李珥)도 사실 배향하기에 합당한데 대신들이 여론을 두려워하여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영의정 박순(朴淳)과 좌찬성 이이도 또한 의논하는 속에 들어 있었으나 당시 재상 중에 저지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추천하여 올리지 않으니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안의 내용은 일기에 추기된 사항임)

이준경(1499년∼1572년)은 경기도 광주(廣州)가 본관이며 서울 출신으로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어릴 때 상서원판관을 지낸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에게서 글을 배우고 황효헌(黃孝獻)과 이연경(李延慶)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1537년), 홍문관직제학, 승정원 승지(1541년), 한성부우윤, 성균관대사성, 형조참판 등에 임명되었다.

또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1548년) 등에 임명되었고, 1550년에는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 대사헌,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58년에는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는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 어린 왕이 즉위하여 섭정을 행할 때, 원로급 재상으로 승정원에 주재하여 국정 전반에 대하여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도록 한 임시 관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였다.

다만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대부들과는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571년(선조 4)에는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시에는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언의 상소문을 올려 이이, 유성룡(柳成龍) 등 젊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황(1501년∼1570년)은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유학자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상복을 입었고, 1539년에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성묘를 핑계로 귀향하였다. 당시 그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년),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등 계속되는 사화를 통해서 죄 없는 유학자 관료들이 하루아침에 관직을 잃고 유배를 당하거나 사형을 당하는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년)가 일어나자 그는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호를 퇴계(退溪)라 정하고 독서에 전념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에서는 그의 명성을 듣고 자꾸 관직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위험스러운 중앙의 관직을 사양하고 외직을 지망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에 임명되었다. 풍기군수에 재임할 때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紹修書院)이 조정의 지원을 받도록 건의하여 우리나라 사액서원(賜額書院, 조정에서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을 하사한 서원)의 시초가 되도록 하였다.

1552년에는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556년에는 홍문관부제학, 1558년에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였다. 1560년 이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육성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제학, 지경연에 임명되었다. 이후 어린 국왕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 『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을 강의하였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올렸다.

위에 소개한 『광해군일기』의 기사 뒤에 추가 기입된 사항이 있다. 【】안의 내용인데 거기에는 율곡도 배향의 자격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추가된 내용 중에는 율곡에 대해서 당시 배향 논의가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배향 논의가 정말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내용은 인조반정 직후 서인 학자들이 추가한 기록으로 보인다.

『광해군일기』: 가끔은 율곡을 지지한 홍가신


『광해군일기』: 가끔은 율곡을 지지한 홍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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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초본> 26권(광해 2년, 1610년) 3월 5일자로 「영원군 홍가신이 치사(致仕)하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치사(致仕)’란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뜻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가신(洪可臣)은 (문음門蔭이다.) 당초 학문과 행실로 선비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나중에 대관(臺官, 사헌부의 중견관리)이 되어서는 세상의 여론에 붙어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다른 당(동인-필자)이 되었다. 책훈(策勳, 공훈이 있어 문서에 기록됨)으로 벼슬이 정경(正卿, 정이품의 벼슬인 의정부 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홍문관 대제학 등을 지칭함)에 이르렀는데 병이 들어 아산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여 치사하였다.”

홍가신(1541년∼1615년)은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위와 같이 퇴임 요청을 할 때 나이는 만 나이로 69살이었다. 그는 ‘문음(門蔭)’이라고 하였는데 문음이란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어려서 허엽, 민순 그리고 나중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1567년(명종 2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에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임명되어 재임할 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된 뒤, 이어서 형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 1584년에 안산군수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 때 정여립과 평소에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3년에 복권되어 파주목사가 되었다. 다음해 홍주목사가 되었는데 이때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그가 영원군(寧原君)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공훈을 세웠기 때문이다. 1604년에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되고, 다음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인용문 가운데 홍가신이 ‘세상의 여론에 붙어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홍가신이 전적으로 공격만 한 것은 아니었다. 홍가신은 가끔은 율곡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583년(선조 16년)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 등 여러 사람이 이이(李珥)를 탄핵하면서 이이가 불교승려라고 성토하였는데, 그것은 군자가 할 말이 아니라며 오히려 송응개 등을 비판하였다.

또 1587년(선조 20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조헌은 다음과 같이 홍가신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박순·백인걸·김계휘·이이가 개혁을 주장하던 때 송기수가 이조 판서로 있었으나 감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날로 분한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우는 더욱 악하여 특히 청의(淸議, 올바른 논의)를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허봉·김첨과 혼인을 맺어 감히 이이를 모함하는 소장을 올리는 한편, 박순·정철·백인걸·김계휘의 무리도 아울러 언급하여 번번이 모함하였습니다. 송응개·송응형·허봉·김첨이 과연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두 왕조의 강직한 신하를 한결같이 배척하여 내쫓기를 도모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당시 조정 반열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홍가신은 김첨에게 ‘그대는 그대의 처남 송응개가 한 일을 옳다고 보는가? 이이를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자라고 하는 것은 옳거니와 소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謂李珥爲君子而未仁者則可, 謂之小人則不可)’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21권, 선조 20년 9월 1일 정해 8번째기사 「공주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렸는데 감사가 받지 않자 사임하고 귀향하다」)

홍가신은 율곡이 어질지 못하다는 점은 인정하나, 소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완전히 율곡의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이렇게 율곡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 그는 1582년(선조 15년)에 율곡이 올린 상소문에 대해서 임금 앞에서 공개적으로 지지를 하다가 동인의 리더중 한 사람이었던 유성룡에게 다음과 같이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이이가 경연에 참여하여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진달하자, 상이 흔쾌히 수락하여 종일토록 토론하고서 파하였다. 이때부터 이이는 경연에 참가하여 임금을 모실 때마다 앞의 이야기를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채용하여 인재를 얻어 정사를 맡겨 기강을 바로잡고 오랜 폐단을 개혁시키는 데 있어 세속이나 근거 없는 논의에 저지되거나 동요되지 마십시요. 3년간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세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기망한 죄를 내리십시요.’하였다.

임금이 그의 상소문을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우찬성이 전부터 이런 논의를 해왔는데 나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모르겠다만 새롭게 고치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령 홍가신(洪可臣)이 대답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이 궁전은 본시 조종이 창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형편이라면 조종이 창건한 집이라 하여 수리하여 고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필시 재목을 모으고 기술자를 불러들여 썩은 것은 갈아내고 허물어진 데는 보수한 뒤에야 산뜻하게 새로워지는 것인데 경장(更張, 고쳐서 새롭게 하다)시키는 계책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하자,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이 이 말을 듣고 이튿날 글을 올려 이이의 논의가 시의에 적합하지 않다고 극론하자, 그 의논이 끝내 중지되었다. 홍가신이 유성룡에게 가니 유성룡이 그가 이이의 논의에 부회(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춤)하였다고 힐책하였다. 홍가신이 말하기를,

‘공은 과연 경장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유성룡이 이렇게 말했다.

‘경장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선조수정실록』16권, 선조 15년 9월 1일「이이가 네 가지 시폐의 개정을 논한 상소문」)

이렇듯 홍가신은 율곡에 대해서 비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홍가신의 은퇴 요청을 받아들여 임금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영원군 홍가신이 예를 근거하여 은퇴하기를 청하니 내가 매우 섭섭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연초에 주는 봉급은 국가의 재정이 비록 부족하다 하더라도 어찌 마련하지 못하겠는가. 사양하지 말게 하라.”

『광해군일기』: 사관에게 밉보인 정혹, 잘보인 이귀


『광해군일기』: 사관에게 밉보인 정혹, 잘보인 이귀.

 

광해군일기』 광해 2년(1608년) 2월 8일자 기사에 「정각, 이귀 등에게 관직을 제수(임명)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광해군일기』에 ‘정각(鄭殼)’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정각’의 정확한 이름은 정혹(鄭㷤, 1559∼1617)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의 「정혹」참조)
우선 그에 대한 임명 내용을 기사는 “정혹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하였다.”라고 적었다. 평산은 황해도에 속한 곳이다. 이러한 기사 뒤에 사관은 정혹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혹은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에 대간이 되어(殼壬寅年間爲臺諫) 힘을 다해서 성혼(成渾)을 공격하고(攻成渾甚力) 당파를 모아 들인다고 지적하였는데(指以嘯聚黨類) 자기편 사람 중에서도 그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자가 있자(自中亦有非之者) 글이 짧아 실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혐(避嫌, 탄핵을 받은 관리가 그 혐의가 풀릴 때까지 사직을 청하고 맡은 업무를 보지 않는 것)하였다.(乃以文短失語避嫌)”

정혹이 성혼을 공격한 사실과 그로 인하여 피혐을 한 사실에 대해서 적었다. 위 문장만 보면 성혼을 공격한 일이 잘못되어 자기편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위와 같은 글을 지은 사관이 그렇게 유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읽는 우리가 잘못이 아니라 사관이 잘못한 것이다. 즉 사관이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정혹은 자가 회보(晦甫)‧회이(晦爾)이고, 호는 송포(松浦)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이다. 그는 1589년(선조 22) 증광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다. 1594년(선조 27)에는 정시에서 병과 6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 부수찬, 우부승지, 이조정랑,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1605년(선조 38)에는 절충장군(折衡將軍) 행용양위호군(行龍讓衛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강원감사(江原監司)‧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정혹은 1602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을 때, 부제학 이정형(李廷馨), 부교리 박진원(朴震元) 등과 함께 성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었다.(『선조실록』146권 선조 35년 2월 8일자 기사) 위의 『광해군일기』기사에서 정혹이 성혼에 대해 힘을 다해 공격했다는 말의 근거가 되는 자료다.

“최영경(기축옥사때 정여립과 연루되어 옥중 사망한 인물-필자)은 맑은 명성과 곧은 절조로 평소에 뭇 소인에게 미움을 받아 소인들이 뜬 말로 체포하고, 국문하여 공초하였는데, 위에서 억울함을 통촉하시고 석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철이 기어이 사지(死地)에 밀어 넣고자 하여 친근한 사람을 사주하여 감히 재차 국문하기를 청해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니, 말하자니 마음이 아픕니다. 만일 전하께서 통렬히 밝혀내 포상과 주벌의 법전을 크게 행하지 않았더라면 먼 후세에 처사를 죽였다는 이름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즉 이 말은 임금이 잘 판단하여 정철에게 벌을 줌으로써 임금이 책임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임-필자주)
성혼은 정철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로 최영경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가만히 보기만하고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에 또한 ‘성혼이 만일 힘써 구제하였더라면 최영경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구제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으나, 얽어 죽인 것에 비한다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묘년에 공론이 격발하여 정철이 이미 형벌을 받았고, 그때 재차 국문하기를 다시 청한 신하들도 탄핵을 받았으나 성혼에게 미치지 아니한 것은 대개 죄가 경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초야에서 소를 올려,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만이 아니고 성혼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그렇습니다.”
이러한 건의는 정혹 혼자 했던 것이 아니고 홍문관 차원에서 여러 관리들이 함께 올린 것이다. 그리고 ‘성혼을 공격하는데 매우 힘껏(攻成渾甚力)’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표현이 매우 완곡하다. 직접적으로 성혼을 강력하게 공격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당파 운운한 것도 근거가 없다. 결국 사관이 서인 쪽 입장에 너무 치우쳐서 성혼을 두둔하는 입장에서 정혹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혹은 1602년 3월 28일에 스스로 파직을 신청했다. 위에 소개한 『광해군일기』를 보면 정혹은 성혼을 공격한 일이 잘못되어 자기편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정혹의 사임 요청은 성혼의 일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그날 정혹이 올린 사직 요청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이 지금 대사헌 정인홍의 상소문을 보니,(이때 정인홍은 관직을 사임하고 재야에 있었는데, 선조가 그를 매우 신임하고 있었다.-필자) 오늘날 사대부의 폐습을 형용한 것이 이 시대의 병폐를 정확히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신(정인홍 자신)이 일찍이 정철·성혼(서인)과 서로 잘 지내지 못했고 또 유성룡(남인)과 흔쾌하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도당들은 못 다 푼 분이 해소되지 않아 풍색(風色)이 좋지 못한 까닭에 논핵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지난날의 소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고 한 것은, 혹 정인홍 자신이 이귀(이이와 성혼의 제자)에게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 글씨는 필자의 주석임)

여기서 성혼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정인홍이 스스로 한 말이다. 정혹이 성혼을 언급한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정혹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중에 ‘(정인홍의 말에) 논핵(허물을 따지는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지난날의 소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는 등의 말은, 아마도 지난 날 윤승훈(尹承勳)을 논핵하였던 일을 지적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신이 사간으로서 윤승훈을 논핵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대신을 가볍게 논핵할 수 없다고 여겨서였는데, 이는 조정을 중하게 여긴 뜻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언어의 실수를 가지고 대신을 논핵하는 것은 중도를 얻는 것이 아닌데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가 모두 논핵을 하기까지 한다면 더욱 미안한 일이었으니, 신의 말은 진실로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편벽된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승훈은 1573년(선조 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물로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1581년), 대사헌 이이(李珥), 장령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심의겸(沈義謙, 서인의 영수)을 탄핵하였다. 그 때 정철(鄭澈)의 탄핵문제까지 함께 거론되자 이에 대하여서는 이이가 반대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이를 논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한 윤승훈에 대해서 정혹은 비판하지 않았는데 그 일을 선조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보면 『광해군일기』의 광해 2년 2월 8일자 「정혹, 이귀 등에게 관직을 제수(임명)하였다」는 기사의 정혹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본다. 사관은 이귀(李貴)를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임명하였다는 말 뒤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썼다.

“이귀는 뜻이 크고 말이 곧았으며 성질이 우직했다.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높이고 이 두 사람이 무함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글을 올려 논변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귀가 소를 올려 정인홍의 잘못과 악행을 곧바로 지적하여 조금도 돌아보는 바 없이 하니 사람들이 그를 소마(疏魔, 상소 마귀)로 지목하였다. 또 나라 일을 담당하면서 견해가 있으면 바로 말을 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할 때는 법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았고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강포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돌하고 과감하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방을 사서 가는 곳마다 낭패를 보았다.”

이귀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말하였듯이 이이와 성혼의 제자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안산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8년(1618년)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그로부터 5년 뒤,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이귀에 대해서 사관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북인인 정인홍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기록이 인조반정 뒤에 추가되었거나 그 전 기록이라면 사관이 서인의 입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일기』: 노응탁이 조헌 사당의 사액을 신청하다


『광해군일기』: 노응탁이 조헌 사당의 사액을 신청하다.

 

충청도 유생 노응탁이 상소하여 조헌의 사당에 사액하기를 청하다」라는 기사가 『광해군일기』 1609년(광해 1년) 3월 23일자(음력)에 실려 있다. 이 문장은 <중초본>과 <정초본>에 모두 실려 있다. 여기서 ‘사액(賜額)’이란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편액 혹은 현판)를 내리는 일을 지칭한다.
사액을 신청한 노응탁(盧應晫, 1555∼1592)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 의병으로 호조참판 겸(戶曹參判 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 1526∼1589)의 둘째아들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제자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는 스승 조헌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청주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어 금산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33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고 알려졌으며, 후세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만경노씨 삼의사(三義士)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선빈의 연구(「만경노씨 삼의사의 ‘역사적 실재’와 ‘기억된 역사’」, 『역사민속학』47, 2015.03)에 따르면 그를 포함한 삼의사는 임진왜란 때 사망하지 않았으며 그 후로도 수십년간 공주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노응탁은 선조 시대에 오현(五賢)의 문묘종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에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조헌의 사당(표충사)이 사액을 받는 일에 참여하였다.
광해군 1년차에 쓴 이 상소문은 임진왜란 때 노응탁이 사망했다면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 이렇게 상소문까지 올렸다는 것은 그가 전쟁 때 사망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지은 상소문은 『광해군일기』에 수록되지 않았다. 그가 상소문을 올린 일과 그 일에 대한 사관(史官)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 유생 노응탁이 상소하여 조헌의 사당에도 고경명(高敬命)의 포충사(褒忠祠), 김천일(金千鎰)의 정열사(旌烈祠)의 사례에 따라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문을 살펴보니 충신을 드러내려는 선비들의 정성이 가상하다.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하고, 이어 ‘해조(該曹, 해당 관청)에 명령을 내려 회계(回啓, 임금의 질문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는 일)하게 하라.’고 하였다.”

조헌(1544∼1592)은 본관이 배천(白川)이며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로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등에게 배웠으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고경명(髙敬命, 1533∼1592)은 본관이 전라도 장흥으로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552년(명종 7)에 사마시에 수석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서도 수석을 하였다. 이해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고경명은 임재왜란 때 이미 60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1581년에 영암군수를 역임하고 김계휘(金繼輝, 1526∼1582)를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계휘는 1575년 사림들이 동서로 분당할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된 인물이다.(그는 당파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당쟁의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서산 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였던 율곡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583년에는 한성부서윤, 한산군수, 예조정랑 등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1591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인 담양의 창평으로 돌아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전라도 지역에서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를 데리고 각지에서 도망 온 관군을 모아 수원에서 왜적과 대항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올려보냈다. 그 뒤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6,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담양에 집결시켰다. 그는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임명되어 태인, 전주, 여산 등지로 북상하여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고경명은 정여립 모반사건(1589년)의 수사 책임자로 활동하다 많은 동인측 유생들을 희생하게 한 정철의 고향친구이기도 하다. 정철과 함께 임억령으로 부터 글을 배워 동문 사이이기도 하다.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나주 출신으로 이항(李恒, 1499년∼1576년)의 제자이다. 그는 1573년(선조 6)에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용안현감(龍安縣監), 강원도·경상도의 도사, 임실현감, 담양부사, 수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적군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으며, 강화도로 올라갔다. 이 즈음에 조정에서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통천(通川)·양천(陽川) 지역의 의병들까지 모아 강화도 연안의 적군을 공격하고,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으며,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3년에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진격할 때 그들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서울이 수복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하여 구휼하기도 하였다. 이해 4월에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하여 상주를 거쳐 함안, 진주에 이르렀다. 6월에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관군과 의병을 모았다. 최고 책임자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고, 10만에 가까운 왜군이 대공세를 감행해오자 분전했으나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조헌은 마음가짐이 고고하여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았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들의 덕을 흠모하였다. 정여립【역적이다. – 사관의 기록임】 이 명성을 지고 있을 때 그를 흉악한 역적이라 지적하여 배척하였고, 섬 오랑캐가 길을 빌려달라고 할 때에는 그 왜놈 사신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효도가 지극하였고 난리에 임해서는 큰 절개를 지켰으니, 【그 이야기를 듣는 자는 누구인들 격앙되지 않겠는가.】또 단지 고경명·김천일과 같은 무리는 아니다.”

마지막에 사관은 조헌이 ‘고경명이나 김천일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非但高、金之倫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조헌을 더 높이기 위한 평일 것이다. 고경명도 김천일도 조헌처럼 몸을 던져 왜병에 항거를 하고 순직한 인물들이다. 다만 조헌과 다른 것은 두 사람 다 율곡이나 성혼과 직접적인 사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역적으로도 이들은 서울, 경기도에서 멀다. 고경명은 율곡보다 4살 더 많으며 김천일은 율곡과 나이가 같다.
이 기록에 의견을 덧붙인 사관은 서인 측 사관일 것이다. 정여립을 역적이라 칭하고 조헌, 이이, 성혼을 높여서 기록한 내용을 보면 그렇다. 이 기록을 통해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나중에는 성혼보다 더 높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그렇게 높게 인식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광해군일기』 : 신응구가 성혼의 원통함을 호소하다


『광해군일기』 : 신응구가 성혼의 원통함을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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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구(申應榘, 1553년∼1623년)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제자로 직산현감, 형조정랑, 이천부사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춘천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582년(선조 1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추천을 받아 장원(掌苑)이 되었다. 1588년 직산현감(稷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임실·함열 등의 현감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조정에 들어가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그는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광해군 2년인 1610년에는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 폐모를 주장하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한 적이 있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서인이 집권하자 형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만퇴집(晩退集)』이 있다.
『인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사망 기록)를 보면 다음과 같이 사관의 평가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춘천 부사 신응구가 사망하였다. 신응구는 젊어서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큰 명망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런데 폐조(광해군 왕조) 때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친형)의 옥사(獄事, 중대한 범죄를 다스림)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 공신이 되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스승들을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11월 2일)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임해군이 옥사를 당하였을 때 익사공신(翼社功臣, 1613년에 임해군의 역모를 제보한 사람과 취조를 담당하였던 48명의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 호칭)을 등록하면서 조정에서 그를 훈적(勳籍)에 넣자는 의견이 있어서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의 문무관)에 올라 영천군(靈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신응구 본인은 이를 수치로 여겨 여러차례 상소를 올려 훈적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한 적이 있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0권(광해 즉위년 11월 22일)에 그가 스승 성혼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다는 기사(「광주 목사 신응구가 스승 성혼의 원통함을 상소하다」)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는 성혼과 관련된 당시의 상세한 사정이 언급되어 있다.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은 호가 묵암(默庵) 또는 우계(牛溪)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공조좌랑, 지평,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등을 지낸 문신이다. 율곡보다는 두 살 위로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성혼과 율곡은 1554년경부터 같은 고을에 살면서 서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혼은 1551년(명종 6년)에 생원과 진사의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리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1568년(선조 1)에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고 사숙하였다.
신응구는 먼저 상소문을 올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리석고 천한 소신(신응구 본인)이 외람되게 옛날에 아는 사이라고 하여 큰 고을에 발탁 제수되었으니, 실로 분수에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경기의 고을로 옮겨 제수해 주심으로써 부모를 봉양하는 데 편리하도록 해주셨으니, 신의 영화와 다행은 한 몸에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신하 성혼(成渾)이 아직도 죄인의 명단에 올라 있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화복(禍福)을 다르게 받고 있습니다.(자신은 임금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나 자신의 스승 성혼은 화를 받았다는 의미-필자주) 그러므로 당연히 성혼이 무함당한 곡절을 낱낱이 말씀드렸어야 하는데도, 상을 당해 애통 속에 황황히 지내어서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윽고 들으니, 해서(海西) 유생 이선장(李善長) 등이 상소를 올려 성혼의 원통함을 말씀드리자, 성상의 비답에, ‘자기가 좋아하는 데 빠져 대의를 잊고 있다.’라는 말씀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성혼을 이처럼 의심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이어서 신응구는 성혼이 비난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신이 삼가 성혼을 공격하는 자들의 말들을 살펴보니, 첫째는 ‘간악한 자의 당이다.’는 것이고, 둘째는 ‘임금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혼은 선왕조에서 세상에 없는 대우를 거듭 입어 거의 거르는 해가 없이 부름과 제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난한 생활을 분수에 달게 받아드리며 평소의 지조를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이이(李珥)를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 남을 구원함)하면서부터 크게 여론에 거슬려 헐뜯는 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계미년은 율곡이 1584년 정월에 병으로 사망하기 직전의 해이다. 율곡은 당시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관리들, 특히 삼사의 관원들은 율곡이 시행한 조치나 조정에서의 처신을 빌미삼아 집요하고도 가혹하고 탄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탄핵에 대해서 성혼이 변호를 한 것이 비난을 받게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주장하였다.

“성혼이 간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닙니다. 정철이 최영경을 얽어 죽인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성혼과 정철이 서로 친하였기 때문입니다. 성혼이 정철과는 비록 친하고 두텁게 지냈으나, 본디부터 조정에 서서 일을 함께 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최영경을 끝까지 두둔한 사실이 있는데, 말할 게 있겠습니까?”

최영경(崔永慶, 1529년∼1590년)은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서울 출생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조식의 제자들은 이황의 제자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나중에 남인, 북인으로 나뉠 때, 북인을 형성하였다. 최영경은 벼슬이 지평 사축에 이르렀으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신응구는 성혼과 정철은 서로 친하게 지내기는 하였으나 동인 최영경이 감옥에 끌려가도록 뒤에서 조종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최영경을 두둔한 사실이 있는데 억지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성혼의 아들이 찾아낸 성혼의 서신을 들었다.

“성혼의 아들 성문준(成文濬)이 아버지가 무고당한 것을 애통해 하여 집안에 묵은 종이들을 들추어 보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며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찰들 중 우연히 병화를 피한 것들을 찾아냈는데, 단지 최영경의 일에 대해 통탄해 마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루된 정언신(鄭彦信)·유몽정(柳夢井)·윤기신(尹起莘)·조대중(曺大中)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놀라고 애달파하며 원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성혼은 최영경 외에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피해를 받은 정언신, 유몽정, 윤기신 등에 대해서도 원통한 마음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에 보존되어 있던 성혼의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신(성혼)이 옛날의 역사를 보니, 반역자들과 친하고 파당을 지은 사람을 다스릴 때 사대부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기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역적(정여립)과 깊이 사귄 자들 중에서 참으로 역모에 참여한 자가 아니면 관작을 삭탈시켜 한가로이 살게 하는 것도 허물을 반성시키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배의 형률을 적용시켰으니 너무나 중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평일에 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어찌 모두 형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정언신은 벼슬이 정승에 올라 팔다리 역할을 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하루아침에 하옥되어 형구(刑具)를 직접 차고 있어야 하니, 상하와 도읍과 저자(시장) 사이에 군신이 존엄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신은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러한 상소문은 성혼이 준비를 하였으나 정언신 등의 일이 이미 처리되어버렸기 때문에 올리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사람들은 성혼이 ‘겉으로는 구원해 주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빠뜨렸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선조 임금에게 직접 호소한 사실도 이렇게 들었다.

“그 당시에 성혼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서 당파를 없애고 형벌을 완화하란 말을 거듭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끝내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가 최영경의 옥사에서 위관(委官, 심판관)에게 편지를 급히 띄운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넉넉히 볼 수 있습니다. 어찌 감히 자신이 말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자신의 분수에서 벗어나는 상소를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성혼은 또 임진왜란 초기 때 임금을 잘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는 비난에 시달렸다.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를 하였다.

“임진년에 주상을 미처 맞이하고 수행하지 못했던 연유는, 당시 논의들이 바야흐로 성혼을 정철의 당(서인)이라고 하였으므로 성혼이 시골에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대궐에 나올 수 없었고, 주상께서 의주로 떠나실 때에는 창졸간에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날 파주 수령이 허둥지둥하다가 미처 먼 마을까지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혼이 사는 곳은 그 고을의 소재와 30리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가가 이미 임진강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또 소문에 배를 철거시켜 나루가 불통되었고 어가가 건넌 뒤에 거리에 이미 난병(亂兵, 문란한 군대)이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적을 피해 마을들이 모두 비었다고 하자, 성혼이 병든 몸을 이끌고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어가가 송도에 머무르리라고는 실로 성혼이 예상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성혼의 집이 산중에 외따로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들은 어가가 그의 집 가까이 지나가는데도 피하고 나와 보지 않았다며 임금을 버렸다고 지목하였으니, 인정과 도리로 따져보아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말입니다. 이 점을 전하의 밝으심으로 살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파주를 지나쳐서 피난 가는 선조 일행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것은 신응구가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즉시 임금을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논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그리고 상소문을 올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 듣고 보는 역할)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임금이 속히 행해야할 계책에 대해서 건의하였다.
그러나 임금 주변의 신하들은 그러한 상소를 변명으로 평하고 오히려 그를 논박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등에 그를 임명하였다. 그는 이천에 머물렀던 광해군(세자)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와 경기 지역의 의병장들을 도왔다. 또 검찰사(檢察使)로 부임하여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조정으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 좌참찬등에 임명되었으며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의정부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주장하다가 동인 강경파로부터 매국노로 규탄을 받고 관직을 물러났다. 그 이후에도 줄곧 조정의 화평론을 변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경기도 파주로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제자로 조헌(趙憲), 정엽(鄭曄), 윤황(尹煌), 윤전(尹烇), 이귀(李貴), 김자점, 김장생, 강황, 윤훤, 황신(黃愼), 김류, 김덕령 등이 있다.

신응구는 성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정여립과 성혼의 관계를 논하면서, 성혼이 정여립을 키웠는데 왜 그는 죄를 받지 않는가하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역적(정여립)이 한때 중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성혼이 길러 부추긴 것으로 말미암았는데, 그(성혼)만이 역적과 어울린 죄를 면했다.’고 합니다. 당초 역적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물러가 글을 읽기로 명분을 내세우고서는 이이와 성혼이 한 시대 유림의 어른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학문을 물었습니다. 이이와 성혼이 그의 기질이 거친 것을 단점으로 여기었으나, 벼슬을 버린 점을 취해 벗들에게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이이와 성혼이 학문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역적이 학문을 묻는 것으로 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럴싸한 방법으로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이가 죽자 역적이 수찬이 되어 서울에 들어왔었는데, 당시 의논이 크게 변해 이이를 공격하는 것이 이로웠기 때문에, 그가 더없이 미워하고 헐뜯으며 아울러 성혼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선왕(선조)께서 그는 형서(邢恕, 송나라 관리이며 정호程顥의 제자로, 상황이 변하자 스승을 배반하고 공격한 인물)와 같다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임금께서 그의 사특함을 배척하신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성혼과 이이도 정여립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 임금이 정여립을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꾸짖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당시 서인과 대립하여 성혼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성혼이 산촌에 은거하면서 뒤에서 조정의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성혼이 초야에 자취를 숨기고 문도들을 모아 스승과 제자라 칭하면서, 날마다 경박한 무리들과 당시의 정사를 논하고 인물의 시비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성혼은 본디 산중의 한 선비입니다. 그의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 출신으로 높은 풍도와 아름다운 덕이 한 시대에 존경을 받았으나 파주에 은거하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그를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성혼의 학문은 대체로 집에서 성취된 것인데, 효도·우애·충성·신의와 자신을 반성하여 간절히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쇠붙이도 녹인다는 비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애닯고 애석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모두 잘 알았다. 스승을 높이려는 정성에 대하여 참으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다. 다만 이는 선왕조에 있었던 일이므로 3년 안에는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부모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할 수 있다는 『논어』(학이편)의 가르침에 근거한 말이다. 선조 임금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신응구의 호소에 수긍한 듯하다. “참으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다.”는 말이 그것을 말한다.

『광해군일기』 : 나덕윤의 상소문과 사관의 핀잔


『광해군일기』 : 나덕윤의 상소문과 사관의 핀잔.

 

광해군일기』 중초본의 광해 즉위년 11월 12일에 「의금부 경력 나덕윤의 상소문」이 실려있다. 이 상소문에도 율곡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상소문은 정초본(10권)에도 올라있다.
나덕윤은 죄인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의금부 소속 관리였다. “신처럼 보잘것없이 천한 사람도 일찍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요행히 임금을 모시는 말석에 끼었습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타고난 성품에 근원한 것이므로, 감히 평소에 조금 깨닫고 있던 견해를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의 세태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지금의 세도(世道, 세상에서 행해지는 도리)를 보건대 어찌해 볼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여러 차례의 변고를 겪자, 인심은 흩어지고 사론(士論, 선비·유생들의 의견)은 분열되어 어느 한 사람도 사도(斯道, 유교)로서 이 세상을 이끌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재주와 기백만을 취하고 도의는 하찮게 여기며, 늘어놓는 말만을 믿고 덕행은 살피려 하지 않은 채 하나같이 총애와 영화, 명예와 이익에만 마음이 팔려 일생의 좋은 꾀로 생각하면서 오직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로울까.’, ‘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에 이로울까.’, ‘어떻게 해서 내 원한을 갚을까.’, ‘어떻게 해서 내가 싫어하는 뜻을 펴볼까.’ 할 따름입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황, 조식, 노수신, 박순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세도가 융성하여 볼만하다고 하였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선비의 기상이 상실되고 인도(人道, 인간의 도리)가 거의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황과 조식이 그 사이에 배출되어 학문과 기절(氣節, 기개와 절도)로 한 시대에 앞장서서 부르짖자,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난 자들이 대체로 훌륭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선왕께서 선비를 존중하고 도를 소중하게 여겨 거두어 부르시고 뽑아 등용시켜, 대간이나 시종의 자리에 발탁해 두셨습니다. 또 그들로 하여금 탁한 무리를 공격하고 청류(淸流)를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켰습니다. 대신 중에는 또 노수신(盧守愼)과 박순(朴淳) 같은 사람을 얻어 오랫동안 정승 자리에 앉혀 두고서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사랑하게 하여 여러 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는데, 벼슬을 처음으로 얻는 자들이 모두 고을 시험과 마을 선발 속에서 배출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인심이 크게 변하고 선비의 취향도 분명하였으므로 세도가 융성하여 볼만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이정귀의 스승 윤근수는 퇴계의 제자이면서도 서인의 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대개 동인은 조식이나 퇴계를 따르고 율곡과 성혼을 비판하였으며, 서인은 율곡과 성혼을 따르고 조식이나 퇴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앞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나덕윤은 이황과 조식(曺植, 1501∼1571), 노수신(盧守愼)과 박순(朴淳)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은 동인 쪽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고, 퇴계보다 1살 위인 조식은 본관이 창녕 조씨이며,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이었다. 소위 남명학파를 창시한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며,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지내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았다.
조식의 제자들은 나중에 조정에 나아가 다수가 북인에 참여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정인홍, 곽재우 등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참전하였다.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김효원이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김효원은 퇴계 문하에서도 배웠다.) 이 때문에 동서 분당이 일어났을 때 조식의 제자들이 동인으로 몰려 서인측과 대립하였다. 또 동인이 남북으로 나뉠 때 강경론을 주장했던 북인에 그의 학맥 제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퇴계 이황과 친분이 있었으며 ‘인심도심(人心道心)’과 관련하여 퇴계와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1587년 기축옥사 때에는 정여립을 추천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노수신은 율곡과도 친분이 있었다.
박순(朴淳, 1523년∼1589년)은 조식과 이황의 문하생으로 이조판사, 한성부 판윤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특히 훈구파와 신진 사림의 교체기에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훈구파는 완전히 몰락하여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그의 동문들이나 제자들은 모두 동인이 되었는데, 그는 당시 율곡이나 성혼과도 교류가 빈번하여 서인으로 지목을 받아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나덕윤이 예로든 인물들은 비교적 동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당시 동인, 서인의 구별은 어떤 것이었을까?
『선조수정실록』(21권, 선조 20년 3월 1일) 기사(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에 ‘서인(西人)’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옛날에 이른바 동인이란 사람들은 심의겸(서인의 영수)을 배척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사람이 동인이 되었다. 옛날에 이른바 서인이란 사람들은 심의겸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사람이 서인이 되었다. (중략)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 출세하는 자본이 되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며 외척(서인의 영수 심의겸)을 배척하는 것이 실로 사림 청류(淸流,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사람)의 논의이므로 선비로서 심의겸을 배척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동서의 이름이 옛날과 달라서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아, 동서의 말이 있은 이래로 서인의 명목은 그 말이 네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심의겸의 친구와 제배(儕輩, 나이나 신분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를 서인이라 하였다. 삼윤(三尹,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윤현尹晛)과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에는 서인을 돕거나 구해주는 자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정철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또 그 다음에는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니며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다. 이이와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림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니 오늘날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에서 공론을 펴는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과연 사실에 의거한 말이겠는가.
이러므로 공론이 가라앉지 않고, 따라서 이른바 서인이란 자가 오늘날에 와서 더욱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는 공론을 하다가 간사한 사람에게 한쪽 당파에 치우친다는 이름을 얻었고 성혼은 이이를 구원하다가 사적으로 구호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중외(中外)의 수많은 선비들은 이이와 성혼을 구원하다가 서인의 이름을 얻었다.”

‘서인’이란 무엇인가를 서인 쪽에서 정의한 내용이다.
나덕윤은 이황, 조식과 비교적 동인쪽에 가까운 인물들인 노수신과 박순을 소개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붕당의 폐해를 논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심의겸(沈義謙, 서인의 영수)과 김효원(金孝元, 동인의 영수)은 단지 명예와 이익이나 따지며 노는 인물들이었는데도 감히 기치를 내세우고 당을 나눔으로써, 조정이 마침내 조용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이(李珥) 같은 사람은 선비로 자처하여 세상의 도리를 담당하고서도 선배와 후배에게 양시(兩是, 둘 다 옳다)와 양비(兩非, 둘 다 그르다)가 있다는 말만을 꺼냈을 뿐, 끝내 진정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심해져 선비들이 이리저리 파당을 이루면서 그 해악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고 기축의 변고(1589년 정여립 사건으로 인한 옥사 사건)는 천만 뜻밖에 터져 나왔습니다. 간악한 자(동인 1000여명이 처벌을 받게 한 정철을 지칭함)가 또 그 사이에 화를 빚어내 한 떼의 명류들이 모두 반역의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말았으니,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나덕윤은 율곡이 책임 있는 관리로서 붕당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기축옥사 사건을 통해 많은 훌륭한 유학자들(동인 유학자를 지칭함)이 반역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어서 그는 당파싸움의 폐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깨지고 집안이 망한 재앙도 계미년에 싹이 터서 기축년에 격화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 안에 싸움이 크게 일어나고 왜구의 화를 이처럼 참혹하게 당하도록 한 것이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 후부터 조정의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 선비들의 논의가 분명치 못해 말만 숭상하고 덕행은 숭상하지 않으며, 이익만을 알고 의리는 모름으로 인해 어진 이와 사악한 자가 뒤섞이어 벼슬길에 진출하고 변론과 아부의 풍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벼슬을 얻을까 걱정하고, 얻은 벼슬을 행여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오직 관작이 좋은 줄만 알아 한 때의 여론에 따르는 것을 옳은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버릇과 권력 있는 자들을 추종하고 빌붙는 태도들이 쌓여 한 시대의 고질병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주장한 나덕윤은 정여립과 정철, 그리고 정개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정여립은 애초부터 불을 지른다거나 사람을 겁탈하는 도적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인 간악한 자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에 지식이 해박하고 견문이 많은 인물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이와 성혼(成渾)이 맨 처음 그와 교류해 보고 나서 그를 추켜세우고 칭찬하였는데, 그가 청요직에 천거되어 등용된 것은 사실 이이가 이끌어준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계미년에 심하게 당론이 나뉘어지고 이이와 성혼이 세력을 잃은 뒤로부터 비로소 안면을 싹 바꾸어 이른바 동인(東人)들에게 빌붙었습니다. 동인들에게 앞날을 예견하는 지혜가 이미 없었고 한갓 한 시대에 난 헛된 명성만을 믿고 배척하지 못했으니, 이는 사람을 가려서 사귀지 못한 죄입니다. (중략) 그러나 만일 그 실정을 따져 그 죄질의 경중을 매긴다면, 교류하고 인정한 죄는 자연히 제일 큰 형벌을 받아야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히 죄를 낮추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은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 1570년(선조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원래는 서인에 속했다가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으며,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동인 편에 서서 성혼, 박순 등을 비판하였다. 임금 선조도 그가 그렇게 율곡을 배반한 점에 대해서 불쾌히 여겼다. 이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는데, 그 뒤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발을 당하였다. 그는 그 길로 피신하여 자살을 하였다. 서인 쪽에서는 그를 반역죄로 몰았는데, 기축옥사 사건으로 확대되어 관련자 천여 명(주로 동인)이 처벌을 받았다.
나덕윤은 정여립을 논하면서 맨 처음 그를 사귀고 인정하여 이끌어준 이이와 성혼이 가장 큰 죄를 받아야하는데, 왜 동인들이 더 큰 벌을 받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조사하여 수많은 동인들을 연루자로 몰아간 정철에 대해서도 이렇게 묘사하였다.

“정철(鄭澈)은 본래 괴팍한 성미로 날조하여 얽어 넣으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음험한 함정을 파서 무고한 자를 빠뜨리고 공법(公法)을 빙자해 사적인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러자 한때 그가 품은 뜻에 휩쓸려서 상소를 올려 옭아매려는 자들이 상소문을 받는 관청 앞에 줄을 섰습니다.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선비까지 발만 움직이고 머리만 흔들어도 거의 다 지목 대상에 들어갔고, 대수롭지 않은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반드시 돕고 지원했다는 죄목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3년의 큰 옥사(獄事)에서 원통한 죄수가 갖가지였고, 심지어는 80된 노모와 일곱 살 난 어린 아이까지도 함께 나란히 사형장으로 끌려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안방에서 나누는 말이나 거리의 여론들이 가엾어 하고 분통해 하였으나, 한랑(寒朗, 26년∼109년, 동한의 청하태수)처럼 초옥(楚獄, 후한 초왕 영의 옥사로 수천명이 애매하게 연좌된 사건)을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랑의 초옥이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일을 말한다. 안충(顔忠), 왕평(王平) 등이 모반한 사건에 연루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한랑이 공정하게 처리하여 죄가 없는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후한서』 현종효명제기(顯宗孝明帝紀)·한랑전)
정철은 서인 쪽에 속한 인물로 정여립 사건의 조사 책임을 맡았는데 그의 조사를 통해서 1000여명 가까운 동인 쪽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다.
나덕윤은 이어서 정개청(鄭介淸)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정개청은 정여립 반란사건과 연루되었다고 지목을 받아 평안도로 유배된 인물이다.

“정개청(鄭介淸) 같은 사람에 있어서는, 애당초부터 조정에 나오지 않았고 단지 산중에 숨어서 몸을 닦는 한 사람의 선비였습니다. 사람됨이, 품성이 순수하고 도타우며 지조와 행실이 맑고 확실한데다 도학(道學)을 천명해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으며, 자신을 엄숙히 다스려 후생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제멋대로 방종을 즐기면서 구속과 검소를 싫어하는 자들이 늘 비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중략) 정개청의 학문은 언제나 정(程, 정자)·주(朱, 주자)를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간악한 자들이 세상을 그르치는 꼴을 보면서 후학의 폐단이 될까 염려하여 정(程), 장(張, 장재)의 말을 부연(敷衍,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고 한(漢)과 진(晉)이 숭상했던 바를 대략 서술했는데, 그의 뜻은 단지 선유들이 이미 정한 논의에 근거해 은연중 스스로를 그르치고 남을 그르치는 정철의 죄상을 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노간(老奸, 늙은 간신) 정철이 마침내 중상하려는 꾀를 내어 개청이 지은 논설 제목 위에 교묘하게 배(排) 자를 덧붙여서 ‘절의를 배척했다.(排節義)’고 지목한 다음, 그의 설이 홍수와 맹수의 피해와 같다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방에 방을 돌려 보이고 역당(逆黨)의 이름을 덮어씌워 외떨어진 변경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 원통함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상소문을 나덕윤이 짓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개창의 억울한 죽음을 임금에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개창(1529년∼1590년)은 북부참봉, 전생서주부, 곡성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함경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박순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제자로 이 상소문의 저자 나덕윤(羅德潤)을 비롯하여 나덕준(羅德峻), 나덕현(羅德顯), 나덕원(羅德元), 안중묵(安重默), 정지함(鄭之諴) 등 근 400여명에 달하였다. 이중에는 당시 호남의 유력가문 출신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제자들은 그가 사망한 뒤에 신원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이 상소문도 그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나덕윤은 이 상소문의 말미에 이렇게 호소하였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왕위를 물려받은 초기에 한 지아비, 한 지어미라도 만일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고 밝히지를 못한다면, 울적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의 화기(和氣)를 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개청은 초야에서 고고한 행실을 지닌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은전이 늦어지고 있으니, 사실 국가 형정(刑政) 중 하나의 큰 잘못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특별히 원통한 실상을 굽어 살피시고 빨리 억울함을 풀어 주시되 선왕조에서 최영경(崔永慶)을 표창했던 일과 같이 밝혀 씻어 주신다면, 어찌 요(堯)임금이 남긴 뜻을 순(舜)임금이 아름답게 이루어준 것과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중략) 감히 마음을 다 털어놓아 전하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그 실없고 참람하여 스스로를 알지 못한 데 대한 벌을 마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최영경(崔永慶, 1529년∼159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그는 지평 사축을 역임하였는데,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옥에서 사망하였다. 조식의 문인이라는 것은 동인 쪽에 지인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정여립과 친한 관리로 지목되고 모반세력으로 몰려 사망한 것이다. 조사를 받으면서 관작이 삭탈되었으나 사망한 뒤 1591년(선조 24년)에 복권되었으며, 1602년(선조 35년)에는 최영경의 동생인 최여경에게 관직이 내려졌다.
나덕윤의 상소문을 읽고 광해군은 이같이 답하였다.

“상소를 보니, 충성심을 충분히 볼 수 있었으므로 참으로 가상히 여긴다. 정개청의 억울함에 이르러서는 나 또한 일찍이 대강 들었다. 그러나 선왕조 때에 있었던 일이므로 감히 경솔히 논의할 수 없다. 마땅히 대신들과 논의하여 조처하겠다.”

임금은 이와 같이 말하고,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명을 내렸다. 그러나 『광해군 일기』 집필에 참여한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기축년 옥사에서 여러 역적들의 공초(죄인이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것)가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았다.(즉 모두 동일하였다.) 그 옥사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역적의 입으로 정확하게 말한 사람들이었다. 심문하는 관리가 어떻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을 개입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정여립의 무리만이 이를 갈며 분통해 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또 임진왜란의 변란에 심문 기록들이 없어져 버리자 나덕윤(羅德潤)처럼 음흉하고 사악한 자들이 때를 틈타 일어나 날조하였다.”

이러한 기록 뒤에는 추기로 보이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살펴보건대 나덕윤은 본디 호남의 호족으로 향리에 살며 불법을 많이 저질렀고 김우성(金佑成)과 한패가 되었다. 처음에 유영경(柳永慶)에게 빌붙었다가 유영경이 쓰러지자 다시 이이첨에게 빌붙었고, 뒤에 김우성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의 논의가 대체로 수시로 반복되었다.” 이 역시 나덕윤을 비난하는 문장이다.

나덕윤이 위와 같은 상소문을 올린 시기는 광해군이 막 즉위할 때였다. 이 당시는 북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였다. 그러므로 나덕윤의 글은 조정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덕윤의 글이 전체적으로 서인을 비판하고 동인(북인)을 추겨 세운 것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광해군의 답변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 글, 즉 「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정리할 즈음에, 즉 인조시대 초기에는 서인들이 인조반정으로 집권하던 시기였다. 서인들로서는 서인의 행위(율곡이나 성혼, 혹은 정철)를 비판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상소문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들이 험악하다.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임진왜란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임진왜란.

 

광해군일기』 선조 행장을 읽으면서 서인과 동인의 갈등에 관심을 가지고 읽다보니 중요한 핵심을 놓쳤다. 선조 행장의 절반이상은 사실 임진왜란과 관련된다. 선조시대의 가장 큰 사건은 일본의 침략, 즉 임진왜란이다. 이정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신하여 도망하는 길을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따라갔다. 이러한 그의 경험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오던 급박한 상황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임진년간에 왜적이 온 나라의 군대를 죄다 동원하여 가지고 와서 마구 쳐들어와 유린하였는데 그 형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 상국(명나라)을 침범하려는 흉계를 세운 것이 진실로 하루 이틀에 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오래 전부터 흉계를 품고 있다가 기회를 노려 발동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태평을 누려 왔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미친 왜구를 만났다. 반격을 가하였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남쪽 지방의 마을들이 서로 잇따라 함몰되었다.”

선조는 동인(남인, 북인)과 서인이라고 불리는 유교 지식인들을 데리고 ‘정권 놀음’을 하면서 나라 바깥에서 준비되고 있는 큰 재앙을 대비하지 못했다. 여기서 정권 놀음이라는 것은 국가의 통치자로서 대국적인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과 권위만을 앞세워 정치를 하였다는 뜻이다.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사신들조차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정확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일부 사신들이 정확한 보고를 했는데도 선조는 그들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상황판단을 그르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정귀가 지은 선조의 행장은 당시 시대의 가치관과 상황에 따라 지은 것이다. 선조의 업적을 치하하고 왕으로서 그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시점으로 읽어보면 한심한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이정귀는 서울이 일본군 손에서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4월에 관군(官軍)이 서울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이 임금에게 축하의 말씀을 해주실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위로해야 할 일이요, 축하할 일이 아니다. 신민(臣民)들을 거느리고 망궐례(왕이 왕세자 등을 거느리고 중국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하여 예를 올리는 의식)를 행하여 황은(皇恩, 중국 황제의 은혜)에 사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 기로(耆老, 육십세 이상의 노인)와 백성들로 하여금 동시에 망궐례를 행하게 하여 함께 황은에 감격해 하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선조가 보기에는 명나라가 도와서 서울을 수복한 것이다. 이순신의 공로나, 왕세자로서 전장을 누빈 광해군의 공로, 혹은 수많은 의병장들 그리고 백성들의 고생은 선조로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나라가 망해도 자신은 중국으로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 군주로서는 당연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선조는 신하들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한 바를 그는 이렇게 칙명으로 내렸다.

“예조에 하명하기를 ‘상란(喪亂)를 당한 뒤로 도성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를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살아남은 백성의 과반이 흰 상복(喪服)을 입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에 살펴보니, 도성 백성들이 거리를 꽉 메웠는데도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이는 필시 난리를 겪은 뒤 윤기(綸紀, 도덕과 기강)가 느슨해져서 그런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각부(各部)로 하여금 규검(糾檢,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들추어내어 자세히 살피고 조사함)하게 하라.’ 하였다.”

임진왜란(1592년)은 조선이 건국(1392년)하고 꼭 300년 지난 뒤에 일어났다. 사실은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이미 그 수명이 다하고 있었다. 율곡이 개혁의 필요성을 외친 것은 그런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조선은 다시 건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선’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도 바뀌지 않았고, 임금을 둘러싼 정치 세력도 바뀌지 않았고, 그 전체를 움직여가는 이념, 즉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도 바뀌지 않았다.

선조는 서울로 돌아와서 영리하게 움직였다. 백성들의 윤리 도덕의식을 다시 강조하고 예절을 통제하여 유교적인 통치 체제를 더욱 강력하게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후에 예학이 크게 일어난 것은 그의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하들이 “성전(聖殿, 문묘나 종묘)이 모두 소각되었고 또한 위판(位版)도 없으니, 제사를 지낼 장소가 없습니다.”고 신하들이 보고하자, 선조는 간이 제단을 축조하고 몸소 나아가 문묘 제사를 지냈다.

또 그는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인재가 적은데다 수용하는 방법도 과거에만 달려 있다. 글을 지어 올리게 하는 과거보는 마당에서 어떻게 사람의 재능을 다 발휘하게 할 수 있겠으며 따라서 호걸스런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넓은 세상에 우뚝한 재능과 특이한 행실이 있는 선비가 임하(林下)에서 속절없이 늙어가는 일이 어찌 없겠는가?”하면서 “발탁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라.”고 하명하였다. 전쟁 전에도 항상 하던 말이었다.

그가 새로운 인재를 선발한다고 정치가 새로워질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부지런히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면서 조선을 임진왜란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조선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다.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율곡과 퇴계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율곡과 퇴계.

 

해군 즉위년(1608년) 2월 21일, 전 임금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의 행장(行狀)이 실렸다. 이 ‘행장’이란 ‘행동(行)의 모양(狀)’ 즉 행동거지를 뜻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사망한 사람의 행실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전기(傳記)’ 보다는 더 짧은 글로 고인의 성명, 생존월일, 자호, 관작, 가족 관계 및 언행 등을 서술한 것이다.
선조의 행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국왕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휘(諱)인데 공희왕(恭僖王)의 손자이고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정씨는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임자년 11월 11일 한성 인달방(仁達坊, 지금의 서울 사직동 부근)에서 왕을 낳았다. 왕은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났으므로 항상 예법을 따르기를 좋아하였다. 어릴 적에 공헌왕(恭憲王, 명종. 재위 1545∼1567)이 일찍이 두 형과 아울러 함께 불러들여서 자신이 쓰고 있던 관(冠)을 벗어 차례로 쓰게 하여 하는 행동을 살펴보았다. 차례가 왕에게 이르자 왕이 꿇어앉아 사양하고,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하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공헌왕이 매우 감탄하고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 하였다. 또 임금과 아버지가 누가 더 중하냐고 묻고 글자로 써서 대답하게 하니,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공헌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명종은 아들이 일찍 죽고 없었다. 그래서 후계자로 이복 조카를 선임하였는데 그가 선조였다. 이 과정이 행장의 첫머리에 그려져 있다. 선조는 1567년부터 1608년 까지 약 40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의 중요사건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함
1575년 유학자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짐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일어남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남
1597년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공함(정유재란)
1598년 노량해전이 일어남. 이순신 전사
1608년 선조 사망. 광해군 즉위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전국의 유학자들, 즉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의 두 파로 나누어져 서로 각축을 벌였으며, 일본이 침략하였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이 그의 집권 기간 중에 일어났으며, 그는 일시적으로 중국의 국경 바로 앞까지 피난을 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100%로 그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최고 통치자로서 그가 초래한 것이었다.
그는 유교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행장에는 그가 유교를 위해서 이룬 업적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헌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으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에 대해서는 전해온 것이 드물었다. 그런데 고려의 정몽주가 처음으로 끊어진 학문을 창도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본조(本朝, 조선왕조)에 이르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이 서로 계속하여 일어나 도의(道義, 도리와 의리)를 밝히고 경전이 전하는 뜻을 잘 발휘하였다. 왕은 이들이 사도(斯道, 유교)에 큰 공이 있다는 것으로 제일 먼저 명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또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게 하는 한편, 유신(儒臣) 유희춘(柳希春)에게 명하여 그들의 행적을 편찬하게 하고 이를 『유선록(儒先錄)』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어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 등을 간행하게 하였으며, 또 『하씨소학(何氏小學)』이 명물(名物, 명목이나 사물)과 도수(度數, 법식이나 수량)를 가장 상세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였으므로 초학자에게 편리하다는 점과, 조정에서 편찬한 『삼강행실(三綱行實)』은 윤리와 기강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가 재위하였을 당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와 율곡이 생존해있던 시기로 주목할 만하다. 또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사림(士林)이 두 파로 나뉘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중요하다.(이러한 현상은 선조시기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렇게 고착화된 것이다.) 사림이 중앙정계에서 이렇게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선조시대 부터였다.
그 전에는 훈구파(조선 건국 공신들과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세력)가 득세를 하였다. 훈구파의 공격으로 사림은 무오사화, 갑자사회, 기묘사회, 을사사화 등을 겪었으나 선조시대에 들어서는 그런 훈구파의 세력을 완전히 꺾고 사림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최고통치자인 선조의 지지가 있었다. 선조는 사림 출신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고, 또 그들을 통해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중앙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학자들은 당시 관리들의 임용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직위를 두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으로 나뉘어 경쟁하기 시작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 정철, 윤두수 등이었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 이산해 등이었다. 서인들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랐고, 동인들은 조식과 이황의 학문을 지지하는 경향을 띠었다. 서인들은 서울의 서쪽에 주로 살고 있고 동인들은 서울의 동쪽에 주로 살고 있었다. 지역적으로 보면 서인들은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즉 기호지역 출신들이 많다. 정치적 성향을 보면 서인들은 신하들의 권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동인들은 왕권의 강화를 강조하였다.

율곡이 사망한 직후에는 동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589년에 정여립의 역모사건(기축옥사)을 계기로 서인들이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년)에는 건저 문제(建儲問題,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논란)로 서인 쪽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하게 대응하자는 남인(南人)과 강경하게 대응해야한다(사형 주장)는 북인(北人)이 나뉘었다.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 많았고, 북인은 조식의 제자들이 많았다.
선조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남인의 편을 들어주어, 선조 시대 집권 후반기에는 류성룡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국난기를 거치면서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북인 중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대거 등장하여 발언권이 강하게 되었다. 선조 시대에 집권세력의 교체를 보면 대체적으로 서인→ 동인 → 남인 → 서인 → 북인으로 흘러갔다. 사실 이렇게 바뀌게 된 근본 원인은 선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측근세력을 바꿈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고 자신이 편한 정치를 행하려고 한 것이다.
다시 선조 행장으로 돌아가 율곡 이이에 대해서 논한 부분을 살펴본다.

“일찍이 유신(儒臣, 유학을 공부하는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의 『지남록(指南錄)』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비분강개하여 참고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었다. 대개 문산은 백이(伯夷)·숙제(叔齊) 이후 한 사람으로 만세 신하의 표상인데, 우리나라 정몽주의 절의와 문장이 문산과 그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으니, 그(정몽주)의 문집도 속히 출간하여 반포하라.’하고, 이어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합하여 지칭하는 말) 노수신(盧守愼)에게 서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찬술하여 올리니, 왕이 매우 가상히 여겨 포상하고 즉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문천상(文天祥, 1236년∼1283년)’은 남송 시대 정치가로 몽고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회유도 뿌리치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문천상의 문집을 본받아 정몽주의 문집도 출간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그 뒤에 율곡이 『성학집요』를 올렸다는 간단한 문장이 보인다.
이러한 율곡에 대한 언급 외에 선조 행장에는 퇴계 이황에 대한 서술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직후에 마음을 가다듬고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면서 밤중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당시의 명유(名儒)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에 돌아가 학생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했는데 전왕(前王) 때부터 누차 불렀으나 오지 않았었다. 왕이 정성과 예물을 극진히 하여 나오도록 힘껏 부탁하였고 발탁하여 이공(貳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아래의 직책인 좌우 찬성贊成을 말함. 이황은 우찬성)에 임명하였다.
이황이 자신을 알아준 데 대해 감격하여 소장을 올려 치도(治道, 정치의 도리)에 대한 여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고 나서 또 『성학십도(聖學十圖)』·『서명고증(西銘考證)』을 찬술하고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을 손수 써서 올렸는데, 왕은 겸허한 마음으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고 모두 베껴 써서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두게 한 다음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불러 대면하고 조용히 다스리는 도에 대해 강론하는 등 예우가 융숭하였으므로 지치(至治, 지극히 잘 다스리는 정치)를 이룰 것을 기약했었다. 그러다가 이황이 사망하기에 이르러서는 마음 아프게 애도하여 마지않으면서 ‘이황이 남긴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도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집하여 간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퇴계에 대해서 상세한 언급을 하였다. 율곡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매우 자세하다. 퇴계를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오지 않았다는 점과 『성학십도』 등 저서를 올린 일, 그리고 사망한 뒤 선조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기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 율곡도 선조가 관직을 권유했을 때,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성학집요』를 올렸으며, 일찍 사망하여 선조가 그 슬픔을 표한 일도 있었다.

이황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도 보인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또 소장을 올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을 문묘(文廟)에 종제(從祭,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다)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답하기를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겨서 감히 경솔히 허락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 일이 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논의하여 결정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 신하를 높임에 있어서는 그들의 학문을 높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여러 학생들은 모두 영재(英才)를 지니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이니 의당 수시로 부지런히 힘써 서로 익히고 닦으면서 다함께 대유(大儒)가 되어 나의 부족한 점을 힘을 다해 보좌해 주는 것이 바로 내가 기대하는 것이다.’ 하였다.”

선조가 사망할 당시 율곡이나 퇴계는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율곡은 퇴계에 비하면 그 학문이나 명성에서 퇴계에 훨씬 미치지 못하여 퇴계에 대한 언급이 율곡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시대 조정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을 살펴보면 율곡의 이야기가 퇴계보다 더 많이 나온다. ‘이이(李珥)’로 『선조실록』을 검색해보면 모두 203건이 검색된다. ‘이황’으로 검색하면 그 1/2정도인 106건이 검색된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이이’는 245건, ‘이황’은 73건만 검색이 된다. 퇴계에 대한 언급이 율곡의 1/3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보더라도 율곡에 대한 언급이 퇴계에 대한 언급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율곡은 실지로 선조와 머리를 맞대고 정치를 논의한 경우가 퇴계보다 월등히 더 많았다. 율곡은 사망하기 직전에도 병조판서(1582년), 돈녕부판서(1583년), 이조판서(1583년) 등에 임명되어 선조의 자문에 대응하고 있었다. 율곡이 사망하던 날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선조의 슬픔을 전하고 있다.

“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율곡의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라고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사망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 생선이나 육류가 들어 있지 않은 간소한 반찬)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을 더 후하게 내렸다.”

퇴계 이황(李滉, 1502년∼1571년)이 사망하였을 때도 선조는 슬픔을 표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당시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고 조정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선조와 함께 정치를 논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슬픔의 강도가 율곡 보다는 미치지 못함을 그의 졸기에서 읽어볼 수 있다.(『선조수정실록』4권, 선조 3년 12월 1일 숭정 대부 판중추부사 이황의 졸기)

“주상(임금 선조)이 집무를 시작하면서 조야(朝野)가 모두 부푼 기대에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 신성한 덕치)을 성취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임금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하지만 이황은 이미 늙었고 재지(才智)가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하며, 또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도 야박하여 위아래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유학자가 무엇을 하기에는 어렵겠다고 여겨 총록(寵祿, 총애하는 자에게 내리는 봉록)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고야 말았었다. 상은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여 증직(贈職)과 제례(祭禮)를 더욱 후하게 내렸다.”

위 졸기를 잘 읽어보면 선조는 퇴계의 부고를 듣고 슬픔을 표하기는 하였으나 퇴계에 대한 선조의 서운함이 묻어 있다. 『선조실록』 3권(선조 2년 12월 미상)에 실린 「우찬성 이황의 졸기」는 더욱 ‘노골적’이다.

“우찬성 이황(李滉)이 졸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수(壽)는 70이었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순(文純)이라 시호하였다. 학자들이 퇴계 선생(退溪先生)이라 일컬었다. 그의 학문과 사업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해진다.”

모두 합해서 겨우 3줄 정도의 졸기가 실려 있다.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정은 어찌되었든 퇴계에 대한 선조의 인상은 율곡 만큼 깊지도 않았으며 율곡 만큼 애증이 점철된 관계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나이 차이도 많았고(퇴계는 선조보다 50살이나 위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무관심’했던 퇴계 보다는 율곡에 더 선조의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율곡은 선조보다 15살 위였다.)

그렇다면 왜 선조의 행장은 율곡보다 퇴계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을까? 선조의 행장을 집필한 사람은 당시 호조판서 이정귀(李廷龜, 1564년∼1635년)였다. 그는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조선시대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본관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지역적으로 보나 스승 윤근수로 보나 그는 서인에 속한다. 그의 아들은 대제학을 지낸 이명한(李明漢)이며 그 아래로 부수찬, 인천부사를 지낸 손자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 있다. 이단상은 제자로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서인의 주류 학자들이다.
이정귀의 스승 윤근수(尹根壽, 1537년∼1616년)는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으로 시인이며 화가이다. 그는 1575년 동인 서인이 서로 갈릴 때, 퇴계 이황의 제자이지만 같은 동문인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따르지 않고 서쪽의 심의겸을 지지하여 서인에 가담한 인물이다. 서인이지만 이황의 제자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어, 그것이 제자 이정귀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퇴계와 율곡에 대한 균형 맞지 않는 서술은 아무래도 궁금하다. 선조 행장을 집필하던 때는 광해군이 막 집권을 시작하던 시기이며 이때는 서인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인 동인의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인인 이정귀로서는 문장을 잘 써서 선조의 행장을 짓게 되었지만 그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율곡은 조금 약하게, 퇴계는 조금 강하게 서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정귀는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고, 이후 병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또 정권이 바뀌어 인조반정으로 서인들과 남인이 집권을 하였을 때도 인조를 가까이서 모시고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일기』 : 이귀의 상소문


『광해군일기』 : 이귀의 상소문.

 

해 즉위년(1608년) 2월 13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임)의 기록(『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함흥 판관으로 있던 이귀(李貴)가 상소문을 올렸다.

“신은 일개 외관(外官, 지방관)으로서 마침 군무(軍務, 군대업무)에 관한 일 때문에 임명되어 서울에 갔다가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였습니다.(선조임금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는 뜻) 그리하여 궁궐로 달려가 관료들이 모여 통곡하는 뒷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한참 울부짖는 슬픔 가운데 삼가 살펴보니 미진한 상례(喪禮)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예관(禮官)이 두서를 바꿔서 행하고 관리들이 일을 태만하게 한 데 대해 옥당(홍문관)에서 논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여러 일 가운데 작은 것이었습니다.”

이귀(李貴, 1557년∼1633년)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옥여, 호는 묵재,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안산 군수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 군수품 징발 등의 공을 세운 바 있다.
그는 선조가 사망 소식을 듣고 궁궐에 들어갔다가 관리들이 예절을 모르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그 일을 상소문에 적은 것이다. 또 이렇게 지적하였다.

“임금이 승하하신 때를 당하여 대신(大臣)이 된 사람은 마땅히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모두 궁궐 앞 넓은 터로 나아가, 초상을 알리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도 한번 곡을 한 뒤에 관리들이 곧바로 흩어져 모두 구석으로 들어 가버렸습니다. 심지어 대신들은 빈청(賓廳, 관료들이 모여 회의하는 곳)에 모여 앉아 모피 방석에 병풍을 치고서 평일처럼 태연하게 승전(承傳, 보고자)을 출입시키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전하(새로 임금이 된 광해군)께서 거적을 깔고 땅바닥에 거처하는 이러한 때에 신하가 된 입장에서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돌아가신 왕에 대한 효도로서 선왕이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해야할 것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일을 경계하도록 건의하였다.

“궁궐 출입을 엄격히 하여 연줄을 통하여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고 사사롭게 예물 바치는 일을 끊어 소인들이 아첨하는 풍조를 제거시키고 언로를 널리 열어 귀에 거스리는 충언(忠言, 충성된 말)이 나오게 하고 조정을 엄숙하고 맑게 하여 좋고 싫음을 공정하게 하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없습니다.”

이귀는 이러한 상소문을 올리고 약 6년 뒤인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에 공신(衛聖原從功臣)으로 인정되어 등록되었다. 그러나 2년 뒤 그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
이귀는 위의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훌륭한 사람들을 추천하기도 하고 관리들 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비판하기도 하였다.

“정창연(鄭昌衍)이 병이라고 핑계하고 출사하지 않고 있는데, 그의 숨겨진 뜻을 알 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훌륭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정창연 부자(父子) 같은 사람들은 진실로 등용을 해야 합니다.
박건(朴楗)처럼 인망이 흡족하게 여겨지지 않는 자가 새 정부 제일의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는데, 이 역시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저의 이 말은 임금과 친척관계라는 것 때문에 인재를 죄다 폐기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눈을 비비면서 새로운 정치와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때에 이런 사람들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창연(1552∼1636)은 1579년(선조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이후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이귀의 상소문 덕분인지는 모르나, 1614년(광해군 6)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이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박건(朴楗)은 관료나 문신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광해군과 친척이 되는 인물이라고 하였는데, 한미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이귀가 상소문을 올린 바로 그 날 이귀의 상소문을 읽고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한 기록이 있다.(『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2월 13일』)

“지금 함흥 판관 이귀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한 장의 임명장에 임금의 친척에 관계된 이가 3인이다.’고 하면서 신의 성명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인망(人望)이 흡족하게 여겨지지 않는데도 또한 새 정부에서 제일 먼저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헛된 말입니다. 다만, 외척(外戚)에 대한 한 조항에 관해서 신은 실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운운한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귀가 소장을 올려 남을 무함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신을 인척이라는 것으로 밀어내려 하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시켜 주십시요.”

박건의 이러한 건의에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이귀의 말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나, 진실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임으로써 언로를 열어야 한다. 다만 그대는 선조(先朝, 앞선 조정)에서 대간과 시종을 역임하였으니,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이귀는 자신의 상소문에서 또 조정에서 언로가 막힌 점에 대해 크게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언로가 막힌 것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먼저 해야 할 일은 언로를 여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시건방지고 망녕스러운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그럽게 용납해야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죄를 가하여 발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언로를 터달라는 것은 요즘 말로는 ‘언론의 자유’를 뜻한다.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귀는 다음과 같이 정인홍의 예를 들어 국가의 언로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지금 정인홍이 죄를 받은 것은 실지로 봉장(封章, 임금에게 올린 글)을 올린 일에 연유된 것으로 내용은 다소 지나친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요점을 따져보면 역시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더구나 정인홍은 선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나이가 또 70세인데 지금 만리나 먼 유배지로 가다가 도로에서 죽는다면 이는 성세(聖世,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왜병들과 싸운 인물이다. 자(字)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 서산(瑞山)이다.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이며, 남명학파의 지도자로 북인이었다. 서인인 이귀와는 완전히 대립된 위치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에 북인에 속하여 정권을 잡았으며 그 후 북인이 분열한 뒤에는 이산해와 함께 대북파의 영수가 되었다. 대사헌, 공조참판,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언적, 이황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유적(儒籍, 유학자 명단)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능양군)를 옹립하고 정권을 잡으면서 참형을 당했다.
이귀는 상소문에서 정인홍에 대해서 계속 이렇게 말했다.

“정인홍은 타고난 성품이 편협하여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거의 경박한 무리들이 많고 이들이 왕래하면서 주고받는 말들을 경솔히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신의 스승인 성혼(成渾)을 배척하였으며 일본의 ‘히데요시(秀吉)’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망령스럽다는 것은 진실로 따져볼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신이 정인홍에 대해서 평소 서로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인데도 지금 이렇게 운운하는 것은 정인홍을 비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국가의 언로를 위하여 하는 걱정인 것입니다.”

이귀의 이러한 말은 정인홍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기도 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광해 2년 4월 20일)에 이귀의 성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정리된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귀는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모셨다】강개(慷慨, 불의에 대하여 의기가 복받쳐 원통하고 슬픔)하여 의논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자주 상소하여 시사를 말하였다. 일찍이 정인홍을 꾸짖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그의 죄를 논박하였는데,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숙천 부사가 되어 전임 부사 윤삼빙(尹三聘)이 뇌물을 받고 공물을 훔친 죄를 논핵(論劾, 허물을 캐묻고 따짐)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세력이 있던 윤삼빙이 마침내 대관(臺官,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을 사주하여 논박하게 한 것이다.”

이귀는 광해군 초년에 이 사람, 저 사람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아무래도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북인이나 북파와는 대립된 서인 출신이었으며, 성격적으로도 너무 강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 때 『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집필한 사람들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4월 20일자 기록이 사초에 끼어든 것이다. 이 기록은 나중에 정리된 『정초본』에서는 없어졌다.
이귀는 계속에서 상소문에서 자신이 상소문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분연히 큰일을 하려는 뜻을 지니시고 신이 위에서 거론한 네 가지 사항, 즉 궁궐의 출입을 엄격히 하는 일, 개인적인 헌납을 끊는 일, 조정을 맑게 하는 일, 그리고 언로를 여는 일, 이 네 가지 일에 대해 깊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주역』에 ‘국가를 창건하여 계승해감에 있어 소인은 기용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송나라 신하 왕소(王素)가 ‘누구를 정승으로 삼아야 되겠는가?’ 하는 인종(仁宗)의 질문에 답하기를 ‘환관(宦官)과 궁첩(宮妾, 궁중에서 일을 보는 여자들)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선임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신중히 해야 될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기용하는 한 가지 일에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정치를 하는 즈음에 제가 구구한 정성으로 거듭 기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귀는 스스로 율곡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섬겼다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자신의 상소문을 마무리 하였다.

“신은 젊어서부터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이 때문에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대해 대강 들었던 탓으로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제 몸이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제 몸 생각보다는 항상 국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라는 뜻임-필자주) 그리하여 종전에는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대행 대왕(선조임금)께 진달하였는데 대행 대왕께서도 저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하셨기 때문에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너그러이 용납하셔서 의원에 명하여 약을 하사하고 개나 말처럼 천한 제 몸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셨으니, 그 은혜가 너무도 흡족하였습니다. 전하(광해군)께서 저위(儲位, 왕세자)에 계실 적에도 제가 누차 망령스런 말을 진달하였는데도 과분하게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혹은 칭찬하시고 장려하시는 은총을 받았는가 하면 하사품을 받는 은혜도 있었습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분수에 넘친 은혜를 받는단 말입니까. 항상 감격스러운 마음을 지니고서 단지 결초보은(結草報恩,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하기만 기약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하께서 사위(嗣位,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음)하신 때를 맞이하여 어리석고 망령된 말로 새로운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우러러 도움이 되게 할 것을 생각하며 감히 이렇게 상중(喪中)에 계신 전하께 번잡스레 아룁니다. 그지없이 죄송스럽습니다.”

이귀는 1619년(광해군 11년)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1620년 신경진과 김류가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도 이서, 김자점, 최명길, 최내길, 구굉, 이괄 등과 함께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1623년 3월 13일 밤 반란 세력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후의 인조)을 추대하는데 성공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모두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이귀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후 연평군(延平君)에 봉작되고 후에 부원군(府院君, 왕비의 아버지나 정일품 공신에게 주는 작위)이 되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위에 소개한 이귀의 상소문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인조 10년경에 완성된 『광해군일기』<정초본>에는 그 상소문이 삭제되었다. 『광해군일기』는 결국 반정세력(서인)이 검토, 수정을 하였을 터인데, 반정을 일으킨 이귀가 자신의 상소문을 다시 읽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아마 자신의 글을 읽고 낮이 뜨거웠을 것이다. 광해군을 향하여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다”고 해놓고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