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향현(鄕賢), 최수성


강릉의 향현(鄕賢), 최수성.

 

릉은 예로부터 효자·효부·열녀가 많이 나온 곳이라 하여 ‘예향(禮鄕)’이라 불렸고, 또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났다고 하여 ‘문향(文鄕)’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문향·예향의 고장 강릉에서 배출된 인물 가운데 지방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12분을 일컬어 ‘12향현’이라 한다. 그리고 이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행하는 곳이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향현사(鄕賢祠)이다.
강릉 지방에 향현사를 건립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에 쇠약해진 문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자는 논의는 있었으나 쉽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645년(인조 23) 8월에 강백년이 강릉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전 목사 이상험과 전 직장 김충각 등 여러 사람들의 건의로 마침내 사당을 완공하여 최치운·최응현·박수량·박공달·최수성·최운우 등 6현을 배향하였다. 그 후1682년(숙종 8)에는 최수를, 1759년(영조 35)에는 이성무·김담·박억추를, 1808년(순조 8)에는 김윤신·김열을 배향함으로써 모두 12분의 향현을 모시게 되었다.
여기서는 12향현 가운데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 그림, 음률 등이 당대에 뛰어나 ‘사절(四絶 )’이라 불렸던 최수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수성(崔壽峸)의 자는 가진(可鎭)이고,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호산인(鏡湖散人)이다. 그는 4~5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이르러 문장이 대성하였다. 시를 지으면 운율이 이백·두보에 못지않았고, 글을 지으면 문체가 유종원·한유에 못지않았으며, 필법에서는 왕희지의 글씨에 견줄 만했고, 화법에서는 고개지의 묘수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의 시는 속세를 벗어난 것과 같이 맑고 깨끗하였다. 기묘명현이었던 김정(金淨)은 일찍이 그의 시를 사랑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이름을 시문학에 남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최수성이 하루는 동호당(東湖堂:독서당)에 이르러 김정을 찾아가니, 김정이 그를 맞이하여 술동이를 열어놓고 매우 즐겁게 술을 마셨다. 김정이 송죽도(松竹圖)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누워서 그림을 그렸는데, 김정이 이 그림을 곧바로 족자로 만들었다. 이 그림이 호당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천하에 뛰어난 필치라고 하였다.
공이 그린 그림이 또 내장고(內藏庫)에 있었는데, 왜인(倭人)의 사신이 그때 마침 와서 온 나라의 명화(名畵)를 요구하여 보았으나 모두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공의 그림을 보고 매우 사랑한 나머지 값이 300금(金)에 달하는 보검 한 쌍과 바꾸자고 청하였으나 중종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명나라 사신이 와서 공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정말로 천하에 뛰어난 보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은 많았으나 흩어져서 다만 몇 수의 시만 남아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뿐이고, 서화도 남아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
공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는데,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했으며 수학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공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면서 김정·조광조 등과 서로 좋은 벗이 되어 경전을 탐구하고 도의를 강론하니,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다. 김굉필은 기묘년의 많은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최수성이 제일이라 하였고, 성수침은 항상 기묘년의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공을 첫 번째로 꼽으며 말하기를, “만약 이 사람이 뜻을 얻는다면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힐 것인데, 결국 간사한 사람의 손에 죽고 말았으니 매우 애통하다.”고 하였다.
공의 동문인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이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일련의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통해 그 세력이 확대되자 반정공신에 대한 대대적인 위훈삭제를 단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이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사림에 대한 중종의 견제심리까지 작용하게 하여 위훈삭제 조치가 결정되고 3일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결국 조광조는 사사되고, 김구·김정·김식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윤자임·기준·박세희 등은 극변안치(極邊安置), 정광필·이장곤·김안국 등은 파직되었다.
그런데 최수성은 기묘사림에게 화가 미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천(老泉:김식의 자)이 효직(孝直:조광조의 자)·원충(元冲:김정의 자)·대유(大柔:김구의 자)와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최수성이 별안간 밖에서 들어오더니 인사도 않고 한참 섰다가 급히 노천을 불러 “나에게 술 한 그릇을 달라.”고 하였다. 술을 주니 단숨에 마시고 나서 하는 말이 “내가 파선되는 배에 탔다가 거의 빠져 죽을 뻔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이제 술을 마시니 풀린다.”하고, 간다는 말도 없이 바로 가버렸다. 앉은 사람들이 괴상하게 여기니 효직이 말하기를, “파선되는 배라고 한 것은 우리들을 가리킨 것인데 자네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이네.”라고 하였다.
《대동야승》권3, 병진정사록

얼마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남곤이 죄인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이 되어 최수성도 아울러 추고(推考)할 것을 중종에게 청하기를, “조광조 등이 최수성을 선사(善士)로 여기고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아 조정의 진퇴를 반드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결정합니다. 최수성은 비록 초야의 선비로 이름이 났으나, 조광조가 나라를 그르친 근원은 모두 최수성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정의 무리들과 별도로 음모를 꾸미느라 항상 김정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라고 권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내막이 있을 터이니 국문하소서.”하며 최수성도 잡아들여 심문할 것을 청하자 중종이 허락하였다. 최수성이 공초하기를, “신은 백면서생인데, 조광조와 무리를 지어 조정의 일을 의논할 리는 만무합니다. 김정의 무리에게 조정에서 물러나 돌아가라고 권한 것은 신이 한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조광조·최수성 등이 붙잡혀 와서 고문을 당할 때, 최수성은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이 힘써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최수성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김정·김식 등 그와 친한 동료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술과 여행, 시와 서화 등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소나무로 거문고를 만들어 타다가 싫어지면 이것을 버리고 떠나갔는데,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진위(振威:현 경기도 평택)의 남탄현(南炭峴)에 별장을 마련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원숭이 한 마리를 길렀는데, 능히 서찰을 전할 수 있고 우물의 물을 길어 벼루에 따를 때에 턱과 손가락이 사람과 같았다. 그리하여 정자의 이름을 ‘원정(猿亭)’이라고 하였는데, ‘원정’이라는 별호는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 후 최수성은 1521년(중종 16)에 일어난 이른바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안당·안처겸·안처근 3부자를 비롯하여 권전·이정숙·이충건·조광좌·이약수 등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최수성이 신사무옥에 연루된 것은 남곤과의 원한에서 비롯되었다. 강릉의 읍지인 《임영지》에 의하면, 어느 날 공이 김식의 집에 있는데, 때마침 남곤이 찾아왔다. 공이 번듯이 누워 있으니, 남곤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식이 “이 사람은 숨어사는 선비 최원정(崔猿亭)이오.”라고 말했다. 공이 거짓으로 취한 척하고 일어나지 않다가, 남곤이 문으로 나가자 성난 소리로 “그대는 어찌하여 간교한 사람과 교유합니까? 일시에 사류(士流)를 해칠 자는 바로 이 사람이오.”라고 하였다.
《해동잡록》에 의하면 일찍이 남곤이 산수화 한 폭을 김정에게 보내 제시(題詩)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때마침 그 옆에 있던 최수성이 그 산수화를 보고 제시를 쓰기를

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려가고[落日下西山] 외로운 연기는 먼 숲에서 나오네[孤煙生遠樹] 은사의 차림 복건 쓴 서너 사람[幞巾三四人] 망천장의 주인은 누구인가[誰是輞川主]

라고 하였다. 남곤은 평소 그와 친한 최세절로부터 조카 최수성이 자기들을 비난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지는 해’는 훈구파를 뜻하고, ‘복건을 쓴 서너 사람’은 사림파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남곤이 이것을 보고 최수성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최원정화 풍남태설(崔猿亭畵諷南台說)》에서도 최수성의 신사무옥 연루에 대하여 자세히 나타난다. 최수성의 숙부 최세절이 재주는 있었지만 지조 없이 남곤을 찾아다니면서 벼슬을 구하였다. 원정은 매양 숙부에게 직간하여 “군자와 군자와의 사귐은 두루 미치되 아첨하지 않으며, 소인과 소인의 사귐은 아첨만 하되 두리 미치지 못한다 했습니다. 지금 숙부께서는 군자의 두루 미침은 알지 못하고 오로지 소인들의 아첨만 숭상하니, 무섭고 두려워서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과 업신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숙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숙부는 이 말을 듣고 다시는 원정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 최수성이 그의 숙부 최세절에게 보낸 시에 “해 저물어 푸른 산 아득도 한데, 하늘은 차고 강물은 절로 일렁이네, 외로운 배여 서둘러 정박해야 하리. 밤이면 풍랑이 거세질 테니[日暮蒼山遠 天寒水自波 孤舟宜早迫 風浪夜應多]” 라고 하였다. 최수성의 숙부가 이 시를 남곤에게 보이니, 남곤은 한참을 보더니 말했다. “해 저물어 푸른 산 아득도 한데”라는 구절은 세상의 도리가 점점 나쁜 쪽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고, “하늘은 차고 강물은 절로 일렁이네”라는 구절은 군주가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는 뜻이며, “외로운 배여 서둘러 정박해야 하리”라는 구절은 세상을 피해 은거해야 한다는 뜻이고, “밤이면 풍랑이 거세실 테니”라는 구절은 조정이 장차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라 하였다.
남곤은 이 시가 세상을 우습게보고 조롱하는 뜻이 참으로 통렬하다면서, 그대의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다면 의당 죽였겠지만, 자네 얼굴을 보아 이번만은 용서한다고 하였다. 이후 남곤은 최수성을 해치려는 마음이 전보다 갑절로 커졌다. 결국 남곤은 신사무옥 사건의 추관(推官)이 되어 최수성을 추국하도록 청하여 끝내 죽이고 말았다.
율곡 이이는 “최수성은 처사(處士)로서 산림에 은거하면서 도학에 몰두하여 깊이 의리를 알아 명성과 이득을 구하지 않고 여러 번 명한 관직에도 불응하다가 마침내 기묘사화를 당하여 조광조와 더불어 일시에 간사한 사람들의 모함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하였다. 율곡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기묘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안처겸의 옥사(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죽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