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호송설(護松說)


율곡과 호송설(護松說).

 

동고속도로 강릉 나들목을 나와 강릉 시내 방향으로 오다보면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낮은 집들 사이로 눈을 사로잡는 단아한 한옥지붕이 보인다. 뒤로는 소나무숲을 등지고 앞으로는 넓은 논밭을 안고 있는 배산임수의 전형인데, 이곳이 바로 임경당(臨鏡堂)이다.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는 김광헌(金光軒)의 큰 아들 김열(金說)의 아호인 임경당과 관련된 문화재가 두 곳이 있다. 강릉에서 가까운 금산리 445번지에 있는 것이 하임경당(下臨鏡堂)인데 대개 임경당이라 부르고, 마을 위쪽에 있는 것을 하임경당과 구분하여 상임경당(上臨鏡堂)이라 하는데 진사댁이라고도 한다.
이곳 금산리는 본래 조선 중종 대 김광헌이 세운 마을이라 하여 건금리(建金里)[갱금]라 하던 것이 1916년 장안동(長安洞)·제동(堤洞)·구동(鷗洞)·성하(城下)를 합하여 금산리라 했다. 금산리에는 강릉 최씨 평장공파의 시조인 최입지(崔立之)의 묘가 있는 산이 있는데, 그 형국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양이라 하여 금산(琴山)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강릉 김씨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금(琴)’자 대신 음이 같은 ‘금(金)’자를 써서 금산리라 하였다.

강릉 김씨는 통일 신라기에 명주군왕이었던 김주원으로 부터 비롯된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여러 파로 나뉘어져 왔으나, 금산리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아직까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김주원의 23세손 김반석(金盤石)의 차자인 김광헌의 후손들이다.
김광헌의 호는 정봉(鼎峰)이다. 정봉은 당시 금산리의 주봉으로, 모습이 솥처럼 보이고 세 가닥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솥의 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김광헌은 함헌(咸軒)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는데 서로 친구의 호를 지어주었다. 김광헌은 함헌에게 그의 마을 앞에 있는 칠봉산(七峰山)을 따서 ‘칠봉’이라 지어주고, 함헌은 그의 마을 뒤에 있는 정봉을 따서 ‘정봉’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김광헌은 중종 대에 진사과에 입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금산리 정봉산 하금산평(下琴山坪)에 분가하여 시서(詩書) 읽는 것과 나무 심는 것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았다. 네 아들을 키웠는데 후손이 금산을 중심으로 세거하여 금산파라 하였다.

장자인 김열(金說)은 자가 열지(說之), 호가 임경당으로 경사(經史)와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과거에 응시했다는 기록은 없고, 평강 훈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친과 우애로 수신제가에 힘써서 당시 사람들이 임영처사(臨瀛處士)라 칭하였다.

1569년(선조 2년) 어느 여름날, 율곡이 임경당을 방문하였다. 이 무렵 율곡은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 온 후, 국가사업인 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사직하고 향리인 강릉 오죽헌에 돌아와 잠시 머물고 있었다. 율곡이 강릉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계시는 외할머니 용인 이씨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병을 하기 위해서였다. 율곡의 사직을 두고 조정에서는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근친도 아닌 외할머니의 간병을 위해 사직한다는 것은 직무를 소홀히 하는 처사라는 비판이 잇달았고, 급기야는 파직을 소청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비록 외할머니라 하더라도 정리가 도타우면 가능한 일이고, 효행에 관계된 일이라 파직할 것이 아니라는 뜻을 견지하였다.
당시 율곡은 33세였고 임경당 김열은 63세였으니, 이들의 만남은 잠시 고향을 찾은 율곡이 오랜만에 향리의 어른을 찾아뵙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연치로 보아 임경당은 출중한 문재를 타고난 율곡의 어린 시절을 익히 보아 왔을 터이고, 율곡 역시 향리에서 명망을 얻고 있었던 임경당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임경당의 주위에는 김열의 아버지 김광헌이 손수 심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있었다. 그동안 김열은 아우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소나무를 보호하고 기르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해왔다. 율곡과 만난 자리에서 김열은 집 주위의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나의 선친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우리 형제 모두가 이 집에서 저 소나무를 울타리로 삼고 지내고 있네. 그래서 이 소나무들을 볼 때마다 선친을 생각하곤 한다네. 이러한 소나무를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아 도끼나 낫으로 베고 잘라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없어질까 늘 두려운 마음뿐이라네. 그대가 이를 보호할 수 있는 교훈될 만한 말을 몇 마디 써 주면 집안 사당 벽에 걸어 놓고 자손들로 하여금 늘 이를 보게 하여 가슴 깊이 새기게끔 하겠네.”하였다.
주인으로부터 뜻밖의 요청을 받은 율곡은 겸양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몇 마디 말이 어찌 도움이 되겠습니까? 부친의 뜻이 아들에게 전해지고 아들은 다시 그 뜻을 자손에게 전한다면 그 뜻은 반드시 백세토록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말로써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써 가르치는 것만 못하고, 글로써 전하는 것은 마음으로써 전하는 것만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율곡이 사양하는 자세를 보이자 임경당은 ”그대의 이 말은 그러하거니와 다만 사람이 갖추고 있는 인·의·예·지의 본성은 하늘에서 얻은 것인데, 이것을 완전히 확충하는 사람도 진실로 적지만 이것을 아주 끊어버리는 사람도 또한 드므네. 보통 사람의 성품이란 경계하여 주면 양심이 일어나고 경계하여 주지 못하면 어두워지게 되니, 나는 보통 사람을 계발시켜 어둡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이네. 저들 그 마음을 곡망(梏亡:어지럽게 하여 멸함)하고 부모를 진월(秦越:서로 떨어져 교류가 없는 것)같이 대하는 자는 금수일 뿐이니 내가 비록 효제로써 자손에게 기대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보통 사람으로써 기대할 수야 없겠는가. 자손들도 또한 마음이 있으니 어찌 금수로서 자처하는 데까지야 이르겠는가.”하면서 글을 지어 주기를 재차 요청하였다.
그러자 율곡은 임경당의 인품에 감동하면서 ‘호송설’을 짓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심에 그분이 보시던 서책을 차마 읽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손때가 묻어 있기 때문이오,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그분이 손수 쓰시던 그릇을 감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입김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하물며 드리워져 있는 소나무는 선대에서 손수 심은 것이 아니던가? 비와 이슬을 머금고 생장하였고 서리와 눈으로 다져져 튼실하게 되었으니, 잠깐만 눈길이 스쳐도 감회를 일으켜 어버이 생각이 불현 듯 나고, 비록 한 가지 한 잎의 작은 것이라도 상처나 해를 입지 않을까 삼가고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할 터인데 어찌 가지나 줄기를 범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짐승의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경계할 줄 알 것입니다.”
이어서 율곡은 후손들에게 경계하는 말로서 그 글의 끝을 맺고 있다. “선조들이 고생과 노력을 쌓아서 한 세대 30년을 기약하고서야 가업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손이 불초하면 가업이 무너지는데 한 해를 기다릴 것도 없다. 이 소나무를 붇돋아 심은 지 수 십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큰 나무로 성장하였는데 도끼로 벤다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것이니, 이 어찌 가업을 이루기는 어렵고 파괴하기는 쉬운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지금도 금산리 종가에서는 김열의 호에서 연유한 임경당이라는 누정이 있는데,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강원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에 율곡의 호송설 제판(題板)이 걸려 있는데, 크기는 가로 105cm, 세로 50.5cm의 목판으로 판각되었다. 근년에는 송림이 우거진 강릉고등학교 교정에 그 원문과 번안문을 새긴 석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