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암 송시열(尤菴 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송시열 관련 기사는 생전에 2,000회, 사후에 1,000회에 육박해서 그는 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송시열이 받는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송시열이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인물이라며 비난을 퍼붓고, 누군가는 그가 조선을 ‘친명사대주의’의 나라로 만들어 멸망의 길을 걷게 했다며 개탄한다. 심지어 한편에서는 그를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 우리 동방)의 주자(朱子)’라며 우리나라 인물로는 유일하게 이름에 ‘자(子)’를 붙여 ‘송자(宋子)’로 극존칭을 쓰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의 골수 신봉자’라며 ‘송자(宋者)’라고 낮추어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서로 다르게 평가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퇴계 이황은 16세기가 열리던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타계했고, 율곡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타계했다. 퇴계와 율곡이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였다면 17세기를 대표하는 선비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선조 말년에 태어나 광해군과 인조, 효종과 현종대를 거쳐 숙종대에 죽었으므로 무려 여섯 왕과 인연을 맺었다. 퇴계와 율곡의 초상이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라면, 송시열의 초상은 강직하다. 굳게 다문 입술, 깊게 팬 주름, 흰 수염, 당당한 풍채가 사람을 압도한다. 49세의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아깝게 유명을 달리한 율곡과 달리 송시열은 83세에 타계했으므로 드물게 장수한 선비다. 하지만 매화에 물을 주라는 부탁을 하고 명을 달리한 퇴계와 달리 송시열은 임금이 주는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문하에 들어가 배울 스승이 없었던 퇴계나 율곡과 달리 송시열은 스승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12세의 송시열에게 부친 송갑조(宋甲祚)는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을 가르쳤다. 이를 다 배운 송시열은 “이 글처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한다. 비록 어리지만 강직하고 단호한 언명이 인상적이다. 부친의 훈계는 일생 학문의 정초(定礎)가 되었다.

24세의 청년 송시열은 율곡의 수제자로 명성이 자자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었다. 80세가 넘는 노선생 김장생은 말년에 자신의 명성을 넘게 될 후계자를 만난 셈이다. 송시열이 그에게 배운 기간은 1년 남짓, 스승이 타계한 후에는 그의 아들 김집에게 배웠다. 김장생은 율곡에게 공부한 서인의 대표 주자이고, 송시열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공부했으니 당대 최고의 학맥을 쌓은 셈이었다. 송시열이 17세기를 대표하는 서인의 영수로 부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차지한 비중을 견주어 보면 송시열이 조정에 머문 실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문과를 통하지 않고 학식으로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傅)에 임명된 것이 그의 첫 출사였다. 그때가 1635년(인조 13)이었는데 29세의 송시열은 열두 살 연하의 대군을 약 8개월 정도 가르쳤다. 그러나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병자호란의 충격을 ‘머리에 신발을 쓰고 발에 모자를 쓰게 된 사건’, 즉 기존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 사건으로 생각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르친 봉림대군은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기에 그의 자책과 좌절은 더욱 심했다. 송시열은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인조가 붕어하고 효종이 즉위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였다.

효종은 사부 송시열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효종은 즉위하자 원로들을 초빙했고 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의 뜻을 밝혔다. 송시열은 그 유명한 〈기축봉사〉로 화답했다. 북벌이야말로 국가의 대의라고 천명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의 나라 청을 배격하며 인조가 당한 치욕을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효종과의 인연은 짧았다. 스승 김집과 함께 출사했던 송시열은 조선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압박하는 청나라와 국내 친청파의 준동을 목격하고는 8개월여 만에 다시 낙향했다. 효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불렀지만 출사를 사양하고 학문에 열중하면서, 서인학맥의 도통을 정리하는 등 서인의 이념적 결집을 위해 노력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극진했다. 왕이 사관을 멀리한 채 독대한 신하가 송시열이었다. 한번 낙향한 송시열은 한사코 임금의 부름을 거절했다. 이유는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구애는 계속되었다.

1658년(효종 9)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마침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담비로 만든 털옷을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신임했다. 은밀히 독대한 일도 그 시기였다. 효종은 일편단심 북벌이었다. 북벌만이 아버지의 치욕을 갚는 효행이었다. 북벌만이 인질 생활 9년 동안 형과 동생이 겪었던 모욕에 대한 복수였다. 효종은 즉위 원년에 와신상담할 것을 포고했고 약속을 지켰다. 효종은 군대를 확대했고, 군사 훈련을 다그쳤다. 북벌의 그날만 기다린 왕이 효종이었다. 효종이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낸 것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추진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실상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명과 조선의 군신 관계는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국시로 정해진 명분이었고, 임진왜란 때 명의 구원병 파견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므로 송시열에게 있어 명을 멸망시킨 청은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는 군부(君父)의 원수였다. 그러나 송시열의 존명배청 감정은 《춘추(春秋)》의 원리에 의해 관념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송시열은 “아픔을 참고 억울함을 머금지만 사세가 절박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자의 입장을 늘 강조했다. 즉 송시열의 북벌론은 실제적인 부국강병책으로 군사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유교정치의 보편적인 이념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효종의 북벌론은 양병(養兵)에 치중되어 있었고, 송시열의 북벌론은 양민(養民)에 치중되어 있었다. 송시열은 군사 양병과 군비 확장을 추구하는 효종에게 양병보다는 민생 안정을, 무력보다는 군덕을 닦을 것을 종용했다. 효종과 송시열은 이렇듯 ‘북벌’이라는 이념에서는 생각이 일치했지만 방법론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동상이몽일 뿐이었다. 게다가 효종이 얼마 안 가 갑자기 죽었고 결국 북벌론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현종이 즉위하고 1차 예송(기해예송)이 일어나 남인과의 예론이 격화하자 송시열은 1661년(현종 2)에 다시 낙향했다. 현종 대에도 그는 거의 정계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1668년(현종 9)과, 1673년 좌의정으로 임명되어 잠시 출사했을 따름이었다. 현종이 죽고 2차 예송(갑인예송)이 일어나자 그는 예를 그르쳤다는 공격을 받아 1675년(숙종 1)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어 약 5년을 보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 정권이 성립되자 송시열은 적극적으로 출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서 많은 논쟁에 관여했는데, 특히 스승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훈을 옹호한 일로 서인 소장파의 불만을 샀다. 또 자신의 수제자 윤증과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장기간 논쟁했는데, 두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결국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숙의 장씨(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일에 반대한 서인을 내치고 남인을 등용했다. 당시 서인 영수였던 송시열은 원자의 정호(定號)를 미루자고 상소했다가 유배당하고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송시열의 행적과 공과에 대한 논쟁은 사후에도 생전처럼 뜨거웠다. 1689년(숙종 20) 서인이 집권하자 그는 바로 복관(復官)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를 제사하는 서원이 각처에 건립되었고 1756년(영조 32)에 드디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남인이나 소론 일각에서의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으나 점차 그의 공적이 인정되는 형편이었다.
송시열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정조대가 절정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송시열이 공자, 주자의 의리 정신을 계승했다고 평가해 그를 기리는 다양한 추승사업을 펼쳤다. 그에 힘입어 노론 측에서는 1787년(정조 11)에 기존의 문집과 별집 등을 망라한 234권의 거질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했다. 《송자대전》은 분량뿐만이 아니라 명칭과 체제부터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유학의 성인(聖人), 현인(賢人)에 붙는 ‘자(子)’라는 영예로운 호칭에 《주자대전》을 본뜬 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방대한 《송자대전》을 관통하는 핵심은 주자의 학문 완성과 그 지향하는 바의 실현이었다. “주자의 일점일획도 고치면 안 된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송시열은 주자를 철저히 존숭했다. 그에게 주자의 언설은 시대에 맞추어 재해석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그대로 적용해야 할 교리에 가까웠다. 주자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봉은 주자에 대한 흠모로 이어졌다. 어느 날 송시열이 안질과 각질에 걸렸는데, 그는 주자도 같은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병을 번거로워하기보다는 영광으로 여겼다. 또한 생일날 받은 선물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준 것도 주자를 따른 것이었으며, 약혼한 손녀가 혼사 전에 죽은 것 역시 슬퍼하는 한편으로 주자에게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을 정도로 송시열의 주자와 주자학에 대한 존숭은 맹목적이었다.

송시열이 후대에 더욱 인정받은 근거는 ‘의리 정신을 계승’한 삶 자체였다. 의리가 전도(顚倒)된 현실에서 ‘세상의 도리[世道]’를 지켰다는 평가가 있었기에 그는 공자, 주자를 잇는 후인(後人)이 될 수 있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정통인 주(周) 왕실이 추락하고 힘을 앞세운 패자(覇者)들이 천하를 좌우했다. 그가 인(仁)을 강조했던 것은 정통에 의한 질서를 회복하자는 현실성 있는 외침이기도 했다. 공자는 비록 생전에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유학자들은 공자의 외침이 있는 한 세상의 바른 질서는 언제든 회복될 수 있다고 여겼다.
주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자는 금(金)에 의해 송(宋)이 남쪽으로 밀린 시대에 살았다. 정통인 송은 쇠퇴하고, 오랑캐인 금이 패권을 쥐었다. 하지만 주자는 희망을 가졌다. 가치가 전복된 세상에서는 공자처럼 도리를 보전해야 한다. 현실은 가변적이기에 세상은 언젠가는 불변의 도리에 힘입어 다시 밝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 주자는 어지러운 시대에 유교문화의 정수를 창달하거나 계승했다. 정통이 뒤바뀌거나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밝힌 문화와 이념이 있는 한 세상은 다시 밝아진다. 그것이 유학자들의 세도관이었다.
송시열이 후대에 높이 평가받은 것은 그 정신을 계승, 실천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조선이 청에게 무릎 꿇고 명이 망해버린 시대를 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교 국가인 조선은 유교문화의 명맥을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송시열이 주자와 책임감을 동일하게 느끼고, 주자의 말 하나하나를 실천하려 한 데는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무너진 세도를 지킨다는 원칙을 평생 견지했고 결국 조선은 그것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송시열의 후인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붕당은 18세기에 접어들어 집권 주류로 부상했고, 그의 행적은 국가를 지탱한 일로 칭송받았다. 영조대의 문묘 배향과 그를 주자의 후인으로 인정한 정조 대의 평가가 그 절정이었다.

송시열은 이념의 실천자였고, 단연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자 방식대로’를 외치며 사문시비(斯文是非)를 벌였던 그의 노력이 21세기를 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고 거북살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송시열의 죽음도 일면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칙과 고집을 내세우며 극단을 치닫는 성격 때문에 정쟁의 비극에 휘말린 것이니 그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민하고 과단성 있으며 기력이 뛰어났던 유림의 종사(宗師) 송시열. 현재에 이르러서도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그가 조선 후기의 정치 사상계를 휘어잡았던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