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소녀 유지(柳枝)를 만나다


율곡, 소녀 유지(柳枝)를 만나다.

 

녀린 몸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그 고운 눈길 한번 아니 주노라
부질없이 파도 소리 듣고 있을 뿐
운우대에 오르는 꿈 아직 못 꿨네.

너 자라면 응당 이름 떨치련마는
나 쇠약해 널 가까이 할 수 없다네.
이 나라 제일 미녀 주인도 없이
기생되어 살다니 가련하구나.

율곡은 1574년(선조 7) 10월, 39세의 나이로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황주에 순시차 갔다가 그곳에서 평소 자신을 존경해왔다는 16세의 어린 소녀 유지(柳枝)를 만난다. 율곡과 유지의 만남에 대한 최초의 자료는 율곡이 40세 되던 1575년 정월 초이튿날 유지에게 준 시와 그 서문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집에 실려 있는 이 글에 의하면, “어린 기생 유지가 있었는데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다. 앞으로 다가 오라고 불렀더니,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물어보았더니 선비의 딸이었으나 그 어머니가 기적(妓籍)에 있었기 때문에 황주(黃州) 소속의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엾게 여겨 시를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이때 지은 시가 위에서 인용한 시다.
율곡은 1575년 3월에 병으로 체직되어 파주 율곡리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 다시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다. 율곡이 유지를 다시 만난 것은 1582년(선조 15) 10월이었다. 율곡은 명의 사신 황홍헌과 왕경민을 맞이하는 원접사가 되어 의주로 가는 길에 황주를 지나게 되었고, 11월에는 이들 사신의 귀국을 배웅하게 되었다. 유지는 율곡이 오가는 길에 묵는 지방 관아의 숙소에서 시중을 들었다. 유지와 율곡이 함께한 기간은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느라 관서지역에 머무는 기간 동안이었을 것이니 길게 잡아야 한 달 남짓이었을 것이다. 이해 12월에 율곡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583년 9월 하순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해주에 물러나 있던 율곡은 황주에 있는 누이 집에 문안을 갔다가 유지를 만나게 되었으니 거의 10개월 만이다. 그 둘은 여러 날 동안 주변의 풍광 수려한 지역을 유람하며 함께 술도 마시고 다정하게 지냈다. 애초에 율곡의 이번 황주 여행은 그곳에 사는 누님을 찾아뵙는 목적으로 나선 것이어서 마냥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율곡이 해주로 돌아가야 했기에 유지는 어느 절까지 따라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길을 떠난 율곡은 그날 저녁 무렵 재령의 밤곶[栗串] 나루터 강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그런데 밤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뜻밖에 아까 절에서 작별했던 유지였다. 웬일인지 묻는 율곡에게 유지는 다시 뵙지 못할 것 같아 찾아왔노라고 대답했다. 율곡은 순간 갈등했다. 깊어 가는 밤에 도학자의 방에 처첩 아닌 젊은 여인을 맞아들이는 것은 의에 어긋나고, 문을 닫고 돌려보내는 것은 인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도 잠깐, 율곡은 유지를 안으로 받아들였다.
촛불을 켜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병풍은 걷어냈지만 각각 다른 이불과 다른 요를 깔고 덮고 잠을 청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새벽에 율곡은 지필묵을 준비하여 그 밤에 있었던 일을 적어 유지에게 주었다. 이 글이 〈유지사(柳枝詞)〉다.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문서는 〈유지사〉를 짓게 된 경위를 적은 서문과 〈유지사〉, 그리고 유지사 뒤에 부록처럼 첨부된 3편의 7언절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지는 선비의 딸인데, 황주의 기생이 되어 있었다. 내가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어린 소녀로서 나에게 시중드는 기생이 되었다. 날렵한 몸매에다 아리땁고 세련되어 모습이 빼어난데다 생각이 지혜로웠다. 그러므로 내가 어루만지면서 어여쁘게 여기기는 했으나 애초부터 정욕을 품지는 않았다. 그 후 내가 원접사로서 관서 지방을 왕래할 때도 유지가 언제나 안방에 있었으나 단 하루도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계미년(1583년)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에 계시는 누나에게 문안을 갔을 때도 유지와 술잔을 함께한 것이 여러 날이었고, 해주로 돌아갈 때는 절까지 따라 와서 나를 전송해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작별을 하고 밤곶이 강마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밤중에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 보니 바로 유지였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오기에 이상해서 그 연유를 물었더니 유지가 하는 말이 이러했다. “선생님의 명분과 의리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는데, 하물며 저같이 시중이나 드는 기생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나이까. 게다가 예쁜 여자를 보고도 무심하시니 더욱더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번에 이별하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가 어렵기에 감히 이렇게 멀리 찾아왔사옵니다.” 드디어 촛불을 밝히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아! 기생들은 다만 다정하게 구는 뜨내기 건달들만 좋아하는 법이니, 그 가운데 어느 누가 명분과 의리를 사모할 줄을 알겠는가. 더구나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감복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아, 이 여자 선비가 천한 사람들에게 곤욕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니 애석하기만 하다. 또 지나가는 길손들이 내가 유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을까 의심하여 유지를 돌아보지 않게 된다면, 나라 제일의 미인에게 더욱 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유지사’를 지어 유지와의 인연이 정에서 시작되어 예의에서 그쳤음을 서술해놓았으니, 읽는 분들은 이점을 자세하게 헤아려주시라.

유지에 대한 율곡의 사랑은 유지에게 〈유지사〉를 친필로 써 준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순수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율곡 같은 저명 학자가 기생과의 일화를 친필로 남길 경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유지사〉는 결과적으로 율곡의 이미지에 손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이 구태여 친필의 〈유지사〉를 남긴 것은 유지와 자신이 아무런 육체적 관계가 없었음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자신으로 인하여 유지의 명예를 손상하거나 앞날을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사랑과 배려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밤곶 강마을에서의 일이 있은 지 넉 달이 지나지 않아 율곡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 유지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하며, 이후에도 율곡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율곡이 직접 써준 〈유지사〉를 첩(帖)으로 만들어 황주를 지나가는 지체 높은 사대부들을 애써 찾아다니면서 화답시를 얻어 보관하곤 했다는 것이다. 신흠(申欽)의 《상촌고(象村稿)》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유지는 황주의 기생이다. 일찍이 기생이 되었는데 재주와 용모가 빼어났다. 율곡 이선생이 원접사로서 황주를 지날 때 황주 고을의 원이 유지에게 선생을 모시게 했다. 선생이 그 재주와 용모를 어여삐 여겨 더불어 거처하면서도 어지럽힘이 없었으며, 사(詞) 한편을 지어주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유지가 선생을 추모하기를 마지 아니 하면서, 이 사(詞)를 첩(帖)으로 만들고 황주를 지나 서쪽으로 가는 지체 높은 사대부들을 찾아가 화답을 요청하지 않음이 없었다. 기유년(1609년) 겨울에 내가 북경으로 가다가 황주를 지날 때 유지가 또다시 찾아와서 화답을 청했으므로 내가 절구를 지었다.

이처럼 유지의 요청을 받고 화답을 한 사대부의 작품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흠이 화답시를 지었다는 해가 1609년이니 이미 율곡이 죽은 지 2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유지는 여전히 첩으로 만든 〈유지사〉를 들고 사대부들을 찾아다니면서 화답을 요청하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에게 두 번 이상 찾아가서 화답시를 받기도 했던 셈이다.
율곡과 성혼을 종유했고 직접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은 최립(崔岦)도 율곡이 유지에게 써준 시에 대한 차운시를 남기고 있다.

어찌 문자로 미인을 중히 여겼을까
한 번 웃는 자리 얼마큼에 해당할까
중요한 것은 선생의 명의(名義)에 감동하여
청동거울 들고 다시는 화장하지 않았으리.

이처럼 유지가 율곡이 별세한 이후에 〈유지사〉를 첩으로 만들고 지속적으로 화답시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유지가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저명 인사들의 시들을 받아 시첩을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당대의 명유였던 율곡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증명서인 〈유지사〉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저명 인사들의 화답시를 두루 받아둠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일 것이다. 또한 율곡을 사랑한 유지가 율곡이 별세한 후 자신에게 접근하는 뭇남성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유지사〉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때 화답시를 청했던 대상은 주로 율곡의 지인이나 문인이었을 것이다. 유지가 지혜롭다고 율곡이 말했으니 율곡이 생전에 정적들의 혹독한 모함에 시달렸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율곡에게 흠이 될 수도 있을 〈유지사〉를 아무에게나 보여주었을 리 없다. 그녀는 율곡에게 사랑받은 여자임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며, 그것으로 일생의 보람을 삼았을 것이다. 이것이 그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보존하는 지혜로운 방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율곡과 유지의 애틋한 사연은 당시 호사가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밝혔듯이 그가 〈유지사〉를 쓴 이유는 이러한 세간의 억측으로부터 유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도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이 일화에 대한 논란이 문하에서 있었다. 유지에 대한 율곡의 처신이 문인들과 후학들 사이에서 시비의 논란이 되었다.
이희조는 〈유지사〉를 비롯한 율곡의 시고(詩稿)는 간행하여 후세에 전하더라도 선생에게 누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드높은 경지를 더욱더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유지사〉에서 ‘문을 닫아걸면 인을 상하고 함께 자면 의를 해친다.’는 구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이유경(李有慶) 또한 이 일을 ‘조화를 이루되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음[和而不流]’이라고 평가하였다.
반면에 이지렴(李之濂)은 박세채가 율곡집을 재편집할 때 유지와의 관련 시고(詩稿)는 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이러한 글들이 율곡의 성대한 덕에 누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또한 후세에 가르침을 남길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결국 박세채는 이지렴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주목할 것은 김장생, 송시열, 그리고 권상하의 문집에는 유지와의 일화나 〈유지사〉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황상 이들이 유지의 일화를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언급이 없음은 이를 논란하는 것을 피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