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선조를 만나다


율곡, 선조를 만나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경복궁 내 작은 침소인 양심당(養心堂)에서 조선 제 13대 왕 명종이 승하하였다. 그의 나이 34세로 재위 22년째였다. 그는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의 위세에 눌려 단 한순간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 보지 못한 불운한 군주였다.
명종이 위독한 상태를 보이던 6월 27일 한밤중에 다음 왕이 결정되던 순간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비 심씨가 대신인 이준경과 심통원을 급히 불러 침전으로 입대(入對)하게 했을 때 상은 이미 인사불성 상태였다. 준경이 앞으로 나아가 큰 소리로 “신들이 왔습니다.” 했으나 상은 반응이 없었고, 준경이 또 사관을 시켜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올리게 했으나 상은 역시 살피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준경이 왕비에게 아뢰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직의 대계(大計)를 정해야 합니다. 주상께서 고명(顧命: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함)을 못하실 입장이니, 당연히 중전께서 지휘가 있으셔야겠습니다.”하니, 왕비가 답하기를 “지난 을축년(1565년)에 주상으로부터 받아 둔 전지가 있으니, 모름지기 그 사람을 사군(嗣君:왕위를 이은 임금)으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했다. 이는 을축년 9월, 상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 중전이 봉서(封書) 하나를 대신에게 내린 바 있었는데, 하성군 이균(李鈞)을 사군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준경 등은 배사(拜謝)하며 아뢰기를 “사직의 대계는 정해졌습니다.”했다.
《선조수정실록》 권1, 총서

명종이 세상을 떠난 6월 28일 다음 왕이 될 하성균 이균은 모친상을 당해 사직동에 있는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다. 새벽 2시경 명종이 눈을 감자 도승지 이양원을 비롯한 몇 명이 사직동 사저로 방문했다. 그러나 아직 새벽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고 이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날이 밝고서야 이양원 등은 빈소를 지키던 이균에게 중전의 명을 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울면서 사양하던 이균도 마침내 의관을 갖추고 경성전(慶成殿)으로 들었다. 경복궁 내 서쪽에 있던 작은 침전인 경성전은 명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대궐에 들어온 이균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즉위식에 나오라는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균은 경성전의 상차(喪次:상주가 머무는 방)에 머물며 나오지 않았다. 인순왕후와 대신들의 청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근정전으로 나아가기는 했으나 용상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임금 자리는 꿈에도 꿀 수 없었던 후궁의 손자 아닌가? 거듭되는 주청에 결국 하성군은 용상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조선의 역사에서 최초로 후궁의 소생으로 왕이 된 선조 임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선조의 즉위는 사림들, 특히 신진 사림들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라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참으로 지긋지긋했던 척신들의 공포정치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즉위식에 참석한 조정 대신들은 어린 신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나라의 미래를 점쳐보느라 바빴을 것이다. 선조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다 궐내에서 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특히 이날 즉위식이 끝나고 신왕의 유모가 화려한 가마를 타고 들어와 무언가를 청탁했다. 그러나 어린 신왕은 청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참람 되게 가마를 타고 들어 온 것을 꾸짖었다. 그 바람에 유모는 집으로 갈 때 걸어서 가야 했다. 또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환관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늘 편전에 묵묵히 앉아 독서에 전념했다. 이에 조정과 재야에서는 성덕(聖德)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높아만 갔다.
선조의 즉위는 바야흐로 사림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정권을 잡은 사림은 우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을 갔던 노수신, 유희춘 등을 다시 기용했다. 또한 그동안 관직에 나아가기를 꺼려했던 이황 등 명망 높은 사림들도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리는 시기이다.
조선 국왕 27명 중에서 스승 복이 가장 많았던 인물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선조일 것이다. 이황, 기대승, 이이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성리학의 최고봉들이 그에게 학문적 기초를 놓아주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사흘이 지난 7월 6일, 그가 처음 행사한 인사발령이 바로 이황을 예조판서 겸 경연과 춘추관을 책임지는 동지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때 이황의 나이는 이미 67세였다. 이황은 20여 일 정도 한양에 머물다가 8월 1일 사직을 하고 고향인 안동 도산으로 내려갔다. 10월 1일 선조는 자신이 이황의 낙향을 말리지 못한 것은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경연에서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다. 11월 4일 경연에 참석한 이황은 선조에게 《소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소학》을 통해 사람됨의 본바탕을 함양한 후에 《대학》을 읽어야 통치의 기본이 바로잡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11월 17일 경연에서는 요순 임금이 인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는 대목의 《대학》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황이 사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듬성듬성 선조의 학문에 도움을 주었다면, 이황보다 한참 어린 기대승은 훨씬 적극적으로 사림의 세계관을 선조의 머릿속에 담아준 인물이다. 기대승은 선조 즉위년(1567년) 10월 23일 41살의 나이로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된 이후 연일 선조의 학문 연마를 도왔다. 10월 23일의 첫 경연에서부터 기대승은 군자-소인론을 바탕으로 기묘사화 이후 계속된 사림에 대한 탄압을 이야기하면서 마땅히 시비를 가려 억울하게 당한 이들을 풀어줄 것을 선조에게 요청했다. 그는 “어진 이 하나가 참소를 받고 물러가면 사방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발걸음을 멀리할 것이며 조정에 나오는 자들은 녹만을 탐할 뿐입니다.”고 강조하였다.
율곡 이이가 경연에 참석해 선조의 학문을 돕기 시작한 것은 선조 2년(1569년) 8월 16일부터였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18세, 율곡의 나이는 34세였고 직위는 홍문관 교리였다. 두 사람이 이때 처음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학술 토론의 장인 경연에서는 첫 대면이었다. 《맹자》를 진강한 후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으로서는 한 시대의 사조(思潮)가 어떠한지를 살펴서 그 사조가 잘못되었으면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권간이 국정을 전단한 뒤를 이어받아 사습(士習)이 쇠약하고 나태해져 한갓 녹(祿)을 받아먹고 자기 한 몸 살찌울 줄만 알지, 충군 애국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설령 한두 사람 뜻을 가진 이가 있어도 모두 시속(時俗)에 구애되어 감히 기력을 발휘하여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속의 풍조가 이러하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크게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분발하시어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킨 뒤에야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척신정치에 의한 폐해를 회복하고 새롭게 혁신하는 정치를 펴기 위해서는 임금 스스로 올바른 공부법에 바탕을 둔 학문 연마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대학》을 염두에 두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단지 부지런히 경연에 나와 고서(古書)를 많이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하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실지로 공효가 있게 된 다음에야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정치 문제에 대해서 “현재 민생은 곤핍하고 풍속은 박악(薄惡)하여 기강은 무너지고 선비 사회의 풍토는 바르지 못한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해가 되었는데도 그 다스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의 격물 치지 성의 정심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지적하면서 “만약 전하께서 (지금처럼) 유유범범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형식만을 일삼는다면 비록 공자와 맹자가 좌우에 있으면서 날마다 도리를 논한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유익함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9월 25일에 율곡은 선조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올렸다. 이 책은 율곡이 지난 한 달여 동안 동호독서당에 머물면서 임금의 학문하는 방법과 정치하는 도리를 문답체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율곡은 먼저 군주의 길과 신하의 길을 각각 논하고 이어 좋은 군주와 좋은 신하가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설명하였다. 이어 그는 조선 역사를 간략히 개관하면서 도학이 땅에 떨어지게 된 경위를 정리하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논하였다. 다음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교육을 진작시킬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면서 정명(正名)이야말로 정치의 근본임을 역설하면서 그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날의 경연에서 율곡은 “세종과 세조 같으신 분은 군신(群臣)들과 서로 친하기를 가인(家人)이나 부자(父子)처럼 하였기 때문에 뭇 신하들이 은혜와 덕에 감격하여 사력을 다했던 것”이라면서 “지금 신이 누차 입시(入侍)하여 전하를 뵈니 신하들의 말에 조금도 응수하여 대답하지 않으십니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다 직설적으로 선조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대저 한 집안의 부자와 부부가 아무리 지친의 관계라 하더라도 만약 아비가 자식에게 답하지 않거나 지아비가 아내에게 답하지 않으면 그 정(情)도 오히려 막히게 되는데, 하물며 명위(名位)가 현격한 군신(君臣)의 관계이겠습니까. 여러 신하가 상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은 경연 자리에서뿐이기 때문에 입시하는 신하들이 미리 아뢸 내용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궁리하고 정리해 놓았다가도, 상의 앞에만 오게 되면 천위(天威)에 겁을 먹고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여 10분의 2~3 정도에 그치고 맙니다. 상께서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응수를 해주신다 해도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뜻이 통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입을 꼭 다물고 말씀하지 않음으로써 저지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전하를 위해 헤아려보건대 널리 선책(善策)을 구하여 시대를 구제하는 데에 급급하셔야지 깊숙이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셔서는 안 됩니다. 명종대왕께서 200년 종사(宗社)를 전하에게 부탁하셨는데 전하께서는 그 우환을 받으신 것이지 그 즐거운 세상을 이어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200년 종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진작시킬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해 선조는 “학문은 온축하여 덕행이 된 뒤에야 밖으로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법인데, 덕행이 없는 몸으로 어떻게 사업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삼대의 융성한 정치도 마땅히 점진적으로 시행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한마디로 학문이 아직 갖추어 있지 않은데 정사를 서두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대승, 이이 같은 소장 사림들이 요구하는 급진개혁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뜻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문제의 본질은 학문 연마의 완급이나 혹은 개혁의 속도 조정이라기보다는 선조 자신의 성품, 즉 협량과 자신감 결여에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정통성 없는 즉위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임과 동시에 선조의 타고난 품성이 더해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협량과 자신감 결여는 두고두고 신하들에 대한 선조의 불신, 선조에 대한 신하들의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선조는 변덕이 심하고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왕이었다. 선조의 이러한 면을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선조 7년(1574년), 선조의 나이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이때 사간원 정언 김성일이 경연에 참석했다. 이날 선조는 경연관들에게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에 비한다면 어느 임금과 견주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이주가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십니다.”하고 말했다. 요순이라면 성군의 대명사가 아닌가. 이 말을 들은 선조는 내심 흐믓해 했다. 보다못한 김성일이 “전하는 요순 같은 임금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 같은 폭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조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어찌 한 사람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김성일은 다시 한 번 선조의 고질적인 병통(病痛)을 날카롭게 찌른다. “전하께서는 천자(天資:타고난 품성이나 소질)가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시기에 어렵지 않으나, 다만 신하가 옳게 간하는 말을 거부하시는 폐단이 있으시니 실로 염려되는 것입니다.” 어느새 신하들에게 데면데면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정곡을 건드린 김성일의 말에 선조는 낯빛이 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신하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유성룡이 나섰다.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는 대답은 임금을 격려하는 말이고, 걸주라는 대답은 경계시키는 말입니다.” 선조는 그제야 노기를 풀었다. 만약 유성룡이 적시에 무마하지 않았다면 김성일에게 후환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조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신하들의 권력 다툼을 이용했다. 선대 왕들 중에서도 왕권 강화를 위해 집권 세력과 견제 세력을 동시에 키운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경우에는 세력의 균형이라는 정치적 신념보다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처분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경쟁구도에서 훈구파가 사라짐으로 해서 사림의 분열이 생겼지만, 사림의 분당이 선조의 집권기에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국란에 미리 대처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지만 전쟁이 일어난 후 선조의 행보는 더욱 실망스럽다. 선조는 유린된 국토를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왕권 유지에만 급급했다. 이순신과 같은 전쟁영웅에 대해서도 질투하고 견제할 정도였다. 서인의 모략이 있었다고는 하나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이순신을 파면하고 백의종군하게끔 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전공을 세운 사람보다 자신을 호종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봉했다.
선조는 실제로 명에 가서 원병 파견을 요청했던 정곤수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했던 이항복의 공로를 가장 높이 평가하여 포상했다. 그러면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무장들의 공로를 평가하는 데는 매우 인색했다.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군(明軍)의 힘 때문이었다. 우리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운좋게 남은 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했다.“ 거나, ”명군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논한다면 그것은 모두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명나라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선조실록》 선조 34년 3월 14일)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선조가 비정상적으로 명군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그럴수록 명나라에 군사를 요청할 것을 결단한 자신의 역할이 부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