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이름, 문묘 배향


영광의 이름, 문묘 배향.

 

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조선 왕조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성균관은 학궁(學宮) 혹은 반궁(泮宮)이라고도 한다. 돌계단을 올라 작은 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뚝 선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고, 그 남쪽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유생을 길러내던 국립대학이었으므로, 이곳에는 반드시 공자와 중국과 한국의 유교 성현 위패를 모신 신성한 공간인 문묘(文廟)가 설치됐는데 문묘의 정전(正殿)이 바로 대성전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자(子思子), 맹자(孟子) 등 4성(四聖)과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등 21위를 좌우로 배열하고 이보다 한 단계 급이 낮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중국 유현(儒賢) 94위, 우리나라 위인 동국 18현을 각각 봉안했다. 이들에 대한 제사는 매년 봄가을 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봉행한다.

문묘 종사는 유학의 도통과 관련되어 있는데, 도통론은 도(道)가 계승되어 내려간 정통을 밝히는 논리이다. 유학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원리이자 질서인 도가 선택 받은 성인에 의해 현실 사회에서 구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시대를 이어 가며 등장하여 도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유학에서 도통론이 본격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송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송과 남송, 원을 거치면서 조선에 유입된 주자학은 국가 이데올로기로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도통론은 그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 우리나라 지식인들인 ‘동국 18현’은 누구이며 어떤 사유로 문묘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때 설립된 태학이다. 태학에도 문묘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이 고구려 문묘가 우리나라 문묘의 시초로 본다. 그 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714년 신라 성덕왕 13년에 왕자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공자와 10철, 그리고 공문(孔門) 72제자의 화상을 가져와 왕명에 의해 국학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우리나라 사람을 처음으로 문묘에 배향한 것은 고려 시대 때인 1020년(현종 11)이었다.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유교 실력으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이 그 주인공이다. 2년 후인 현종 13년에는 불교가 성행하던 신라에서 유교를 학습하고 실천한 설총을 향사(享祀)했다. 이어 1319년(충숙왕 6)에는 주자학을 학습하고 국학을 진흥시킨 안향이 포함됐다. 고려 말의 대학자이며 충신이었던 정몽주는 조선 왕조에 들어와 100여 년이 지난 1517년(중종 12)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전 왕조의 충신을 표창하여 배향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그가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창시자이며 강상의 표상으로 추앙되어 성균관 학생들과 관료들의 끈질긴 요청으로 실현되었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인재양성의 요람인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문묘를 설치해 주자학의 발전에 기여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명 학자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학생들의 사표로 삼았다. 성균관과 향교에 모셔지는 학자들을 ‘문묘해향공신’이라고 부르며 최고의 영예와 권위를 부여했다.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국가에서도 그 후손들을 특채하는 등 특별하게 대접했다.

따라서 문묘에 어떤 인물을 올릴지 결정하는 향사의 문제는 늘 국가의 중대사가 됐다. 문묘배향공신은 성인의 경지에 올랐거나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도달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이었다. 조선조 전반에 걸쳐 향사의 대원칙은 도학 즉, 성리학의 정통성에 있었다. 이것은 여러 성향을 지닌 다양한 유현들이 배향된 중국과는 대조를 이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를 두고 학파, 정파 간 대립이 결부되면서 적잖은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서 문묘종사 논의가 처음 진행된 시기는 세종 대이다. 당시 문묘 종사 대상자로 논의된 인물은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권근(權近)이다. 태종이 즉위한 뒤, 제거된 정도전(鄭道傳)의 공백을 메우면서 권근이 학문적 주도권을 갖게 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권근 계열의 문묘 종사가 논의된 것이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추구하던 태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권근 계열이 왕조의 건국 시기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이들이 비록 태종 대 국가의 학문적·이념적 측면을 관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더라도 그들의 역할은 왕권의 통제 안에 머물러야만 했다.

문묘 종사가 다시 주장된 것은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 세력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들은 정몽주-김굉필(金宏弼)의 문묘 종사를 요구하였다. 정몽주는 태종 이래 전조(前朝)의 충신이란 명분으로 국가적인 추승 사업의 대상이었다. 중종 대의 사림은 국가가 인정한 충신의 전범인 정몽주의 이미지에 도학의 전승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김굉필과 함께 문묘 종사를 추진하였다.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이며 무오사화의 희생자였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여 성현의 지위에 올리면 세조와 연산군의 자의적 왕권 행사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 세력에게 이념적 정통의 권위까지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사림은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은 자신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해 줄 뿐만 아니라 왕권의 독단을 견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이념인 문묘 종사를 포기하지 않고 정몽주-김굉필로 이어졌던 도통의 계보를 발전시켜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도학 계보’를 창출하였다. ‘조선 도학 계보’는 선조 초년에도 상당히 유포되어 조광조의 추증 및 문묘 종사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김굉필-정여창(鄭汝昌)-조광조, 이언적(李彦迪)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4현’이다. 이들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인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선조 대에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사림은 선조에게 끊임없이 4현의 문묘 종사를 요구하였다. 이는 명종 말기 이황(李滉)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선조 원년 이미 4현의 문묘 종사가 요청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포함한 ‘5현’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1604년(선조 37) 이후 왜란으로 불탔던 문묘가 재건되는 것을 계기로 5현의 문묘 종사가 다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선조는 오히려 주자학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용인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5현 종사를 좌절시키려 하였다. 선조에 의해 거부된 문묘 종사는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요구되었다. 이때는 성균관 유생뿐 아니라 지방의 유생들도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예조, 대간, 대신들도 그 의견에 동조하였다. 결국 1610년(광해군 2) 국왕의 결정에 따라 5현 종사가 결정되었다. 즉위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국왕으로서 정통성에 문제가 있던 광해군은 5현 종사 결정을 통해 사림 세력 전반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한편 1611년(광해군 3)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제자인 정인홍을 중심으로 남인인 이황과 이언적을 문묘에서 퇴출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해 큰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이른바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정인홍이 스승 조식이 이황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이언적의 과오까지 지적하면서 발단되었다. 이 사건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인 조식이 5현에 포함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그러나 오히려 유생들의 비난과 저항을 받아 정인홍 자신은 청금록에서 이름이 삭제되었고, 조정은 한동안 혼란에 빠져 대북 정권에 큰 타격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의 당파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을 문묘에 배향시키려고 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 세력이 집권하자 그들의 사상적 지주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올리자는 논의가 제기됐다. 서인들의 빗발치는 요청에도 인조는 서인의 독주를 막을 속셈으로 영남사림을 이용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숙종은 남인 집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경신환국을 단행해 남인을 몰아내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6년 뒤인 1689년(숙종 15)에 문묘에서 출향(黜享: 위판을 퇴출하고 제사에서 제외하는 일)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다시 종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우리나라 인물로는 유일하게 이름에 ‘자(子)’를 붙여 ‘송자(宋子)’로까지 불리면서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宋時烈)의 역할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이이와 성혼의 추봉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1681년(숙종 7)에는 자신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의 종향을 청원해 오랜 논쟁 끝에 비록 자신의 사후이기는 하지만 결국 1717년(숙종 43)에 성사시켰다. 김장생이 배향된 그해, 전라도 유생들이 김장생의 제자인 동시에 ‘양송(兩宋)’으로 불렸던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의 배향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노론계의 지지로 즉위한 영조 32년(1756년) 양송의 종사도 최종 승인되었다.
결과적으로 인조대 이후 비집권층이 된 영남의 남인 계열에서는 단 한 명의 배향공신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나마 영조 대부터는 1764년(영조 40)에 종사된 박세채(朴世采)를 제외하면 전부 노론 계열이다. 소론인 박세채는 탕평론을 주장한 것이 왕에게 높게 평가받아 가까스로 추봉됐다.

18현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라의 2현인 설총과 최치원, 고려 2현인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에서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이다. 이중 선조대의 문인인 김인후는 1796년(정조 20)에,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헌과 인조대 문인인 김집은 1883년(고종 20)에 각각 향사됐다.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관계로 송시열의 스승이라는 이유에서 종향됐다. 이들의 집안인 광산 김씨는 한 가문에서만 2명의 배향공신을 배출함으로써 조선후기 최고의 명문가로 크게 주목받았다.

18현에 선정된 인물들은 모두 가문이 좋다거나 벼슬이 높아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벼슬과 출세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해 역사책에서조차 흘려버리는 당대 석학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났느냐, 누가 더 유명하냐가 아니다.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아야 했다. 그래서 옛말에 “정승 10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 종사 현인(賢人) 1명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18현 중에는 화려한 삶보다는 불우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 사화나 정변에 휘말려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거나, 초야에 묻혀서 학문에만 전념해 존재와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들의 사상과 학문의 세계를 알고, 삶을 들여다보고 본받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신문화를 살찌우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