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에 배향된 아버지와 아들,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문묘에 배향된 아버지와 아들,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정동길이 만나는 사거리 지점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보인다. 그 입구를 따라 정다움이 느껴지는 좁다란 숲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나타난다. 표지석에는 ‘김장생, 김집 선생 생가터’라고 되어 있고, 그 설명에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禮學)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이 태어나신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보다 한 세대 늦게 태어난 김장생은 그 시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혔던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에게서 예학을 배우고, 율곡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특히 성리학의 중추를 이루는 예학의 깊이가 깊어 예학의 태두로 칭송받았다. 그의 아들 김집은 부친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 추앙받았다.
문묘에 모신 여러 성현 가운데 ‘동국 18현’이 있다. 신라시대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시대의 안향, 정몽주, 그리고 조선시대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학문과 도덕의 수준이 깊고 높아 백성들이 하나같이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인물들이다. 그들 가운데 부자가 함께 배향된 경우는 김장생, 김집 부자가 유일하다. 조선시대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대대손손 가문의 자랑이었는데 김장생, 김집 부자는 함께 배향되는 더 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누린 것이다.
그들 부자는 충청도 연산(논산)의 향리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아버지 김장생은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해, 그의 거처는 이름난 연산서당(連山書堂)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했다. 선비들의 눈에는 아버지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아들 김집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1606년(선조 39) 전라도 고부 출신의 선비 권극중(權克中)은 두 달 동안 연산서당에서 머물면서 김장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스승 부자의 조화로운 삶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서,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정리하여 후세에 남겼다.(〈유사(遺事)〉, 《신독재전서》제20권)

침실이나 서재에 훼손된 곳이 있으면, 신독재 선생이 손수 살펴보고 수리하였는데 흙손질도 직접 하였다……선생(김장생)께서는 준치[眞魚], 식혜, 메밀국수를 즐기셨다. (김집은) 식혜를 끼니마다 챙겨 그릇에 가득 담아 올리고, 국수는 사흘마다 한 번 올리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당시 선생의 집이 매우 가난했다. 그러나 신독재가 음식 일체를 미리미리 준비하여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만일 상에 올릴 고기가 없으면 몸소 그물을 들고 서당 앞 시냇가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왔다. 밭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일이며 요역(徭役)을 바치는 일 등 집안의 모든 일을 손수 다 맡아서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 타시는 말도 살찌게 잘 보살폈고, 안장과 굴레 등도 항상 빈틈없이 손질하였다. 다니시는 길까지도 항상 깨끗이 쓸었다. 울타리 밑까지도 항상 손을 보았다. 이처럼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온갖 일을 묵묵히 차분하게 다 하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아들 김집은 효자였다.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 역시 권위를 부리거나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권극중은 김장생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사계 선생은 덕성이 얼굴에 넘치고, 기상이 온화하고 단아하셨다. 가까이 모시고 있노라면,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 김장생과 김집 부자가 함께하는 공간은 화기애애했다. 김장생과 김집의 수제자였던 송시열의 회고담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송시열, 〈어록〉, 《신독재선서》제18권)

선생(김집)이 서제(庶弟, 배다른 동생)와 함께 노선생(김장생)을 모시고 계셨다. 마침 서제는 참봉 윤재(尹材)에게 답장을 쓰고 있었는데, 상대를 ‘존형(尊兄)’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선생은 ‘세상 풍속이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서제가 고쳐 쓸 때까지 (선생은) 온화한 말로 거듭 타이르셨다. 노선생께서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당시 선비들은 아들 김집을 선생, 아버지 김장생을 노선생이라고 불렀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 김장생은 매사에 개입을 자제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두 아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면서 김장생은 아들에게도 예를 다하였다. 아들이 질문하면 병상에 누워 있다가도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리 가까운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고 해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인지 김집은 40여 년 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크고 작은 예법을 철저히 배웠다. 윗방의 아버지와 밥상을 따로 했지만 아랫방의 김집은 윗방에서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결코 밥상을 물리지 않았다.
이처럼 평화롭고 정겨운 연산서당의 풍경과 달리 김장생 부자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김장생은 본래 병약했다. 1558년(명종 13)에 김장생은 열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 김계휘(金繼輝)는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시골로 쫓겨난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 김호(金鎬)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라야 했다.
김장생은 13세에 송익필에게 배웠다. 송익필은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학문이 고명했던 이이와 성혼도 예에 관한 문제는 그에게 물었을 정도로 대가였다. 그리고 김장생이 이이를 찾아 배움을 청했을 때 나이가 스물이었다. 이이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고 스스로 회고할 정도로 그의 영향은 컸다. 또 33세에는 성혼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이로서 김장생은 서인 학문의 기초를 세운 세 사람의 학문을 고루 섭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1575년(선조 8)에 후배 사림이 동인(東人)을 형성하고 선배 사림이 서인(西人)을 형성하여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된 이후, 그의 스승 이이, 성혼, 송익필 등이 서인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동인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송익필은 서출(庶出, 서자 출신)이었던 부친 송사련이 안당(安塘) 부자를 고변하여 멸문시킨 신사무옥(辛巳誣獄) 때문에 사대부, 특히 동인에게 질시 받았다. 1586년(선조 19)에 동인은 그의 집안을 도로 천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기축옥사(己丑獄死)로 그는 신분을 회복했으나, 그 배후로 지목되어 다시 정쟁의 중심에 섰다. 이후 송익필은 유배와 사면을 거듭하다 말년에는 불우하게 여생을 마쳤다. 김장생은 스승의 집안이 선비에게 죄를 끼쳤다는 하자는 인정했지만, 법을 어기면서까지 가해지는 무고한 핍박에는 반대해 말년까지 스승의 뒤를 돌봐주었다.
동인들은 이미 작고한 김장생의 아버지까지 탄핵했다. 그는 참혹한 정치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현실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이후 몇 차례 지방관으로 부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미처 난을 피하지 못한 김장생의 장남 김은(金檃) 내외와 손자가 모두 실종되었다. 또한 서제(庶弟) 김연손(金燕孫)은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김장생 집안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둘째 아들 김집이 곁에 머물렀지만, 김집의 아내는 병이 심해 집안의 대소사를 조금도 돌보지 못했다.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장생은 이미 큰아들과 큰손자를 잃었기 때문에 김집이 새장가를 들었으면 했다. 그러나 김집은 재혼을 거부하고 앞서 첩으로 맞이한 이씨(이이의 서녀)와 해로할 생각이었다. 김장생은 아들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김장생 일가는 더 큰 위기를 맞았다. 문경 새재에서 일어난 강도사건을 계기로 집권층인 대북파는 일곱 명의 서자를 강도 혐의로 체포해서 고문을 가하고, 그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며 역모죄로 몰았다. 김장생의 서제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김장생에게도 역모 혐의가 씌여졌지만, 천신만고 끝에 풀려났다. 그러자 그는 연산으로 내려가 ‘시골집에 숨어 살며 문을 닫아걸고 외부인의 방문을 사절하고, 오직 경서(經書)만을 쌓아두고 읽는’(김집, 〈연보〉) 생활을 하였다. 김집도 그 곁을 지키며 평생 아버지를 봉양하며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김장생은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10여 년간 학문 연마에 몰두했고, 강학을 통해 수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훗날 강학을 하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돈암서원이 세워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사정은 조금 달라졌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길에 올랐는데, 고령의 김장생은 나아가 인조를 뵈었다. 김장생의 나이 어언 75세, 아들 김집도 50세였다. 얼마 뒤 인조는 김장생 부자에게 관직을 내렸다. 김장생은 학자로서 고명했기에 실권은 없지만 명예로운 자리에 등용되었고, 김집에게도 부여 현감 자리가 주어졌다.
1627년(인조 5) 가을, 김집은 벼슬을 내려놓았다. 그 뒤 전라도 임피(군산)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금방 사직했고, 전라도사에 임명되었을 때는 부임조차 하지 않았다. 김장생 부자는 인조 초기부터 반정공신들과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이 집권 주류가 되었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정에 참가한 서인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들이 비록 ‘산림을 받들어 중용한다.(즉, 재야에 있는 선비들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한다.)’고 내세웠지만, 그 말에는 산림은 객체이고 권신인 그들이 여전히 정국을 주도한다는 의미도 깔려 있었다. 그들은 이내 크고 작은 정파로 분열했는데 공신 대 비공신(功西와 淸西), 세대간 대립(老西와 少西) 등이 그것이었다.
청서(淸西)에 속했던 김장생은 인조와도 정면충돌했다. 1631년(인조 9) 인조는 자신의 생부 정원대원군을 추숭하여 왕호(王號)를 부여하려 했다. 인조가 생부를 높이고자 한 데는 그의 효심도 있었겠지만, 정치적 계산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생부의 권위를 높여 ‘반정’으로 집권한 자신의 허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조를 도와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은 대부분 추숭에 찬성했다. 그들과 인조는 정치적으로 같은 배를 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1632년(인조 10)에 정원대원군은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예학의 태두로 손꼽히던 김장생은 끝까지 반대했다. 왕의 생부를 높여 ‘대원군’이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왕호까지 부여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요, 학문적으로는 마땅한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인조는 김장생이 학문을 빌려 왕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판단했다. 격노한 인조는 교서를 내려 김장생의 불충함을 꾸짖었다. 조정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장생은 1631년 8월 8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김장생을 성덕군자(成德君子)라 불렀고,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차마 직접 부르지 못하고 그가 살던 지명을 따서 ‘사계선생(沙溪先生)’이라 부르며 우러렀다.
김장생이 죽은 후에는 아들 김집이 그의 역할을 계승했다. 김집은 아버지의 《의례문해》를 교정하고 《상례비요》를 중간했다. 그리고 《상례문해속(喪禮問解續)》과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를 저술해 예학을 더욱 발전시겼다. 교육도 꾸준히 진행했다. 그의 문인은 송시열·송준길을 비롯해 이유태·윤선거 등인데 부친과 많이 겹친다. 사실 김장생 말년의 제자는 김집이 가르친 경우가 많았다.
김집은 아버지처럼 문과를 통하지 않고 천거로 관직에 올랐지만 실제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병자호란 이후 산림으로서 잠시 경연(經筵)에 참여했지만, 그 비중은 미미했다. 그가 정계에서 의미 있게 활동한 시기는 효종이 즉위하고부터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산림을 대거 등용하자, 이미 70대 중반에 접어든 김집은 ‘대로(大老)’로 불리며 큰 기대 속에 출사했다. 당시 대로로 불린 사람은 김집 말고도 김상헌(金尙憲)이 있었다.
김장생, 김집 부자는 율곡 이이의 학맥을 공고히 하고 예학의 태두로 한 시대와 산림정치를 열었다. 그들 대에 체질이 바뀐 서인의 일부는 17세기 후반 노론으로 이어졌고, 18, 19세기에도 사대부층의 주류를 이어갔다. 김장생 부자에 대한 존숭이 높아감은 불문가지다. 김장생은 1717년(숙종 3), 김집은 1883년(고종 20)에 각각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부자의 문묘 배향은 한국 역사상 그들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