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흡(金昌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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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년)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조선 시대 산수 기행문학과 관련되어 주목받는 시인이기도 하다.(참고 이경수 글, 57쪽) 고위 관직을 연임한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며, 파주목사,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김광찬의 손자다. 그는 집안 대대로 고위 관리를 역임한 안동 김씨 가문 출신이었으나 당쟁의 화를 피해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를 쓰며 산수를 즐기고 은둔생활을 추구하였다. 이단상(李端相)의 제자로 저서에 『삼연집』이 있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호락논쟁에서 낙학파의 이론 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653년(1세, 효종 4년)

윤7월 5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임), 서울에서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증조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김광찬(金光燦)은 동지중추부사 증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손위 형으로 영의정과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김창집(金昌集), 예조판서·지돈령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 있다. 동생으로 김창업(金昌業)과 김창즙(金昌楫)이 있다. 어머니는 해주 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로, 안정 나씨(安定羅氏)이다.

 

1665년(13세, 현종 6년)

동몽교관 김시량(金時亮)에게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부귀와 화려한 것을 싫어하였으며, 1667년경부터 형들과 함께 이단상(李端相, 1628∼1669)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8년(16세, 현종 9년)

1월, 이세장의 딸 경주 이씨와 결혼하였다. 2월, 할아버지 김광찬이 사망하였다.

 

1670년(18세, 현종 11년)

큰 아버지 김수증이 당쟁으로 불안해진 정국에 대비하여 춘천에 농수정사를 짓고 장차 은둔할 장소를 마련하였다. 김수증은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바 있다.

 

1671년(19세, 현종 12년)

형 김창협과 천마산, 성거산, 금강산 등지를 유람하였다. 이 때 금강산 여행은 맨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일생동안 총 6차례의 금강산 여행을 했다. 여행할 때 수시로 시를 남겨 후대에 그는 금강산 기행 한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힌다.(이경수 57쪽)

 

1673년(21세, 현종14)

2월, 진사시에 응시하여 1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산기슭에 낙송루(雒誦樓)를 세우고 독서하며 지냈다. 이즈음 그는 수련서, 참동계 등 도교 책을 가까이하고 시문에 힘을 쏟았다.(이경수 58쪽)

이해에 속리산, 백마강을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다음해에는 평양을 유람하였다.

 

1675년(23세, 숙종 1년)

가을, 인제 한계령을 유람하였다. 9월, 영암에서 근무하는 부친을 찾아뵈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그곳을 방문하였다. 10월, 월출산, 죽림정 등을 유람하고 시를 썼다.

그는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가 이러한 취미를 갖게 된 것은 가문의 정치적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아버지 김수항은 남인과 서인이 서로 싸우는 가운데 서인의 지도자 위치에 서있었다. 큰아버지 김수증, 작은 아버지 김수흥 역시 고위관리였다. 그만큼 그 가문은 당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서 항상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김창흡은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은둔 생활을 고민하고 있었다.(이경수 57쪽)

 

1676년(24세, 숙종 2년)

봄에 도갑사, 만덕산 백련사, 북한산 등을 유람하였다. 6월, 둘째 형인 김창협과 같이 삼각산 중흥사 들어가 독서를 하였다. 11월, 남산에 은거하는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1638∼1689)를 찾아가 뵙고 강학하였다.

1678년(26세, 숙종 4년)

2월, 형 김창협과 중흥사에서 책을 읽었다. 9월, 부친이 근무하는 철원을 방문하고, 겨울에 철원 보개산 대승암에 머물렀다.

 

1679년(27세, 숙종 5년)

3월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7월에 철원군 용화사에 거처하면서 삼부연의 절경을 즐기고 스스로 호를 ‘삼연(三淵)’으로 정하고 은둔 생활을 계획하였다. 김양행은 그를 일러 “거친 옷에 짚신을 어부와 아이들 사이에 섞여 사니 사람들이 문벌세가의 자제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김창흡은 은둔자의 생애를 살려고 결정을 한 상태였다.(이경수 59)

이즈음에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읽고 「후천도설(後天圖說)」을 지었다.

 

1680년(28세, 숙종 6년)

3월, 용화촌의 석천사를 유람하였다. 4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여, 부친이 복권하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면담했다. 이즈음 형 김창협이 장원 급제하고 김창집도 관직에 나아갔다. 이때부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부친이 유배당할 때까지 김창흡 가문은 실세를 회복하고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1682년(30세, 숙종 8년)

백악산 남쪽에 낙송루를 짓고 문학인들과 함께 시모임을 열었다. 양주 송천, 속리산, 여주 등을 유람하였다. 우의정 김석주(金錫胄)가 문장의 탁월함과 품행의 훌륭함을 내세워 김창흡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1683년(31세, 숙종 9년)

가을, 조계사, 봉흥사를 유람하였다. 12월, 동생 김창립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송시열이 거쳐하는 수원 만의촌을 방문하였다.

 

1684년(32세, 숙종10년)

가을에 양주의 일사정, 춘천의 청평산 운곡 등지를 유람하고 삼부연으로 들어갔다.

 

1685년(33세, 숙종 11년)

졸수재 조성기 선생에게 편지하여 태극도(太極圖)를 논하였다. 4월,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이해에 금강산, 미호(渼湖) 등지를 유람하였다. 금강산 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다음해 한강 상류의 저자도를 유람하고 부친의 노후를 위해서 그 곳 현성(玄城)에 정자를 지었다.

 

1688년(36세, 숙종 14년)

3월, 청풍, 단양, 영월, 제천 등을 유람하였다. 가을에 현성에 머물렀다.

 

1689년(37세, 숙종 15년)

2월,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진도로 유배되었다. 김창흡도 부친을 따라갔으나, 4월에 부친이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경기도 양주 율북리 운곡에서 장사지냈다. 다음해 작은 아버지 김수흥도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김창흡은 설악산으로 가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691년(39세, 숙종 17년)

6월, 부친의 복을 마쳤다. 부친이 사약을 받은 이후에 김창흡은 극심한 좌절과 혼돈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심리적인 의지처로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글에서 “만사는 끝났고, 유일한 치유책은 참선의 희열에 탐닉하는 것뿐”이라고 하였으며, “유교든지 불교든지 진실로 힘을 써서 오묘한 데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유독 나의 신세가 불교의 말에 감동되어 무엇인가 느끼게 하여 얼핏 의지할 것이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유호선 89쪽)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동생 김창즙이 편지를 보내와 경계하였다. 다시 『중용』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

 

1692년(40세, 숙종 18년)

여름, 양구에서 지냈다. 8월에, 설악산 곡백담에 들어갔다. 11월에 삼부연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음해 봄에 봄, 양근 국연에 거처하였다가 9월에 양근의 벽계로 이사했다.

 

1694년(42세, 숙종 20년)

4월, 부친의 명예와 관작이 회복되었다. 형 김창집도 명예를 회복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김창흡은 여전히 산수를 유람하면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논맹정의(論孟精義)』,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을 읽었다. 다음해 강릉을 거쳐 신흥사, 상원사 등을 유람하고, 양주 목식동으로 들어갔다.

 

1696년(44세, 숙종 22년)

5월,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서연관에 선발되었다. 겨울에, 양주 석실의 송백당에 머무르며 형 김창협과 강학하였다. 이 다음 봄에 벽계로 돌아왔으며, 「지자설(智字說)」을 짓고, 가을에 인제 합강정을 유람하였다.

 

1698년(46세, 숙종 24년)

백천군수로 있는 형 김창집을 방문하고,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을 찾아가 보았다. 큰형 김창집이 강화 유수로 임명되자, 김창흡은 형의 임지를 방문하고 강화 마니산을 돌아보았다. 3월에 송백당에 머물렀다. 겨울에 다시 강화도에서 근무하는 김창집을 방문하였다.

이해 설악산에 은거지로 백연정사를 세웠다. 다음해 겨울에는 적성사에서 독서를 하였다.

 

1700년(48세, 숙종 26년)

봄, 강화에서 선친의 문집 『문곡집(文谷集)』의 인쇄에 참가하였던 장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8월, 문경, 속리산, 화양서원, 선유동 등지를 유람하였다. 9월에 형 김창집이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다. 김창흡은 그 뒤 숭양서원, 화담서원을 방문하였다.

 

1702년(50세, 숙종 28년)

3월, 목식동에 있으면서 독서를 하였다. 4월, 벽계로 돌아왔다. 신유(申愈)에게 편지를 써서 학문하는 요체를 논하였다. 10월에 양주 묘적사, 속리산 용유동 등지를 유람하였다.

 

1703년(51세, 숙종 29년)

2월,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3월, 이덕수에게 편지하여 우암 송시열과 주자를 비난한 박세당(朴世堂)을 비판하였다. 6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1704년(52세, 숙종 30년)

이덕수(李德壽)에게 편지를 한 일로 소론에서 비난이 일자 집안의 손자뻘 되는 김명행(金明行)에게 편지를 하여 변론하였다. 송일원(宋一源)에게 편지를 써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의 두 가문 자손들이 서로 논쟁하는 것을 훈계하였다.

 

1705년(53세, 숙종 31년)

8월, 세자익위사 익위가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9월, 양양, 강릉, 간성 등지를 유람하고, 설악산으로 돌아왔다. 송일원에게 편지하여 윤증(尹拯)의 문도들을 비판하였다. 이해 설악산에 은거지로 사용할 벽운정사를 조성하였다.

 

1706년(54세, 숙종 32년)

4월, 관서 지방을 유람하였다. 7월, 삼주에 있는 형 김창협을 찾아갔다. 8월, 부인 이씨가 사망하였다. 다음해 가을에 10월, 청평산을 거쳐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이 때 설악산 벽운정사가 완성되었다.

1708년(56세, 숙종 34년)

2월, 두류산을 유람하고, 안동을 거쳐 영남의 여러 곳을 유람하였다. 4월, 형 김창협이 사망하였다. 9월, 설악산으로 돌아와 곡운으로 들어갔다. 10월, 벽운정사가 불타 심원사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해 가을에 설악산 영시암을 완성하고, 「석담육곡(石潭六曲)」이라는 시를 지었다.

 

1710년(58세, 숙종 36년)

봄, 강릉 오죽헌, 간성 운근정 등을 유람하였다. 부친의 행록(行錄)과 부인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8월에 네 번째로 금강산에 올랐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빈 암자 찾아와 고요함을 배우네.

홀로 누워 선방의 문을 닫았다.

조용한 정원, 물통에 샘물 떨어지고

처마에 부는 바람, 떡갈잎이 날린다.

멍하게 있을 뿐, 누구와 벗하겠는가.

담담한 마음 뿐 돌아가고 싶지 않네.

길에서 만났네. 시 짓는 스님들

솔잎차로 배고픔을 달래주는구나.

1711년(59세, 숙종 37년)

포천, 김화, 금강산 등지를 유람하였다. 설악산의 갈역정사(葛驛精舍)가 완성되었다. 이현익(李顯益)이 『중용』의 ‘미발(未發)’에 대해서 묻자 거기에 답하였다.

김창흡은 인간의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 즉 미발(未發)의 상태는 오직 착하기만 할 뿐이라는 순선(順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원진, 권상하와 같은 호학파(湖學派)가 미발 상태에도 본연의 성(착한 본성)과 기질의 성(악한 본성)이 함께 있다는 주장과 대립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미발순선설’을 인물성동론과 함께 ‘낙학(洛學)’으로 정의하였다.(이종우 109쪽)

이해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에 다음과 같은 「장안산영루감흥(長安山映樓感興)」이라는 시가 있다.

 

한밤에 어찌해서 일어나 머뭇거리나.

흐르는 물은 가는 사람 붙잡지 않네.

유람하던 즐거움 시를 지어 담아두고

잠자리 남겨 둔 누각에 달빛만 비치네.

종소리는 서리 내린 가지에서 울리고

붉은 기운은 산 중턱을 가로질러 흐르네

닷새 동안 산에 빠져 술도 잊었는데

한잔 들어 신선이 사는 곳에 감사드린다.

 

1712년(60세, 숙종 38년)

서울에 가서 석교에 갔다가 돌아왔다. 11월, 사은사로 가는 형 김창집을 송별하고, 설악산으로 돌아왔다.

 

1713년(61세, 숙종 39년)

봄, 영랑호, 신흥사 등을 유람하였다. 5월, 동생 김창즙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0월, 금강산 백화암에 머물렀다. 가족들을 사별한 자신의 노년의 슬픈 심경을 달래면서 다음해 봄까지 금강산에 체류하였다. 이때 승려들과 주역을 논하였다.

 

1714년(62세, 숙종 40년)

2월, 설악산으로 돌아왔다. 5월에 벽계에 머물렀다. 11월, 김화 수태사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평강 부석사로 이주하였다.

 

1715년(63세, 숙종 41년)

2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3월에 이천의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평강 희령을 돌아보았다. 여름, 곡운 화음동에 거처하였다. 가을, 곡운의 마을 입구에 곡구정사가 완성되었다.

 

1716년(64세, 숙종 42년)

2월,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상소문으로 비난을 받은 형 김창집에게 편지하여 앞으로 일을 논하였다. 배움을 청한 유숙기(兪肅基)에게 답서를 보내 사양하였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영평의 원통사와 곡구정을 방문하였다.

 

1717년(65세, 숙종 43년)

1월, 보개산 영은암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하였다. 2월에, 광주 서석산, 무주, 용담 등지를 유람하였다. 7월, 이재형(李載亨)에게 편지하여 사람과 동물의 본성에 대해서 논하였다. 9월, 곡운으로 돌아왔으며 10월에는 영평 명학재에 머물렀다.

 

1718년(66세, 숙종 44년)

2월, 조정에서 상을 당하여 복제를 물어왔으나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윤8월, 오대산을 유람하고 벽계로 돌아왔다. 11월, 영평 백운사에 머물다가 명학재로 돌아왔다.

 

1719년(67세, 숙종 45년)

1월, 장암에 들러 이희조(李喜朝)를 방문하고 벽계로 돌아왔다. 2월,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곡운으로 들어와 『독서일록(讀書日錄)』을 남겼다. 9월, 은진을 거쳐 고산 안심사에 머물렀다. 10월에 지평, 장령이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 임금으로부터 주자 관련 서적을 하사 받았다.

 

1720년(68세, 숙종 46년)

3월, 아들 김양겸(金養謙)이 근무하는 곳을 방문하였다. 다음 달에 구월산을 유람하였다. 6월, 숙종이 사망한 뒤 조정에서 복제 문제로 의견을 물어왔으나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김창집에게 편지하여 유생의 복제를 논하였다. 7월, 곡운으로 갔다. 동춘당 송준길의 손자 송요좌(宋堯佐)에게 편지하여 연보 발문의 부탁을 사양하였다.

 

1721년(69세, 경종 1년)

7월에 집의, 10월에 집의 겸 시강원진선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월, 동생 김창업(金昌業)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거제로 유배 가는 김창집을 전송하였다.

 

1722년(70세, 경종 2년)

2월 18일, 김창집의 편지에 답장을 하였다. 2월 19일, 절필시(絶筆詩)를 짓고 이틀 뒤인 21일, 사망하였다. 이날 『경종실록』에 이러한 졸기(卒記, 사망에 즈음한 기록)가 실렸다.

 

“세제 시강원(世弟侍講院) 진선(進善) 김창흡이 사망하였다. 김창흡의 자는 자익이고, 호는 삼연으로,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젊은 날 협기를 드날렸으며 약관(弱冠)의 나이에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장자의 글을 읽다가 마음속에 홀연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 사이에 방랑하며 고악부(古樂府)의 시도(詩道)를 창도하여 중흥시킨 시조가 되었다. 또 도교와 불교에 탐닉하여 오랫동안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집안의 재앙을 당하자 비로소 그 형 김창협과 함께 학문에 종사하니, 그 견해가 때로 크게 뛰어났다. 만년에는 설악산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고 『주역(周易)』을 읽었다. 스스로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이른 곳이라면 나 역시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괴팍한 데 가까워 무릇 시론(時論)에 대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긴 글을 써서 당국자를 배척하였다. 말이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의 조상을 비판하여 자못 처사(處士)로서 의논을 함부로 한다는 이름을 얻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수여하고자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망하니, 나이 70세이다.”

 

4월, 포천 묘곡에 장사 지냈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에 그의 묘지가 보존되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석실서원, 경기도 양평군 미원서원, 덕원의 충곡사, 경상북도 울진군 신계사 등에 배향되어 있다.

김창흡은 시를 잘 쓰고 성리학에 밝아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는 형인 김창협과 같이 이황의 주리설과 이이의 주기설을 절충하였다. 다만 율곡 이이는 착한 정(情)이 맑은 기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김창흡은 김창협의 주장을 따라 그것은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저서에 『삼연집(三淵集)』, 『심양 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참고자료>

『경종실록』 6권, 경종 2년(1722년) 2월 21일 졸기

「김창흡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이경수, 「삼연 김창흡 한시의 금강산 표현」, 『인문과학연구』44, 2015.03

이종우, 「삼연 김창흡의 미발설과 호락논쟁에서 그 위상」, 『열상고전연구』63, 2018

유호선, 「김창흡의 불교적 사유와 불교시」, 『한국인물사연구』2, 2004.09

조준호, 「김창흡」, <디지털포천문화대전(http://pocheon.grandculture.net/)>, 2019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