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만(奇宇萬) 3


기우만(奇宇萬) 3                                                       PDF Download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은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학자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을미사변 직후 호남창의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손자로 그 학문과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함) 사상을 계승하여 그것을 항일의병 운동으로 구현하였다. 개화기 호남의 대표적인 유림으로 평가된다. 저서로 『송사선생문집』이 있다.

 

1846년(1세, 헌종 12년)

8월 17일, 장성부 탁곡(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소곡리)에서 부친 기만연(奇晩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幸州, 경기도 고양)이며,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혹은 학정거사(學靜居士)이다. 나중에 참봉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853년(8세, 철종 4년)

여름에, ‘고문(古文)’을 읽었다. 12월, 할아버지 노사(蘆沙) 기정진을 모시고 하사(下沙)로 이사하였다.

 

1854년(10세, 철종 5년)

사서(四書, 논어·맹자·대학·중용)를 읽었다. 13세 경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과 『강목(綱目)』을, 14세 경에는 『심경(心經)』을 읽었다.

 

1861년(16세, 철종 12년)

『주역』, 『예기(禮記)』, 『춘추』 등을 읽었다. 할아버지 기정진을 모시고 갈전으로 옮겨 지냈다.

 

1862년(17세, 철종 13년)

2월에 다시 하사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삭녕 최씨 최인석(崔錫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다음해 여름에 남원의 제암서숙에 가서 처조(妻祖, 부인의 할아버지)인 최정익(崔挺翼)에게 과문(科文, 과거시험에 통용되던 여러 가지 문체의 글)을 배웠다. 가을에 『좌전(左傳)』을 읽었다.

 

1866년(21세, 고종 3년)

할아버지 기정진이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이 시기부터 기정진의 위정척사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외국인들과 통상을 거부하고, 향촌에서 군사를 조련하여 무기를 제작하고 서양세력의 침약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조일형 198-199쪽)

 

1869년(24세, 고종 6년)

여름에 추산정에서 강회 모임을 가졌다. 10월에 승보복시(陞補覆試)에 응시하여 삼장(三場, 초장, 중장, 종장의 세 단계 시험)에 수석을 하였다. 다음해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여름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주역』을 강론하였다.

 

1874년(29세, 고종 11년)

봄에 고양의 선영에 성묘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성환에서 면암 최익현을 만났으며, 전의(全義,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들러 임헌회(任憲晦)를 만나고 계룡산을 유람하였다. 가을에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875년(30세, 고종 12년)

겨울, 고진원의 창촌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월송으로 이사하였다. 다음해 1월에, 부친상을 당하다. 이후 부친을 대신하여 할아버지 기정진을 극진히 모시고 그의 학문을 배웠다.

 

1877년(32세, 고종 14년)

전년에 크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자 기민(飢民)의 구호에 나섰다.

 

1878년(33세, 고종 15년)

4월,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았다. 5월, 할아버지 기정진의 명을 받들어 월송리에 담대헌을 지었다.

 

1879년(34세, 고종 16년)

1월, 김석귀(金錫龜),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 등과 함께 할아버지가 지은 『납량사의(納涼私議)』, 『외필(猥筆)』등을 강론하였다. 12월,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기우만은 이때부터 노사 기정진을 이은 노사학파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노사학파는 호남지역의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활동의 기반이 되었다.(조일형 198쪽)

 

1880년(35세, 고종 17년)

아들 기낙도(奇洛度)가 태어났다. 다음해 여름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정리하였다.

 

1882년(37세, 고종 19년)

4월, 서자(庶子) 기숙도(奇淑度)가 태어났다.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즈음부터 서양과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이 시작되었다. 8월, 익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83년(38세, 고종 20년)

봄에 『노사집(蘆沙集)』을 간행하였다. 11월, 나주의 초지로 옮겨 거처하였다. 12월,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이 내방하였다.

다음해(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거사는 실패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조정은 더욱 수구적으로 변하고 청나라 세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1885년(40세, 고종 22년)

2월, 삼가의 물계로 정재규를 방문하였다. 진주의 월횡으로 가 조성가(趙性家)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리산, 가야산, 수승대 등을 유람하였다. 8월, 김석귀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다음해 7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1888년(43세, 고종 25년)

겨울, 지인들과 월강(月講, 매월 열리는 강학회)을 설치하였다. 다음해 가을, 능주의 정의림(鄭義林)을 방문하였다.

 

1890년(45세, 고종 27년)

정재규, 김현옥 등과 함께 노사 기정진이 지인들과 문답한 글을 편찬하여 『답문류편(答問類編)』으로 간행하였다. 8월, 향음주례를 행하였다.

 

1892년(47세, 고종 29년)

가을, 동복의 물염정과 적벽, 순천의 송광사를 유람하였다. 다음해 11월, 고진원의 중흥동으로 돌아와 살았다.

 

1894년(49세, 고종 31년)

12월, 마을 모임을 열어 동학도를 물리칠 방도를 모색하였다.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다.

 

1895년(50세, 고종 32년)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동학도를 물리칠 방책을 묻자 편지로 답하였다. 이건창(李建昌)이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방문하였다. 윤5월, 동학당을 평정하였다고 하는 『나주평적비(羅州平賊碑)』 비문을 지었다. 이해 8월 명성황우가 시해되고 겨울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소(『乙未疏』)를 올려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복수하고 단발령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을미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머리털을 훼손하라는 명령을 들은 후로부터 문을 닫고 곡기를 끊어서 갑자기 죽어 세상을 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대개 황후(민비)의 원수는 곧 신하들이 함께 와신상담해야 할 자인데 국가의 형세가 날로 깎이어 설욕할 희망이 없습니다. 전장(典章)과 문물은 여러 성조(聖朝)에서 전수된 옛 법도인데 하루아침에 개변하여 다시 회복할 기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훼발령까지 이르니 혼란스러움이 지극합니다.

대개 나라는 망하지 않음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하여 존재하기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람은 죽지 아니함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시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죽는 것이 낫습니다.”

 

1896년(51세, 고종 33년)

1월, 유인석(柳麟錫)의 경기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여 기우만도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2월,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 200여 명의 지사들과 나주로 가서 전열을 정비하고, 호남대의소장(湖南大義所將)이 되었다. 상소를 올려 의거를 보고하였으나 전달되지 않았다. 사방에 통문을 돌려 30일 광주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으나, 27일 조정에서 선유사 신기선 등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통곡하고 해산하였다.

8월, 국치를 갚지 못하자 삼성산 꼭대기에 삼산재를 짓고 그곳에 줄곧 머물러 외부활동을 끊었다.

이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기우만, 『송사집』권1 「漫題」)

 

이제부터 우직하게 처세를 하고 싶지만

커다란 집을 누가 기둥하나로 버티겠는가.

서툰 목수가 제 손만 다치는 것을 이제 알고서

목을 움츠리고 산에 들어와 썩은 선비가 되었다.

 

다음해 10월에 명성황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기우만은 산에 올라 통곡하고 삿갓이며 의복, 이불을 모두 흰색으로 하여 예를 갖추었다. 그 즈음 고종이 사람을 보내서 귀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 당시 지인 조성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엎어진 둥지에 온전한 알이 없듯이, 현인군자들이 유리되고 도망쳐 숨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저 집에 사는 제비가 어찌 화가 장치 미치려 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끌끌 차게 합니다. 군자는 곤궁 속에서 형통하니 바로 이때가 그렇습니다. 지리산 바위동굴에서 크게 『춘추』를 읽는다면 어찌 꼭 노중련(鲁仲连,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처럼 동해를 밟고, 백이(伯夷, 은나라 말엽의 사람)처럼 수양산에 오를 것이 있겠습니까? 저의 처신은 그 마땅함을 얻지 못했으니 삼성산 산중으로 들어가 수풀 속에 집을 지어 인생을 마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이 5칸짜리 집을 지어 지난달부터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집과의 거리는 5리로 가깝습니다. 멀리 보낼 편지라 감히 장황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1898년(53세, 고종 35년)

10월, 장성의 담대헌에서 『노사집』을 다시 발간하였다. 다음해 봄에 삼산재 북쪽에 단을 설치하고 앞선 성인들과 스승에게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1900년(55세, 고종 37년)

7월,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고 주임관에 서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다음해 정재규 등과 함께 단성의 신안정사에 간역소(刊役所)를 설치하고 『노사집』의 세 번째 출간을 준비하였다. 그해 11월, 최익현을 찾아뵙고 조부 기정진의 신도비명을 받았다.

 

1902년(57세, 고종 39년)

4월, 영남의 최동민, 권봉희 등이 기정진이 지은 『외필』의 내용을 트집 잡아 통문을 발송하고 『노사집』을 폐기하려고 하였다. 다음해 11월 광주의 주흥동(朱興洞)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1905년(60세, 고종 42년)

1월, 관찰사 이도재가 향약을 설치하면서 도약정(道約正)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乙巳疏』)를 올려 ‘오적(五賊)’의 처단을 청원하였다.

 

1906년(61세, 고종 43년)

1월, 여론을 모아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고자 계획하였다. 동지들과 곡성에서 회합을 가지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여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압송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10월, 의병을 모의했다 하여 왜경에 의해 광주 경무서에 구금되었다.

이때 기우만이 일본 경찰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조일형 215)

 

“1895년 을미년 망극의 변고는 너희가 한 짓이다. 조선의 신민이라면 누가 너희를 진멸시켜 너희의 고기를 먹고 너희의 가죽에 눕고자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바야흐로 동지를 불러 모아 곧장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려고 하였으나 선유사가 와서 회유하여 부득이 해산하고 돌아가 입산하여 토굴을 지어 생활하였다. (중략) 손 안에는 비록 작은 무기도 없지만 흉중에는 항상 만 명의 갑옷 입은 병사가 있다. 강물소리를 들으면 철갑옷을 털어 입고 동쪽(일본)으로 정벌 갈 것을 생각하고, 산수를 보면 거짓 병사로 위장시켜 오랑캐를 축출하고 싶어진다. 비록 온 나라 사람들이 의거를 일으켜 나를 추대하더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살아서는 이씨(조선)의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이씨의 귀신이 되는 것으로 종결지을 것이다.”

 

1907년(62세, 순종 1년)

봄에 ‘을사오적’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영광 경무서에 체포되었다. 4월 5일,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20일에 석방되었다. 다음해 1월에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다 고종이 퇴위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뒤 은둔하였다.

 

1910년(65세, 순종 4년)

지난해(1909년)에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여 의병에 참가했던 호남지역 의사들의 충정을 기렸다.

이해 7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침식을 폐하고 천인(賤人)을 자처하며 사람들을 일체 만나지 않았다. 다음해 3월 남원의 사촌으로 옮겨 가 살았다.

 

1913년(68세)

12월, 부인상을 당하였다.

 

1916년(71세)

10월 28일, 사망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그는 제자들에게 “내 나이가 80을 바라보니 죽는 것은 한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수가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월, 덕만에 장사를 지냈다. 뒤에 순창의 무이산으로 이장하였다. 1928년에 장성의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자료>

기우만, 『송사집』

「기우만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김기림, 「송사 기우만의 시세계 고찰」, 『동양학』60, 2015

박성수, 「기우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조일형, 「松沙 奇宇萬의 위정척사사상과 의병정신 : 상소문과 담판문을 중심으로」, 『용봉인문논총』52,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