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조 최고의 호조판서 이명


인조조 최고의 호조판서 이명

 

이명은 재정 운용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인조, 선조조 최고의 호조판서라는 평이 있다.

“공이 재정을 운용하는 것이 대개 국가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힘썼다. 재화가 값이 천할 때에는 내보내고 귀할 때에 사들여서 그 남는 것을 저축하니, 관직에 있은 지 수년 만에 창고가 가득 찼다.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선조ㆍ인조 이래로 나라 살림을 맡은 사람으로 이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이명(李溟, 1570-1648)은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자는 자연(子淵)이고 호는 구촌(龜村)이다.

 

광해군 초년에 이조정랑을 지내면서 이이첨(李爾瞻)이 세력을 모으는 것에 반대하였고, 1613년(광해군 5)에 김제남(金悌男)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보호하였으며, 이덕형(李德馨)을 두둔한 상소를 지었다고 지목받아 관작이 삭탈되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있다.

“삼사(三司)에서 이덕형 베기를 청할 때에 부제학 이성(李惺)이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공이 응교로 있으면서 원(院)에 들어가 말하기를, ‘이공이 무슨 죄이기에 곧 역적과 함께 같은 법으로 다스리려 하오.’ 하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또 정온과 함께 이덕형을 구하는 소의 초고를 만들었더니, 간당들이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다.”

 

이듬해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전라도관찰사에 특진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 인조의 공주 몽진을 도왔다.

 

이명은 정파로 북인에 속했고 반정의 주체는 서인이었다. 그럼에도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이명이 은밀하게 반정에 동조했음을 알려준다.

“공이 황해 감사로 있을 때, 이귀가 은밀히 반정할 계획으로 공에게 의논하였는데, 공은 거짓 취한 체하며 답하지 않고 작별할 때에 칼 한 자루를 선사하였다.”

이귀가 반정할 계획을 발설했다는 것은 반정에 동조할 여지가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터인데, 필시 이명이 김제남(金悌男)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보호하고 이덕형(李德馨)을 두둔한 상소를 지어 관직을 삭탈당한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 이귀의 계획을 듣고 거짓 체한 체했다는 것은 정파가 북인이라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칼 한 자루를 선사했다는 것은 반정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1623년의 인조반정 때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었는데, 반정 후에 탈출을 기도한 폐세자(廢世子)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어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받았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처음에 이이첨과 결탁하였고 뒤에는 유희분(柳希奮)에게 의지하였다는 죄목으로 관작을 삭탈 당했다.

 

이명이 이이첨과 결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일찍이 어사로 용만(龍灣)에 갔는데, 부윤 이이첨이 날마다 공에게 문후하며 매우 친근하게 하였다. 공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소인이구나.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자다.’ 하였는데, 이첨이 듣고 감정을 품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경기도관찰사로서 전란 수습에 공을 세웠고, 그 뒤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국경방비를 강화하였다. 그 뒤 여러 곳의 관찰사를 거쳐 호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뒤에는 다시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전란 후 고갈된 재정을 잘 수습하였다.

 

국자의 재정을 담당하는 자로서 이명이 진심진력하여 좋은 성과를 냈음을 보여주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이 있다.

“병자년 난리 후에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큰 난리가 겨우 진정된 때였기 때문에 국고에 남은 저축이 없었다. 공이 시장의 매매를 조절하고 잡비를 아껴 방납(防納)을 금지하고 호조 안의 모든 일과 전곡의 출입을 정밀히 정비하여 금, 은, 포목 등을 그 좋고 나쁜 데 따라 나누어 세 가지 등급으로 구별하였다. 일찍이 별도로 누만(累萬)을 저축하여 두고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가에 급한 일이 생기면 이것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가볍게 쓰지 마셔야 합니다.’ 하였다.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가 있으므로 본국에서 달마다 공급하는 것이 있고, 심양의 사신이 자주 왕래하면서 백 가지로 물건을 요청하는데도 호조에서 여유 있게 수응하여 부족함이 없고, 백성들에게 긁어내지 않았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호조에 사람을 얻었으니 백성이 그 은혜를 입는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였다. 심양에 바치는 세공미가 만 석인데 공이 말하기를, ‘이 부담이 그대로 가면, 나라가 반드시 피폐할 것이다.’ 하고, 계책을 세워 사신을 보내니, 9천 석의 감면을 얻었다.”

난리가 막 끝난 후라 국가의 재정이 결핍한 상태에서 심양에 인질로 가 있는 세자와 대군의 재용을 충당하는 일과 청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대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을 텐데 이명이 호조 판서가 되어 잘 처리했기에 인조가 “호조에 사람을 얻었으니 백성이 그 은혜를 입는다” 하고 칭찬을 한 것이다.

 

이명이 이처럼 호조의 재정을 잘 처리하는 데에는 용의주도한 일처리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일화가 나온다.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 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이명이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호조의 직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것이다.

“원두표(元斗杓)가 일찍 공을 비방하였는데 공을 대신하여 호조에 들어가게 되자 부중(府中)에서 조치하여 놓은 일을 보고 크게 탄복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재주가 이 같을 수 있는가? 나는 공의 규모를 지키기만 하면 족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시끄럽게 새로 고치랴.’ 하였다.”

심지어는 이명을 비방했던 이조차 그의 일처리에는 탄복을 했다니 인조, 선조 시대 최고의 호조판서라는 평은 헛말이 아닌 성 싶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신국, 정파를 넘어 오직 실력으로


김신국, 정파를 넘어 오직 실력으로

 

김신국은 정파적으로 북인에 속한다. 광해조는 북인들이 득세하였지만 서인이 주축이 되어 인조반정을 일으킨 후 북인들은 실세했다. 김신국은 북인임에도 불구하고 인조조에서도 여전히 중책을 맡았다. 인조가 그의 탁월한 경세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김신국은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립되자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소북의 영수로서 활약했다. 그는 광해군대의 정국 최대 이슈였던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는 적극 찬성을 하지 않았으나, 폐모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인조반정 이후 일시 유배되기도 했다. 이는 이후 인조 시대에 녹을 먹는 내내 괴롭혔다.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있다.

“갑자년에 김신국(金藎國)이 도승지가 되었다. 유백증(兪伯曾)이 신국은 전에 폐모(廢母)시키자는 정청의 계사(啓辭)를 지었다고 하여 탄핵하고자 하였다. 이에 여러 재상 중에 서너 명이 모두 일찍이 정청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서로 잇달아 도승지의 처지가 되어 모두 인책하고 나오지 않으니, 온 조정이 소란스러웠다.”

김신국은 광해군 11년(1619) 호조판서를 제수 받아 인조반정 때까지 역임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도 광해군대의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평안도 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정권의 성격이 전혀 다른 광해군과 인조 양대에 걸쳐 6번이나 호조판서를 맡았던 것은 그만큼 김신국이 실무에 능했던 관료임을 증거하고 있다.

 

김신국이 재기 있는 선비임을 보여주는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있다. 기지를 발휘하여 위급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임진왜란에 영남에서 충주(忠州)에 달려 이르렀는데, 길이 막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우가 왜적을 만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어 격문을 초하여 의병 천여 명을 모집하여 적을 죽이고 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조정에서 듣고 멀리서 참봉을 제수하였다. 모부인이 여주(驪州)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행장을 재촉하여 근친(覲親)하려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가는 데는 반드시 적진을 지날 것이니, 경솔히 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게 한 꾀가 있다.’ 하고, 군사 수십 명을 시켜 흰 깃발을 가지고 따르게 하고, 공은 남여를 타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천천히 길을 가며 기세가 태연하니, 적병이 바라보고 의아하게 여겨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김신국이 실무에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인물임을 여러 유현들의 평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계사년에 도원수 권율이 종사관으로 불러서 같이 일하면서 탄복하여, ‘참으로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할 재주가 있다.’ 하였다. 을미년에 훈국(訓局)을 처음 설치하였는데, 도감 제조(都監制調) 이덕형이 아뢰기를, ‘김신국은 나이가 젊은데 재간과 국량이 있고 군사(軍事)에 뜻이 있습니다.’ 하고, 군색랑(軍色郞)으로 불러 썼다.”

김신국은 경세능력 중에서 북방과 경제 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다.

국방에 대한 김신국의 탁월한 능력은 1613년(광해군 5) 평안도관찰사를 맡으면서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그는 후금이 필시 침략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계책으로서 진관을 설치하고(置鎭管), 조련을 밝게 하고(明操鍊), 군율을 엄히 하고(嚴軍律), 사기를 장려하고(勵士氣), 상 주기를 중시하고(重賞頒), 기계를 수선하고(繕器械), 전마를 공급하는(給戰馬) 7가지의 방안을 제시했다. 김신국은 광해군대에 변방의 임무에 밝은 인물이 등용되는 비변사 당상(堂上)에 강홍립(姜弘立) 등과 함께 추천되었으며,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도 평안도관찰사에 즉각 기용되는데, 이것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그가 국방에 대한 실무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638년에는 판중추부사로 인조의 명을 받아 강화도의 형세에 대해 보고한 후 바로 강화유수를 제수 받았다. 김신국은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임을 강조하고, 남한산성이 방어처로서 부적절함을 지적하였다. 김시양이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이 조선의 보배라고 한 데 대하여, 김신국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남한산성 때문이라면서, 병자호란 당시 군권을 장악했던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등의 산성(山城) 중심의 방어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연려실기술>에 김신국이 김시양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병자년 난이 지난 뒤, 김시양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어 그것을 힘입어 망하지 않았으니, 남한산성은 보배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대도 또한 이런 말을 하오.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오.’ 하니, 시양이 그 말에 매우 감복하였다.”

경제 방면으로 말하자면 김신국은 1619년부터 1623년의 인조반정까지 4년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국부(國富) 증대 정책을 추진하는 핵심에 있었다. 김신국은 호조판서로 임명된 직후 ‘식화(食貨)는 왕정이 먼저 할 바이며 축적(蓄積)은 생민의 대명(大命)’이라는 인식하에 은광 개발과 주전(鑄錢)의 통용을 건의하였다.

김신국은 1625년(인조 3)에 김신국은 다시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가 다시 발탁된 데에는 광해군 후반 정치적으로는 큰 혼란이 있었지만 경제정책은 안정성을 유지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신국은 그해 국용을 절제하고(制國用), 전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며(行錢幣), 바다의 이익을 거두는(收海利)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김신국은 양입위출(量入爲出: 구입액을 고려하여 비용을 절약함)의 철저한 이행과 서리(胥吏)들의 이익추구 방지가 국가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기본임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폐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숙종대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전국에 널리 유통되는데, 이러한 유통의 기반에 김신국과 같은 선구적인 관료가 있었다.

김신국은 양란 이후 사회 재정비의 방향을 농업경제보다는 상공업 중시 쪽으로 설정, 국부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경제정책은 실무적 경험을 바탕으로 개혁조치를 취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김신국은 이처럼 탁월한 경세능력을 소유한 인물로 정파를 추월하여 중용되었다. 그가 이처럼 중용된 데에는 그의 탁월한 경세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인데, 이 능력이 현실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동력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지지와 헌신을 이끌어내야 한다. 김신국은 이 능력 또한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연려실기술>에 일화가 나온다.

“호조 판서 때에 중국 조정에 은을 올리는 일이 있었는데, 공이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아래 관원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봉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어떤 산원(算員) 한 사람이 곁에 있다가 공이 잠깐 다른 데를 보는 틈을 타서 은 한 덩어리를 몰래 훔쳐 가지고 곧 일어나 나가서, 용변하는 것처럼 꾸미고 몰래 다른 곳에 두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여도 공 혼자만 알았으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즉시 모두 자리 파하기를 명하며, ‘산증(疝症)이 일어나려 하므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하면서 한쪽 방에 은을 보관하도록 하고, 그 산원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다음날을 기다려 문을 열고 은을 봉함하는데, 과연 은이 축난 것이 없었다. 공이 그 죄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십여 일 뒤에 다른 작은 일을 가지고 그 직책을 갈았는데, 사람들이 그 아량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을 잘하려는 의욕이 앞서면 아랫사람을 독려하는 게 지나쳐서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랫사람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유도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신국은 이를 몸소 잘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김신국(金藎國)-당쟁을 초월해 실무능력을 인정받은 국방, 경제 전문가

 

 

천민 출신의 충무공 정충신


천민 출신의 충무공 정충신

 

이순신 장군의 시호가 충무공이다. 무신이기에 무(武) 자에 충(忠)을 붙였다. 이황은 시호가 문순공인데 문인이기에 문(文) 자에 순(純)을 붙였다.

충무공 시호는 이순신 장군 외에도 또 있는데 정충신 장군도 시호가 충무공이다.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은 천민 출신이다.

정충신의 인생에는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권율 장군과 이항복이다.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다.

정충신은 광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가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정충신 또한 천민으로 태어났다. 정충신은 성장한 뒤에 당시 광주 목사로 재직하던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으로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通引)을 겸하였다. 행동거지가 민첩하고 야무졌기에 권율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 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연려실기술>에 기록이 나오는데, 아울러 정충신의 기상을 보여주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정충신은 자는 가행(可行)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고려 병장 정지(鄭地)의 후손이다. 미천한 집에 태어나서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겸하여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통인)이었다. 일찍이 절도영에 사역되어 불려갔는데, 늙은 기생의 집에 유숙하였다. 기생이 절도영 잔치에서 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주었는데, 공이 물리쳐 먹지 않고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절도사가 되었으면, 자신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남에게 먹일지언정 어찌 남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하니, 그 뜻과 기운 높음이 이러하였다. 임진년에 목사 권율(權慄)이 행재소에 장계를 전달할 만한 사람을 모집하였는데,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분연히 가기를 청하니,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적병이 길에 가득 찼는데, 공이 단신으로 칼을 짚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당시 권율의 장계를 의주에 파천한 선조에게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광주에서 북쪽 끝 의주까지 가려면 왜군이 깔려 있는 적진을 뚫어야 해서 이 어려운 임무를 아무도 맡아서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정충신이 자원해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선조에게 직접 면천을 받아 양인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당시 행재소에 이항복이 있었는데 정충신을 가르치고 자식처럼 아꼈다. <연려실기술>에 적힌 내용이다.

“이항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멀리서 와서 몸 둘 곳이 없으니, 내게 머무르게 하겠다.’ 하였다. 이내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공이 재주가 뛰어나 문리가 날로 진보되니, 항복이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가을에 행재소에서 시행한 무과에 올랐다. 임금이 항복에게 이르기를, ‘경이 일찍 정충신의 재주를 말했었는데, 이제 과거에 합격했으니 데리고 와서 나를 보게 하라.’ 하였다. 들어가 뵈니, 임금이 칭찬하며 이르기를, ‘나이가 아직 어리니, 좀 자라면 크게 쓰리라.’ 하였다.”

 

정충신이 비록 천민 출신이지만 남다른 재질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를 적었다.

“공은 키와 몸이 작았으나 눈이 샛별 같고, 얼굴이 아름다우며 말솜씨가 있고, 기상이 좋아 영특하였다. 활발하고 의기가 있고 일을 잘 헤아려서 미리 맞히는 것이 많았다.”

광해군은 후금이 날로 성장해 명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중립 외교를 펼치고자 하였고 북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정충신은 만포 첨사로 광해군을 이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정충신은 인조 정권이 집권한 이후 한직으로 밀려났다.

정충신이 다시 중용되는 계기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면서다. 그런데 정충신과 이괄은 평소 형제처럼 친한 사이였다. 그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된다. <연려실기술>에 이러한 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김시양이 언젠가 조용히 묻기를, ‘공이 이괄이 반란한 것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와 이괄의 친분이 형제와 같은 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것이오. 또한 문회(文晦) 등에 의해 고발되었던 것은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잡혀 문초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소. 그리고 이괄이 모반할 때, 내가 영변(寧邊) 근방에 있었으니, 만약 사람들이 의심하게 된다면 나의 본심을 천하에 분명히 밝히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성을 버리고 도망 나와 내 본심을 밝혀서 사람들이 절로 믿도록 한 것이었소.’ 하였다.”

이괄과의 친분으로 고초를 겪은 정충신은 남이흥과 함께 황주에서 기세등등한 반란군을 막아내었으나 패배하였다. 다시 도원수 장만의 휘하로 들어간 정충신은 안현에 주둔할 것을 청하여 2천 명의 관군이 안현 위로 올라가 주둔했다. 공격해 오는 반군과 한바탕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둔다. 안현 전투의 패배로 타격을 입은 반란군은 곧 내분으로 자멸했다. 정충신은 이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정충수는 병자년에 죽었는데, 그가 죽은 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충수는 병중에도 청이 공격할 것을 걱정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이다.

“병자년 봄에 왜구가 온다고 말이 와전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왜인은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요, 나라의 큰 근심은 곧 북녘 오랑캐다.’ 하였다.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단절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공이 이때에 병으로 앓아누웠다가 이 말을 듣고 심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이해에 결정된다.’ 하였는데, 이해 12월에 오랑캐가 과연 크게 쳐들어왔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인조가 특별히 왕이 의관에게 명해 치료에 진력하게 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연려실기술>에 인조의 각별한 정을 적어두었다.

“병자년 여름에 병이 심하였는데, 임금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하도록 하고 달마다 먹을 것을 내려주었다. 의관의 말이, ‘마땅히 인삼 두어 근을 써야 하겠다.’고 하면서도 임금에게 청하기를 어렵게 여겼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면 국력을 다 소비하더라도 아깝지 않은데, 하물며 몇 근의 인삼이겠는냐.’ 하였다. 죽은 뒤에 내시에게 명하여 호상하게 하고, 어포(御袍)를 주어 수의(襚衣)로 하게 하고 관청에서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정충신은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긴 임경업은 정충신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유, 반정의 포고문을 짓다


장유, 반정의 포고문을 짓다

 

장유가 애초에는 반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귀와 나눈 대화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이귀가 당시 일에 강개하여 반정할 뜻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장유가 듣고 사림(士林)의 화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귀에게 빨리 시골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이귀는 대의(大義)를 들어 그를 꾸짖었다.”

이귀의 설득이 주효했는지 모르지만 장유도 반정에 힘을 보태어 후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특히 장유와 그의 아우 장신이 훈련대장 이흥립을 반정에 가담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연려실기술>에 적힌 내용이다.

“인조가 수백금을 내어 심기원의 무리들로 하여금 의사(義士)들을 모집하여 결탁하게 하였으나 힘을 얻기가 어려웠다. 이때에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 안에 있는 것을 여러 사람이 걱정하였다. 이귀는 본래 흥립과 한 마을에서 살면서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뜻을 통하여 결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흥립(興立)이 박승종(朴承宗)과 사돈이 되었으므로 흥립의 첩 딸을 승종의 첩 아들과 짝지었다.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마침내 장유(張維)와 상의하여 아우 장신(張紳)을 시켜 흥립에게 함께 일할 것을 말하게 하여 승낙을 얻었는데 장신은 바로 흥립의 사위이다. 드디어 장유의 집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여 흥립의 편지를 장단 부사 이서와 이천 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에게 전하고 거사할 날을 약속하였다.”

“이때에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조정 안에서 중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걱정하여 그 사위 장신(張紳)을 시켜 설득하게 하였더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이귀도 함께 공모하였는가?’ 하므로 장신이 그렇다고 하니 흥립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허락하였다. 장유(張維)가 이귀에게 회답하여 알리니 이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며 사례하였다. 드디어 흥립을 시켜 손수 글을 써서 장단(長湍)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이흥립이 안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장유(張維, 1587-1638)가 누구인가?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은 이다.

 

<연려실기술>에 장유 본인이 자신의 문장을 평한 내용이 나온다.

“나면서 남달리 뛰어났으며, 어려서 맏형을 따랐는데, 그의 배우는 것을 곁에서 듣고 빨리 기억하였다. 윤월정(尹月汀)에게 《한사(漢史)》를 배웠으며, 사계(沙溪)에게 《예기》를 배웠다. 열 살에 두 경의 정문(正文)을 다 외웠으며, 12, 3세에 《소미통감》을 다 읽고 또 능히 외었다. 16세 때에 창려문(昌黎文)을 받아서 읽고 문득 고문의 법도를 알았다. 19세에 한성시(漢城試)에 장원하였고, 20세에 진사가 되고 23세에 과거에 올랐다. 글을 짓는 것이 한유(韓愈)의 짓는 법을 따라 진부한 말들은 쓰지 않았다. 선배들의 명작을 보고서도 뜻에 차지 않는 것이 많았다. 얼마 후에 임자년의 화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있게 되어 마침내 문장에 힘을 썼다. 다만 병이 많았으므로 부지런히 글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30세 때에 문체가 대략 성취되었다. 일찍이 스스로 평가하여 말하기를, “나의 작품 중에 사부 6, 7편은 마땅히 고려조의 이문순(李文順)과 나란히 할 것이며, 고문 수십 편은 중국에는 감히 내놓을 수 있으나 《동문선》에 끼우는 것은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다만 시는 본래 늦게 배웠기 때문에 끝까지 소가(小家)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후인이 품위(品位)를 매길 때에는 우리나라 어느 분들 사이에 끼워 줄런지 알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문장에 대한 자부가 느껴진다. 그러나 문장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성덕지사(成德之士)의 인품 또한 숨길 수 없을 것 같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이다.

“백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장유의 문장과 덕행은 비록 공자 문하에 둔다 하여도 안연이나 민자건에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약관에 음부경(陰符經)을 주해하였는데, 독특한 의견이 많이 있었다.”

“정태화(鄭太和)가 일찍이 말하기를, ‘반정 훈신 중에 인망 있는 이가 많았으나 그 후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전히 종묘사직을 위하는 마음으로 거사를 한 사람은 또한 몇 사람에 불과하니, 지천(遲川, 최명길), 계곡(谿谷, 장유)와 함릉(咸陵), 李澥) 몇 사람이 그러한 이들이다.’ 하였다.”

 

반정이 성공한 후에는 폐정을 혁파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위무하는 순서를 밟게 된다. 장유가 명을 받아 작성한 대사면 포고문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임금이 즉위하여 중외(中外)에 크게 사면하는 교서를 내렸다. 교서의 대략에,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가법(家法)이 매우 올바르니, 인(仁)으로 다스리고 효(孝)로써 도리를 삼았다. 그러나 하늘이 돌보지 않아 드디어 나쁜 운수를 만났으므로 십 수 년 동안 적신 이첨이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국권을 도적질하더니, 마침내는 모자지간을 이간하여 끝내 인륜의 변을 일으켜서 대비를 별궁에 유폐시키고 갖가지 모욕을 주었으며, 대비의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 있었다. 이에 삼강(三綱)이 비로 쓴 듯 없어졌으니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사치와 욕심이 도를 넘고 정치와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의 원망과 하늘의 노함이 극도에 이르러 밖으로 무너지고 안으로 다투어 나라를 망치고 제사를 끊기에 충분하였으니 이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다. 모두 대비의 말씀에 갖추어 있으므로 덧붙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가 박덕한 몸으로 선왕의 훈계를 받들어 삼가 집을 지켜 목숨을 마치려 하였더니, 다행히 2, 3명의 충의로운 신하가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된 것을 민망히 여기고 인륜이 끊어짐을 두려워하여, 대의(大義)를 분발해서 내란을 평정하고 이미 대비를 복위시키는 한편 이내 나를 추대하기를 원하니, 내가 아래로 여러 사람의 생각에 몰리고 위로 대비의 뜻을 받들었노라. 이에 깊은 못이나 골짜기에 빠진 듯 두렵도다. 내 어찌 감당할까 생각하니, 즉위한 시초에 반드시 다시 새로운 교화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에 무신년 이래 모함으로 옥에 갇힌 사람과 연좌된 사람과 국사를 논하다가 벌을 받은 자는 모두 그 죄를 씻어주라. 동시에 모든 건축 토목을 일으키던 역사와 조도사(調度使)라는 명목의 관리들이 거두고 빼앗던 것을 일체 개혁하고, 그 밖에 백성을 침노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외척과 권세부린 자들 소유의 농장 중 세금을 줄여주고 부역을 면제하였던 사실을 함께 조사하여 타파하며, 내수사(內需司)와 대군방(大君房)에서 백성에게 빼앗은 전답을 일일이 돌려주도록 한다. 또 금년 3월 13일 새벽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죄를 지은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한다. 이로써 정치를 새롭게 하는 뜻을 보이노라.’ 하였다. 계곡(谿溪谷) 장유(張維)가 지어 올렸다.”

새로운 왕이 등극했으니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다. 광해조의 폐정을 혁파하고 대사면을 조선팔도에 포고한다. 이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정의 동력을 확보하려는 당연한 조치다. 이 중대한 포고문을 장유가 명을 받들어 썼으니 그의 문장과 경륜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인륜을 저버린 불효를 바로잡는 것을 반정의 첫 번째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생들을 돌려보낸 이성구


기생들을 돌려보낸 이성구

 

반정은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이다. 광해군이 무엇을 잘못했던가? 불충과 불효이다. 명나라가 왜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국운을 다시 회복시킨 은혜)를 저버린 불충을 저지르고, 배다른 형제를 죽이고 서모를 유폐한 불효를 범했다. 이 두 가지가 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다. 이 외에도 광해군이 호색광음(好色狂飮, 여색을 좋아하고 술을 즐긴다)한 임금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가 부덕한 임금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이성구(李聖求, 1584-1644)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이고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이다. 태종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봉유설>을 지은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다.

1608년(광해군 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내, 삼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있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했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해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 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인목대비를 폐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연려실기술>에 이를 적어두었다.

 

“대비를 폐할 때에 바른 것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가 정협(鄭浹)을 천거한 죄로 정승에서 파면되자 공이 지평으로서 반박하기를, ‘이항복이 정협을 천거하여 쓸 때에 어찌 후일에 정협의 반역을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대신에게까지 연루시킴은 너무 심합니다.’ 하였으나, 간당들이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후에 이항복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이 일로 무고당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해가 심한 정치를 일신시키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부승지·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했으며,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귀의 아들로 반정의 주역인 이시백(李時白)이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이성구의 인물됨이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인정반정 당시에 사간으로 임명되어 정치를 일신했는데, 그중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이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반정할 당시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함부로 잡아 가둔 사람들을 너그럽게 놓아 주고, 성문의 통행금지를 풀고, 광해조 때 만든 침향산(沈香山)을 불태우고,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은 모두 공이 먼저 주장하여, 새로운 교화를 도운 것이다.”

 

기생을 흩어 보냈다면 필시 이전에 기생을 모았을 것이다. 바로 광해군이 침향산을 만들고 기생을 모은 것이다. 반정을 일으켜 새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침향산을 불태우고 기생을 돌려보내는 일들이 전 왕조의 폐정을 바로 잡는 일임은 두 말이 필요 없다. 이 일을 이성구가 제일 먼저 주창했다. 이를 두고 반정 후에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조치였다고 평을 얻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성구가 이 일을 후회하는 듯한 시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임금이 반정하던 당시에, 공은 사간이 되었는데, 기생을 파하도록 건의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뽑혀왔던 기생들을 모조리 돌려보내었으니 이것은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큰 정사였다. 얼마 후에 공이 의정부의 사인이 되었을 때에 지은 한 절구(絶句)가 있으니,

 

이원을 파하자고 아뢴 것은 간관이란 직명 때문이었는데 / 奏罷梨園爲諫名
연못의 정자에 오니 기생이 없으므로 풍정을 저버렸네 / 却來蓮閣負風情
못물은 가득하고 연꽃은 서늘한데 / 池塘水滿芙蓉冷
홀로 난간에 기대어 빗소리 듣는구나 / 獨凭危欄聽雨聲

하였으나 이는 농담이었다.

 

김시양(金時讓)이 화답하기를,

청루에 박행하다는 이름을 피하지 않았으니 / 不避靑樓薄倖名
한 장의 소가 참으로 임금 사랑하는 심정이 있었네 / 一封眞有愛君情
어찌 응향각(연못 가의 정자 이름) 빗소리 듣는 날 / 如何聽雨凝香日
도리어 당초 정성(음탕한 음악) 내친 것을 후회하는가 / 却悔當初放鄭聲

하였다.”

 

이성구의 시는 풍류의 흥을 높이고 있다면 김시양의 시는 정색하며 도의로 화답했다. 이성구가 기생을 돌려보낸 일을 정말로 후회한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풍정을 대하고 풍류의 정취를 한껏 펼친 것이다. 이를 김시양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김시양의 화답은 준엄하다.

 

이는 김시양이 1611년(광해군 3)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을 때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서 광해조이 실정에 대한 준엄한 심판 의식이 작용하기도 했기도 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당시 이 일을 기록해 둔 내용이 있다.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향시를 주관하였는데, 여러 소인들이 시험 문제에 임금을 비방하고 풍자하였다고 적발하여 체포당하였다. 정 판서(鄭判書) 세규(世規)가 광릉(廣陵) 길에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법정에 들어오자 의금부에서 극형에 처하기를 아뢰었는데, 광해주(光海主)가 그것을 3일 동안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옥에서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니, 윤효선(尹孝先)이 시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함께 잡혀 있었는데, 공을 차서 일으키며, ‘지금이 어떤 때인데 평안히 잘 수 있소.’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요.’ 하였다. 백사 정승 이항복(李恒福)이 구원하여 사형에서 감형되어 종성(鍾城)으로 귀양 갔다. 공이 가던 길에서 시를 지었는데,

 

마음과 행동이 본래 백일을 속이지 않았으니 / 心跡本非欺白日
길흉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물을 것이 아니다 / 吉凶元不問蒼天

하였다.”

 

이성구는 만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모함으로 사직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선천부사 이규(李烓)가 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지어 소요하며 지냈다. 그 무렵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규(李烓)의 전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다가 탄핵을 입어 벼슬이 떨어지자, 양화강(楊花江) 위에 우거하면서 집에 써 붙이기를 ‘만휴암(晩休菴)’이라 하였다. 어느 날 불이 났는데 나와서 밭둑에 앉아 말하기를, ‘술독은 탈이 없느냐.’ 하더니,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 하고, 다른 것은 묻는 것이 없었다.”

기생을 돌려보낸 것은 행정 관료의 실천이요 빗속에서 아쉬워하는 것은 묵객의 정취이다. 이 둘이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은 집에 불이 났을 적에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는 이 한 마디에서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의 이익재, 이정귀


조선의 이익재, 이정귀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은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이다.

이정귀는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했다고 전한다. 1577(선조 10)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1585년(선조 18)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設書: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는 정7품관)가 됐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해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후에 『대학강어(大學講語)』로 간행됐다.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의 병부주사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켰다. 이정귀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이와 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진다. 이정귀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浩蕩: 세차게 내달리는 느낌)하고 표일(飄逸: 세속의 때가 없는 느낌)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문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정귀가 문장으로 일대의 종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연려실기술>에 몇 가지 예화가 나온다.

“경기 감사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 막 국(局)을 설치하여《동국시문(東國詩文)》을 편찬하려 했다. 윤근수(尹根壽)와 이호민(李好閔)이 그 일을 주장하였는데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정귀가 비록 지방 일을 맡았으나 이 국(局)에 없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더니, 왕래하면서 참정(參定)하도록 윤허하였다. 이것은 사원(詞苑 문단)의 아름다운 일로 전하여졌다.”

“칙사 웅화(熊化)가 올 때에 공이 접반사가 되었는데, 서로 즐겁게 사귀어 말끝마다 꼭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공의 화답하는 시를 보고는, ‘글자마다 당 나라 사람의 넋이다.’ 하고 《황화집》의 서(序)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문재는 원래 타고난 천부의 자질이 중요하다. <연려실기술>에 이정귀의 천부적 소질을 소개하였다.

“말을 배우자 곧 글자를 알고 능히 글을 만들었고 한 편이 나올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니 신동이라 일컬었다.”

“어머니 김씨가 공을 잉태하여 해산할 때가 되자, 범이 와서 대문 밖에 엎드려 있어 사람들이 감히 쫓아 보내지 못하였는데 해산하자 곧 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장에 뛰어날 징조다.’고 하였다.”

문장에 능한 선비 중에는 문한에는 출중하지만 시무는 능통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정귀는 문장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명나라에서 양 안찰사가 갑자기 서울에 왔을 때, 임금이 나가 접대하려 했으나 역관(譯官)을 갖추지 못하였다. 창졸히 공을 시켜 접대하게 하였더니, 보는 대로 알아내어 주선하는데 실수가 없었다. 일을 모두 마치자 임금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정귀의 재주가 이렇게까지 좋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관직을 7계급이나 뛰어 올려 주어 승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손님에 대한 의례(儀禮)가 있을 때마다 공이 꼭 임금 앞에 있었다. 중국의 사신들이 관사에 가득하여 응접하기에 번잡함을 이루 말할 수도 없었는데, 공이 안에서는 응대하고 밖으로는 외교하는 글을 맡아서 남들이 미루는 일도 공은 처리하기를 물 흐르는 것같이 하였다. 언젠가 병이 들어 여러 날 되었는데 임금이 묻기를, ‘이정귀는 어디 있느냐.’ 하고, 특별히 내구(內廐)의 말을 하사하였다.”

“정유년에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평양에 도착하여 군사와 성과 양식과 기계에 관한 실정을 묻고, 삼조(三曹 이조ㆍ호조ㆍ병조)의 판서들이 와서 대답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걱정하였으나 공이 풍부한 재주와 눈치가 있었으므로 자문(咨文)을 주어 대신 갔다 오도록 했다. 종사관으로 명 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서 남정(南征)하였다.”

이정귀는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이런 면들이 어우러져 장유가 이정귀가 고문대책(高文大冊: 내용이 알차고 문장이 세련된 글)을 신속하게 창작하는 능력이 빼어나다고 한 이유일 것이다.

이는 사대부가 마땅히 해야 할 순수한 문학을 창작으로 실천하면서도 「무술변무주」 등의 외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실용문을 써 이름을 알린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정귀의 문학은 한편으로 이웃 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를 위한 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쓸모를 십분 발휘한 의의를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는다.

 

이정귀의 일생의 업적과 삶을 전대의 선인에 견준다면 누굴까?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말한다.

“문장이 있고 아울러 복록을 겸하여 누렸으며 공명이 장한 것을 세상에서 고려의 이익재(李益齋)와 비교하였다.”

참으로 이정귀는 조선의 이익재라고 할 만하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금옥 같은 군자 오윤겸


금옥 같은 군자 오윤겸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은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추탄(愀灘), 토당(土塘)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다.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고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서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하고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오윤겸은 성혼 문하에서 손꼽히는 제자다. 성혼이 일찍이 오윤겸을 평한 내용이 <연려실기술>에 적혀 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문하에서 배웠는데, 우계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윤겸은 어지러운 나라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성혼이 어지러운 나라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대강을 말한 것이고 그 구체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일화를 통해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임진년에 정철이 호남 체찰사(湖南體察使)로 갈 때, 종사관의 일을 보았는데 음관(蔭官)으로서 막부의 종사관이 된 것은 공이 처음이었다. 이 뒤에 평강 현감(平康縣監)이 되었다. 그때에 감사 정구(鄭逑)가 순찰하기 위해 강릉에 왔는데 부사(府使)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강에 가면 반드시 그 현감을 매질할 것이다.’ 하였다. 강릉 부사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정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스스로 선비라 일컫고서 문서를 기한에 못 마치니, 이 때문에 매질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강릉 부사가 말하기를, ‘공이 현에 이르시면 옳고 그른 것을 묻지 않고 갑자기 들어가 매질하면 그만이나, 만일 함께 이야기를 붙이면 매질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구가 말하기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구가 평강현에 이르자 곧 현감을 불러들이었는데, 공의 행동하는 것이 단아하며 언사가 자상하고 민첩하여 묻는 데 따라 해명하는 것이 물 흐르듯이 하였다. 정구가 자기도 모르게 심복하여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밤새도록 이치를 이야기하였는데, 기뻐서 하는 말이, ‘참으로 금옥 같은 군자로다.’ 하였다. 강릉으로 돌아오게 되자 부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과연 옳았소.’ 하였다. 경포호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호수 복판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평강 현감과 함께 뱃놀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부사가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어려운 일입니까. 공무로 핑계하고 부르시면 곧 올 것입니다.’ 하니, 정구가 그 말을 따랐다. 며칠을 머물러 공이 오는 것을 기다려, 다시 호수 가운데서 잔치를 베풀고 한껏 즐긴 후에 헤어졌다.”

정구가 어떤 인물인가? 매섭기가 추상같은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오윤겸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자 그의 매력에 폭 빠졌다니 놀라운 일이다. 정구가 “참으로 금옥 같은 군자로다”라는 이 말이 오윤겸의 기품을 그대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오윤겸이 친화력과 기품은 왜인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났다.

“정유년에 비로소 과거에 오르고 정사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관백(關白) 이하 모두가 공경히 대접하였다. 돌아오자 일본 사신이 와서 묻기를, ‘귀국에는 오공과 같은 분이 몇이나 있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너무 많아서 쉽게 셀 수가 없었다.’ 하니, 일본 사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귀국이 비록 장하다 하지마는 인재는 반드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오윤겸의 이와 같은 친화력과 기품이 어찌 타고난 기질이 수승해서 뿐이겠는가? 젊어서 성혼의 문하에서 배우고 익힌 도학의 성정이 우러난 것일 터이다.

“임술년에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서 황성도(皇城島)에 이르렀는데, 배가 몇 번이나 뒤집힐 뻔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얼굴이 질색이 되었는데 공은 단정히 앉아 글을 지어 쓰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이미 미리 정한 것, 이렇게 되어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하고, 조용하게 옷깃과 소매를 여미고 목숨이 다할 때를 기다렸으나 마침내 무사하였다. 공은 포은(圃隱)의 외손(外孫)이다. 일본과 금릉(金陵)에 사신으로 간 것이 마침 포은과 같은 시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광해조에 폐모 수의(廢母收議)에 반대하여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동대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 ‘이런 큰일을 만나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니, 공은 ‘평생에 배운 바가 바로 오늘에 있네.’ 하는 여덟 글자로 답하였다.”

오윤겸의 수양 경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임에 틀림없다. 생사의 기로에서 천명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이른바 <맹자>에서 말한 요수불이(夭壽不貳, 살고 죽는 데에 마음이 흔들림이 없다)의 경지가 아닌가?

 

오윤겸이 죽으면서 자손에게 남긴 말이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공이 죽을 때 말하기를, ‘내가 거룩하고 밝은 임금을 만났어도 세도(世道)를 만회하지 못하였으며, 나라에는 공이 없고 몸에는 덕이 없었다. 비석을 세우지 말고 시호를 청하거나 남에게 만장(挽章)을 구하지 말라.’ 하였다”

성혼의 빼어난 제자라는 역대의 평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칙과 현실의 조화를 주장한 최명길


원칙과 현실의 조화를 주장한 최명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 창랑(滄浪)이다.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때문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 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 해 정월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다. 이후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최명길은 이항복 문하의 제자로 이시백, 장유와 동문수학한 관례로라도 반정의 주역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는 있었지만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처음에는 반정에 적극 가담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점차 반정의 중책을 맡고 반정이 성공한 후에 계해정사 1등공신에 책봉된 것으로 보인다.

“이귀가 전에 벌써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등과 약속을 하였고 최명길(崔鳴吉)도 모의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최명길은 매우 두려운 마음에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이귀의 집을 찾아감에, 이귀가 안석에 기대어 계집종을 시켜 머리를 빗으며 태연히 말하고 웃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하였다.”

“이귀가 심기원을 청하여 평산에 함께 있으면서 평산을 모의하는 장소로 삼는 한편 최명길과 김자점은 서울에 머물러 모든 일을 주선하였다.”

“거사할 모의가 이미 정하여졌으나 여러 사람이 안팎으로 흩어져 있었으므로 힘을 합하지 못하여 일이 자못 어긋났다. 최명길이 이것을 걱정하여 계해년 봄에 서울 교외에서 성중으로 들어와서 여러 사람에게 통고함으로써 드디어 계획이 정하여졌다. 명길이 일찍이 유청전(劉靑田)의 영기점법(靈棋占法)에 통달하여 점을 쳐서 좋은 날을 받아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정하였는데, 공훈을 정할 때에 명길이 일등공신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영기점법에 통달하여 점을 쳐서 거사일을 정했다는 일화와 함께 <연려실기술>에 최명길의 신묘한 경험을 기록해 두었다.

“공이 정승 자리에 있을 때, 구오(具鏊)가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구오는 능천(綾川)부원군인후의 아들이다. 그때 그는 나이 젊고 이름난 무사(武士)였다. 구오가 수원으로 부임하면서 공에게 들러 인사하고 공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한 뒤에 절하고 물러갔다. 그가 겨우 대청을 내려가자, 공이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천천히 완릉공(完陵公 공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괴이한 일이다. 구오가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하였다. 완릉공이, ‘어찌된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 대청을 내려 걸어 나갈 때 보니, 정신이 벌써 흩어져 마치 인형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하였는데, 며칠이 안 되어 구오가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최명길은 당대의 경세지사로 이름이 높았는데, 현실을 직시하여 강화론을 주장한 것이 제일 유명하다. 그러나 강화론이 야합이 아닌 이상 어찌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없겠는가. <연려실기술>에 원칙을 중시한 최명길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양파(陽坡 정태화(鄭泰和))에게 고모의 사위 아무개가 있었는데 음사로 한 고을 수령 자리를 구하였다. 이때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양파가 고모의 청에 못 이겨 가서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전후에 벼슬을 제수한 것이 어찌 모두 다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고야 말할 수 있겠는가만 능히 내 양심에는 부끄럽지 않을 뿐이다. 이 사람은 능히 그 직책을 감당할 만한가.’ 하고는 끝까지 추천하지 않았다. 양파가 이 말을 가지고 자제들에게 매양 말하기를, ‘최 정승이 내 말에는 일찍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서는 분명하기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일찍이 말하기를, ‘반정 훈신 중에 인망 있는 이가 많았으나 그 후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전히 종묘사직을 위하는 마음으로 거사를 한 사람은 또한 몇 사람에 불과하니, 지천(遲川, 최명길), 계곡(谿谷, 장유), 함릉(咸陵, 李澥) 몇 사람이 그러한 이들이다.’ 하였다.”

“계해년에 조정에서 훈신들에게 집을 내려주었는데 적몰(籍沒)한 여러 죄인들의 집이었다. 공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끝내 거기 들어가지 않았다. 내려준 전답을 받자 또 말하기를, ‘권세 있던 사람들이 백성의 전지를 강탈한 것이 무수하였기 때문에, 내가 받은 전답 가운데에도 반드시 백성의 전지가 많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도로 찾아 가기를 허락한다고 큰 거리에 방을 붙였다. 그 후에 와서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하나하나 문서를 만들어 돌려주었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성리학적 토양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소신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최명길이 명체달용(明體達用, 본체를 밝히고 쓰임을 두루한다)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은 이유는 멸사봉공의 원칙을 확고히 견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폐동궁과의 의리를 지킨 윤지경


폐동궁과의 의리를 지킨 윤지경

 

윤지경(尹知敬, 1584-1634)은 자는 유일(幼一)이며 호는 창주(滄洲)이다. 청요직을 지낼 무렵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형복(鄭亨復)으로 하여금 폐모론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리게 하고, 폐모론에 반대한 정홍익(鄭弘翼)이 유배당하자 도성 문밖까지 전송하는 등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다.

1623년 겸보덕으로 궐내에 입직하던 중 인조반정이 일어나 반정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뻔했으나 이귀(李貴)의 만류로 화를 면하고, 반정에 호응해 전한이 되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윤지경이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기는 했지만 반정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정은 다른 말로 하면 역모이기 때문이다.

“보덕 윤지경(尹知敬)이 분주히 내전으로 들어가 광해를 찾았으나 보지 못하고, 불빛 속에서 중궁 유씨(柳氏)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원컨대 세자를 따라 빠져나가서 일을 도모하소서.’ 하였다. 일설에는 문이 닫혀 안에서도 모두 숨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창졸간에 무사에게 끌려가게 되었는데 무사가 칼을 들어 치려 하는 것을 이귀가 보고 급히 말렸다. 이끌고 인조를 뵙게 하니, 꼿꼿이 서서 절하지 않고 말하기를, ‘밤중에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누구이기에 내가 가벼이 무릎을 꿇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능양군이 부득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일을 일으킨 것이오.’ 하니, ‘그러면 어찌하여 궁실을 태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군사가 실화하여 탄 것이지, 일부러 불을 놓은 것은 아니오.’ 하였다. 또 묻기를, ‘전 임금은 어떻게 처우할 것이오?’ 하니 ‘죽이지 않는 것으로 대우할 것이오.’ 하니 지경이 바로 내려서서 절하였다.”

윤지경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적에 이귀가 그의 생명줄을 잡아준 것으로 나온다. 이 와중에서도 시비곡직을 가리고 사태를 파악하여 처신하는 윤지경의 모습이 이채롭다.

“반정하는 날 모든 사람이 도망쳐 숨어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輔德) 윤지경은 처음에 절하지 않고 땅에다 손을 짚고 버티어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존경할 만하다.”

“(윤지경이) 드디어 동쪽 행랑에 가서 (본인을) 가두어주기를 청하므로 최명길 형제가 그의 손을 잡고 내력을 상세히 말하였다. 지경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두운 조정에서 자주 중요한 관직을 지내면서 망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 한 마디도 바르게 구하는 말이 없었던 것이 첫째 죄입니다. 반정하는 군사가 들어올 때 먼저 기미를 알아 명에 응하지 못하고, 감히 집사와 다툰 것이 둘째 죄입니다. 폐동궁(廢東宮)에게 특별한 사랑을 입었는데, 그가 망명할 때에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지 못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의거한 여러 사람을 보며 새 조정을 다시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경은 이로써 세상에 명망이 중해졌다.”

 

이 외에도 윤지경의 재질과 행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공이 어렸을 때, 모습이 시원스럽고 명랑하여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윤씨 집에 대대로 사람이 있다.’ 하였다. 필주(泌州) 박이서(朴彛叙)가 보고 말하기를, ‘이 집에 이 아이가 있으니, 가르쳐 성취시켜야겠다.’ 하고, 드디어 사위로 삼았다.”

“이첨이 정권을 잡아 시사가 크게 변하니 드디어 병을 핑계로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하루는 친한 손이 바로 방에 들어와, 한참을 쳐다보고는 말하기를, ‘공이 병으로 혼자 물러나 있다더니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네.’ 하였다.”

“정형복(鄭亨復)이 폐모론을 배척하는 소를 올릴 때에, 공이 실제로 도왔었는데 이 일에 연루되어 폐고되었다. 후일 정공(鄭公) 홍익(弘翼)이 폐모에 반대하다가 귀양 가자, 공이 술을 가지고 새문[新門]밖에 가서 이별하고, 옷을 벗어서 선사하였다. 물러와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이 폐모론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정이(靜而)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하였는데, 정이는 정형복의 자다.”

“공이 충청 감사에 임명되어 임금에게 하직하는 날에 임금이 인견하고 술을 내렸는데, 공이 신은 신발이 매우 낡은 것을 보고, 곧 어화(御靴)를 벗어 내시를 시켜 전문(殿門) 밖에서 뒤따라 나와 주게 하였으니 은혜와 사랑이 이러하였다.”

반정이 끝난 후에 광해군과 폐동궁에 대한 처분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유리안치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는데, 후에 폐동궁이 강화도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쳤다가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은 폐동궁에게 자진하라는 처분이 내려지는데, 이런 논란의 와중에 이경진은 이에 참여하지 않아 비판을 받게 된다.

“삼사에서 폐동궁(廢東宮)이 도망쳐 나간 죄를 논하였는데, 공은 스스로 여러 신하와 다르다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으니, 시배(時輩)들이 장차 중상하려 하였다. 친구들이 와서 참론(參論)하기를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형복도 와서 굳이 권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의(義)가 있는 바에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한다.’ 하고,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일찍 폐동궁에게 두터운 사랑을 받았던 까닭이었다.”

이경진의 인품을 재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국난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정묘년 난리에 여러 진지가 모두 무너지니,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어찌 수천 리의 큰 나라를 가지고 적병의 소문만 듣고 먼저 무너진단 말인가.’ 하였다. 밤에 일어나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하인에게 촛불을 잡게 하고 스스로 소를 지어 썼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였다. 임금이 편전에 불러서 보니, 공이 울며 말하고 또 말하며 울었는데, 충성된 계책이 환하였다. 임금이 얼굴을 고치고 그 말을 모두 쓰기로 하고, 즉시 독검어사(督檢御史)로 삼았다. 달려서 임진강에 이르니 적병이 벌써 황주에 들어와 있었다. 공이 여러 번 군사를 청하므로, 호서 충청도 군사 수천을 배속시켰더니, 군사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적병이 강화하고 물러갔다. 임금이 강화에서 돌아와, 공을, ‘나라가 위태함을 보고는 몸을 잊는 사람이다.’ 하고, 특히 형조 참의로 올려 주고, 해동 남자라 부르며 비단을 내려 상을 주니, 나라 사람이 모두 공을 찬양하고 말하기를, ‘만일 여러 신하들이 능히 이 대부와 같이 나라만 알고 몸을 잊는다면 어찌 강한 오랑캐를 근심할 것인가.’ 하였다.

윤지경은 청나라와의 척화를 강력히 주장해 윤황(尹煌), 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되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덕형, 광해를 살펴주소서


이덕형, 광해를 살펴주소서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자는 원백(遠伯)이며 호는 죽천(竹泉)이다.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이다.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오성과 한음’ 설화의 주인공 중 한명인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다른 인물이다. 한음은 남인이었지만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됐다. 이산해의 숙부인 토정 이지함이 한음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이산해 집안에 한음과 동명이인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죽천 이덕형이다.

이덕형은 광해군 때에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러워지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 인조)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이덕형을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덕형은 광해의 폐정을 반대하면서 반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반정 후의 처신을 보건대 애초에 광해의 폐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고, 심정적으로 반정의 명분에 동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반정이 일어날 때 직책이 도승지로서 광해군의 총임을 받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정파들의 칼날을 맞지 않고 인조 시대에도 여전히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지조 있는 행실이 옳게 평가받은 것처럼 보인다.

“반정하는 날 모든 사람이 도망쳐 숨어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輔德) 윤지경은 처음에 절하지 않고 땅에다 손을 짚고 버티어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존경할 만하다.”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상황에서도 의연한 모습이 엿보인다.

이덕형은 광해가 반정으로 폐주가 되었지만 광해조의 녹을 먹은 신하로서 광해에 대한 충의를 접지 않았다. 이는 인조가 가상히 여긴 바이고, 반정의 주역들로부터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 이는 이덕형의 평소 몸가짐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인조가 돈화문 안에 앉은 후, 군사를 나누어 서궁에 가서 문안을 드리었다. 대궐에 입직한 신하들 병조 판서 권진(權縉) 이하가 모두 허둥지둥하며 절하여 축하드리고 땅에 엎드려 명을 듣는데, 유독 도승지 이덕형(李德泂)만은 절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덕형을 에워싸니 덕형이 땅에 버티고 소리쳐 말하기를, ‘신하로서 어찌 된 영문도 모르고서 갑자기 절할 것이냐?’ 하였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능양군이 대비를 받들어 반정하셨다.’ 하니 덕형이 눈물을 흘려 사례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임금께서는 전(前) 임금을 보전하여 주소서.’ 하였다. 여러 장수 가운데 칼질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인조가 중지시켰다.”

“이때 덕형이 도승지로서 대궐 안에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연이어 인조에게 청하여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하니 눈물이 쏟아져 흐르고 흐느낌이 심하여 말소리조차 이룰 수가 없었다. 후에 또 스스로 청하기를, ‘전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죄를 지닌 채 그 전 벼슬에 그대로 있는 것은 맑은 조정에 큰 누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마음은 반정하던 날에 내가 이미 알았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뒷날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덕형의 충의는 내가 반정하던 날 알았노라.’ 하였다.”

광해에 대한 충의의 도리를 다했지만 사태를 파악한 이덕형이 반정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담당해서 반정이 성공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반정 후에 인조 시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 이귀가 명을 받들어 도승지 이덕형과 함께 의물(儀物)을 갖추어 대비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그 아들 시백(時白)을 시켜 인조에게 사뢰어 인조가 곧 서궁으로 가서 문안드리니, 대비가 드디어 임금 책립하자는 명을 내렸다.”

저서로 <죽창한화>와 <송도기이>가 있다. 수필집 <죽창한화>는 이덕형이 겪은 다양한 풍습과 제도, 인물 등을 서술하였다. 그중 연산군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난리를 피해 전라도 진안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97세 한 노인과 만났다. 노인은 7세 때부터 군역이 부과돼 서울에서 향군(鄕軍)으로 근무하면서 연산군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노인은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고 연산군의 인상을 얘기했으며 당시 상황도 정확히 떠올렸다.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드물고 키가 크며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다. 연산이 전교(서울 중랑천 살곶이다리)에 거동할 때 역군으로 따라갔다. 화양정(성동구 살곶이목장 내에 있던 정자)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 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신하들은 물리쳤다. 마관(馬官)이 수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다. 그해 가을 반정(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에서 반정으로 물러난 왕이 앞으로는 연산군이요 뒤로는 광해군인데, 이덕형은 광해군의 반정을 목도하였다. 그리고 <죽창한화>에 실린 연산군 이야기는 행간에 황음무도한 연산군의 폐정을 들추어내고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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