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혁명 동지 신경진


든든한 혁명 동지 신경진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은 자가 군수(君受)이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아버지다.

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 전쟁에 참여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기용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나라 사신의 접대를 거부하여 교체되었다.

이어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 등과 모의, 신경진과 인척 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 뒤 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반정 후 서인이 훈서(勳西)·청서(淸西)로 분열하자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임을 들어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극력 회피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사림을 천거하고 장용(奬用: 장려하여 등용)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무인이면서도 김류·이귀·최명길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했는데, 특히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김류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은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의 종사관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연려실기술>에 신경진이 김류와 합심하여 반정을 도모한 내용들이 다수 나온다.

“신경진이 평소 김류와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하루는 조용히 글 배우기를 청하고는 바로 사략(史略)을 내어놓았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내치다. [伊尹放太甲 ]’는 대목에 이르러서 책을 덮으며 탄식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일이 옳은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태갑이 탕(湯)의 법도를 뒤엎었으니 내쫓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하였다. 경진이 말하기를, ‘요즈음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는 ‘옛날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경진이 울며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나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다.’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그것이 내 뜻이다.’ 하였다. 이내 묻기를, ‘마음 가는 데가 어디 있는가?’ 하니, 경진이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바로 선조의 친손인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니 하늘이 주신 바이다.’ 하여 마침내 의논이 결정되었다. 신경진이 평안 우후(平安虞候)에 임명되었는데 신병을 빙자로 부임하지 않으니 박승종(朴承宗)이 의심하여 효성령 별장(曉星嶺別將)으로 내쫓으므로 그날로 출발하였다.”

“(김류가) 혼자 있을 때에 늘 통분해하며 뜻이 나라를 바로잡아 다시 세우는 데에 있었다. 마침 정승 신경진(申景禛)이 왔는데 공은 평소부터 그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어 함께 일을 할 만한 자임을 알고 있었다. 눈물을 흘려 울면서 말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이씨의 종묘사직이 아침저녁으로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의 손에 옮겨지는 것과 같은 지경이니, 우리가 어찌 멸족될 것을 두려워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또 하물며 우리 두 사람의 아버지께서 나라 일로 함께 돌아가셨으니, 우리 두 사람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함께 죽지 않으면 어떻게 돌아가신 어른들을 지하에서 뵐 것인가?’ 하였다. 신공이 팔을 걷어붙이며 무릎을 맞대고 말하기를, ‘그것이 나의 뜻이다.’ 하여 드디어 큰 계획이 정해져서 서로 죽음으로써 다짐하였다.”

신하가 반정을 도모한다는 것은 생사의 외줄을 아슬아슬하게 탈 수밖에 없다. 만약 도모하는 일이 사전에 발각된다면 본인이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구족멸문의 화가 미친다. 일이 사전에 누설되는 경우는 내부자의 고발일 가능성이 많은 법, 생사를 함께 하기로 다짐한 혁명 동지가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런 이치를 생각해보면, 김류와 신경진은 선대부터 시작된 인연으로 맺어진 서로 가장 신뢰하는 동지였을 것이다.

신경진은 무장인지라 경세지책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상신(相臣)의 반열에 올랐다. <연려실기술>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경진(申景禛)은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외종(外從)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병이 중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영의정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임금이 그가 글을 읽은 사람이 아니므로 백관을 통솔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한 것으로 벼슬을 중하게 아끼는 뜻을 가진 한편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죽은 뒤에 신하의 최고직을 명정(銘旌)에나마 쓰게 하고자 함이었다.”

신경진이 무장으로 백관을 통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이루는 데에는 신경진의 남다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 중 일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임금이 언젠가 구궁(舊宮)에 행차하여, 친척들을 불러들여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나아가 뵈는 이가 모두 앞을 다투었다. 그러나 공이 혼자 즐거워하지 않고 말하기를, ‘신하가 어찌 감히 사사롭게 뵐 수 있는가?’ 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듣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식견이 다른 사람은 따라가지 못할 바이다.’ 하였다.”

“안주(安州) 목사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무덤에서 울고 큰비나 눈이 와도 그만두지 않았다.”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에서 동성(東城)을 지키는데 홀연히 대포알이 날아와 단(壇) 위를 쳐서 대장기(大將旗)가 부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공은 태연히 진정시켰다.”

“남한산성에서 공은 동쪽 성을 지켰는데, 군중이 정돈되어 엄숙하였다. 날마다 출병하여 잘 싸워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많았다. 적과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높은 언덕이 있는데, 적이 그곳을 점령하여 성을 내려다보았다. 공이 포수를 선발하여 쏘게 하니, 한 방에 그 장수가 맞아 떨어졌다. 우리 군사가 모두 용기를 내어 마구 쏘아대니 적이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임종할 때, 정신과 언어가 평일과 같은데, 한 마디도 집안일을 말하는 것은 없고, 다만 나라 일을 걱정하였다. 낮에 큰 별이 갑자기 떨어졌는데, 이날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신경준이 김류와 더불어 반정을 도모하고 반정공신에 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김류(金瑬, 1571-1648)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이귀(李貴, 1557-1633),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다.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598년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과 풍악을 벌여 놀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이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항복이 김류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논한 이야기가 여러 번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광해주 10여 년 동안에 조정은 문란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고, 대비를 감금하여 아침저녁으로 없앨 궁리를 하니 이항복이 김류(金瑬)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요사이 임금의 정사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우니 우리 무리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다.’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우니 김류가 그 뜻을 알았다.”

“항복이 귀양 길에 오를 때에 작별하면서 김류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이는 관옥(冠玉, 곧 김류) 뿐이다. 힘써주기를 바란다.’ 하니 김류가 묵묵히 있었으나 김류의 뜻은 이미 이때에 정해졌다고 한다.”

“반정하던 날에 항복이 김류ㆍ이귀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거사가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항복이 김류를 광해군의 폐정을 끝장낼 인물로 점찍은 것처럼 이귀 또한 김류를 높이 평가하여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했다.

“이귀가 김류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할 때의 대장은 나처럼 노쇄한 자는 안 될 것이오. 영감은 원래 장수의 물망이 있는 사람이니,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오. 영감을 대장으로 삼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본래 김류는 문과 급제한 인물이지만 무장의 능력이 있었다. 이귀가 김류에게 장수의 물망이 있다는 말이 그런 의미다.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박세채가 구체적으로 밝혔다.

“김류는 천성이 비범하고 기국이 엄숙하고 단정하며 또한 문장을 잘하고 지략이 있었다. 일찍이 대궐 뜰에서 책문 시험을 볼 때에 병무(兵務)에 대해 매우 잘 논했으므로 사람들이 장상의 재목이 된다고 여겼는데, 이 때문에 광해주 때에도 자주 원수(元帥)의 물망에 올랐다. 계해년 정사(靖社)에 모든 사람이 추대하여 영수(領袖)로 삼은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금이 반정하기 전에 세 번 그 집에 찾아가서 큰일을 도모하였다.”

김류가 반정군의 대장이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거사 당일 김류가 늦게 합류하여 잠시나마 혼란이 발생한다. 혁명의 성패는 일초일각을 다투는 법인데 대장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회합 장소에 모인 이들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족히 가늠하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김류가 늦게 합류한 사연을 적어두었다.

“이때 김류가 고변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앉아서 잡히기를 기다려 주저하며 나가지 못하였는데, 심기원이 원두표와 함께 그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찌 움직이지 않소?’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날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뿐이오.’ 하였다. 기원이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고스란히 잡혀간단 말이오? 이 마지막 지경에 이르러서 잡으러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금부도사가 어찌 두려울 것이오.’ 하였다. 김류가 옳게 여겨 그 아들 경징(慶徵)을 불러서 전통(箭筒)과 마구(馬具)와 군복을 재촉하여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기원의 군사가 이미 와서 정렬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이 대장좌(大將座)를 설치하여 김류를 부축하여 자리에 올리고, 원두표(元斗杓)와 이해(李澥)ㆍ박유명(朴惟明) 등과 함께 절하여 꿇어앉고는 항오(行伍)를 정돈하여 사현(沙峴)을 넘어갔다. 김류가 늦게 온 것은 실로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밤이 되자, 이괄이 군관 20여 명을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먼저 갔는데 고요하기만 하고 사람의 형적이 없었다. 근심하고 낭패할 즈음에 홀연히 한 점의 불빛이 서북 산 아래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기다리니,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송영중(宋英重)ㆍ한교(韓嶠) 등이 각각 모집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조금 뒤에 장유(張維)가 와서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고변을 하여 벌써 국청을 개설하고 사방으로 나가 체포하는데,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곽(李廓)이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을 나왔다.’고 하였다. 이때 미리 약속하였던 모든 군사가 태반도 오지 않았고 장단(長湍)의 군사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다만 대오(隊伍)도 되지 않던 수백 명 오합지졸만이 이 소식을 듣고는 겁을 내고 무너져 흩어지려 할 판이었다. 이귀가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다 입을 대고 말하기를, ‘대장 김류가 오지 않고 일이 이미 이쯤 되었으니, 반드시 그대가 대장이 되어야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나도 평일에 본래 군사 일에 등한하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힘을 얻기 어렵소.’ 하였다. 드디어 이괄을 추천하여 대장으로 삼고 말하기를, ‘나(이귀 자신)부터 누구든지 규율을 어기면 목을 베시오.’ 하고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줄지어 이괄에게 전하게 하니 이괄이 기꺼이 따랐다. 곧이어 군관들을 불러 써두었던 의(義) 자 수백 조각을 꺼내어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니, 모두 옷 뒤에 달아 표적을 삼았다. 이시백(李時白)이 말하기를, ‘군에 계통이 서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빨리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괄이 곧 그 말대로 하여 엄하게 부서를 단속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심기원과 원두표가 찾아가 김류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반정이 어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김류가 나타나지 않자 다급해진 이귀가 김류를 대신하여 이괄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만약 이대로 반정을 거행하여 성공했다면 이괄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바로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는 대목에서 이괄의 심사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이미 이괄의 난은 싹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설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혁명가 이귀


혁명가 이귀

 

이귀(李貴, 1557-1633)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김류(金瑬, 1571-1648),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이다.

이귀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 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논변하는 글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으로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물러 나와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죄를 청하고 방어 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 해 숙천 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 대책을 올려 후한 상을 받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과 명나라 군중으로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 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 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고, 1616년(광해군 8)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에게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난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 의거를 준비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는데, 아들 시백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귀(李貴)가 귀양 가 있을 때 이상한 돌을 한 개 얻었는데, 이름을 용암(龍巖)이라고 하고 거기에 한 수의 절구를 쓰기를,

슬프다 용이여 덕이 어찌 쇠하였는가 / 吁嗟龍兮德倚衰
물결 복판에 길게 누웠으니 세상이 모르는구나 / 長臥波心世不知
융중에 있는 제갈공명을 비웃지 말라 / 莫笑隆中諸葛老
은근히 세 번 찾음이 어찌 때가 없으랴 / 殷勤三顧豈無時

하였다.

이귀의 아들 시백(時白)이 화답하기를,

당년에 한 나라의 국운이 쇠함이 부끄럽고 한이 되어 / 愧恨當年漢業衰
돌로 변하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구나 / 變形爲石不求知
깊은 못에서 자주 고개를 돌리며 / 深潭入處頻回首
부질없이 융중 꿈이 깰 때를 생각하도다 / 空憶隆中夢覺時

하니 이귀가 기뻐하며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부자지기(父子知己 부자간에 서로 알아준다는 말)라 하겠다.’ 하고는 드디어 비밀스러운 의논을 정하였다.”

 

이귀는 아들만이 아니라 그의 딸도 반정을 도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먼저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동생 자겸(自兼)의 아내였는데, 일찍이 과부가 된 후에 정조를 잃고 절간으로 떠돌아다니며 아미타불을 섬겼는데, 앞 설에는 자겸이 젊어서 불법을 좋아하여 죽을 때에 아내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삼가 불도를 닦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씨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에 들어가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간음한 일이 발각되어 잡히어 심문을 당하게 되니 궁중에 들어가기를 원하므로 광해가 허락하였다. 일설에서 광해가 풀어주고 성중(城中) 자수궁(慈壽宮)에 있게 하였는데 이씨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生佛)이라 일컬어 신봉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한다. 궁중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김상궁과 사귀어 모녀 간을 맺게 되었다. 항상 말하기를, ‘아버지 이귀와 시숙 김자점의 충성을 불행하게도 대북(大北)이 질시하여 항상 모해를 받는다……’ 하였다. 나날이 억울한 것을 호소하고 또 김자점을 후원하여 뇌물을 쓰는데 부족하면 김상궁에게서 꾸어서 다른 궁인에게 주고 또 다른 궁인에게 꾸어서 상궁에게 바치니, 이렇게 돌린 것이 수천 냥이므로 모든 궁인들이 기뻐하여 모두 김자점을 성지(成之)라 자를 부르며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광해가 유상(惟翔) 등이 아뢰는 말을 듣고 매양 잡아 신문하고 싶어도, 상궁과 개똥이[介屎] 등이 말하기를, ‘성지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사람이며, 더구나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다른 모의를 할 것입니까.’ 하니 광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귀는 반정의 주역인 김류, 김자점보다 연장자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보면 이귀가 반정 주역의 연장자로서 오랫동안 일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된 김류도 이귀가 포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귀가 이름 있는 선비인 김자점ㆍ심기원과 무장(武將) 신경진ㆍ구굉 등과 함께 김여물(金汝岉)의 아들 김류와 협의하였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가 시의(時宜)에 부합하지 못한 채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이때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경진의 아버지 신립(申砬)과 김류의 아버지 여물(汝岉)이 임진왜란 때에 충주에서 함께 전사한 인연으로 평소 정의가 두터웠으므로 경진을 시켜 뜻을 통하게 하였더니 김류가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신립 장군의 아들로 인정반정의 중핵 중 한 명인 신경진도 역시 이귀를 통해 반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귀가 당시 일에 강개하여 반정할 뜻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었을 때 신경진(申景禛)은 북우후(北虞候)로 있었는데, 이귀는 신경진이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인 줄 알고 마음으로 서로 깊이 결탁하였다. 이귀가 체직되어 돌아온 후 신유년 4월에 아내의 상사를 당하자 신경진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당시 상황에 말이 미치자, ‘지금 세상이 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인가?’ 하였다. 이귀가 희롱삼아 답하기를, ‘이때는 태평성대라 할 만한데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고변(즉 고발)을 할 것이다.’ 하였더니, 경진이 “내가 먼저 고변할 것이니 어쩔 것인가?” 하여 이귀가 그 뜻을 추측하고 드디어 의논을 정하였다.”

혁명가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면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광해군의 폐정을 반대한 여론의 동향이 중요한 지렛대가 되기는 했겠지만 이귀에 대한 신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조정 안에서 중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걱정하여 그 사위 장신(張紳)을 시켜 설득하게 하였더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이귀도 함께 공모하였는가?’ 하므로 장신이 그렇다고 하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허락하였다. 장유(張維, 장신의 형)가 이귀에게 회답하여 알리니 이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며 사례하였다. 드디어 흥립을 시켜 손수 글을 써서 장단(長湍)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흥립이 안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혁명은 그 시작이 승패의 중요한 갈림이 되는데, 이귀가 거사 초기에 반정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내용들이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이흥립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

“이날 인조가 특명으로 이귀를 호위대장에, 신경진을 부장에, 김자점ㆍ심기원ㆍ심명세ㆍ송영망(宋英望) 등을 종사관에 임명하였다. 이서ㆍ이괄ㆍ이흥립 등도 모두 여기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절제를 받지 않는 자는 먼저 베고 뒤에 알리게 하였다. 모든 일이 새로 시작되어 육조와 모든 관아에 인원이 미처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설치와 시행이 모두 이귀에게서 나왔다.”

반정을 일으키고 그 빠른 수습을 이귀가 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서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의 윤허를 받아야 혁명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역시 이귀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날 이귀가 명을 받들어 도승지 이덕형과 함께 의물(儀物)을 갖추어 대비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그 아들 시백(時白)을 시켜 인조에게 아뢰어 인조가 곧 서궁으로 가서 문안드리니, 대비가 드디어 임금으로 책립하자는 명을 내렸다.”

“이때 인조가 또 이정귀(李廷龜)를 보내니, 대비가 분판(紛板)에 글을 써서 내보이기를, ‘좋은 대궐에 앉아서 스스로 하면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기에 꼭 나를 청하는가?’ 하였다. 인조는 대비가 끝내 마음 돌릴 뜻이 없음을 알고 해가 저물 즈음, 수레를 갖추고 친히 서궁에 나아가는데 폐주(광해군)를 여(輿)에 태워서 뒤따르게 하였다. 그래도 대비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므로 인조가 땅에 엎드려 대죄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대비가 또한 전국보(傳國寶 옥새)를 들이라고 재촉하므로 이귀가 대답하기를, ‘대비께서는 전국보를 받아서 장차 무엇에 쓰시렵니까. 신의 머리가 부러져도 국보는 들이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대비가 ‘오늘 한 일을 내가 상세하게 알지 못하니 글을 써서 들이라.’ 하므로, 이귀가 김대덕(金大德)을 시켜 자초지종을 모두 쓰게 하고 또 임기응변으로 말하기를,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이 사방의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모일 것입니다.’ 하였다. 대비가 친히 안뜰에 서서 시녀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대장이 어찌 나를 의심하느냐? 나에게 친아들이나 있느냐? 국보를 재촉하여 거두는 것은 국체(國體)를 존중하기 위함이다.’ 하니 이귀가 ‘진실로 그러시다면 정전(正殿)에 납시어 임금을 책립하고 대신을 불러 국보를 전하는 것이 옳겠사온데, 하필 국보를 빨리 들이라 하시나이까?’ 하였다. 이렇듯 상하가 서로 고집만 피우고 있을 때, 인조가 박홍구(朴弘耈)에게 명하여 국보를 받들어 들이게 하고, 또 계자(啓字)도 들이게 하였다. 대비가 대신과 도승지에게 명하여 오랫동안 뜰아래 엎드려 있던 인조를 받들어 들어오게 하여, 비로소 책립하는 예를 행하였다.”

“대비가 전후의 어렵고 위태로웠던 사실을 역력히 진술하고, 또한 조종(祖宗) 이래 임금이 신하와 백성에게 행한 도리에 대해 말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든 일이 겨를이 없다고 여러 번 청하고 인조도 또한 겸손함이 매우 간절하니, 대비가 천천히 옥새를 주면서 ‘잘하시오.’ 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들을 보면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준비하고 결행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귀의 민활함과 주도면밀함이 잘 드러난다. 게다가 아들과 딸들까지도 반정에 참가했다. 혁명가 이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인조(1595-1649)는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이다.

자는 화백(和伯)이고, 호는 송창(松窓)이며 휘는 종(倧)이다.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이고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繼妃)는 조창원(趙昌元)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인조는 조선의 제16대 왕이고 15대 왕은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조선의 제16대 왕이 되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그 후에도 병란을 겪었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고 형제의 의(義)를 맺었다. 바로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인조는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는데,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하고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곧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시대의 양대 전란이다. 임진왜란은 선조 때에 병자호란은 인조 때에 겪은 국난이다. 역대로 사가들이 선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처럼 인조 또한 평이 좋지 않다.

애초에 반정을 도모하던 세력들은 광해군을 대신할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다. 봉건왕조에서 반정의 최종적인 성공은 반정 후에 추대된 왕에 달렸기 때문이다. 반정 세력을 옹호하면서도 국론을 한데로 모을 수 있는 적임자.

 

반정을 의논할 적에 반정으로 모실 왕을 논하는 이야기들이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신경진(申景禛)이 승평군(昇平君, 김류)과 반정을 의논하면서 먼저 추대할 분을 정하려 할 때에 공이 인조대왕을 두고 말하기를, ‘신성문무(神聖文武)가 실로 천명을 받을 만한 인물이다.’ 하였다.”

“처음에 여러 사람이 의거(義擧)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용의 걸음과 범의 걸음 같으며,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으니 신인(神人)의 주인이 됨직하다.’ 하였다.”

“신경진이 평소 김류와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하루는 조용히 글 배우기를 청하고는 바로 사략(史略)을 내어놓았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내치다. [伊尹放太甲 ]’는 대목에 이르러서 책을 덮으며 탄식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일이 옳은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태갑이 탕(湯)의 법도를 뒤엎었으니 내쫓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하였다. 경진이 말하기를, ‘요즈음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는 ‘옛날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경진이 울며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나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다.’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그것이 내 뜻이다.’ 하였다. 이내 묻기를, ‘마음 가는 데가 어디 있는가?’ 하니, 경진이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바로 선조의 친손인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니 하늘이 주신 바이다.’ 하여 마침내 의논이 결정되었다.”

 

이 기록들은 반정이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주상 인조에 대한 평임을 감안하더라도 인조의 풍모를 가늠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의 왕으로 추대될 만한 인물로서의 인조의 모습 말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외에도 인조의 풍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록들이 다수 나온다.

“임금은 성품이 매우 공손하고 검소하여 항상 사치를 경계하고 음악과 여색, 진기한 오락을 아예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하교하기를, ‘사치와 화려함은 말류의 폐습이니, 이 어찌 다스려진 세상에서 숭상할 일이겠는가. 우리 조종 때부터 절약과 검소를 몸소 행하여 윗사람이 표본이 됨으로써 뭇백성이 감화되었으니, 순박한 풍속이 수백 년 동안 흘러 내려왔다. 그동안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어지러운 조정의 군신들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화려함을 숭상하여 의복과 거마와 궁실 등을 사치스럽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염치(廉恥)가 이로 인하여 무너져 없어지고 백성이 이로 인하여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대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먼저 이러한 풍습을 없애려고 생각하였으나, 물들어 더러워진 지 이미 오래이므로 갑자기 개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부터 백성을 바꾸어 다스리는 법은 없으며, 위에서 좋아하는 것은 아래서 반드시 더 좋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치한 풍습이 변하지 않는 것은 위에서 모범을 보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무릇 우리 종실과 공, 경, 대부들은 모두 나의 뜻을 체득하여 혼인 잔치와 손님 대접하는 것이나 거마, 의복의 제도에 검소와 절약을 힘써서 나쁜 풍습을 크게 고쳐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인조가 검소한 덕이 있다는 설명은 선조가 검소한 덕이 있었다고 밝힌 <연려실기술> 선조 조목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두 임금이 공히 존귀한 왕좌에 있었음에도 검약한 생활을 했다는 점은 대서특필할 만하다. 이는 두 임금이 천성으로 검약한 덕을 숭상한 바도 있었겠지만 국란을 겪은 후 산업과 물자가 궁핍한 시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레 더욱 검소한 덕을 실천했을 수도 있겠다.

“임금이 상벌을 삼가고 벼슬을 아꼈으며 찡그리고 웃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이형익(李馨益)과 박군(朴頵)은 의술로 사랑을 받았으나 박군은 육품(六品)에 지나지 않았고, 형익은 삼품산질(三品散秩)이었다.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하였으며,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였고, 임금의 한 마디 칭찬과 꾸짖음이 곧 평생의 판정이 되었다. 궁중에서 쓰는 상(床)과 자리는 아예 붉은 칠을 하지 않았으니, 그 검소한 덕이 이와 같았다.”

“임금은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나 아예 한 구의 시도 짓지 않았고, 비답하는 문자도 또한 내시(內侍)에게 베껴서 쓰게 하고, 손수 초(草)한 것은 물 항아리에 담가 찢어버렸으므로 종친과 왕자의 집에는 몇 줄의 필적도 없었다.”

 

인조가 말이 무겁고 감정 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 인조의 행위를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성으로 ‘신성문무(神聖文武)’ 하거나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기도 하겠지만 신하들이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도록 하고, 몇 줄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데에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고심이 배여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임금의 체모가 준엄하고 무거우며 덕량이 깊고 넓어 몸가짐 하나하나가 규범에 어긋나지 않았다. 보위에 있은 지 27년 동안에 효를 다하고 윤리를 돈독히 하며, 학문을 닦고 어진 이를 가까이 두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하며, 교화를 두텁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궁중을 엄하게 다스리고 벼슬을 아끼며, 절약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간언을 용납하며, 형옥을 보살피고 나쁜 당파를 없애는 것이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와 조금도 중단이 없었다.”

 

위의 글은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인조 지문(誌文)의 일부이다. 이는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이 인조에 대한 총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조선의 왕으로 국부의 체통을 가지고 있다는 평이다. 물론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항복, 반정의 정신적 지주


이항복, 반정의 정신적 지주

 

<연려실기술>에는 계해정사(癸亥靖社) 조목을 두고 인조반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한다.

인조는 1623년 곧 계해년에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이 중심이 되어 광해군(光海君)을 내쫓고 인조(仁祖)를 옹립하는데, 이를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 부르고 반정이 성공한 후에 계해정사공신(癸亥靖社功臣)을 책봉한다.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의 10명은 1등공신,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공신,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8명은 3등공신이며, 이에 책록된 공신은 총 53명이다.

반정에 참가한 문신과 무신이 모두 이항복의 문인이었다고 <연려실기술>은 이성령(李星齡)이 지은 <일월록(日月錄)>을 인용한다. 이성령의 기록은 반정과 이항복이 밀접한 상관성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는 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항복이 귀양길에 오를 때에 작별하면서 김류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이는 관옥(冠玉, 김류의 자)뿐이다. 힘써주기를 바란다.’ 하니 김류가 묵묵히 있었으나 김류의 뜻은 이미 이때에 정해졌다고 한다. 이 말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반정에 가담한 문신과 무신이 모두 항복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므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여 이런 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라는 이성령의 말은 이항복이 반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지만 도리어 이항복이 반정을 적극적으로 도모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긴 이어서 나온 인용문은 이항복이 심지어 김류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지적하면서 흐느끼기까지 했다는 내용이다.

“광해주 10여 년 동안에 조정은 문란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고, 대비를 감금하여 아침저녁으로 없앨 궁리를 하니 이항복이 김류(金瑬)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요사이 임금의 정사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우니 우리 무리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다.’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우니 김류가 그 뜻을 알았다.”

 

이쯤 되면 이항복이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반정의 주역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확실히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박세채(朴世采)의 <남계집(南溪集)>을 인용하여 이항복이 반정에 끼친 영향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항복은 광해주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서북도(西北道)의 관리 임명을 전적으로 주관하였다. 또 김류를 종사관으로 삼고 무신 신경진(申景禛, 平城)을 비롯한 구굉(具宏, 綾城), 구인후(具仁垕, 綾川), 정충신(鄭忠信, 錦南) 이하와 문사로서 선배인 신흠(申欽)을 비롯한 이정귀(李廷龜), 김상헌(金尙憲)과 후배인 최명길(崔鳴吉, 完城)을 비롯한 장유(張維, 新豐), 조익(趙翼, 浦渚), 이시백(李時白, 延陽) 이하 그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반정공신의 여러 사람들은 대체로 모두 항복이 평소 길러둔 사람들이었으니, 옛날에도 이만큼 사람을 많이 얻은 이가 없었다. 반정하던 날에 항복이 김류, 이귀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거사가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박세채의 기록은 이항복이 실제로 반정을 지휘하지는 않았다는 점만 빼면 반정의 총설계자라는 점을 부각한다.

이항복이 김류와 이귀의 꿈에 나타나 거사를 독려했다는 기록은 <백사행장(白沙行狀)〉에 기록된 내용과도 상호 연결된다.

“무오년 5월에 이항복(李恒福)이 북청(北靑)에 귀양 가 있었다. 하루는 꿈에 선조가 용상에 앉아 있고, 유성룡(柳成龍)ㆍ김명원(金命元)ㆍ이덕형(李德馨)이 함께 입시하고 있었다. 선조가 이르기를, ‘혼(琿 광해의 이름)이 무도하여 동기를 해치고 어머니를 가두어 두니 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항복이 아니면 이 의논을 결정하지 못하겠으니 속히 부르소서.’ 하였다. 이에 항복이 깜짝 놀라 깨어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살아있을 날이 오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이틀 뒤에 죽었다.”

 

선조는 용상에 앉아있고 유성룡(柳成龍)ㆍ김명원(金命元)ㆍ이덕형(李德馨)이 입시하였는데, 선조가 이항복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명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이항복이 죽고, 후일 반정 당일 반정의 주역인 김류와 이귀의 꿈에 이항복이 나타나 거사를 독려하였다는 이야기는 절묘하다.

이항복은 정사년에 폐모(廢母)가 부당함을 간하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 가서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는데, 귀양을 가기 전에 광해군의 실정을 해학으로 지적한 일화 한 토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공은 농담을 즐겼다. 일찍이 비변사 회의가 있던 날 공이 유독 늦게 왔으므로 혹자가 말하기를, ‘어찌 늦었습니까?’ 하니 공이,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늦었소.’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하니, ‘환자(宦者)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하자 여러 정승이 배를 잡고 웃었다. 공의 이 말은 비록 익살에서 나왔으나, 대개 당시의 일이 대부분 허위를 숭상했기 때문에 풍자의 뜻을 붙인 것이다.”

“환자(宦者, 내시)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당시의 국정을 말도 안 되는 말로 비난했으니 비수를 품은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