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석(黃胤錫)


황윤석(黃胤錫)                                                              PDF Download

1729년(영조 5)∼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이며 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 등으로도 불렀다. 1727년 4월 8일에 전라도 고창 흥덕현 구수동(지금의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만은(晩隱) 황전(黃廛)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호(美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인이다.

황윤석은 5․6세 때 할머니 김씨 부인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7세 때 「소학」․「사기」․「사서오경」․「제자백가」 등을 두루 읽기에 이르렀다. 이미 6세 때에 쉬운 글자를 맞추어 시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문학적 재주가 뛰어났다. 천성이 워낙 책을 좋아하여 외가의 서재에서 수일 동안 책을 읽느라 허기는 물론 집에 돌아갈 생각도 잊었다고 한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 구암(龜巖) 황재중(黃載重)이 농암 김창협의 문인이었다. 아버지 황전은 김창협 문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로써 낙론계열과 집안 대대로 교유하는 사상적 기틀이 만들어졌다. 황윤석은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학맥을 계승하며 주자․송시열․김창협․김창흡․김원행을 존숭하며

“우리의 가학은 진실로 우암(송시열)과 농암(김창협)의 학맥”

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우암은 주자의 정맥이고 농암과 삼연(김창흡)은 우암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는데, 송시열․김창협․김창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식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후일 김원행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게 되는 요인도 가문의 학문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김원행은 김창협의 양손자로, 정통 노론계열 학통을 이으면서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당시 많은 제자들을 강학하고 있었다. 황윤석은 36세 때 석실서원에 있던 김원행을 찾아갔는데, 이때 홍대용을 비롯한 김원행의 여러 제자들을 만나 이들과 교유하면서 서양과학을 접하는 등 학문의 폭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 이에 황윤석은 문학․경학․예학․천문․지리․의학․풍수 등 정치․경제․사회․농업 제반 분야의 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스승 김원행이 ‘진정 호남의 호걸의 선비[眞湖南豪傑之士]’라 한 것과 서명응의 ‘박학지사(博學之士)’, 영조의 ‘박식자(博識者) 등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학문적 박학성에 연유한다.

황윤석의 행장에는

“옛날의 군자는 하나의 사물이라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라고 하여 학문하는 자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박학한 선비로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가서 배우고 토론하는 등 배움에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았고, 중국에서 새로 나온 서적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입수하여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등 그의 박학에 대한 열의를 볼 수 있다. 황윤석이 남긴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저작물은 그가 어떤 자세로 학문에 임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죽기 전까지 남긴 저서로는 「이재난고(頤齋亂藁)」․「이수신편(理數新編)」․「산뢰잡고(山雷雜攷)」․「자지록(資知錄)」․「역대운어(歷代韻語)」․「성씨운휘(姓氏韻彙)」․「성리대전주해(性理大全註解)」․「구경잡록(九經雜錄)․「소학강의(小學講義)」 등이 있다. 아버지 황전 역시 책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누군가가 책을 팔러오자 밭 갈던 소와 책을 교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황윤석은 10세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죽기 이틀 전까지 계속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이재난고」가 그것인데, 분량도 방대하지만 그 내용 또한 다양하여 그의 학문적 성향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천문(天文)․역학(易學)․견문(見聞)․기행(紀行)과 학술적 논설 및 그 시대의 생활상 등 조선후기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일기 내용 중의 과거 시험의 폐단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황윤석이 경희궁 후정시(後庭試)에 응시한 1764년 4월 1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민홍열(閔弘烈)이 장원이었고 향유는 모두 낙방했다. 이날 초저녁에 임금이 새로 과거에 합격한 다섯 사람이 모두 경성에서 나오고, 향유 중에는 한 사람도 참여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일 다시 경희궁에서 후정시를 열라고 특별히 명했다.”

지방출신인 향유(鄕儒)와 달리 서울출신인 경유(京儒), 경유 중에서도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정치적 위세는 과거시험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과거시험에 경유들만 합격하고 향유는 한명도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향유들을 위한 과거시험을 다시 시행하라는 명이다. 이것은 향유들을 배려한 조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임금부터 이미 경유(京儒)와 향유(鄕儒)의 구분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만큼 경유들은 과거급제에 유리했고, 경화세족의 자제들은 급제가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다. 황윤석은 이러한 과거시험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1766년 2월 16일 일기 중의 한 대목이다.

“지금 재상 이하부터 처음 벼슬한 집에 이르기까지 무릇 조금의 세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방(榜)에 게시한 명단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없고, 권세가에 빌붙은 향유도 많이 합격한다. 그러나 이렇지 않는 사람은 낙방한다. 심하다! 과거의 폐단이 하늘을 찌름이.”

 

그해 3월의 정시(庭試) 결과는 합격한 향유는 한 사람도 없었다. 6명이 합격했는데, 모두 쟁쟁한 가문의 자손들이 합격했고, 향유는 모두 떨어졌다. 이것은 비단 향유만 겪는 설음은 아니었다. 노론 집권층 내에서도 인사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인맥에 의해 합격자가 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장에서부터 경유들, 특히 경화사족들은 위세를 부리면서 특별하게 굴었다. 과거장에 시중을 드는 수종을 3․40인씩 데리고 들어와 우산과 장막을 둘러 자리를 맘대로 넓게 차지하는가 하면, 향유가 부득이 인접한 자리를 잡으면 칼을 뽑아 머리를 부수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들은 시험 정보에 밝아 시험 감독관이 누군지 짐작했으며, 오늘날의 과외선생에 해당하는 독선생을 모시고 시험 답안지를 본격적으로 익혀 사륙변려문에 능하기도 했다. 합격자 예상에도 밝았으며, 과거시험장에서 글씨는 대신 써주는 서수(書手)를 데리고 와서 시험지를 대필하게 하였다. 그 모든 것은 한미한 가문에서 올라온 향유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향유들은 오직 홀로 자기가 준비한 공부로 자기 손으로 답안지를 써서 제출하는 것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1766년 3월 3일 일기의 내용이다. 황윤석은 두호(杜湖)로 조정(趙晸)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댁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일을 위로하니 조정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 애는 초시도 매우 다행이라네. 과거시험을 주재하던 시험관이며 재상인 김상복(金相福)이 과거시험에서 서너 명을 선출하였는데, 대제학 정실(鄭實)의 아들 정지환(鄭趾煥)이 명성이 있어 장원이 되었네. 임금께서 합격자의 총 명단을 물리치시고 이전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에게 2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고쳐 내라고 다시 명하시니 곧 장원은 이한경(李漢慶)이 되었지. 그는 작고한 남인출신으로 참판 이제화(李齊華)의 아들이고 지금 명성이 있는 이성경(李星慶)의 동생이라네. 이런 과거시험에서 어찌 쉽게 합격하겠는가.”

이것은 명문세족의 집안출신이 아니고서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려움을 토로한 글로써, 과거제도의 많은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1770년 9월 10일의 일기에는 과거시험장에서 생긴 불상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경의궁(慶熙宮) 흥화문(興化門) 안으로 과거를 응시하러 갔다. 그런데 과거 시험장 문에 들어서서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뒷사람들에 의해 급히 떠밀려 넘어지면서 왼쪽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져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부득이 상처의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를 감싸고 수습하느라 시험의 답안지를 늦게 제출하게 되었다.
이처럼 황윤석의 일기인 「이재난고」 가운데 상당한 분량은 경화사족들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할애되어 있다. 이것은 황윤석의 진로나 벼슬길과도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예민하게 수집․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재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윤석, 사환을 위해 떠돈 시간의 내면풍경」(이지양, 「고전과 해석」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08), 「이재 황윤석의 詩 연구」(김대하, 공주대학교 석사논문, 2012)

임윤지당(任允摯堂)


임윤지당(任允摯堂)                                                    PDF Download

1721(경종 1)∼1793(정조 17) 조선후기의 여성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윤지당(允摯堂)이라는 호만 전한다.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任適, 1685∼1728)으로, 권상하의 문인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호조정랑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윤부(尹扶)의 딸이다. 조선의 6대 성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의 여동생이다. ‘윤지당’은 오빠 임성주가 지어 준 당호이다.
동생 임정주(任靖周, 1727∼1796)는 「윤지당유고」의 「유사(遺事)」에서 ‘윤지당’이라는 호를 쓰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윤지당은 어렸을 때에 우리 둘째 형인 임성주가 지어주신 것이다. 주자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과 문왕의 부인인 태사를 존경한다’는 말에서 따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실제로 태임의 친정이었던 지중씨(摯仲氏, 임씨)의 ‘지’라는 글자를 취하신 것이다. 지임씨를 독실히 믿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우리 이종형 한정당이 손수 도장을 새겨서 주니 이로부터 집안에서 윤지당이라고 불렀다.”

오빠 임성주가 유교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인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의 덕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윤지당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태임의 성씨가 임씨였기 때문에 임성주가 더욱 친근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임정주는 윤지당이 어릴 때부터 학문을 할 수 있었던 집안 배경을 적고 있다.

“어릴 때부터 빠른 말이나 황급한 거동이 없었고,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하셨다. 여러 오빠 형제들을 따라 경전과 역사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배웠고, 때때로 토론을 제기하였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둘째 형님(임성주)께서 기특히 여기시고 「효경」․「열녀전」․「소학」 등의 책을 가르치셨는데, 누님이 매우 좋아하셨다. 낮에는 종일토록 부녀자의 일을 다해내고 밤이 깊으면 소리를 낮추고 책을 읽으셨다. 뜻이 못소리를 따르는 듯하고 정신이 책장을 뚫을 듯하셨다. 그러나 학식을 감추어 비운 듯이 하셨기 때문에 친척들 중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대부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윤지당도 남자 형제들 곁에서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읽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듣다가,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오빠 임성주로부터 「효경」․「열녀전」․「소학」 등을 배우게 되었다.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전념하고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으므로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 진취를 알지 못하였다. 윤지당이 어릴 때부터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총명함도 있었지만 오빠 임성주의 가르침과 같은 집안의 학문적 환경이 뒷받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정주가 쓴 「유사」에는 윤지당의 정숙한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7․8세 때 어떤 일 때문에 외가에 가서 몇 달을 머물게 되셨다. 매일 저녁 어른이 잠자리에 드시면 비로소 잠옷으로 갈아입고 저고리와 치마를 잘 정돈하여 시렁에 올려놓고 잠드셨다. 깨어날 때는 반드시 어른들보다 먼저 일어나 침구를 거두고, 세수하고 빗질하고 평상복을 갈아입으셨다. 종일토록 어른을 모시고 앉아 있으면서 발자취가 마루 아래로 내려가시는 일이 없었다. 돌아오실 때까지 이와 같이 하기를 한결같이 하시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되던 해 청주근처 옥화(玉華)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 17세 때 조상들의 선영이 있던 여주에 와서 살다가 19세(1739) 때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에게 시집갔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27세 되던 1747년(영조 23)에는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후 윤지당은 원주에서 시동생 형제들과 한 집안에서 같이 살았다. 시동생들은 윤지당을 공경하였으며, 섬기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 큰 시동생이었던 신광우(申光祐)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엘리트 관료였다. 시댁의 경제적 환경은 여유가 있었으며, 이로써 윤지당의 학문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가 1793년(정조 17) 음력 5월 14일 원주 자택에서 73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윤지당이 작고한 지 3년 후인 1796년(정조 20)에 그녀의 문집이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라는 이름으로 친정 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에 의해 간행되었다.

 

윤지당은 자신의 저술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알았고, 이미 자란 다음엔 더욱 좋아하기를 입이 고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되어 그만둘 수 없었다. 이에 서적에 실려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을 다해 탐구한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어느 해에 죽을 날이 얼마 안되어 갑자기 초목처럼 썩어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마침내 가정일 틈틈이 글을 써서 뜻밖에도 모두 40편이 되었다.”

윤지당이 남긴 40편의 유고를 남겼으나 동생과 시동생이 유고를 정리하면서 35편으로 산정하여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윤지당은 역대 유명 인물들에 대한 논평을 즐겼던 것 같다. 「윤지당유고」에는 여러 인물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다. 「최홍이녀(崔洪二女)」의 전기는 경상도의 한 모녀가 억울하게 죽은 남편과 아버지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원수를 갚은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이 전기에서 두 여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두 여인의 일은 정절과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용기도 있다. 비록 남자라 하더라도 그들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시경」에서 ‘저 자식된 이여, 목숨을 바쳐도 뜻이 변치 않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두 여인을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윤지당은 최씨와 홍씨 두 여인의 용기를 남자라도 미칠 수 없는 경우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윤지당은 이들의 행위가 순수한 성품에서는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줌으로써 여성도 남자들과 같이 효와 의리를 실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윤지당은 11편의 논(論)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해 평가하였는데, 특히 왕안석(王安石)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왕안석은 송나라의 재상으로 개혁정치를 추구한 인물이다. 도의와 명분을 숭상하던 윤지당은 왕안석이 인의(仁義)를 저버린 채 부국강병만을 취하는 행동은 잘못이라고 보았으며, 왕안석이 일찍 죽은 것은 송나라를 위해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이렇게 볼 때, 윤지당은 실용과 공리보다는 성리학적인 명분에서 내면의 도덕성을 가진 사람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윤지당은 사마광(司馬光)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를 함께 내리고 있다. 사마광을 사마온공이라 높이면서 “사마온공은 송나라의 어진 정승이다. 그가 평생에 행한 일에는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었다고 하니, 그 어질고 현명했던 것을 알 수 있다”라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역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비판하였는데, 즉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비의 촉한을 대신하여 조조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이나, 또한 조조가 헌제(獻帝)를 협박해서 재위를 찬탈한 인물인데도 한나라의 헌제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윤지당의 학문적 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둘째 형님(임성주)께서 양근 군수로 계실 적에 <임성주의 아들> 협과 홉 형제가 별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누님께서 원주에서 오셔서 관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조카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렸다. 하루는 누님께서 ‘오늘 공부는 어떠하냐?’라고 물으시니 조카는 ‘날이 더워 고통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부채질을 하느냐?’고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누님께서는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데, 부채질할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라고 하셨다.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미루어보면 누님의 존심양성(存心養性)하신 수양의 경지를 가히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윤지당유고」, 「녹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윤지당의 생애와 「윤지당유고」(최연미, 「서지학연구」17, 서지학회, 1999), 「<윤지당유고>를 통해 본 임윤지당의 생애와 사상」(전혜원, 전북대학교 석사논문, 2007)

조중회(趙重晦)


조중회(趙重晦)                                                              PDF Download

1711년(숙종 37)∼1782년(정조 6)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익장(益章). 아호는 쓰지 않은 듯. 찾아볼 수가 없다. 단종 때의 충신인 조여(趙旅)의 10대 손으로, 아버지는 영조 때 도승지를 지낸 조영복(趙榮福)이고 어머니는 이만봉(李萬封)의 딸이다. 당시 노론 가운데 낙론을 대표하던 이재(李縡, 1680∼1746)의 문인이다.
조중회는 25세(1736) 때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관직의 임명은 그 후 3년 뒤인 영조 15년(1739)에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에 처음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파직과 체직 및 유배 등의 정치적 굴곡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정조 3년(1779)에 병으로 사직할 때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으며,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더구나 영조 말년에는 육조(六曹)에서 호조와 형조를 제외한 나머지의 판서직을 모두 역임한 바 있는 실력 있는 정치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의 학문적 깊이나 성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와 정조 연간에 조중회에 관한 기사가 모두 134건이나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학자라기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간 인물로 판단된다. 정조 6년(1782) 4월에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듬해에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그의 정치적 여정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일이다. 그는 영조 27년(1751) 11월 7일에 사은겸동지사의 일원으로 연경으로 떠나 이듬해 4월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나이 만 40세 때의 일이다. 조중회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연행의 길을 떠나기 전에 33인이라는 적지 않는 지인들로부터 석별의 정을 담은 전별시문을 받게 된다.
전별시첩」은 1751년(영조 27)에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행을 떠나는 조중회를 송별하는 33인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전별’의 사전적 의미는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의 뜻이니 전별시란 작별을 위한 잔치 석상에서 석별의 정을 담아 지은 시를 말하는 것이다. 「전별시첩」에 실린 시문들은 바로 연행을 떠나기 직전인 그해 10월 말과 11월 초에 쓰여진 것이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들은 본래 신라와 당나라간의 교류를 통하여 일찍이 개척된 해로로 통행하였다. 즉 황해도의 풍천이나 평안도의 선주에서 배를 타고 황해도를 건너 산동성의 등주로(登州路)를 통해 북경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연행 노정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방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육로가 정착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연행노정기(燕行路程記)」에는 이러한 육로의 연행 길이가 총 3,069리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성에서 의주까지 1,050리, 의주에서 책문까지 120리, 책문에서 심양까지 445리, 심양에서 산해관까지 787리, 산해관에서 황성(皇城)까지 667리로, 총거리가 3,069리가 된다.

지금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1,200km 정도가 된다. 영조 41∼42년(1765∼1766)의 연행기록인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을 보면, 연행사가 11월 2일에 한성을 출발하여 다음달 27일에 북경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경에 들어가는 데만 55일이 소요되었고, 하루 평균 59리(22.3km)를 이동한 셈이 된다.
육로의 연행노정은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을 거쳐 산동에서는 청석령(靑石嶺)․회녕령(會寧嶺)․소석령(小石嶺) 등의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고, 압록강을 건넌 뒤에도 팔도하(八道河)와 태자하(太子河) 등의 큰 강을 건너야 하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이었다. 당시에 말과 수레 및 도보에 의존하는 교통수단으로는 대단히 고단하고 위험한 길이었으며, 특히 음력 동짓달에 출발하는 동지사의 경우는 북경(연경)에 이르기까지 한겨울의 추위와 싸워야 했으므로 더욱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연행의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작성한 각종 연행록이 현재 수백 종 전래되고 있다. 이들 연행록에는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중국의 수도에 가서 그들이 해낸 일, 본 것과 들은 것, 느낀 것, 준 것과 받은 것, 체험한 일 등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행록의 기사 중에서 연행 중에 겪은 어려움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연행노정의 멀고 험난함과 함께 숙소의 불편함, 허술한 의복,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물 등도 연행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뿐만 아니라 조공국(朝貢國)의 사신으로서 겪어야 했던 수모와 심적 부담감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중국 측의 관리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거나 조선의 사신을 변방의 몽고와 같이 취급하여 대접한 사례가 각종 연행록에는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
연행은 대개 5개월 정도 뒤에는 다시 돌아와 헤어졌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은 험난한 여정 때문에 먼 지방으로의 부임과도 같은 전별연이 베풀어져 석별의 정을 나눈 것으로 여겨진다.

전별시첩」에는 시문을 읽을 수 없는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모두 32장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형식별로 나누어 보면, 7언시가 20장, 오언시가 4장, 문장이 8장이다. 이들 시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골라 내용을 소개한다.

남쪽 고을에도 눈바람부니 걱정되어 잠못이루는데
南城風雪耿無眠

가만히 셈해보니 살져 누린내 난지가 백년도 지났네.
黙筭腥膻過百年

진중하게 수레와 말을 몰아도 늦지는 말아야 하니
珍重使車驅莫緩

우두커니 서서 중원소식 돌아와 전해주길 기다리네.
中原消息竚歸傳

이것은 맨 첫 장에 수록된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의 시이다. 이 시의 작가인 이기진은 조중회가 여행을 떠나기 2년 전 같은 계절에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사람이다. 험난한 여정과 한겨울의 추위를 이미 경험한 바 있는 그로서 아끼는 후배에 대한 걱정과 배려를 시에 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걱정뿐만 아니라,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연행사절을 이끌되 너무 늦게 움직여 북경에 도착하는데 차질을 빚어서도 안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고 있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서는 무사히 연행에서 돌아와 재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계풀 자라나는 추운 겨울에 그대는 수레를 이끌고
薊野寒生學士車

눈 내린 아침에 의관을 갖추고 오랑캐에게 절을 하네.
朝衣推雪拜穹廬

옥하관의 밤을 밝히는 외로운 등불
玉河館裡孤燈夜

문득 예전에 대궐에서 올린 상소문이 생각나네.
應憶天門舊上書

이것은 병조판서 직을 수행하고 있던 진암(晉庵) 이천보(李天輔)의 시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한지 9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천보는 청의 조정을 오랑캐라고 표현하여 명나라를 흠모하고 북방 민족이 건국한 청나라에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공문서가 아닌 사적인 시문이나 서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릉의 송백에 저녁 구름이 얽히고
驪陵松柏暮雲縈

천추에 남은 한이 가슴에 맺혀 평온하지 못하네.
遺恨千秋鬱未平

해마다 가죽과 비단을 실고 헛되이 달려가 절하니
皮弊年年空走拜

험한 일하는 사신들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네.
不知何處有荊卿

이것은 조중회와 나아가 동갑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시이다.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하는 못마땅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격려나 안부보다는 작가 자신이 그간 품어왔던 심정을 토로하는 듯한 내용이다.
전별시의 내용은 주로 험난한 여정을 출발하는 사신에게 용기를 가지라는 격려의 내용, 조선의 사신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북방의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야하는 데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내용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로써 명나라를 흠모하고 병자호란으로 당했던 굴욕이 오랜 원한이 되어 당시까지도 선비들의 가슴에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조중회 贐行 <餞別詩帖>에 관한 연구」(김동환, 「서지학연구」45, 서지학회, 2010)

이기경(李基敬)


이기경(李基敬)                                                              PDF Download

1713년(숙종 39)∼1787년(정조 11)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이기경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백심(伯心), 호는 목산(木山)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익열(李翊烈)이고 어머니는 오대성(吳大成)의 딸이다. 1713년 1월 11일 나주 도림촌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50세 무렵 벼슬에 물러나 전주 오목대 아래에서 살며 후학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호를 ‘목산’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매일 50편의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1726년 이유(李瑜, 1690∼1752)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호남 선비들을 상대로 백일장을 베풀었을 때, 이기경은 14세의 나이로 백일장에 나아가 모든 부문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의 집안은 전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호남의 명문가였다. 이기경은 20대 초까지 향리에서 학문을 탐구하다가, 한양으로 상경하여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는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그 소임을 다하고자 일기를 쓰며 자신을 성찰하였다. 특히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에는 진솔하게 올린 상소가 너무 과격하다고 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기경은 5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 오목대(梧木臺) 아래에 거주하며 성리학을 탐구하는가 하면, 인근의 학자들과 담론을 나누면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동문인 순창의 양응수(楊應秀, 1700∼1767)와 고창의 황윤석(黃胤錫, 1729∼1791) 등 여러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는 관료생활로 탐구하지 못한 성리사상을 면밀하게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호남의 학문은 김인후(金麟厚)와 기대승(奇大升)에게서 연유하여 박광일(朴光日)과 이기경에 이르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이기경의 학문은 호남을 대표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조가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향리에 물러나기를 쉽게 여긴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진퇴관이 분명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소신이 남달라 영조가 지극히 총애하였다.

1759년(영조 35) 2월에 영조는 이기경을 호조참의에 제수하면서

“네가 제수하지 아니하면 누가 능히 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에 대한 기사가 총 69차례 나온다. 이를 보면 이기경은 그저 전주지역만의 인물이 아니라 중앙무대에서 크게 활약한 관료이며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1779년(정조 3) 2월에는 영조의 탕평책을 가장 반대하였던 사람 중의 하나인 홍계희(洪啓禧)와의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이정유서(二程遺書)」를 분류하는 등 성리학을 탐구하였으며, 「해상단방(海上單方)」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해상단방」은 집안에 처할 때 자세, 교제할 때 마음가짐, 그리고 벼슬에 나아가 해야 할 역할 등을 옛 성현들의 글을 인용하여 저술한 것이다. 1785년 73세 때에는 스승 이재의 「도암예설(陶庵禮說)」을 교정하였으며, 1787년 12월에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아들 이덕감이 상소하여 부친의 원통함을 호소하니 정조는 1788년(정조 12) 9월에 이기경의 죄를 씻어주었다. 이후 인봉소원(麟峯書院)에 배향되었고 유집으로 「목산고(木山藁)」가 전한다.

그는 관리자로 벼슬에 있을 때나 죄인으로 유배지에 있을 때 줄곧 일기를 썼다. 이러한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관리자로 있을 때에는 책임의식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죄인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식을 갖는 것이었다. 생원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면서 쓴 「취정일기(就正日記)」를 시작으로, 1746년(영조 22) 8월에 평안도의 태천현감이 되어 쓴 「태주일록(泰州日錄)」, 1755년(영조 31) 5월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어 쓴 「서연일기(書筵日記)」, 1765년 3월에 충청도 동쪽으로 유람하면서 쓴 「동유일기(東遊日記)」 등이 있다. 이러한 일기는 이기경의 개인적 생활 및 소회 그리고 그 당시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서 1755년(영조 31) 7월에 동지사서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쓴 「음빙행정역(飮氷行程曆)」을 소개하고자 한다. 「음빙행정역」은 1755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의 청나라 북경을 연행한 일기이다. ‘음빙’이란 ‘얼음을 마신다’는 뜻으로 추운 지방에 간다는 의미이다. 즉 동지사서장관으로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연경)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북경 체류 기간 중의 활동, 다시 북경에서 귀국할 때의 여정에서 보고 들은 풍물과 체험 내용을 일기로 쓴 기행문이다.

일기는 청나라로 출발하기 일주일 전인 11월 3일부터 시작된다. 3일에는 여행 경비에 충당할 예산을 신청하는 문제로 국왕을 면대한다. 4일에는 의정부에서 외교문서의 오류를 확인하는 등 연행에 필요한 각종 사항을 재차 점검한다. 이후 일행은 11월 9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개성(開城)에 도착, 이어서 평산(平山)․황주(黃州)․평양․의주(義州)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심양(瀋陽)에 도착한다. 그리고 사신 일행은 12월 29일에 청나라의 예부(禮部)를 방문하여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상견례를 나눈다. 일행은 북경의 여러 지역을 관광하거나 청조에서 베푸는 다양한 의례행사에 참석한다. 이후 일행은 1756년(영조 32) 2월 16일에 북경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다. 4월 4일에 서울에 도착하고, 4월 5일에 국왕을 알현하여 업무를 보고한다.

이기경의 「음빙행정역」에는 당시 청 왕조의 정치․군사적 동향이나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행록인 「음빙행정역」에는 도처에 명나라에 대한 추모와 청 왕조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 있다. 이는 같은 노론 낙론계 북학파들의 태도와 크게 다른 점이다.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의 북학파들이 청나라의 발달한 산업과 문화를 열심히 배워 도입하고자 한데 비하여, 이기경은 청나라에 대해 태생적인 거부감을 보였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청나라의 사신으로 가서 황제에게 절했던 일을 훗날에 회고하면서

“지금까지도 오랑캐에게 절했던 일을 마음속으로 수치스럽게 여긴다”

고 토로하였다.

이기영이 연행을 다녀온 1755년 당시는 청나라가 강희(康熙)․옹정(擁正)의 치세를 지나면서 정치․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가 날로 번창하던 전성시대였다. 이러한 청 왕조의 번성기에 북경 일대를 여행한 이기경은 그 번화한 도시와 풍부한 물산 그리고 강성한 군대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멸망한지 100년이 지난 명 왕조의 그림자를 찾는 일에 연연해하였다.
이기경은 청의 쇠망과 한족 왕조의 부흥 징조를 비과학적인 자연현상에서 찾기도 하였다. 1755년 12월 26일 옥전(玉田) 근방의 고수촌(枯樹村)을 지나면서 난세(亂世)에는 잎이 말라 없어지고 치세(治世)에는 다시 잎이 싹튼다는 영험한 ‘고수’의 가지를 꺾어보았다. 그 마른 가지에 물기와 생가가 있는 것을 보고 나서 그는

“이 고수에 곧 잎이 싹틀 것이며, 청조가 망하고 정통 한족이 일어날 것이다”

고 예측하였다.

북경 주변에 많이 건립되었던 황제의 호화로운 별궁이나 행궁(行宮) 및 불우(佛宇)를 보면서 이것이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고 민원을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청조는 재정이 고갈되어 상인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이 때문에 파산하여 실업자가 되는 일이 많다는 등의 정보들에 매우 주목한다. 이기경은 건릉황제의 일탈적 행태와 각 지역의 반란, 재정 고갈, 민심 이반 등 각종 모순을 청 왕조가 몰락하는 징조로 파악하였다. 어떤 측면에서 그는 청 왕조의 멸망을 바라면서 그 징조를 찾아내는데 몰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그의 중화주의와 화이관(華夷觀) 및 반청(反淸) 감정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후기 존주론(尊周論)의 창시자였던 송시열의 학맥을 이은 이재의 촉망받던 제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 다음 세대인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노론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극복되고 있지만,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와 의식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순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산 이기경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일고」(이형성, 「퇴계학논총」18, 퇴계학부산연구원, 2011), 「목산 이기경의 연행록< 飮氷行程曆>」(이영춘, 「한중인문학연구」44, 한중인문학회, 2014)

오원(吳瑗)


오원(吳瑗)                                                                        PDF Download

1700년(숙종 26)∼1740년(영조 16)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 할아버지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晉周, 1680∼1724)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현종의 딸 명안공주를 맞이하여 임금의 사위가 된 오태주(吳泰周, 1668∼1716)에게 입양되었다. 자식이 없던 오태주가 아우 오진주의 아들 오원을 양자로 맞아들인 것이다.

당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재(李縡)가 그의 고모부로,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한편 오원의 아들 가운데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은 문형(文衡)을 지냈으며, 손자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은 성리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렇듯 대단한 가문을 배경으로 하는 오원은 1700년에 도성 내 대사동(大寺洞)에서 출생하였다.
아들 오재순에 따르면, 오원의 얼굴은 각이 졌고 수염이 성글며, 넓고 평평한 이마에 귓바퀴가 크고 둥글게 솟아 단정하고도 풍성한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또 웃음이 적고 조용하였으며 스스로 뽐내지 않고 행동거지에 무게가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나온 지 7일 만에 생모를 여의고 할머니 황씨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기억조차 날 리 없는 생모이지만, 오원은 생모의 부재라는 상실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동지사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대사성과 부제학 등을 거쳐 1740년(영조 16)에 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인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에 올라 영조에게 탕평책을 건의하자, 오원은 그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직되기도 하였다.

오원은 황우석(黃遇石, ?∼1738)․남유상(南有常, 1696∼1728)․이사중(李思重, 1698∼1733)․이천보(李天輔, 1698∼1761)․남유용(南有容, 1698∼1773)․이수득(李秀得, 1697∼1775)․황경원(黃景源, 1709∼1787) 등 여러 벗들과 교유하였다. 이 가운데 평생을 두고 가장 의기가 잘 맞았던 이는 황우석과 남유용․이천보였다. 황우석은 오원보다 마흔살 가량이나 나아가 많았지만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는가 등 오원이 평생에 걸쳐서 허물없이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성품은 정직하고 온후하였으며 문장 또한 깨끗한 절개를 지녔다. 영조실록, 영조 16년 10월 10일에는

 

“사람됨이 조촐하고 깨끗하였으며 소탈하고 우아하여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라고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고 있다. 또한 오원이 과거에 급제한 후 영조가 그를 불러서 만난 일이 있는데, 이때 오원은 영조에게

“사사로이 뵙는 것은 상규(常規)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후에 혹 사사로이 보자는 명이 있으면 받들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오원의 성품에는 다소 고지식한 면모가 있었으나 검소하면서도 남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흉년이 든 해에는 가난한 족친들을 불러 밥을 해 먹이는가하면, 가난한 벗이 객사하여 장사조차 지낼 수 없게 되자 곡식을 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기도 하였다.

오원은 41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겉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가문적 배경을 갖고 있었음에도 오원은 17세부터 잇따라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오원은 가족을 잃은 아픔을 시로써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오원의 몇 편의 시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소개한다.
오원은 16세 되던 해에 안동권씨 권정성(權定性, 1677∼1751)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718년에 오원은 아내와 사별하게 된다. 부친을 여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아내가 죽고 나서 이듬해 겨울 전주최씨 최식(崔寔)의 딸과 다시 혼인하게 된다. 그 즈음까지 오원은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데,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고 있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 같으니
人生如逝川

한 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겠는가.
一去那復回

비단 창은 쓸쓸히 드리워 있는데
綺窻寂寂掩

밝은 달빛은 때때로 비친다네.
明月時時來

그대 떠올리길 차마 자세히 못하겠으니
思君不忍詳

내 마음은 오래도록 슬픔을 머금네.
我懷久含哀

산 사람은 나날이 쉽게 잊어가고
生者日易忘

죽은 사람은 장차 차가운 재가 되겠지.
死者且寒灰

이 시는 남조(南朝) 심약(沈約, 441∼513)의 도망시(悼亡詩)를 읽고 느낀 애틋함을 주체하지 못해 가을 밤에 지은 것이다. 혼인한지 3년 만에 사별하였지만, 그 사이에 쌓인 부부의 정은 두터웠다. 첫째 부인 안동권씨를 사별하고 나서 곧 둘째 부인을 맞아들이지만, 첫째 부인을 쉽게 잊지 못하였던 듯하다. 첫째 부인 사후 10년이 지난 해에, 또 다시 오원은 죽은 부인을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그대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대는 나를 저버리니
吾不負君君負余

아름다운 말 굳은 약속 모두 부질없게 되었네.
良箴信誓一成虛

황천에 돌아간 그대는 즐겁겠지만
歸侍重泉君則樂

나를 위해 어째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는가.
爲吾何不少躊躇

사별한지 10년이 지나 지은 것이지만, 바로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듯 아내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원의 생부인 오진주는 첫째 부인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오원을, 둘째 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오완(吳琬)을, 셋째 부인 대구 서씨와의 사이에서 오관(吳瓘)과 오찬(吳瓚)을 얻었다. 그러니 오원에게는 모두 세 명의 아우가 있었던 셈이다. 이 아우들 가운데 오원이 가장 가깝게 지내며 아꼈던 것이 오완(1703∼1721)이다. 생후 7일 만에 생모를 여읜 오원처럼, 오완 역시 6세 때 생모를 여의어 서로 연민의 정을 느끼며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2세 되던 1721년에 아우 오완은 병이 들어 결국 죽게 된다. 아우 오완을 잃은 지 3년 만에 생부 오진주를 여의고, 그 이듬해에 오원은 첫 아들을 얻게 된다. 둘째 부인 전주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이 아이 역시 세 살 되던 해에 죽고 만다. 첫 아들을 잃고 난 후의 심정을 오원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불행히도 네가 내 아이로 태어나
不幸汝生爲我兒

하늘까지 닿은 내 죄로 네가 재앙을 당하는구나.
通天我罪汝橫罹

삼년만 시간 동안의 너를 생각하니 눈물만 흘러
三年萬點思兒涙

매번 부모라고 나를 돌아보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每憶爺娘顧我時

오원은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멀리하였는데, 이 아이가 바로 그러한 부친의 뜻을 알고 화려한 옷이나 새 옷 가까이에 가려 하지 않았다는 아이다. 아우 오완을 잃었던 때에도 그랬지만, 첫 아들이었던 이 아이를 잃고 난 후 오원은 또 다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이 요절하였다는 죄책감이었다.

이렇게 그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첫 아들을 잃은 그 해에 오원은 둘째 부인과도 사별하게 된다. 이렇게 오원은 생후 7일 만에 생모를, 17세에 부친을, 20세에 첫째 부인을, 22세에 가장 아끼던 아우 이완을, 25세에 생부를, 28세에 첫 아들을 잃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7세부터 소중한 가족을 하나하나 잃어갔다.
이처럼 가족의 상실과 그에 따른 자책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부친, 아내, 아우, 아들의 죽음에 부친 시에서는 한결같이 쓸쓸한 정조가 두드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원이 시를 짓는 태도는 검소하고 원칙주의적인 그의 성품과 관련된 것으로, 재주를 뽐내려 한다거나 꾸미는데 힘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특징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월곡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곡 오원의 시계계」(안순태, 「한국한시작가연구」, 한국한시학회, 2012)

양응수(楊應秀)


양응수(楊應秀)                                                              PDF Download

1700년(숙종 26)∼1767년(영조 43)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달(季達), 호는 백수(白水). 순창 출신. 아버지는 승의랑 양처기(楊處基)이고, 어머니 강화최씨로 최휴지(崔休之)의 딸이다. 지금의 전북 순창군 혁성면 괴정리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최씨부인이 가을날 한줄기에 다섯 개의 잘 익은 이삭이 달려있는 기이한 꿈을 꾼 이후에 선생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에 벼화변(禾)이 들어가는 수(秀)자를 썼다고 전해진다.

양응수는 나이 9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4년 후인 13세 때에는 어머니마저 잃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였기 때문에 부모를 보양하지 못한 불효의 죄책감으로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성격은 의지가 굳고 강직하면서도 독실하였다. 한 예로 그가 63세 때에 친구가 죽었는데, 가난하여 시체를 덮을 염포(斂布)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안 양응수는 하나 밖에 없는 자기의 이불을 주어 염포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추운 겨울밤에 이불도 없이 지내면서도 ‘고인을 위한 일이라 행복하다’는 모습에서 그의 초연한 인격을 짐작할 수 있다.

젊어서는 권집(權緝)에게서 배웠으나, 후에 양응수의 나이 38세 때에 경기도 한천(지금의 용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이재(李縡)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이재는 낙론(洛論)의 거장으로 그의 문하에는 수많은 석학들이 모여들었다. 양응수가 이재의 문하에 들어가려 할 때에, 이재는 양응수의 학문적 자질이 있음을 알고 다른 문인들과 달리 각별히 대우해주었다. 양응수 또한 이재의 고매한 인품과 학덕에 심취하여 그를 스승으로 받들고 지성으로 섬겼으며, 두 분 사이가 부자지간처럼 지냈다. 어느 날 이재는 함께한 술자리에서 양응수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주었다.

 

훈훈한 취흥 돋우며  倚微醺

경의를 담론하고   而談經

백발 날리며    揚白鬚

시를 읊는구나   而哦詩

 

이 글은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학문에 정진하는 양응수를 보고 굳센 그의 기상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재가 지어준 것이다. 이때 그 글을 본 동문들이 그를 양백수(楊白鬚)라 부르면서 희롱하였다. 이를 본 이재가 양응수의 호를 ‘백수(白水)’라 지어주었다. ‘백수’라는 두 글자는 문자 그대로 맑은 물이라는 뜻으로 그의 청아한 심성을 뜻하는데, 그가 흰 호수 위에 정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이재의 문하에는 송명흠(宋明欽)․김원행(金元行)․박성원(朴聖源)․민우수(閔遇洙)․임성주(任聖周)․유언집(兪彦鏶)․원인손(元仁孫)․이휘지(李徽之) 등과 같은 조선의 석학들이 잇따라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재 문하에서 학덕(學德)을 말한다면 양응수를 따를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1755년(영조 31)에 건원릉참봉에 제수되고, 이어 익위사부수로 옮겨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학문연마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양응수의 학문은 성인이 되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니, 성인을 배우고 본받아서 이를 현실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데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성인이 되기 전에 미리 포기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인이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행실을 미루어 넓혀나가는 것이니 도덕을 실천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성인이 되는 공부는 반드시 학당의 강의나 독서를 통해서만이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등 인간생활 자체가 모두 성인되는 공부이다. 이에

 

“도를 밖에서 구하는 것은 문자(文字)를 위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의 학문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한편 양응수는 성인이 되는 학문방법으로 독서를 강조하였다.

“학문의 방법은 대상세계를 탐구하는 궁리(窮理)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반드시 독서에서 찾아야 한다”

라고 하여, 독서를 학문의 기본 요건으로 인식하였다. 양응수의 독서에 관한 견해는 그의 문집 곳곳에서 보이는데, 「위학대요(爲學大要)」편에 수록된 <독서법>에는 독서의 방법이나 효과 등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의 독서법에 관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양응수가 살았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서의 목적을 성인의 도를 배우는 것보다, 과거공부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출세하여 명성을 떨치는데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양응수는 독서의 궁극적 목적을 성인의 도를 배워서 누구나 성인이 되는데 두었다.

“독서는 장차 도를 구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서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독서를 하고도 도를 깨닫지 못하고 지식을 넓히는 것만을 능사로 삼기 때문에 도학(道學)과 속학(俗學)의 구분이 있다.”

독서의 목적은 많은 지식을 섭렵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성인의 도를 배워서 실천하는데 있다. 따라서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는 성인이 되는 ‘도학’과 달리 세속적 학문이라는 의미의 ‘속학’이라 구분하였다.

“옛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고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어찌 옛 사람이 아는 것을 나라고 해서 모를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하여, 이러한 도학을 공부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양응수는 독서의 순서를 제시하였다. 제일 먼저 「소학」을 읽어서 청소하고 어른에게 응대하는 등의 일상생활의 기본 도리를 읽힌다. 다음으로 사서(四書) 가운데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서로 읽고, 그리고 오경 가운데 「시경」․「예기」․「서경」「역경」․「춘추」의 순서로 읽어 성현의 말씀을 공부한다. 사서와 오경의 독서과정을 마친 후에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가례(家禮)」․「주자대전(朱子大全)」 등과 제자백과와 잡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서를 해나갈 것을 권장하였다.

“「논어」를 읽고 난 후에 전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이 있고, 읽고 난 후에 그 가운데 한 두 구절을 터득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며, 읽고 난 후에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 사람이 있다”

라고 하여, 사람마다 독서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나이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독서방법을 달리 제시하였으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널리 취하여 얻은 바가 많게 하고, 기억력이 좋지 않는 사람은 글의 뜻이 간략하고 쉬운 것으로 함양하게 한다.”

자신에게 맞는 독서방법으로 꾸준히 독서해나갈 것을 권장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글을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자, 이에 선생은

 

“다만 이것은 너무 많은 것을 탐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의 복주 출신 진진지(陳晉之)는 아주 노둔하여 독서할 때에는 50글자를 가지고 반드시 200-300번을 읽은 뒤에 기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반복하여 읽으면 글이 기억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가령 200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의 경우, 독서의 양을 줄여서 100글자를 반복하여 읽으면 기억력이 없는 사람도 저절로 기억할 수 있고, 이해력이 없는 사람도 저절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노둔한 사람이라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면 저절로 암기되고 이해된다.
또한 독서의 병폐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진도에만 급급해하는 것을 지적하였다.

 

“많이 읽을지라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면 한 걸음 물러나서 살펴서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

 

즉 한권의 책을 읽고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 뒤에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두르거나 조바심내지 말고 반복하고 완미하여 그 뜻을 깨달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야 비로소 독서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독서는 모르던 것을 아는 지식의 성취뿐만 아니라, 독서를 통한 생활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독서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독서 후에도 생활의 변화가 없으면 독서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저서로는 「백수문집(白水文集)」 30권 17책이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 「백수 양응수의 독서론에 관한 연구」(김오봉, 전북대학교 석사논문, 1995), 「백수 양응수의 「四禮便覽辨疑」연구」(김윤정,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4), 「18세기 양응수의 독서법에 나타난 독서양상과 그 의미」(박수밀, 「국제어문」42, 국제어문학회, 2008)

고용즙(高用楫)-2


고용즙(高用楫)-2                                                        PDF Download

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미상(未詳)이며, 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竹峯)이다. 임피(臨陂) 술산(戌山)의 죽봉(현재 전북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호를 ‘죽봉’이라고 하였다.
앞의 내용에 이어 여기서는 고용즙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을 소개한다. 고용즙은 경종(景宗)에서 영조(英祖)로 왕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4대신의 원통함을 드러내고 역적의 무리를 토벌하라는 상소문을 몇 차례 올렸다.

고용즙은 영조가 즉위한 초(1725)에,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의 죄와 탕평책의 부당함을 논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辛任士禍)와 관련된 내용이다. ‘신임사화’는 신축(辛丑, 1721)과 임인(壬寅, 1722)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옥사이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죽고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 없었으며 병이 많았다. 김창집 등 노론의 4대신은 하루 빨리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노론 4대신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이다. 물론 소론측의 반대가 있었지만, 경종은 1721년 8월에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실현시켰다. 유봉휘 등 소론이 이에 반대했으나, 결국 노론세력의 주장이 관철되어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노론측은 더 나아가 10월에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통해 경종을 대신하여 세제(후의 영조)의 대리 청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발한 조태억(趙泰億)․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耈) 등 소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던 중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 등이 소를 올려 노론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세제 청정을 상소한 조성복과 이를 강행한 노론 4대신, 즉 이이명․이건명․김창집․조태채를 파직시켜 유배를 보냈다. 이 밖의 노론 인사들도 대거 숙청되어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조성복이 왕에게 상소하기를,

“오늘날 동궁은 장성한 나이가 전하께서 선왕의 곁에 나가셔서 정사에 참석하실 때보다 갑절이 될 뿐만 아니니, 여러 정사를 밝게 익히는 것이 더욱 마땅히 힘써야 할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하들을 맞으실 때나 명령을 재결하는 사이에 언제나 세제(연잉군)를 불러 곁에 모시고 참여해 듣게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일을 가르쳐 익히게 한다면 동궁께서 일에 밝고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경종실록」1년 10월 10일)

경종 역시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면서 “만약 청정하게 하면 나라 일을 의탁할 수 있고, 내가 마음을 편히 하여 쉬면서 요양할 수 있을 것”

(「경종실록」1년 10월 10일)

이라고 하여 국사를 모두 세제에게 처리하게 하도록 하였다.

노론은 뜻밖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노론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받아 내자 당연히 소론의 반대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삼사에서 먼저 왕을 찾아가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신기가 왕성하십니다. 비록 병환 때문이라고 하교하시지만, 드러난 증세가 없으니 마땅히 더욱 분발하시고 힘쓰셔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약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편안하고 한적한 방법만을 위하여 이런 정무를 놓을 생각을 가지시니, 신 등은 전대에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음을 실로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마음을 빨리 돌이켜 비망기를 도로 거두소서.”

(「경종실록」1년 10월 13일)

 

조태구는

“국가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라 곧 조종의 국가입니다. 옥새를 가지는 자리는 사람이 사사롭게 결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지 않는다면 돌아갈 수 없다고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사실상 말도 안되는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들도 소론이 들고 일어서자 꼬리를 내렸다. 김창집은

“이제 여러 신하가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반드시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뜻이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와 다르겠습니까”

고 말하면서 집권할 수 있었던 아쉬움을 드러냈다.노론이 쥘 듯 했던 정권은 소론이 더욱 확실하게 쥐게 되었다. 소론은 곧바로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 4대신, 즉 이이명․이건명․김창집․조태채를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저 무리들이 몰래 딴 뜻을 쌓아온 지 무릇 몇 해가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모의하고 밤낮 경영한 것은 모두 전하를 단속하고 하늘이 내릴 자리를 동요시키려 한 것이었으니 식자들이 전일의 일이 일어날 줄 안 지 오래 되었습니다. 만약 이 무리가 임금 아래에 하루라도 더 있으면 반드시 종사에 근심을 끼칠 것입니다. 청컨대 이들을 절도에 위리안치하고……”

(「경종실록」1년 12월 12일)

경종은 소론의 의견에 따라 김창집․이건명․조태채를 유배시켰다. 중국에 왕세제 책봉을 위해 가있던 이건명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 밖의 노론 인사들도 대거 숙청되어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소론 정권은 노론 대신의 처벌을 유배형에서 끝내지 않았다. 이듬해 3월 목호룡(睦虎龍)은 남인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고 고변함으로써 노론의 비극이 또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 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목호룡이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역적으로서 전하를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으로 한다고 하며, 또 전하의 폐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저는 비록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는데 뜻을 두었으므로,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감히 이처럼 상변한 것입니다. 흉적은 정인중․김용택․이기지․이희지 등입니다.”

(「경종실록」2년 3월 27일)

 

이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는 결국 사사되었으며, 또한 이들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대대적인 화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즙은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 내용은 죽봉집권2, 「상소문(疏)」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고용즙이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이광좌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인데 천지간에 편안히 살고 있다.……차라리 동해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습니다.”

“속히 이광좌․유봉휘․조태억 등의 죄를 바루시어 신명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주시고, 그 남은 흉적들은 죽일 수 없는 자들도 또한 모두 공론을 한번 들어보시고 차례로 서둘러 판단하시어 처분을 내리소서.”

“괴수들을 파하여 전하의 의혹을 풀고, 군부의 무고함을 씻으며, 난적의 죄를 다스려서 삼강(三綱)이 땅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구법(九法)이 패하지 않게 하소서.”

소론의 입장에 있던 이광좌 무리를 처단하고 인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용즙이 보기에, 역적의 두목은 이광좌이며, 이광좌의 죄는 한이 없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임금의 병환을 숨겼다는 것이다. 임금을 보호해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임금의 병을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로써 차마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광좌가 임금의 병환을 숨긴 이유로써, 만약 임금의 병환이 드러나게 되면 세자를 세우려는 노론들의 죄를 물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고용즙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 일파가 일으켰던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어, 당쟁이 심화되었던 당시 노론․소론의 갈등과 대립상을 엿보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글판 죽봉시문집」(죽봉시문집편찬위원회, 2016), 「죽봉 고용즙의 南征賦에 대한 고찰」(柳在泳, 「한국언어문학」제22집, 한국언어문학회, 1983)

고용즙(高用楫)-1


고용즙(高用楫)-1                                                        PDF Download

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미상(未詳)이며, 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竹峯)이다. 임피(臨陂) 술산(戌山)의 죽봉(현재 전북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호를 ‘죽봉’이라고 하였다. 죽봉은 창강(滄江)이 앞에 흐르고, 율포(栗浦)가 둘러 있으며, 패향(전주)과 인접해 있는데, 고용즙은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늙었으며 이곳에서 노래하다 죽었다. 할아버지 고이원(高而遠)과 아버지 고필(高佖)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고용즙은 탐라국(耽羅國, 제주의 옛 이름) 고을나(高乙那)의 후예로 45대를 군주로, 16대를 신하로 내려온 명문가문이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혁혁하여 문충공(文忠公)과 문영공(文英公) 두 분이 가장 뛰어났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니 생원인 고견(高堅), 선전관인 고몽진(高夢辰), 통정인 고이원(高而遠) 등은 모두 고용즙의 고조․증조․조부이다. 어머니는 영월 신씨로 신경녕(辛慶寧)의 딸로 어질고 규범이 있었다. 특히 부친은 용모와 언행과 문장이 뛰어났고, 가족이나 사회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고 한다.

광산(光山) 김낙현(金洛鉉)이 지은 행장에 따르면,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무너져서 예에 넘쳤으며, 장사와 제사지내는데 정성을 다하고 친척들과 화목하고 가난을 구휼하였으며, 은혜와 의리 두 가지를 강론하고 도리를 밤낮으로 토의함에 꺼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친한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가 존경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한 평강(平康) 채정억(蔡廷億)의 만장에 따르면,

“문장과 덕행 둘 다 어기지 않으려 노력하였으니, 사람을 보면 반드시 사랑을 베풀고, 글을 대할 때는 밥 먹는 것도 잊었으며, 화락하고 조용한 얼굴은 항상 봄날이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고향의 유림들과 협의하여 스승인 김집(金集)과 김구(金絿) 등이 배양되어 있는 봉암서원에 사액할 것과, 정읍에 송시열이 배양되어 있는 고암서원을 창건할 것을 소청하였다. 봉암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임금께서는 두 신하의 도학과 덕행을 깊이 살피시어, 후인들이 보고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는 바탕이 되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은액을 하사하시어 서원을 치장하고, 두 신하의 도와 덕을 천하 후세에 더욱 빛나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국가에도 퍽 다행하고 사문(유림)에도 퍽 다행한 일이겠나이다.”

이처럼 고용즙은 임피지역에 학문적 영향을 크게 끼친 조속(趙涑)․김구 등과 같은 명유들을 숭상하는데 노력하였고, 노론세력으로서 송시열․김집 문하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학문과 대의를 중시 여겼던 유학자였다. 유고로 「죽봉집」을 남겼다. 「죽봉집」은 고용즙의 시문집이다. 3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고용즙의 6세손인 고동화(高東華)에 의하여 200여년이 지난 1938년에 갈운동의 영모재(永慕齋)에서 간행되었다.

죽봉집」의 편찬 경위에 대해서는 고동화가 「죽봉집」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죽봉이 남긴 주옥같은 글이 책상에 쌓이고 상자에 넘치기에 이르렀으나, 중간에 유실되고 화재를 만나 남은 것이 겨우 금 부스러기나 깃털 조각 같은 약간 뿐이었다. 고동화의 조부인 고천종(高千鍾)께서 좀먹은 문서와 먼지에 쌓인 책을 순서대로 엮어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부께서 돌아가실 무렵에 손자인 동화에게 ‘너는 마땅히 생각하여 할애비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종형들과 뜻을 모아 자구를 손질하고 교정을 보아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죽봉집」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1의 「민기부(悶己賦)」는 상중에 쓴 작품으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주가 된 고용즙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부친은 특히 용모․언행․문장이 뛰어났고 가족이나 사회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과거에는 실패하였으나 전원에 뜻을 두어 정자를 짓고 못을 파며 국화와 버들을 심어 은자답게 살아가다가 고용즙이 28세 때인 1699년 9월에 병석에 눕게 되고, 온갖 약에도 효과가 없어 다음 달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슬픔이 극에 달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고 여러 풍수(風水)를 맞아 묘지를 정하여 다음 해 2월 14일에 안장하는 효자 고용즙의 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때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글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까. 하늘에 부르짖으니 삼광(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고, 땅을 치니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고, 가슴을 치니 뼈가 부러지는 듯하며, 눈물을 뿌리니 피가 흐르는 듯하는구나.”

또한 지은 년대를 알 수 없으나 부채의 여덟 가지 덕목을 읊은 「팔덕선부(八德扇賦)」가 있으며, 천지의 운행과 질서에 따라 사람들에게 길일과 흉일을 가려서 때를 살피고 경계할 것을 알리는 「역서부(曆書賦)」가 있다. 또한 호남지방을 다니면서 지명의 이름에 얽힌 의미를 낱낱이 풀이한 「남정부(南征賦)」도 있다.

권2의 ‘흥학당(興學堂序)’에는 선비를 양성하고 학문을 부흥시키는 흥학당의 설립 취지를 고을 군수를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써, 여기에서 고용즙은 서당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족한 자금을 빈민 구휼을 위해 비축해 둔 창고의 곡식 일부에서 활용할 것을 제의한다. 「필묵계서(筆墨契書)」에서는 붓과 먹의 서로 도와주고 유익함을 주는 관계를 들어서 이웃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유하고 있다. 「제영지지서(題瀛州誌序)」에서는 제주 고씨가 동방의 유명한 문중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족보가 만들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후에 고도열(高道說)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고씨의 문중의 자료를 모아 족보를 만들게 되는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봉암서원서(鳳巖書院序)」에서는 봉암서원에 배향된 김집과 김구의 도학의 연원을 그리고 조정에 사액을 청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들은 김장생의 근원이고 조광조의 문하에서 덕행을 이었으니 삶에서는 종장이요 국가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초당서(草堂序)」는 고용즙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쓴 말년의 작품인데, 여기서는 저자가 거처하는 초당의 주위환경을 그린 것이다.

또한 「취취당기(就就堂記)」는 죽봉의 동생 고윤경(高潤卿)이 서당을 열고 이름을 청하기에 ‘취취당’이라고 이름 지으니 ‘취취(就就)’는 나아가고 나아가라는 뜻이다. 즉

“배우되 그 넓은 데로 나아가고, 묻되 살피는 데로 나아가고, 변론하되 분명한 데로 나아가고, 행동하되 독실한 데로 나아가고, 아침에도 나아가고 저녁에도 나아가고 어제도 나아가고 또 오늘도 나아가고, 한치 한치 나아가고 자꾸자꾸 나아가서 만개 삼태기의 흙을 쌓아 그 높이를 이루듯 하고, 아홉 길이나 되게 땅을 파서 그 깊이를 이루듯 하라. 그런즉 때때로 익히는 힘을 쓰면 날로 늘어나는 효과를 장차 거둘 것이니 어찌 취취하는 공로가 아니겠는가?”

 

상소문은 주로 경종(景宗)을 지지하던 소론의 주요 인물들을 처단하라는 내용이다. 즉

“신등이 이 애통한 울음과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위험을 피하지 아니하고 다시 이렇게 부르짖으며 엎드려 비나이다. 조정에서는 김일경(金一鏡)․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 모든 역적들을 속히 나라의 형법으로 바루어 만고의 강상을 잡아주시면 매우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나이다.”

상소의 내용에는 스승인 송시열과 김집을 사사한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유봉휘․이광좌 등이 주장한 세제책봉 및 대리청정의 반대에서부터 신임사화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담고 있다. 또 소론 일파가 일으켰던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어, 당쟁이 심화되었던 당시 노론․소론의 갈등과 대립상을 엿보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글판 죽봉시문집「(죽봉시문집편찬위원회, 2016), 「죽봉 고용즙의 南征賦에 대한 고찰」(柳在泳, 「한국언어문학「제22집, 한국언어문학회, 1983)

송명흠(宋明欽)


송명흠(宋明欽)                                                              PDF Download

1705(숙종 31)∼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1705년 10월 21일 한성 제생동(濟生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요좌(宋堯佐)이며,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의 문인이다. 송명흠 역시 23세 때 고양(高揚) 화전(花田)으로 이재를 찾아가 배웠다. 어릴 적에는 사화를 피하여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도곡(塗谷)․송촌(宋村)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충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에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에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었으나,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도중에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송명흠은 영조로부터 ‘산야(山野)의 당을 모으는 자’이며 ‘당론의 폐단’을 자행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모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44년 7월 13일에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질이 아름답고 실천이 독실하여 젊어서는 높은 명망을 받았다. 중간에 임금의 부름에 따라 도성에 나아가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서 논의하는 자리에서 대답하고 상소한 것이 모두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볼 때, 그의 관료로서의 소신있는 행동을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순조실록」, 순조 3년 9월 7일에는

“송명흠은 지조가 맑고 태도와 행실이 돈독하여 진실로 군자의 성대한 덕이 있어 우뚝하게 사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송명흠의 학문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에 뿌리를 둔 가학(家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는 17세기 대표적인 예학자이며 사림세력을 주도해 간 학자였던 송준길의 4대손으로, 그의 학문적 기반은 선조 송준길의 학문을 계승․정리하고 집대성하는데 기반을 두었다. 이에 어려서부터 부친 묵옹(黙翁) 송요좌의 엄격한 지도하에 유가의 기본 경전과 역사서 및 성리서를 두루 배우고 익혔으며, 공자․맹자․주자 등을 배우고 성현의 뜻으로 나아가는 가르침을 받았다.

송명흠은 가학의 전통을 보존하고자 37세 때에 종숙부 권화혁(權火赫)에게 송준길 연보의 간행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임종 3개월 전에는 문경 병천에서 송준길의 문집을 교정하였으며, 같은 달 상주 흥암에서 송준길 문집의 간행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임성주(任聖周)가 그의 「묘지명」에서

“송명흠은 마음을 세우고 학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집에 있거나 조정에 나아가서 논의를 펴고 일을 처리함에 이르기까지 거의 하나도 송준길이 남긴 법도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라고 쓴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조실록」, 영조 39년 3월 5일에서도

“송명흠은 문정공 송준길의 4대손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송명흠은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송준길을 계승하는 가학의 전통 위에 두었으며, 이러한 가학적 전통 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나갔다.

또한 이재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김창협(金昌協)-이재(李縡)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낙론학통을 계승하였다. 송명흠이 활동한 18세기는 인물성동이론논쟁 또는 호락논쟁이 당대의 철학적 화두로 등장한 시대였다. 말 그대로, 사람의 본성과 사물(또는 동물)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었던 논쟁이었다.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을 같다고 보는 쪽을 동론(同論)이라 하였고, 다르다고 보는 쪽을 이론(異論)이라 하였다.

동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간(李柬)이 있었고, 이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원진(韓元震)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인성과 물성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견해가 심화되면서 주위 학자들까지 동조하였고, 이로써 학파적 양상으로 그 논쟁이 전개되었다.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이 한원진의 ‘이론’에 동조하고, 낙하(洛下, 서울 부근)지방의 학자들이 이간의 ‘동론’에 동조함으로써 ‘인물성동이논쟁’이라는 명칭 외에 호서와 낙하의 첫 글자를 따서 ‘호락논쟁’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한원진 외에 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위백규(魏伯珪)․송능상(宋能相) 등이 있었고, 후자에 속한 대표적 학자들로는 이간 외에 김창협․이재․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김원행(金元行) 등이 있었다. 이로써 조선유학사의 3대 논쟁 중의 하나인 인물성동이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송명흠은 당시 호락논쟁에서 낙론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이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니, 이재의 사상은 그대로 송명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이재와 마찬가지로 송명흠은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성에는 본래적 의미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 속에 내재된 의미의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는 구분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본연지성이라 하여 본연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물성동이론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세계관에 대한 해석과 연결된다. 성리학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리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리는 원리․질서․법칙․규범 등으로 설명하고, 기는 음양을 비롯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모든 것을 가리킨다. 송명흠은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리와 기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리와 기가 함께 있어야 한다(不相離)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에 더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또한 리와 기의 엄격한 구분을 강조하는 사고로 이어졌다(不相雜).

이러한 관점에서 천리와 인욕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가 발현되는 본연의 세계를 중요시하였고, 이를 통해 의(義)와 불의(不義), 정(正)과 사(邪), 군자와 소인, 중화와 이적, 왕도와 패도 등을 분명히 구분하고자 하였다. <채오봉유적(蔡五峯遺蹟)>의 서문에서

“군신과 부자의 윤리는 하늘과 땅의 불변하는 강령이며, 중화와 오랑캐, 정(正)과 사(邪)를 엄격하게 판별하는 일은 춘추대의(春秋大義)이니 혹시라도 이것을 잃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를 회복하거나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혼란한 시대에 대처하여 천리를 실현시키는 일이며, 또한 그것이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부터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춘추대의를 확립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조에게

“천하만사의 근본은 군주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 못하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를 한마디 말한다면,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모든 정치의 근본 역시 군주의 한 마음에 있으니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하는 근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송명흠은 현상적 측면의 기보다 근원적 측면인 리를 더 강조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그가 영조에게 올린 상소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는 교화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고, 교화를 세우고 두터이 하는 데는 학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며,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는 데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높이고 본받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대(三代)의 성대한 시대로부터 우리나라의 여러 성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도리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32년 4월 14일)

즉 하나라․은나라․주나라와 같은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명하고 덕 있는 사람을 높이 받드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역천집」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순조실록」, 「역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천 송명흠의 主敬사상과 현실대응」(송인창, 「한국사상사학」14, 한국사상사학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