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


자기 소개

 

율곡 :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사회자는 없는 모양이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율곡: 우리 둘이 직접 대화를 나누는 형식인가요?

소라이: 예, 무슨 사회자가 필요하겠습니까? 선생님과 제가 돌아가면   서 사회를 보면 되지요.

율곡: 아하, 그렇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역시 실용주의자이십니다. 주최 측의 의도를 잘 파악하시고 금방 이해를 하시네요. 저는 아무래도 격식을 차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소라이: 선생님은 과연 조선의 유학자이십니다. 정통 유학을 받아들인 조선인들은 그렇게 예의와 격식을 중시한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일본인들은 무사 정신을 중시합니다. 무사들은 아무래도 실용적이지요. 예의나 격식 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중요시하지요.

율곡: 그렇습니까?

소라이: 나이가 아무래도 어린 제가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겠습니다.

율곡: 그러시지요.

소라이: 저는 일본 에도시대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입니다. 저는 1666년에 태어나서 1728년에 사망했습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62년을 살았지요.

율곡: 저보다는 오래 사셨군요. 저는 조선의 유학자 율곡 이이입니다. 저는 1536년(음력)에 태어나서 1584년에 사망했습니다. 저는 선생님보다 더 젊어서 하늘로 돌아왔습니다. 48년을 살았지요. 환갑을 지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저보다 100년 쯤 전에 활동을 하셨군요.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보면 130살 앞선 분이십니다. 제가 준비한 저의 간략한 연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세 1536년 에도(江戶)에서 출생
 14세 1679년 부친이 막부로부터 질책을 당하여 칩거명령을 받음
온 가족이 외가가 있는 가즈사노(上総)지방으로 이사
 27세 1692년 부친이 사면을 받아 에도로 돌아옴
소라이, 학당을 개설하여 유학자로서 활동함
 31세 1696년 5대 쇼군(徳川綱吉)의 측근에게 발탁되어 자문이 됨
500석의 녹봉을 받고, 이해 11월에 결혼
 40세 1705년 부인 사망
 44세 1709년 쇼군 쓰나요시가 사망, 후원자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실각함
소라이도 관직을 물러남. 니혼바시에 학당 개설
 48세 1713년 재혼하였으나 2년 후에 재혼한 부인 사망
 49세 1714년 ⌈훤원수필(蘐園隨筆)⌋발간
 52세 1717년 ⌈학칙(學則)⌋, ⌈변도(弁道)⌋, ⌈변명(弁名)⌋ 등 초고 완성
 53세 1718년 ⌈논어징(論語徵)⌋완성. ⌈대학해(大學解)⌋, ⌈중용해⌋ 집필
 57세 1722년  제8대 쇼군 요시무네(徳川吉宗, 재임: 1716-1745)의 신임받음
쇼군의 자문이 되어 자주 비밀스러운 자문에 응하고 면담함
 62세 1727년 쇼군에게 정치 개혁안 ⌈정담(政談)⌋을 완성하여 제출
 63세 1728년  월 19일에 사망

 

율곡: 저보다 15년을 더 사셨으니, 역시 훌륭하신 업적을 많이 남기셨군요. 50대에 참 많은 성과를 이루셨군요. 부럽습니다. 제 연표를 보여드리지요.

 1세 1666년 12월 26일(음력), 강원도 강릉 외가에서 태어남
 6세 1542년 전년에 한양 본가로 돌아와 어머니 사임당에게 글을 배움
 12세 1548년 진사 초시에 합격함
 15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별세함
 18세 1554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 심취.
다음해 강릉 외가에서 유학공부
 20세 1556년 한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함.
다음해 노씨 부인과 결혼
 22세 1558년 별시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함
 25세 1561년 부친 이원수가 별세함
 28세 1564년 생원시 장원급제 후 여러 관직을 역임.
구도장원공이라 불림
 32세 1568년 천수사 서장관으로 명나라 다녀옴.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됨
 33세 1569년 선조 부름으로 조정에 들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림
 34세 1570년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처가인 해주에 은거
 35세 1571년 청주 목사로 부임하여 서원향약을 실시
 36세 1572년 병으로 사직하고 다시 해주에 가서 은거
 38세 1574년 우부승지에 임명, ⌈만언봉사⌋를 올림, 황해도 관찰사 임명
 39세 1575년 병으로 파주 율곡으로 돌아옴.
⌈성학집요⌋를 올림
 41세 1577년 ⌈격몽요결⌋을 완성함.
해주 석담에서 생활
 42세 1578년 해주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양성.
만언소를 올림
 43세 1579년 ⌈소학집주⌋를 완성. 다음해 ⌈기자실기⌋를 편찬
 45세 1581년 대사헌 예문관 제학을 겸임, 대제학을 지냄. 경연일기 완성
 47세 1583년 병조판서를 지냄.
⌈시무육조⌋를 올림
 48세 1584년 서울 대사동에서 사망함

 

소라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무엇인지요?

율곡: 자주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했다는 뜻입니다.

소라이: 대단하시군요. 일본에도 과거시험이 있었더라면 저도 도전해 보았을 텐데, 일본에는 과거 시험이 없습니다.

율곡: 그럼 어떻게 관리를 임명하는지요?

소라이: 그냥 알음알음으로, 소개를 하고 추천을 하여 관직에 나가지요. 선생님은 30대 이후에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관직생활을 하셨군요. 그래서 병을 얻으신 건지요?

율곡: 예, 많이 바쁜 생활을 했지만, 병은 그것보다 저희 집안 내력인 듯합니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일찍 돌아가셨으니까요. 아버님은 환갑 때까지는 사셨습니다만, 저도 병이 염려되어 자주, 낙향을 하고자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계속 중앙에서 저를 새로운 관직에 임명하고 찾으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쁘게 살았지요.

소라이: 선생님 연표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낙향하셔서 10년 정도 더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많은 관직경험과 해박한 경전 지식을 활용하여 정말 훌륭한 업적이 나왔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율곡: 다 하늘의 뜻이지요. 하늘이 그렇게만 살라고 명을 내리신 것을 제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제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저를 많이 기억해주는 것만으로 만족을 삼아야지요.

소라이: 한국의 화폐 5,000원권에 선생님의 모습이 실려 있고, 또 50,000원권에 선생님 어머님의 모습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선생님은 성공한 인생을 사신 거지요. 사실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부러울 뿐입니다.

율곡: 선생님도 훌륭한 생애를 살지 않으셨습니까? 일본 사상사에서 최고의 학자로 후대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으니 저도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퇴계 이황 선생님을 손에 꼽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그런 존재이니, 제가 부러워할 대상입니다. 저는 2인자까지는 평가가 되기도 하지만 최고는 못됩니다. 그렇게 평가를 받고 있지요. 아무래도 제 학문이 번뜩이는 것은 있지만 충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저도 퇴계 선생님 같이 70세까지는 아니더라도, 60세 정도까지는 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하하.

소라이: 천명은 미묘한 것이지요. 일찍 돌아가신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님을 더 그리워하게 하고, 더 흠모하게 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을 보면 오래오래 살아서 자신의 좋은 명성을 갉아먹고 후인들에게 폐만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 처해 말년에 고생만 하다 사망한 경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