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을 때


아이가 윗사람에게 공손하지 않을 때

 

싸가지 없는 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이라고 상스럽게 내뱉거나 아니면 마음속에서라도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말은 대개 젊은 사람이나 아이가 어른에게 공손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비속어로서 사용된다. 이런 말을 듣는 젊은이나 아이는 어른한테 대들지는 못하고 아마도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여기면서
‘왜 아랫사람들만 어른에게 공손해야 하는가?’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공손하면 안 되나?’
‘나이가 무슨 벼슬인가? 나이 값을 해야 어른이지.’
라는 따위의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대들지 않고 이렇게 생각만 해도 양반이다. 요즘은 젊은이에게 그렇게 말했다간 봉변당하기 일쑤다.
이런 사례는 찾아보면 엄청 많다. 학교현장에서 교사가 학생을 때려서 폭력 시비가 생기는 일 가운데도 이런 일이 많다. 학생의 언행이 불손하여 분노를 참지 못한 교사가 욱하는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나오는 폭력이 그런 예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가정에서도 부모가 돌발적으로 아이들 때리는 경우에도 이것과 관련이 꽤 있다. 그 밖의 학교의 선후배 사이, 군대 내 선임자와 후임자 사이, 직장의 상사와 부하 사이, 한 마을 안에서, 무릇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이런 나이나 경력을 가지고 따지는 서열의식 내지 질서의식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젊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가도, 정작 자신이 어른이 되거나 선배가 되었을 때는 아랫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요즘 것들 참 싸가지가 없어.”
라고 내뱉는다.
선생이 살았을 조선사회에도 이러한 질서의식이 사회의 규칙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경계시켰다.

〔3〕형이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화낸 듯이 사납게 말하는 것 (不敬兄長, 發言暴勃)
어른 공경과 효제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불손한 태도에 왜 화를 낼까? 교사나 부모에게 불손하게 대드는 아이를 보고 불문곡직하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정서는 어디서 기원하고 있을까? 앞의 선생의 말을 가지고 볼 때 전통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전통에서 연장자를 공경하는 풍습과 관련이 있고, 가족 내에서 부형(父兄)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데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형을 공경하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의 정서로 볼 때 전혀 이해하기 어려울 듯하다. 옛날에는 조혼의 풍습이 강했기 때문에 생식 능력만 있으면 대체로 일찍 혼인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형제 사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났다. 큰 형과 막내 동생의 나이 차이는 무려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서, 큰 형은 막내에게 거의 부모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부모가 일찍 죽으면 어린 동생들은 형의 보호를 받고 자라게 된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보면 형을 부모처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먹여주고 키워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교는 부모 공경의 효도와 함께 형을 공경하는 효제(孝弟 또는 孝悌)를 강조해 왔다.

선생도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하고 공경해야 하니, 나보다 나이가 갑절이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10살이 많으면 형처럼 섬기고, 5살이 많으면 약간 공경해야 한다(「접인장」).

이렇게 나이를 기준으로 공경의 정도를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읍(揖)하고 절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나이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의 친구이면 절해야 하고, 동네에서 15살 이상이면 절해야 한다. 벼슬이 당상관이고 나보다 10살 이상이면 절해야 하고, 같은 고장 사람으로서 20살 이상이면 절을 해야 한다(「접인장」).

선생이 참고했을 법한 주자의 『동몽수지(童蒙須知)』에서도 이런 사례가 등장한다.

자식과 동생들은 항상 말소리를 낮추고 흥분을 가라앉혀서 상세하고 천천히 말해야지, 고상한 말을 시끄럽게 떠들거나 뜬소문 같은 말을 장난치듯이 말해서는 안 된다. 고개를 숙이고 윗사람이 하는 말을 경청해야지 망령되이 그들과 크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논의(論議)는 요즘말로 토론에 가까울 것 같다. 어떤 일에 대한 시비나 미추 따위를 웃어른과 함께 따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식과 동생을 대상으로 한 말이므로 부모나 형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말로 보인다.

왜 어른을 공경해야 할까?

그렇다면 왜 젊거나 나이 어린 사람들은 윗사람들에게 공손해야 할까? 거기에는 설득력 있고 타당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 부모나 형을 공경해야 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것 같다. 철학적 문제를 떠나 윤리적 의무라는 가치에서 볼 때 세대 간 상부상조의 관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와 특별히 상관이 없는 남을 특별히 나이가 많다고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밝히려면 꽤 많은 지면이 요구된다. 그래서 좀 거칠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태동하게 된 것도 춘추전국시대라는 사회의 혼란함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물론 그 혼란함은 사회 전체에 걸쳐 있었지만, 치자의 논리를 강조한 유교의 입장에서는 제후나 대부들의 행태를 두고 논의한 것이 많다. 곧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거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하극상, 곧 지도층의 비도덕적 행위가 사회를 혼란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효도나 효제, 그리고 장유유서 등의 오륜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사회 또한 사대부가 지배하던 사회였으니 이에 더하여 그러한 윤리가 더욱 고착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전통시대의 산업은 농업이었으므로 인구의 이동이 거의 고착화된 향리와 씨족 중심의 공동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윤리가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이가 기준이 되었고, 그것이 풍습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때문에 아랫사람이 버릇이 없을 때 윗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모멸감을 느낀다.

서열의식

그렇다면 이런 장유유서나 나이를 가지고 서열을 매기는 것이 유교만의 잔재일까? 유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숙고 없이 습관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자칭 진보라고 자부하는 인사들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병폐의 대부분이 유교 때문이라고 말할 때가 더러 있다. 어느 문명권을 막론하고 전근대인 시대와 사회를 거쳐 왔고, 거기에는 비판받아야 할 모습들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점은 유교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는 여기서 유교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숭상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반면에 자신의 전통을 곡해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문명이고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장유유서랄까 아니면 나이를 기준으로 공경을 해야 한다는 점이 꼭 유교에만 있는지 따져 볼 필요는 있겠다. 일찍이 나이 곧 연치(年齒)를 기준으로 남을 높이는 문제는 『예기』나 『맹자』 등에 보인다. 특히 『맹자』에는 벼슬과 나이와 덕을 가지고 높이는 문제를 다루었는데, 마을에서는 나이가 기준이 된다는 말에 등장한다. 여기서 나이를 가지고 사람을 높이는 기준을 마을에서 적용한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연 발생적이다. 아마도 씨족 중심인 마을이라면 자연이 나이 많은 사람이 부모나 형뻘 되는 사람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연발생적이란 말에 좀 더 신경을 써보자. 이런 서열은 동물사이에서도 존재한다. 동물의 서열은 대개 힘센 놈이 기준이 된다. 어찌 보면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래도 가장 인간적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나이로 따지기 이전엔 힘이나 외모 또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렇게 나이 곧 연도순이 서열의식으로서 어떤 조직이나 직장에서 그것으로 자연히 연결되었다고 본다. 이른바 군대에서는 병사끼리의 ‘짠밥’ 순, 학교에서는 먼저 입학한 순, 회사에서는 입사한 연도 순, 공무원의 호봉도 근속연수 순 등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서열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고착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굳이 우리문화에는 있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세계 어느 곳이든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무슨 벼슬인가?

그렇다고 해서 나이만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나이만 가지고 높여야 한다면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한 번도 공경을 받을 수 없다. 비록 나이로 공경의 기준을 삼은 것은 전통사회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인정하더라도 나이만으로 그것을 결정하면 상당히 억울한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덕(德)이나 능력(能力)이 공경 받는 경우도 있다. 앞의 『맹자』에서 덕으로 공경 받는 사례가 그것이다.

필자가 볼 때 비록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려도 어떤 덕이나 높은 학문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경 받는 경우가 과거에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분이 어디에 행차할 때 공경하는 마음에서 흠모하여 남녀노소 막론하고 그를 보고자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까 무조건 나이만 기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높은 덕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공경을 받을 수 없는가? 더 나아가 공경 받을 만큼의 인격도 부족하고 나이만 많다고 꼭 공경해야 하는가? 현대인들에게는 이건 정말 납득시키기 어려운 문제이다.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공경할 만한 점이 없으면 공경하지 않는 것이 요즘 세태가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은
“나이 값을 해야 공경하지.”
라고 말하든지 생각할 것 같다.
바로 여기서 유교적 장유유서나 연장자를 공경하는 유교적 윤리에 대한 재해석과 새로운 적용이 필요하다. 이것은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다. 옛날에 이랬으니 성인이 그렇게 했으니 무조건 따르라는 식의 방식은 이제 먹히지 않는다. 새로운 대안을 내야 따르지 않을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라

유교적 논리가 젊은 사람들이나 또 세계 어느 나라사람들이든 먹히려면 보편타당해야 한다. 철학자 칸트가

“네 의지와 격률이 동시에 항상 보편타당한 입법원리가 되도록 행위 하라.”

라고 말한 것과 같이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고 지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 또는 능력이나 덕이 높은 사람만 높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한다. 남을 공경하는 것도 자발적으로 나오게 해야지 어떤 윤리적 규범으로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다만 항상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야 마땅하다(「지신장」).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려면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대접하라.”

고 한 말을 생각해보라. 인류가 남긴 모든 고전의 주제를 몇 마디로 말하라면, 그 가운데 ‘겸손’이라는 말도 끼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기를 낮춤으로써 남을 높인다면 나이가 문제 될 수 없고, 지위나 덕이 높은 사람도 아랫사람에게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필자도 언제부터인가 후배들이나 강의를 들은 제자들에게 반말이나 예삿말을 쓰지 않는다. 선배에게 하듯이 그대로 존댓말을 쓴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부모가 시키는 일을 아이가 곧바로 따르지 않을 때


부모가 시키는 일을 아이가 곧바로 따르지 않을 때

 

내 아이도 내 맘대로 되는가?
식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내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특히 어릴 때는 아이에게 무얼 시켰는데 곧장 하지 않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가령 밥을 다 차려 놓고 밥 먹으로 오라고 부르면 꾸물대면서 늑장을 부리기도 하고, 숙제를 미리미리 하라고 당부했는데 하지 않고 놀다가 정작 등교하기 직전에 밥도 안 먹고 숙제한다고 허둥대기도 하며, 자기 전에 양치질 하고 자라고 일렀는데 그냥 자버리기도 한다.

아이가 좀 자라서도 그런 일은 반복된다. 등교 후 곧장 집으로 오라고 일렀는데 친구들과 놀면서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돌아오고, 공부나 숙제 따위를 다 하고 게임은 한 시간만 하라고 했는데도 공부나 숙제를 내팽개치고 몇 시간 째 게임을 하기도 하며, 속옷을 자주 갈아입으라고 일렀어도 땀이 배어 냄새가 날 때까지도 그냥 입고 다니는 남자아이들도 있고, 동생이나 형, 언니나 누나와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틈만 나면 상대방만 탓하며 티격태격 싸우는 아이들도 있다.

옛날에도 아이들이 그랬던 모양이다. 율곡 선생이 『소아수지』에서 말하는 두 번째 경계하는 항목이 바로 이 문제이다.

〔2〕부모가 명한 것을 곧장 시행하지 않는 것(父母所令, 不卽施行)

사실 선생의 이 말에 대해서 ‘부모가 명한 것이라고 해서 곧장 이행해야 합니까?’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지금 세상은 조선시대도 아니고 또 부모가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부모의 명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더구나 자식이 장성하여 부모보다 교육을 많이 받고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이 들고 판단력이 흐려져 시대의 흐름과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부모의 명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상식을 조금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고대에서 부모에 잘못이 있으면 간(諫)하라고 하고 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선생의 이 말은 보편적인 입장보다는 일단 아동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아이는 태어나서 최초의 교사가 되는 사람은 부모다. 아이는 사리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부모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서 부모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부모의 명을 즉시 따르지 않는 원인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아이가 부모의 명을 순순히 따른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 그런가? 앞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현대의 아이들은 모르긴 해도 옛날보다 부모의 말을 즉각 따르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천성적으로 성격이 순하거나 칭찬을 통해 잘 길들여진 아이는 부모의 명에 곧장 따른다. 필자도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이 하라고 한 일을 거부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일에 따라서는 하기 싫어서 마지못해 한 것이 있는데, 그 일 가운데 하나가 여름철 마당에 난 잡초를 뿌리 째 뽑는 일이었다. 필자가 살았던 시골집은 마당이 꽤 넓었고, 그래서 꾀를 내어 잡초의 줄기와 잎만 뜯다가 아버지한테 혼 난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모든 아이들이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도 필자처럼 순한 아이도 있고, 부모의 명에 뺀질뺀질 핑계 대며 거부하는 아이들도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유전적인 성격 차이 또는 도덕성의 발달 정도에 따라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양육 환경과 가족 안에서 역할이나 서열 등에 따라서 후천적으로 학습되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사람의 본성은 비슷한데 습관으로 인해 멀어진다(性相近, 習相遠).”

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유전적 요인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환경적 요인 곧 학습을 통하여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경우와 따르지 않는 경우로 그 원인을 나눌 수 있겠다. 여기서 부모의 교육적 역량이나 가정환경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다. 쉽게 말해 양육을 잘하는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의 역량 차이에 따라 아이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양육 방식의 차이

사실 아이가 부모의 명을 순순히 따른다고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부모가 매우 엄격하여 마치 군대의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듯 지체 없이 명을 따르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이는 부모가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곧장 따를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부모의 권위나 강압에 못 이겨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기가 약한 아이는 따르겠지만 기가 센 아이는 처음에는 따르다가 나중에는 빈틈을 노려 꾀를 부리거나 좀 더 자라면 점점 반항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명을 거역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

반면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고, 예기치 않게 어겼을 때는 가벼운 벌칙을 병행하면 아이들은 바르게 자라고 부모의 명을 잘 따른다. 그런데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부모가 항상 올바르며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또 그 양육방식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잘못에 대한 벌을 줄 때 안됐다 싶어 감해주거나 생략하다보면, 아이는 벌을 우습게 여긴다. 또 아버지는 엄격한데 어머니가 인정이 많아 몰래 아이를 감싸준다면 아버지의 훈육이 먹히지 않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벌이나 책임에 대한 일관성이 없다면, 아이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배양하지 못하게 된다.

바른 부모가 되기 위해서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부모가 되었으면 마땅히 자식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또 부부사이라도 예의와 공경을 잃지 않아야 집안일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자식을 낳았으면 약간의 지식이 있을 때부터 착한 곳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만약 어려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자라게 하면 나쁜 것을 익히고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어 가르치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거가장」). 바로 부모의 교육적 역할과 환경 조성을 지적한 말이다.
이러한 양육 방식의 차이를 공자가 『논어』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자식 교육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자녀들을 잔소리를 가지고 이끌고 체벌을 가지고 말을 잘 듣게 만들면,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어겨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반면에 올바른 인격으로 자녀들을 이끌고 모범적인 행위로 따라오게 하면 자녀들은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고 또 바르게 될 것이다
(원문: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

 

말 잘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앞에서 율곡 선생이 아이가 부모의 명을 곧장 시행해야 한다고 하는 데는 어떤 전제가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항상 올바르고 자애로워야 한다는 점과 또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명을 어기지 말고 곧장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이 녹이 있다. 이런 조건이라면 선생이 말한 명제는 충족된다. 도덕원리나 논리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바른 도리를 말하는데 즉각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비도덕적이다. 도덕률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이는 그런 도덕원리를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도덕적 판단능력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자님이나 성경의 말씀을 귀에 따갑도록 말해준다고 해서 아이가 순순히 따르겠는가? 강제로 지키게 하면 어딘가에서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다.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럴 때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가 모범적으로 잘 보여주고 사랑으로 인도하여 아이가 잘 따른다면 무척 다행이겠지만, 그래도 안 따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초리를 들고 야단쳐야 할까? 이것도 요즘에는 아동학대로 비춰져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데는 그 행위의 잘못을 떠나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이의 생각이 부모의 그것과 달라서, 또는 아이의 욕심 또는 욕망이 부모의 그것과 배치되거나, 부모의 명이 자신의 욕망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렸거나, 때로는 아이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부모의 명을 망각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다짜고짜 윽박지르거나 야단쳐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알고 보면 아이도 나름의 생각과 주관과 욕망이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즉 아이도 나름의 인격체이고 의견과 의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이나 지시로 따르게 한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라면 자기가 사는 동네나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그러니, 만약 아이가 부모의 명을 거역하면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므로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남이 시키는 대로만 알아서 척척 하는 아이는 아무리 부모의 명이라고 해도,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 아직도 순종이 미덕일 수 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자신의 주관과 의지가 박약한 우유부단한 사람, 더 심하게 말하면 정신적 노예가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모나 교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편하겠지만,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을 대할 때 그렇게 판단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아이의 생각이나 판단이 비록 미숙하고 보잘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존중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사람은 커서도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존중은 사랑의 방법 가운데 하나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부모가 자애로워야[慈] 한다’는 가치를 좀 더 재해석하고 확대하여 ‘자식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현대판 자식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옛날이라고 이러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 이렇게까지 굳이 해석하느냐 하면, 흔히 ‘유교’ 하면 고리타분하고 가부장 중심으로 무조건 자식들에게 효도하라고 강요했다는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모에 대한 순종도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인지 옳음에 대한 순종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정통 유교에서는 옳음에 대해서 당연히 따라야 했다. 혹시 부모가 옳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가? 자식이 부모의 잘못을 여러 번 간했는데도 듣지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도 유교는 울면서라도 마지못해 따르는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의 사회적 환경으로 볼 때 힘든 일이다. 혹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해도 순임금과 같은 성인(聖人)이 아닐진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식 키우기는 옛날보다 더 어렵다. 부모가 자식을 순종하게 만들려면 부모이기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따르게 해야 한다.

자식의 동의를 얻어야

사실 옳기 때문에 따르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식이 어리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 주고, 부모가 시키는 것을 따르게 하려면 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애비가 시키면 군말 없이 해야지. 시건방지게 네까짓 것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혹시 이런 말을 할 부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동의를 받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다. 더 나아가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존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이 되었을 때 아랫사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막 시킬 가능성이 있다.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아 부모의 이런 영향에서 벗어난다면 혹 달라 질 수는 있겠으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무튼 자식에게 무엇을 시키고 싶어도 그의 동의를 받는 방식에서 부모의 졸렬함과 노련함이 엇갈린다. 그래서 부모 노릇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배우는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때


아이가 배우는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때

 

아이가 딴 생각 못하게 하는 방법이 정말 있을까?
요즘 부모들도 이 글의 제목을 보면 무릎을 탁 칠 것 같다. 율곡 선생이 살았을 때도 아이들이 공부보다 딴 곳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이지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공부에 큰 필요성과 관심을 자발적으로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예전에 학부모들은 학교에 가서 담임교사와 상담할 때 ‘아이가 딴 생각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방법’을 자주 묻곤 했다. 이런 질문에 아마 담임으로서는 대단히 난감했을 것이다.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 그리고 가능한 방법이 과연 있을까?

아이들의 관심사는 남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필자의 경험에서 볼 때 온통 먹는 것과 노는 것이 주를 이룬다. 초등학생들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남자아이의 경우 거의 다 엄마가 무슨 음식을 해주었다, 어떤 곳에 있는 음식점에서 무얼 먹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는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구누구와 무엇하고 놀았다든지 부모와 어디에 가서 무엇을 구경했다는 따위가 대부분이다. 여자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했다거나 집안일을 도왔다거나 친구와 함께 소꿉(인형)놀이를 했다는 등의 내용이 많다. 대체로 남자아이들보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니 옛날이라고 달랐겠는가? 모르기는 해도 옛날 아이들도 글방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동무들과 노는 데 더 정신이 팔렸을지 모르겠다. 개울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산골짜기 어디에 있는 산딸기와 머루와 다래를 따 먹을 생각, 오늘밤 누구네 수박과 참외를 서리한다거나, 자치기나 연날리기나 썰매타기 등 노는 것이 무척 많았으니,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린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소아수지』의 첫 번째 항목의 내용은 이렇다.

〔1〕가르침을 좇지 않고 다른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는 것(不遵敎訓, 馳心他事)

이 내용은 아이들이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하는 말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해 아이들은 배우는 일을 잘 따르고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르침’이란 평소 배우는 내용으로서 옛 성현의 가르침일 수도 있고, 스승이나 부모의 가르침이나 훈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면 모두 동일하다. 부모나 스승이라고 해서 옛 성현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옛 성현의 가르침도 결국 이들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는 대로 하지 않고 딴 곳에 마음을 쏟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옛날과 지금의 배움의 차이

이글을 보면 아이들이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가르침을 좇고 공부할 때는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정보 정도만 담겨있다. 여기서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가야겠다. 지금의 가르침의 내용은 적어도 유치원 교육부터는 ‘교육과정’이라고 하여 국가에서 정해놓고,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그 내용을 특성화하도록 약간의 융통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대개 교과와 연계되어 있고, 그것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교과서 내용이다. 그 내용은 잘 알다시피 각 교과마다 가진 특수한 내용들이다. 그 내용이 가진 목표에는 대개 지식적인 것 정서와 기능적인 것 그리고 태도적인 것이 모두 포함되는데,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모습을 보면 지식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 대학입시 때문이다. 비록 도덕과의 경우는 태도에 더 치중하고, 예체능 교과는 정서와 기능이 더욱 강조되지만, 지식 교육의 대세에 밀려 해당교과의 목표가 잘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율곡 선생이 살았던 조선중기는 이런 교과가 없었다. 원래 고대 중국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라 하여 예절·음악·활쏘기·수레몰기·글씨쓰기·셈하기의 육예(六藝)라는 과목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거의 유교경전과 일부 사서(史書)를 읽고 독해하는 것으로 공부의 내용을 차지하였다. 이 또한 과거시험 때문이다.
이렇듯 교육내용이 거의 유교경전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보면 한문을 익혀 독해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내용적으로 보면 성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일종의 도덕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를 공부해도 결국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므로 일종의 도덕사관이 주를 이룬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거의 당시에 바람직하게 여겼던 도덕적 덕목을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도덕적 가르침을 얼마나 자발적으로 발휘할까?

고분고분한 아이를 원하는가?

아이들이 딴 생각하지 않고 배우는 것을 고분고분 따라 하는 것은 모든 부모나 교사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생활에서나 필자의 경험에서 볼 때 그런 학생들은 많지 않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분고분함이 언젠가 필연적으로 배반을 일으킨다. 학생 자신의 삶에서나 그 학생이 관계하는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성하고 부정하고 때로는 저항하거나 반항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유아기 때에 형성된 관념과 도덕적 기준과 잣대를 버리지 않은 한 그 인간의 자아는 결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아이들의 관심사로 돌아가 보자. 아이들이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것은 공부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재미가 있어도 요즘 세상에는 공부보다 재미있는 일이 백 배나 더 많다. 공부를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교사들이 컴퓨터나 동영상, 게임, 애니메이션 또 그 무엇을 동원하여 가르치려고 부단히 애처롭게 노력해도, 아이들을 유혹하는 세상의 상술을 당해낼 재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아이들은 동물적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한다. 동물의 새끼들을 보라. 다 놀면서 장난치면서 성장하지 않는가?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이성적인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성인(成人)이 되기 이전까지의 아이들을 감성적 욕망에 이끌리는 동물로 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이들을 대하는 것이 되레 마음이 편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동물수준의 인간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주변을 둘러보라.
이 말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적 행위는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의 수준이 되면 대체로 먹는 것에 집착하고 또래집단에서 노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가 중학년 정도 되면 거기에 보태서 입는 것에도 관심이 쏠린다. 부모가 사주는 옷을 순순히 입는 것보다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것은 또래집단에서 유행에 뒤떨어져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는 노력과도 연관되어 있다. 노는 것도 또래집단을 갖지만 점점 개인화 되어 게임에 빠지기도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여기에 보태 이성(異性)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용모 등에 무척 신경을 쓰고 부모나 교사의 말보다 연예인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더 영향력을 미친다. 심지어 반항적이기까지 하고 자기 또래집단끼리만 소통한다. 또래 사이에 중시하는 일종의 명예심이랄까 의리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을 종합하면 이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 가르침을 자발적으로 따를 것이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설령 겉으로는 도덕적으로 행동해도 그 동기는 칭찬을 받고 비난을 피하는 관습적인 수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수준에서 행동하는 것이지, 도덕적 양심과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소인의 행동이지 군자의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리니까 쉽게 말해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얼마나 직접 노출되느냐 감추어져 있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성인(成人)들도 대부분 그러하지 아니한가?

노는 것을 인정해야

그러니 아이들을 동물적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일도 아니고, 동물 취급을 해야 한다는 말도 더욱 아니다. 다만 그런 수준을 이해하고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보다 놀기 좋아한다는 경향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노는 것은 그냥 무의미하게 노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특히 아이가 어릴수록 그러하다. 노는 것이야 말로 창의력의 원천이며 상상력의 보고이다. 놀면서 물리적이고 구체적 경험을 통해 사고력이 발달하고 창의력도 싹튼다. 흔히 ‘정규 학교에서 공부한 놈보다 가방끈은 짧지만 사회에서 굴러먹은 놈이 머리가 잘 돌아가고 융통성이 있다.’는 속언은 이런 경험을 통해 나름의 사고력과 판단력이 발달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학교의 경험이 온실 안의 그것이라면 사회의 경험은 노지(露地)의 험한 경험이 아닌가?
그리고 필자가 작품을 구상할 때 언제나 상상력의 창고가 되었던 것은 어릴 때 놀았던 기억이다. 장면과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때 언제나 옛날의 추억에 의존한다. 그래서 어릴 때 충분히 잘 놀았던 사람이 훗날 적절한 교육을 받았을 때 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신념이다. 잘 놀았지만 적절한 교육이 없거나 잘 놀지 못하고 오로지 학원과외를 통해 일류학교 졸업한 사람에게는 큰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니 어릴 때 충분히 노는 것을 막으면서 유아기 때부터 오로지 영어니 수학이니 또 무엇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 놀아보지 못한 아이는 훗날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잘 자라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나름대로 잘 자랐다고 하더라도, 어릴 때 잘 놀아보지 못했던 보복으로 성인이 되어 엉뚱한 데서 잘 놀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망치고 삶이 험난한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모른다.

도덕적 엄격주의

자, 그렇다면 율곡 선생은 아이들이 이렇게 놀기 놓아하는 습성을 몰라서 이런 말을 했을까? 선생의 말 가운데 행간을 읽어보면 그 점을 알았던 것 같다.

‘다른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는 것(馳心他事)’

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른바 교육이 존재하는 이상 피교육자의 마음에는 다른 곳에 마음을 쏟는다. 특히 그 대상이 나이가 어리다면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한 점 여유도 없이 마음을 단속하라고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점은 아마도 비록 아이들의 습성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아 올바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선생은 믿었던 것 같다. 당시는 성현의 가르침 외에는 특별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몸을 잘 닦아 남을 대하는 것이 사대부의 교육목표였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교육의 방법이나 목표에 개입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도덕적 엄격주의가 교육의 방법에 적용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사회적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 도덕적 엄격주의가 국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에게 요구되었던 태도였다. 그래서 공부의 내용이 온통 도덕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노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학부모나 교사들은 아이들이 공부에만 전념했으면 하고 바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해오는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서 어릴 때 장난치며 놀았어도 훗날 훌륭한 인물이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교육의 목표에 접근하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아이들이 노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어쩌면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배우는 점이 더 많다. 너무 아이들이 고분고분하도록 강요하면, 기가 센 아이들은 반항하며 다른 길로 빠지고, 기가 약한 아이는 눈치 보며 우유부단한 습성을 길러줄 것이다. 아이들도 정해진 시간과 규칙에 따라 잘 놀게 하고, 그런 휴식과 즐거움에서 동력을 얻어 배움에 정진하도록 해야겠다. 그런 절도가 없이 아이가 노는 데만 정신을 놓고 있다면, 전문가를 찾아 별도로 상담해 봐야 한다. 아이를 망쳤다기보다 그 특성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 어떻게 키울 것인가?


내 아이 어떻게 키울 것인가?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세대

요즘 인구가 줄어들고 앞으로도 더 줄어들 전망이어서, 나라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결혼해서 아이 많이 낳으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혜택을 주는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그 정책은 아직 미흡한지 결혼할 생각조차 안하는 젊은이들이 넘쳐 난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혼인을 거부하는 데는 매우 설득력 있는 이유가 많다. 우선  일자리가 없어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서 결혼을 못하는 경우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소수 인력이나 기계가 대신하고, 그나마 인력이 필요한 회사는 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이전한다. 고작 남아 있는 일자리는 임금도 적고 대우도 열악한 직종인데, 이 자리는 대개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망하는 직종은 경쟁이 치열한 대기업 사원과 공무원, 그리고 소수의 전문직이고, 그래도 좀 낳은 경우는 부모가 경영하는 작은 사업체나 일터를 물러 받는 정도이며, 그 나머지는 신분이 불안정한 서비스나 협력업체 직원이 되거나 아르바이트로 전전한다.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인구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혼인을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사실 서민들에게 경제가 이렇게 어렵게 된 데는 현행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 잉여가치가 자본을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법을 바꾸어 개혁해야 풀리는 문제인데, 법을 다루는 국회의원들이 이런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다 운이 좋아 혼인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아이들의 양육비 못지않게 양육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큰 짐이다. 예전처럼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전업주부로서 활동할 때는 그래도 양육환경이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하니 양육환경이 열악해졌다. 그래서 경제적 비용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엄청 바쁘다.

아이가 더 자랐다고 해서 문제가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성장에 비례하여 각종 교육비와 입시 준비, 또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 예컨대 친구사이의 갈등, 각종 사고 등으로 부모는 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청년이 되어서도 자녀의 혼인과 경제적 자립, 자녀와의 갈등 등으로 죽을 때까지 자녀로부터 해방되기 어렵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옛날처럼 효도가 일상화 된 때도 아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 키워도 결국은 대다수의 부모가 현대판 고려장인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니 자녀는 낳아 키우는 일은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 요즘처럼 이해타산이 밝은 젊은이들이 뭐가 답답해서 혼인하려고 할까? 옛날에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거의 막혀 있어서 혼인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어 경제적으로 독립이 가능할 경우, 누가 그런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겠는가?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인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특한 젊은이들도 있다. 비록 인구절벽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기 없는 지방의 영세한 사립대학교를 제외하고 학교가 왕창 망했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래도 자녀를 낳아 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반증일 테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으로 더 복잡하고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자신들의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옛날도 그랬지만 지금도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많은 수입이 보장되는 좋은 직장에서 일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입시경쟁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세상이 하도 자주 변해서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좋은 학교부터 나오고 보자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생각도 학부모들의 불안감에서 나왔다는 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부모들에게는 이런저런 걱정이 많다

이렇게 사회가 어렵고, 미래도 불확실하다보니 부모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이 많은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시켜야 할지 과거처럼 정해진 모델도 없다. 그나마 교과교육은 학교나 학원을 통해서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거의 방치 상태이다.
더구나 내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그리고 학교에 갔을 때 안전하게 잘 있는지, 혹 친구와 싸우지는 않는지, 거기다가 혹시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 않는지 무척 고민이다. 아이가 좀 더 자라면 나쁜 친구들과 사귀지는 않는지, 부모 몰래 나쁜 짓이나 하지 않는지, 이성 친구를 잘못 사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우리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정말로 고민이다.
간신히 대학에 들어가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대학을 나와서 취직은 할 수 있는지, 전공의 장래가 보장되지 않아 다른 전공으로 선택해야 할지, 해당학교가 일류학교가 아니라서 다시 다른 대학으로 편입학하거나 보다 좋은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해야 할지, 그리고 남자 아이라면 안전하게 군대에 갔다 오는 일 등 부모의 근심걱정은 그칠 날이 없다.

내 아이와 창의력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을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할까? 미래 사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숙고할 수밖에 없다. 흔히 미래는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한다고 다들 입만 열면 말한다. 그런데 창의력이나 문제해결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것들은 또 다른 인성(人性)적 요소를 충족시켜야 나올 수 있는 문제들이다. 예컨대 물리학자가 어떤 원리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렇게 하려면 일단 창의력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개 창의력이 금방 샘솟지는 않는다.
창의력이 발휘되려면 일단 그 일에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그 일에 오랫동안 매달리는 인내심, 그 문제에만 온통 관심을 쏟는 집중력, 그리고 누구의 강요나 강압이 아닌 스스로 하려는 자발성,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남의 것을 베끼거나 모방하지 않는 정직성, 어떤 이론이나 편견에만 매달리지 않는 개방성, 그리고 그 연구를 스스로 해결하는 독자성 등 많은 인성적 요소가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

인성은 창의력의 바탕

바로 인성이 제대로 되어야 창의성도 발휘된다. 필자가 아는 작은 회사의 CEO나 대학의 인사를 맡은 교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임용대상자의 인성을 먼저 본다고 한다. 실력이나 업적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대개 주관적 판단에 의지하는 인성을 우선시 한다는 것은 인사를 정실(情實)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에 부조리한 정실에 의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에 의구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창의성 또는 문제해결의 바탕이 되는 인성의 덕목을 살펴보면, 결국 인성이 좋은 사람이 실력도 있고 능력도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좋은 인성은 창의성의 밑바탕만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직업을 스스로 찾는 진취성, 기존의 직업을 끈기 있게 이어가면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적극성, 친구와 사회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친화성, 좋은 가치와 보편적 선을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의 발휘,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비록 소박하지만 남과 협력하며 자신의 삶을 여유 있게 사는 협력정신이나 포용성의 발휘 등도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인성과 관련이 있다.

옛날의 유교식 교육, 지금의 인성교육

인성에 대해서 흔히 세간에서는 고리타분한 옛날 유교적 덕목을 주입하거나 『명심보감』 따위를 달달 외게 해서 길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글의 의도는 이런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기획하였다. 조선시대는 그런 책들을 달달 외면 그대로 인성함양에 적용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옛 성현들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외고 실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옛날처럼 달달 외고 그대로 실천했다간 남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성관련 교재를 외고 쓴다고 해서 훌륭한 인성이 길러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체로 위선자가 되기에 딱 알맞다. 마치 기독교의 성경을 곧이곧대로 사회에 나와서 사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경우와 흡사하다. 현실은 과거의 고전이 만들어질 때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여 오늘에 맞게 교육시켜야 한다.

소아수지와 인성교육

소아수지(小兒須知)』는 율곡 선생이 쓴 책이다. 이 책은 『율곡전서습유(栗谷全書拾遺)』 권4의 「잡저(雜著)」에 들어있다. 책의 제목이 그러하듯 어린이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어린이를 위한 책에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있는데, 이 책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격몽요결』은 학문을 시작하는 초학자를 위한 것이라면, 이 『소아수지』는 그것과 별도로 아이들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인성교육의 기초로서 소아에게 반드시 주지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나 한편 모르기는 해도 『격몽요결』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언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자(이름 : 朱熹, 1130~1200)의 『동몽수지(童蒙須知)』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선생도 주자의 내용을 참고하여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몽’은 ‘소아’와 같은 뜻이니 두 책의 제목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소아수지』의 내용을 더 구체화 한 것이 『격몽요결』로 보인다. 내용이 중복된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시에 『격몽요결』을 언급하겠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알아서 말씀을 지키겠는가? 성현의 말이니 그대로 따르라고 해서 순순히 지킬 아이는 거의 없다. 이는 반드시 부모나 스승의 지도가 병행되어야 함을 뜻한다. 더구나 이 책의 분량은 매우 적어 총17개의 짤막한 글로 되어 있다. 대부분 아동이 경계해야 할 내용이다. 원문으로 보자면 채 한 쪽도 되지 않아, 어쩌면 가장 내용이 짧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부모나 스승 된 사람은 선생의 이 간략한 내용을 보고 실정에 맞게 더 보태서 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필자는 총17개의 내용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설명할 계획이다. 채 한 줄도 안 되는 글을 가지고 이렇게 길게 설명한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옛날의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또 옛날의 글이라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기에, 현대의 인성교육에 적용할 때는 그 때에 맞는 ‘시중(時中)’의 논리나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옛 성현을 욕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 무조건 외고 따르게 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게 하면 아들은 되레 ‘성인은 성인이고 나는 나이다’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하겠는가?

그것만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 부모나 교사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선생의 주장을 현대 교육적 관점에 맞게 해석할 필요가 있고, 또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을 손익(損益)할 필요도 있다. 더구나 옛날과 지금에 있어서 교육철학의 차이점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전이 다 그러하지만, 그것을 금과옥조로 믿고 따르기보다 거기서 내가 무엇을 취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또한 현재 우리의 인성교육에 대한 뚜렷한 모범 답안이 없기에 옛 성현의 말에서 보편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을 찾아 설명하겠다.
17개의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고 따로 번호를 붙여 소개하겠다.

율곡과 우계, 친구 이상의 친구


율곡과 우계, 친구 이상의 친구

 

율곡이 평생을 함께한 가장 절친한 벗은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이 1536년생이고 성혼이 1535년생이라 성혼이 한 살 더 많았지만 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로 사귀었다. 우계 성혼은 청송 성수침의 아들이다. 그는 초야에 묻혀 살면서도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를 본받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파주에서 살았다. ‘우계(牛溪)’는 그가 살았던 파주군 파평면 늘로리의 앞 냇물 이름에서 빌려왔다. 율곡 집안의 농장이 파평면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두 사람이 교분을 맺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사람들은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거나 편지를 보내서 만났다. 1년 연상인 성혼이 율곡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이 두 사람이 벗트게 된 계기였다. 율곡이 성혼을 처음 만난 것은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19살 때로 금강산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이후로 두 사람의 우정은 죽는 날까지 이어졌다.

남의 단점과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성격 탓에 율곡의 교우 관계는 그리 원만한 편이 못 되었다. 그런 율곡이 “나는 성품이 느슨하고 해이해 비록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지만, 우계는 알고 난 다음에는 곧 하나하나 실천하여 실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라고 칭찬할 정도로 성혼을 높게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의 광경이 어떠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율곡이 43세이던 해 눈 오는 겨울에 소를 타고 우계를 찾아간 날을 기록한 듯싶은 시가 남아 전한다.

 

한 해가 저물어 눈이 산에 가득한데

들길은 가늘게 교목 숲 사이로 갈렸구나.

소타고 어깨 들썩이며 어디를 가나

우계 물굽이에 미인을 그리워했다네.

느지막이 사립문 두드리며 청초한 분 인사하곤

작은 방에 베옷 걸치고 방석에 앉았네.

긴 밤 고요히 잠 못 이루고 앉았노라니

벽 위에 푸르른 등불만 깜박이네.

반생에 슬픈 이별만 많아

산 너머 험한 세상길 다시금 생각하네.

이야기 끝에 뒤치다보니 새벽닭 울어

눈 들자 창문 가득 서릿달만 차가워라.

 

온 산에 눈이 가득한 날, 교목 숲 사이로 갈라진 들길을 따라 우계에 사는 미인(성혼)을 찾아갔다. 말을 탄 것도 아니고 소를 타고 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저물어 이내 밤이 되었다. 우계의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작은 방석에 마주 앉았다. 베옷을 입은 성혼과 마주앉아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등잔불에 담아 놓은 기름이 다 타들어갔다. 바람에 깜박이는 등잔불이 어쩌면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치열한 정쟁을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닮은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다. 이런 세상에 이 친구마저 없었다면 어찌 견디었을까. 어느새 날이 밝아오는 듯 새벽닭이 울고 창문에는 서리 달만 차갑게 떠 있다.

율곡과 우계는 서로를 깊이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언젠가 한 선비가 율곡을 찾아갔는데, 율곡이 술에 취해 누워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그 선비가 율곡을 찾아간 것을 후회하고 돌아와 우계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알렸다. 그러자 우계가

“이 친구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필경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 그날 성상께서 궁궐에서 빚은 귀중한 술을 하사한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 이런 일화가 말해주듯이 율곡과 우계는 마음으로 깊이 사귄 벗, 즉 심우(心友)였다.
율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우계를 추천했는데, 『선조실록』선조 13년(1580) 12월 18일자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상께서 성혼에게 특별하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대우하신 것은 근세에 드문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사람을 꼭 쓰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번 만나보는 데 그치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성혼의 어진 덕은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다만 그의 재능이 어떤지를 알지 못할 뿐이다.”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재능도 한 가지로 논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도 능히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의 책임을 맡아 볼 사람이 있고 선을 좋아해서 능히 많은 아랫사람을 포용해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혼의 재능을 능히 천하를 경륜할 만하다고 평가한다면 지나칠지도 모르나 그 위인이 본디 선을 좋아합니다. 선을 좋아하면 천하도 다스릴 수 있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어찌 쓸 만한 재목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몸에 고질병이 있어 필시 헌관(憲官)의 직책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이 사람을 반드시 한가한 자리에 붙인 후에 때때로 경석에 입시하게 하면 선한 도를 개진하는 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우계는 선하기 때문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만한 재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다만 고질병이 있어서 건강하지 않으니 한가한 벼슬을 내려주고 이따금 불러서 의견을 구하라는 답변이다. 사실 성혼은 약관의 나이에 병을 얻어 평생토록 병마와 싸우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조선의 이름난 유학자들 중 퇴계 이황과 우계 성혼 두 사람보다 더 많은 병을 앓은 분이 없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율곡은 임금이 우계를 이따금 만나는 것만으로도 선한 도를 널리 펼치는 데 보탬이 될 거라고 믿었다. 율곡이 우계를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583년(선조 16)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율곡 이이에 대한 탄핵이 열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율곡은 과로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마침 임금이 변방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병조의 당상관을 불렀을 때, 내병조까지 왔다가 현기증이 일어나서 가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의 관리들이 ‘이이는 임금을 업신여겼으니 용서치 못할 죄를 지었고 나라를 그르칠 소인’이라며 일제히 탄핵을 시작했다. 결국 율곡은 조정의 여론에 밀려 이 해 6월에 병조판서를 그만두게 되었다.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 머물다가 해주로 돌아갔다.

이때 조정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성혼이 율곡을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성혼은 종삼품의 무관 벼슬이었는데, 상소문을 올려 율곡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성혼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임금을 저버리는 행위라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신이 삼가 이이의 사람됨을 보건대, 생각이 넓고 기질이 민첩한 데다가 타고난 성품이 고상하여 어려서부터 구도(求道)하는 뜻을 가졌으며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분발하니, 비록 세상의 그 많은 이치를 골고루 안다고 할 수 없으나 의리라고 하는 큰 원칙은 확립되어 있사옵니다. 서재에 들어앉아서 글이나 외고 문장이나 해석하는 그런 썩은 유생들과는 질적으로 다르옵니다.(중략)
그는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라는 것을 알 뿐이고, 자신에게 미칠 화근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은 믿사옵니다. 그는 어려운 때를 당하면 그것을 구제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자신의 몸을 후환으로부터 보전하려는 계획을 가질 겨를이 없었사옵니다. 이것이 그의 본래의 사람됨입니다.

우계는 율곡이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염려하는 사람이므로 정치적 안위만을 도모하는 썩은 유생들과는 사람됨이 다르다고 변호했다. 우계가 율곡을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계의 상소문은 흔들리고 있던 선조의 마음을 다시 율곡 이이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탄핵을 주도한 대사간 송응개와 도승지 박근원, 신진 관리 허봉을 유배에 처했다. 율곡을 조정에서 몰아내려 했던 동인 세력의 중심인물 세 명이 나란히 유배에 처해진 이 사건을 ‘계미삼찬’이라고 한다.

계미삼찬 이후 선조는 율곡의 복직을 명하는 간절한 비답을 여러 차례 내렸다. 하지만 율곡은 선조의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에서 파직된 지 석 달 후인 1584년(선조 17) 1월,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율곡의 부음이 전해졌을 때 우계는 율곡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꺼내들고 피울음을 토해내었다.

아, 나는 실로 어리석고 혼몽하여 고질병까지 겹쳤습니다. 처음 형을 만나 다소 도(道)를 듣고는 스승으로 섬기려고까지 하였으니, 그렇다면 형에게서 얻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늙어가면서 정의(情義)에 있어 서로 신뢰하여 더욱 깊어지고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하고 연마함에 있어 서로 도움이 되어 더욱 절실해졌으니, 내가 만약 형이 없었다면 자립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중략)

옛날 편지를 다시 꺼내어 펴보니, 나에게 벼슬하는 의리에 대해 간곡하게 말씀해 주었는데, 그 말씀이 깊고 간절하여 나도 모르게 편지를 쥐고 울었습니다. 형은 그토록 나를 벼슬에 머무르도록 하였으면서 자신은 어찌 머물지 아니한 채 돌아보거나 연연해함이 없이 차마 군부(君父)를 버리고 떠나간단 말입니까.

스승과도 같았던 친구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남겨진 우계에게는 이제 삶이 고통이었다. 율곡이 그리워서 편지를 다시 꺼내보는 밤, 우계는 자신도 모르게 편지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제문(祭文)만으로는 애통함을 달랠 수 없었던 우계는 만사를 지으며 비통해했다.

하늘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대도(大道)가 끝내 캄캄해져

백성들은 의지할 데를 잃었구나.

살아 있음이 고통인 줄 알겠구나

태허(太虛)로 돌아간 것이 즐거움이니

곧 지하에서 만날 것이니

길이길이 처음 뜻을 이루어보세.

 

친구의 죽음은 커다란 도가 사라지는 것이며, 백성들에게는 의지할 데를 잃는 참혹한 슬픔이었다. 친구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임에 절망하면서도 우계는 율곡과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었다. 우계는 율곡의 기일(忌日)이 되면 늘 소복을 입고 지내면서 한평생을 함께 걸었던 친구 생각으로 슬픔에 젖곤 했다.
율곡이 서거한 후에 당쟁으로 옥에 갇혔다가 얼마 후에 풀려 난 우계는 1585년에 율곡의 무덤을 찾아 곡을 했다. 그러고는 율곡 작품의 운을 빌린 시를 지어 친구인 구봉 송익필에게 보냈다. 우계가 지은 시는 이렇다.

세태는 사람 따라 변하고

수심은 늙어갈수록 새롭다.

어이 알았으랴. 뒤에 죽을 사람 되어

그대 시 읽고 상심하게 될 줄을

 

우계는 평소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자신이 율곡보다 먼저 세상을 뜰 거라고 여겼다. 살아서 친구의 죽음을 겪는 것보다 차라리 먼저 이승과 하직하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율곡은 가고 자신은 남았다. 이 시는 그런 참담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율곡과 계미기사(癸未記事)


율곡과 계미기사(癸未記事)

 

계미기사』는 1583년(선조 16)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시정(時政)을 기록한 것으로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동서당론에 관계된 기사를 뽑아 편찬한 책이다. 1583년은 율곡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이다. 이 글은 계미기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치열했던 동서 붕당간의 갈등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1583년 1월, 선조는 율곡을 병조판서로 기용하여 병권을 맡겼다. 당시 율곡은 거듭되는 승진으로 인하여 몇 년째 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지만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6월에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2만여 명이 함경도 종성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율곡은 이에 대한 대책을 다각도로 제시하였다. 우선 군사 가운데 전마(戰馬)를 바치는 자에게는 북변으로 가는 것을 면제해 주는 조치를 취하면서, 이를 임금에게 미리 아뢰지 않고 시행했다가 뒤늦게 임금에게 계(啓)를 올려 ‘황공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또 임금이 변방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병조의 당상관을 불렀는데, 율곡은 내병조까지 왔다가 현기증이 일어나서 가지 않았다.
그러자 동인들로 채워져 있던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6월 11일에 선조에게 율곡을 파직시킬 것을 요청했다.

“군정(軍政)은 중대한 일인데 아뢰지도 않고 마음대로 행하였고, 또 예궐하여 대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울러 부름을 받고 궐내에 왔으면서도 내조에만 들르고 끝내 지척 사이에 있는 승정원에 들려 교지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이로써 임금을 업신여긴 죄가 크니 파직을 명하기 바랍니다.”

간원들은 여러 날에 걸쳐 논박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율곡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율곡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은 터라 계속해서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선조는 율곡을 타이르며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영의정을 비롯한 정승들도 율곡의 사직을 반대했다. 그런 가운데 율곡은 6월 17일에 이런 상소를 올렸다.

“신은 죄를 짓고 황공하여 감히 출사를 못 하였습니다. 병권을 제 마음대로 하거나 임금을 업신여기는 일은 바로 신하로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지난번 대신들이 신을 위하여 각자 상소를 올리면서도 대간의 말이 지나치다고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이렇게 큰 죄를 짓고서 병조 수장의 위치에 처하여 장수들을 호령한다면, 그것이 사방에 전해졌을 때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니 사면령을 내려주소서.”

그러면서 율곡은 계속해서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율곡의 태도에 대해 사헌부와 사간원 간관들이 다시 그의 파직을 청했다.

“이이는 자신을 반성하여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오히려 자기가 먼저 의심하고 시기하여 분노를 깊이 품어, 여러 날 올린 상소의 내용들이 평온하지 않고 대간이 논핵한 것을 꼭 허구 날조한 것으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신들이 대간을 물리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고, 또 좌우와 여러 대신에게 물어 경중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마치 무슨 승부를 결정하려는 것 같았습니다.(중략)
대간이란 말을 하는 것이 직책이므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임금이라도 그대로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하의 반열에 있는 자가 자기의 허물을 듣기를 싫어하여, 자기가 옳다고 강변하고 말을 한 대간들을 속 좁은 자들로 몰아 입을 열지 못하게 하니, 이는 매우 대간을 멸시하고 공론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지만 여전히 선조는 율곡을 파직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문관이 나서서 율곡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대간이 이이의 직을 파할 것을 청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니 이이로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거취를 놓고 다투기 위하여 필설을 놀려 공의와 맞붙어 싸우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는 시론(時論)이 자기를 미워하여왔다고 하고, 두 번째는 좌우에 물어보라는 등의 애절하고 괴로운 말들로 임금의 귀를 동요시킴으로써 죄를 대간 쪽으로 돌려보내고야 말겠다는 심산입니다. 이는 바로 온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고 대간쯤은 손바닥이나 사타구니 사이에다 버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그 얼마나 공론을 무시한 처사입니까?”

홍문관까지 이렇게 강하게 율곡을 비판하고 나서자, 선조는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선조는 “그대들이 올린 글의 뜻은 알겠다.”면서 삼사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조는 정승들에게 내린 비망기에서 율곡이 이번 일이 있기 전부터 신진 사림들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마침 율곡이 실수를 하게 되자 이 틈을 노려 기필코 그를 제거하려 했다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다른 공경대부들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오지 않았던 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임금을 업신여겼다고 논한 경우는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 대간의 말이 유독 이이에 대해서만 그렇게 직설적으로 공격하는가? 그가 말[馬]을 바치게 한 일을 사전에 아뢰지 않았던 것도 허다한 사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때맞추어 아뢰지 못했던 것뿐이지, 어찌 멋대로 권세를 부리기 위하여 한 짓이었겠는가?”

선조의 이 말을 듣고 옥당 관원들이 모두 사직을 청했다. 이에 대해 선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홍문관을 맡고 있던 권덕여와 홍진을 강하게 비판했다.

“권덕여와 홍진은 일찍이 내 앞에서 이이의 충직함에 대하여 칭찬하였었는데, 소인을 그토록 찬예했던 그들 자신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구나. 홍진 같은 별 볼 일 없는 무리야 책할 것도 없겠으나, 권덕여는 연로한 사람으로서 신진 선비들에게 붙어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는 이이를 소인으로 지목하고 나서니 그야말로 앞뒤가 뒤바뀐 자가 아닌가?”

이처럼 왕과 신하들이 언쟁을 벌이자, 영의정 박순이 우선은 율곡을 체직시키는 것이 합당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영의정 박순의 의견에 대해 선조는 다음과 같이 다소 한탄조의 비답을 내렸다.

“병조판서는 갈아야 한다. 이이는 이미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 되어버렸는데 무슨 영명이라는 것이 또 있겠는가? 내 비록 어두운 임금이나 소인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할 리야 있겠는가? 이이야 자기 고향으로 잘 돌아가서 흰 구름 사이에 높다랗게 누워 있다 한들 그 누가 그를 얽매어둘 수 있겠는가?”

선조의 비답을 전해 듣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버렸다. 또한 권덕여는 사직을 청하고 물러가 죄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도승지 박근원을 필두로 한 승정원 승지들이 선조에게 양사의 관원을 모두 출사하게 하고, 권덕여도 출사하여 직무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선조는 권덕여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혼이 이이를 대변하는 글을 올렸다.

“송(宋)의 구양수나 유지도 논핵을 당하고는 모두 글월을 올려 자신을 변명했지만 그들 역시 반드시 소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이가 말한 것은 그 목적이 출사하기 위함이었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는데도 삼사의 논의가 크게 일었고, 게다가 또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든가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죄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처음은 경미한 죄였는데 거기에다 왕을 업신여긴 죄와 나라를 깔보는 죄명을 씌웠고 이제는 또 그 죄명으로 법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려고 하니, 이는 그를 꼭 죽을 땅으로 몰아놓고야 말겠다는 심산인 것입니다.”

성혼의 상소문에 관한 말을 듣고 장흥 부사 송응개가 상소하여 논박했다. 송응개는 이이와 심의겸은 같은 당인이며, 사실은 이이가 서인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원색적으로 율곡을 비판했다.

“이이는 원래 하나의 중으로서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인륜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변신하여 환속한 뒤에 권력 있는 가문의 가축이 되었던 것을 이 세상의 청의(淸議: 뜻이 높고 올바른 논의)는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높은 관청에 뽑혀 알성급제 할 때에 관청에 있는 많은 선비들은 그와 동렬이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사귀기를 불허했는데, 마침 심통원이 자기의 심복을 보내 앞뒤에서 분주히 소통의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출세한 후에는 심의겸의 추천을 받아 청요직의 길이 트였으므로 그와 심복 관계를 맺어 생사를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가 일생 동안 가진 마음을 더욱 알 만합니다. 또 박순은 입을 모아 이이를 찬양하고, 성혼도 박순이 찬양하는 사람이며, 성혼 또한 심의겸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입니다.”

송응개의 말을 듣고 선조는 화가 나서 말했다

. “네 말이 설사 다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이제 와서야 말한 것은 불충이다. 너의 직위를 내놓고 물러가라.”

성혼의 상소를 듣고 사헌부 간관들도 모두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헌부 관원들은 업무를 보지 않았다. 그때 정언 이주가 상소하여 이이를 비판하고, 박순과 심의겸, 성혼 등이 모두 한 패거리라고 했다. 이후 동인 중 한 명이었던 우의정 정지연이 상소를 올려 이이에 대한 조정의 의논을 중재하려 했다. 그는 병이 깊어 조정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이를 탄핵하는 일로 삼사와 왕이 서로 언쟁을 벌이고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다투는 양상이 되자,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정지연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박순, 심의겸, 이이, 성혼을 한꺼번에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이이를 두둔하는 영의정 박순을 파직하라고 요청하자, 선조는 윤허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때 양사의 글을 주도한 인물은 허엽의 아들 허봉이었다. 허엽과 박순은 서로 악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허봉이 양사를 충동질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정의 논쟁은 급기야 성균관 유생들에게로 번졌다. 성균관 유생 유공진 등 470명과 전라도와 황해도 유생 400여 명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은 어진 신하라고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힘을 얻은 선조는 그해(1583년) 8월 28일에 이이와 박순, 성혼을 비난한 도승지 박근원은 강계로, 장흥 부사 송응개는 회령으로, 창원 부사 허봉은 종성으로 귀양 보내버렸다. 이것을 계미년에 세 명을 내쳤다고 해서 ‘계미삼찬’이라고 부른다.

세 사람을 유배 보낸 선조는 이이에 대해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이이는 진실로 군자이다. 이이와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근심이 아니라 오직 당이 적을까 근심이다. 나도 주희의 말대로 이이나 성혼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

선조는 그런 말을 한 뒤, 1583년 9월 8일에 율곡을 이조판서에 제수하여 조정에 나오라고 했다. 율곡은 그때 파주에 머물면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또한 이조판서에 제수되기 사흘 전인 9월 5일엔 사직 상소를 올렸었다. 선조는 그런 율곡의 마음을 이해한다면서 이번에는 이조판서에 제수한 것이다.
율곡은 10월 22일에 궁궐로 들어와 선조를 알현하고 박근원과 승응개, 허봉 등을 유배에서 풀어줄 것을 청했다. 율곡은 박근원과 송응개는 본래 간사한 자들이지만, 허봉은 다소 가볍긴 하나 간사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도 했다. 하지만 선조는 단호하게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은 말할 것이 없다.”

고 거절하였다.

12월 11일에는 해주 사는 유학 박추가 김성일, 우성전, 이경률 등이 동서 분당의 주역이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추의 상소문을 읽고 선조는 “바른 말을 상소하여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처럼 선조가 율곡의 의견을 따라 조정 인사를 단행했을 때 이미 율곡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조정에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4년 1월 16일, 율곡은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

“숙헌(율곡 이이의 자)이 형의 편지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봉함을 뜯고 두 번 세 번 되풀이 읽었습니다.”

(1560년 10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숙헌이 요즘 임진나루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다소 넓기에, 네댓 날쯤 문회(文會)를 열어 『대학』과 『논어』를 강론할 생각입니다. 형이 왕림하여 질정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1577년 윤8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형에게 보내는 숙헌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편지를 미리 뜯어보아도 좋다는 숙헌의 허락이 있었지요.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읽어보았더니, 숙헌의 날카로운 칼날도 형에게 완전히 제압되었군요.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1579년 11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위에서 인용한 글은 모두 우계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단락이다. 율곡 이이와 함께 대학자인 우계 성혼이 학술모임에 초대하기도 하고, 서로 편지를 공유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송익필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그의 가족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중종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상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515년(중종 10), 조광조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며 중종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조광조는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종이를 제조하는 부서인 조지서의 사지로 재직 중인 초보 관리였다. 조지서라는 별 볼일 없는(?) 관서에 근무하던 조광조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초보 관리의 신분으로 치른 알성시에서 합격한 이후였다. 알성시 장원 급제 뒤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과 사간원 정언을 거쳐 마침내 홍문관에 입성한다. 홍문관 관리가 된 조광조는 중종의 뜨거운 총애를 받으며 승진을 거듭했고 개혁을 주도하며 젊은 선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조광조는 특히 엉터리로 임명된 반정공신들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훈구대신들에 대하여 날선 비판을 하였는데, 그를 추종하는 사간원․사헌부, 홍문관과 성균관의 젊은 유생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때 비판의 대상이 된 대신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예외가 바로 이조판서 안당이었다. 안당은 드물게도 신진 사림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은 대신이었고,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마침내 1518년(중종 13) 5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와 신진 사림들은 강경하게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 작위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해야 한다는 것)를 주장했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공신에 임명된 총 117명 가운데 4등 공신 65명 전원을 포함한 76명이 공신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조광조와 신진사림들은 비로소 역사를 바로잡았다고 기뻐했지만, 이들은 중종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위훈삭제는 공신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의 콤플렉스를 자극한 것이다.

위훈삭제가 이루어진 지 3일 뒤, 중종은 후궁 희빈 홍씨의 아버지이자 반정공신인 홍경주와 남곤에게 밀명을 내려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는 관리들을 체포하였다. 결국 조광조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그를 추종했던 선비들도 모두 숙청되었다.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조광조가 사사된 뒤 중종의 마음을 알아챈 신하들은 안당에 대한 탄핵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안당은 고신(告身: 관직 임명장)을 빼앗겼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과 친밀했던 안당은 집중적으로 탄핵을 받았다. 그를 비난하는 가장 큰 근거는 그의 세 아들들이 모두 현량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이다. 현량과는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관리등용 제도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 받아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사람은 임금과 대신들 앞에서 심층 면접을 본 뒤 곧바로 벼슬을 내리는 방식이었다. 현량과가 시행되자 조광조와 친밀한 젊은 선비들이 대거 발탁되었는데, 그 중에는 안당의 세 아들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안당을 비난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량과가 실시된 지 얼마 뒤 안당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 형제들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곧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합격도 취소되었다. 다시 정규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는 이상 정계에 진출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1521년(중종 16),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3년의 시간이 흘렀고 안처겸 형제들의 삼년상도 끝이 났다. 탈상을 하는 날, 안처겸 형제들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모여 세상을 한탄하며 조광조를 숙청한 조정 대신들을 비난하였다. 안당은 아들들의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위험하다고 여겨 주의를 주었지만 혈기왕성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들들을 설득하지 못한 안당은 한양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바로 이때 안당의 이종 서조카 송사련이 안처겸 형제를 역모로 고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는 정실부인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재혼을 하는 대신 데리고 있던 집안의 노비 중금을 비첩으로 삼았다. 중금은 안돈후와의 사이에서 딸 감정을 낳았다. 노비의 딸 감정은 천출이긴 하였지만 혈연적으로는 안당과 이복 남매였다. 안당은 감정의 노비문서를 없애고 신분을 양인으로 바꿔주었다. 감정은 평민 출신 군인 송인과 혼인하여 송사련을 낳았다.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송사련은 안당에게 이종조카였고 안처겸에게는 이종사촌간이었다. 따라서 송사련은 안당 집안의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이 송사련이 안처겸의 역모를 고발한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역모에 민감했고 기묘사화가 끝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긴장했다. 곧바로 친국(親鞫: 임금이 죄인을 몸소 신문하는 것)이 열렸고 모진 고문 끝에 관련자들이 속출했다. 안처겸, 안처근 등 7명은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역모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20여 명이 숙청되었다. 역모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좌제가 적용되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안당은 교형(絞刑: 교수형)을 받았고, 남은 가족들은 변방으로 쫓겨나는 형벌을 받았다. 이 사건을 ‘신사무옥’이라고 한다.

신사무옥은 조광조를 추종하던 마지막 세력까지 숙청된 사건이자 송사련과 안당 가문과의 길고긴 악연이 시작된 것을 의미했다. 신사무옥으로 안당의 가문은 풍비박산되었고, ‘같은 집안사람’으로서 역모를 고변한 26세의 송사련은 공신으로 책봉되어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렸다. 종5품 관상감 판관으로 재직 중이던 송사련은 신사무옥이 마무리된 지 열흘 만에 다섯 품계를 뛰어넘어 정3품 중추부 첨지사로 승진하였고, 안당 가문에서 몰수한 재산은 송사련의 차지가 되었다. 신사무옥은 노비의 손자 송사련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신사무옥 당시 안당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둘째 아들 안처함이었다. 아버지 안당의 성품을 닮은 그는 형 안처겸과 동생 안처근이 시절을 한탄하며 세상을 뒤집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모으자 극구 말렸던 인물이다. 신사무옥 이후 경상도 청도에 유배된 안처함은 항상 행동을 조심한 덕분에 1522년(중종 17)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안처함은 처가가 있는 경기도 용인에 거처를 마련하고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543년(중종 38) 세상을 떠났다.

구봉 송익필은 1534년(중종 29) 바로 송사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송익필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총기를 드러냈지만 이름난 유학자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안당의 가문을 몰락시킨 송사련의 악명이 선비들 사이에서 워낙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익필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며 과거시험에 매달렸다. 송익필은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만이 아버지의 오명을 씻고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558년(명종 13) 다섯 살 아래의 동생 송한필과 나란히 소과 초시에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송익필은 이내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송익필 형제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이 알려지자 사관 이해수, 김홍식 등이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며 그 자식들은 역시 얼손(노비의 자손)들이니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송사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1559년(명종 14) 결국 송익필의 초시 합격은 취소되었고, 대과 응시 자격도 박탈되었다. 이때 송익필의 나이는 스물여섯,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양반의 신분을 얻었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스물여섯의 송익필은 입신양명의 꿈을 포기한 채 파주 구봉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송익필은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바로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연마한 ‘율곡 이이’와 조광조의 제자였던 성수침의 아들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 이이는 관료가 되기 위해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우계 성혼은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송익필은 독서에 매달렸다. 이처럼 각자 목표하는 길은 달랐지만 세 사람은 서로 학문을 논하며 우정을 키워갔다.

1560년(명종 15) 가을, 송익필은 제자 한 명을 받았다. 율곡을 통해 알게 된 김계휘가 아들 김장생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제자를 기른다는 것은 이제 과거시험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송익필은 고민 끝에 김장생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과거길이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치열하게 학문을 연구한 송익필의 명성은 점점 세상에 알려졌고 김장생을 시작으로 많은 제자들이 파주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송익필의 인생에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듯 점점 어두워지고만 있었다. 1566년(명종 21) 신사무옥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당의 둘째 아들 안처함의 아들인 안윤이 할아버지 안당의 신원 복귀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명종은 안당의 신원을 복귀시켰고 고신과 직첩도 돌려주었다. 안당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안당의 후손들로서는 거의 50년 만에 선조의 명예를 회복한 셈이었다. 안당이 명예를 회복할수록 송사련 일가에 대한 비난 여론은 거세졌다.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 송사련은 이를 개의치 않았고 유력 인사들이나 명사들과 교류를 즐기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비상한 두뇌로 고변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인생을 바꾼 송사련은 그 자체로 만족했다. 그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명예직 당상관으로서의 신분을 즐기면서 당대의 권세가들과 어울리며 평생을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하지만 양반이자 공신의 아들로 태어난 송익필은 달랐다. 그는 실력도 빼어났고 목표도 있었지만, ‘송사련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정정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출사의 꿈을 접은 송익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가한 서생으로서 제자를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송익필은 성리학 중에서도 특히 예학(禮學)을, 그중에서도 가례(家禮)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태생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정정당당할 수 없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괴로움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 결과 송익필에게 학문을 배운 김장생은 훗날 조선 예학의 종주로 성장하였다.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배운 학문을 아들 김집과 김집의 제자 송시열에게 가르쳤다. 김집은 정실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율곡 이이의 서녀를 소실로 맞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하여 김집은 송익필과 율곡 이이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 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집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송시열을 자신의 제자로 받았다. 송익필․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학맥은 그대로 서인의 계보가 되었다.

이처럼 후대에 흔히 율곡의 제자들로 일컬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혼과 송익필의 제자이기도 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친우 사이인 율곡, 성혼, 송익필은 제자를 공유하는 하나의 학단(學團)을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부분이 율곡의 제자로 알려진 것은 율곡의 학문적 비중과 사회적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사실상 성혼, 송익필과 공유되었던 제자들이 율곡문하로 흡수되어 알려졌던 면이 있다. 또한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송익필의 처지와 신분 때문에 그의 제자를 자처하기가 꺼려졌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선조가 즉위한 지 8년째가 되던 1575년, 조선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곧 후배 사림이 동인을 형성하고 선배 사림이 서인을 형성하여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조정이 온통 동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기 시작했을 때,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가 80세였으니 천수를 누린 셈이었다. 송익필은 율곡에게 아버지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位)를 베푸는 나무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조정에 출사할 수도 없는 송익필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한 율곡은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율곡은 누구보다 조광조를 존경해왔고 송사련이 사람들에게 어떤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잘 알았지만, 흔쾌히 친우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당쟁이 본격화된 이후 송익필의 당파와 당색은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그 후 당쟁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율곡이 동인들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자 송익필은 서인 세력의 숨은 브레인으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송익필은 친우인 이이와 정철, 성혼 등이 조정의 주요 사안이나 정책에 대하여 조언을 청할 때면 언제든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조정에 나아갈 수 없다는 단점으로 인하여 송익필은 오히려 조정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었다. 그는 파주 구봉산 자락에 앉아서 율곡을 통해 선조의 심리를 읽어냈고 동인들의 목표와 방향을 파악했다. 덕분에 송익필의 조언은 율곡과 서인 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1584년(선조 17) 1월, 율곡 이이가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율곡 이이의 죽음은 당파를 초월하여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서인들은 늘 율곡에게 동인의 편을 든다며 원망하였고, 동인들은 율곡이 어차피 서인의 편이라며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서인 중에서 율곡을 대체할 인물은 어디에도 없었고, 동인 중에서 율곡처럼 조정의 화합을 이끌 인물도 없었다.
율곡을 통해 세상과 조정과 소통하고자 했던 송익필이 느낀 상실과 슬픔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서인 세력은 양지에서 활동하던 수장을 잃었고, 양지를 잃은 서인 세력은 음지에서 활동하던 수장 송익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익필은 조정에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율곡의 죽음과 함께 서인의 실각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송익필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1586년(선조 19), 안당의 손자 안윤이 송익필의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내용은 송익필의 외할머니 감정이 안돈후(안당의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노비 중금(안돈후의 비첩)과 그녀의 전남편(노비) 사이에서 생긴 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송익필 일가는 안당 집안과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안당 집안의 사노비였다. 중종 시대에 만들어진 『대전후속록』에 따르면 비록 노비라 하여도 2대에 걸쳐 양인이 할 수 있는 부역에 종사하면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여기에 따르면 송익필의 경우, 아버지 송사련과 할아버지 송인이 양역에 종사하였고, 또 이미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안당의 후손들은 60여 년을 기다려온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동인 세력과 손을 잡았다. 사헌부를 장악한 동인 세력에 의해 국법은 무시되었고 소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드디어 그 해 7월 15일, 송익필 집안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졌다.

“송사련의 후손 송익필 형제와 그 자손들을 원래대로 안씨 가문의 사노비로 되돌려라.”

판결이 나오자마자 송익필 집안의 일가친척 70여 명은 모두 안당 가문의 보복을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져 도망노비가 되었다. 송사련의 무덤은 사정없이 파헤쳐졌고 시신은 훼손되었다. 송사련에 대한 안당 가문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참혹한 사건이었다.

송익필도 안당 가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가 도망친 곳은 깊숙한 지방이 아니라 대궐에 가까운 한양, 그것도 동인의 수장 이산해의 집이었다. 송익필이 한양을 떠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동인 이산해의 집에 숨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 이산해는 송익필에게 서인에서 동인의 편으로 전향하면 모든 고초를 해결해 주겠노라고 회유했다고 한다. 송익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송익필이 다시 노비로 환천되자 제자들과 친구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선조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성혼과 정철은 송익필의 노비문서를 구입하여 그를 다시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안당 가문에서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소송을 진행한 것도 판결을 이끌어낸 것도 동인이었지만 이들은 송익필을 환천시켜 서인의 기세를 완전히 꺾은 것에 만족할 뿐 송익필을 안당 가문에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공노비가 아닌 사노비였기에 도망노비를 찾는 것은 주인의 몫이라는 주장이었다. 동인 중에는 송익필과 학문적․문학적 교류가 깊었던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차마 송익필을 직접 끌고 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정여립의 역모 사건인 ‘기축옥사’의 배후 조종자의 역할을 한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고, 조헌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갈 곳이 없던 그는 스승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김장생이 충청도 당진에 거처를 마련해 주자 그곳에서 책을 저술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1599년(선조 32) 6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악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송익필. 그의 삶은 영광보다 고난이, 명예보다 비난이 가득했다. 송익필은 가정의 아픔과 부친의 불명예를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립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장가로 불렸으며, 그가 지은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는 입신양명이 좌절되자 기꺼이 친구들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서인 세력의 책략가가 되어 당쟁의 역사를 만들었고, 스승을 하늘처럼 존경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어 조선 산림의 종주가 되었다.

율곡의 사직상소


율곡의 사직상소

 

늘날 선조는 당쟁의 폐단과 임진왜란의 참화를 부른 암군(暗君:어리석은 임금)이라는 혹독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임금은 아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폭정에서 겨우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특별히 명종의 총애를 받던 선조가 1567년 왕으로 등극했다.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인해 즉위 초에는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정사 처리에 능숙하여 1년 만에 친정을 하게 될 정도로 선조는 영민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사회는 희망에 부풀었다. 부패한 척신들이 국정을 농단하던 어두운 시대가 끝나고 올바른 유학자인 사림(士林)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는 기대였다. 이러한 여망에 부응하듯 즉위 초 선조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정사를 토론하고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할 정도로 뛰어난 군왕의 자질을 보였다. 또한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했다.

특히 학문을 사랑한 선조는 비록 퇴계와 율곡으로부터 존경받는 군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이 두 학자를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하고 존중했다. 실제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퇴계를 스승으로 불러들였다. 병을 이유로 퇴계가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선조는 친히 편지를 보내

“어진 임금은 어진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성군이 되는 것이오.”

라고 하면서 어리석은 자신을 깨우쳐달라며 극진한 예우로 모셨다. 선조가 성군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 만큼, 율곡은 다가올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율곡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정작 선조는 퇴계의 가르침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퇴계는 1569년(선조 2) 3월 늙고 병약함을 이유로 들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다. 율곡은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5개월여가 지난 8월 16일부터 경연에 참석해 선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율곡의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성군의 뜻을 세우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시간이 지나자 신하들의 간언을 뿌리치는 방법까지 나름대로 터득했다.

선조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은 점차 절망으로 바뀌었다. 오만하고 의심이 많던 선조는 임금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척신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사림 역시 이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임금은 신하를, 신하는 임금을, 신하는 다른 신하를 불신하면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마치 임금이 성군의 뜻과 방향을 좇아 정치를 하도록 이끄는 것이 자신이 벼슬하는 유일한 이유인 양 줄기차게 선조에게 선정을 실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율곡은 강한 어조로 임금의 태도를 비판했으며, 갈수록 치열해져만 가는 붕당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온 힘을 쏟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578년(선조 11), 1579년(선조 12)에 제출되었던 대사간 사직상소에 잘 드러난다.

1578년 5월 1일, 대사간에 임명된 율곡은 곧바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신이 쓸 만한 사람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당면한 일들에 대해 하문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의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신다면 다시는 소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선조는 그동안 여러 차례 율곡을 요직에 등용했지만, 정작 그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임금이 자신의 간언을 들을 생각이 없으니 사직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면 더는 자신에게 출사(出仕: 벼슬길에 나아감)하라고 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반응에 선조도 그날로 임명을 철회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으니 글로 써서 아뢰라.”

라고 말했다. 그러자 율곡은 기다렸다는 듯 장문의 글을 올렸다.

지금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은 곤궁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졌음은 전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임금은 한 나라의 근본으로 정치가 잘 다스려지냐 혼란스러우냐는 오로지 임금에게 달려 있습니다. 임금이 할 도리를 다했는데도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율곡은 임금의 다스림의 근본은 ‘성군과 선치(善治)’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곡은 선조에게 성군이 되겠다는 뜻을 선포하고 선정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다. 임금의 강력한 의지와 실천만이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평안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곡이 보았을 때 임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일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임금은 그 선택의 올바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얻어 부족함을 채우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요, 순, 우, 탕과 같은 성군들이 자신의 총명함을 과신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좋은 말을 수용하려고 애썼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이들 임금의 경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선조가 자신만 옳다는 아집에 빠져 독단적으로 정치를 행하고 있으니,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율곡은 선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쓸 만한 재능을 가진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할까 봐 걱정하시고, 곧은 말을 개진하며 논쟁하는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명령을 어길 것이라며 지레 싫어하십니다. 유학자로서의 행실을 실천하는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다고 의심하십니다.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떤 도를 배우고 어떤 계책을 아뢰어야 전하의 마음에 부합하여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누구라도 자신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언로를 열어놓아야 한다. 옛말에 간쟁(簡爭)하는 신하가 일곱 사람만 있다면 어떤 임금도 성군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나라도 부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임금은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여론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문제도 결국 자만 때문이다.

흔히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가 발생해도 결코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일이 실패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 탓이다. 내 판단은 분명히 옳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방해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오로지 주관적인 잣대를 사용한다. 그에게는 내 생각을 따르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내 생각을 반대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율곡은 선조의 잘못과 허물들을 가감 없이 거론했다. 그리고 상소의 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디 전하께서는 기회를 놓치지 마옵소서. 「하서(夏書: 『서경』의 편명)」에 이르기를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미 위태로운 조짐이 드러났으니,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바로잡을 일이 시급합니다.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율곡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가리켜 ‘흙이 무너지는 형세’, ‘쌓아놓은 계란이 무너지는 형국’이라고 표현했다. 2백 년 묵은 집이 낡아서 동쪽을 고치면 서쪽이 무너지고, 서쪽을 고치면 동쪽이 무너져, 유명한 목수라도 어찌 손댈 바를 모를 지경리라고 했다. 삼척동자 어린 아이의 눈에도 나라가 망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 백성의 부모라는 임금은 팔짱만 끼고 앉아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밤중에 벌떡 일어나게 된다고 술회했다.

율곡은 절박했다. 병이 들기 전에 예방했다면 좋았겠지만, 병이 아직 심하지 않은 지금이라도 치료에 나서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율곡은 왕명을 거역하고 사직상소라는 강경한 형식을 통해 선조를 일깨우고자 한 것이다.

율곡은 이듬해인 1579년 5월에 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동인과 서인에 관한 논의가 큰 문젯거리가 되고 있으니, 신은 이 점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라며 붕당에 대한 견해와 대책을 상세히 개진했다.

사실 조정과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선 것은 선조 8년, 즉 1575년 때이지만, 이 사건의 발단은 윤원형이 한창 권세를 떨치고 있던 1564년(명종 19)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있던 심의겸이 공무 때문에 윤원형이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심의겸은 우연히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마주쳤다. 이조민은 전부터 심의겸과 잘 아는 사이여서 자신의 서재로 그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조민의 서재에는 손님용 침구가 많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심의겸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해 이조민에게 누구의 침구인지 물었다.
이조민은 심의겸의 물음에 별 생각 없이 답변해주었는데, 그 가운데 김효원이 있었다. 김효원은 당시 과거급제는 하지 못했지만 글과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들은 심의겸은 마음속으로 ‘학문을 한다는 선비가 어찌 권문세가의 무식한 자제들과 어울려 지낸단 말인가. 절개가 있는 선비가 아니구나.’ 하고는 이때부터 김효원을 비루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은 권력에 빌붙어 출세 길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장인의 성화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잠시 동안 윤원형의 집에 묵은 것뿐이었다. 심의겸은 앞 뒤 사정도 살피지 않고 한 가지 면만 보고 김효원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여하튼 그 다음 해 3월 김효원은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고, 그 몸가짐이 단정하고 책임감이 강해 날로 명성을 얻어갔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김효원은 오래지 않아 이조좌랑의 요직에 천거되었다. 그런데 심의겸이 번번이

“김효원은 예전에 난신(亂臣) 윤원형의 집에 드나들며 권세를 좇던 비루한 사람”

이라며 가로막고 나섰다. 이 때문에 김효원은 낭관이 된 지 6∼7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조좌랑이 될 수 있었다. 이조좌랑이 된 김효원은 학문과 인품을 두루 갖춘 선비들을 천거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후배 사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김효원은 자기 앞을 가로막은 심의겸에게 만큼은 관대하지 못하고 그를 괘씸하게 여겨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심의겸은 어리석고 고지식하며 거친 인물이다. 크게 쓸 수 없는 인물이다.”

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심의겸의 주변 인물들은 김효원이 원한을 품고 보복이나 하는 소인배라고 떠들고 다녔고, 김효원을 따르는 인물들은 또 그들대로 심의겸을 두고 올바른 선비를 해치는 간악한 사람이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이런 와중에 김효원과 심의겸을 확실하게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어 갈 때 자신의 후임(이조좌랑)으로 천거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두고서

“이조의 관직은 외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등용할 수 없다.”

라고 극력 반대했다. 심의겸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일족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심의겸은 난신 윤원형의 문객 노릇을 한 주제에 도리를 따진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그러자 김효원을 따르는 세력이

“김효원은 나라를 위해서 한 말인데, 심의겸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올바른 선비를 핍박한다.”

면서 성토했고, 이에 대해 심의겸의 편을 든 세력은

“심의겸의 말은 직접 보고 들은 실상을 전했을 뿐이다. 오히려 김효원이 원한 때문에 외척임을 구실삼아 심충겸을 반대하고 있다. 이것은 소인배나 하는 행동이다.”

라면서 비난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서로를 더욱 배척했고, 이때부터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당쟁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가 힘든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괜한 일을 만들어 소문내기 좋아하는 자들이 동인과 서인에 관한 갖은 설을 지어내어 실상은 살펴보지도 않고 단지 의겸과 가까운 사람은 서인으로, 효원과 가까운 사람은 동인이라고 하니, 조정과 신하들이 모두 동․서로 편입”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굳어져“논의가 갈수록 과격해지고 바로잡아 제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율곡은 상소에서 두 사람 모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고 하였다.

효원도 신이 아는 자이고 의겸도 신이 아는 자입니다. 이 둘의 사람됨을 논한다면 다 쓸 만합니다. 잘못을 논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을 군자라 하고 다른 한 사람을 소인이라고 부른다면, 신은 그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율곡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심의겸은 외척으로서 정치에 개입하려 한 잘못이 있고, 김효원은 사적인 감정으로 심의겸을 비난한 잘못이 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되면 자연스레 화합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러한 율곡의 입장은 미봉책이라는 반론에 부딪힐 수 있었다. 그도 이 점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사람들은 신에게 ‘둘 다 옳다고 얼버무리니 시비가 분명하지 않다.’고 나무랍니다. 천하에 어떻게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 있을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논함에 있어 세상에는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경우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율곡은 만약 한쪽이 옳고 한쪽이 그르다고 한다면, 헐뜯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서로 질투와 반목을 거듭하는 형세를 결코 없앨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시비비를 가리다보면 또다시 예전 사화처럼 큰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진정 동인과 서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세상의 일이란 둘 다 옳은 것도 있고 둘 다 그른 것도 있다면서, 김효원과 심의겸 양쪽의 반목과 대립은 모두 그른 것이라는 양비론(兩非論)을 내세웠다.

지금 조정의 분열을 해소하지 않고 저들이 서로 헐뜯고 다투게 내버려 둔다면 머지않아 종기가 곪아 터지는 아픔이 오늘날보다 더욱 심할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동인과 서인의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다시는 서로를 구별하지 말도록 명하옵소서. 당파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어질고 재능이 있으면 등용하고, 그러지 못하면 버리시옵소서. 편벽되게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자와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자는 억제하고, 남을 모함하여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공연한 일을 만들려고 하는 자는 배척하옵소서.

율곡이 동서 화합을 위해 주장한 논리를 보면, 그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말부터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자발적인 화해가 어렵다면 임금이 강제로라도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한 인재 등용을 통해 갈등을 억제하고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율곡의 주장은 붕당의 반발을 살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신의 상소가 아침에 올라가면 저녁도 되지 않아 신을 헐뜯는 말이 쏟아질 것이옵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신이 받은 큰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이 몸을 다 바치더라도 어찌 주저하오리까.

동서 분당을 전후한 시기, 율곡은 조정과 사림을 이끄는 리더 중의 리더였다. 따라서 율곡의 말 한마디 혹은 행동 하나가 조정과 사림에 끼치는 영향력과 파급 효과가 엄청났다. 율곡은 자신을 둘러싼 이러한 정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친분과 당파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서 항상 동서화합을 부르짖었다.

율곡의 이 사직 상소는 배수의 진을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생명을 걸고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자신이 앞장설 테니 임금도 노력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며 곧바로 그를 해임한다. 율곡의 말처럼 동인과 서인 세력은 결국 말을 다스리지 못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에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는 비극을 초래했다.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험으로는 나라에 필요한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였다.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진출하여 관리 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는 데 일생을 걸었다. 과거시험에는 관리를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그리고 율관․역관․의관 등 기술직 종사자를 뽑는 잡과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물론 문과(대과라고도 함)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에서 뽑는 소과에 합격해야 했다. 소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뉜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진사시는 문장력을 알아보는 시험이었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시험에 해당된다. 고전소설에서 ‘최진사’, ‘허생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논술고사는 대학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진사시 이외에 본시험인 문과에서 책문(策文)이라 하여 주제에 맞는 문장 작성 능력을 비중 있게 평가했다. 그런데 문장시험에서는 직접 생각해낸 글 대신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조대의 학자 신흠은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기존의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경우가 거의 반수가 되었다.“고 개탄하기도 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 이 둘을 합쳐서 소과라 했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면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에서는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점 이상 되어야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줘 성실성을 과거 응시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지금의 내신성적과 유사한 셈이다.

문과 역시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총 33인의 합격자를 선발했다. 식년시가 3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니 3년에 33명의 관리가 뽑혔다. 조선시대에 공무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학자들마다 통계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 시험이 대략 744회 실시되어 급제자는 모두 1만 4,620여 명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정기 시험인 식년시 163회에서 6,063명, 각종 부정기 시험 581회에서 8,557명이 선발되었다. 다만 이 숫자는 중시를 제외한 숫자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과거 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 간다’는 뜻의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는 그토록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던 과거길이 오늘날 여행을 뜻하는 관광길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 흥미롭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을 방방(放榜)이라 했다. 과거 합격자가 발표된 뒤에 궁중에서 방방의 또는 창방의라는 의식이 치러졌다. 왕은 어좌에 앉고 시신과 백관이 서 있는 가운데 의식이 치러졌으며, 급제자는 차례대로 왕에게 사배례를 올린 다음 합격증인 홍패․백패와 어사화와 주과(酒果) 등을 하사받았다.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은 동기생이라 하여 아무리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친구처럼 지냈고, 따로 계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합격자는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三日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관과 선배, 친척을 방문하며 인사하는 일)를 했으며, 합격자를 배출한 마을에서는 경사가 났다 하여 한바탕 큰 잔치를 베풀었다. 조선후기에는 「평생도」라 하여 자기 일생의 주요 장면을 8폭 병풍에 담아 집에 보관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는데, 이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과거 합격 장면이었다. 그만큼 과거급제는 개인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문과 시험이 740여 회 치러졌으므로 장원급제자도 740여 명이다. 문과 급제자 전체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숫자이고, 1년에 장원급제자가 대략 1.4명 배출되었으니 정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문과 급제는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가문의 커다란 영예였다. 급제만 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는데 더구나 장원급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장원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는 엄중한 금기를 깨고 불공을 드리기도 하고, 과거 시험만 보게 해준다면 개구멍이라도 지나겠다고 통사정을 하는가 하면, 신문고를 두드리는 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장원급제자들 가운데는 어렵다는 과거에 연달아 장원을 차지한 수재도 있었고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도 있었다.

반드시 머리가 좋고 똑똑해야 장원급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과거의 장원들 중에는 신동으로 널리 알려져 이름을 날린 사람도 많았다. 우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여섯 살에 글을 읽고 글귀를 지어 사람들이 모두 신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세종 20년(1438)에 19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종 26년(1444) 문과에 3등으로 급제했다. 세조 3년(1457)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해서 사간원 우사간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정시에도 다시 장원을 차지해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는 특히 시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장원이었다. 그가 사은사로 북경에 가서 통주관에서 안남국(베트남)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도 장원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중국 당대에 형성된 시체. 일정한 격률과 엄격한 규범을 갖춤) 한 율을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했고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을 지어 응답했다. 그러자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기재(奇才)다”

라고 했다. 또한 요동 사람 구제(丘霽)가 서거정의 시를 보고는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

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조 2년(1456)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은 10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세종이 22세인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

“옛날에 사람이 7보를 걷는 동안 시를 지은 사람도 있고 동발(銅鉢: 타악기의 하나)을 친 소리가 끝나는 동안에 시를 지은 일도 있는데, 네가 능히 옛 사람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춘운(春雲)’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자 임원준은 즉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화창한 삼춘 날씨에, 멀고 먼 만 리 구름이로다. 바람은 천 길이나 헤치고, 햇빛에 오화가 문채 나네. 상서로운 빛은 옥전에 어리었고, 서기(瑞氣)는 금문을 옹위하네. 용을 따를 날을 기다려, 장맛비가 되어 성군을 보좌하리라.”

이 시를 듣고 임금은 한참 동안 칭찬을 했고, 얼마 후 그에게 집현전 관직을 제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훗날 훈구파의 거물 임사홍의 아버지인 까닭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뒷날의 사관은 그를 성질이 음침하고 교활하며 탐심 많고 간사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어머니가 기이한 꿈을 꾼 후 그를 낳았는데,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아 눈만 스치면 곧 암송하고 글도 잘 지은 신동이었다. 그는 태종 14년(1414)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최고의 신동을 꼽자면 율곡 이이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율곡을 잉태할 때 꿈에 동해 바다에 나갔더니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있다가 자기 품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또 태어나기 전날 밤 사임당은 큰 바다에서 흑룡이 날아와 침실의 처마 밑에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율곡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율곡을 낳은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고, 율곡의 아이 시절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율곡의 천재성은 어려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옛 사람이 쓴 시의

“은행 껍질은 푸른 옥구슬을 머금었고, 석류 껍질은 부서진 붉은 진주를 싸고 있네”

라는 시귀를 인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일곱 살 때에 이미 경서에 통달했고,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는데도 일찍이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여덟 살 때는 고향 마을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화석정(花石亭)’이란 시를 지었고, 열 살 때에는 강릉 경포의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다.

13세가 되던 명종 3년(1548)에 서울에서 진사 초시에 해당하는 진사해(進士解)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율곡이 어린 나이에 급제한 것이 기특하여 승정원에서 불러보니 동년배의 다른 급제자는 자못 뽐내는 태도를 보였으나 율곡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한다.

율곡은 23살이 되던 명종 13년(1558) 겨울에 문과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했는데, 당시 고관(考官: 시험관)이었던 정사룡 등은 그의 2,500여 자에 달하는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을 보고 놀라

“우리들은 여러 날 애써서 생각하던 끝에 비로소 이 문제를 구상해냈는데, 이모(李某)는 짧은 시간에 쓴 대책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

고 말하였다. 율곡의 「천도책」은 당시의 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후일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뒷날(1582년) 율곡이 원접사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사신이 율곡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천도책」을 지은 분이냐”

고 물었다는 것으로 보아, 율곡의 명성은 이미 그 당시 중국의 학계에까지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율곡은 문과 별시의 최종 시험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율곡은 아버지 삼년상을 치른 후, 29세 되던 해인 명종 19년(1564)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같은 해 식년문과에도 급제했다. 생원과 진사시는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하고, 문과시험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하여 일곱 번 장원을 차지하였다. 여기에다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별시 초시에 장원한 것을 합치면 아홉 번 장원을 한 셈이다. 한 사람이 아홉 번 장원을 차지한 것은 역사상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요즘이라면 기네스북에 오를 경이로운 기록이다. 이렇게 연이어 장원으로 뽑히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이 지나간다면서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율곡이 여러 차례 장원한 것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명종은 그를 대궐로 불러들여 ‘석갈등용문(釋褐登龍文: 갈옷을 벗고 용이 되어 출세하다)’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다고 한다.

율곡은 왜 문묘에서 쫓겨날 뻔했을까


율곡은 왜 문묘에서 쫓겨날 뻔했을까

 

선왕조는 공자를 받드는 유교의 나라이자 지식인의 나라였다. 건국 이듬해에 문묘(文廟), 즉 공자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그 6년 뒤에는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열어 유생을 길러 냈다. 지금의 성균관대 명륜동 캠퍼스 안에 있는 성균관 대성전(사적 143호)이 조선의 문묘다.

원래 문묘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에선 유학과 주자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인(賢人)들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이 때문에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조선 모든 유학자들이 한번쯤 꿈꿔봤을 소원이 되었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자신의 학문과 삶이 완벽히 유학적이었으며, 또한 이후 여러 후학들의 모범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묘 종사란 유학적 삶의 가장 화려한 종착점이기도 했을 것이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었기 때문에 문묘종사의 기준은 당연히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공헌했느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조선시대에 문묘종사가 도학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 그 명분 뒤에 숨겨진 실리는 단순히 도학 내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문묘에 종사되는 일은 학문이나 도학의 문제를 넘어 정치의 문제였고, 권력의 문제였다.

1575년(선조 8) 동서분당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였다. 처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졌던 것이 동인에서 남인․북인으로, 서인에서 노론․소론으로 나뉘어졌다. 특이한 점은 학문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퇴계의 문하였다면 퇴계의 문인이나 그를 종주로 삼는 학파들로 구성되어 있는 동인에 자연스럽게 속하게 된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퇴계를 문묘에 종사한다는 것은 곧 퇴계의 학문이 올바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붕당의 정당성이나 정치적 위신도 덩달아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문묘종사 논쟁은 정치권력 투쟁과 교묘히 연관되어 있다.

문묘에 종사된 18명의 우리나라 선현 가운데 종사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인물은 이이와 성혼이었다. 이이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이었다. 2년 후인 1625년부터는 이이와 성혼을 함께 종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두 사람이 문묘에 종사된 것은 1682년(숙종 8)이었으니, 자그마치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6년 뒤인 1689년(숙종 15)에 문묘에서 출향(黜享: 위판을 퇴출하고 제사에서 제외하는 일)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다시 종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가 누구인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세계에서도 드물게 화폐에도 등장하는 학자가 아닌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율곡 이이가 무슨 이유로 문묘에 종사되기까지 숱한 논란을 겪었고, 한 번 문묘에서 쫓겨나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을까?

1623년 3월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잡았던 북인, 그 가운데서도 대북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인조반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면서 학통으로는 율곡학파 계열이었다. 이귀는 이이의 제자임을 자처했고, 신경진도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김류는 이항복․성혼의 문인이며, 이시백은 성혼과 김장생의 문인이다. 반정 세력의 정신적 후원자를 자임했던 김장생은 이이의 수제자였다.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일 만인 1623년(인조 원년) 3월 27일에 제기됐다. 이날 아침 경연에서 유순익이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고 제안했고, 이어서 민성징․이민구․유백중 등이 그의 문묘 종사가 공론이라는 이유를 들어 윤허할 것을 청했다. 이렇듯 반정이 일어난 지 보름도 안 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굳이 이이의 문묘 종사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이의 문묘 종사가 시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천리를 멸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에 죄를 짓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는 것이었다. 주자학적 가치에서 볼 때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은 천륜을 어긴 것이다. 또한 명나라에 등을 돌린 것 역시 당시 주자학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의리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광해군이 명의 구원 요청을 사실상 거부하고 후금과 적절한 관계를 모색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돼왔던, 명을 중심에 둔 중화질서 체제를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쇠한 명 대신 후금(훗날 청)이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던 시기에 여전히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고 명의 은혜를 운운하는 것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판알만 튀겨서 해결할 수는 없다. 때로는 커다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당시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국제관계에서 나라의 이익 못지않게 나라 사이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렇게 보면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과 후금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한 것 등은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명분은 반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서인의 집권까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대북의 대안이 꼭 서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인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다른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유순익이 지금은 눈을 씻고 새롭게 변화해야 할 때라면서 이이의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인조는 이이의 문묘 종사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권력이 서인들에게 지나치게 집중될 경우에 그것이 가져올 폐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의 문묘 종사는 그의 문인들을 비롯한 서인들의 의견일 뿐 공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이이와 성혼을 함께 문묘에 종사하자는 공식적인 주장은 1625년(인조 3) 2월 오첨 등 40명의 해주 유생들에 의해서 처음 제기됐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도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하려고 했으나 영남 유생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대대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635년(인조 13)에 와서다. 이 해 5월 관학 유생 송시형 등 270여 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상소를 했다.

송시형 등은 이이와 성혼이 이황을 이어 유림의 종장이 됐고, 특히 주자학 이론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이학의 이론을 완성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 상소는 당시 율곡학파의 영수이던 김집이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로서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전한 인물이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서는 이이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인가, 아니면 이이와 성혼을 함께 문묘에 종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그래서 그들은 김집에게 문의를 했고, 결국 그의 견해에 따라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함께 추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남인들은 이이와 성혼을 사림의 종장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남인 계열의 성균관 유생들은 두 학자의 문묘 종사를 반대해 서인 계열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마침내 채진후 등 50여 명이 성균관을 나와 동학(東學)에 자리를 잡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남인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려는 서인 측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635년 6월 19일에는 황해도 생원 윤홍민 등 48명, 파주 유생 유응태 등 36명, 경기 유생 신희도 등 33명, 그리고 평안도 유생 홍선 등 33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뿐만 아니라 사학 유생 윤숙거 등 140여 명이 상소를 올렸고, 그 뒤에도 개성 유생 고형 등 50명, 풍덕 유생 최시달 등 15명, 전라도 유생 김시길 등 195명, 충청도 유생 민여기 등 50명이 잇달아 상소를 올렸다. 다음해인 1636년(인조 14) 10월에도 진사 윤성 등 수백 명이 상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세 번에 걸쳐 주청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한결같이 문묘 종사의 문제는 함부로 논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렸다. 특히 홍선 등에 대해서는

“몸을 수양하고 글을 읽는 일이 곧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알지도 못하는 일을 굳이 논하여 남의 비웃음을 사는 일은 하지 말라”

고까지 했다. 『인조실록』에서는

“이때 지방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관학 유생들이 선동하여 꾄 것이라고 하는 유언비어가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답변이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이때 남인들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채진후의 상소를 보면

“비록 두 신하의 학술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지만”

이라고 해 이이와 성혼의 학문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비켜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이의 문장과 학문은 한때의 명신이 되기에 족하니 어진 관리라고 부를 수 있다”

고 해 이이의 학문을 높게 평가했으나, 문묘에 종사하기에는 출처가 바르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여기서 이이의 출처가 바르지 않다는 것은 그가 한때 불교를 공부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혼에 대해서는

“이이보다 (학문이) 한참 아래이고 또 간흉과 한 무리가 된 실상과 임금을 버린 행적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본 것”

이라며 문묘에 종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혼에 대해 문제 삼은 것은 기축옥사 때 정철과 한 패가 되어 최영경 등 죄 없는 선비들을 죽였다는 것과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 나선 임금을 제때에 모시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극심한 갈등을 야기했다. 서인 계열의 태학생 홍위 등 수백 명은 효종 즉위년(1649) 11월 23일을 비롯해 수차례에 걸쳐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효종의 답변은

“문묘 종사는 막중하고 막대한 전례여서 경솔하게 논의하기 어렵다”

는 것이었다.

남인 측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효종 1년(1650) 2월에 진사 유직을 대표로 한 영남 유생 900여 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 900여 명이나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남인들의 의지가 확고했음을 말해준다.
성균관에서도 서인 계열 유생 사이의 불신과 반목은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을 보듯이 했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서인 재임(齋任: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던 임원)들은 처음에 이상진․유직 등 8명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했다가 다시 논의해 4명을 구제했으나, 도리어 유직에게만큼은 부황(付黃)의 유벌(儒罰)을 추가했다. 부황은 지목된 사람의 이름을 누런색 종이에 써서 북에 붙이고 그 북을 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벌이다. 이는 죄상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유림 자체의 처벌로소 유생들에게는 최고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남인 계열 유생 50여 명은

“하찮은 과거를 위해 구차스럽게 성균관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고 하면서 퇴거했다.
이 문제에 대해 영의정 이경여는 유직이 선현을 모함했기 때문에 유적에서 삭제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유직의 삭적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해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효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직에게 내린 부황의 처벌을 풀도록 분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인 계열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임금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효종은

“피차의 유생들이 한결같이 명령을 어기고 있는데, 이들은 유독 이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알바 아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알 바 아니라는 것은 나는 그들을 이 나라 백성으로 인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격한 감정이 실린 발언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학생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 안에 살지 않는 자는 또한 교화를 벗어난 일개 난민일 뿐입니다. 이런 죄명을 지고 무슨 얼굴로 다시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라며 공관(空館: 성균관 유생들이 관(館)을 비우고 물러나가던 일)을 풀지 않았다. 이 문제는 결국 효종으로부터 잘못했다는 사과를 이끌어내고 학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감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효종은 끝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은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다시 추진했다. 현종 즉위년(1659) 12월에는 관학 유생 윤항 등이 다섯 차례에 걸쳐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부제학 유계 등도 같은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 효종 3년에는 김포 진사 이영원을 비롯해 강원도․평안도․함경도․충청도․전라도 유생들이 연이어 문묘 종사를 청했다. 이렇듯 두 선현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현종 재위 15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반복됐지만, 인조․효종과 마찬가지로 현종도 일관되게 거부했다. 역시 서인들의 위상이 강화돼 권력이 서인들에게 더욱 집중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현종대에 벌어진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서인 세력은 급격히 위축됐고 마침내 숙종이 즉위한 직후 남인 정권이 출범했다. 인조반정 이후 실로 50여 년 만에 있었던 정권 교체였다. 이를 흔히 갑인환국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부터다. 이 해 8월 황해도 생원 윤하주 등이 3차례에 걸쳐 두 사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 해 8월 황해도 생원 윤하주 등이 3차례에 걸쳐 두 사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어서 1681년(숙종 7) 9월에는 이연보 등 관학의 팔도 유생 500여 명이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결국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현실화된 것은 바로 이 해(1681년)였다. 숙종은 9월 19일 이연보 등이 전날에 이어 재차 상소를 하자 드디어 담당판서와 대신들에게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양현(兩賢)의 도덕과 학문은 실로 한 세대에서 우러러 사모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니,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대체로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대대의 조정에서 일찍이 윤허하지 않았던 것과 내가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었던 것은 모두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인사들의 주청이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또한 간절해서 끝내 억지로 어기기 어려우니, 그것을 해당 관서로 하여금 대신에게 묻도록 하여 특별히 오현을 종사하는 청을 윤허할 수 있도록 하라.

숙종실록』권12, 숙종 7년(1681) 9월 19일 무진조

이날 대신 김수항․김수흥․정지화․민정중․이상진이 모두 종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숙종은 우리나라의 두 선현과 송나라의 세 선현(양시․나종언․이동)의 문묘 종사를 허락했다. 이이와 성혼이 실제로 문묘에 종사된 것은 그 이듬해(1682년) 5월 20일이었다. 이로써 60년 가까이 끌어오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 이기는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문묘에서 쫓겨났다 다시 종사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취소하고 그 두 사람의 위패를 문묘에서 철거했다. 물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종사되긴 했지만, 이이와 성혼이 살아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는 인조 즉위 이래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안 가운데 하나였다.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인 서인들의 학통이 그 두 학자로 소급되기 때문에, 그들의 문묘 종사는 곧 서인들에게 학통의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남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학통의 권위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서인들에 의해 추진된 두 학자의 문묘 종사가 남인들의 반대와 여러 대에 걸친 임금의 견제로 쉽사리 실현될 수 없었고, 게다가 출향과 복향을 겪어야만 했던 데는 이 같은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