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진복창


율곡과 진복창

 

율곡전서』권33 연보(年譜)에 의하면, 율곡의 나이 일곱 살 때인 1542년(중종 37)에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율곡은 진복창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군자는 마음속에 덕을 쌓는 까닭에 그 마음이 늘 태연하고, 소인은 마음속에 욕심을 쌓는 까닭에 그 마음이 늘 불안하다. 내가 진복창의 사람됨을 보니, 속으로는 불평불만을 품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려고 한다. 그 사람이 뜻을 얻게 된다면 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한이 있으랴.”

일곱 살의 어린 율곡은 마침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던 진복창의 사람됨을 꿰뚫어 보고 이에 대한 글을 남겼던 것이다. 도대체 진복창이 어떤 인물이기에 일곱 살짜리 소년이 그에 대한 약전(略傳)을 쓰고 그 인물됨을 이렇게 평한 것일까?

진복창에 관한 첫 번째 『조선왕조실록』기록은 1535년(중종 30년) 별시문과 갑과에서 장원급제를 해 성균관 전적(정6품)에 제수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정자·전적을 지내는 등 중앙관직을 역임했으며, 이어 부평부사를 지냈다.

관직생활 10년째이던 1545년(명종 원년) 외직인 부평부사에 있다가 정4품 사헌부 장령으로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이때 사관들은 그의 인격을 두고

“사람됨이 경망하고 사독(사악하고 독함)하다”

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이후 그의 행적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기록이다.
그 때문인지 중종 말년까지 진복창은 외직을 떠돌며 이렇다 할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율곡이 「진복창전」을 썼던 것은 이 무렵의 일로 보인다. 문과에 장원급제까지 했던 진복창이 경망스러운 사람됨으로 인해 배척당하게 되자 율곡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어른들이 언급했던 것 같고, 율곡은 군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는 차원에서 진복창에 관한 약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중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한 직후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리청정을 하고 외삼촌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이 이끄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잠재적인 반대 세력인 사림을 중앙 정계에서 대거 축출했다. 이때 진복창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의 수하로 활동하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관료들을 탄핵하고 몰아내 죽였다. 진복창의 눈에 걸리면 그 집안의 어린아이까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사관들로부터 ‘독사(毒蛇)’라고 불렸다.

실제로 명종 때 진복창이 보인 행적을 추적해 보면 ‘독사’라는 별명도 칭찬에 가까울 정도다. 을사사화 직후인 1545년에 진복창은 부평부사라는 외직에 있다가 다시 사헌부장령을 맡아 중앙 정계로 복귀했다. 이후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요직을 오가며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핵하고 퇴출시켰다. 그의 뒤에는 윤원형이라는 당대 실세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후 그는 홍문관 응교를 거쳐 1548년(명종 3년) 2월 3일, 사간원의 영수인 대사간에 올랐다. 당시 사관은 이를 두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복창은 권간(權奸) 이기의 심복이 되어 그들의 지시에 따라 선한 사람을 마구 공격하였는데 그를 언론의 최고책임자로 두었으니 국사(國事)가 한심스럽다.”

처음에는 권력가였던 이기의 수하에 서서 반대파를 탄핵하고 공격함으로서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을사사화가 성공하면서 권력의 축에 들어가 득세했던 이기의 아래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윤원형이 이기를 몰아내려하자 얼른 이기에게서 등을 돌려 그의 등에 칼을 꽂게 된다.
그가 대사간에 오른 1548년 4월 19일, 대사헌 구수담이 좌의정 이기를 탄핵하고 나서자, 구수담의 편을 들어 이기를 탄핵함으로서 보기 좋게 이기를 배신했다. 구수담은 사림으로 내외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고, 진복창도 구수담에게 학문을 배운 바 있다. 이 때 대사간인 진복창도 구수담을 거들고 나섰다. 한때는 이기에게 빌붙어 영화를 누렸지만 이기가 윤원형의 견제를 받게 되자 미련 없이 배반한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구수담이 유배를 당하면서 잠잠해지나 했던 여론은 이기에게 등을 돌려 그를 공격했고, 진복창은 그 가운데서 이기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렸다. 결국 1552년 이기는 실각하게 되고, 조정의 중심 권력은 드디어 윤원형의 것이 된다. 윤원형이 조정의 모든 실세를 장악하자 이기에게 충성을 바치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철저히 윤원형의 심복으로 행세하며 윤원형과 자신의 정적들을 계속 몰아냈다.
한편, 진복창은 1549년(명종 4년) 5월에 홍문관 부제학에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올랐다. 조정 관리들의 목숨 줄을 틀어쥐는 자리에 오르자, 몇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 명종의 눈에 강직한 사람으로 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렇게 임금의 신뢰를 받게 되자 그 자만은 극에 달했다.

진복창이 이기를 배반한 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원래 진복창이 맨 처음 장령이 될 때 힘써 추천한 이는 훗날 을사사화에서 공을 세우게 되는 허자라는 인물이었다. 허자는 정순봉, 임백령과 함께 1등 공신이었고 윤원형은 2등 공신이었다. 그런데 대사헌에 올라 실세로 떠오른 진복창은 이조판서인 허자도 우습게 알았다. 결국 진복창은 허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진복창의 권력욕은 그칠 줄 몰랐다. 당시 병조판서 이준경은 윤원형도 함부로 못할 만큼 내외에서 큰 신망을 얻은 인물이었다. 마침 집도 가까워서 진복창은 이준경과 친해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한번은 이준경의 친척인 이사증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복창이 이준경의 곁에 앉게 되었다. 이때 진복창은 술에 취해 이준경에게

“왜 구수담이 나를 저버렸는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준경과 구수담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이날 잔치에 구수담의 며느리집 여종이 일을 거들기 위해 왔다가 진복창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구수담에게 전하였다.

이에 구수담은

“조만간 나에게 큰 화가 닥칠 것”

이라고 걱정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수담은 진복창의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게다가 뒤늦게 구수담이 자신이 한 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전해들은 진복창은 이준경이 그 말을 흘린 것으로 단정하고 이준경까지 미워하게 되어 결국 이준경도 형 이윤경과 함께 일시적이나마 병조판서에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진복창이 대사헌이 되려고 실력자를 찾아다니며 로비하던 중 개성유수로 있던 강직한 성품의 송순이

“진복창은 시시한 자로 조정을 시끄럽게 하니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며 먼저 대사헌이 된 적이 있다. 그것을 진복창이 모를 리 없었다. 결국 송순은 진복창에게 대사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렇게 배신의 일로를 걷게 되자 그에 대한 악평은 늘어만 갔다. 허자를 제외하고 사림의 존경을 받고 있던 네 사람이 진복창의 공작으로 화를 입게 되자 홍문관 직제학 홍담을 비롯한 뜻 있는 젊은 관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진복창의 손발 노릇을 하던 사헌부, 사간원까지도 돌아섰고, 조정 대신도 진복창을 멀리 내쳐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해서 올렸다. 처음 명종은 진복창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라 하며 그 탄핵들을 물리쳤지만, 윤원형은 그를 가만히 놔뒀다가는 자신과 누나 문정왕후의 앞길에 방해가 될 거라고 여겨 그를 험한 변방 삼수로 유배 보냈다.

진복창의 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561년(명종 16), 그의 아들 진극당이 과거에 급제하자 언관들은 진복창을 다시 비난하기 시작했다. 진복창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사통하다가 진의손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이 진복창이고, 따라서 그의 어머니는 음탕한 여자이며 행실이 방종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진복창과 진극당은 이런 여인의 소생이므로 관직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출신을 둘러싼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결국 진극당의 과거급제는 취소되었으며, 그를 합격시킨 시험관들에게까지 처벌이 미쳤다.

그러나 삼수로 유배 간 진복창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백성의 땅을 빼앗고 공공연하게 뇌물을 요구했으며 집에 형틀까지 설치하여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불러다가 곤장을 치곤하였다. 졸개를 30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매사냥을 하기도 했으며, 사람을 때려죽이기까지 했다. 결국 조정에 보고가 올라가 진복창은 가중처벌에 해당하는 가죄(加罪)를 받아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던 일)되었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문과 장원급제자로서는 너무나도 비참한 죽음이었다.

진복창은 오늘날까지도 간신의 오명과 문명(文名)의 두 가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당대에 간신으로 삶을 마쳤지만, 한편으로는 문장에 뛰어난 수재이기도 했다. 역대 제왕의 사적을 노래한 역대가는 그가 귀양 가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그의 대표작으로 전체가 전하지는 않지만 『순오지』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곡이 첫 벼슬살이(호조좌랑)를 시작한 때는 1564년(명종 19) 8월이었다. 이후 율곡은 1567년(명종 22)까지 3년여 동안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선조가 즉위한 다음 해(1568)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초기 관직 생활 동안 조정의 핵심 기구에서 정치와 행정 경험을 쌓은 율곡은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 서장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 경험과 더불어 해외 문물을 접하는 기회까지 누렸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홍문관 부교리, 이조좌랑에 이어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1570년(선조 3) 율곡은 해주 야두촌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으려 하였으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미 학문의 성취를 이루기 시작하였던 때라 정중한 상소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에 돌아와 조선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주변에 학문과 경륜 높은 인재가 있어야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조정이 건재하게 되고, 백성들은 그 건재한 조정에 의지하여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1574년(선조 7) 율곡은 군왕의 간곡한 소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황해감사로 나가 반 년 남짓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대사간, 대사헌, 호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동서로 갈라진 정쟁의 갈등이 날로 높아지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급기야 1579년(선조 12) 율곡은 통치자의 정신적 해이와 신료들의 무능함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임을 청한다.

어제 대사간 이이가 사면하고 아뢰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기강이 무너진 것과 민생이 곤궁한 것은 상께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므로 더 진달(進達:윗사람에게 전달함)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성상께서는 이미 마음을 미루어 위임하시려는 뜻이 적으시고 조정 신하들은 또한 담당하여 힘을 다해 보려는 뜻이 모자랍니다.

큰 관원은 유속(流俗:세속. 세상에 유행하는 일반적인 풍습)대로 하는 것만 편하게 여겨 수수방관하며 성패(成敗)를 임의로 놔두고 있고, 작은 관원은 비록 건백(建白: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함)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혹자는 과격하고 혹자는 우활하여 실용에 절실하지 못하여 의논이 가닥만 많고 통일되는 바가 없습니다.

국가의 사세가 날로 글러짐이 마치 물이 더욱 아래로만 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에는 위로 임금의 허물과 실수를 바로잡음이나 아래로 관원들의 태만과 경솔을 경각시키는 일은 오직 간관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진실로 재주와 성의를 겸비하고 학식과 생각이 탁 트이어 옛것에 얽매이지도 않고 지금의 사태에 현혹되지도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조실록』선조 12년 5월 22일 자

선조는 율곡과 같이 학덕이 높고, 성품이 올곧은 신하를 가까이 두기를 원하였다. 때로는 동료 신료들의 무책임을 통박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 알려서 치도를 확립하게 하려는 신료들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바른 말하는 신료들을 탄핵하는 세력들이 공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선조는 시골로 내려간 율곡을 다시 대사간으로 불렀다. 대사간의 직책은 간쟁을 수습하고 처리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나 율곡이 올린 사양상소는 칼날과도 같았다.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로 이이를 부르니 이이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오지 않고서 상소를 올려 동서의 분당에 대하여 논하면서

“동인이 서인을 공격함이 너무 심하여 억지로 시비를 결정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동서의 당론을 타파하고 사류들을 보합케 하여 그들이 한마음으로 나라에 몸 바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상소의 사연이 시사(時事)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이를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이 어지럽게 논박하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7년 1월 1일 자

조선왕조가 개국한지도 어언 2백여 년이 지나 알게 모르게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회의 여러 면에서 병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살았던 율곡은 조선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당시 퇴계를 비롯한 선학들이 개척하고 다져 놓은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토대로 그 이상을 현실 사회에 접목하고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에게는 넘쳐나고 있었다.

또한 선조는 사가(私家)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림 출신이나 다름없었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사림 출신의 스승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그들과 함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다짐하였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도 그런 쪽으로 성숙되어 있었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의식화된 사림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기도 하였다. 선조는 이들을 개혁 세력으로 삼아서 적극 등용한다면 침체된 정계를 개편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 같은 신구 정치 세력의 교체기에 이이가 대표적인 관료학자로 이념 집단인 사림의 정치화를 선도할 적임자라고 선조는 믿었다.

선조에게 율곡의 간곡한 가르침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다면, 율곡은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상소문을 올려 선조의 선정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습니다. 먼저 그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오활한 듯하나 성과가 있고, 말단만을 일삼는 것은 절실한 것 같으면서도 해가 됩니다. 오늘날의 일로써 말한다면 조정을 화합시키고 옳지 못한 정사를 고치는 것이 근본이고, 병력과 식량을 조달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말단입니다. 말단도 실로 거행해야 하겠지만 더욱 먼저 해야 할 것은 근본입니다.

선조수정실록』선조 14년 4월 1일 자

 

서애 류성룡이 율곡 이이에게 이 말의 진의를 물었다.

“전일 궐정에서 의논할 때 공은 근본적인 장책(長策: 제일 좋은 대책이나 방책)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입니까?”

하자 율곡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아래로는 조정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입니다. 그런데 상의 뜻은 사류를 경시하고 유속의 무리들을 신임하니 무슨 일인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곡이 생각하고 있는 임금의 소임과 신하의 소임이 무엇인지가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율곡은 평생을 성인(聖人)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율곡이 세운 평생의 뜻은 ‘성인이 되겠다.’였다. 이는 과거에 급제해 이름을 드높이고 권력과 출세를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고 옛 성현을 본받아 자신을 갈고 닦고 백성을 가르치는 삶을 의미하였다. 그렇기에 율곡은 시간을 아껴 늘 공부하고,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며,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또한 백성들의 삶과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의 정치적 여건은 그의 이런 의지와 실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선조는 입으로는 성군의 정치를 말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의지가 없는 임금이었다. 율곡의 끊임없는 간언에도 선조는 변명과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선조는 용군(庸君)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용군이란 마음이 나약해서 뜻이 굳지 못하고, 결단력이 부족해서 낡은 관습에만 매달리는 탓에 나날이 나라와 백성을 쇠락의 길로 밀어 넣는 임금이다.

선조는 “총명하고 지혜롭지만 덕을 베푸는 것이 넓지 못하고, 좋은 말을 듣기를 즐기지만 또한 많은 의심을 버리지 못해”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임금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힘써 건의를 해도 지나치지 않나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신하는 교만하거나 과격하다고 의심하고, 명예를 얻는 신하는 혹시 당파를 이루지 않나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비판하면 편파적으로 모함하지 않나 의심하느라 아무런 일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이러한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와 백성은 폭군이나 혼군이 다스릴 때처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살거나 큰 재앙을 입지는 않는다. 하지만 큰 발전과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칫 후퇴와 쇠락의 구렁텅이로 추락할 수 있다.

다만 용군은 폭군이나 혼군과는 다르게 일을 추진할 뜻과 실행할 결단력이 부족할 뿐이다. 따라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보완하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 혁신한다면 큰 발전과 성장을 이끌 수도 있다. 율곡이 항상 선조의 모자람을 질책하면서도 끝내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외국학생 초청 문화 체험행사


율곡연구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8년 7월24일 ~ 7월 27일에 외국학생 초청 문화 체험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