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상(金永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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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율곡학맥-김영상
김영상 초상
김영상(金永相, 1836∼1911)은 조선시대 말엽의 유학자로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합방에 저항하였다. 을미사변 때에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두문불출하였고, 1906년경에는 임병찬, 최익현 등과 한일의병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는, 일본의 유화정책을 거부하고

 

“원수와는 한 하늘아래 같이 살수 없다”

 

며 저항하다 옥중 단식 중 사망하였다. 저서로 ⌈춘우정문고(春雨亭文稿)⌋가 있다.

 

1836(1, 헌종 2)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古阜) 산북리(지금의 정읍시 정우면)에서 부친 김경흠(金景欽)과 모친 나주 오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조선 개국의 원종공신(原從功臣)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이다. 호는 춘우정(春雨亭), 자는 승여(昇如)이며, 승화(昇和)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본적은 전라북도 정읍(井邑)이며,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도강은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으로, 1895년(고종 32년) 탐진현(耽津縣)이 합쳐져 강진군이 되었다.

1851(16, 철종 2)
가족을 따라 태인(泰仁) 고현내면 원촌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곳은 조상 대대로 살던 세거지였다. 이후 줄곧 태인에 거주하며 활동하였다.

1853(18, 철종 4)
집안의 아저씨에 해당하는 이재 김인흠(肄齋 金麟欽)에게 글을 배웠다.

1858(23, 철종 9)
집안의 할아버지인 비인재 김기(卑忍齋 金曁)에게 글을 배웠다.

1871(36, 고종 8)
미국 함선이 조선에 들어와 공격을 받은 신미양요(辛未洋擾) 사건이 일어났다. 이해 스승 비인재의 소개로 노사 기정진을 만났다. 이후 전주 출신의 간재 전우와도 자주 교류를 하였다. 당시 기정진과 전우는 전라도 지방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다.

1885(50, 고종 22)
50세의 나이에 익산에 사는 인산 소휘면(仁山 蘇輝冕, 1814∼1889)을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그는 폐백(幣帛)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제자의 의례를 한 뒤에 소휘면과 사제관계를 맺었다. 소휘면은 일찍이 젊었을 때부터 학문으로 주변에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1881년에 선공감가감역, 전설시별제(典設寺別提), 전라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882년 역시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오직 후학의 양성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1895(60, 고종 32)
10월 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암살된 사건이 일어났다.(을미사변乙未事變) 12월에는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사건을 겪으면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일본의 침략을 개탄하며 두문불출하였다.

1906(71, 광무 10)
이해에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돈헌 임병찬 등이 이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킬 때(병오창의) 같이 참여하여 성명문을 낭독하였다. 이후 석지 채용신,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찬 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 이 가운데 채용신(蔡龍臣, 1850년∼1941년)은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관료생활을 하였는데, 1905년 이후에는 그림만 전문적으로 그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김영상을 그린 그림을 남겼다. 면암 최익현이 이 해에 대마도에서 순절하였다.

1907(72, 광무11, 융희 원년)
시산리 대주평(지금의 칠보초등학교 자리)에 태산사(台山祠)를 세우고 면암 최익현의 영정을 모셨다. 유림들의 요청을 따라 태산사 상량문을 짓고, 태산사에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태산사는 일제 탄압으로 훼손되었다가 1975년 시산사(詩山祠)로 이름을 바꾸어 원촌마을 산중턱에 중건되었다.

2017 율곡학맥-김영상

1910(75, 융희 4)
이 해 나라를 일본에 내준다는 양국조서(讓國詔書)가 내렸다.(한일합병) 조선이 멸망하여 나라 안의 국민들이 온통 비통스러워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전국의 유학자 100명에게 노인 은사금을 내렸다. 그러나 김영상은 은사금을 여러 차례에 걸쳐 거절하였다.

전해오는 말로 당시 은사금을 가지고 온 일본 순사를 향하여

“내가 일본 국왕의 간을 씹어 먹어야 하는데 그리 못하니 대신 너라도 먹어야겠다.”

고 하면서 그의 팔뚝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채용신이 그린 김영상의 투신 모습(投水圖)

1911(76)
계속되는 일제의 유혹을 뿌리치고 면장을 통해 내려온 은사금 사령서를 찢어버렸다. 4월에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산외면 동곡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5월 6일 동국 헌병대를 떠나 군산형무소로 이송 도중 만경강을 건너다가 손자에게 절명시를 남기고 투신하였다.(일설에는 감옥에서 순절하기 전에 남겼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昔屈子之精忠
그 옛날 굴원은 사심 없는 충정으로

指汨羅而爲期
멱라수에 몸을 던져 한 생을 마쳤다.

今春雨余陽九
이제 나는 양구를 뒤로하고

從沙津而逝斯
사진을 떠나 여기에서 작별한다.

酌椒酒之三桮
향기로운 술 세잔을 따라

慰魚腹之忠魂
고기 뱃속의 충혼을 위로하고

踵東海之高蹈
제나라 사람 노중연(魯仲連)의 길을 따라

永陟江於干磐
영원히 물가를 오르내리리.

 

김영상이 투신한 직후 일본 헌병이 급히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구조하였다. 이후 군산 형무소 감옥에 수감된 뒤, 단식하던 중 5월 9일 사망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78년 6월 전북지방의 인사들이 발의하여 그가 투신을 시도하였던 창사진 나루터인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춘우정 투수 순절 추무비(春雨亭 投水 殉節 追慕碑)를 세웠다.

저서로 ⌈춘우정문고(春雨亭文稿)⌋(1961년 필양사(泌陽祠) 발간)이 있다. 이 책은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의 사진, 글씨 등이 실려 있으며, 제 1권에는 부(賦)와 시(詩), 제2권에는 서(書)와 기(記), 발(跋), 설(說), 논(論), 잠(箴), 소(疏) 등이 실려 있고, 제3권에는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비(碑),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 유사(遺事), 잡저(雜著) 등이 실려 있다. 나머지는 제6권까지 부록이다.

 

<참고문헌>
김정자, 「인물 생애 정보 – 김영상」,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이종근, 「춘우정 김영상(1836∼1911)」, 새전북신문, 2011.11.16
「채용신의 <항일지사 김영상 투수도>」, 김달진미술연구소, http://www.daljin.com/column/1120

류우현, 「청하면, 김영상 선생 투수비 환경 정비」, 전북중앙신문, 2017.5.29

「전북의 항일운동가-‘원수랑 함께 할 수 없다’ 순절한 춘우정 김영상」, 전북도민일보, 2017.07.19

강경희(姜敬熙)


강경희(姜敬熙)                                                              PDF Download
강경희(1858년∼1922년)는 고종 22년(1885년)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병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사간원 대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궁내부에 재직하면서,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시대가 바뀌어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친일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완용과 가깝게 지내면서,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자원 제공을 받은 친일 유림의 공자교 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1858(1, 철종 9)
강문형(姜文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문형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를 역임한 무인이었다. 3남 중 차남으로 위로는 형 강민희(姜敏熙), 아래로는 동생 강돈희(姜敦熙)가 있다. 나중에 강만형(姜晩馨)의 양자가 되었다. 강경희의 자는 성일(聖一)이고, 호는 유당(有堂)이다.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이며, 본관은 진주(晉州),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지금의 서울) 남부(南部) 회현방(會賢坊, 지금의 명동, 회현동 일대)이다.

1885(28, 고종 22)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30등으로 합격하였다.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행하는 특별 과거시험으로 시험과정은 생진초시·생진복시·문과초시·문과복시·문과전시의 5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시험과목은 매 3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같다. 강경희는 이 시험에 도전하여 문과에 급제한 뒤, 형조참의, 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890(30, 고종 27)
승정원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었다. 원래 승정원은 국왕의 직속 기관으로 왕명의 출납, 즉 임금의 명령을 바깥으로 전달하고 조정 대신들의 보고나 요청, 의견 등을 임금에게 전달하는 비서기관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우레가 있자 동료들과 함께 임금에게 경계의 글을 올렸다. 임금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지금 우레의 재변(災變, 기상이변)을 초래한 원인을 생각하다가 마침 그대들이 올린 글의 내용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더욱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1891(34, 고종 28)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사간원은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곳으로 ‘간쟁(諫諍)’을 주요 업무로 삼는다. 간쟁이란, 윗사람의 옳지 못한 일을 지적하여 잘못을 고치게 하는 일이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행동에 문제가 있을 때 그 잘못을 말하여 고치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첨예한 정치 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신하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기능도 겸했다. 요즘의 감사원이나 언론기관의 역할에 해당한다. 사간원에는 대사간(大司諫), 사간(司諫), 헌납(獻納), 정언(正言) 등이 있는데, 우두머리인 대사간은 정3품, 사간은 종 3품이다.

 

1897(40, 광무 원년)
이해 10월 고종이 원구단(園丘團)에서 천제를 올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 전까지 조선의 국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중국의 천자만이 그러한 행사의 자격이 있다고 여겨져 왔으나 과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11월에 명성황후 국장(國葬)을 치렀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강경희는 이후 대한제국 시절에 주로 궁내부에 재직하였는데, 중추원의관, 비서원승, 전선사장선, 시강원부첨사, 규장각부제학, 중추원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899(42, 광무 3)
정부에서 헌법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였다. 여기에 황권의 절대성을 명시하고, 황제가 전권을 장악한 전제군주제를 추구하였다.

1904(47, 광무 8)
2월 23일,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다. 8월,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와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

1905(48, 광무 9)
일본이 러일 전쟁에 승리하였다. 일본은 이해 11월, 제2차 한일 협약 성립을 성립시키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나아가 한국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정치를 추진했다.

1907(50, 융희 1)
주임관 2등에 올라, 시강원에서 근무했다. 이해에 친일 유림단체인 대동학회에 가담했다. 이해 황태자 즉위식이 있었다. 강경희는 대거(對擧) 부첨사(副詹事)로서 즉위식을 준비하는데 공을 세우고 여러 관리들과 함께 임금이 내린 상을 받았다.

1908(51, 융희 2)
대동학회 평의원이 되었다.

1909(52, 융희 3)
이해에 경제연구회(회장 김재순)에 가입했으며, 대동학회가 재편된 공자교회에 가담했다. 대동학회는 유교 계열의 친일단체로 박은식, 장지연 등이 반일의 기치를 내걸고 대동교를 결성하자, 유림(儒林)을 기반으로 공자교회로 변신, 개편했다. 공자교회는 ‘유도(儒道)의 진흥과 인도(仁道)를 밝힘’을 목표로 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로 부터 자금의 지원을 받았고,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유교 경전의 번역 추진, <대한매일신문> 매입 등이었다. 이후 강경희는 이완용이 주도한 국민연설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국민협성회의 한일 합방실행 추진단체인 한국평화협회에서 자선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10(53, 융희 4)
8월, 한일 합방조약이 강제 조인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은 이완용, 일본 측 한국 통감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였다. 이 두 사람이 담합하여 강제로 조약을 통과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일합방 추진에 적극 가담한 자들은 이완용 외에도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을사오적이라 불린다.

당시 황현, 민영환 등이 자결하고 많은 지식인들이 극렬히 반대하였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만주로 도망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강경희는 한일합방 추진에 적극 가담했다.

1911(54)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로 임명되어 이후 10여년간 활동을 하였다.

1915(58)
경기도 시흥군 동면의 공동묘지 용지를 조선총독부에 기부하여 일본으로부터 사례로 나무 잔을 받았다.

1922(65)
향년 65세로 사망했다. 2002년에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2006년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김은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고종실록」, 「순조실록」, 「조선총독부관보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 확정ㆍ발표」<프레시안> 2006.12.06.

김제겸(金濟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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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율곡학파-김제겸
김제겸의 묘지와 묘비(경기도 여주)
김제겸(金濟謙, 1680년∼172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증손자이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손자로, 숙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김창협(金昌協)의 아들이다. 본관이 안동인 이들 집안은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당파 싸움의 화를 입어 김수항 이하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까지 4대가 불행한 죽임을 당했다.

김제겸은 40세(1705년) 때 병과로 급제하고, 사간원(司諫院)의 정언, 사간, 예조참의, 승지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722년에 부친 김창협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문제와 관련되어 신임사화로 유배를 당한 뒤 사약을 받고 사망하고, 자신의 아들 김성행도 감옥에서 고초를 당하다 요절하는 불행을 겪었으며, 자신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1680(1, 숙종 6)
아버지 김창집(金昌集, 1648년∼1722년)과 어머니는 박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창집의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며,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손자이다. 또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며, 저서로 ⌈국조자경편⌋과 ⌈국몽와집⌋이 있으며,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의 형이다. 부인은 박세남(朴世楠)의 딸이다.

김제겸은 어려서 작은 아버지 김창흡(金昌翕)에게 글을 배웠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충민(忠愍)이다.

 

1681(2, 숙종 7)
부친 김창집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부친은 1672년(현종 13년)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675년에 그의 부친 김수항(김제겸의 할아버지)이 귀양을 가자 과거 응시를 미뤘었다.

 1684(5, 숙종 10)
공조좌랑이었던 부친이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부친은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2017율곡학맥-김제겸
김제겸의 부친 김창집(金昌集)

 1689(10, 숙종 15)
기사환국 때 할아버지 김수항이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부친은 귀향해서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15, 숙종20)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부친이 복권되었다. 부친은 이 해 병조참의, 동부승지, 참의, 대사간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에 임명되었을 때, 큰 기근으로 도둑이 들끓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였다. 이후 강화유수, 예조참판,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 이조, 형조의 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1696(17, 숙종22)
부인 송씨와 사이에 아들 김성행(金省行)이 태어났다. 자는 사삼(士三), 호는 취백헌(翠柏軒)이다.

1705(26, 숙종 31)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부친은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710(31, 숙종 36)
세마(洗馬)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고양 군수를 거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재직하였다.

1712(33, 숙종 38)
부친 김창집이 청나라에 사은사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1717(38, 숙종 43)
부친이 영의정에 취임하였다.

1719(40, 숙종 45)
증광 문과에 도전하여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정언은 사간원(司諫院)의 정육품(正六品) 관직이다. 위로 대사간(大司諫), 사간(司諫), 헌납(獻納)이 있다. 나중에 김제겸은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가, 집의(執義)·응교(應敎)·교리(校理)·사간·예조참의·승지 등을 역임했다.

1721(42, 경종 1)
부친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후 소론이 탄핵 운동을 벌여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부친 김창집(金昌集)은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과 함께 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파 4 대신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소론이 정권을 잡은 뒤, 소론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이 탄핵하여 유배를 당했다. 이어 소론은 노론파가 반역을 도모를 했다고 무고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 신임옥사辛壬獄事)가 발생하였다. 신임사화는 경종이 즉위한 해부터 다음 해 1722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이다. 부친은 이일로 거제도에 유배(위리안치)되었다.

1722(43, 경종 2)
부친이 유배를 당한 성주에서 사약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이에 김제겸도 울산에 유배된 뒤에 부령(富寧)으로 옮겨졌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부친 김창집은 1724년에 복권되었으며, 영조는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다. 부친의 저술로『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몽와집(夢窩集)』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김제겸은 조성복(趙聖復), 김민택(金民澤)과 함께 신임사화로 희생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는 저서로 ⌈죽취고(竹醉藁)⌋, 편저로 ⌈증보삼운통고(增補三韻通考⌋)를 남겼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3년 뒤(영조 1년)에 관작이 복구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도 같은 해에 화를 당하였다. 향년 27세였다. 아들 김성행은 서덕수 등과 함께 경종 때에 영잉군(영조)을 추대하려고 하였는데, 목호룡(睦虎龍)이 상소를 올려, 임금을 시해하려는 역적 무리 중 한사람으로 지목하여 관청에 잡혀 들어가 심문을 당하였다. 그는 심문 도중,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나, 거듭되는 고문으로 매를 맞다 요절하였다. 이러한 일로 왕세제 연잉군(뒷날의 영조)은 그 지위를 온존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김성행이 죽은 날은 5월 9일이었다. 김성행은 3년 뒤,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이후 지평, 이조참의, 이조참판 등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영잉군이 1724년 영조로 등극한 후,

 

“종사(宗社)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김성행의 힘이었다.”

 

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울러 영조는 직접 김성행의 제문(祭文)을 지어 추도하였으며, 김성행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신 정려를 하사하였다.

김성행의 아들 김이장(金履長)은 나중에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였다.

김제겸은 살아생전에 아들 김성행이 옥중에서 매를 맞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유배지 울산에서 새로운 유배지인 함경도 부령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아들 묘소에 들러 다음과 같은 묘지문을 적어 아들에게 고하였다.

 

“유세차, 1722년 임인(壬寅) 유월 갑인(甲寅) 삭(朔), 초 7일 경신(庚申)날에 아버지는 죽은 아들 성행(省行)의 묘 앞에서 고하노라. 아아, 슬프구나. 나의 아들은 어질었도다. 나의 아들 너는 능히 목숨을 바쳤구나.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고 이를 따랐으니, 이 완고한 마음은 즐거울 뿐, 슬프지 않구나. 나는 지금 북쪽으로 옮겨가니,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할 수 없어, 너의 무덤 풀밭에 술을 뿌린다. 이 슬픔,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아 울고 싶구나. 나의 아들아, 오래도록 편안하여라. 흠향하소서.”

 

3대가 같은 해에 사망한 이들의 묘지는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에 나란히 마련되었다. 김제겸의 조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년 ∼ 1689년)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진도에 유배를 당하여, 1689년 4월 진도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한집안의 4대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참고문헌>

오갑균, 「김제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병섭, 「김성행」,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신임사화 노론 안동 김씨 세장지」, http://blog.daum.net/yacho2011/2006

황재필(黃在弼)


황재필(黃在弼)                                                              PDF Download

 

황재필(黃在弼, 1847년 ∼ 1893년)은 조선시대 말기의 학자로 일찍이 한문을 배워서 글재주가 있었으며 학문의 성취가 빨랐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벼슬길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후 스스로 경학연구에 전념하고 주위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배움에 힘썼다. 그 아들이 황종관(黃鍾寬) 편찬한 시문집 『단파유고(檀坡遺稿)』 5권에는 그가 ⌈논어⌋, ⌈맹자⌋ 등을 연구하여 서술한 「(疑)」와 200편에 가까운 시문이 실려 있다.

 

1847(1, 헌종 13)
의금부도사 황은섭(黃殷燮)과 연안김씨(延安金氏) 김정(金鉦)의 딸 사이에 전라북도 고창 성내면 대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자는 양언(良彦), 호는 단파(檀坡)이다. 안촌(安邨) 황이후(黃以厚) 후손이다. 황이후는 이괄(李适)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軍糧)을 모아 병영에 보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전주에서 기의하여 공훈을 세웠다.

그는 어려서 집안의 할아버지 저파공(樗坡公) 밑에서 글을 배웠다. 재주가 있어 학문 성취가 빨랐으며 집안에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였다. 계속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길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경학(經學) 연구에 전념하였다. 곽기옥(郭琦玉), 서문백(徐文伯), 김성도(金聖道), 민승호(閔升鎬) 등 인근 유림들과 교류하면서 시문을 짓고 서신을 왕래하였다.

그는 ⌈논어⌋,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뽑아서 스스로 답하고 여러 학자의 설을 이용하여 고증한 뒤, 의(疑)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문장들은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예(禮)에 대하여도 일가견을 가지고 제도를 연구하고 설명을 붙였으며, 후학 양성을 위해서 강석(講席)을 마련하여 경전과 예법을 강의하였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직접 시행하기도 하였다.

 

1893(47, 고종 30)
동학(東學)이 일어나 마을사람들 가운데 가담하는 자가 많아졌다. 황재필은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사람들을 모아 난에 가담하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향년 47세로, 이 해에 사망하였다. 저서로 『단파유고(檀坡遺稿)』 5권이 있다. ⌈단파유고⌋는 1929년에 아들 황종관(黃鍾寬)이 부친의 시문을 모아 간행하였는데, 5권 2책으로 구성되어있다. 목활자본이며, 권두에 백낙규(白樂奎)의 서문이 있다. 권말에 종제(從弟) 황재용(黃在涌)과 김재준(金在駿), 고광두(高光斗), 황종관(黃鍾寬) 등의 발문이 있다.

권1·2에는 시(詩) 136수, 서(書) 10편, 서(序) 4편, 기 1편(「시은기(市隱記)」), 제문 2편(「제김진사문(祭金進士文)」외 1편), 축문 8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3·4에는 잡저 7편이 들어있는데, 「유건설(儒巾說)」, 「단설(檀說)」, 「과정문견록(過庭聞見錄)」, 「장남종관혼서(長男鍾寬婚書)」, 「차남종국혼서(次男鍾國婚書)」 등이 실려있다. 이중에 「유건설(儒巾說)」은 선비들이 쓰고 다니는 두건을 설명한 것이으로 그 제도와 유래, 사용처 등을 밝혔다. 「과정문견록(過庭聞見錄)」은 자신의 아버지 황은섭(黃殷燮)의 일상생활과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또 의(疑)가 15편 수록되어 있는데, 「대학문제(問題)」 2편, 「중용문제」 2편, 「맹자문제」 3편, 「논어문제」 8편이 있다. 이것은 황재필이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유교 경전을 공부하다가 생각나는 의문점에 대하여 여러 설을 이용하여, 풀이하고 자기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권5는 부록으로 행장, 묘갈명, 향천장(鄕薦狀), 도천장(道薦狀), 단파정상량문(檀坡亭上樑文), 단파정운(檀坡亭韻) 98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황재필의 문장은 실려 있지 않다.

1930년에, 황재필의 아들 황종관(黃鐘寬)은 부친을 기리기 위해서 단파정(壇坡亭)을 건립했다. 그리고 1939년에 영석재(永錫齋)를 건립하였는데, 이 두 문화재는 고창 성내면 대천(大川)마을에 있다. 원래 단파정은 황재필이 살았던 시기에 지어졌으나 없어지고 아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하지만 현재 보이는 단파정은 1930년대에 지은 단파정이 아니고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모습은 정자 중심에 팔각정의 방이 있다.

대천마을은 신대리에 속해 있는데 신대리는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으로 원래는 신정리(新亭里)와 대천리(大川里)로 구성된 마을이다. 신정리의 ‘신(新)’자와 대천리의 ‘대(大)’자를 따서 ‘신대(新大)’가 된 것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본래는 흥덕군(興德郡) 이동면(二東面)의 지역이다. 이후 1914년 4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봉서리(鳳西里), 대천리, 해평리(海坪里), 신정리, 옥교리(玉橋里)의 각 일부와 이서면(二西面) 왕동(王洞)이 병합되어 신대리가 되었고, 성내면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권호기, 「황재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권호기, 「단파유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윤종호,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신대리」,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인교, 「南道 정자기행(2629)-고창 단파정(檀坡亭)」, 한국매일, 2015.10.28

홍일순(洪一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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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순(洪一純, 1804년∼1856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로 15세(1818년) 때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양자가 되었다. 어려서 부친과 절친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에게 글을 배웠으며 나중에 임헌회(任憲晦), 신응조(申應朝), 김평묵(金平黙) 등과 교류하였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성리학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시흥현령(始興縣令), 과천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오곡집(鰲谷集)』4책을 남겼다.

 

1804(1, 순조 4)
아버지 홍우필(洪禹弼)과 어머니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박씨는 박상한(朴相漢)의 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일대)이며, 자는 헌문(憲文), 호는 오곡(鰲谷)이다.

1810(7, 순조 10)
나중에 양부가 된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돈녕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홍직필은 아들 홍일한(洪一漢)이 있었는데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딸은 민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1814(11, 순조 14)
홍직필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1822년에는 장흥고봉사, 1838년에는 이조 재학, 장악원주부, 황해도도사,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18(15, 순조 18)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양자(養子)가 되었다.(⌈매산집(梅山集)⌋) 홍직필의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으로 서울 출신이다.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이간(洪履簡)이다. 1801년 사마시에 응시하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에서 낙방한 뒤에는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과 오랫동안 사귀었는데 그로부터 성리학의 여러 주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저서로 매산집(梅山集)이 있다.

홍일순은 어려서 양부와 절친한 박윤원과 오희상에게 글을 배웠으며 나중에 임헌회(任憲晦), 조병덕(趙秉悳), 신응조(申應朝), 김평묵(金平黙) 등과 교류하였다.

홍직필은 홍일순이 어렸을 때의 일을 이렇게 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시 제목은 ‘一純朝出江門不還終夕苦佇因之爲詩’(⌈매산집⌋권2)으로 그 내용은 ‘일순이 아침에 강문(江門)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저녁 내내 애타게 기다리며 시를 짓다.’이다. 아이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이 드러나 있다.

 

飛雪層冰江上村
눈 날리고 층층이 얼음이 언 강가 마을에

癡兒訪道丈人門
어리석은 아이가 도를 찾아 어른의 문하에 찾아갔네

白頭扶杖倚閭望
백발에 지팡이 짚고 마을 어귀에서 바라보니

夕鳥下庭山日昬
저녁 새 뜰에 내려오고 산의 해는 어둑어둑 해지네

 

홍일순에게 글을 가르쳤던 오희상은 당시 노량진 부근에 거처를 정하여 살고 있었다. 거기로 글을 배우러 간 아들 홍일순을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홍직필이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시로 담은 문장이 또 한편 있다. 제목은 「待兒, 즉 ‘아이를 기다리며’(⌈매산집⌋권2)이다.

 

送子蘆漪去
아들을 노의선생(오희상)에게 보냈는데

淹遲反面行
돌아와 얼굴을 보여주는 걸음이 더디구나

冉冉黃昏近
어느덧 황혼이 가까우니

依依初月生
은은히 초승달 떠오르네

簷端白雲宿
처마 끝에는 흰 구름 머물고

庭際草蟲鳴
뜨락에는 풀벌레 우는구나

倚杖勞凝望
지팡이 짚고 애써 응시하며

衡門夕不扃
저녁에도 사립문 닫지 않노라

부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홍일순은 경학과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태극(太極), 도기(道器), 명덕(明德) 등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면 명덕론(明德論)에 대해서는 명덕이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허령불매(虛靈不昧)하고 이치를 갖추어 온갖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마음(心)이라고 하였다. 이기설은 전적으로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랐다. 그는 이기론에 대해서, 리(理)의 근원도 하나이고 기(氣)의 근원도 하나이므로, 기가 이를 떠나지도 못하고 이도 기에서 떠나지 못한다고 설명하였다.

 

1844(41, 헌종 10)
선공감역(繕工監役)으로 제수되었다. 양부 홍직필이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고, 또 나중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45(42, 헌종 11)
1월, 초사(初仕)로 가감역(假監役)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시흥현령(始興縣令) 등을 역임했다.

1848(45, 헌종 14)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지냈다.

1851(48, 철종 2)
양부 홍직필이 대사헌에 임명되고, 다음해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52(49, 철종 3)
양부 홍직필은 이 해에 용인(龍仁) 충열사(忠烈祠)의 원장이 되었다. 7월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홍직필은 6월부터 설사증을 앓다가 7월 17일에 경기도 노호(鷺湖)의 노의정사(蘆漪精舍)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77세 였다.

1856(53, 철종 7)
이 해에 향년 53세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오곡집(鰲谷集)』4책이 있다.

오곡집』은 8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사본이고, 서문과 발문이 없다.

제1권에는 시 98수, 서(書) 10편이 실려 있는데 아버지 홍직필을 비롯하여 오희상, 조병덕(趙秉悳), 신응조(申應朝), 임헌회(任憲晦) 등 여러 학자들에게 인심(人心), 도심(道心), 태극, 도기(道器), 이기(理氣), 명덕(明德), 예설 등에 관하여 문답한 것이다.

제2권부터는 서 107편, 서(序) 1편, 제문 9편, 묘지 1편, 가장(家狀) 3편, 잡지(雜識) 1편, 그리고 부록으로 제문 2편, 묘갈명·묘지명·연설(筵說)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1885년(고종 22년)년에 조정에서 심순택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이번에) 지평에 추증(贈職)한 신(臣) 심의덕(沈宜德)은 연전에 특별히 추증하여 포상을 하였는 바, 그는 일찍이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연원(淵源)이 순정(純正)하고 예학(禮學)에 해박하여 후학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고 현령(縣令) 홍일순(洪一純)은 문경공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독실하게 실천하였는데, 끝내 현감에 그쳐 그 깊은 학문을 펴지 못하여 사림(士林)이 지금까지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처럼 순정한 학문과 행실은 마땅히 특별한 상전(賞典)이 있어야 합니다. 심의덕에게는 도헌(都憲)과 좨주(祭酒)를 더 추증하고 홍일순과 이의조에게는 특별히 참의(參議)와 좨주를 추증하여 장려하는 성상의 뜻을 보이시면 실로 밝은 시대의 풍속을 세우는 정사에 빛이 날 것이기에 아룁니다.”

(⌈승정원일기⌋) 이에 임금은 건의한대로 실행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 , ⌈매산집⌋
전종헌, 「홍일순」,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이종덕, 「홍일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8
이종덕, 「오곡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