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후(金鍾厚, 1721-1780)-2


김종후(金鍾厚, 1721-1780)-2                            PDF Download

 

김종후는 자는 자정(子靜)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 1673-1753)이고, 아버지는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 1697- 1753)이며, 동생이 김종수(金鍾秀, 1728-1799)이다.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다.

조부 김희로는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04년 빙고별검(氷庫別檢)·경력(經歷) 등을 지냈다. 경종이 다병무자(多病無子)함을 들어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형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파직당하여 위원(渭原)에 유배당하였다. 그러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세력을 얻게 되자 공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호조참판·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김치만은 1720년(경종 즉위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참봉이 되었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 등을 역임하였다. 1736년(영조 12)에 자신의 딸과 영조의 조카 낙천군(洛天君) 이온(李縕)과의 혼인을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글씨로는 이도곡묘갈명(李陶谷墓碣銘)을 남겼다.

 

스승 정암(貞庵) 민우수는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20세 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후에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通政)으로 승차(陞差)하면서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세자찬선(世子贊善)·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동생 김종수는 1768년(영조 4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왕세손 필선(弼善)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 때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올랐고,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 우의정에 올랐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默) 등과 친하게 교유했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김종후는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장헌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김구주(金龜柱)와 입장을 같이 하였다. 그 뒤 김구주(金龜柱, 1740-1786)가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였다.

 

김구주는 영조의 계비로 선조 초년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시파를 대거 숙청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다. 누이가 영조의 계비(繼妃)가 됨에 따라 음보에 의하여 벼슬에 올라 궁중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1762년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7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강원도관찰사·좌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외조 홍봉한(洪鳳漢)을 모함하여 왕세손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이때부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하여 벽파의 영수(領袖)로서의 지위에 올랐다. 정조가 즉위하자 흑산도에 유배되었고, 1779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84년 왕세자 책봉 때 특사령으로 나주에 옮겨졌으나 병사했다.

 

홍국영은 1771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이 때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그 소생인 손자(뒤의 정조)를 후계로 정하였다. 영조 말년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홍인한·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하였다.

그 뒤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해 숙위대장을 겸직하는 등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조정 백관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할 수 있어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아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원빈이 20세도 못 된 나이로 1년 만에 병들어 죽는다.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1780년 음식에 독약을 섞어 왕비를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축출 당했다.

 

정조 4년(1780)에 김종후의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장령 김종후(金鍾厚)가 졸하였다. 김종후의 자는 백고(伯高)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曾孫)이며 김종수(金鍾秀)의 형이다. 영조 때 경학과 품행으로 천거되었고 지금 주상이 즉위하여 경연관으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항상 명의(名義)를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였었는데, 홍국영(洪國榮)이 축출될 적에 상소하여 보류하기를 요청하면서 몹시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그의 창피함을 비웃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특별히 은전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그에게 본암집(本庵集)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문행(金文行, 1701-1754)-2


김문행(金文行, 1701-1754)-2                            PDF Download

 

김문행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사빈(士彬), 호는 화음(華陰)이다. 증조부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고, 조부는 김창국(金昌國)이며, 부친은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낸 김치겸(金致謙)이다.

증조부 김수증은 1670년(현종 11)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 살만한 곳을 가려져 정함)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그 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했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조부 김창국은 숙종의 후궁인 영빈김씨(寧嬪金氏)의 아버지이다. 1681년(숙종 7)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빙고별감(氷庫別監)이 되었다. 장악원주부·첨정·의금부도사·공조좌랑(工曹左郞) 등을 지냈으며, 이후 동궁의 시위를 담당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찬(翊贊)이 되었다. 또 익위(翊衛)·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등을 지냈으며, 이후 외직으로 나가 여러 고을의 현감과 군수를 지냈다. 1707년(숙종 33)에는 관직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천부사(成川副使)에 이르렀다

 

부친 김치겸은 김창흡의 아들인데, 김창국(金昌國)이 두 딸을 낳고 아들이 없으므로 종제(從弟) 김창흡(金昌翕)의 아들인 김치겸(金致謙)을 후사로 삼았다.

김문행은 1726년(영조 2)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음해인 1747년 수찬(修撰), 겸사서(兼司書), 겸문학(兼文學), 부교리, 응교(應敎)를 역임했다. 1748년에는 사간(司諫), 보덕(輔德), 익선(翊善) 및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했다. 1753년에는 승지(承旨)에 올랐고, 좌승지(左承旨)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문행과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인연도 언급할 만하다. 황윤석은 자는 영수(永叟)이고 호는 이재(頤齋)로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배워 널리 백가에 통하였다. 특히 수학과 천문에 당대 제일의 학자로 평가받았다. 『이재유고(頤齋遺稿)』·『이재속고(頤齋續稿)』·『이수신편(理藪新編)』·『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처음 황윤석이 김문행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과거에 전념할 것이 아닌 것을 알고 경학을 공부한다면 재종제인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소개하여 황윤석이 김원행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곳에서 만난 홍대용과 절친한 우정을 나눈다.

 

구한말에 대원군이 ⌈이수신편(理藪新編)⌋을 구한 적이 있었다. 대원군이 이 책을 수소문한다는 소문을 접한 황윤석(黃胤錫)의 6대 후손은 집에 보관되어 있던 ⌈이수신편(理藪新編)⌋을 가지고 서울 운현궁으로 찾아가 바쳤다. 대원군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하자,

“전라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 있는 명당인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묘를 한자리 쓰는 것이 소원입니다.”

라고 했다. 다섯 신선이 모여 바둑을 두고 있는 형상이라고 알려진 이 묏자리는 당시 호남 최고의 음택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는 만일사(萬日寺)라고 하는 절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일사(萬日寺)는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위하여 기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이성계가 무학을 만나러 만일사(萬日寺)에 왔다가 절 아래의 동네에서 고추장을 맛보았는데 이 고추장이 바로 오늘날 순창이 고추장의 명소로 알려지게 된 계기이다. 결국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만일사(萬日寺)는 산 아래쪽으로 이전해야만 했고, 원래 있던 절 자리에 황씨 집안이 묘를 쓰게 되었다.

 

<참고자료>

국역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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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徐逈修, 1725-17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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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는 자는 사의(士毅), 호는 직재(直齋)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할아버지는 서종대(徐宗大)이고, 아버지는 현령 서명훈(徐命勳)이다. 이재(李縡)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김원행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고, 대사성 서유망(徐有望)이 아들이다.

스승 이재는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했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스승 김원행은 이재의 수제자로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고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로서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였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서형수는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척신(戚臣) 홍계희(洪啓禧) 등 요인들이 교유를 청해온 것을 거절하여 관계의 진출이 늦어졌다.

 

1771년 교리로서 척신의 자제가 대거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폐단의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승지로서 국가 대훈자(大勳者)의 특전이 너무 지나침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 해 벽파(僻派)를 탄핵하였다가 면직당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1773년 승지로 재기용된 뒤 대사간·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공조참의에 이르러 홍인한(洪麟漢)·이득신(李得臣) 일파의 전횡을 바로잡을 것을 계속 주장하였고, 그 뒤 대사간·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서형수의 딸인 영수합(令壽閤) 서씨는 조선 후기의 여성시인으로서 학문이 뛰어나고 겸손한 인품에 승지 홍인모(洪仁謨)에게 출가하여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키웠다.

 

조모가 “여자가 글을 잘하면 명이 짧다.”고 하여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여 형제들 곁에서 외우는 것을 듣고 깨우쳐 경적(經籍)을 널리 섭렵하였다. 출가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홍석주(洪奭周), 홍길주(洪吉周), 홍현주(洪顯周), 유한당(幽閑堂) 홍원주(洪原周)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들이었다. 문집으로 ⌈영수합고(令壽閤稿)⌋가 있다.

 

영수합고(令壽閤稿)는 1권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서씨의 남편 홍인모(洪仁謨)의 유고집인 『족수당집(足睡堂集)』 6권에 부록으로 편록 되었다. 영수합 서씨가 죽은 이듬해 아들들이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쓴 홍길주(洪吉周)의 발문과 홍현주(洪顯周)의 후기가 있다.

 

오언과 칠언의 절구 및 율시가 192수 실려 있으며, 1813년에 쓴 홍석주(洪奭周)의 묘표와 정경부인행장(貞敬夫人行狀)이 있다.

“선비성정은 똑바르다[先妣性情正].”

고 아들들이 평하였던 바와 같이 수록작품은 대체로 규범적이요, 윤리·도덕적인 내용을 많이 썼고, 중국문장가들의 시문을 차운한 것이 많다.

 

맨 처음 실린 「기장아부연행중(寄長兒赴燕行中)」에는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 「차이백추하형문(次李白秋下荊門)」과 「차당인방은자불우(次唐人訪隱者不遇)」·「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등이 있는데, 대부분 당시(唐詩)에 차운한 것이다.

 

<참고문헌>

국영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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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호는 자는 사경(士京)이고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다. 형이 은일로 이조참의에 천거된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교분이 깊었다.

박지원은 서울 명문가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박필균이고 박지원보다 12세 위의 팔촌 형 박명원(朴明源)은 영조의 사위였다. 영조는 가장 귀여워했던 딸을 박명원에게 시집보냈다. 딸이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위를 총애했다.

 

박지원은 1778년에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군 연암골로 숨어들었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홍국영의 눈 밖에 났던 게 화근이었다. 박지원을 아꼈던 유언호는 서울을 떠나 있을 것을 권유하였고 박지원은 그의 말대로 연암골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이 바로 박지원의 서재 연암산방(燕岩山房)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박지원은 죽을 때까지 연암이란 호를 썼다.

그로부터 2년 뒤,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고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쓰게 된다. 이 책이 등장하자 젊은이들은 그의 문체를 따라 썼고 박지원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유언호의 형 유언집은 자는 사호(士鎬)이고 호는 대재(大齋)로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부친 유직기가 『소학』의 「가언」과 「선행」편의 내용을 정리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유언집이 『대동가언선행』을 편집했다. 『대동가언선행』은 아동 교육서이긴 하지만 누구나 본받을만한 훌륭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대체로 『격몽요결(擊蒙要訣)』·『성학집요(聖學輯要)』·『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등에서 해당 내용을 뽑아 정리하였다.

유언집은 학행이 있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정조 1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1778년(정조 2) 경연관이 되었으며, 1783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원자를 보도(輔導)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에 대한 내용은 ⌈영조실록⌋40년 조에 그 대략이 나온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인정전 월대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고금 당론(黨論)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유에 대해 두루 서술하고 또 어진 사람과 사특한 사람이 진퇴하는 의의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무릇 1백여 글자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신경의 상소에 조화시켜 보려는 신하를 배척하여 산림의 선비가 또 하나의 당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 만약 근원을 통렬히 깨뜨리지 않으면 그 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를 책자로 만들어 《엄제방유곤록(嚴隄防裕昆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간행하여 사고에 넣어두라고 명하였다.”

 

유언집은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본 편찬사업은 정조 1년 3월에 마무리되었는데, 김치인(金致仁) 등이 올린 차자(箚子)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신 등은 명을 받고 삼가 두려워하여 주야로 편찬하면서 먼저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를 권수(卷首)에 드러내어 그 체단(體段)을 높였고 다음에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의하여 일·월(日月)을 차서(次序)하였으며 사실을 뽑고 문자(文字)를 조절하여 시종(始終)을 다 실었으며 금오(金吾)의 문안(文案)을 참고하여 국정(鞫情)을 다 실었고 간간이 조정의 계사(啓辭)와 소장(疏章)을 실어 국론(國論)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단락(段落)마다 번번이 논단(論斷)을 붙여 옛날 사신(史臣)의 주폄(誅貶)한 뜻을 모방하였습니다. 편집(編輯)한 규모는 한결같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의거하였고 범례(凡例)와 대의(大義)는 모두 예재(睿栽)의 품지(稟旨)를 거쳤습니다. 국(局)을 설치한 지 4개월 만에 비로소 끝마쳤는데 책이 모두 3편(編)입니다. 신 등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봉진(封進)합니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1802년(순조 2)에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