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징(成萬徵, 1659-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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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징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달경(達卿)이고 호는 추담(秋潭)·환성당(喚醒堂)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로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숙종 연간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 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는데,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였다.

학술적으로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애초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 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성만징은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렸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인물성동이본변(人物性同異論辨)이 활성화 되었다. 이 논쟁은 지역적으로 낙파(洛派)와 호파(湖派)로 나뉘어 격론을 벌였다. 성만징은 ‘성은 곧 이(性卽理)’라는 설과 ‘이기가 혼융(混融)하다’는 설을 내세워 낙파의 설을 지지하였다.

1703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왕자사부(王子師傅)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04년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둘러싼 논쟁 때 송시열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예학에 밝았으며, 문경의 한천사(寒泉祠)에 배향되었다. 시문집인 《추담문집》이 있다.

추담문집》은 8권 3책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1926년 후손 해중(海重)이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권말에 7대손 석(檡)의 발문이 있다.

시에는 차운(次韻)·증별(贈別) 또는 만시(輓詩)가 많고, 기타 영물(詠物)·감회를 나타낸 것도 상당수 있다. 「우음(偶吟)」은 『대학』을 300번 읽고 3개월의 정좌 끝에 깨달은 바를 옮긴 시라고 주석되어 있다. 「별이주경세석연행(別李周卿世奭燕行)」과 「유감(有感)」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서 중에는 이세필(李世弼)과 교환한 서찰이 많은데, 여러 선생의 예설(禮說)을 분류하고 편차(編次)하여 심도 있게 논구한 내용이 들어 있다. 권상하(權尙夏)에게 올린 문목(問目)에는 이기설과 경전에 대한 훈고(訓詁)·예설 등이 있다.

예설에 관해서는 혼례 때 신랑·신부의 위치와 음식을 진설하는 방법이 이유태(李惟泰)의 집안에서 쓰는 고례(古禮)와 주희(朱熹)의 『가례(家禮)』가 서로 다른 것에 관해 묻고, 이어 서동부서(壻東婦西)로 된 고례의 서부즉석설찬도(壻婦卽席設饌圖)를 그려 넣고 있다. 기타의 서에도 성리설과 예설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잡저의 「만동사시비변(萬東祠是非辨)」은 당시 만동묘(萬東廟)에 있는 명나라 신종의 신위를 두고 일부에서 선비가 천자를 제사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라는 등의 시비가 있자, 그에 대해 반박한 글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상열(徐相烈, 1854-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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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열은 본관이 대구(大丘)이고 일명 상열(相說)이라고도 한다. 자는 경은(敬殷)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다. 충청북도 단양 출신이다. 장신(將臣) 문유(文裕)의 증손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릴 때는 지친인 서광범(徐光範, 1859-1897)의 도움을 받았으나 박영효(朴泳孝)와 친히 지냄을 보고 멀리하였다.

서광범은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등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0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규장각검교(奎章閣檢校)·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세자시강원 겸 사서(世子侍講院兼司書)·세자시강원 겸 필선(世子侍講院兼弼善)·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해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9월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같은 해 6월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의 종사관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 시설을 시찰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다음 이듬해 6월에 귀국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12월 개화당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서상열은 무과에 급제하였지만 묄렌도르프(Mollendorf,P. G. von, 穆麟德)가 조정에 입사하게 되자 이를 통탄하고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는 독일 할레대학에서 법학과 동양어를 전공하고 청나라 주재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였다. 1869년 청의 세관리(稅關吏)로 일하다가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조선의 통리아문(統理衙門) 참의(參議) ·협판(協辦)을 역임하면서 외교와 세관업무를 맡았다. 재정고문으로 민씨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오전 발행은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주장한 개화파와 대립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김옥균(金玉均)의 개화파에 반대하였고, 민씨 척족세력을 도왔다. 외무협판에 재직 중인 1885년에 이홍장의 압력으로 해임되었고 한국을 떠나 중국 닝보[寧波]에서 죽었다. 한국 역사에 조예가 깊고 만주어에 능통하였다.

김상열의 스승 김평묵은 24세에 이항로를 찾아가 배우고 또 홍직필(洪直弼)을 찾아 배우는 등 학업에 매우 전념하였다. 두 선생을 동시에 따른 관계로 학설은 넓고 온건하였다. 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에 기울여졌다. 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와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로 보느냐 기로 보느냐의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74년에 스승의 『화서아언(華西雅言)』을 편집하여 간행했다. 1880년에 선공감가감(繕工監假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유중교는 5세에 이항로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는데, 총명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아이들과 놀기를 싫어하고 다만 경적(經籍)에만 몰두했다. 김평묵(金平默)에게 배우고 21세 때 이항로의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수했다.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대해 김평묵에게 「논조보화서선생심설(論調補華西先生心說)」을 보냄으로써 사칠논쟁(四七論爭)이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버금가는 대논쟁이 이항로 문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유중교는 심(心)을 기(氣)로 규정하고 이항로 및 김평묵은 심을 이(理)로 규정함으로써 스승의 설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인들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논쟁은 더욱 확대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888년에는 두 설을 절충해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김평묵에게 보냄으로써 잠정적으로 심설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임종 직전에 문인들에게 정안(正案)의 문자(文字)는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과 도리에 모두 맞지 않는다.’ 하여 거두어들일 것을 명함으로써 결국 두 설은 합일을 보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서상열의 학문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선전관을 제수하고 장차 통정(通政)의 계급에 올려 세자의 사부로 초빙하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갑신정변 후 세상을 비관하더니 갑오경장의 충격으로 병석에 눕기까지 하였다.

그 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거의할 것을 결심하고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과 의병을 일으켜 제천으로 들어가 이필희(李弼熙) 의진(義陣, 의용병의 군진)의 참모가 되었다. 충주·영월을 거쳐 안승우 의진과 회합하여 유인석(柳麟錫)을 만나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제천에서 안승우와 홍사구(洪思九)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진을 강화하려고 영춘·정선을 거쳐 황해도·평안도로 진출하여 모군하려 하였다가 도중에 적과 여러 차례 접전하였는데 낭천(狼川)에서 교전 중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육의사열전(六義士列傳)』
기려수필(騎驢隨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문오(朴文五, 1835-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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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오는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대화(大化), 호는 성암(誠菴)이다. 아버지는 박도정(朴道精)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형 박문일과 함께 관서지방에서 당시 으뜸가는 학자라는 찬양을 받았다.

스승 이항로는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의 이기론(理氣論)은 주리(主理)적 입장을 고수하여 이(理)와 기(氣)는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理)를 중요시하는 그의 주리설(主理說)은 조선이 처한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순선(純善)을 지향하고 대의(大義)를 실천하는데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영남의 이진상(李震相), 호남의 기정진(奇正鎭)과 더불어 한말 주리철학(主理哲學) 3대가로 일컬어졌다.

이항로의 주리적 입장은 19세기에 발생한 심설논쟁(心說論爭)과 연관된다. 조선 사회 내부의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격화와 서양의 문화적 군사적 충격에 직면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대를 배경으로 심설논쟁이 발생하였다. 당시 유학자들 중 상당수가 조선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타개책을 모색하면서 그 이념적 지향으로 주재(主宰)하는 이(理)를 중심에 둔 이른바 주리(主理)적 입장을 취하였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한주학파(寒洲學派)에서 주장하는 심즉리(心卽理),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소리 높여 외친 호남과 강우지역의 노사학파(蘆沙學派)에서 주장하는 심지명덕(心之明德), 위정척사의 맹장들을 많이 배출한 기호지역의 화서학파(華西學派)에서 주장하는 심주리(心主理) 등이다.

이항로는 주리철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한말(韓末) 위정척사(衛正斥邪) 의리론(義理論)의 대표자로서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선봉이 되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척사위정(斥邪爲正)과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 박문오와 그의 형 박문일은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화서학파가 관서지방에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문오는 경학(經學) 연구에 전심하는 한편,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종 때 판서 남정철(南廷哲)이 기자묘수호소(箕子墓守護所)를 설치하여 도내에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인사를 뽑을 때 입직수호생(入直守護生)과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임명되자 사퇴하였다가 주위의 권유로 보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 뒤에 덕천군수를 지냈다. 저서로는『성암집(誠菴集)』이 있다.

 

성암집은 4권 4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1904년 아들 동흠(東欽)이 편집하고 제자 이윤실(李允實)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학진(金鶴鎭)의 서문과 권말에 박은식(朴殷植)과 김병훈(金秉熏)의 발문이 있다.

서(書)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학문을 하는 데 필요한 지경궁리(持敬窮理) 또는 수정지방(守靜之方)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한 것과 시세에 관한 의견을 적어 수령들에게 보낸 것이 많다. 소에는 교수를 맡을 학행 있는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의 하교에 대한 회답 상소가 있다.

잡저 중 「존심양성설(存心養性說)」에서는 존(存)과 양(養)은 사(事)이고 심(心)과 성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므로 존심양성은 곧 하늘을 섬기는 일이라 전제하고, 애친(愛親)하는 마음을 보존하여 양인(養仁)하는 성을 삼으며 경군(敬君)하는 마음을 보존하여 의(義)의 성(性)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는 등 척사의 입장에서 유학이론을 천명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이 하나이지만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고 혹은 성명(性命)의 바른 것에 근원한다고 전제하고 이황(李滉) 등의 설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길로 가는 데 각기 중한 것을 취한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밖에 성리(性理)를 설명한 「천리인욕변(天理人慾辨)」과 「심성정의변(心性情意辨)」이 있다.

 

<참고문헌>

성암집(誠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문일(朴文一, 1822-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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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일은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자는 대수(大殊), 호는 운암(雲菴)·운재(雲齋)·징암(懲菴) 등이다. 평안도 태천(泰川)출신으로 박도정(朴道精)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통정대부 김태려(金泰呂)의 딸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관서지방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전병훈(全秉薰, 1857-1927) 등의 스승이다. 박문호(朴文五)가 동생이다.

스승 이항로는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했지만 당시 권력층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 교유하며 지낼 것을 종용했는데, 이에 격분하여 과장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이항로의 이기론(理氣論)은 주리(主理)적 철학 입장을 고수하여 이(理)와 기(氣)는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理)를 중요시하는 주리설(主理說)은 객관적 측면에서 보자면 논리적 약점을 피할 수 없지만 당시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순선(純善)을 지향하고 대의(大義)를 실천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영남의 이진상(李震相), 호남의 기정진(奇正鎭)과 더불어 한말 주리철학(主理哲學) 3대가로 일컬어졌다.

이항로는 주리철학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한말(韓末) 위정척사(衛正斥邪) 의리론(義理論)의 대표자로서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선봉이 되었다. 문하(門下)에서 척사위정(斥邪爲正)과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중 박문일과 그의 동생 박문오는 관서지방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화서학파가 관서지방에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은식(朴殷植)은 1884년(26세)에 영변의 산중 생활을 마치고 평안북도 태천에서 제자를 기르고 있던 박문일 (朴文一)과 그의 아우 박문오(朴文五)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는다.

박은식은 박문일과 박문오 형제로부터 주자학을 체계 있게 배웠다. 박문일은 뒷날 자신의 저서 ⌈운암집⌋에서 박은식을 평하여

“세상에서 문장을 논한다면 반드시 박은식을 손꼽는다.”

라고 하였다.

 

박은식이 청년기에 수학한 계보를 세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가학으로 부친 박용호로부터 주자학과 과거를 위한 시부(詩賦)를 배운 것이다. 박은식은 이 때 주자를 존숭했으며 또한 초학인 만큼 그 영향도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정통파 주자학도로서 교육받으면서 주자학도로서 자기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둘째는 다산 정약용의 실학을 수학한 것이다. 이는 주자학도로서의 박은식의 사상체계 안에 주자학을 내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맹아를 심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박문일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더욱 깊이 본격적으로 수학한 것이다. 당시 관서의 큰 학자인 박문일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더욱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수학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계통을 제대로 전수받게 된다.

 

전병훈(全秉薰)은 본관이 정선(旌善)이고 평안북도 출신으로 고종 29년(1892)에 의금부 도사,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순종이 즉위하던 해(1907)에 관직을 버리고 중국 광동으로 건너가 정신연구에 몰두하였다. 10년 동안 도교의 수련과 ⌈도장(道藏)⌋을 연구한 다음 61세 때 도를 체득하여 북경에 정신철학사를 세우고 활동하였다. 북경에서 활동하면서 우남전(于藍田), 서변선유사(西邊宣諭使)인 정몽찰(丁夢刹), 육군중장인 강수기(江壽琪) 등을 제자로 삼았다.

자는 서우(曙宇), 호는 성암(成菴) 외에도 취당(醉堂)이 있으며 도호는 현빈도인(玄牝道人)이다. 서우란 ‘우주 안의 새로 열리는 서광(宇內之新開曙光)’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1920년에 저서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이 북경에서 출간되었다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은 6권 2책을 되어 있으며 속 표제는 ‘정신심리도덕정치철학통편(精神心理道德政治哲學通編)’으로 되어 있다. 권1 정신철학통편, 권2 심리철학, 권3·4 도덕철학, 권5·6 정치철학의 순이다.

책머리에 엄복(嚴復)·강유위(康有爲) 등 당대 중국 사상계의 원로들과 전 양광총독(前兩光總督) 장준(張駿) 등 한림 출신 명사들이 이 책에 대한 논평을 싣고 있음을 볼 때 전병훈의 활동 영역과 비중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유교·불교·도교의 전통사상과 서양철학을 종합하여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새로운 통합사상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첫머리에 실린 <단군천부경주해>는 전병훈이 추구하는 통합의 중심이 한국인의 민족종교적 심성임을 보이고 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대철학자에서부터 데카르트·칸트·몽테스키외·아담 스미스 등 근대사상가에 이르기까지 서양사상을 긍정적으로 섭취하였고 특히 칸트의 <세계정부론>과 <영구평화론>을 극찬한다.

전병훈 자신도 <세계일통공화정부헌법9조>를 제시하면서 파리강화회의와 함께 고조된 세계평화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 근대사상사에서 매우 특징 있는 저술로서, 종교학·철학·심리학·윤리학·정치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근대 상황에 직면하여 전통적 통합논리를 제시하고자 한 저술이다.

후에 박문일은 1866년(고종 3) 사복시주부(司僕寺注簿)·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으며, 188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의 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전통적 유학자로 오직 도학에 전념하면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자주 서울에 출입하였으나 권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말 한필로 상경하여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더불어 나랏일을 걱정하기도 한 기개가 있었다.

1882년 요동(遼東)에 전쟁의 화기(禍機: 재변이 드러나지 않고 잠겨있는 기틀)가 박두할 기색이 있자 고향인 태천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게 하고 병기를 갖추어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같은 문인인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과 교분이 두터워 경전에 관한 문답의 서신내왕이 많았으며, 임헌회(任憲晦)와는 이기설(理氣說)에 관한 의견교환을 많이 하였다. 사서에 대한 해석인 「경의해(經義解)」를 잡저로 남겼으며, 저서로는 『운암집(雲菴集)』 12책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신용하, ⌈박은식의 사회사상연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민정중(閔鼎重, 1628-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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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중은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할아버지는 경주부윤 민기(閔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민유중(閔維重)이 동생이다.

1649년(인조 27)에 정시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직언(直言)으로 뛰어나 사간원정언·사간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소(疏)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강빈이 인조 때에 죄를 받아 폐출되어 죽고 그 자녀는 어린데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므로 백성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신료 중에 감히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홀로 맨 먼저 논하였다. 다른 신료들이 깜작 놀랐지만 현종이 그 충직한 것을 알고 죄주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동생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배웠으며 1645년 귀국할 때 천문, 과학, 종교에 관한 많은 서적 등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인조 및 조정 중신들의 반감을 샀고, 이에 인조를 비롯한 조정의 냉대를 받았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병에 걸렸다가 귀국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울러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더욱이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세자빈 강 씨를 사가로 폐출시킨 뒤 두 달 뒤 사사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에게도 강빈의 죄를 물어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이 가운데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민정중은 이어서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가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대사간으로 나아갔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호조·공조의 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삼사에 재직할 때는 청의(淸議)를 힘써 잡았고, 대사성에 있을 때는 성균관의 증수(增修)와 강과(講課)에 마음을 다해 선비 양성의 효과가 매우 많았다. 또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그곳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켰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적(許積)·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다. 이때 호포(戶布) 등 여러 가지 일을 실행하려 했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반대에 부딪혔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관작이 회복되어 양주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뒤에 여주로 옮겨졌다.

 

숙종실록⌋ 18년 조에 민정중의 졸기가 실려 있다. 민정중의 대략을 가늠할 수 있다.

“전(前)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벽동(碧潼)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했는데, 65세였다. 민정중은 자(字)가 대수(大受)로 사람됨이 영특(英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이 괴과(魁科, 문과 장원)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제현(諸賢)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 내는 데에 매우 공효가 있게 되므로, 당시에 정엽(鄭曄)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 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그대로 겸임하고 있고 체직되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교도(敎導)하여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북(關北)을 안찰(按察)할 적에 북쪽의 풍속은 오로지 무예(武藝)만 숭상하고 문사(文事)에는 소홀하여 진실로 친상사장(親上死長,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상(上)에 나와 있는 말인데, 곧 친상(親上)은 평소에 윗사람을 친애하는 것이고, 사장(死長)은 위난(危難)을 당했을 적에 어른을 위해 죽는 것임) 하는 의리에 어두우므로, 비록 재질과 능력이 강건(强健)하여도 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자신이 솔선시범(率先示範)하며 선비들의 교화(敎化)를 크게 천명(闡明)하므로, 얼마 되지 않아서 빈빈(彬彬, 문채와 바탕이 함께 갖추어져 찬란한 모양) 해져 볼 만하게 되었다.

그 뒤에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 남쪽 변방으로 귀양을 갔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輿望)은 더욱 높아져서 오늘날의 진요옹(陳了翁)이나 유원성(劉元城) 같은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다. 경신년의 경화(更化, 고쳐서 새롭게 함) 때에는 제일 먼저 태부(台府, 의정부)에 들어오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몇 해 동안 한결같이 임금의 덕을 바로잡는 것과 선비들의 공론을 붙잡기에 주력하고, 여타의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하는 것을 보자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여 밝히므로 세상의 도의(道義)가 더욱 힘입는 바가 있게 되었다. 기사년의 변(變, 기사환국)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뒤에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이재가 지은 비명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는데, 이 또한 민정중의 대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공은 사람됨이 엄준(嚴峻)하고 광명(光明)하며 그 학문은 경(敬)을 첫째로 삼되 감언(敢言)을 좋아하며 훌륭한 행실을 닦아서 사대부를 이끌었다. 처음에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한 것이 22세 때인데, 이때 효종이 새로 즉위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로 옮겼는데, 직언(直言)이 있으면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고 삼갔다. ……

일찍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지기(志氣)가 매우 날카로우시나 한결같이 확고한 실속이 없고, 규모가 크기는 하시나 거꾸로 되어 자주 바꾸는 과실이 있으며, 깊은 궁궐에 오래 계시어 마음 편히 지내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니, 근본을 세워서 정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감사하였다. ……

의정부의 천거로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동래부는 왜인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는데 왜인은 본디 교활하고 사납거니와, 약속을 범하면 공이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므로 왜인의 원한이 심하였다. 일찍이 연음(宴飮) 때에 칼을 뽑아 공의 좌석에 던졌으나 공이 움직이지 않으니, 모두 관문(館門)을 함부로 나가는 것을 공이 군사를 시켜 막았는데, 왜인이 그 뒤로는 두려워하여 감히 공을 범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노봉문집(老峯文集)』·『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 등이 전하며, 글씨로는 「우상이완비(右相李浣碑)」·「개성부유수민심언표(開城副留守閔審言表)」·「개심사대웅전편액(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노봉문집⌋은 12권 6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등과 주고받은 서간에서는 성리학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문답식으로 토론하고, 당시 당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시폐 등을 역설해 저자의 정치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당시 당쟁의 핵이었던 예론(禮論)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임진유문」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활동상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까지 자세하게 묘사해 그들의 충절을 현양하였다.

연행일기」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동안의 일기로 우리나라에서 청나라까지 가는 노정을 명확하게 표시하였고 중국의 풍속과 문화·제도·생활 상태 등 변모해가는 대륙의 정세를 하나하나 묘사하였다. 이 「연행일기」는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견주어 볼만한 작품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보다 먼저 쓰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국역국조인물고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익희(金益熙, 1610-1656)


김익희(金益熙, 1610-1656)                                 PDF Download

 

김익희는 자가 중문(仲文)이고 호는 창주(滄洲)다.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김반(金槃)이다. 동생은 김익겸(金益兼)이다. 어렸을 적에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김장생이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다. 가학으로 시(詩), 서(書)를 배우고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에게서 고문(古文)을 배웠다.

1633년(인조 1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등용되었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35년 수찬(修撰)·사서(司書)에 올랐다. 경연(經筵)에서 강론할 적에 낭랑한 목소리로 뜻을 분명하게 밝혀 인조(仁祖)가 가상하게 여겼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에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사신을 보내 조정을 협박하자, 당시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동료들과 청과의 화의를 물리쳐야 한다고 주청했는데, 그 의리가 매우 분명했다. 당시 이미 전쟁의 실마리가 열렸는데도 관리들이 맡은 임무에 전처럼 게으른 것을 생각하고 포빙악화(抱氷握火,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항복한 후 그 원수를 갚으려고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에서 겨울이면 차가운 얼음을 안고 여름이면 뜨거운 불을 손에 쥐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의 주장을 지극히 진언하여 신첩(臣妾, 굴복하는 사람)으로 전락되는 욕을 막고자 했다.

이해 겨울 청이 마침내 침략해 오자 조정의 논의는 ‘걸련(乞憐, 다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 줄 것을 구한다는 뜻)’으로 책략을 삼고자 했다. 이에 탄식하길,

“지금 반드시 저들한테 꺾이어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바르게 행하다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동료들과 조정으로 들어가 임금을 마주하고서

“지금 화해하자는 말로 주상에게 아뢰는 자는, 반드시 죄를 주고 난 연후에 적(賊)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었다.

1637년(인조 15) 2월에 맹약(盟約, 청나라와 맺은 강화 조약)이 이루어졌는데, 어머니 서씨(徐氏)와 둘째 아우 익겸(益兼)이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비로소 듣고서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음을 통분하였다. 또 나라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생각하고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이 여기어 상복을 벗은 뒤에 비록 조정의 일에 힘썼으나 마음속에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1637년 교리(校理)·집의(執義)를 거쳐 1639년 이조좌랑이 되고, 1642년 사간이 되었다. 강원도감사(江原道監司)로 있을 적에 노산묘(魯山墓, 뒷날의 장릉(莊陵, 단종의 능))를 수리하고 율곡(栗谷)의 사당을 새롭게 하였다. 뒤에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는데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 드릴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 후 병이 들어 체직되었다가 다시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경연사(成均館大司成兼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다. 효종이 “김익희(金益熙)는 비록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해도 대사성(大司成)만은 그대로 유지하게 하라.”고 하였다.

대사헌이 되자 모든 관사 사람들이 두려워 숨을 죽였고 여러 시기한 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효종이 포상하여

“그대 직분에 삼가 힘써야 한다.”

고 하자, 사례하여 이르기를,

“분주히 직분을 수행함은 유사(有司)의 떳떳함입니다.”

라고 했다. 효종이

“유사의 떳떳함을 거론할 수 있는 자는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동료들 가운데 법에 구애되는 일을 한 자가 있으므로 잡아서 용서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거슬리는 말이 있어도 임금은 공을 올곧게 여겨 위로하고 달랬다.

1656년(효종 7) 정월(正月)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에 제수되었다가 2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하였는데, 청에 보내는 문서를 짓는 것 때문에 대제학을 사양하자 임금도 회피(回避)할 것을 특별히 허락하고 문서에 관한 일을 차관(次官)에게 명하였다.

5월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임명하였다. 효종이 인재를 추천하게 하여 나랏일을 함께 성취하려 하다가 병환으로 사직의 소를 보고서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 직임에 발탁하여 임명한 것은 크게 쓰기 위함인데, 어찌하여 거듭 질병에 걸린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체직을 허락하고 의원과 약을 서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또한 액정서(掖庭署, 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등을 관장하던 관서) 사람을 보내서 문안케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효종이 몹시 슬퍼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은 비명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는데, 김익희와 송시열의 교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노선생(老先生,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공과 놀기를 좋아하여 매우 돈독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 공은 임금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위촉되어 와서 나를 위문하였는데, 공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임금께서 또한 천신(賤臣, 송시열 자신을 가리킴)에게

“장차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쳐서 짐의 뜻에 만에 하나라도 도와야 한다.”

고 말씀하였다.

그 뒤에 부름을 받고 진언(進言)하였더니, 임금께서 위연(喟然)히 탄식하여 이르기를,

“김익희(金益熙)의 말이 언제나 이와 같더니, 무슨 까닭으로 일찍 죽었는가?”

라고 하였다. 나는 눈물을 거두고 나왔다.”

 

문집에 ⌈창주유고(滄洲遺稿)⌋가 있다.

 

창주유고(滄洲遺稿)⌋는 18권 7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 가운데 권8의 「갑신봉사(甲申封事)」는 1644년(인조 22) 병자호란을 겪은 뒤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전야(田野)가 황폐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수습 방법을 제시한 글이다.

1654년(효종 5)에 올린 「갑오봉사(甲午封事)」는 먼저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관계를 약술하고, 이어서 사람을 얻어서 위임하는 방도와 직관(職官)·전부(田賦)·병제(兵制)·학규(學規) 등의 문제에 관한 견해를 개진한 글이다. 특히 효종의 인정을 받았던 유명한 봉사라 전해 온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역국조인물고

 

김장생(金長生, 1548-1631)


김장생(金長生, 1548-1631)                                PDF Download

 

김장생은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다.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金集)이다.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워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에 뽑혔지만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다.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김장생은 83년의 긴 생애 동안 30대 이후 꾸준히 예학을 연구했다. 예서는 크게 세 주제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전례문답(典禮問答)⌋은 국가 의례를 다룬 저서다. ⌈가례집람(家禮輯覽)⌋(1599년)과 ⌈상례비요(喪禮備要)⌋(1583년)는 양반의 생활 예절을 정리한 저작이다. ⌈의례문해(疑禮問解)⌋(1646년)는 변칙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답변한 내용이다.

 

인조실록⌋ 9년 조에 김장생의 졸기가 실려 있다. 김장생의 대략을 가늠할 수 있다.

 

“전 형조 참판 김장생(金長生)이 죽었다. 장생은 자(字)가 희원(希元)으로 자질이 돈후하고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하게 좋아했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주렴계, 정호, 정이)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의미를 파악한 후에야 그쳤다.

또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하였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 일찍이 신의경(申義慶)이 편집한 상제서(喪制書)를 정리하고 절충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라고 이름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하였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할 적에 화기가 애애하였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사람의 선악을 분변할 때는 엄정한 말과 낯빛으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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