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행(金元行, 1702-1772)-2


김원행(金元行, 1702-1772)-2                            PDF Download

 

김원행은 자가 백춘(伯春)이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미호(渼湖)다.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김창협의 수제자인 이재(李縡)의 문인이고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로서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였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당시는 율곡학파 학맥을 계승한 송시열(宋時烈)의 주제자인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발생한 호락논쟁이 뜨거웠다.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李柬)은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은 권상하의 학설을 이어 호론의 중심이 되었다.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자연히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하였다.

 

김원행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을 비롯하여 심설과 명덕설 등은 그의 문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을 거쳐 19세기 초반 낙론을 주도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에게 이어졌고, 20세기 초반 낙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전우(田愚, 1841-1922)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몇 사람의 실학자도 일부 배출되었는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대표적이다.

홍대용은 어려서 김원행이 주석하고 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세거지에 있던 서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홍대용이 석실서원에서 수학한 기간은 12세부터 35세까지 2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엄격한 학풍을 내면화하면서 성리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했다.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홍대용의 학문적 업적은 1765년 초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김원행은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옥사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인 김성행(金省行), 김탄행(金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후 여러 중책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740년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 받고 1750년 위솔(衛率)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751년 익찬(翊贊) ·지평(持平), 1754년 서연관(書筵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759년 왕세손(王世孫: 正祖)이 책봉되자 세손의 교육을 위하여 영조가 그를 불러들였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하고 응하지 않았다. 1761년 공조참의(工曹參議)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세손유선(諭善)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문집에 ⌈미호집(渼湖集)⌋이 있고 독서차록(讀書箚錄)과 미상경의(渼上經義) 등은 김원행의 경학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호집⌋은 20권 10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조실록』 48년 임진(壬辰) 12월조에 ‘미호집약간권장우가(渼湖集若干卷藏于家)’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72년(영조 48) 저자 생존 시에 이미 『미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書)에는 김시관(金時觀)과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논란한 것, 유척기(兪拓基)와 예설에 대해 논한 것, 송명흠(宋明欽)·임성주(任聖周)·김종후(金鍾厚)·이완(李浣)·홍대용(洪大容) 등 당시의 많은 학자·문인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이 있다. 이 서한들에는 경의(經義)·심성(心性)·이기(理氣)·예설·사론(史論) 등에 관한 내용이 많아, 훈고학(訓詁學) 및 성리학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인 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잡저 가운데 「잡기(雜記)」·「도곡수기(陶谷隨記)」 등은 독서를 하다가 학문에 관해 생각나는 대로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명덕설의문(明德說疑問)」·「중용귀신설(中庸鬼神說)」·「심성기질설시이민철(心性氣質說示李敏哲)」 등은 유가의 경전이나 성리설에 관해 논변한 내용들이다.

독서차록(讀書箚錄)』은 김원행이 『중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책으로,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및 전(傳) 1장부터 33장까지 장별로 각 구절의 논리적 맥락을 분석하고 이를 풀이하였다. 김원행의 경학과 관련된 저술은 대부분 『중용』관련 저술에 집중되어 있다.

독서차록』과 함께 『중용문답(中庸問答)』·『중용강설(中庸講說)』이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미호강의(渼湖講義)』·『미상경의(渼上經義)』에서도 『중용』의 비중이 역시 크다.

 

미상경의(渼上經義)는 김원행이 동료 학자나 문인과 도학(道學)의 중요 경전과 문헌에 대해 논의한 서신을 경전별로 분류한 저서이다. 이 책의 구성은 우선 『소학』에서 시작하여 사서(四書)·삼경(三經)을 거쳐 「태극도(太極圖)」·『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에서 끝난다. 노론 낙론계의 주요인물인 김원행의 경학사상이 경전별로 분류되어 있어서 18세기 낙론계의 사상적 쟁점과 문제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재(李縡, 1680-1746)-2


이재(李縡, 1680-1746)-2                                      PDF Download

 

이재는 김창협의 수제자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김창협은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었으며,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재는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그의 문하에 김원행, 송명흠,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재는 숙종 경신년(1680) 9월 28일에 태어났다. 임신 중에 민 부인이 달이 수중에 드는 꿈을 꾸었는데 광채가 방에 가득하였다. 5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작은아버지인 충숙공이 열성적으로 지도하였고 안으로는 민 부인의 인도가 또한 엄격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신축년(1721) 겨울에 경종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 측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대신들이 백료를 이끌고 명을 거두기를 정청(庭請)했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신임옥사에서 중부 충숙공 이만성(李晩成)이 조옥(詔獄)에 유폐되어 죽자 예로써 염장(斂葬)하고 인제 골짜기로 들어가 더욱 경전에 힘써 날마다 과정을 두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다.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예학(禮學)에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례편람⌋은 예학에 관한 깊은 조예를 토대로 편술되었다. 당시 거의 맹목적으로 시행하던 주자 ⌈가례⌋의 허점을 보완하면서 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요령 있게 엮었다. ⌈가례⌋는 원칙만의 편술이기 때문에 사용할 적에 어려움이 있었다.

상례(喪禮)는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주로 참고하고 현실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관행을 많이 수용하였다. 제례(祭禮) 역시 시속(時俗)의 예제(禮制)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의 경우는 마땅한 준칙이 별로 없어서 ⌈가례⌋의 고례(古禮)와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대폭 보충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찾고 그 옳고 잘못됨을 그 나름으로 고석(考釋)하여 판별하였다.

사례편람⌋은 이재가 죽은 뒤 그 자손들에 의해서 다시 수정되고 정사되어 비로소 완벽한 체제가 이루어졌지만 바로 간행되지 못했다. 이재의 증손인 광정(光正)이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던 1844년(헌종 10)에 간행되었다. 이때 도록을 부록으로 붙였다. 그 뒤 황필수(黃泌秀)·지송욱(池松旭) 등이 ⌈사례편람⌋에 보정을 더해서 ⌈증보사례편람⌋이라 하여 1900년에 다시 간행하였다.

사례편람⌋은 편술자인 이재의 명성도 있었겠지만 특색 있는 편술방법, 그리고 요령 있게 꾸며진 여러 학자들 주장의 이동(異同)과 그 고정(考正)이 있어서 사례를 행용하는 데 도움이 컸다. ⌈가례⌋의 원칙을 지키되 시속과의 묘미 있는 절충과 예의 보편성의 추구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기 마련인 예속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되고 세상에 보급된 후에 편술된 많은 사례관계의 예서는 거의 이 책에 기준하여 편술되었고, 사회에서 시용되는 예속 역시 여기에 기준하여 행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되고 이용된 예서 가운데 ⌈사례편람⌋의 이용도가 가장 영향력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실록⌋ 22년 조에 이재의 졸기가 실려 있다. 사관의 기록을 통해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지중추부사 이재(李縡)가 졸(卒)하였다. 이재의 자는 희경(熙卿)이요, 본관은 우봉(牛峯)이니, 고 상신(相臣) 이숙(李䎘)의 손자였다. 품성이 맑고 순수하며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인망이 당대에 뛰어났었다. 신축년·임인년의 화가 일어났을 적에 그의 숙부인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자 어머니를 모시고 인제(麟蹄)의 설악산으로 은퇴하여 벼슬길에 생각을 끊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을사년 경화(更化, 바꾸고 새롭게 함) 이후에는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단 한 번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을 뵙고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입을 다물고 어물어물하기만 하는 시론(時論)의 폐단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책에 뜻을 기울이고 있는 참이어서 그의 말을 등한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용인(龍仁)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에 사방에서 배우러 찾아온 자가 매우 많았고 근세의 모든 선비들이 그를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한원진(韓元震)은 선정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데 그가 심성(心性)을 논한 말이 이재의 말과 합치되지 않아서 이재가 시를 지어 변론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학자들이 도암 선생(陶菴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병순(田秉淳,1816-1890)


전병순(田秉淳,1816-1890)                                  PDF Download

 

전병순은 본관은 담양(潭陽)이고 자는 이숙(彛叔), 호는 부계(扶溪) 또는 겸와(謙窩)이다. 전석채(田錫采)의 아들이다.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조병덕(趙秉德)‧전우(田愚) 등과 교유하였다.

 

스승 홍직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출중하여 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다. 그리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오랜 교유를 나눈 오희상(吳熙常)은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고 평했다.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

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는데, 주리(主理)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홍직필의 권유로 벼슬할 기회를 가졌으나 사양하고 성리설(性理說)‧심설(心說)에 몰두하였다. 문인으로는 임철규(林哲奎)‧김낙종(金洛鍾) 등이 있다.

 

전병순은 이기(理氣)의 선후 문제는 주리(主理)‧주기(主氣)의 어떠한 시각에 입각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였다. 또한 심(心)에 갖추어진 이치를 성(性), 성이 모아진 기(器)를 심, 심성이 발한 곳을 정(情)이라 규정하였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정(情)이 발한 것으로 볼 때 주리의 입장은 사단이고, 주기의 입장은 칠정이라고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또 인심(人心)‧도심(道心)은 그 발하는 곳에 근거하여 말한 것으로서 성명(性命)에 근원하면 도심이 되고 형기(形氣)에서 생기는 것은 인심이 된다고 하였다.

대학(大學)의 명덕(明德)이 심통성정(心統性情)을 말한 것이기는 하나 심과 성은 자체로서 구별되기 때문에 심‧성을 나누어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에는 정자(程子)의 학설이 주를 이루었다. 저서에 『부계집(扶溪集)』이 있다.

 

부계집은 8권 5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913년 손자 범진(凡鎭)·익진(翼鎭)과 임철규(林哲圭)·김낙종(金洛種)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전우(田愚)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복경(金復經)의 발문이 있다.

젊은 나이에 벼슬을 단념하고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뒤에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40여 년 간 강학에 힘써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따라서 시나 문장에서도 성리학자로서 도(道)를 추구하는 의식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자연을 노래한 시에서도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원리의 탐구와 유교적 이념에 대한 지향이 깔려 있다.

 

<참고문헌>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임헌회(任憲晦, 1811-1876)


임헌회(任憲晦, 1811-1876)                                 PDF Download

 

임헌회는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송치규는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默)의 문인이다. 학문은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반궁실천(反窮實踐)을 목표로 삼았다.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1798년(정조 22) 경상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와 호조좌랑, 1801년(순조 1) 사헌부지평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180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듬해 사헌부집의, 1812년 세자시강원진선·공조참의, 1815년 시강원찬선·공조참판, 1816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당대의 거유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스승 김정묵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적(儒籍)에서 제적되었기 때문으로 전한다.

 

홍직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다.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임헌회는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 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고산문집(鼓山文集)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고제 전우는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당시의 거유(巨儒)인 신응조(申應朝)의 권고로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에게서 20년 간 배웠다. 윤치중(尹致中)ㆍ서정순(徐廷淳)과 함께 임헌회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학풍은 철저히 이이(李珥)ㆍ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1882년(고종 19) 문벌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ㆍ장령(掌令), 1906년(광무 10)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등 보직이 있었으나 다 사퇴하고 말년에는 자손들도 버리고 서해의 계화도(界火島)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고산문집⌋은 20권 10책, 속집 4권 3책, 부록 3권 3책, 합 27권 16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883년(고종 20) 임헌회의 문인 전우(田愚) 등이 편집하여 행했으며 부록은 1932년 김종학(金鍾學)이 간행하였다. 1937년 이인구(李仁矩)가 『전재문집(全齋文集)』이라는 제목으로 석판본 20권 10책을 간행했는데, 내용은 『고산문집』과 대동소이하며, 다만 편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書)는 그의 스승인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을 위시하여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 및 사우(士友) 조병덕(趙秉悳)·신응조(申應朝)·홍일순(洪一純)·김평묵(金平默)·이응진(李應辰)·소휘면(蘇輝冕), 그리고 문인 전우·서정순(徐政淳)·윤치중(尹致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주로 경전·예설(禮說)·성리설·태극·심성(心性)·이기(理氣) 등에 관한 논술이 많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김평묵과 왕래한 서한은 ‘명덕(明德)’에 대한 기본적 견해가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과 명덕주리설(明德主理說)로 차이를 나타내면서 새로운 학파적 논변으로 발전되었다.

임헌회가 명덕을 심(心)으로 파악한 점은 화서학파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명덕이 중리(衆理)를 갖추고 있으며 만사(萬事)에 응한다.”

는 점을 심(心)의 체(體)와 용(用)으로 파악하였다. 명덕은 비록 형이하(形而下)이지만, 갖추어져 있는 바의 이(理)는 곧 형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심(心)은 형이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갖추어져 있는바 소이연(所以然)으로 말한다면 형이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명덕주리·주기의 분별은 명덕의 유위(有爲)·무위(無爲)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알 수 있는데, 이(理)가 정의(情意)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명덕은 정의가 있고 지각(知覺)이 있는 물사(物事)이며 이(理)는 단지 정의와 지각이 없는 물사이다. 따라서 명덕은 주기적인 입장에서 파악해야 하며, 주기적인 입장이라고 하여 이(理)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임헌회는 심(心)을 이(理)로 파악하는 김평묵 등의 논의는 기(氣) 위에 나아가 이(理)를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명덕에 갖추어져 있는 이(理)와 명덕의 허령불매(虛靈不昧: 마음이 거울같이 맑고 영묘하여 무엇이나 뚜렷이 비추어 일체의 대상을 명찰함)한 상태를 함께 이(理)로 파악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지적하였다.

 

조병덕에게 답한 서한에서는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해

“생한 것을 성(性)이라고 이른다는 말은 대체로 생하기 전에는 성을 말할 수 없으며, 생이 있는 후에야 비로소 성이라 말할 수 있다.”

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이계(二誡)」는 부모의 상례(喪禮)를 성경(誠敬)으로 하고, 내외(內外)를 엄하게 해서 가도(家道)를 바르게 하라는 가법을 전하고 있다. 「예의쇄록(禮儀瑣錄)」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제례(喪祭禮)의 불합리한 점을 논한 것이며, 「제찬도설(祭饌圖說)」·「거상의(居喪議)」·「조주체봉의(祧主遞奉儀)」·「조주매안의(祧主埋安儀)」 등에서는 상제의식(喪祭儀式)에 관한 해설과 도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간서잡록(看書雜錄)」·「경의쇄록(經義瑣錄)」은 경전상의 난해한 어구에 대하여 제현의 설을 인용하고 고증·분석하였다. 「매산선생어록(梅山先生語錄)」은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평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전 가운데 「화망건선생전(畫網巾先生傳)」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 춘추대의를 지켜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망건선생의 일화를 기록한 글로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의 대명관(對明觀)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여기서 임헌회가 대명유민(大明遺民)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전재문집(全齋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지수(李趾秀, 1779-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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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는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이다. 형신(衡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보(熙輔)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명원(命源)이다.

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족부(族父) 병원(秉源)에게 수학하였다. 병원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으로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1809년(순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시강원사서가 되고, 1825년 옥구현감으로 나갔다. 1831년 동부승지가 되고 1840년(헌종 6) 회양부사 등을 지내고 1842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옥구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동부승지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소대(召對 : 왕의 부름에 의한 대좌)에 응하여 국가기본정책을 건의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중산재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중산재집(重山齋集)』 8권이 있다.

 

중산재집⌋은 8권 4책으로 활자본이다. 1858년(철종 9) 손자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달수(宋達洙)의 서문이 있다.

시에는 영회(詠懷), 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해인사유회고운(海印寺有懷孤雲)」은 해인사를 찾아가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을 돌아보고 옛일을 회고하는 시다. 「해금강(海金剛)」은 해금강의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서경의 표현 기교가 수준 높다.

소차는 「사승선환향겸진면학소(辭承宣還鄕兼陳勉學疏)」 등 사직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연설은 『맹자』 제3권 등을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서(書)의 「상재상(上宰相)」과 「여이판서광정(與李判書光正)」에는 회양의 삼정 문란(三政紊亂), 특히 환곡의 폐단과 읍민의 비참한 실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밖의 글들에는 정도(正道)와 문법(文法) 등에 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잡저의 「황정십조(荒政十條)」는 당시의 시정 개혁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진심(盡心)·택인(擇人)·서력(紓力)·예비(豫備)·정초(精抄)·진급(賑給)·즙간(戢奸)·금도(禁盜)·상벌(賞罰)·고적(古蹟)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한, 「가녀계사(家女戒辭)」는 여자가 출가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행동 규범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고, 「책제(策題)」는 군자와 소인의 구별 방법, 인재 등용, 목민의 중요성 등을 기술한 내용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병문(李秉文, 1826-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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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문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덕여(德汝)다. 이장현(李章顯)의 손자이며 이헌도(李憲度)의 아들로 좌의정 이헌구(李憲球)에게 입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김복순(金復淳)이다.

외할아버지 김복순은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4세손이자 부사를 지낸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권문세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다진 김조순(金祖淳)과 친형제간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황주목사, 광주목사를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 이헌구는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2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그 뒤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36년(헌종 2)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고, 1841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사헌을, 이듬해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44년 사헌부대사헌으로 김유근(金逌根)·김홍근(金弘根)의 추죄를 주장하다가 덕원부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어 사은 겸 동지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7년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49년(철종 즉위년) 이조판서, 이듬해 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852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 69세로 치사(致仕)하기를 연이어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바로 좌의정이 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판중추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를 역임하는 등 치정(治政)에 힘썼다. 70세가 되어 국가로부터 궤장(几杖)을 수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청검(淸儉)하며 근면하기로 이름났다.

이병문은 1848년(헌종 14) 5월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1864년(고종 1) 충청도감사를 지내고 1867년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예방승지를 거쳐 1870년 대사헌에 올랐다. 1874년에는 도총부도총관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4월에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부사 조인희(趙寅熙), 서장관 정원화(鄭元和)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지의금부사·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76년 재차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에 『선원보(璿源譜)』 수정에 감인위원(監印委員)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879년 다시 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의정부우참찬·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그해 12월 외직인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2년의 임기를 마친 뒤 1882년에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의 장물을 취득한 일로 인하여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아 고금도에 유폐되었다가 1884년 2월에 향리로 돌아왔고, 그해 말에 풀려났다.

 

1885년에 복직이 되어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해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5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거쳐 그 해 10월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886년 약원제조(藥院提調)를 지내고 1888년에 의정부좌참찬·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응조(申應朝, 1804-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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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응조는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유안(幼安), 호는 계전(桂田)·구암(苟菴)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상현(常顯)의 아들이다. 대유학자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다.

1852년(철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조정랑·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866년에 이조참판·대사헌, 1871년에 강원도관찰사, 1873년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2년 7월 판부사(判府事)로 있으면서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처지에 서서 사학(邪學)과 양술(洋術)을 배격하였다. 특히 인천개항은 삼남과 서북의 이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지리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최대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수교 및 통상을 제한하려는 척사적 처지를 정책적 측면에서 주장했다.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한 대원군이 우의정으로 임명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뒤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연로하여 퇴임한 뒤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문집으로 『구암집(苟庵集)』이 있다.

 

원래 『구암집』 127권이 필사본으로 가장(家藏)되어 오다가 6·25 때 없어지고 현재 전해지는 ⌈구암집⌋은 이전에 전우(田愚)가 원본에서 직접 발췌·편집하여 필사한 것으로 원집 13권 속집 7권, 재속집 8권으로 모두 28권 14책이다. 전우의 제자인 이인구(李仁矩)에게 전수되어 비장(秘藏)해 온 것을 손자인 석희(錫羲)가 대본으로 제공함으로써 1993년 평산신씨종중이 영인·간행하였다.

옥당시서진소회(玉堂時書進所懷)」는 신응조가 홍문관에 있을 때 경연(經筵)에서 철종(哲宗)을 모시고 강의한 것이다. 학문에 힘써 성군이 될 것을 당부하면서 자신의 소견을 상신하는 글이다. 서(書)는 이선영(李善永)·남공철(南公轍)·조병덕(趙秉悳)·임헌회(任憲晦) 등 당시의 명공석학들과 주고받은 서한이 실려 있다. 주로 경전(經典)과 시사(時事)에 관한 논술이 많다.

잡저는 주로 선비가 심신(心身)을 단련하여 지덕(知德)을 계발하는 수양의 덕목인 「자성(自省)」·「경타(警惰)」·「징분(懲忿)」·「지과(知過)」·「방욕(防欲)」 등이 있다. 또한 인간의 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재화를 획득하고 이용하는 과정을 논하는 「재원(財源)」·「용재(用財)」, 범죄를 행한 자에게 국가 권력이 과하는 제재에 대해 논한 「형벌(刑罰)」 등 다양한 제목을 제시한 논술이 많다.

 

속집의 잡저 81편은 78세 때 12일 동안 저술한 것으로 수필문학이다. 「비언」에서는 판부사(判府事)로 있을 때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처지에 서서 사학(邪學)과 양술(洋術)을 배격하였다. 특히 인천 개항은 삼남과 서북의 이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천이 군사·지리상의 요지이므로 큰 우려가 있음을 강조하여,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수교 및 통상을 제한하려는 척사적 처지를 정책적 측면에서 주장하였다.

설증」은 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경사(經史)를 설명하는 고증학(考證學)이다. 「설총」은 여러 학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책 가운데 「비언」은 조선 말기의 역사적 변천과정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소휘면(蘇輝冕, 1814-1889)


소휘면(蘇輝冕, 1814-1889)                                 PDF Download

 

소휘면은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순여(純汝), 호는 인산(仁山)이다. 아버지는 형술(亨述)이다.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홍직필의 문인이다.

스승 홍직필은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한 훈육을 받으며 할아버지 수구(洙榘)에게 학업을 닦아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다. 홍직필 문하에서 전병순(田秉淳)·조병덕(趙秉悳)·한운성(韓運聖)·임헌회(任憲晦)와 함께 매문오현(梅門五賢)으로 일컬어졌다.

1858년 도백(道伯)이 소휘면의 학행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1881년 선공감가감역을 제수 받았으며 곧 전설시별제(典設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1882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오직 후학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인산문집(仁山文集)』 17권이 있다.

 

인산문집⌋은 17권 8책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자세하지는 않으나 1900년에 간행된 듯하다.

서(書)는 이 문집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홍직필(洪直弼)·송내희(宋來熙)·조병덕(趙秉悳)·전우(田愚) 등 당시 이름난 학자 및 제현들과 주고받은 것이다. 대부분 경전의 내용이나 성인들의 행동에 대한 의문점, 도학의 원리에 대한 의논과 후학들의 질문에 답변한 것들이다.

특히, 조병덕·구인조(具寅祖)·조장하(趙章夏)·이선식(李善植)·권성문(權聖文) 등 기호학파 학자들과는 많은 양의 편지를 통해 학문적으로 상당히 깊이 있는 문제를 토의하고 있다. 이 중 「상숙재조장(上肅齋趙丈)」은 조병덕에게 학문을 하면서 평소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의문점을 묻고 있다. 주로 『중용』의 성(性)·도(道)·교(敎)에 대해 다루었다. 미발설(未發說)에 대해 주희(朱熹)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한 점이 주목된다.

 

잡저 중 「용현론(用賢論)」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용현이 급선무임을 주장한 것이다. 「혹인문답(或人問答)」은 어떤 사람이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 중 의심스러운 곳을 질문한 것에 답한 글로 율곡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간서차록(看書箚錄)」은 수필 형식의 짤막한 독후감으로, 수록된 내용이 다양한데, 주로 우리나라와 중국 선유들의 말이나 왕복서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 주석을 달거나 시사와 관련시켜 풀이한 글이다.

현강기문(玄江記聞)」 역시 「간서차록」과 마찬가지로 수필 형식의 글이다. 자신의 의견을 시사와 관련하여 논한 것이다. 저자의 깊고 해박한 지식과 당시 시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엿볼 수 있다. 「혼례동뢰설위도(婚禮同牢設位圖)」는 기호지방 사대부가의 혼례 상차림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인산문집(仁山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기종(朴淇鍾, 1824-1898)

 


박기종(朴淇鍾, 1824-1898)                                 PDF Download

 

박기종은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자는 공진(公振), 호는 죽포(竹圃)이다. 감찰(監察) 혁수(赫修)의 아들이다. 처음 김상철(金相轍)에게 수학했고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이기설(理氣說)에 몰두하였다.

스승 홍직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다.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숙유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과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는 주장도 반대하였다.

박기종은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사간원정언·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874년(고종 11) 시폐(時弊)를 논한 상소,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인한 국정문란의 대책을 논한 상소, 1884년 갑신정변에 대한 대책을 논한 상소를 올렸다. 내용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1890년 일본세력이 횡행함에 분을 참지 못하여 치사(致仕, 관직을 사직함)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진압에 힘썼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결연히 의병의 뜻을 품었으나 병고로 이루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죽포집』이 있다.

죽포집은 10권 4책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1912년 동문 송영술(宋榮述)·고태주(高兌柱) 및 동족 우상(禹相)·홍상(洪相)·기룡(淇龍) 등이 편집하여 간행했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사종질(四從姪) 순상(舜相), 사위 오근후(吳根厚), 족질 임상(琳相) 등의 발문과 나경성(羅經成)의 후서가 있다.

소의 「갑술봉소(甲戌封疏)」는 1874년(고종 11)에 사헌부장령으로 당시의 시폐(時弊)를 지적하여 올린 것이다. 「임오봉소」는 임오군란으로 인한 국난을 6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올린 글이다. 「갑신봉소」는 갑신정변 때의 정황을 적고 그 대책을 강구한 내용 등이다. 당시의 정세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들이다.

서(書)는 일반적인 문집처럼 경의(經義)를 논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사회상의 문제점을 논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잡저에는 『삼국지』에서 지금까지 논란거리가 되어온 인물의 평이나 주요 사건에 대한 시비를 나름대로 평한 「독삼국지(讀三國志)」와 벼슬에 있으면서 올린 서계(書啓)·관문(關文)·보장(報狀)과 일반 백성에게 내린 통문 등이 실려 있다.

금잡기(禁雜技)」는 잡기에 대한 폐해를 7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흥미 있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죽포집(竹圃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송능상(宋能相, 1709-1758)


송능상(宋能相, 1709-1758)                                 PDF Download

 

송능상은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사룡(士龍), 호는 운평(雲坪) 또는 동해자(東海子)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현손이다. 송시열의 학맥을 계승한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수제자인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문인이다.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의 학문은 제자 권상하를 거쳐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룬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다. 송시열 제자 중에는 김창협(金昌協), 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숙종 연간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 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는데,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했다. 학술적으로 그는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했다. 문하에서 공부하던 이간과 한원진을 거쳐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 발생한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입장을 견지한다.

 

한원진은 권상하의 수제자다. 자는 덕소(德昭)이고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유기(有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저서로는 『남당집』이 있으며, 편저로는 『임시취고(臨時取考)』·『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퇴계집소석(退溪集疏釋)』·『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장자변해(莊子辨解)』·『선학통변(禪學通辨)』·『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거관록』·『심경부주차기(心經附註箚記)』·『춘추별전(春秋別傳)』·『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가례소의의록(家禮疏擬疑錄)』·『가례원류의록(家禮源流疑錄)』·『고사편람(古事便覽)』 등이 있다.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과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된 한국 성리학사상의 거작이다.

주자언론동이고⌋는 6권 3책으로 1741년(영조 17)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에 착수했지만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문인인 한원진이 스승의 유업을 이어 이룩한 유학 사상의 대작이다.

한원진은 후인들이 주자의 논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도(道)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를 알기 위해서는 주자를 알아야 하고 주자를 모르고서는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므로 그 말의 처음과 끝이 한결같으나, 주자는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者)이므로 초년설과 만년설이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주자의 설에 대해 시간상의 선후와 의리(義理)라는 표준을 세우고 말은 비록 다르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통하는 것, 본래는 다름이 없는 것인데 학자들이 다르게 본 것 등으로 나누어 일일이 변정하였다. 이 책에서는 조선조 성리학의 핵심 문제들을 주자의 만년정론(晩年正論)으로 확정해 풀어나가는 것이 주목된다.

첫째, 기(氣)는 유위(有爲)로써 발동하는 것이고, 이(理)는 무위(無爲)로써 무발동이라 하여 퇴계학파의 이발(理發)을 부인하고 있다.

둘째,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둘이 모두 성의 용(性之用)으로서 정(情)이라는 이이(李珥)의 설을 확인하고 있다.

셋째,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대해서는 한원진의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넷째 이기선후(理氣先後)에 대해서는 유행의 면에서는 이기무선후이고, 본체론으로 보면 이선기후이며, 발생에서 보면 기선이후이나 이기(理氣)는 원래 선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이동기이(理同氣異)에 대해서는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이이의 입장인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이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고 나아가 본인이 주장하는 호론(湖論)을 확인하려는 목적에서 서술된 저작임을 보여준다.

송능상은 1739년(영조 15) 5월 송인명(宋寅明)이 왕세자를 가르칠 적합한 인물로 다섯 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중 한 명에 들어 시강원 자의가 되었다. 이듬해 3월 춘추의리를 강조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의리를 논하였다. 1744년 이후 여러 차례 장령에 임명되었다.

 

1750년 정우량(鄭羽良)이 우리나라의 도통(道統)에서 김장생(金長生)을 넣지 않고, 윤증(尹拯) 부자를 언급하자 노론의 입장에서 도통에 대하여 아뢰었다. 1752년 8월과 12월에 계속 장령에 임명되었고 1754년과 1755년 두 차례 집의에 임명되었다. 1758년 묘향산에 들어가서 『대학』을 강론하다가 객사하였다. 자품이 고매하고 규모가 정대하였다고 한다. 경학·예학 등에 밝았다. 저서로는 『운평문집』이 있다.

 

운평문집』은 문학적인 면보다는 학술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시 역시 학문적인 제재가 많다. 서(書)에는 스승 한원진(韓元震)을 비롯해 윤봉구(尹鳳九)·이재(李縡)·임성주(任聖周)·송환기(宋煥箕) 등 노론 학자들과 학문에 관하여 문답한 서한이 많다.

기의 「종회사사실기(宗晦祠事實記)」·「종회사이건기(宗晦祠移建記)」는 송시열(宋時烈)이 청주 화양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자들을 훈도하던 곳에 김천택(金天澤)·민익수(閔翼洙) 등이 세운 사묘(祠廟)인 종회사에 관한 기록이다. 종회사는 송시열이 정계에 등장하기 전의 복거지(卜居地)인 동시에 말년에 퇴거한 곳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송시열의 족적을 살펴보는 데 참고가 된다.

간서잡록(看書雜錄)」은 『악기(樂記)』·『맹자』·『장자(莊子)』에 관한 연구서로, 도량형에 관한 자의(字義)를 고증해놓은 것이 있어 흥미를 끈다. 규(圭)·촬(撮)·초(抄)·작(勺)·합(合)과 되[升]·말[斗]·섬[石] 등 양(量)에 관한 단위, 서(黍)·누(絫)·수(銖)·냥(兩)·근(斤)·균(勻)·석(石) 등 무게의 단위가 고증되어 있어 도량형 연구에 도움이 된다.

독례수차(讀禮隨箚)」는 『의례』에 관한 규정을 초록해놓은 것이다. 「제목주의(題木主議)」는 『가례』에 관한 의논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비래강록(飛來講錄)」은 『대학』에 대한 제자 문흠(文欽) 등의 문의에 답변한 강의록이다. 「독서법(讀書法)」에서는 글을 읽는 방법으로서 삼도(三到)·삼요(三要) 및 문장구조의 형태법 설명인 십이법(十二法)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