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 관리의 폐단과 해결책


병사 관리의 폐단과 해결책

 

선조 시대의 군정(軍政)에서 또 한 가지 문제점은 병사 관리가 체계적하지 못하고 병사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율곡은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했다.

“(계축년, 즉 1553년 이후) 지금 20여 년 만에 다시 군적(軍籍)을 만드는 큰 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부족한 군졸의 숫자가 계축년보다도 심하고 병역 의무자(閒丁)의 숫자 또한 계축년보다 훨씬 적다. 아무리 교묘하게 찾아 모은다 해도, 어찌 밀가루 없이 수제비를 만들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군졸을 만들어 내겠는가라는 의미임-필자) 지금 다시 샅샅이 조사해서 찾아 낸 자들은 아이들이 아니면 거지고, 거지가 아니면 양반 사족(士族)일 것이다. 실제로 아직 군역에 나가지 않은 장정이 몇이나 있겠는가? 지금 군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금방 또 빈 장부가 될 것이다.”

 

왜 군졸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었을까? 율곡은 앞서 제출한 ⌈동호문답⌋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은 거꾸로 매달린 것보다 더 심해서, 만약 급히 구제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텅 빌 형세다. 나라가 텅 비게 된 뒤에는 눈앞에 닥친 수요를 어느 곳에서 마련하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이르고야 마는 이치다. (관청에서 새롭게 군적을 만들 때) 군인의 수를 줄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그만큼의 군인이 있어야 쓸 때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청에서 가끔 인구조사를 하여 군적을 만드는데 그 군적은 허위로 사병수를 부풀려 만든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너무 곤궁하여 각 지방의 공동체, 즉 농촌 마을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청에서는 허위로 사병을 늘린 뒤에, 그 사병들의 몫에 해당하는 면포를 그 일족에게 부과하여 징수한다. 그래서 율곡은

“만약 급하게 군대를 출동하는 일이 있게 되면, 친척들이 창을 메고 나서지 못할 것이고, 군포로 받은 면포를 가지고도 끝내 사람을 모집하지 못할 것인데,(그것은 마을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필자) 무엇 때문에 허위의 장부를 만들어 백성들이 실제로 피해를 당하게 하는가?”

라고 물었다.

 

이렇게 전쟁이 나도 농촌마을에서 병사를 징집할 대상이 없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율곡은 다음과 같이 ‘일족절린(一族切鄰, 당사자가 없을 때 친척과 이웃에게 세금을 대신 부과하는 일)’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가령 지금 여기에 세금 때문에 도망친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 때문에 반드시 그 친척과 이웃에게 그의 세금을 거두고, 친척과 이웃이 감당할 수 없어 또 도망치면, 다시 그 친척의 친척과 이웃의 이웃에 부담시킨다. 이렇게 한 사람이 도망치면 재앙이 수천 가구까지 파급되어 그 형세는 반드시 백성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된 뒤에야 그칠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10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10가구도 없고, 작년에는 1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한 집도 없게 되었다. 마을이 쓸쓸해지고 민가의 밥 짓는 연기가 아득히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만약 이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본이 뒤집어져 나라가 존립하지 못할 것이다.”

 

연좌제 같이 마을 안에서 한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주위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일족절린(一族切鄰)의 폐해 때문에 지방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관청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동책임을 물었던 것은 범죄를 미리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없애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더 많은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면 근무지에서 근무해야할 사람들이

 

“일부러 도망가 전부 군역을 기피하여 군인의 수가 끝내 한 사람도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동호문답⌋)

 

율곡은 이렇게 대답한다.

“백성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모두가 절박하여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이다. 저들이 비록 간사할지라도 만약 생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기꺼이 취하겠는가? 만약 일족절린(一族切鄰)의 관습으로 피해를 당할 근심이 없고 자신의 군역만 책임지게 된다면, 백성들이 삶을 편안하게 여기고 생업을 즐기는 것이 마치 물에 빠지고 불에 탄 고통에서 빠져나온 것과 같을 것이다. 어찌 모두 군역을 기피할 이치가 있겠는가?”

(⌈동호문답⌋)

 

그래서 우선 율곡은 이러한 ‘일족절린’의 폐해를 과감히 없애고 현실에 입각하여 정확한 군적을 만들자고 제한했다.

“군적(軍籍)을 만드는 일을 실제의 군인 수를 확보하는 데 힘써야지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 병역 의무자(閒丁)라고 할지라도 15세가 안 된 소년들은 이름과 나이만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해당되는 나이가 되면 군적에 편입해야한다. 날품팔이나 거지는 모두 군적에서 삭제해야 한다.”

(⌈만언봉사⌋)

 

동호문답⌋에서도 군적을 정확히 만들어야 한다며, 이렇게 상세하게 제안했다.

“마땅히 각 고을에 명령을 내려 장부에 올라 있지 않은 장정을 찾아내 모자라는 군사에 충당하고, 장부에 올라있는데도 입대하지 않은 인원을 모두 차출해 정규군에 보충해야한다. 나아가 새로 설치된 부대인 위(衛)의 경우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는 자와 한역(閒役, 힘들지 않은 부역) 장부에 이름이 들어있어 관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자를 제외한 인원을 모두 찾아내어 군역에 충당해야한다. 군사를 담당한 관원으로 하여금 그 사무를 총괄하게 하여 반드시 실제의 수효를 파악하게 하면, 비록 군적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지 않더라도 군적은 이미 완료가 될 것이다.

그런 뒤에 한정(閑丁, 부역을 하지 않은 장정)을 찾아내어 발견 되는대로 보충을 하고, 매번 세초(歲抄)할 때마다 지방 관청에 명하여 군적(軍籍)을 병조(兵曹)에 올리게 하고 그에 따른 장부는 해당 관청에 올리게 하여, 다만 실제 숫자만 기록하고 허위 명단은 다 지워버려야 한다.”

(⌈동호문답⌋)

 

동원 가능한 장정은 모두 정확히 차출하여 활용하고, 그렇지 못한 장정은 명단에서 제외하여 군적이 정확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그동안은 군적을 통해서 현상 파악이 불가능 하였던 것이다. 부조리는 바로 그러한 틈으로부터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막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또 이렇게 제안했다.

“수령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생활을 안정시키며 부지런히 그들의 수고를 위로하도록 하고, 장정이 생기는 대로 군적에 보충시키되, 일정한 기한을 정하지 않더라도 꼭 채우도록 해야 한다. 또 6년마다 반드시 군적을 고쳐서 갑자기 생기는 소요(騷擾)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

(⌈만언봉사⌋)

군적이 정확해야 병사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수시로 군적의 정리를 제안한 것이다. 평소에 그러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갑자기 일어나는 사태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동호문답⌋에서는 수령들이 해야 할 업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좀 더 상세하게 제안했다.

 

“만일 한정(閑丁)을 잘 찾아내어 10호 이상을 증가시킨 수령(守令)은 상을 주고, 새로 도망하는 집이 생겨 그 수효가 축소되어 5호 이상이 감소시킨 수령은 죄를 주되 파직하거나 강등시키고, 심한 자는 죄를 무겁게 주며, 늘고 줄어든 것이 같은 자는 불문에 붙이고, 3년간 고을을 다스렸으나 호구의 증가가 없는 자에게도 죄를 준다.

또 어사로 하여금 암행하게 하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 수령의 현명함을 살피도록 한다. 만약 전과 같이 사사롭게 일족절린(一族切鄰)이 있거나 호구를 거짓으로 증가시켜 포상을 노리는 자가 있으면, 곧 뇌물죄의 법률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동호문답⌋)

 

율곡은 이렇게 실행을 하면 ‘수령들은 법을 두려워해서 마음을 다하여 백성을 보호할 것이니, 10년 못가서 백성들의 생활은 넉넉해질 수 있으며 군사의 수는 충족될 수 있다.’(⌈동호문답⌋)고 단언하였다.

그는 그래도 병사들이 부족할 경우에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기도 했다.

“만약 병사들이 부족하여 여러 곳의 군역에 대응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현재 자신의 차례가 되어 교대 근무를 하러 들어가는 병사들의 수를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때는 방비가 허술해도 큰 지장이 없는 곳의 군졸의 수를 줄이면 된다. 그래도 부족한 경우에는 남쪽 지방의 겨울철에 요충지를 방비하는 병사들의 수를 적절히 줄이고, 그래도 부족할 경우에는 면포를 바쳐 병역을 면제받는 보병(步兵)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군사적 요충지를 방비하는 병사의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게 해야 한다.”

 

이상이 율곡이 제안한 군적(軍籍)과 병사를 관리하는 요령이며,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제안을 통해서 우리는 율곡의 개혁 정신을 잘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군정(軍政)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복잡한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군정(軍政)을 개혁해야한다


군정(軍政)을 개혁해야한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백성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 사항을 제시했는데, 맨 마지막으로 군사와 관련된 정치를 제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군정(軍政)을 개선하여 안팎으로 방비를 굳건히 해야 한다.  (改軍政, 以固內外之防.)”

 

만언봉사⌋는 율곡이 1574년에 지어 올렸기 때문에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18년 전의 일이다. 선조가 이때부터 율곡의 제안에 따라 군정(軍政)을 개혁했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발생하였더라도 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이 압록강 부근까지 도망가는 사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율곡은 군정의 개혁에 대해서 대략 4가지 사항의 문제점을 나열하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한다.

2)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

3)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

4)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

 

이하 각 항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한다.

율곡은 우리나라 법제에 결함이 많다고 하면서 다음 사항을 지적했다.

 

“(법에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벼슬을 설치해 놓고 그들이 먹고살 녹봉은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병사(士卒)들을 통하여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 변방의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하는 폐단은 여기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국법이 느슨해지자 탐욕과 포악한 짓이 더욱 성행했다.”

 

또 장수를 뽑을 때도 공정하게 선발하지 않고 뇌물을 통해서 장수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장수가 된 사람들은 자격이 미달된 사람들이 많아, 병사들을 도구 삼아 착취하고 그 돈으로 더 높은 자리로 출세하는 것만 신경을 썼다. 국방은 염두에 없었다. 율곡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현장에서 착취를 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병졸들 가운데 근무가 힘들다고 여겨 대신 면포(綿布)를 바치고 면제받으려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장수는) 기뻐하면서 그것을 허락한다. (중략) 사람이 목석이 아닌 이상 누군들 자신을 아끼지 않겠는가? 면포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받은 자들이 자기 집에 편히 누워있는 것을 보면, 부러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고 그들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병역 근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늘어나 수비를 해야 할 진(鎭)과 보(堡)가 비게 되면, 상부에서 조사 나올 때 근처에 사는 백성들을 꾀어서 가짜로 점호(點呼)를 대신 받게 한다. 지역을 순시하며 검열하는 관리는 그 숫자만을 조사할 뿐이니, 그 누가 진짜와 가짜를 따지겠는가?”

 

실지로 나라를 지켜야할 병사들이 제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병사들은 군역(軍役)에 징발될 양인들이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군역에 차출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뇌물을 주어서라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장수들은 그것을 봐주고 뒷돈을 받았던 것이다. 그 돈으로 장수들은 자기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어서 율곡은 그러한 폐습이 어떻게 백성들의 안위를 위협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복역을 면제받는 것이 비록 편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대신하는 면포를 마련하는 일도 어렵다. 그래서 병역 근무에 여러 번 걸리면 집안 살림이 바닥나 지탱할 수가 없어, 도망치는 자들이 계속 생겨난다. 그 다음 해에 장부에 있는 숫자대로 병역 근무를 독촉하면, 해당 고을에서는 도망간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서 한 사람을 대신 응하도록 하고, 그 사람이 또 도망가면 그 친척의 친척에게까지 근무를 하도록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병역근무를 담당하는 백성들은 피해가 커지는 것이다. 반대로 뇌물로 장수가 된 뒤에 병사들을 쥐어짜 뇌물을 거둬들인 자들은 부자가 되어 처첩(妻妾)을 두고 생활하며 또다시 권문세가에게 뇌물을 바쳐 더 많이 해먹을 수 있는 높은 자리로 승진을 꾀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율곡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모든 병영(兵營)·수영(水營)·진(鎭)·보(堡)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을의 장부에 올라 있는 것 이외의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변방 장수의 양식으로 넉넉하게 제공해야 합니다. 만약 그 고을의 곡식만으로 부족하면 이웃 고을의 곡식을 거두어서라도 반드시 변방의 장수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장수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착취를 하고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율곡은 지적하고 개선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생계가 가능하게 한 뒤에는, 조정에서 법을 엄격하게 정하여 장수들이 병사들로부터 한 톨의 쌀이라도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변방 군대의 검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개선책을 제시했다.

 

“검열할 때는 단지 군사들을 호명하여 부재자의 유무를 조사하는 일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무기 상태를 검열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시험해서, 군사들의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못한지를 가지고 지휘관의 성적을 매겨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전처럼 재물을 받고 병사를 풀어놓아 보냈다가 발각되면 뇌물죄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당시 변방의 장수들은 생계를 위해서도 백성들로부터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은 허위 근무자 명단을 만들어서까지 뇌물을 받았으니 국방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국방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깝게는 국방을 튼튼히 하는 일이고 멀리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2)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

 율곡은 병사들의 근무지가 자기 고향에서 너무 먼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보았다.

 

“(조정에서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병사들을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근무하게 하지 않는다. 가는 데 며칠이 걸리는 곳에 보내기도 하고, 혹은 천리 밖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곳의 풍토에 익숙지 않아 병에 걸리는 자들이 많다.”

 

그는 병사들의 근무지가 자기가 살던 곳에서 매우 먼 곳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는데도 시일이 걸릴 뿐만 아니라, 병에 걸리는 자들도 많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율곡은 병사들이 현지에 있는 “장수의 학대에 떨고, 또 그 지방 토박이 병사들의 횡포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객지에서 추위와 고통을 겪고 굶주리는 것과 배를 채우는 것도 일정치 않는데, 남쪽지방 출신 군인으로서 북쪽 국경에서 근무를 서는 자들의 경우는 고생이 더욱 심해, 여위고 병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여 얼굴빛은 제 색깔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이 적군을 만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내세울 경우 비용도 많이 든다. 그 점에 대해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황해도 기병으로 평안도에 가서 경비 근무를 서는 사람의 경우, 그 군역을 대신할 사람 한 명을 보내는 비용이 면포 30필∼40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 정도의 면포라면 시골에 사는 백성 몇 가구가 생산해야 하는 양이다. 한 명이 가면 반드시 몇 가구가 파산을 하게 되니, 어찌 궁지에 몰리거나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무지가 너무 멀어 발생한 문제점이다. 그래서 율곡은 해결책으로, 군사 요충지 주변에서 군역을 담당할 병사들을 모아야 한다고 하였다.

 

“전략상 요충지에서 경비근무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고을 출신의 병사들을 모아서 거느려야 한다. 만약에 그 고을 출신의 병졸이 부족할 경우에는 인근 마을에 배정해서 차출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전략상 요충지에서 복역할 때는 그에게 부과되는 여러 종류의 부역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요충지에서 방비하는 군역만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먼 곳에 와서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순번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해야 한다.”

 

율곡은 위와 같이 요충지 인근의 인력을 활용할 것을 건의하고 동시에, 국경지방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만약 국경의 경비가 허술해질까 걱정된다면, 국경의 수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 된다. 그리고 3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아 화살을 많이 적중시키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고, 두 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그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만약 다섯 번이나 일등을 차지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군졸의 경우는 군관(軍官)으로 특별히 임명해야 한다.”

 

요충지 인근의 백성들에게 군사 기술을 가르쳐 활용하는 방안이다. 3개월 마다 시험을 봐서 잘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거나 부역을 면제해주고, 그 중에서도 더욱 잘하는 자들은 군관으로 발탁을 하도록 건의하였다. 노비가 만약에 그러한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천민 신분을 벗어나게 해줄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준비를 한 뒤에, “만약 적이 국경을 침입한다면 사람들은 제각기 스스로 지킬 것인데, 누가 힘써 싸우지 않겠는가?”하고 물었다.

 

 

3)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

조선시대에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평민 성인 남자, 즉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良人)은 두 가지 부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병역의무인 군역(軍役)이고 다른 하나는 일시적으로 토목공사나 물자 수송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이다.

율곡은 이전에 ⌈동호문답⌋에서 이러한 부역이 공평하지 않게 운영되고 있다고 ‘역사불균(役事不均, 부역이 고르지 않음)’의 폐단을 지적한 바 있다.

 

“(관청에서는) 지금의 이른바 정군(正軍, 정병正兵이라 칭하기도 함)·보솔(保率, 정병이 거느리던 병사)·나장(羅將)·조례(皀隸) 등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당번으로 세우기도 하고, 2번으로 나누어 세우기도 한다. 혹은 3번, 6번, 7번까지 거듭 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자는 그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도망쳐버리고, 어떤 자는 조금 편안한 생업을 얻어 자신을 보전하고 있다. 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 서로 간에 차별을 두어 괴로움과 즐거움이 같지 않게 하는가?”

(이종란 역해, ⌈동호문답⌋, 율곡연구원, 2016년 참조)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 그는 ‘해당 관청이 잘 판단해서 규칙을 정하여 순번이 많은 자는 횟수를 줄이고 적은 자는 늘여야 한다. 모든 부역을 순번대로 번갈아 쉬게 하고 골고루 근무하게 하여, 누구는 너무 괴롭고, 누구는 너무 편안한 폐단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도망간 백성들이 다시 모이고, 권세 있는 집안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들어가 부역을 피하는 잔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공평하지 못한 부역의 의무를 시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부역제도에 대해서⌈만언봉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양역(良役, 양인들의 부역, 즉 요역과 군역)은 그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조례(皁隷)와 나장(羅將)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큰 고역을 치르고 있다.”

 

매우 많은 명목의 부역 중에서 군역에 해당하는 조례(皁隷)와 나장(羅將)의 직책에 부조리가 많다는 것이다. 조례(皁隷, 혹은 皀隸)는 서울의 각 관아에서 부리던 하급 군관을 말한다. 나장은 나졸(羅卒)이라고도 하는데 병조에 속한 하급 직원이다. 그런데 일반 평민이 교대로 그 직책의 군역을 담당한다.

율곡의 지적에 따르면 실지로 그런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평민은 대신 면포를 납부한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부조리가 있다고 한다.

 

“(조례나 나장이) 소속된 관아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이 대신 군역을 치르도록 처리해 놓고 갑자기 저리(邸吏, 서울에 파견된 향리)를 독촉하여 대역의 빚을 갚게 한다. 이 때 저리(향리)는 이자를 따져서 바친 뒤에 거기에 든 기타 비용까지 계산하여 당사자에게 그 세 배를 받아낸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언제나 세 사람의 군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면 관행대로 일족에게서 그것을 받아낸다.”

 

조선시대에는 일곱 가지 종류의 천인(賤人)들이 있었다. 직업으로 구분하면 중, 무당, 백정, 노비, 기생, 상여꾼 그리고 신발 만드는 기술자(鞋匠)였다. 그런데 관청의 경호나 경비 등 잡일을 하는 조례(皁隷)나 죄인의 압송이나 매질을 담당하는 나장(羅將)도 그런 천인에 속했다.

그래서 일반 평민이 서울의 조례나 나장이라는 직책의 군역을 맡게 되면 실지로 그 일은 하지 않고 면포만 대신 냈다고 한다. 그런데 중간에서 향리가 그 일을 주선하면서 3사람분의 면포를 받아간다.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 그 대책으로 율곡은 다음과 같이 선조에게 제안하였다.

 

“이른바 조례(皁隷)나 나장(羅將) 등은 제각기 소속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이름을 다 폐지하여 모두 보병으로 바꾸십시오.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납부하는 면포는 병조(兵曹)에 직접 납부하게 하고, 병조에서는 각 관청에서 부역을 치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면포를 지급한다면 그러한 폐단이 사라질 것입니다. 저리(邸吏)는 불시에 독촉받는 일을 면하게 될 것이며, 민간에서는 세 배나 되는 가혹한 양의 면포를 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안 중 하나로 율곡이 제시한 군정의 개혁안이었다. 향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넘기지 말고 직접 중앙 관청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병조에서 직접 ‘부역을 치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면포를 받고 지급하는 일을 처리함으로써 백성들이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다음으로 ‘4)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라는 항목은 율곡이 앞서 제시한 ⌈동호문답⌋에서도 병사 관리 문제를 상세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별도로 장을 만들어 같이 소개하기로 한다.

노비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노비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율곡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로 노비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가 지적한 노비제도는 노비제도 전체가 아니라 ‘선상(選上)’이라고 하는 제도였다. 당시 관청에는 관노비가 있었는데, 지방 관청의 관노비를 일부 선발하여 중앙 관청의 관노비로 일을 하게 했다. 그렇게 선상을 통해서 중앙의 관노비가 된 사람들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노비제도 자체도 문제지만 율곡의 인식은 거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이며 지식인이었던 그였지만 시대에서 오는 한계는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단지 율곡이 현실에 맞지 않고, 백성들의 삶을 옥죄는 제도는 과감히 고치자고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 관청의 노비(奴僕)만 가지고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지방에 있는 관노비들이 돌아가면서 서울에 올라와 일을 돕도록하는데 이것을 선상(選上)이라 부른다.”

 

지방 관청의 노비가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면 그 자체로 아무런 고통은 없을 것이다. 요즘에 지방의 공무원들이 서울에 올라와 근무를 하게 한다면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오는 가난한 관노비들이 자기가 먹을 양식을 싸 가지고 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당하는 고통이 많아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서 면포를 바치는 것으로 노역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단지 면포를 징수할 뿐이고, 서울로 올라 와서 노역을 치르는 공천은 한명도 없다.”(⌈만언봉사⌋)

 

서울에 머물며 근무하면서 관노비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단지 면포(綿布)를 내는 것으로 그 노역을 면제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노비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율곡은 관노비들이 2년은 부역을 하고 1년은 선상을 치르다, 대체로 3년이 되면 반드시 한 집은 망한다고 하였다. 집안이 망하면 유랑민으로 떠돌거나 도적이 된다. 율곡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을 맡은 관아의 아전들이 선상 대상자를 나누어 배정하는 것도 공평하지 못하다. 비록 관노비의 수가 많은 고을이라도 뇌물을 주면 적게 배정하고, 겨우 몇 가구만 있는 고을이라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많이 배정한다. 지탱할 힘이 없으면 그 침해가 일족에게 미쳐, 일반 백성들까지도 고초를 당한다.”  (⌈만언봉사⌋)

 

아전들의 횡포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아전들은 관청에서 실무를 맡는 최하급의 관리다. 원래는 지방의 호족들이었으나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지방 세력을 형성하다, 조선시대에 중인계층으로 관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지위는 세습되었는데, 과거시험에서 문과를 볼 수 없어서 고급관리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있었다. 그들은 급여가 거의 없거나 아주 적었기 때문에 부정부패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율곡은 ⌈동호문답⌋에서 아전의 횡포를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세상의 도리가 땅에 점점 떨어지고 폐단이 날로 늘어나 교활한 관노비나 약아빠진 아전들이 온갖 물건을 사사로이 준비해 두고 관청을 우롱하고 백성을 가로막아, 백성들이 비록 좋은 물건을 가지고 와도 끝까지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반드시 자기들이 사사로이 준비해둔 물건을 대신 납부한 뒤 백성들에게 백배의 값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법이 무너지고 해이해져 금지하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으며, 나라의 비용은 조금도 늘지 못하고 민간에는 살림이 텅 비게 되었다.”

(이종란 역해, ⌈동호문답⌋, 율곡연구원, 2016, 142-143쪽.)

 

이것은 방납의 폐해이다. 그 외에도 율곡은 당시 아전들의 횡포에 대해서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단이라 하여 이렇게 소개했다.

 

“권력을 휘두른 간신들이 나라의 물을 흐린 뒤로 상하 사람들이 오직 뇌물만을 일삼고 있다. 관직은 뇌물이 아니면 승진하지 못하고 소송도 뇌물이 아니면 판결이 안 나며 죄도 뇌물이 아니면 사면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관료들이 법도가 아닌 것만 배우고, 아전들까지도 법조문을 가지고 농간을 부린다. 그리하여 백성이 온갖 물건을 관청에 납부할 때에 좋은 물건인지 나쁜 물건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많은지 적은지도 계산하지 않으며, 오직 뇌물의 등급으로 판단한다. 심지어 관청의 일개 하인이나 노비까지도 조금이라도 일 맡으면 금방 착취를 일삼는다. 이뿐만 아니라 소송이라는 중대한 일도 역시 교활한 아전의 손에 맡겨져 뇌물에 따라 옳고 그름이 가려지니, 이것은 참으로 정치를 혼란시키고 나라를 망치는 고질병이다. 지금은 권력을 휘두른 간신들이 이미 제거되고 공론이 조금은 시행되고 있어 조정에서는 옛 습속이 약간 고쳐졌다. 하지만 아전들의 간사함은 이전보다 더 심하다.” (⌈동호문답⌋)

 

이서주구(吏胥誅求)’의 ‘이서(吏胥)’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속해 있는 하급 관리를 말하며, ‘주구(誅求)’란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일을 뜻한다.

이러한 아전들에게 신상의 제도는 뇌물을 받기에 딱 좋았다. 아전들은 중앙에 보낼 선상의 대상자를 배정할 때, 마음대로 그 수를 정했다. 뇌물에 따라 배정을 조정하는 것이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일반 백성들까지 연계시켜서 선상의 책임을 전가하였다. 율곡은 그래서 임금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해당 관청에 명하시어 노비 장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현존하는 관노비의 수에 근거하여, 매년 남자 노비가 바치는 면포 두 필과 여자 노비가 바치는 면포 한 필 반의 총계가 얼마인지를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그 5분의 2는 면포를 관장하는 사섬시(司贍寺)에 비축하여 나라의 비용으로 쓰게 하고, 5분의 3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어 선상으로 해결하던 노역에 충당하게 하십시오. 면포가 부족할 경우에는 알맞음을 헤아려 노역하는 수를 줄이게 하십시오.”

 

먼저 관노비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그 노비들이 바치는 공물의 수량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에 중앙에서 필요한 인력이나 비용을 예상하여 관노비 징발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중간에서 아전들이 멋대로 장부를 조작하는 일이 불가능해서 아전들의 횡포를 방지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계유지가 어려워서 부정을 저질러야 하는 아전도 문제지만, 각 관청에 소속된 노비의 숫자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조정도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선상 제도로 차출되는 관노비이며 우매한 백성들이다. 율곡은 이런 노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정이 현실적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참고로 조선의 아전들이 그렇게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국가에서 봉급을 받지 못했다. 율곡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농사짓는 것을 대신할 만한 녹봉을 지급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옛날에는 관청의 아전들이 일정한 녹봉을 위로부터 받아먹었는데 지금 아전들은 따로 녹봉이 없으니, 만일 수탈을 하지 않으면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제도가 아직 완비되지 못한 것이다.”(⌈동호문답⌋)

 

아전들이 그렇게 뇌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봉급을 제공하고, 그들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뇌물죄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폐단을 고치려면 모든 관료를 엄하게 단속하고 뇌물죄를 다스리는 법을 거듭 밝히며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야 한다. 그래서 조정이 숙연해지고 사람마다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해야 한다. 그런 뒤 수탈하고 뇌물을 받는 습관을 일체 금지하고, 숨기고 감춘 것을 적발하여 그 실정을 파악하고, 백성들이 호소하는 것을 허락하며 그 억울함을 살펴야 한다. 만약 아전이나 사령의 무리가 뇌물을 받았거나 수탈하여 그 사실이 발각되면, 그 수량이 베 1필 이상인 경우에는 모두 전가사변(全家徙邊)의 형률로 다스려 변방에 있는 6진의 빈 땅으로 보내 그곳을 채우도록 한다. 그러면 뇌물을 받는 습속을 완전히 씻을 뿐만 아니라, 장차 국경을 튼튼히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동호문답⌋)

 

율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이와 같이 노비제도를 개선하고 그러한 제도를 악용하여 뇌물을 받는 아전의 봉급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제도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상황의 심각성 때문이었다. 그가 당시 어떻게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동호문답⌋의 문장 중에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의 정치를 바꾸지 않는다면, 비록 요순 같은 성군이 있고 고요(皐陶)나 기(夔)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다하더라도 장차 일어날 혼란을 다스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백성들은 반드시 썩은 생선처럼 문드러지고 흙처럼 무너질 것이다. 거기다 크게 걱정할만한 것이 또 있다. 지금 백성들의 힘을 헤아려보면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숨을 할딱거리고 있는 것 같아 평일에도 버티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다가 만약에 남쪽이나 북쪽에서 외적이 침입해온다면, 장차 분명히 빠른 바람에 낙엽이 휩쓸리듯 무너질 것이다. 백성은 그만두고라도 종묘사직이 어디에 의탁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통곡이 나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미 조선 사회는 내부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궁중의 사치 풍조를 바꿔야 한다


궁중의 사치 풍조를 바꿔야 한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선조 임금에게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도록 요구하면서 ‘사치 풍조를 바꿔야 한다(革奢侈之風).’고 요구했다. 여기에서는 그 ‘사치 풍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율곡은 왜 사치 풍조를 바꾸자고 했을까?

혁사치지풍(革奢侈之風)’에서 동사로 사용된 ‘혁(革)’자는 ‘개혁하다’, ‘바꾸다’는 뜻 외에도 ‘고치다’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사치 풍조를 고쳐야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사치 풍조를 고치자는 말은 이미 사치 풍조에 젖어 있다는 뜻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오늘날 백성들이 궁핍하고 그들의 재물이 바닥난 것이 너무 심하다. 그러니 공물(貢物)을 경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비용지출을 선대 임금들처럼 하지 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된다.”

(이종란 역해, ⌈만언봉사⌋, 율곡연구원, 2016년, 173∼174쪽 참고. 이하 같음)

 

율곡은 백성들의 상황이 몹시 궁핍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물을 경감시켜주자고 한다. 또 비용지출을 더 줄여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비용지출이란 당연히 궁정 내부의 비용지출을 말한다. 그는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사치하고 문란한 풍속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놓고 서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었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경쟁하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음식 한 상 차리는 비용으로 굶주린 사람의 몇 개월 양식을 마련할 수 있고, 옷 한 벌의 비용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다.”( ⌈만언봉사⌋)

 

이렇게 음식과 옷의 사치와 낭비는 반드시 궁중에 한한 일은 아니겠으나 율곡의 지적은 궁중 내부를 향한 것 같다. 예를 들면 ‘음식 한 상 차리는 비용’이 굶주린 사람 몇 개월 양식이라고 하고, ‘옷 한 벌의 비용’으로 사람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러한 음식과 옷은 궁중의 음식과 옷을 말하는 것이다.

율곡은 이전에 제출한 동호문답에서도 궁중에 진상(進上)하는 공물(貢物), 즉 지방의 특산물이 너무 많다고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요즘 궁중에 올리는 물건은 반드시 모두 궁중에 올리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자질구레한 물건도 다 바치려고 바다와 육지에서 생산되는 것을 빠짐없이 긁어모으고 있으나, 임금의 밥상에 올릴 만한 것을 제대로 고른다면 몇 가지가 안 된다. 옛날에 훌륭한 왕(聖王)은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렸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들게 하지 않았다. 궁중에 올리는 물건 하나하나가 모두 바치기에 적합하더라도 그 수를 줄여서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줘야 한다. 더구나 급하지도 않은 수요 때문에 백성에 해를 끼쳐서야 되겠는가?”(⌈동호문답⌋)

 

실지로 임금의 필요는 많지 않으나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욕심을 내서 지방의 특산물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 말이다.

율곡은 이러한 발언이 자칫 임금을 받드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을 초래할 수 있어, 다음과 같이 변호하는 글을 ⌈동호문답⌋에 같이 실었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큰 도리를 가지고 임금을 사랑하지 작은 정성으로 하지 않는다. 만약 나라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하고 인구가 번성하면 우리 임금의 소득도 많아질 것이다. 어찌 자질구레하게 물건이 늘거나 줄어드는 것이 우리 임금에게 손해나 이익이 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순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였다. 이는 천자의 귀한 몸으로도 칠기를 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순임금 시대의 여러 신하들이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순임금은 천하의 성스러운 임금이 되었고 순임금의 신하들은 천하의 훌륭한 신하가 되었다.”(⌈동호문답⌋)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궁중의 사치가 백성들의 고통을 초래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열 사람이 농사를 지어도 한 사람을 따로 먹여 살리기가 부족한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다. 열 사람이 길쌈을 해도 한 사람의 옷을 따로 마련하기가 부족한데, 길쌈하는 사람은 적고 옷을 입는 사람은 많다. 그러니 무슨 수로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어 추위에 떨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만언봉사⌋)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또 율곡은 길쌈, 즉 옷을 짜는 일이 쉽지 않아 10명이 달려들어 옷을 짜도 한사람 입히기가 힘든데, 옷은 짜지 않으면서 입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한다. 이는 생산하는 사람에 비해 소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며, 그만큼 궁중의 소비가 극심하다는 뜻이다. 율곡은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만약 전하부터 먼저 절약과 검소에 힘써 이 병폐를 해결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형법이 엄하고 명령을 부지런히 내린다 하더라도 도로무익(徒勞無益, 수고롭기만 하고 실익이 없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 원로(元老)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성종(成宗)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 대신이 문안하러 들어가니, 침실 안에서 덮고 계신 다갈색 명주 이불이 다 해어져 가는데도 새것으로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들은 지금까지도 성종임금을 흠모(欽慕)하는 생각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만언봉사⌋)

성종(成宗, 1457년∼1495년)은 제9대 왕으로 1469년부터 1494년까지 재위하였다. 선조는 제14대왕으로 1567년부터 1608년까지 재위하였으니 선조보다, 약 100년 전에 임금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유교 사상에 조예가 깊어 초야에 있던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고, 성리학에서 지향하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율곡은 성종 때의 검소한 생활을 예로 들며 선조에게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부탁하였다. 임금부터 먼저 그렇게 하여 사치스러운 병폐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형벌이 엄하고 왕명을 부지런히 내려도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결국 율곡이 말한 절약과 검소는 선조 임금 본인에 대해서 하는 말이요, 음식이며, 의복이 너무 사치스럽다는 것은 궁정내부의 생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거기에서 더 나가 구체적으로 궁중에서 어떻게 절약할지 하는 방법을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폐단을 개혁하려면 마땅히 대신과 해당 관청에서 궁중에 올리는 물건의 목록을 모두 가져다가 긴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단지 궁중에 올리기에 적절하여 꼭 남겨두어야 하는 것만 취하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모두 없애야 합니다. 비록 궁중에 올리기에 합당한 것일지라도 수량이 너무 많은 것은 또한 그 수량을 줄이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주상의 백성을 사랑하는 은혜가 아래까지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정당한 것만 올리게 하였던 미덕이 오로지 문왕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입니다.”(⌈동호문답⌋)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대 임금들의 비용지출의 규모와 사례를 상고하도록 명하시어, 궁중의 비용지출을 선대 임금들의 옛날 검약하던 제도를 그대로 따르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조정 안팎에 모범을 보여 민간의 사치 풍습을 고쳐서, 사람들이 성대한 음식상을 차리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소서.”(⌈만언봉사⌋)

 

⌈만언봉사⌋의 건의를 보면 우리는 율곡이 당시 궁중의 비용 지출 규모가 앞선 임금들의 시대보다 더 많아졌다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지출을 앞 시대의 규모로 축소하고 궁중 안팎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민간에서도 음식상을 성대히 차리지 않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특히 음식과 의복의 사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건물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왜 건물의 사치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을까?

참고로 임진왜란 때(1592년) 평양에서 한음도정(漢陰都正) 이현(李俔)이 올린 간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하께서는 사직이 폐허가 된 것을 통감하시어 즉시 스스로를 탓하는 전교를 내리시고 통렬하게 자책하셔야 합니다. 사치스러운 토목공사, 여러 궁가(宮家)의 침탈행위, 조정이 깨끗하지 못했던 것, 일본에 대한 실책, 상과 벌의 시행이 적합하지 못했던 것, 이단을 숭상하여 믿은 것, 언로가 두절된 것, 아첨하는 궁인과 신하들이 많았던 것, 왕의 개인 금고가 가득 찼던 것,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가혹했던 것 등 갖가지 죄과를 열거하여 …”

 

당시 궁중은 의복과 음식의 사치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사치와 낭비가 있었다. 율곡은 아마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상세히 언급은 피한 것 같다.

임금이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치스러운 풍조를 바꾸도록 요청한 것은 율곡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치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율곡은 이러한 요청을 하면서 마지막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이 내려 준 재물을 아껴서,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 주십시오.  (以惜天財, 以舒民力焉)”

 

백성들에게 받은 세금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왜냐하면 통치자(임금이나 대통령)에게 백성은 하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재물을 아껴서 백성들의 힘(民力)을 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서(舒)’라는 한자에는 ‘펴다’, ‘넓히다’, ‘느긋하다’, ‘여유롭다’, ‘쉬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백성들이 여유롭고 쉬면서,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렇게 쉽게 쳐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에 궁중에서 음식이며 의복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그것을 본 관리들이 너도나도 자기만 생각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조선은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이 사망하고 8년 뒤, 즉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그 때 누가 그 궁궐들을 불태웠는지 아직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군들이라고 하기도 하고, 조선의 백성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구태여 범인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모든 문제는 궁중 안에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전쟁 후에 경복궁을 복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백성이 흩어지고 힘이 빠졌으며, 나라 재정이 무너진 상태에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포기하고 창덕궁만 다시 짓기 시작했다. 당시 주로 머문 곳은 정릉동(지금의 정동, 즉 덕수궁 자리)에 있는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년∼1488년, 성종의 형)의 집이었다. 그곳을 임시 궁궐(행궁)로 삼아 거처하다 사망했다.

선조가 살던 행궁은 나중에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졌는데, 일제가 침략하여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살게 하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을 빼앗긴 왕에게 오래오래 살라고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일본에게 이렇게 두 차례의 침략과 치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거기다 또 잊지말아야할 것은 우리 내부의 통치자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민심이 이반되면, 나라가 안에서부터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한다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

 

절약(節約)’과 ‘검소(儉素)’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요즘의 소비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 두 단어는 갈수록 듣기 힘들고, 보기 드물다.

구글(Google)에서 만들어놓은 트랜드(Google Trends)에서 사용 빈도수를 조사해봤다. 2004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한글로 ‘절약’과 ‘검소’라는 단어를 검색해본 빈도수를 그래프로 그려놓은 것이다. 파란 선은 ‘절약’, 빨간 선은 ‘검소’의 검색 추이다. 시간에 따른 관심도의 변화인 셈이다.

오른 쪽으로 갈수록, 즉 시간이 흐를수록 관심도가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푸른 선으로 그려진 ‘절약’이라는 단어는 10년쯤 전에는 지금보다 3배정도 더 관심을 받았다. ‘검소’는 그때도 많지 않았으나 지금은 관심도가 그 때보다 더욱 적어 0에 가까이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이런 추이가 계속된다면 ‘절약’과 ‘검소’라는 말은 한국어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사어(死語, 죽은 단어)’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율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의 3번째로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도록 요구했다. 그 실천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국왕인 선조였다. 나라의 임금이 솔선해서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숭절검(崇節儉), 이혁(以革), 사치지풍(奢侈之風).”

 

숭절검(崇節儉)’의 ‘숭(崇)’은 동사로, 숭상하다는 뜻이며, ‘절검(節儉)’은 목적어로, 절약과 검소를 뜻한다.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라는 뜻이다. ‘이혁(以革)’의 ‘이(以)’는 ‘그것으로’의 뜻이며, ‘혁(革)’은 동사로 ‘고치다, 바꾸다’의 뜻이다. ‘사치지풍(奢侈之風)’은 목적어로 ‘사치의 풍조’를 말한다.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여 사치의 풍조를 바꿔야한다는 의미이다.

율곡은 왜 절약과 검소를 강조하였을까? 공자의 제자들이 지은 논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도천승지국(道千乘之國), 경사이신(敬事而信),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 사민이시(使民以時)”

 

공자의 말이다. ‘도천승지국(道千乘之國)’의 ‘도(道)’는 ‘길’이라는 뜻이 있는데, 그 뜻이 전용되어 동사로 ‘다스린다’는 의미도 있다. ‘천승지국(千乘之國)’은 ‘천승의 나라’라는 뜻으로 목적어 역할을 하여 ‘천승의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천승(千乘)의 나라’란 공자시대 중국에서는 제후국을 뜻했다. 당시 천하는 주나라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각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분봉을 받아 각 지역을 다스렸다. ‘천승(千乘)’이란 천대의 ‘마차(승乘, 타다)’를 말한다. 여기에서 마차는 전쟁에 사용되는 전차를 의미한다. 천대의 전차를 동원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뜻하는데, 나라다운 나라, 혹은 비교적 큰 나라를 뜻한다.

그런 나라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정치의 요령(要領,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골자나 핵심)을 설파한 글이다. 공자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경사이신(敬事而信)’, 두 번째는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 세 번째는 ‘사민이시(使民以時)’이다.

먼저 ‘경사이신(敬事而信)’의 뜻은 다음과 같다.

‘경사이신(敬事而信)’에서 ‘경(敬)’은 명사로 ‘공경’을 뜻하나 여기에서는 동사로 사용되었다. 동사의 의미로는 ‘공경하다’, ‘삼가다’, ‘공손하다’, ‘정중하다’는 뜻이 있다. ‘사(事)’는 일을 뜻한다. 그러므로 ‘경사(敬事)’는 ‘일을 조심스럽게 하다’, 혹은 ‘일을 공손하게 하다’는 뜻이다. 일을 할 때에 그 일을 공손한 마음을 가지고 아주 조심스럽게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而)’는 접속어로 영어의 ‘and’, 혹은 ‘then’과 같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의 뜻이다. ‘이(而)’를 사이에 두고 앞 문장의 동사와 뒷문장의 동사, 앞 문장의 명사와 뒷 문장의 명사가 서로 대응한다. 그러한 규칙을 생각해보면 뒤에 나오는 ‘신(信)’은 한 글자에 ‘경사(敬事)’라는 글자에 대응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믿음직스럽게 일을 처리하다’, 혹은 ‘믿음을 주다’는 의미이다. 전체적인 의미는 공손하게 일을 처리하고 그러한 일처리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

다음으로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의 뜻은 다음과 같다.

‘절용(節用)’은 동사 ‘절(節, 절약)’과 목적어 ‘용(用, 비용)’으로 이루어졌다. 그 뜻은 ‘비용을 절약하다’이다. ‘이(而)’는 ‘그래서’, ‘그리고’의 뜻이며, ‘애인(愛人)’은 동사인 ‘애(愛)’와 목적어인 ‘인(人,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을 어여삐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사랑하다’는 뜻이다. ‘애(愛)’라는 글자는 서양의 문물이 들어와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다는 뜻이 강해졌으나, 원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엾게 여기다’, ‘어여삐 여기다’는 뜻이 많았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절용이애인(節用而愛人)’을 전체적으로 해석하자면,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들을 가엾게 여긴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비용을 절약하는 것과 백성들을 가엾게 여긴다는 뜻은 각기 별도의 의미가 아니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둘이 서로 상관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국가를 다스리는 요령의 하나로 공자가 이 말을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절약하는 것과 백성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 그런가?

임금은 백성이 내는 세금으로 먹고사는 존재이다. 백성들이 밭에 나가 힘들여 농사를 지어 그 중 일부를 국가에 바친다. 임금뿐만 아니다, 모든 관리들도 마찬가지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대통령 이하 모든 공무원들 그리고 각급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은 국민의 세금을 받아서 일을 한다. 그 일을 하면서 한 푼이라도 절약하면 그것은 바로 국민의 부담을 줄이는 일이 된다. 국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들이 내는 세금을 사용할 때 아끼고 아끼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공자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이 내는 세금을 아끼고 절약함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공자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사민이시(使民以時)’의 뜻은 다음과 같다.

‘사민(使民)’은 동사인 부릴 ‘사(使)’와 목적어인 백성 ‘민(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성을 부린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以)는 ‘∼을 가지고’라는 뜻이며 ‘시(時)’는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시(以時)’는 ‘때를 가지고’라는 뜻이다. 백성을 부리는데 때를 가지고 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때를 보면서 백성을 부려라.’는 뜻이다.

옛날 전통시대에 백성들은 대개가 농민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국가는 그 농민들이 생산해낸 농산물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국가의 노동력도 농민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래서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시기를 고려해서 백성들을 부려야한다는 것이다. 농사로 한참 바쁜 때에 국가에서 부역을 시키면 농사를 못 지어, 먹을 것이 없다. 농민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세금을 낼 수도 없으니 국가는 운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때를 잘 맞추어 백성들을 부려야 하는 것이다.

요즘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요즘 농민들은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는다. 1980년도에 1천만명 정도 되었던 농민 인구수가 요즘은 250만명도 안 된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세금은 농업, 공업, 상업, 그리고 서비스업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받는다. 그러니 ‘때’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국가의 사업은 나라를 지키는 일 외에는 ‘부역(賦役)’이 필요 없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국민에게서 받은 세금으로 사람들을 고용하여 일을 시킨다. 그러니 ‘사민이시(使民以時)’는 사실상 필요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말의 깊은 뜻을 곰곰이 살펴보면 역시 버릴 수가 없다. 그 말은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어보면 국가가 정책을 추진할 때, 항상 국민의 입장에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이나 업무 추진 공무원들이 책상 앞에서만, 상상으로 일을 꾸밀 것이 아니라, 현장의 상황을 잘 살펴보고 국민들의 입장을 잘 검토한 뒤에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공청회를 열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형식적으로 공청회를 연다. 법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냥 시늉만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말이 많아진다. 국민의 의견을 진지하게, 왕의 의견처럼 생각하고 잘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요령이라는 것이다. 요즘말로 바꾼다면, 국가 행정의 요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절약과 검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율곡의 제안 중에 임금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억제하고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임금의 행동이 바로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신하들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유교 사상 중에 ‘삼강(三綱)’이 있다. 즉 세 가지 모범이다. 여기에서 ‘강(綱)’은 ‘벼리’를 뜻하는데, 그것은 그물의 바깥 위쪽을 연결하는 굵은 끈을 말한다. 그 벼리를 잡아당기면 그물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가운데로 모아진다. 이러한 ‘벼리’는 전용하여 ‘통괄하다’, ‘근본이 되다’, ‘모범이 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이 삼강의 뜻은 다음과 같다.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은 신하의 모범이다.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버지는 자식의 모범이다.

부위부강(夫爲婦綱): 남편은 부인의 모범이다.

 

부인은 남편을 본받아 그 행동을 따라서 하며, 자식은 아버지를 본받는다. 신하는 임금의 행동을 보고 따라서 한다. 임금은 온 나라 사람들의 아버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은 임금을 본받아 그 행동을 따라서 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절약하면 백성들도 절약하게 되고, 임금이 사치하면 백성들도 사치를 한다. 율곡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유교적인 사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선조 임금에게 절약과 검소를 중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바꾸라(革)’고 한 것이다.

요즘 대통령도 국민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가? 헌법을 보면 대통령은 국민이 뽑은, 5년짜리 임시직 공무원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대통령을 그렇게 단순히 기간제 근로자 정도로 여기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100년이 못될지 모르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고, 유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지 2000년이 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대통령은 부모와 같은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대통령과 공무원들도 절약과 검소를 중시하고 사치를 멀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요즘의 경제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다. 정부에서 절약과 검소를 강조하면 경제가 침체된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모두 절약하고 검소만을 추구하면 상인들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하고 물을 수 있다.

공자는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편에 정치를 잘 하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 미덕을 소개했다. 그 중 하나로 ‘은혜를 베풀지만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惠而不費)’고 했다. 좀 더 구체적인 뜻을 묻는 제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의 이익이 되는 곳에 이익이 되도록 세금을 써라(民之所利而利之)”

 

국민들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일에 예산을 집행해야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통치자가 해야 할 일이다. 통치자가 베풀어야할 은혜는 국민의 세금으로 값비싼 시계를 만들어 여기저기 뿌리는 일이 아니다. 국민들이 이익이 되는 일을 찾아서 그 일에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 통치자가 베푸는 은혜다. 그렇게 국민의 이익이 되는 곳에 사용하는 세금은 낭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율곡이 임금에게 요구한 절약과 검소는 임금의 사사로운 생활과 관련된 부분이다. 좀 더 넓혀보면 궁궐내부(요즘은 청와대 내부)의 생활과 관련된다. 백성들이 먹고 사는 일, 백성들이 들에 나가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경비까지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라는 뜻은 아니다. 국민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일에 예산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가 되던 ‘낭비’가 아니며, ‘사치’가 아니다. 물론 거기에는 정확한 예측과 엄밀한 집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22016년 12월 13일, 어떤 신문 사이트에 이런 뉴스가 올라왔다.

 

“세금 풍년 즐기는 정부…초과세수 8조원 훌쩍 넘을 듯”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졌다.

“저소득층의 울음소리는 귀를 때리는데 나라 곳간은 ‘대풍년’이다. 정부 세수 목표치보다 최소한 8조원의 세금이 더 국고에 들어올 전망이다. 국책연구기관이 내년 성장률이 2% 초반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면, 경기 완충을 위한 재정 여력은 넉넉한 셈이다.”(한겨레)

 

이렇게 초과된 세수는 국가채무의 상환이나 지방자치단체에 지원하는 비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 글을 쓴 기자는 세금을 더 내야하는 국민들의 어려운 입장을 지적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재정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고 하였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이면 국가재정이 그만큼 더 튼튼해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회에서 정해둔 세수 금액을 초과해서 거두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확한 예상을 하지 못하고 섬세한 집행을 하지 못하였다는 비판도 받아야 할 것이다.

“‘세수풍년’”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넘친다.

 

“반갑지만 않군요 … ‘세수 풍년’의 그림자”(중앙일보, 2017.2.9)

“가계 살림 팍팍한데, 정부만 세수 풍년”(Chosunbiz, 2017.11.7)

“가계·기업은 배 곯는데…정부만 세수 풍년”(조선닷컴, 2017.11.6)

“‘세수풍년’? …결국 서민 주머니 털었다”(이데일리, 2017. 3. 11)

“‘불황속 세수풍년’ 원인은 ‘양극화 심화’”(경남신문, 2017. 8. 19)

 

참고로 2015년에는 세수가 예산액보다 3조원정도 부족하였다. 2014년에는 11조원이 부족하였다.(한국경제, 2018.8.19) 그러던 것이 2016년에는 20조원이 초과되었으며 2017년도 크게 초과될 것으로 전망된다.

건강보험료도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걷었다.”고 한다.

2016년 9월 11일에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보면 “건강보험 재정은 2011년 1조6천억원의 누적 수지로 재정 흑자로 돌아섰으며, 누적흑자는 2012년 4조6천억원, 2013년 8조2천억원, 2014년 12조8천억원, 2015년 16조9천억원 등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한다.(연합뉴스)

기사는 건강보험재정이 남아도는데도 보험료가 매년 올랐다며 당국을 이렇게 비판했다.

 

“수입 측면에서는 건강보험이 당해 연도 지출을 예상하고 수입계획을 세우는 ‘단기보험’이란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건강보험 당국이 해마다 필요 이상으로 보험료를 많이 거둬들였기 때문에 누적흑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정부가, 혹은 관련 당국이 세금이나 비용을 과다하게 받아내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다. 율곡은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하고 그가 쓴 ⌈만언봉사⌋에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그런 폐단을 없애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공안(改貢案), 이제(以除), 폭렴지해(暴斂之害)”

 

개공안(改貢案)’에서 공안(貢案)은 목적어, 개(改, 바꾸다)는 동사이다. 즉 ‘공안’을 바꾼다는 뜻이다. 공안이란, 백성들이 조정에 바치는 공물과 세금, 즉 ‘공부(貢賦)’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을 개정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세금 제도를 개혁하자는 뜻이다.

이제(以除)’에서 이(以)는 ‘무엇을 가지고’, 혹은 ‘그렇게 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즉 ‘세금 제도를 바꿔서’라는 뜻이다. ‘제(除)’는 제거하다, 없애다는 뜻으로 그 다음에 나오는 목적어 ‘폭렴지해(暴斂之害)’를 꾸며주는 동사이다. 즉 폭렴지해를 없애자는 말이다.

폭렴지해’는 폭렴(暴斂), 즉 사납게(暴) 걷는 일(斂)을 말한다. 조정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매우 사납게 거두어들이는 해(害)가 ‘폭렴지해’의 뜻이다. 그러므로 위의 한문 문장을 전체적으로 해석해보면 “세금 제도를 개혁하여 조정이 세금을 사납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어떤 이유에서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걷는 일(暴斂)’이 나쁘다는 것인가? 그는 ⌈만언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 시대(先代)의 조정에서는 나라 살림에 필요한 경비를 많이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매우 적었다. 그런데 연산군(燕山君)시대 중엽에 이르러 경비 지출에 사치가 심해서 일상적인 공물(供物, 나라에 바치는 지역 특산물)로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공물을 더 많이 책정하여 욕심을 채웠다.”

 

연산군(1476∼1506)은 조선 제10대 임금(재위 1494∼1506)으로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에 올랐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폭군으로 지탄을 받았다. 나중에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이 일어나 임금에서 폐위되었다. 그런 연산군 시대에 사치가 심해서 백성들로부터 공물을 추가로 걷어 들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곡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보면, 당시 추가로 걷은 공물의 분량을 조정에서는 줄여주지 않고 그 뒤에도 계속 걷어 들였다.

 

“그런데 저번에 내가 승정원에 있으면서 호조(戶曹, 호구와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관청)에서 공안(貢案)을 가져다 보니,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신유년(1501)에 추가로 책정한 것을 줄이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때를 따져보니 바로 연산군 때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공안을 덮고 크게 탄식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신유년이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다. 그 사이에 성군(聖君)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어진 선비가 조정에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법을 어째서 개혁하지 않았단 말인가?”

 

율곡의 생각으로 1501년에 정한 공안에 따라 공물을 너무 많이 받아들였으니 이후에 다시 그 양을 줄여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치지 않은 것이다. 요즘 생각으로는 다소 이상하다. 74년이나 경과했으면, 물가가 많이 올랐을 것이며, 백성들의 경제적인 능력도 향상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율곡에게는 물가상승이나 인플레이션 등의 관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생산되는 특산물은 수시로 변한다. 백성들의 재물과 전결(田結, 논밭에 매기는 세금)도 수시로 늘었다, 줄었다한다. 그런데 공물(貢物)을 처음에 책정한 것은 건국 초기의 일이었고, 연산군 때에는 거기에 더 늘려서 책정했다. 시대에 따라 적절하게 조사하고 헤아려서 상황에 맞게 변통(變通)해 온 것이 아니다. 지금 각 고을에서 바치는 공물은 대부분 그곳 산물이 아니다.”

 

공물을 낼 수 있는 백성들의 능력은 해마다 바뀌고, 지방의 특산물도 수십 년이 지나면서 바뀌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공물의 분량을 조정하지 않고 특산물의 종류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백성들의 호구(戶口) 수도 점점 줄어들고 논밭과 들판도 점점 황폐해져 옛날에 백 명이 바치던 분량을 작년에는 열 명에게 책임 지워 바치게 하고, 작년에 열 명이 바치던 분량을 금년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 지워 바치게 하고 있다. 그러한 행태는 그 한 사람까지 마저 없어진 뒤에야 그칠 것이다.”

 

율곡이 본 조선의 경제적인 상황은 날로 피폐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삶이 갈수록 풍요롭고 여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궁핍으로 쪼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부담하는 세금을 개혁하여 줄여나가자고 한 것이다.

그는 임금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혜가 있어서 일을 잘 아는 신하, 계산능력이 있어서 계산을 잘 하는 신하, 그리고 재능이 있어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신하를 뽑으시기 바랍니다. 그들로 하여금 세금제도 개혁의 일을 전담하게 하십시오. 조정의 대신들은 그들을 통솔하게 하시고, 연산군 때에 과다하게 책정한 공물은 모두 없애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 시대 임금들의 옛 법을 회복하십시오.”

 

나아가 그는 임금에게 각 고을에 특산물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도록 건의했다. 그리고 논밭에 매기는 세금(田結)이 많은지 적은지를 조사하고, 백성들의 가구 수 증감을 조사한 뒤에 그 추이를 산정하여 일체를 고르고 공평하게, 그리고 적정하게 세금을 부과하도록 건의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당부했다.

 

“반드시 원래 정해진 공물이나 세금을 각 관청에 납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방납(防納)은 금하지 않아도 자연히 없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급선무는 이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악명 높은 방납의 폐해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해소 방안을 제시하였다. 방납이란 지방에서 백성들이 납부할 공물을 관리들이 먼저 대신 납부하고 백성들에게 그 대가를 받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받는 대가가 터무니없이 많아 백성들이 고통에 처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율곡은 1569년에 올린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런 풍습이 원래는 없었다고 이렇게 언급하였다.

 

“역대 임금들은 나라에 바치는 특산물을 남이 대신 내는 제도를 아주 엄하게 금지했다. 나라에 바치는 모든 특산물은 오직 백성이 직접 관청에 납부하게 하였다. 모든 관청의 관리들도 임금의 뜻을 받들어 아전들에게 기만을 당하지 않아 농간질이나 실상을 모르는 폐단이 없었다. 백성들은 나라에 바치는 특산물 때문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이다.”( ⌈동호문답⌋)

 

그런데 어느 틈엔가 ‘방납’이 횡행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악폐가 생기게 되었는지 율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상의 도리가 점점 땅에 떨어지고 폐단이 날로 늘어나 교활한 관노비나 약아빠진 아전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그들은 온갖 물건을 사사로이 준비해 두고 관청을 우롱하고 백성을 가로막아, 백성들이 좋은 물건을 가지고 와도 끝까지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자기들이 사사로이 준비해둔 물건을 대신 납부하게 하였다. 그 뒤에 백성들에게 백배의 값을 요구하였다. 그런데도 나라의 법이 무너지고 해이해져 그것을 오랫동안 금지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나라에서 쓸 수 있는 비용은 조금도 늘어나지 못하고 민간에는 살림이 텅 비게 되었다.”( ⌈동호문답⌋)

 

이런 폐단을 없애려고 조정에서 나중에 방납을 중지시키고 백성들이 공물을 직접 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이 필요한 특산물은 이미 시장에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다시 비싼 돈을 마련해서 이전에 공물을 방납하던 사람들에게 다시 찾아가 가격의 몇 배를 더 주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밖에 없었다. 공물방납은 금지되었으나 그 폐단은 오히려 심해진 것이다.

율곡은 그 폐단을 시정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내가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공물(貢物)을 내는 법을 보니, 논 1결(結)마다 쌀 한 말을 거두는데, 관청에서 스스로 비축해두었던 물건을 서울에 바친다. 백성들은 쌀을 내는 것만 알고 농간하는 폐단은 전혀 모른다. 이것이 오늘날 백성을 구제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만약 이 법을 전국에 반포하면 공물 방납의 폐단이 머지않아 저절로 고쳐질 것이다.”

( ⌈동호문답⌋)

 

“대신과 해당 관청이 8도의 지도와 장부를 모두 가져다가 인구와 논밭의 많고 적음, 생산물이 풍부하거나 부족함을 검토하게 한다. 그런 뒤 공물을 다시 부과해서 그 부담을 균등하게 해준다. 나아가 공물 중에서도 나라의 비용에 절실하지 않은 것은 적당하게 수량을 삭감하여 8도의 고을에서 마련하는 바를 모두 해주처럼 1결에 한 말로 만든 뒤에 그 법령을 반포한다면 어찌 실행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동호문답)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 납부하게 하여 방납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율곡의 이런 제안은 대동법의 효시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이라 한다. 당시는 당장 실행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임진왜란 이후에 특산물 대신 쌀로 통일해 납부하는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어 그의 아이디어는 빛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은 조선시대에 난무하였던 방납의 폐해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세금과 관련하여 국민들을 편하게 하는 방안은 여전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을 최대한 적절하게 잘 조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정치하는 사람들과 공무원들은 알아야 한다. 국가에서 필요한 비용을 최대한 잘 예상하고 운영하여 국민들의 불필요한 부담을 줄여야 한다. 넉넉하게 받아서 창고에 쌓아두는 것만 좋은 정치가는 아니다. 국가를 진정으로 부강하게 만드는 길은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여유롭고, 건강하며, 행복하게 되도록 국가가 도와야 한다. 세금을 무조건 많이 징수한다고 해서 국가가 부강하게 되지는 않는다. 율곡이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율곡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다섯 가지 방법 중에 맨 첫 번째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했다.

 

“개성심(開誠心)”

 

개성심(開誠心)’에서 ‘개(開)’는 ‘열다’는 뜻으로 동사의 역할을 한다. ‘성심(誠心)’이란 ‘정성스러운 마음’을 뜻하는데, 목적어이다. 즉 ‘성심(誠心)을 열어라.’는 뜻이다.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그 마음이 ‘정성스러운 마음’이어야 한다.

우리말로 대화할 때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라.’고 한다. 이러한 말은 한문으로 표시하면 ‘진성심(盡誠心)’이다. ‘진(盡)’은 ‘다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율곡은 왜 ‘정성을 다하라(盡誠心)’라고 하지 않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열어라(開誠心)’고 하였을까?

‘나’ 자신이 회사에서, 혹은 직장이나 어떤 조직에서 윗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나’에게는 아랫사람, 즉 부하들이 있다. 한 가족 안에서 가장이나 어른의 위치에 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내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면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편할 것인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자.

 

1) 정성을 다한다.

2) 마음을 열고 대한다.

 

1)의 방법은 정성스럽게 아랫사람을 대하고 조직이나 가족, 혹은 회사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여 일을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계가 있다. 조직을 위하고 가족을 위해서는 훌륭하지만, 아랫사람들과 좀 더 친밀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서기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일을 잘하고, 능력 있는 상사가 꼭 100%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설사 그가 인간적으로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아랫사람들에게는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율곡은 이러한 뜻을 표현의미하는 ‘진성심(盡誠心)’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2)의 방법이 율곡이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개성심(開誠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마음을 열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성심(誠心)’의 ‘성(誠)’자는 ‘정성(精誠)’이라기보다는 ‘마음을 참되게 가지다.’라는 뜻에 가깝다. 그러므로 성심(誠心)은 (그러므로) ‘참된 마음’ 혹은 ‘진실된 마음’이다.

윗사람이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아랫사람들이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율곡은 선조 임금에게 이러한 마음을 요구하였다.

 

율곡은 ‘개성심(開誠心)’ 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이어서 썼다.

 

“이득, 군하지정(以得, 羣下之情)”

 

(以)’란 ‘그것으로’라는 뜻이다. 이(以) 다음에 얻을 득(得)자가 있는데 ‘이득(以得)’이란 그것으로 얻는다,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란 진실된 마음을 윗사람이 열어 보여준다면, ‘이득(以得)’ 다음에 나오는 목적어, 즉 ‘군하지정(羣下之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군하(羣下)’는 ‘군하(群下)’와 같은 말로 아래의 많은 사람들, 즉 많은 아랫사람들을 뜻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지(之)’는 ‘의’이며 ‘정(情)’이란 마음이다. 함께 해석하면 ‘많은 아랫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情)과 마음(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마음(心)은 정(情)보다 더 넓은 뜻이다. 일반적인 ‘마음’이다. 이에 반하여 정(情)이란, 심방변(忄)에 푸를 청(靑)을 써서 마음속에 새싹처럼 파릇파릇하게 자라나는 어떤 것을 표현했다. 그것은 어떤 것에 느껴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지내면서 생겨나는 애정, 즉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이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고 말할 때의 그 정(情)이다.

그러므로 군하지정(羣下之情)이란, 아랫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감정을 뜻하며, 그것은 윗사람이 마음을 활짝 열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대해줌으로써 생겨나는 감정을 말한다. 그것은 존경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충성스러운 마음(忠情)일 수도 있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특별히 그러한 방법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하였는데, 그 중에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하무, 이지성, 대하(殿下務, 以至誠, 待下)”

 

“전하(殿下, 임금)께서는 힘껏(務, 힘쓸 무), 지극한 정성으로(以至誠) ‘대하(待下)’ 즉 아랫사람들(下)을 대(待)하도록 하십시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지극한 정성(至誠)’이란 지극히 참다운 마음, 혹은 참으로 진실된 마음을 뜻한다.

 

“심시즉(心是則), 언역칭시(言亦稱是) 심비즉(心非則), 언역척비(言亦斥非).”

 

‘마음이 옳다(心是)’면, 즉(則) ‘말도 역시(言亦)’, ‘옳다고 칭찬(稱是)’하십시오. ‘마음이 아니라면(心非)’면, 즉(則) ‘말도 역시(言亦)’, ‘아니라고 배척(排斥)’하십시오. 율곡이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임금이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신하들에게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옳다고 느끼면서도 말은 아니라고 한다거나 마음속으로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말로는 옳다고 하는 것은 진실된 마음(誠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어서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신하에게 벼슬을 주어 나오게 했으면 반드시 그 현명함을 들어 상을 주시고, 만약에 그를 물러나게 했으면 반드시 그 과오를 잘 평가하여 책임을 물으십시오. 모쪼록 전하의 마음을 대문처럼 활짝 열어 놓으시어,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우러러볼 수 있게 하시고, 거기에 조그만 거리나 장애도 없게 하십시오.

(進之則, 必賞其賢. 退之則, 必數其過. 聖心如門洞開, 使羣下咸得仰見, 無少隔礙.)”

 

임금의 마음을 신하들이 거울 들여다보듯이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임금이 어느 날 어떤 신하를 중용하여 일을 시켰으면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고, 만약에 누구를 물러가게 하였다면 거기에 합당한 평가가 뒤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내색도 없이 갑자기 신하를 임명하고, 파면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금의 진실된 마음을 숨기는 일이며, 임금의 마음을 신하들이 엿볼 수 없게 하는 일이다. 임금의 마음과 신하들의 마음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근대정치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아벨리(1469년∼1527년)의 군주론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도 안 되고, 악인이 되는 법도 알아야 한다.”

“군주는 인자함이나 신의 등 좋은 기질을 모두 갖출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는 있다.”

“군주는 백성을 단결시키고 충성을 지키게 하려면 잔인하다는 악평쯤은 개의치 말아야 한다.”

 

율곡은 위와 같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반박하듯이 이렇게 설명한다. 임금이 자신의 마음을 대문처럼 활짝 열어 놓는다면, 신하들이 임금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릴 것이다. 또 지혜로운 자들은 충성을 다하려고 할 것이고, 소인들은 간계를 부리려는 생각을 끊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모든 것을 감추고 자신의 속마음과 겉마음이 다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랫사람들은 모두 임금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경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임금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나라의 정치는 어지러워진다.

이러한 말들은 왕조시대에 조선의 임금을 위한 충고였지만, 요즘 시대의 말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윗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열고 아랫사람들을 대하면 아랫사람들은 그를 멀리하는 마음이나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윗사람에 대해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고, 마음이 좁은 사람들도 스스로 가지고 있던 나쁜 마음을 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랫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윗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

 

‘백성(百姓, 즉 民)’이라는 말과 ‘국민(國民)’이라는 말은 비슷하지만 매우 다르다. ‘백성’은 전통시대에 사용된 말이며, ‘국민’은 근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말이다. ‘나라의 백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국민’은 근대적인 국가를 전제로 형성된 단어이다. 국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헌법에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굳이 해석하자면 ‘국민이 주인이며(民主), 주권(主權)이 대통령 한 사람의 의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합의에 따라 행사되는 국가(共和國)’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스스로 통치한다고 하는 의미가 강하다.

‘백성’은 그와 달리 피통치자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존재로 매우 중시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이 즐겨 읽었던 ⌈맹자⌋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민위귀(民爲貴), 사직차지(社稷次之), 군위경(君爲輕)”

 

민위귀(民爲貴)’, 즉 백성(民)은 귀하다.(爲貴) ‘사직(社稷)’은 토지 신을 뜻하는 ‘사(社)’와 곡식의 신을 뜻하는 ‘직(稷)’이 합쳐진 단어로 그 신들을 모시는 장소를 뜻하는데, ‘국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백성의 다음(次之)’이라는 것이다. 백성은 국가보다 더 귀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뒤에 마지막으로 맹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군위경(君爲輕)’이다. 즉 군주(君主)는 가볍다(爲經).

⌈맹자⌋라는 책은 조선의 임금들도 통치의 교과서로 읽었던 경전이었다. 그런 ⌈맹자⌋에 군주보다 귀한 것은 국가요, 국가보다 귀한 것은 백성들이라고 선언되어 있는 것이다. 유교가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도 있으나 유교사상 안에는 요즘 민주사회에서도 깜짝 놀랄 만한 좋은 사상들이 적지 않다.

‘안민(安民)’, 즉 ‘백성을 편하게 한다.’

라는 단어의 사상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율곡 이이(李珥, 1537∼1584)는 1574년, 선조 7년 1월에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만언소(萬言疏)⌋라고도 불린 이 상소문은 ‘만언(萬言)’, 즉 한자 1만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으나 실지로는 12,000자가 넘는다.

당시 율곡은 우부승지(右副承旨)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承政院)에는 도승지(都承旨),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가 있고 그 밑에 좌부승지, 우부승지 등의 관리들이 있었다.

승정원의 관리들은 국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나 신하들이 올리는 상소문 등 모든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들은 임금의 자문 역할을 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과 각급 관청, 혹은 임금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유교 경전과 역사 서적을 읽는 경연(經筵)의 자리에 참석하여 국정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왕명을 직접 받아 시행하고 또 임금을 수행하는 일도 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당시 38세였던 율곡은 최고 권력기관에 속한 고급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그런 위치에 있던 그가 ⌈만언봉사⌋를 임금에게 올린 것은 그 직책 때문은 아니었다. 임금이 모든 공무원들과 초야의 지식인들에게 교지를 내려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임금인 선조는 교지에서 “국가가 장차 흥성(興盛)하려고 할 때는 하늘이 상서로운 일을 일으켜 깨우치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고 할 때는 요사스러운 징조를 만들어 경고한다.”고 하였다. 당시 나라 안에 요사스러운 징조들이 많이 나타났던 것이다.

교지는 또 “(요즘) 여러 변괴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요성(妖星, 요사스럽고 불길한 별)은 한해가 다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태백성(太白星, 금성)은 대낮에도 나타나 거리낌 없이 반짝이며, 때 아니게 우레가 발생하고 지진(地震)이 일어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임금인 내가 덕을 닦는 일에 힘쓰지 않은 탓이니,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태백성, 즉 금성은 샛별이라고도 불리는 별로 밤하늘에서 달 다음으로 밝은 별이다. 흔히 새벽하늘에 동쪽에서 밝게 빛나거나 해질녘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선조 때에는 대낮에도 나타나 반짝였다고 한다. 요즘은 지진이 발생하거나 재해가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도 대통령의 책임으로 몰고 가지는 않지만 당시는 국가에 이상한 징조가 발생하면 임금이 정치를 잘못한 탓으로 여겼다. 그래서 선조는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의견제시를 부탁했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는 뜻을 여러 번 내렸으나 소장(疏章)을 올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것은 나의 말에 거짓이 있고 좋은 의견을 구하고자 데 성의가 부족하여, 신하들에게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며 의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직접 문장을 지어 목마르게 의견을 듣고자하니, 위로는 조정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초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하여 극언(極言)이라도 숨기지 말라.”

 

율곡의 ⌈만언봉사⌋는 이렇게 하여 제출된 것이다. ‘만언봉사’의 ‘봉사(封事)’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옛날 중국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써서 의견을 제시할 때는 그 글을 검은 천 주머니 속에 넣어 밀봉(密封)한 뒤에 올렸다고 한다. 글의 내용이 밖으로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언 봉사’란 밀봉하여 임금에게 올린 1만자의 상소문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만언봉사⌋에서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안민위강자(安民爲綱者), 기목유오(其目有五).”

 

안민(安民)’은 ‘안(安, 편하다)’이 동사, ‘민(民, 백성)’이 목적어로,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이다. 민(民)이라는 글자는 인(人)자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인(人)자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민(民)자는 군주(君主), 즉 임금을 뺀 나머지 사람들을 말한다. 혹은 임금과 그 신하, 즉 관리들을 뺀 나머지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 말하자면 피통치자들이다. 그러므로 ‘백성’이란 ‘사람’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통치자를 전제로 한 말이다.

위강자(爲綱者)’에서 ‘강(綱)’이란 ‘벼리’, 즉 기본 원칙, 강령(綱領), 규범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벼리란 원래 그물 위쪽을 꿰어놓은 줄로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강자(爲綱者)’는 ‘강령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기목유오(其目有五)’란, 그 항목(其目)이 ‘다섯 가지가 있다(有五)’는 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안민위강자(安民爲綱者), 기목유오(其目有五)’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강령에 다섯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면 국민을 편하게 하는 강령에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국민을 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국민들이 부유하게 잘 사는 것일까?

금년 10월 추석 때 ‘건국 이래 최장 10일 연휴’가 있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들께서 모처럼 휴식과 위안의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하면서, 그런 장기간의 연휴가 내수 진작과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해달라고 내각에 당부했다. 그런 조치에 어떤 지식인은 이렇게 반박했다.

 

“편히 쉬면서 여행하고 소비하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주변 환경이 안전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지금처럼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및 핵실험 도발과 이에 대응하는 선제 타격설 등으로 한반도가 전쟁 공포에 휘말린 상황이 이어질 경우 어디 마음 편히 관광하며 지갑을 열 수 있겠는가. 정부와 정치권이 지혜를 모아 국민의 불안감을 덜어주고 안심시켜야 마땅하다.”

(양재찬,<The SCOOP>, 2017.9.11)

 

전쟁 공포로부터의 불안감 해소를 제안한 내용이다. 그 외에도 국민을 편하게 하는 일이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의 유학자이자 고위관료였던 율곡은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선조에게 핵심적인 여러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다음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