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미국 LA 포럼

>>2017년 미국LA 포럼 <International Conference onYulgok Studies>

선조가 총애한 서예가 한호


선조가 총애한 서예가 한호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유신과 무신 외에도 서예가들을 다수 배치하였다. 한호가 글씨로는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조선시대 품인(品人) 기준으로 본다면 특별한 부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이긍익이 한호가 이룩한 서도 경지에 근거하여 ‘선조조의 명신’ 조에 넣은 데서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을 편집한 방침을 엿볼 수 있겠다.

한호는 자가 경홍(景洪)이며, 호는 석봉(石峰)이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군수 대기(大基)의 5대 손으로서 계묘년(1543)에 나서 정묘년 나이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삼조(三曹)의 낭관과 가평ㆍ흡곡(歙谷)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을사년(1605)에 죽었다.

한호는 선조의 총애를 입어 그 명성과 부귀가 더해졌다. 사실 선조 또한 역대 조선의 왕 중에서 상당한 명필로 인정받는다.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총애가 융숭하였으며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제수하였는데, 몇 년 후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였으나 추고만을 명하였다. 그가 공조 낭관이 되어서 의례 바치는 것을 규식대로 하지 않아 응당 파직되어야 하는 것을 임금이 다스리지 말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빨리 어의에게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하도록 명하였다. 죽은 뒤에 임금이 오랫동안 애도 하였다.”

“일찍이 당지(唐紙)에다 이태백(李太白)의 시를 써서 5권으로 만들었는데, 각체(各體)를 모두 갖추었다. 또 큰 종이에 <동서당집고첩(東書堂集古帖)>을 썼는데, 임금이 듣고 급이 내시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가지고 대궐로 들여오도록 하고, 다음 날 비단, 포목, 소금, 쌀, 종이, 먹, 지필묵, 향, 어연(御硯), 옷, 신 등 물건을 매우 후하게 내려주면서 그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하였다.”

한호 글씨에 대한 당시 조선과 중국 사대부들의 애호와 평가를 이정귀가 지은 한호의 묘갈명에서 대략을 소개했다.

“임신년에 정유길(鄭惟吉)ㆍ임오년에 이이(李珥), 신축년에 이정귀(李廷龜)의 세 차례 빈사(儐使) 행차와 신사년과 계사년의 주청사(奏請使)가 갈 때에 모두 명필로서 참여하였다. 중국의 이여송(李如松)과 마귀(麻貴)와 북해(北海)의 등계달(鄧季達)과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이 모두 글씨를 요구하여 갔다. 왕감주 새정(王弇州世貞)이 글씨를 평하기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

하였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마땅히 왕우군과 안로공(安魯公 안진경(安眞卿))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

하였다.”

 

“선조가 공의 대자(大字)를 보고 탄복하기를,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

하고 하사하는 어선(御膳)과 법주(法酒)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또 내시를 보내어 그의 집으로 잔치를 내리는 한편 한가로운 고을을 재수하도록 명하였다. 또 어필로

‘취한 속에 천지에서 붓으로 조화를 뺏았다.
[醉裏乾坤 筆奪造化]’

라는 여덟 자를 써서 주었으며, 병이 나자 어의(御醫)와 약이 길에 연이어졌다. 나이 63세에 죽으니 부고를 듣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내렸으며, 관에서 상장(喪葬)을 돌보아 주었다.”

이광사가 <원교필결>에서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하는 마당에 한호를 논했는데 한호의 학문과 서도를 평함에 대략을 얻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필법을 안평(安平 용(瑢)), 자암(自庵 김구(金絿)),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석봉으로써 4대로 가르쳤는데, 정론(定論)은 석봉을 우리나라의 제일로 꼽았다. 석봉은 재질과 학문은 높지 못하였으나 연습을 쌓아 공을 이루어서 비록 옛사람의 획법(畫法)을 알지 못해도 또한 자연히 서로 합하는 곳이 있었다.

가문이 미천했기 때문에 관가에서 쓰는 정식(程式)에 국한되어 진서(眞書)는 더욱 비루하였으나, 또한 필력에 볼 만한 것이 있었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의 득의한 곳에 이르러서는 규모가 크고 깊으며 질박하고 힘차 송(宋)ㆍ원(元)에서 높이 나와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이순신이 허여한 유형(柳珩)


이순신이 허여한 유형(柳珩)

 

잘 알려지지 않은 출중한 인물들이 많다. 유형도 그중 한 명이다. 유형은 이순신의 신임이 두터웠던 무장이다.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유형을 두었다.

유형은 자가 사온(士溫)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병인년(1566)에 나서 갑오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년에 해남 현감(海南縣監)이 되었고, 정유년에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발탁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경상도 우병사(右兵使)에 임명되었다. 북병사(北兵使)ㆍ평안 병사를 역임하고, 황해 병사로 재임 중 을묘년(1615)에 죽으니, 나이 50세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강화에서 활동하다가,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선조의 친유(親諭)를 받고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자를 등에 새겨 스스로 맹세하였다. 신설된 훈련도감에서 군사조련에 힘쓰다가 해남현감으로 나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노력하였다. 남해 앞바다에서의 전투에서는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의 곤경을 구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도,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 유형은 이순신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1600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하였다. 이어서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에 죽었다. 용병(用兵)에 능하고, 특히 통제영(統制營)의 기계설비와 회령·경성의 축성 등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타고난 기질이 장대하고 성질이 호탕하여 어려서 구속받기를 싫어했던 유형이 무장으로 거듭나는 일화를 <연려실기술>이 적어 두었다.

“사람됨이 용모가 장대하고 어려서부터 성질이 호탕하여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말달리기와 검술을 좋아하고 산업을 일삼지 않았다. 어머니가 울며 이르기를,

‘내가 죽지 않고 사는 것은 오직 네가 있기 때문인데, 네가 이제 이같이 방탕하게 노니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제가 마침내 성공하여 어머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소서.’

하였다. 물러나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태어나서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또 어머니로 하여금 잡수시는 것도 어렵게 하였으니 사람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가산을 다스려서 축적해 놓고, 또 스승을 찾아 수학하였다. 조금 뒤에 탄식하기를,

‘대장부가 재주를 보이지 못할 데가 없거늘 하필 서책의 장구(章句)와 구두(句讀)를 일삼겠는가.’

하였다. 아침에는 활을 쏘고 저녁에는 글을 읽었다. 임진왜란에 칼을 잡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을 좇아 평안도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선전관에 임명되고 무과에 올랐다. 임금이 일찍이 무신들의 활쏘기를 구경하다가 공의 차림새가 출중함을 보고 주목하던 중에 화살 한 개로 정곡을 맞추니, 상이 불러다가 공의 아버지와 조부의 이름을 물었다. 상이 이르기를,

‘국사에 힘써 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말라.’

공의 할아버지 진동(辰仝)은 벼슬이 공조판서로서 장상(將相)의 재주가 있었고, 아버지 용(溶)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냈다. 하고 특별히 말을 하사하여 권장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감격하여 울고 드디어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자를 먹물로 새겼다.”

이순신이 진충보국의 일념으로 전쟁에 임하는 유형을 평한 내용이 있다.

“이덕형(李德馨)이 일찍이 이순신(李舜臣)에게 묻기를,

‘누가 그대를 대신할 수 있느냐?’

하니 순신이 말하기를,

‘충후(忠厚)하고 담략(膽略) 있기가 이 세상에서 유형한테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 벼슬은 비록 낮으나 크게 쓸 만합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조정에 아뢰어 드디어 우수사에 제수하였다.”

유형이 회령(會寧)ㆍ경성(鏡城)ㆍ창성(昌城)ㆍ삭주(朔州) 등의 성지(城地)를 모두 세웠고 특히 황주(黃州) 성은 더욱 장대했다. 여러 번 큰 병영의 장수를 역임하였으나, 관직에서 물러나는 날에는 쓸쓸히 행장 속에 이불뿐이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