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 근절의 이후백(李後白)


청탁 근절의 이후백(李後白)

 

이후백은 자가 계진(季眞)이며, 호는 청련(淸漣)이다. 경진년(1520)에 나서 병오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종 을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어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무인년(1578)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국조인물고>에 박세채가 지은 이후백의 시장(諡狀)이 실려 있다.

“전조(銓曹)의 장(長)으로 있을 때 친지가 와서 청탁하자 공은 정색을 하고 한 책자(冊子)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으니, 대개 재주와 행실이 있는 사람의 성명을 기록해 둔 것이었는데, 그 사람 역시 그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의 이름을 기록해 두어 장차 의망(擬望)하려고 했었는데, 애석하게 되었네. 자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벼슬을 얻을 뻔했는데……’라고 하니,

그 사람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 공은 매양 주의(注擬)할 때면 반드시 두루 낭료(郎僚)들에게 물어서 논의가 일치된 연후에야 임용했고, 만일 잘못되었으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주상(主上)을 속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청백리(淸白吏)로 선록(選錄)되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선생이 칭탄(稱歎)하기를, ‘이모(李某)는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다하고 몸가짐을 청고(淸苦)하게 한다.

지위가 육경(六卿)에 이르렀는데도 유생(儒生)처럼 가난하다.’라고 하였다. 손님이 찾아와도 술상이 쓸쓸하여 사람들이 그 개결함에 감복하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상공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이모는 나라의 어린 후사(後嗣)를 부탁할 수 있고, 한 지역을 다스릴 임무를 맡겨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후백이 청탁을 거절한 일화를 이이가 <석담일기>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후백이 이조 판서가 되어 공도(公道)를 높이기에 힘쓰고 청탁을 받지 않아 아무리 친구라도 만약 자주 가면 매우 좋지 않게 여겼다. 어느 날 일가 사람이 찾아보고 벼슬을 구하는 뜻을 보이자, 후백이 안색을 변하면서 조그만 책자 한 권을 보여주었는데, 사람의 성명이 많이 기입되어 있었다. 장차 벼슬을 주려는 사람들로서, 그 일가 사람의 성명도 또한 기록 속에 있었다.

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 이름을 기록하여 장차 천거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자네가 벼슬을 구하는 말이 있으니, 만약 구하는 사람이 얻는다면 공도(公道)가 아니다. 아깝다, 자네가 말을 않았더라면 벼슬을 얻었을 것이다.’ 하였다. 후백이 한 벼슬을 임명할 때마다 그 사람이 맡길 만한지 여부를 널리 물었고, 만약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잘못 벼슬을 주었을 때에는 번번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내가 국사를 그르쳤다.”고 하였다.”

이이가 청렴한 바를 허여하기는 했지만 정승의 국량으로는 부족하다는 평을 내린다. 역시 율곡 답다. 그러나 이후백 보다 더 나은 인선이 어렵다면 이후백이 정승이 되었다고 김효원의 말처럼 탄핵할 것인가 하여 이후백이 정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허여하기도 한다.

“공우 벼슬을 할 때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몸을 청고(淸高)하게 단속하여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나 가난하고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다.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았고 손님이 와도 식탁이 보잘것없어 사람들이 그 결백함에 감복하였다. 단지 국량이 좁아서 정승이 될 그릇은 아니었다. 김효원(金孝元)이 항상 말하기를, ‘계진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論劾)할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은 후백이 심의겸(沈義謙)과 서로 잘 알기 때문에, 효원이 의겸에게 사감을 품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하였으나, 이이는 홀로, ‘효원이 본 것이 없는 게 아니다.’ 하였다. 다만 계진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면 어찌 그가 정승이 된 것을 탄핵하겠는가. 후백이 비록 서인의 지목을 받고 있으나, 오로지 주장하거나 부정하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연소한 사류들도 싫어하지 않아 바야흐로 정승의 물망이 있었다. 노진이 죽은 뒤에 후백이 몹시 애통해 하더니, 노진의 관 앞에 통곡하고 전(奠)을 올리고 집으로 돌아와 병이 들어 하룻밤 만에 죽어 사람들이 몹시 애석해 하였다. 이때 노진과 후백이 서로 이어 죽으니, 정2품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다.”

박세채의 시장(諡狀)은 앙모의 정이 더욱 사무친다.

“아! 공의 재주와 덕망으로 선조(宣祖)의 태평성대에 혹 경륜(經綸)하는 큰 책임을 맡겼더라면 그 모유(謀猷)가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론이 모두 조석 사이에 정승이 될 것을 바랐는데 공이 병이 났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나 박세채(朴世采)는 젊어서부터 매양 공의 명망과 덕행에 감복하여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사이에 제일가는 인물로 여겨 일찍이 그분의 논저(論著)한 문자(文字)를 얻어 보고자 하였는데, 얻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매우 서운하게 여겼었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