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애민(淸白愛民) 한 김덕함(金德諴)


청백애민(淸白愛民) 한 김덕함(金德諴)

 

경기도 여주에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덕함의 청렴함을 기리는 비문이 있다. 당시 군청의 정문이었던 영월루 주위에 역대 여주목사들의 공덕비들이 있다. 그중 김덕함 공적비가 있는데, ‘청백애민비’라고 새겨져 있다. 고을 수령으로서 김덕함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덕함(金德諴, 1562~1636)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성옹(醒翁),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홀로 공부에 힘써 27세인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1594년 군공청의 도청(都廳)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 시절인 1617년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뒤 여주목사 ·춘천부사 등을 지냈고, 1636년 청백리에 녹선되고 대사헌에 올랐다.

이항복이 일찍이 김덕함이 큰 인물임을 알아보았는데,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직되고 신묘년에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 및 공 등 3명은 모두 국사를 맡길 만하다고 누차 조정에 말하였다. 임진년에 연안(延安)으로 들어가 이정암(李廷馣)의 종사(從事)가 되어 인근 고을에게 군량을 독촉하여 내게 하였다.”

이항복이 예견한 바는 그의 <행장>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는데, <연려실기술>에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갑오년(1594)에 조정에서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고 전공(戰功)을 사정(査定) 할 때에 청탁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상하에서 서로 부탁하므로 사람들이 피하였는데,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아뢰어 공을 도청(道廳)으로 삼아 사정을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하루는 김응남이 비변사에 말하기를,

‘군공의 중대한 일을 김덕함이 혼자 맡고 있으므로 내가 매일 사대문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의 훼예(毁譽)를 살펴보았는데, 사람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로써 청촉이 감히 그 사람에 대해 범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였다.”

“정유년(1597)에 조정이 강화(江華)에 분호조(分戶曹)를 설치하어 삼남(三南) 지방에 조운(漕運)의 길을 열어 군량을 공급하도록 하였는데, 김응남이 아뢰기를, ‘김덕함의 재능이 강화 유수와 병조분의 양 장관을 겸할 만하며, 이제 분호조의 임무가 극히 중대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일을 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비변사 당상도 필요 없이 단지 이 사람만 차임해도 괜찮습니다.’ 하였다.”

김덕함이 소임을 처리하는 바가 능수능란하고 요령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김덕함이 지방관으로서 이룬 치적을 평한 어사 최현의 장계가 볼 만하다.

“기유년에 체찰사 이항복이 계청(啓請)하여 특별히 공을 안주 목삼(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어사(御史) 최현(崔睍)의 장계에,

‘맑기는 백이(伯夷)와 같고 정사는 공수(龔遂)와 황패(黃覇) 한 나라 때의 지방 명관) 같으며, 겸하여 봉공(奉公)하는 정성이 있어 정치와 교화가 서도에서 제일입니다.’

하였다.”

최현의 장계를 보자면 김덕함이 청령하면서도 유능한 관료임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우공일기> 또한 이를 잘 보여준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모친이 93세에 죽었는데, 공이 매양 모시고 자면서 매사에 몸소 시중을 들어 하룻밤에 간혹 10차례나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곱 고을을 역임하였으나 돌아와서는 반드시 양식이 떨어졌다. 집사람이 간혹 식량이 떨어졌다고 하면 문득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하늘이 반드시 살리는 도리가 있게 마련이다.’

하였다. 평생을 남의 집을 빌려 살았으며 책상과 기물의 먼지를 털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제 몸의 먼지도 또한 깨끗이 털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에 있는 물건이랴.’ 하였다.”

“광해 때에 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길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종을 궁궐 역사에 내보내서 삯을 받아서라도 자급(自給)하는 것이 어떠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남의 집에 기와나 석물(石物)을 도둑질 해다가 나라에 바쳐서 대가를 받아 생활을 도모하는 짓은 내가 차마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고위직에 올라서도 청렴한 바는 원칙을 준수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절에 이항복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었을 적의 일화다.

“당시에 귀양살이 하는 자들은 모두 처자식과 함께 갔는데 공이 ‘위리(圍籬)는 사체(事體)가 옥과 같으므로 처자식과 더불어 뒤섞여 거처할 수 없다.’ 하였다. 다음 해에 부인 이씨가 가족을 데리고 갔으나 각기 딴 집에서 살게 한 것이 5년이었는데, 계해년에 이르러 특사를 받고 비로소 서로 모여 살았다.”

김덕함은 형 덕겸과 더불어 청렴으로 유명했다. 이 또한 부친의 삶에서 보고 배운 것으로 사료된다. 김덕함의 부친 김홍의 묘지의 한 대목이다.

“처음에 공의 5대조인 호군 승부(承富)가 죽자 아내 유씨(柳氏)가 외아들을 데리고 상주에서 백천(白川)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공의 아버지 홍(洪)에 이르러 스스로 집안이 대대로 부진(不振)한 것을 상심하여 아우 택(澤)과 더불어 꾀하기를, ‘형제가 모두 학업에만 종사하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니 살 수가 없다.’ 하여 마침내 그 아우를 면려시켜 문학에 전념하게 하고 홍은 힘써 농사지어 두 집 생활을 하였다. 김택은 과거에 올라 홍문관 정자가 되고 벼슬이 감찰에 이르렀으며 김홍의 두 아들 덕겸(德謙)은 과거에 오르고 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도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그 다음이 공이니, 사람들이 조상의 음덕의 갚음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화로 알아보는 이순신


일화로 알아보는 이순신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이순신을 두었다. 요즘에는 이순신을 주제로 한 소설이나 영화 등도 있고 해서 이순신에 대해 많이 알려진 바가 있지만 <연려실기술>은 1차 자료 격이다.

이순신은 자가 여해(汝諧)이고 본관은 덕수(德水)로 정정공(貞靖公) 변(邊)의 현손(玄孫)이다. 을사년(1545)에 나서 병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역임하고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다. 무술년(1598)에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젊어서부터 똑똑하고 깨끗하여 얽매이지 않았고, 여러 아이들과 놀 때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네 안에서 놀다가 뜻에 거스르는 자를 만나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그 문 앞을 다니지 못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 유학에 종사하니 더욱 글씨에 능하였고, 20세에 무예(武藝)를 배웠다.”

동네 안에서 놀다가 뜻을 거스르는 자를 만나면 그 눈을 쏘려고 해서 어른들도 모두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신체에서 가장 예민하면서도 치명적인 손상을 받을 수 있는 눈을 공격하려 했다니 무장의 기재가 드러난다.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에게 서녀(庶女)가 있는데 이순신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려고 하니, 이순신이 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내가 벼슬길에 나와서 어찌 감히 권문(權門)에 종적을 의탁해서 출세를 매개하리요.’

하였다.”

“이순신이 일찍이 과거(武科)에 응시하여 강(講)에 나갔을 때, 장량전(張良傳)에 이르러 시험관이 말하기를, ‘장량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았다 하니 진짜 죽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강목(綱目>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썼으니, 장량의 뜻이 어찌 신선이 되려고 했습니까.‘ 하자 온 좌중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이순신이 유학을 겸비한 무장이었음은 그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이런 일화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이순신이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어 정해년(1587)에 조정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그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 지역이 너무 멀고 병정이 적었기 때문에 누차 군사를 증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8월에 비적(匪賊)이 전채(田寨 둔전 목책)를 습격하여 포위하자 이순신 선두에 있는 붉은 털옷을 입은 자 수 명을 연속해서 사살(射殺)하고, 추격하여 잡혀가는 남녀 60여 명을 탈환하였다. 한창 교전하다가 공이 화살에 맞았는데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으면서 안색을 변하지 않아 온 군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

생사가 교차하는 전장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는 장수로서 이순신의 위엄이 느껴진다. 이런 기개와 강인함이 있었기에 국난에 처한 조선을 구해내는 중임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전쟁에 승리할 때마다 장수들을 경계하기를, ‘승리를 거듭하면 반드시 교만해지는 법이니 여러 장수들은 근신하라.’ 하였다.”

“이순신이 군중에 있은 지 6년에 본도의 군량 저축이 줄어들어 공급할 수 없음을 보고 드디어 어전(魚箭)과 염전(鹽田)을 크게 개설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설치하는 등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대를 돕는 것에 용감하게 나갈 뿐 주저하지 않기를 마치 기욕(嗜慾)처럼 하여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기 때문에 군량의 여유가 있어 일찍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이순신이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되어서도 공은 기질이 곧아서 아부하지 않았다. 주장이 사람을 보내어 성[堡]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자 공은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관가의 나무이다. 심은 사람이 뜻이 있었을 것인데 베는 사람은 또 무슨 뜻이냐.’ 하니, 주장이 노하여 공을 중상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공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아주 적은 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장수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지휘해야 하는데, 병졸들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것이 제일 첫 번째 조건이다. 부하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장수가 부하들로부터 믿음을 얻어야 한다. 그 믿음은 공정함에서 나온다. 이 공정함은 어떤 위세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강직함에서 나온다. 오동나무를 베는 것과 관련된 사소한 일화처럼 보이지만 이순신이 절대 수세의 국면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끈 힘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이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게 되면 국가에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 것도 족하다. 만약 권귀(權貴)에게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훔친다면 나는 몹시 부끄러워 할 것이다.’

하였다. 장수가 됨에 이르러서도 이 도를 지키고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응접할 때 화평하고 친절하며 경계가 없었으나, 일을 당해서는 과감하게 판단하고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군에 있는 7년 동안 몸과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워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상을 얻으면 반드시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겨 두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원균(元均)과 더불어 오랫동안 서로 화목하지 않았는데, 이순신이 일찍이 그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마땅히 저들에게 공이 있다고 말하고 잘못은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순신이 죽자 그 죽음을 비밀에 붙였는데, 진린이 배 위에서 조선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베려고 다투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통제사가 죽었구나.’ 하니, 좌우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자, 진린이 말하기를, ‘내가 통제사를 보니 군율(軍律)이 몹시 엄했는데, 이제 그 배에서 머리를 베려고 다투느라 어지러운 것을 보니, 이는 호령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조정에서 우의정에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명나라의 장수 형개(形玠)가 말하기를, ‘마땅히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충혼(忠魂)을 표창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자 해변 사람들이 서로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충민(忠愍)이라고 이름하고 좌수영(左水營)에 있다. 군졸들이 또한 비석을 세우고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닭 한 마리로 세금을 걷어 들인 우복룡(禹伏龍)


닭 한 마리로 세금을 걷어 들인 우복룡(禹伏龍)

 

조경이 지은 우복룡의 비명(碑銘)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는데 우복룡이 성균관 유생이었을 적의 일화를 소개한다. 젊은 시절 우복룡의 기개가 잘 드러난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였다. 관례에 대과시(大課試) 때는 삼공(三公)이 육조 당상을 이끌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으면 제생들이 뜰아래에서 절을 올렸다. 공은 홀로 읍(揖)만 하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앞이 아닌데 선비가 뜰에서 절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수상(首相)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종백(宗伯, 예조판서)을 시켜 공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옛날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께서 일찍이 수상(首相)이 벽옹(辟雍, 성균관)에 임할 때는 인신(人臣)들과 차별을 두고자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뜰아래에서 절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예가 아니라고 하여 바로 고쳤는데,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에 이르러 사림(士林)을 원수처럼 보아서 다시 배례(拜禮)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평소 이를 통한(痛恨)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좌상(左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이 유생의 소견이 옳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

하고는 인하여 제재(諸宰)와 의논하여 절하는 것을 읍만 하는 것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날에 복례부(復禮賦)란 제목으로 출제하여 제생을 시험했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했으며 얼마 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국자장(國子長)이 되어 유자부(儒字賦)란 제목으로 출제하여 제생을 시험했는데 공이 또 수석을 차지하였다. 고봉이 공을 앞으로 나와 자리에 앉게 하면서 이르기를,

‘후일 사문(斯文)이 자네에게 의탁하게 될 것이다.’

하니, 이때부터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아울러 조경은 우복룡이 언론과 풍채만이 아니라 정사에도 능한 유자임을 밝혔다.

“공은 약관(弱冠)에 행촌(涬村, 민순)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배우려는 자들이 성대하게 모여들었으나 선생이 유독 공을 칭찬하여 호걸스러운 선비로 허여하니, 일시의 동배(同輩)들 역시 이의가 없었다. 조정에 서서는 언론과 풍채가 모두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했으며, 더군다나 임진왜란 시기에는 정사(政事)를 안동(安東) 수령으로 시작하여 강화(江華)에서 마쳤는데 그 설시하고 조치한 바와 임기응변이 모두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벗어났으니,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라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복룡이 임기응변에 능한 호걸스러운 선비임을 <연려실기술>은 <자해필담(紫海筆談)>을 인용하여 보여준다.

 

“공은 지혜가 많고 유학을 겸하여, 관에 있을 때 엄하게 하지 않아도 일이 이루어졌다. 한번은 촌백성 하나가 조세(租稅)를 체납하고도 너무 가난해서 갚지 못하고 있으니, 공이 말하기를,

‘너가 아무리 가난해도 나라의 곡물을 어찌 납입하지 않을 수 있느냐. 네 집에 있는 물건으로 대신 바칠 수 있겠느냐?’

하자, 백성이 말하기를,

‘가난하여 다른 물건은 없고 다만 닭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닭을 삶아 오너라. 내가 먹고 네가 갚을 곡식을 감해주마.’

하였다. 백성이 이 말을 믿고, 다음 날 닭을 삶아 바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장난한 것이었다. 어찌 원으로서 백성의 닭을 먹고 국가의 곡식을 축내는 자가 있단 말이냐. 속히 가거라.’

하여 백성이 문밖으로 나가니, 여러 아전들이 모두 나누어 먹어버렸다. 조금 있다가 공이 백성을 불러 말하기를,

‘다시 생각하니, 이미 너로 하여금 닭을 잡아오게 하고 또 받지도 않는다면 이는 너를 속이는 것이니, 네 닭을 도로 가져오면 마땅히 약속대로 하겠다.’

하니, 백성이 사실대로 고하자 공이 드디어 여러 아전의 성명 밑에 분배하여 그 조세를 징수하니 즉시 모였다. 이에 여러 아전이 놀라서 굴복하고 속이지 못하였다.”

 

<자해필담>은 다른 일화도 소개한다.

“공이 안동(安東)에 있을 때에 명나라 장수가 대군을 인솔하고 부중(府中)에 들어와서, 어떤 일로 공에게 노하여 공을 욕보이려고 불시에 태평소(太平簫) 30개로 전도(前導)하라고 하였다. 이에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공은 걱정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부민(富民)의 집에 가서 작은 촛대 수십 개를 빌려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퉁소를 잡는 형상과 같이 가지게 하고 사이사이에 태평소를 끼어서 행진하도록 하니, 퉁소소리가 요란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보고 모두 퉁소인 줄 알고 횡포를 부리지 못하고 갔으니, 공이 급한 일을 당하여 군색하지 않게 변통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런데 우복룡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사건이 있으니 의병들을 반란군으로 몰아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경북 예천) 용궁 현감 우복룡이 고을 군대를 거느리고 가던 중 (경북)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하양 (의병) 군사 수백 명이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군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우복룡이 괘씸히 여겨 ‘너희들은 반란군이로구나’ 하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들은 권응수 방어사에게 가라는 박진 병사의 공문을 내보였다. 하지만 우복룡은 자기 군사를 시켜 그들을 포위한 다음 모두 쳐 죽여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그러나 김수 순찰사는 도리어 우복룡에게 공이 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래서 우복룡은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미 이름이 높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복룡 사건을 기록으로 전하는 진원지는 <징비록>이다. 이 사건은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과 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에도 전하지만, 특히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에 실려 있다.

한편 조경이 이 일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우복룡을 신원하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과 동래가 먼저 함락되고 다른 여러 군(郡)이 차례로 무너져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패배한 군졸들이 모여서 도둑이 되어 관군(官軍)을 침탈하였다. 공이 안동(安東)ㆍ영주(榮州)ㆍ비안(比安)ㆍ군위(軍威)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급히 경주로 달려가다가 반졸(叛卒)을 만나자 염탐하여 수창(首倡)한 자 3인을 찾아 죽이고 그 나머지는 석방하여 스스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하였다.

경주 30리 못 미쳐서 영주 군대와 함께 대치하여 진을 쳤는데 밤중에 또 반졸이 떠들썩하게 외치며 일어났다. 영주의 대장(代將)이 화살을 맞아 즉사하였으나 공은 다행히 기강(紀綱)이 있는 종복(從僕)에게 힘입어 겨우 면하였다. 날이 밝자 공은 부오(部伍)를 정돈하여 부대를 재촉해 나아가니, 반졸들이 모두 흩어졌다. 마침내 경주성(慶州城)으로 들어가 군사를 주장에게 소속시키고 즉시 용궁현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조수(鳥獸)처럼 흩어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은 부로(父老)와 자제(子弟)들을 불러 충의심으로 격려하여 군사 3천여 명을 모아 곧장 왜적과 충돌해서 수십 합(合)을 싸우니, 왜구들이 전진하지 못해 용궁현만은 온전하였다. 강좌(江左) 인사들이 공이 힘껏 싸운 형상을 행재소(行在所)에 상소하여 알리니, 붉은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후에 유언비어(流言蜚語)로 중산(中山)의 모함을 입었으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공이 영남을 체찰하면서 당시의 일을 조사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에 힘입어 공의 일이 크게 신원(伸寃)되었다.”

임란 초기에 우복룡이 용궁 현감으로 고을을 지킨 일은 조정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이후로 조선군은 연전연패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선조실록>에는 승리를 뜻하는 ‘승(勝)’ 또는 ‘첩(捷)’이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복룡이 용궁 현감으로 고을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비변사는 선조에게

“용궁(경북 예천군 용궁면) 현감 우복룡(禹伏龍)은 여러 고을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자기 고을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크게 가자(加資, 벼슬의 등급을 올림)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삼으소서”

하고 건의한다. 그리고 선조가 이를 허락했다.

조경의 글에 의하자면 우복룡 사건은 신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서애의 <징비록>에 소위 우복룡 사건이 기록되어 현재에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진위를 반드시 따져야겠지만 기록의 무서움을 새삼 알려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

청탁 근절의 이후백(李後白)


청탁 근절의 이후백(李後白)

 

이후백은 자가 계진(季眞)이며, 호는 청련(淸漣)이다. 경진년(1520)에 나서 병오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종 을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어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무인년(1578)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국조인물고>에 박세채가 지은 이후백의 시장(諡狀)이 실려 있다.

“전조(銓曹)의 장(長)으로 있을 때 친지가 와서 청탁하자 공은 정색을 하고 한 책자(冊子)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으니, 대개 재주와 행실이 있는 사람의 성명을 기록해 둔 것이었는데, 그 사람 역시 그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의 이름을 기록해 두어 장차 의망(擬望)하려고 했었는데, 애석하게 되었네. 자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벼슬을 얻을 뻔했는데……’라고 하니,

그 사람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 공은 매양 주의(注擬)할 때면 반드시 두루 낭료(郎僚)들에게 물어서 논의가 일치된 연후에야 임용했고, 만일 잘못되었으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주상(主上)을 속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청백리(淸白吏)로 선록(選錄)되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선생이 칭탄(稱歎)하기를, ‘이모(李某)는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다하고 몸가짐을 청고(淸苦)하게 한다.

지위가 육경(六卿)에 이르렀는데도 유생(儒生)처럼 가난하다.’라고 하였다. 손님이 찾아와도 술상이 쓸쓸하여 사람들이 그 개결함에 감복하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상공이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이모는 나라의 어린 후사(後嗣)를 부탁할 수 있고, 한 지역을 다스릴 임무를 맡겨도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후백이 청탁을 거절한 일화를 이이가 <석담일기>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후백이 이조 판서가 되어 공도(公道)를 높이기에 힘쓰고 청탁을 받지 않아 아무리 친구라도 만약 자주 가면 매우 좋지 않게 여겼다. 어느 날 일가 사람이 찾아보고 벼슬을 구하는 뜻을 보이자, 후백이 안색을 변하면서 조그만 책자 한 권을 보여주었는데, 사람의 성명이 많이 기입되어 있었다. 장차 벼슬을 주려는 사람들로서, 그 일가 사람의 성명도 또한 기록 속에 있었다.

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자네 이름을 기록하여 장차 천거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자네가 벼슬을 구하는 말이 있으니, 만약 구하는 사람이 얻는다면 공도(公道)가 아니다. 아깝다, 자네가 말을 않았더라면 벼슬을 얻었을 것이다.’ 하였다. 후백이 한 벼슬을 임명할 때마다 그 사람이 맡길 만한지 여부를 널리 물었고, 만약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잘못 벼슬을 주었을 때에는 번번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내가 국사를 그르쳤다.”고 하였다.”

이이가 청렴한 바를 허여하기는 했지만 정승의 국량으로는 부족하다는 평을 내린다. 역시 율곡 답다. 그러나 이후백 보다 더 나은 인선이 어렵다면 이후백이 정승이 되었다고 김효원의 말처럼 탄핵할 것인가 하여 이후백이 정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허여하기도 한다.

“공우 벼슬을 할 때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몸을 청고(淸高)하게 단속하여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나 가난하고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다.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았고 손님이 와도 식탁이 보잘것없어 사람들이 그 결백함에 감복하였다. 단지 국량이 좁아서 정승이 될 그릇은 아니었다. 김효원(金孝元)이 항상 말하기를, ‘계진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論劾)할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은 후백이 심의겸(沈義謙)과 서로 잘 알기 때문에, 효원이 의겸에게 사감을 품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하였으나, 이이는 홀로, ‘효원이 본 것이 없는 게 아니다.’ 하였다. 다만 계진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면 어찌 그가 정승이 된 것을 탄핵하겠는가. 후백이 비록 서인의 지목을 받고 있으나, 오로지 주장하거나 부정하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연소한 사류들도 싫어하지 않아 바야흐로 정승의 물망이 있었다. 노진이 죽은 뒤에 후백이 몹시 애통해 하더니, 노진의 관 앞에 통곡하고 전(奠)을 올리고 집으로 돌아와 병이 들어 하룻밤 만에 죽어 사람들이 몹시 애석해 하였다. 이때 노진과 후백이 서로 이어 죽으니, 정2품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다.”

박세채의 시장(諡狀)은 앙모의 정이 더욱 사무친다.

“아! 공의 재주와 덕망으로 선조(宣祖)의 태평성대에 혹 경륜(經綸)하는 큰 책임을 맡겼더라면 그 모유(謀猷)가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론이 모두 조석 사이에 정승이 될 것을 바랐는데 공이 병이 났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나 박세채(朴世采)는 젊어서부터 매양 공의 명망과 덕행에 감복하여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사이에 제일가는 인물로 여겨 일찍이 그분의 논저(論著)한 문자(文字)를 얻어 보고자 하였는데, 얻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매우 서운하게 여겼었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

효자 이기설(李基卨)


효자 이기설(李基卨)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유현(儒賢) 조에 이황을 첫 번째로 소개하고 이어서 이이를 배치하여 두었는데, 이기설 또한 유현 조에 나온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참봉 이계장(李繼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령(掌令) 이언침(李彦忱)이고, 아버지는 이지남(李至男)이며, 어머니는 정원(鄭源)의 딸이다.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이기설의 스승인 박지화는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庵). 아버지는 형원(亨元)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유·불·도 등에 통달하였다.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수암유고』·『사례집설(四禮集說)』 등이 있다.

박지화는 유학 보다는 선학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택당 이식이 박지화를 평한 글이 있다.

“박지화는 서족(庶族)으로 태어나 널리 배웠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또한 理學을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고 고청(孤靑) 서기(徐起)는 천인(賤人)으로 경사<經史)를 밝혀 학자들에게 교수하였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산수를 좋아하였고 명산에 은거하였으니 모두 화담 문도(門徒)의 조류(潮流)이며 또한 자못 괴이한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박지화를 말하여 신선이 되어 갔다고 하니 화담의 기풍을 배운 사람은 대개 이와 같다.”

<국조인물고>에 유몽인이 지은 박지화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학관(學官) 박지화(朴枝華)의 자(字)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암(守菴)이다. 일찍이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수업하였고 젊어서부터 명산(名山)을 유람하며 소나무 잎만 먹고 곡식을 먹지 않았다. 학자(學者)들과 같이 산사(山寺)에서 머물면서 한 달이 되도록 한 벌의 베옷만 입은 채 낮에는 책을 베개로 삼아 자고 15일 밤은 왼쪽으로, 15일 밤은 오른쪽으로 누워 잤는데, 베옷이 새로 다린 것처럼 구겨지지 않았다.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불가(佛家)의 세 가지 학문에 모두 공부를 깊이 하였고 특히 예서(禮書)에 정밀하고 해박하였다. 그 문장은 시(詩)와 문(文)이 모두 고상하고 뛰어났는데, 일찍이 부마(駙馬)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 대한 만사(挽詞)를 지었을 적에 시인(詩人) 정지승(鄭之升)이 마지않고 칭찬하기를, ‘그 사람은 가문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문장가의 지위는 가장 높다.’고 하였다. ……일찍이 금강산(金剛山)에서 노닐었는데, 그때 나이 70여 세였으나 몇 발 정도 떨어진 사이를 건너 다녔고 발검음이 나는 것 같았으므로 산중에 중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는가 하면, 도성 안에 살 적에는 문을 닫고 온종일 방안에 꿇어앉아 읊조렸으므로 마치 산림(山林)처럼 적막하였다.”

이기설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586년(선조 19) 효행과 순덕(純德: 도덕을 빠짐없이 행함. 또는 순수한 덕)으로 남부주부에 특별 임명되고, 다시 청산현감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그 해 겨울 무주현감을 거쳐 이듬 해 송화현감으로 나갔다.

1591년 한성부판관이 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의 발발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지자 구제에 힘썼다. 이듬해 호조정랑으로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의 도감낭청(都監郎廳)을 겸했으며, 해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그 해 겨울 왕과 함께 환도하면서 군향(軍餉) 수급의 책임을 지고, 또 비변사낭청까지 겸해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2월에 덕천군수로 나갔으나 1594년 어머니 정씨(鄭氏)의 사망으로 사직하였다. 1596년 청풍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군(郡)이 고향 가까이 있어서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해 얼마 되지 않아 충북에서 가장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1599년 이산해(李山海)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원군수로 나갔다.

1601년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듬해 연안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군자감부정·사도시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이천부사·예빈시부정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고, 1610년(광해군 2) 부호군 임명도 거절하였다.

그 뒤 승지 등의 직책을 내렸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해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다. 서울 삼청동백련봉(白蓮峯) 아래에다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학문에 전심해 경사·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당시 사대부의 사표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633년 인조가 특명으로 정려를 내렸는데, 편액을 효자삼세(孝子三世)라 하였다. 저서로는 『연봉집』이 있다.

이기설은 효행으로 유명한데,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 그 일단을 적어두었다.

“20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물과 미음도 입에 대지 않은 것이 7일로 스스로 반드시 죽기로 결정하여 눈물이 다하자 피가 이어 나왔다. 장사 지내기에 이르러 모친 정씨가 지나치게 애통해하다가 병이 중하게 되었다. 형 기직이 모친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육즙(肉汁)을 만들어 올리니, 모친이 의심하여 기설로 하여금 먼저 맛보도록 하였다.

공이 알지 못하고 맛보고 나서 모친에게 먹도록 권하였다. 물러 나와서야 알고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즉시 칼로 혓바닥을 긁어내니 피가 흘러 입에 가득하였다. 형이 지나치게 애통해하다가 먼저 죽으니, 물과 미음조차 입에 넣지 않아 거의 운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삼 년 상을 마치고나자 기운이 허약하여 거의 죽은 사람처럼 지낸 것이 10년이었다.

병술년에 효행이 뛰어나 특별히 무주 현감(茂朱縣監)에 제수되자 모친을 받들고 부임하여 한 고을의 녹으로 봉양하였으나 의복 제구는 반드시 노비의 공물을 썼다. 평상시 제수(祭需)에 반드시 꿩을 썼었는데, 송화 현감(松禾縣監)이 되었을 때 기제(忌祭)를 만나 꿩 사냥을 했으나 얻지 못하여 문을 닫고 자책하던 중 새벽에 이르러 꿩이 대청으로 날아 들어와 제물로 썼다.”

“갑오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있었다. 발인(發引)하여 가는 도중에 화적떼가 침범해 왔다가 영구(靈柩)를 지키고 울부짖는 것을 보고 도둑이 그 효성에 감격하여 가버렸다. 적성(積城)에서 정상(停喪)중에 불의에 실수로 불을 내자 몸으로 관을 가려 머리털이 모두 그슬렸으나 다행히 죽음은 면하였다. 고을 사람들에 그 효성에 감동하여 감화된 자가 있었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병장 정구


의병장 정구

 

조선시대 유학사에서 성리학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분야가 예학이다. 예는 시대의 산물로서 그 당시 사회의 삶과 문화를 반영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대학민국에서 조선시대 사회상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예학은 어찌 보면 낡은 옷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예학 분야 연구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에 뛰어드는 상황을 비춰보면 예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선시대 양대 학파를 꼽자면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꼽는다. 성리학으로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한 이황에서 시작한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원류가 된다면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한 이이에서 시작한 율곡학파가 기호학파의 원류에 해당할 것이다. 예학으로 꼽자면 기호학파에 김장생이 있다면 영남학파에는 정구를 들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박세채의 글 중에 정구와 김장생을 비교한 내용이 나온다.

“계해년(1623) 초에 신흠(申欽)이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지를 때 정경세(鄭經世)가 찾아왔다. 신흠이 마침내 공의 평소의 학문의 깊이를 물으면서 말하기를, ‘김사계(金沙溪 김장생)와 어떠한가?’ 하니, 경세가 답하기를, ‘비록 자세히는 모르나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추면 서로 같을 것이다.’ 하였다.”

신흠이 정구의 신도비를 적을 적에 영남학맥을 계승한 정경세를 찾아 정구에 대한 여러 일화나 내용을 자문하였을 것이다. 예학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고 있지만 정경세가

“비록 자세히는 모르나 장점과 단점을 서로 맞추면 서로 같을 것이다.”

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정구가 이황과 조식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이황과 조식 외에 우계 성혼을 들고 있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보는 사람마다 신동이라 일컬었다. 한창 젊었을 때에 포부가 매우 커서 우주간의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산수(算數),병법(兵法),의약(醫藥), 풍수(風水)에도 모두 통달하였다. 처음에 오건(吳健) 덕계(德溪)에게 배우고, 또 이황ㆍ조식ㆍ성혼 세 선생한테 가서 배웠는데, 모두 마음으로 허여하였다.”

정구는 성주에서 출생했는데, 이곳은 남명의 탄생지와 멀지 않아 인근에서 남명의 제자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정구는 13살 때 남명의 제자인 오건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는데 그 재주가 뛰어났고 특히 주역을 금새 익혔다고 한다.

정구가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한 내용 중에도 주역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역시 박세채의 기록이다.

“공은 어렸을 때에 뛰어난 천재여서 13세에 학업이 이미 이루어지니, 오건이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어 시를 주어 격려하였다. 18세에 《주역》을 읽어 대의를 깨달았다. 이에 의문되는 부문을 표기하여 이황에게 나가 질문하고 장차 머물면서 배우려고 하였는데, 만나서 질문하기에 이르니 의심난 부분은 이황도 이따금 또한 알지 못하므로 공이 드디어 하직하고 돌아가려고 물러 나오다 조목(趙穆)을 만났다. 조목이 묻기를, ‘어째서 갑자기 돌아가는가?’ 하니,

공이 그 이유를 갖추어 말하자 조목이 꾸짖기를, ‘역학(易學)이 본래 알기가 어려운 것인데, 선생이 비록 의심나는 곳을 일일이 투철하게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군이 나이 어린 사람으로 선생의 도덕을 듣고 수백 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왔는데, 그 보고 느낀 흥기(興起)하는 바가 어찌 한갓 한두 군데 문의(文義)에 있겠는가.’ 하니, 마침내 한 달 동안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이황이 일찍이 사람에게 답하는 글에, ‘정구라는 자가 찾아왔는데, 또한 심히 영리하고 민첩하다. 다만 그 민첩한 곳이 도리어 병통이 될까 염려된다.’고 하였으니, 대개 이 때문이었다.”

이황과 조식 두 스승에 대한 정구의 생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이 신흠의 신도비에 나온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자 비로소 소명(召命)에 나아갔는데 선조(宣祖)께서 친히 인견(引見)하시고 묻기를, ‘그대의 스승이 이황과 조식인가?’ 하고, 아울러 두 사람의 기상과 학문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황은 덕량이 굉후(宏厚)하고 조행(操行)이 독실하며, 조식은 기국이 엄정하고 재기가 호매(豪邁)합니다.’고 하였다.”

정구가 예학에 밝은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주역에 정통했다는 것은 덜 알려진 바이고 그가 국난에 처해 몸소 전장에 뛰어든 의병장이라는 사실은 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구가 서울에 침범하여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난하자 선생은 의병(義兵)을 창도(唱導)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정예병을 소집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관북(關北)의 토병(土兵)이 왜적에게 붙어 혼란을 선동하여 선조의 친형인 하릉군(河陵君)이 깊은 산 속에서 궁지에 몰려 목을 매어 죽자,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서 통분한 나머지 꾀를 써서 적을 사로잡고 하릉군의 시신을 찾아 손수 직접 빈염(殯殮)한 뒤에 행재소(行在所)에 보고하니, 선조께서 몹시 애절하게 느끼고 선생을 통정 대부로 승진시키도록 명하여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무기를 제조하고 둔전(屯田)을 확장하고 군사 훈련을 엄격하게 실시하고 굶주리는 자들을 구제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여러 가지 정무(政務)를 모두 제대로 거행하였다.”

정구가 학문만 하는 선비가 아니라 정무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유자라는 점은 그의 예학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신흠이 정구를 평한 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 사현(四賢)이 세상에 나오자 정학(正學)이 밝아졌는데, 그것을 절충(折衷)하여 집성(集成)하는 일은 오직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이 그렇게 해내신 분이고, 선생은 그 분을 친히 보고 알아서 그 단전(單傳)을 얻었다.

주 부자(朱夫子)를 모범으로 삼고 이 선생을 지남(指南)으로 삼아서, 내면에 축적한 식견이 넓고 배양(培養)한 지기(志氣)가 깊었으므로 거의 자신을 완성하고 나아가 남을 완성하여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었으나, 말단 관직과 고을 수령만을 지냈으니 어찌 크게 시행할 수가 있었겠는가.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 이후로는 세상이 극도로 혼암(昏暗)하였으므로 선생이 죄에 걸려들지 않고 면한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생이 전후로 올린 소장(疏章)은 천백 년의 후대에까지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고 국조(國祚)를 영원토록 이어지게 하였던 것이니, 선생 같은 분은 세운(世運)의 성쇠(盛衰)에 관계가 있었던 분이 아니겠는가. 황도(黃道)가 다시 밝아지고 태양이 제 빛을 되찾은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선생의 도(道)야말로 모범으로 삼아 본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늘이 정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세상의 이른바 유자(儒者)라는 사람들이 높은 자는 한 가지 절개에 치우치고 낮은 자는 비근(卑近)한 데에 빠져드는데, 능히 전체적인 대용(大用)에 힘을 써서 도를 보위한 공로가 있는 자는 오직 선생뿐이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