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가 본 이황


이이가 본 이황

 

조선을 대표하는 두 명의 유학자를 꼽으라면 누구나 이황과 이이를 꼽는다. 이황은 1501년 생이고 이이는 1536년 생으로 35년의 연수 차이가 나고 학문적 교류가 거의 없기는 했지만 이이 당시부터 현인으로 추앙받던 이황을 이이는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황과 이이의 후학들이 동서분당을 거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나뉘어 정치적, 학문적으로 불상용의 국면을 조선시대 내내 전개하기는 했지만 어찌 이러한 문호 다툼을 이황과 이이 양현에까지 소급할 수 있겠는가? 이이가 지은 <석담일기>는 인물평이 은후(隱厚)한 맛은 적고 각박하기까지 한데 이는 실상을 사실대로 기술하려고 한 이이의 의도가 있다. 그렇다면 <석담일기>에서 이황을 뭐라고 평하는지 살펴보자.

한편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이황을 서술하면서 동서분당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동각잡기(東閣雜記)>와 더불어 <석담일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 또한 필시 용의가 있을 법하다.

이황은 나아가기는 겨울철 살얼음을 밟듯이 하고 물러나기는 전장에 나선 병마처럼 한다고 하여 늘 말이 많았다. 이황 스스로도 기대승과 주고받은 서신 중에 이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이이가 <석담일기>에 적은 내용이 있다.

“공이 산림에서 도를 지키니 인망이 날로 무거워갔다. 명종이 누차 불렀으나 이르지 않았다가 말년에 공을 불러 중국 사신을 접대하게 하자 공이 비로소 나갔으나, 사은숙배하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였다. 공이 이에 조정에 머물러 명종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직하니, 이이(李珥)가 공을 뵙고 말하기를,

‘어린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어려운 일이 허다하니 분의(分義 도리)로써 헤아려 볼 때 선생께서는 물러가서는 안 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도리로 보면 물러갈 수 없으나, 내 한 몸으로 본다면 몸에 병도 많고 재주도 또한 미치지 못하니 물러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성혼(成渾)이 참봉에 임명되었는데 오지 않았으므로 좌중의 손님이 ‘성혼은 어째 오지 않느냐?’고 말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성혼은 병이 많아서 직무를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억지로 벼슬하게 한다면 그를 괴롭히는 것에 불과하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숙헌(叔獻)은 어째서 성혼에게는 후하게 대하고 나한테는 박하게 대하는가.’

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이 벼슬하는 것이 만일 선생과 같다면 일신의 사계(私計)는 돌아볼 것이 못 됩니다마는, 성혼으로 하여금 말직에 쫓아다니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만약 선생께서 경연에 계신다면 도움이 심히 클 것인데, 벼슬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일이지 어찌 자신을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이황은

‘벼슬이라는 것은 진실로 남을 위해서이다. 만약 남에게 이익이 미치지 못하면서 자신에게 우환이 절박하다면 할 수 없다.’

고 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조정에 계시면 설사 하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임금의 마음이 중하게 의지하고 인심이 기뻐하며 믿을 것이니, 이 역시 이익을 사람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누차 사양하자 체직을 허락하니, 다음날에 조정에 하직하지도 않고 돌아갔다. 이에 의논하는 자들이 간혹 명종의 장삿날이 임박했는데도 회장(會葬)하지 않고 지레 돌아 간 것을 잘못이라고 하였다.”

조정의 유현으로 이황의 역할을 기대한 이이의 심정이 고스란히 잘 보인다. 또한 이황이 쉽게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심사도 행간에서 느껴진다.

이황이 사망한 뒤에 선조가 행장(行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 행적을 적은 문장)이 없기 때문에 아직 시호를 내릴 수 없다는 영을 내리자 이이가 행장이 없더라도 시호를 내리기에 문자가 없다는 논지를 펴면서 이황을 평가한 내용이다.

 

“선조 6년(1573)에 여러 신하가 이황의 시호를 청하니, 임금이 행장(行狀)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어째서 행장을 짓지 않느냐?’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옛날 황간(黃幹)은 주자(朱子)의 높은 제자였지만 행장을 지은 것이 오히려 20년 뒤였으니, 하물며 이황의 문인들이 어찌 용이하게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황의 행적은 귀와 눈에 분명하게 남아 있는데 행장의 유무가 어찌 증감(增減)이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에 유학자로서 세상에 이름난 자가 비록 간혹 있으나, 그의 언행을 공평하게 살펴보면 유자의 표준에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황으로 말하면 정신과 기백은 비록 타고나서 억지로 만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주와 기국은 진실로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만 일생을 성리학(性理學)에 침잠(沈潛)하여 언론과 지취(旨趣)를 글로 쓴 것은 비록 옛날 명유(名儒)의 말일지라도 또한 이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인으로 행적이 분명히 드러난 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표창하여 높이는 데에 인색하신데, 하물며 당대의 선비들에 대하여 어찌 선(善)을 좋아하시는 정성이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로는 비록 1, 2년이 지체되더라도 오히려 크게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만, 사방의 선비들이 전하께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없음을 의심한다면 그 해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이는 이황이 재주와 기백은 선현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지만 성리학에서는 으뜸이라고 평한다. 이황이 부족하다는 재주와 기백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이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필시 용퇴를 중시한 이황을 바라본 이이의 심사가 반영되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이가 재주와 기백은 한 등급 깍아내리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학문을 두고는 그 추존하는 바가 극성하다. 조광조와 비교한 이이의 말은 자못 성대하다.

“서경덕(徐敬德)의 논설이 기(氣)를 이(理)로 인식한 것이 많았는데, 이황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학설을 지어 변론하였다. 이황이 세상 유종(儒宗)이 되어 조광조(趙光祖) 이후로 이황과 견줄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기국(器局)은 비록 광조에게 미치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精微)의 극지(極致)를 다 한데 이르러서는 또한 광조가 미칠 바가 아니었다.”

이이의 다음 말이 이황의 실제 삶을 그대로 적으면서도 그 위상을 절실히 적은 글로 사료된다.

“성질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가 옥과 같았다. 젊어서 과거로 출세하였으나 만년에는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고 벼슬을 즐기지 않았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