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를 함께 갖춘 김명원


문무를 함께 갖춘 김명원

 

<국조인물고>의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에 김명원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직제학 김천령(金千齡)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만균(金萬鈞)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퇴계 문하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한 것이 자못 상세하고 통달하였으므로, 이황이 가상(嘉尙)히 여기고, 큰 그릇이 되리라 인정하여 서책(書冊)을 주어서 학문(學問)을 권장하였다.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신도비명에 김명원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위대하도다! 충익공(忠翼公)은 우리의 선왕(先王)을 만나서, 경악(經幄)에 발탁되고부터 변경(邊境)의 직임에 두루 시용(試用)되었도다. 나라 안팎을 경영(經營)하여 공적이 날로 융성하였네. 어찌 공만이 모두 유능해서이겠는가? 선조[宣廟]가 공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로다. 나라의 큰 환난(患難)을 당하기에 미쳐 임금이 간난(艱難)과 위기(危機)를 넘길 적에 창황(蒼黃)하게 부월(斧鉞)을 받았으니 재질이 있더라도 또한 무엇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백발의 나이에 전쟁에 나가니 그는 장수(將帥)인가, 정승인가? 한 손으로 광란(狂瀾)의 물결을 막을 적에 그에게는 나라만 있고 자기 몸은 없었다네. 공의 사업(事業)을 개술(槪述)하면 하늘이 내려준 빼어난 호걸(豪傑)이지만, 공은 자기 공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은 그 공로를 생각하였네.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 자리 내놓자 정승의 위치에 순탄하게 올랐도다. 베푼 업적은 많았는데도 공손하게 아무 것도 없는 듯하였는데, 풍류(風流)가 돈독하고 후하였으니 세상에서 그를 흠잡을 자가 없도다. 그는 장수인 것도 같고 그는 정승인 것도 같네.”

이정귀의 비명을 읽자니 눈에 들어오는 말이 김명원을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재상)의 전형으로 밝히는 대목이다. 이정귀는 일화를 들어 김명원이 출상입상의 전형임을 밝혔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대부인(大夫人)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처음에 공은 기복(起復)당하여 순검사(巡檢使)가 되었고, 얼마 안 되어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에 임명되었다. 임금의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자 도성(都城)의 사람들이 크게 흩어졌는데, 공은 상복[墨衰]차림으로 전쟁에 임하다가, 후퇴하여 임진강(臨津江)을 수비하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강여울을 방비하니, 군사의 형세가 조금 떨쳐져서 왜적(倭賊)이 감히 갑자기 핍근하지는 못하였다.

공도 또한 우리 군사들을 위무(慰撫)하면서 움직이지 아니하니, 조정(朝廷)에서 그가 너무 신중함을 지키고 공격하지 않는가 의심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군사들을 독려(督勵)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임진강을 건너갔다가 왜적의 복병(伏兵)을 만나서 크게 패배하여 신길(申硈)과 유극량(劉克良)이 모두 전사하였다. 공은 말을 달려서 강나루 어귀에 이르러 나머지 군사들을 거두어서 임금의 행차(行次)를 도왔다.

왜적이 평양(平壤)을 함락하기에 미쳐 공은 순안(順安)에 머물러 있었는데, 왜적의 유기(游騎)가 날마다 부현(斧峴)까지 왔으므로, 공은 밤낮으로 행렬(行列)과 진영(陣營)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에도 옷에서 띠[帶]를 풀지 않으면서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요충지[要害]에 배치하여 적로(賊路)를 막아서 행재소(行在所)를 호위하니, 왜적이 감히 서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명(明)나라 장수 사유(史儒)가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패배하자 일로(一路)가 크게 놀라서 모두 말하기를,‘적병(賊兵)이 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그때에 임금의 대가가 바야흐로 용만(龍灣, 의주(義州)) 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혹자가 공에게 행조(行朝, 행재소(行在所))에 빨리 보고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이것을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조금 기다려서 확실히 소식을 전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참 있다가 왜적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듣고, 군사 막료(幕僚)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는 조정에서 군사를 진격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줄을 알고서, 여러 번 첩정(牒呈)하여 싸우기를 요청하고 공의 뜻을 시험하므로, 공은 이것을 싫어하여 손수 서명(署名)하고 첩정(牒呈)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는데,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 공이 곁에 있다가 놀라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곧바로 싸우는 것을 허락합니까?’라고 하였으나, 공은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김응서가 출병(出兵)하여 이곳저곳 배회(徘徊)하다가 왜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공은 또한 이것을 문책(問責)하지 않았고, 다만 사적으로 이공에게 이르기를, ‘이 자는 심장(心腸)이 곧지 못하니, 조심하고 그를 가볍게 믿지 마시지요.’라고 하니, 이공이 감탄하여 혀를 내둘렀다.”

국난을 당하여 사세가 급박하여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유종용하면서도 주도면밀한 모습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선조는 일찍이 김명원이 문무를 다 갖춘 인재임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역시 이정귀의 비문에 소상히 나온다.

“(함경도를) 순안(巡按)하고 돌아오면서부터 나라에서 공에게 변방(邊方)의 일을 맡겼는데, 임금이 그가 장상(將相)의 재질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오랑캐의 변란(變亂)이 일어나면 공은 북방으로 나갔고, 남방에서 왜란(倭亂)이 다급해지면 공은 남방으로 나갔으며, 인물(人物)을 임용하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맡아보는 일에 공이 아니면 불가할 때엔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양전(兩銓,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판서가 되었고, 왕화(王化)를 펴고 변방의 백성들을 진무(鎭撫)하는 일에 공이 아니면 불가할 때엔 공은 외방으로 나가서 병마사(兵馬使)의 직무를 맡았으니, 국가가 공으로써 나라의 안위(安危)를 저울질한 것이 거의 40년이었다. 그 충성과 노고(勞苦)가 중앙과 외방에서 나타나고 그 명망과 실적(實績)이 조야(朝野)에서 믿음을 얻기에 미쳐, 금구(金甌, 정승(政丞)의 자리)의 임명은 곧 (임금의) 특별한 간택(簡擇)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더욱 특이한 은전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김명원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는데, 그 근검하면서도 정성스러운 살림살이를 잘 보여준다.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직무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고, 병란을 당하였을 때에는 더욱 마음과 힘을 다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무릇 조회나 관청에 출근할 때에는 반드시 일찍 가고 늦게 파하기를 노년에 이르도록 게으르지 않았다. 집이 대대로 청렴결백하여 본래 노비와 토지가 없었는데, 공이 조정에 40년 동안 벼슬하면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공훈이 가장 성대하였으나 일찍이 생산을 경영한 적이 없었다.

성질이 검소한 것을 좋아하여 비록 손님을 접대할지라도 채소와 생선 두어 그릇에 불과하며, 거처와 음식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오직 친척과 옛 벗에게만은 정이 돈독하여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고 급한 이를 구제하여 아래로 미천한 자에게 미쳤다. 외삼촌 안한(安瀚)이 늙어 고독하게 되자 집에 데려다 봉양하면서 가족들에게 타이르기를,

‘돌아가신 어머니의 형제분 중에 외숙만 살아 계시니, 마땅히 돌아가신 어머니를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하였다. 그가 죽어 장사할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