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을 죽음에서 구한 정탁


이순신을 죽음에서 구한 정탁

 

<연려실기술> ‘선조조 상신’ 조에 정탁(鄭琢)이 나온다. 정탁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이기옥(李璣玉)의 일기(日記)에 조식이 정탁을 훈도한 내용이 나온다.

“약포상공(藥圃相公, 정탁)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남명(南冥)을 뵈었는데 작별에 임하여 남명이 홀연히 말씀하기를,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이 끌고 가게. 하니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자, 남명이 웃으며 말하기를, 군의 말과 얼굴빛이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馬]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으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수십 년을 다행히 큰 잘못 없이 지낸 것은 선생이 주신 것이다.’ 하였다.”

남명이 소를 가지고 정탁을 훈도하면서 한 말을 보건데 총민한 기국에 활달한 성품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는 정탁이 처음 과거에 급제했을 때에 이준경(李浚慶)이 한번 보고 큰 그릇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용모가 암용[雌龍]과 비슷하니 훗날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시양은 <부계기문>에서 정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정승 정탁이 시골에서 떨치고 일어나 교서관 정자가 되어 향실(香室)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부처에게 공양하려고 향실에 있는 향(香)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교사(郊社 교는 제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하고, 사는 사직(社稷)을 말한다.)에 바치는 물건이다.’ 하고 거절하며 따르지 않았다. 문정대비가 크게 노하여 법사(法司)에 내리도록 명하니 명성을 크게 떨쳤고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기롱이 있었는데, 비록 노복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악한 말로 꾸짖은 적이 없었으니, 그 후덕함이 높은 지위에 오를 만하였다.”

<부계기문>의 저자 김시양은 당색이 서인이고 정탁은 퇴계와 남명 계열의 학자로 동인이다. 당색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평이다. 여기에는 평소 정탁의 원만무별한 성품이 있었다. 정탁은 동인이었지만 당시 서인의 영수인 영의정 윤두수와도 친분이 각별했다. 정탁이 벼슬을 그만 둘 생각으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자 윤두수가 한강까지 직접 나와 작별을 아쉬워하는 석별의 시를 지었는데 지금 그 시가 예천 읍호정(挹湖亭)에 걸려있다.

 

정탁은 왜란을 당하여 조선이 풍전등화의 형국일 적에 나라를 구할 명장들을 많이 천거하고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온(鄭蘊)이 지은 묘지(墓誌)에 이렇게 적혀 있다.

“임진왜란 직전에 임금의 명에 따라 각기 알고 있는 인물을 천거하였는데, 공이 곽재우(郭再祐)ㆍ이순신(李舜臣)ㆍ김덕령(金德齡) 등의 재주가 장수가 될 만하다고 천거하였다. 덕령이 형을 받게 되자, 공이 적(敵)을 앞에 두고 명장을 죽여서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죽이고 말자 적들이 과연 술을 들며 서로 축하하였다.”

본래 김덕령이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거제도 왜적을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을 했다. 한번은 의병장 김덕령이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를 벌하다가 죽는 일이 생겼다. 김덕령은 투옥됐다. 정탁이 이야기를 듣고 구명에 나선다. 그는 “국가가 전란을 당했을 때는 한 명의 인재라도 아껴야 한다.”고 변호했다. 다행히 풀려났다. 그러나 후에 김덕령이 이몽학 역모에 휘말려 다시 체포되는데, 정탁이 이번에도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김덕령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정탁과 유성룡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나이는 정탁이 유성룡보다 16년 연장이다. 정탁이 태어난 곳은 외가인 예천 용문이지만 본가는 유성룡과 같은 안동이다. 정탁은 1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유성룡과 동문수학했다. 둘 다 퇴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약포는 1558년, 서애는 1566년 각각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했다. 정탁은 좌찬성으로 세자(광해군)를 모시고 강계로 향했다. 최악의 경우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할 것에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눈 것이다. 임금이 있는 곳은 ‘원조정(元朝廷)’, 세자가 있는 곳은 ‘분조(分朝)’라고 했다.

정탁은 세자와 함께 종묘사직을 받들고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지를 잠행하며 정세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모병과 작전 지휘, 의병장 격려 등 국사를 처리한다. 그때의 기록은 <용사일기(龍蛇日記)>로 남아 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실상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또한 유성룡과 정탁은 공교롭게도 이순신을 발탁하고 소생시키는 역할도 맡게 된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다. 당쟁과 모함 속에서 명령 불복종이 파직으로 이어진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한 충무공을 제거하는 계략을 마련하는데, 바로 첩자를 내세웠다. 그가 부산을 왕래하며 조선어에 능통한 요시라(要時羅)다. 왜군과 조선군 사이를 오가는 이중간첩이었다. 왜의 지령을 받은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1급 정보를 흘린다. 왜장 가토가 모월 모일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올 것이므로 조선의 수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라는 내용이다. 김응서는 조정에 바로 보고하여 출정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왜적의 계략으로 판단하고 출정하지 않았다. 어떤 기록은 이순신이 출정했으나 이미 가토가 바다를 건너 싸우지 못했다고 돼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 중인 현지 사령관의 압송은 백성의 분노를 샀다. 왜는 동인·서인의 극렬한 당쟁 구도를 꿰뚫어본 것이다.

당시 조선의 국문은 혹독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국문을 받고 이미 반죽음 상태가 돼 있었다. 선조는 단호했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고, 적을 놓아 주고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까지 한 것 또한 엄중한 죄다. 이렇게 죄상이 허다하므로 용서할 수 없으니 법률로 다스려 죽여야 함이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내린 전교(傳敎, 임금이 내린 명령)다. 이순신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누구도 이순신을 변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두 처벌을 주장하는 분위기였다. 다시 국문을 앞두고 이순신의 목숨은 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때 72세 노대신이 상소문을 올렸다. 그가 우의정을 지낸 지중추부사 정탁이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다. 정탁은 당시 지독한 감기에 걸려 직접 아뢰는 대신 병석에서 호소했다. 이순신의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유명한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이다.

 

“(…)이순신은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수륙전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을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무척 크고 적이 매우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고 조금도 용서할 구석이 없다고 판단해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의 사정을 규명하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정탁의 상소에 이어 유성룡·이원익 등도 이순신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선조의 반응에 모두 촉각이 곤두섰다. 놀랍게도 상소문은 선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이순신은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난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지 28일 만이다. 목숨을 건 신하의 바른 말이 장수를 살리고 이순신은 다시 명량대첩으로 나라를 구했다.

정탁의 구명으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선조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긴다. 전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13척이 전부였다. 한 달 뒤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의 각오로 명량에서 133척의 왜적을 맞아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대승을 거둔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은 유성룡이고, 위기에 빠진 이순신을 구한 사람은 정탁”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연으로 충무공 후손들은 얼마 전까지도 정탁의 제사 때 매년 참사하고 호칭도 ‘약포 할아버지’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앙시사매거진 2017년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