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 이산해


신동 이산해

 

후대의 역사에 기록된 이산해의 평가는 높지 않다. 이는 이산해가 동서의 분당과 다시 동인의 남북 분당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 있으면서 매번 당의 영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산해는 광해조의 실정과 폐륜에 적극 가담한 대북의 영수였다. 또한 친구 사이였던 정철을 몰아낸 건저사건은 이산해를 음흉한 정치가처럼 만들었다.

이산해는 동서로 파당이 나뉘어 다투기 전에는 이이와 교분을 나누는 사이였다. <연려실기술> ‘이산해’ 조에 <석담일기>를 전재하여 이이가 이산해를 평한 글을 적었다.

 

“젊었을 때부터 글을 잘하여 명성이 있었으며 벼슬길에 나온 뒤에는 청요(淸要)한 관직을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나 기절(氣節)이 적고 유약하여 남의 말을 피하기 때문에 위아래에 거슬림이 없어 물망(物望)을 잃지 않았다. 당파로 나누어진 뒤 한결같이 동인의 논의를 좇아서 이이(李珥)와 정철(鄭澈)같은 이들은 모두 뜻을 같이하던 친구였으나 저버리는 것을 어렵게 알지 않았다. 이이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친구 여수(汝受 산해의 자)는 오래지 않아 반드시 정승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정승은 모두 근실하고 신중하며 재기(才氣)가 없어 시책하는 바가 없이 청렴한 이름만 가진 사람이 하는데 여수가 그 사람이다.’ 하였다.”

 

이이는 이산해가 글을 잘하고, 근실하고 신중하며 청렴하다고 보았다. 다만 재기가 없어 정승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시책하는 바가 없을 것이라고 박하게 평하였다.

그런데 같은 <연려실기술> ‘이산해’ 조에 전재한 <석담일기>에서는 이이가 이산해의 재기를 허여하는 것처럼 말한다.

 

“공이 이조판서가 되자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나오지 않으니, 이이(李珥)가 가서 보고,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직분을 다하여 보답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오기를 권하였다. 공이 일을 다스리고 정사(政事 인사전형)를 하는데 청탁을 듣지 않으니, 이이가 듣고 말하기를, ‘세상 풍속을 구할 수 있겠다.’ 하였다.”

 

“대사헌 이이가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산해가 평소 벼슬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이조판서가 되자 모두 공의(公議)에 좇고 청탁을 행하지 않아 뜰 안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의 집 같고, 다만 듣고 본 착한 선비로서 벼슬길을 맑히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이같이 몇 년만 해나간다면 세상 풍속이 거의 변화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산해가 재기(才氣)가 있으나 능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유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였다.”

 

이산해가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세상 풍속을 구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재상이 되어서는 재기가 없어 시책하는 바가 없다고 평한 데에는 필시 이이의 깊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풍속을 구하는 것은 재기가 아니란 말인가? 게다가 선조는 “산해가 재기(才氣)가 있으나 능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유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라고 하니 전후의 말이 서로 조응하지 않는 데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이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성리학을 양분하는 거유로서, 젊어서 아홉 번 장원한 이른바 구도장원공으로 불린 당대의 천재였다. 이산해는 신동이었다. 예로부터 소년 천재들의 비범함은 그들이 지은 시에 드러난다.

이이가 9세에 지었다는 화석정(花石亭) 시는 임진강변의 화석정에 올라 가을의 정취를 노래한다.

林亭秋已晩 / 숲과 정자는 늦가을 지나

騷客意無窮 / 시 짓는 이들의 뜻이 한량없네.

遠水連天碧 / 멀리 흐르는 물 하늘에 이어 파랗고,

霜楓向日紅 / 서리 맞은 단풍 해를 따라 붉구나.

山吐孤輪月 / 산은 둥근 달 하나 토해냈고

江含萬里風 /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 머금었네.

寒鴉何處去 / 까마귀는 추운 날에 어디 가는고

聲斷暮雲中. / 저무는 구름 속으로 그 우는 소리 끊이는구나.

 

이산해는 5세에 계부 이지함에게 배웠다. 이지함이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치니, 한마디에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고 도(圖)를 가리키며 논설하였다. 일찍이 글을 읽으면 밥 먹는 것도 잊었다. 이지함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독서를 중지하게 하고 먹기를 기다리니, 이산해가 시를 지었다.

 

腹飢猶悶況心飢/
배 주리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마음이 주림이랴

食遲猶悶況學遲/
먹기를 더디하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공부가 더딤이랴

家貧尙有治心藥/
집은 가난해도 마음 다스릴 약은 있으니

 須待靈臺月出時/
모름지기 영대(靈臺마음)에 달 뜰 때를 기다리소서

 

이산해는 4세 때 능히 독서할 줄 알았고, 5세에는 시를 짓고 병풍 족자를 썼다. 7세에 지은 시가 있다.

 

一犬吠
한 마리 개가 짖고

 二犬吠
두 마리 개가 짖으니

三犬亦隨吠
세 마리 개가 또한 따라서 짖는다

童言山外月如鏡
동자의 말이 산 밖에 달이 거울 같이 밝아서

滿庭樹影閒婆娑
뜰에 가득한 나무 그림자가 한가롭게 흐늘거린다

 

이산해는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위인 이덕형이 이산해의 묘지명을 지으면서 소개한 내용이다.

“세상 물정에 대해 데면데면하였으며, 걱정스러운 일이 닥치거나 횡포(橫暴)한 일이 가해지더라도 그저 자신의 마음에 돌이켜보아 반성하고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그 유락(流落)하여 외지(外地)에 있을 때에도 간 혹 말 한 필에 동복(童僕) 하나만을 데리고 산수(山水) 사이에 왕래하면서 오직 외로운 구름이나 홀로 나는 새와 더불어 형해(形骸) 밖에 담연(澹然)하였으며, 때로는 경치와 시절에 감동하여 흥(興)을 일으키고 회포를 풀어 문득 시편(詩篇)에 나타냈다. 붓을 잡으면 빠르게 달리고 나는 듯이 움직여서 득의한 작품이 많았다.”

“수묵도(水墨圖)를 잘 그렸으나 남에게 보이지는 않았고, 때로 옛 그림을 보면 그림과 혼연일체가 되어 감상하였다. 글을 읽는 데는 열 줄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갔지만, 일찍이 글 읽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다.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 김인후(金麟厚))이 공의 시문(詩文)을 가리켜 말하기를, ‘비유컨대 마치 공중에 지어 놓은 누각(樓閣)과 같아서 천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일 착실하게 글을 읽었더라면 그저 그런 하찮은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였다. 평시에 저술(著述)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모두 병화(兵火)에 없어졌고 몇 편만을 수습해서 세상에 전한다.”

 

이충익은 <연려실기술> ‘이산해’ 조의 마지막에 현종 때 이선이 올린 소를 두고 이산해의 손자인 이무가 이를 반박하는 상소문의 대략을 기록하였다. 신동 이산해가 역사에서 사라진 전후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종(顯宗) 계축년(1673)에 이선(李選)이 올린 소 가운데 공의 이름 산해(山海) 두 자만을 쓰고 성과 벼슬을 쓰지 않았으며 이이첨(李爾瞻)과 아울러 칭하였다. 공의 손자 무(袤 전 사간)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첨은 죄인이요 신의 조부는 명상(名相)입니다. 나이 어린 사람이 본래 전고(典故)에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또한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신의 조부 산해는 5세 때에 기동(奇童)이란 이름이 있었고, 명종 때에 과거에 올라 선조(宣祖)께 신임을 얻어 광국(光國)ㆍ평난(平難) 두 공신에 함께 봉해졌으며, 거의 30년 가까이 이조판서와 영상을 지냈습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윤대관(輪對官) 김응생(金應生)이 신의 조부를 독단한다는 이유로 공격했을 때 선조께서 친필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조판서의 사람됨이 후한 덕, 높은 재주, 큰 기국, 바른 아량, 지극한 충성, 굳은 절개는 그만 두어 논하지 않고 다만 그 용모와 기상에 대해서만 논해도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덩어리의 진실한 기운이 혼연히 차고 쌓여서 한 점 가식과 궤변의 태도가 없으니, 진실로 군자 중에 군자인(君子人)이라 이를 수 있다. 저 응생이란 자는 내 뜻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고 이에 머리를 쳐들고 혀를 놀려 현혹시키고 이간질시키려고 드니, 그 행위를 살펴 보건데 해를 보고 짖는 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난해에는 경안령(慶安令) 요(瑤)가 유성룡을 참소(讒訴, 남을 해치려고 없는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일러바치는 일)하고 올해는 응생이 이산해를 참소하니, 이 두 사람은 곧 국가의 골간이요 주석(柱石) 같은 신하이거늘, 쉬파리 날뜀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다. 하셨습니다. 열 줄의 윤음(綸音)이 또렷이 어제 들은 것 같은데 어찌 뒤에 태어난 신진(新進) 무리가 용이하게 짓밟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한 바는 무신년간의 일을 가리킨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해에 인홍(仁弘)이 소를 올려 당시의 정승(유영경 柳永慶)을 죄에 빠뜨리려 하였는데, 일종의 뜬소문에 신의 조부가 원임 대신으로 물러나와 있었으므로 혹시 인홍과 통했는가 의심하였습니다. 신의 부친 경전(慶全)은 비록 날조된 무함의 화를 입었으나 그간의 시비는 스스로 사류의 공론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광해가 나라를 병 되게 하고 이첨이 집권하여 공훈을 책정할 때에, 사람들의 뒷공론을 두려워하여 신의 조부에게 이미 죽은 뒤에 억지로 훈적(勳籍)을 가하고 또 신의 부친까지 녹공하니, 신의 부친이 항장(抗章)을 올려 면제해 주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부친이 만약 인홍의 상소에 관여하여 알았다면 어찌 능히 오늘날 구실이 될 것을 예측하고서 당일의 부귀를 굳이 사양했겠습니까.’ 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