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을 용납한 이탁


송강 정철을 용납한 이탁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상신’ 조에 이탁(李鐸)이 나온다. 선조 초년에 이준경(李浚慶)이 병으로 정승을 사직하자 오겸이 우의정이 되었으나 인망이 없다 하여 탄핵을 당했다. 그 후 이탁을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이탁이 하명을 받고 문을 닫아걸고 자책하기를, “나 같은 자도 정승에 이르니 국가의 일이 마침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근심이 안색에 역력하였다. 사은숙배한 뒤에 스스로 학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송(宋) 나라 장영(張詠)의 ‘창생(蒼生)이 복이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비로소 취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이탁의 특출한 기백은 심수경(沈守慶)이 묘비명에 밝힌 고사 한 토막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이 15세에 숙모(叔母)를 모시고 남쪽 시골로 내려간 일이 있었다. 역려(逆旅)에서 동복(僮僕)들이 이웃 사람들과 싸웠는데 이웃 사람이 구타를 당한 자가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묵는 집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니, 일행이 기가 죽었다. 공이 나가 승상(繩床)에 걸터앉아 불러서 그 이유를 묻고 즉시 그 종을 결박하여 이웃 사람에게 넘겨주면서 말하기를, ‘살인자(殺人者)는 법(法)이 상명(償命)에 해당된다. 그가 도망갈까 두려워서 지금 너희에게 넘겨 관청에 고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때린 것이 손상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너희들이 감히 난동을 부렸다면 너희들도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문을 닫고 동복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계를 하니, 밤중에 이웃 사람이 몰래 그 종을 돌려보냈다. 의정공(議政公)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기를, ‘이는 그 형(兄)도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이 아이를 기필코 보낸 까닭이다.’ 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 학업(學業)에 힘써 공부를 하였고 사부(詞賦)를 잘했다. 벗을 사귀되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자를 택하였고 언동(言動)을 구차히 하지 않으니, 같은 무리들이 중히 여기고 감히 업신여기지 않았다.”

 

이탁이 이조판서를 맡고 있을 적에 정철이 낭관이 되어 공도(公道)를 힘써 주장하자, 말마다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하루는 웃으면서 정철에게 일러 말하기를, “오직 나만이 그대를 용납하지만 후일에는 반드시 용납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그 말과 같았다라고 심수경이 묘지명에 밝혀두었다.

 

이 일화를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좀 더 소상하게 적어두었다.

 

“이탁이 비록 높은 절조는 부족하였으나 너그럽고 후한 도량이 있었으며, 선비를 사랑하여 능히 그 직언(直言)을 용납하였다.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좌랑 정철(鄭澈)이 매번 벼슬자리의 후보를 천거하는 때마다 반드시 공론을 따르려 하여 공의 뜻을 어기고 번복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탁이 말없이 따랐다. 이윽고 웃으며 정철에게 말하기를, ‘나는 군을 용납하지만 뒷사람은 반드시 견디지 못할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담(洪曇)이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정철이 전과 같이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니, 홍담이 크게 노하였다. 정철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공의 도량은 남이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이 일화는 정철의 말처럼 이탁의 넓은 도량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도량이 넓어서만 되겠는가? 심수경의 말처럼 적폐를 바로잡고자 하는 뜻이 반영되었으리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거쳐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올랐다. 얼마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때에 권간(權奸)의 뒤를 잇게 되었지만 벼슬길이 흐리므로 공이 분연하게 적폐(積幣)를 바로잡고자 하여 관리를 뽑되 한결같이 공론을 주장하여 건백(建白)을 하였다. 재능과 행실이 있는 선비가 재능을 시험한 여부를 구애받지 않고 다 관직(官職)에 제수되니 식자(識者)들은 옳게 여겼으나 유속(流俗)들은 불평하고 더러는 새로 시작함을 허물로 여기기도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고질의 습관을 소통하여 척결할 수 없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사(明士)들이 아래에 침체되지 않고 서관(庶官)에 인재를 얻을 수 있었다. 근세(近世)에 전형(銓衡)을 맡은 자들이 공의 우(右)에 나가는 이가 없었고 선비의 인망이 더욱 무거웠다.”

 

심수경의 이 말은 실질에 가까운 듯하다. 이충익도 <연려실기술> ‘조선조 상신’ 조에서 이탁을 다루면서,

“이탁이 당시의 인망이 비록 박순(朴淳)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선비를 사랑하고 또 국량(局量)이 있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공도(公道)를 확장하는데 힘을 써서 인사 행정이 박순보다 나았다.”

라고 평한다.

 

율곡이 <석담일기>에서 “이탁이 비록 높은 절조는 부족하였으나 너그럽고 후한 도량이 있었으며, 선비를 사랑하여 능히 그 직언(直言)을 용납하였다.”라고 평했는데, 높은 절조는 부족했을지라도 너그럽고 후한 도량은 계구조신(戒懼操身)하는 일상의 삶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을 것이다.

 

“벼슬하지 않고 가정에 거처할 때는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복식(服飾)과 기용(器用)에 금옥(金玉)으로 장식한 그릇이나 능단(綾緞)의 옷이 없었다. 자제(子弟)를 교육하되 매번 청렴하게 할 것을 면려(勉勵)하였다. 본디 물건에 좋아하는 것이 없어서, 공퇴(公退)해서는 객(客)을 대하여 바둑을 두는 것뿐이었다. 가업(家業)이 본디 빈한하여 녹봉(祿俸)에만 의지했고 다른 경영이 없어서, 어떤 때는 양식이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盛)하고 가득 찬 것에 경계를 하여 자제들을 대하고 탄식하기를, ‘덕이 없으면서 높은 벼슬에 이르렀고 공(功)이 없으면서 후한 녹을 받고 있으니, 이는 화(禍)를 부르는 길이다. 너희들은 기뻐하지 말라.’ 하였다.”

 

이탁 평생의 삶은 다음의 말에 그대로 드러난다.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평생 한 일이 일찍이 사람을 대하고 말하지 못할 것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위(地位)가 매우 높아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따를 수 없었고 내가 내 한 집안의 일이지만 또한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숨길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평생 힘을 쓴 곳이다.’ 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