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와 성혼, 지우(知友)이자 라이벌


 

이이와 성혼, 지우(知友)이자 라이벌

 

이이는 1536년 생이고 성혼은 1535년 생으로 성혼이 한 살 더 많다. 양현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우다. 문과를 보지 않은 성혼이 관직에 나오게 되는 데에는 이이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동국18현으로 문묘에 종사될 때에도 양현은 공동운명이었다. 같이 들어갔다가 같이 퇴출되고 그리고 다시 같이 들어갔다.

양현은 기호학파의 두 영수로 영욕을 같이 한 바가 있다. 조익(趙翼)이 양현을 변호하며 올린 상소에도 이런 저간의 사정이 드러난다.

“두 신하의 현부(賢否)는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이(李珥)를 모함한 자는 정여립(鄭汝立)이요, 성혼을 모함한 자는 정인홍이었습니다. 두 신하의 문인으로 저명한 자는 조헌(趙憲)ㆍ오윤겸(吳允謙)ㆍ이귀(李貴)ㆍ황신(黃愼) 등이고, 그 밖에도 행실을 법도 있게 한 자와 벼슬살이를 청렴하게 한 자 및 전야(田野)에 은거하면서 몸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여 평생을 마친 자도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에 와서 볼 때 여림과 인홍의 말이 옳습니까, 조헌과 김장생의 말이 옳습니까. 유직(柳稷)의 논의는 바로 여립과 인홍이 남긴 말을 조술(祖述)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남 한 도로 말씀드리더라도, 처음엔 한 도의 논의가 두 사람을 배척했는데 똑같다가 그 후에 점점 깨닫는 자가 있었으니, 대개 정구(鄭逑)는 두 신하를 유현(儒賢)이라고 하였으며, 장현광(張顯光)은 높이 사모하여 다른 말이 없었고, 정경세(鄭經世)는 처음에는 그 지방 풍속을 따라서 경멸하고 멸시하기를 면치 못하였으나 그 뒤에 깨닫고, 항상 높이 칭송하였으니, 그 높이는 말을 신도 또한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그 중에서도 어질다는 이름이 있는 자는 모두 두 신하를 사모하였고, 다만 심하게 미혹하여 빠진 자만이 오히려 변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기호학파는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조선 후기의 정계와 학계에서 긴장과 갈등관계를 유지했다. 애초에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이 되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할된다. 노소 분당은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이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지만 노론은 율곡과 사승의 연원을 갖고 있다면 소론은 성혼에게서 그 학문적 연원을 찾는다.

애초에 양현을 문묘 종사하는 일에 관한 송시열(宋時烈)의 기록이 <연려실기술> ‘성혼’ 조에 나온다.

“인조반정(反正) 초에 유순익(柳舜翼)이 맨 먼저 율곡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청을 경연에서 발론하니, 녹당 이민구(李敏求)가 뒤이어 아뢰기를,‘이 일은 지금 이미 늦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해주(海州) 유생 윤홍민(尹弘敏)이 사계(沙溪)를 와서 보고 말하기를, ‘저희들은 율곡의 종사를 청하려고 왔습니다.’ 하니, 사계가 ‘좋다.’ 하고 말하였다.

조금 뒤에 다시 와서 뵈니 사계가, ‘너희들의 하는 일이 어찌 되었느냐?’ 하니, 홍민이 말하기를, ‘판서 오윤겸(吳允謙)이 저희들의 말을 듣고 바로 월사(月沙 이정구) 댁으로 가서 말하기를, 오늘 우계를 함께 거론하지 않으면 훗날에는 도모하기 어렵소. 공은 왜 해주 유생을 불러서 말하지 않소. 하여 월사가 저희들을 불러 오 판서의 뜻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자 사계가 탄식하기를, ‘일은 어렵게 되었다.’ 하였다.

그 후 을해년에 나의 종형(從兄)이 관학(館學)에서 발론하였는데,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은 율곡만의 단거론(單擧論)을 극력 주장하고 판서 이정백(李靜伯)은 우계, 율곡의 병거론(幷擧論)을 극력 주장하므로 종형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중의 논의까지도 좋지 않다고 여겨 동춘에게 의론하니, 곧 말하기를, ‘이와 같은 큰일을 어찌 사문(斯文)의 어른께 여쭙지 않는가.’ 하였다. 이에 연산(連山)으로 사람을 보냈더니, 신재(愼齋 김집(金集))가 회보하기를, ‘우계는 율곡에 비해 실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종사한 제현(諸賢)에 비한다면 어찌 우계가 못하다 하겠는가.’ 하여, 그 논의가 드디어 정해졌다.”

종사와 관련한 실상을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업적과 학문으로 보건대 이이가 성혼에 앞서는 것으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현의 고하를 따지는 일이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님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긍익은 종사에 관한 송시열의 이 기록 바로 아래에 소론의 영수가 되는 윤증이 평한 다음의 글을 기록해 두었다.

“선현의 고하(高下)는 스스로 사림(士林)의 정론이 있으니, 종사(從祀)의 청으로 말하면 또한 우계를 율곡의 다음으로 쳤으니, 자손들이 어찌 사의(私意)를 그 사이에 둘 수 있겠는가.”

잘 알려진 것처럼 선조에게 성혼을 추천한 이가 바로 이이이니, 성혼을 제일 먼저 알아준 이는 틀림없이 이이다. 그렇지만 이이가 당시의 명유들을 평하는 <석담일기>의 직필은 막역지우를 논하는 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이가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군은 7번이나 임금의 명을 받았는데, 어째서 한 번도 사은(謝恩)하지 않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어디 나같이 병들고 무능한 자를 부른 때가 있었는가.’

하였다.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재는 각기 그 때를 따르게 마련이다. 소열(昭烈 유비의 시호) 때에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으뜸가는 인물이었으나, 만약 그를 공자ㆍ맹자와 동시에 태어나게 했다면 공명이 어찌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 마침 인물이 적고 보니, 소명(召命)이 어찌 그대에게 내리지 않겠나.’

하였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대면한 자리라면 거북할 법도 한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이이고 보면 역시 이이이고, 이 말을 듣고 거북해했다는 성혼의 뒷말이 없으니 성혼이 역시 성혼이다.

<우계행장>에 이이가 성혼을 평한 내용이 나오는데,

“만약 도달한 견해에 대해 말하면 내가 약간 낫다고 하지만 독실한 지조와 행동에 있어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

는 말은 허언이 아닐 듯싶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이이가 본 이황


이이가 본 이황

 

조선을 대표하는 두 명의 유학자를 꼽으라면 누구나 이황과 이이를 꼽는다. 이황은 1501년 생이고 이이는 1536년 생으로 35년의 연수 차이가 나고 학문적 교류가 거의 없기는 했지만 이이 당시부터 현인으로 추앙받던 이황을 이이는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황과 이이의 후학들이 동서분당을 거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나뉘어 정치적, 학문적으로 불상용의 국면을 조선시대 내내 전개하기는 했지만 어찌 이러한 문호 다툼을 이황과 이이 양현에까지 소급할 수 있겠는가? 이이가 지은 <석담일기>는 인물평이 은후(隱厚)한 맛은 적고 각박하기까지 한데 이는 실상을 사실대로 기술하려고 한 이이의 의도가 있다. 그렇다면 <석담일기>에서 이황을 뭐라고 평하는지 살펴보자.

한편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이황을 서술하면서 동서분당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동각잡기(東閣雜記)>와 더불어 <석담일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이 또한 필시 용의가 있을 법하다.

이황은 나아가기는 겨울철 살얼음을 밟듯이 하고 물러나기는 전장에 나선 병마처럼 한다고 하여 늘 말이 많았다. 이황 스스로도 기대승과 주고받은 서신 중에 이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이이가 <석담일기>에 적은 내용이 있다.

“공이 산림에서 도를 지키니 인망이 날로 무거워갔다. 명종이 누차 불렀으나 이르지 않았다가 말년에 공을 불러 중국 사신을 접대하게 하자 공이 비로소 나갔으나, 사은숙배하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였다. 공이 이에 조정에 머물러 명종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직하니, 이이(李珥)가 공을 뵙고 말하기를,

‘어린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어려운 일이 허다하니 분의(分義 도리)로써 헤아려 볼 때 선생께서는 물러가서는 안 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도리로 보면 물러갈 수 없으나, 내 한 몸으로 본다면 몸에 병도 많고 재주도 또한 미치지 못하니 물러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성혼(成渾)이 참봉에 임명되었는데 오지 않았으므로 좌중의 손님이 ‘성혼은 어째 오지 않느냐?’고 말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성혼은 병이 많아서 직무를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억지로 벼슬하게 한다면 그를 괴롭히는 것에 불과하다.’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숙헌(叔獻)은 어째서 성혼에게는 후하게 대하고 나한테는 박하게 대하는가.’

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이 벼슬하는 것이 만일 선생과 같다면 일신의 사계(私計)는 돌아볼 것이 못 됩니다마는, 성혼으로 하여금 말직에 쫓아다니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만약 선생께서 경연에 계신다면 도움이 심히 클 것인데, 벼슬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일이지 어찌 자신을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이황은

‘벼슬이라는 것은 진실로 남을 위해서이다. 만약 남에게 이익이 미치지 못하면서 자신에게 우환이 절박하다면 할 수 없다.’

고 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조정에 계시면 설사 하는 바가 없다 하더라도 임금의 마음이 중하게 의지하고 인심이 기뻐하며 믿을 것이니, 이 역시 이익을 사람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하였다. ……누차 사양하자 체직을 허락하니, 다음날에 조정에 하직하지도 않고 돌아갔다. 이에 의논하는 자들이 간혹 명종의 장삿날이 임박했는데도 회장(會葬)하지 않고 지레 돌아 간 것을 잘못이라고 하였다.”

조정의 유현으로 이황의 역할을 기대한 이이의 심정이 고스란히 잘 보인다. 또한 이황이 쉽게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심사도 행간에서 느껴진다.

이황이 사망한 뒤에 선조가 행장(行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 행적을 적은 문장)이 없기 때문에 아직 시호를 내릴 수 없다는 영을 내리자 이이가 행장이 없더라도 시호를 내리기에 문자가 없다는 논지를 펴면서 이황을 평가한 내용이다.

 

“선조 6년(1573)에 여러 신하가 이황의 시호를 청하니, 임금이 행장(行狀)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어째서 행장을 짓지 않느냐?’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옛날 황간(黃幹)은 주자(朱子)의 높은 제자였지만 행장을 지은 것이 오히려 20년 뒤였으니, 하물며 이황의 문인들이 어찌 용이하게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황의 행적은 귀와 눈에 분명하게 남아 있는데 행장의 유무가 어찌 증감(增減)이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에 유학자로서 세상에 이름난 자가 비록 간혹 있으나, 그의 언행을 공평하게 살펴보면 유자의 표준에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황으로 말하면 정신과 기백은 비록 타고나서 억지로 만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재주와 기국은 진실로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만 일생을 성리학(性理學)에 침잠(沈潛)하여 언론과 지취(旨趣)를 글로 쓴 것은 비록 옛날 명유(名儒)의 말일지라도 또한 이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인으로 행적이 분명히 드러난 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표창하여 높이는 데에 인색하신데, 하물며 당대의 선비들에 대하여 어찌 선(善)을 좋아하시는 정성이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로는 비록 1, 2년이 지체되더라도 오히려 크게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만, 사방의 선비들이 전하께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없음을 의심한다면 그 해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이는 이황이 재주와 기백은 선현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지만 성리학에서는 으뜸이라고 평한다. 이황이 부족하다는 재주와 기백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이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필시 용퇴를 중시한 이황을 바라본 이이의 심사가 반영되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이가 재주와 기백은 한 등급 깍아내리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학문을 두고는 그 추존하는 바가 극성하다. 조광조와 비교한 이이의 말은 자못 성대하다.

“서경덕(徐敬德)의 논설이 기(氣)를 이(理)로 인식한 것이 많았는데, 이황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학설을 지어 변론하였다. 이황이 세상 유종(儒宗)이 되어 조광조(趙光祖) 이후로 이황과 견줄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기국(器局)은 비록 광조에게 미치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精微)의 극지(極致)를 다 한데 이르러서는 또한 광조가 미칠 바가 아니었다.”

이이의 다음 말이 이황의 실제 삶을 그대로 적으면서도 그 위상을 절실히 적은 글로 사료된다.

“성질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가 옥과 같았다. 젊어서 과거로 출세하였으나 만년에는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고 벼슬을 즐기지 않았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문무를 함께 갖춘 김명원


문무를 함께 갖춘 김명원

 

<국조인물고>의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에 김명원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직제학 김천령(金千齡)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만균(金萬鈞)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퇴계 문하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한 것이 자못 상세하고 통달하였으므로, 이황이 가상(嘉尙)히 여기고, 큰 그릇이 되리라 인정하여 서책(書冊)을 주어서 학문(學問)을 권장하였다.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신도비명에 김명원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위대하도다! 충익공(忠翼公)은 우리의 선왕(先王)을 만나서, 경악(經幄)에 발탁되고부터 변경(邊境)의 직임에 두루 시용(試用)되었도다. 나라 안팎을 경영(經營)하여 공적이 날로 융성하였네. 어찌 공만이 모두 유능해서이겠는가? 선조[宣廟]가 공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로다. 나라의 큰 환난(患難)을 당하기에 미쳐 임금이 간난(艱難)과 위기(危機)를 넘길 적에 창황(蒼黃)하게 부월(斧鉞)을 받았으니 재질이 있더라도 또한 무엇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백발의 나이에 전쟁에 나가니 그는 장수(將帥)인가, 정승인가? 한 손으로 광란(狂瀾)의 물결을 막을 적에 그에게는 나라만 있고 자기 몸은 없었다네. 공의 사업(事業)을 개술(槪述)하면 하늘이 내려준 빼어난 호걸(豪傑)이지만, 공은 자기 공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은 그 공로를 생각하였네.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 자리 내놓자 정승의 위치에 순탄하게 올랐도다. 베푼 업적은 많았는데도 공손하게 아무 것도 없는 듯하였는데, 풍류(風流)가 돈독하고 후하였으니 세상에서 그를 흠잡을 자가 없도다. 그는 장수인 것도 같고 그는 정승인 것도 같네.”

이정귀의 비명을 읽자니 눈에 들어오는 말이 김명원을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재상)의 전형으로 밝히는 대목이다. 이정귀는 일화를 들어 김명원이 출상입상의 전형임을 밝혔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대부인(大夫人)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처음에 공은 기복(起復)당하여 순검사(巡檢使)가 되었고, 얼마 안 되어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에 임명되었다. 임금의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자 도성(都城)의 사람들이 크게 흩어졌는데, 공은 상복[墨衰]차림으로 전쟁에 임하다가, 후퇴하여 임진강(臨津江)을 수비하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강여울을 방비하니, 군사의 형세가 조금 떨쳐져서 왜적(倭賊)이 감히 갑자기 핍근하지는 못하였다.

공도 또한 우리 군사들을 위무(慰撫)하면서 움직이지 아니하니, 조정(朝廷)에서 그가 너무 신중함을 지키고 공격하지 않는가 의심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군사들을 독려(督勵)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임진강을 건너갔다가 왜적의 복병(伏兵)을 만나서 크게 패배하여 신길(申硈)과 유극량(劉克良)이 모두 전사하였다. 공은 말을 달려서 강나루 어귀에 이르러 나머지 군사들을 거두어서 임금의 행차(行次)를 도왔다.

왜적이 평양(平壤)을 함락하기에 미쳐 공은 순안(順安)에 머물러 있었는데, 왜적의 유기(游騎)가 날마다 부현(斧峴)까지 왔으므로, 공은 밤낮으로 행렬(行列)과 진영(陣營)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에도 옷에서 띠[帶]를 풀지 않으면서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요충지[要害]에 배치하여 적로(賊路)를 막아서 행재소(行在所)를 호위하니, 왜적이 감히 서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명(明)나라 장수 사유(史儒)가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패배하자 일로(一路)가 크게 놀라서 모두 말하기를,‘적병(賊兵)이 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그때에 임금의 대가가 바야흐로 용만(龍灣, 의주(義州)) 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혹자가 공에게 행조(行朝, 행재소(行在所))에 빨리 보고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이것을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조금 기다려서 확실히 소식을 전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참 있다가 왜적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듣고, 군사 막료(幕僚)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는 조정에서 군사를 진격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줄을 알고서, 여러 번 첩정(牒呈)하여 싸우기를 요청하고 공의 뜻을 시험하므로, 공은 이것을 싫어하여 손수 서명(署名)하고 첩정(牒呈)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는데,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 공이 곁에 있다가 놀라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곧바로 싸우는 것을 허락합니까?’라고 하였으나, 공은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김응서가 출병(出兵)하여 이곳저곳 배회(徘徊)하다가 왜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공은 또한 이것을 문책(問責)하지 않았고, 다만 사적으로 이공에게 이르기를, ‘이 자는 심장(心腸)이 곧지 못하니, 조심하고 그를 가볍게 믿지 마시지요.’라고 하니, 이공이 감탄하여 혀를 내둘렀다.”

국난을 당하여 사세가 급박하여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유종용하면서도 주도면밀한 모습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선조는 일찍이 김명원이 문무를 다 갖춘 인재임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역시 이정귀의 비문에 소상히 나온다.

“(함경도를) 순안(巡按)하고 돌아오면서부터 나라에서 공에게 변방(邊方)의 일을 맡겼는데, 임금이 그가 장상(將相)의 재질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오랑캐의 변란(變亂)이 일어나면 공은 북방으로 나갔고, 남방에서 왜란(倭亂)이 다급해지면 공은 남방으로 나갔으며, 인물(人物)을 임용하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맡아보는 일에 공이 아니면 불가할 때엔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양전(兩銓,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판서가 되었고, 왕화(王化)를 펴고 변방의 백성들을 진무(鎭撫)하는 일에 공이 아니면 불가할 때엔 공은 외방으로 나가서 병마사(兵馬使)의 직무를 맡았으니, 국가가 공으로써 나라의 안위(安危)를 저울질한 것이 거의 40년이었다. 그 충성과 노고(勞苦)가 중앙과 외방에서 나타나고 그 명망과 실적(實績)이 조야(朝野)에서 믿음을 얻기에 미쳐, 금구(金甌, 정승(政丞)의 자리)의 임명은 곧 (임금의) 특별한 간택(簡擇)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더욱 특이한 은전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김명원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는데, 그 근검하면서도 정성스러운 살림살이를 잘 보여준다.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직무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고, 병란을 당하였을 때에는 더욱 마음과 힘을 다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무릇 조회나 관청에 출근할 때에는 반드시 일찍 가고 늦게 파하기를 노년에 이르도록 게으르지 않았다. 집이 대대로 청렴결백하여 본래 노비와 토지가 없었는데, 공이 조정에 40년 동안 벼슬하면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공훈이 가장 성대하였으나 일찍이 생산을 경영한 적이 없었다.

성질이 검소한 것을 좋아하여 비록 손님을 접대할지라도 채소와 생선 두어 그릇에 불과하며, 거처와 음식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오직 친척과 옛 벗에게만은 정이 돈독하여 가난한 자를 돌보아 주고 급한 이를 구제하여 아래로 미천한 자에게 미쳤다. 외삼촌 안한(安瀚)이 늙어 고독하게 되자 집에 데려다 봉양하면서 가족들에게 타이르기를,

‘돌아가신 어머니의 형제분 중에 외숙만 살아 계시니, 마땅히 돌아가신 어머니를 섬기는 것처럼 섬겨야 한다.’

하였다. 그가 죽어 장사할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

이순신을 죽음에서 구한 정탁


이순신을 죽음에서 구한 정탁

 

<연려실기술> ‘선조조 상신’ 조에 정탁(鄭琢)이 나온다. 정탁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이기옥(李璣玉)의 일기(日記)에 조식이 정탁을 훈도한 내용이 나온다.

“약포상공(藥圃相公, 정탁)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남명(南冥)을 뵈었는데 작별에 임하여 남명이 홀연히 말씀하기를,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이 끌고 가게. 하니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자, 남명이 웃으며 말하기를, 군의 말과 얼굴빛이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馬]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으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수십 년을 다행히 큰 잘못 없이 지낸 것은 선생이 주신 것이다.’ 하였다.”

남명이 소를 가지고 정탁을 훈도하면서 한 말을 보건데 총민한 기국에 활달한 성품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는 정탁이 처음 과거에 급제했을 때에 이준경(李浚慶)이 한번 보고 큰 그릇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용모가 암용[雌龍]과 비슷하니 훗날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시양은 <부계기문>에서 정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정승 정탁이 시골에서 떨치고 일어나 교서관 정자가 되어 향실(香室)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부처에게 공양하려고 향실에 있는 향(香)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교사(郊社 교는 제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하고, 사는 사직(社稷)을 말한다.)에 바치는 물건이다.’ 하고 거절하며 따르지 않았다. 문정대비가 크게 노하여 법사(法司)에 내리도록 명하니 명성을 크게 떨쳤고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기롱이 있었는데, 비록 노복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악한 말로 꾸짖은 적이 없었으니, 그 후덕함이 높은 지위에 오를 만하였다.”

<부계기문>의 저자 김시양은 당색이 서인이고 정탁은 퇴계와 남명 계열의 학자로 동인이다. 당색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평이다. 여기에는 평소 정탁의 원만무별한 성품이 있었다. 정탁은 동인이었지만 당시 서인의 영수인 영의정 윤두수와도 친분이 각별했다. 정탁이 벼슬을 그만 둘 생각으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자 윤두수가 한강까지 직접 나와 작별을 아쉬워하는 석별의 시를 지었는데 지금 그 시가 예천 읍호정(挹湖亭)에 걸려있다.

 

정탁은 왜란을 당하여 조선이 풍전등화의 형국일 적에 나라를 구할 명장들을 많이 천거하고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온(鄭蘊)이 지은 묘지(墓誌)에 이렇게 적혀 있다.

“임진왜란 직전에 임금의 명에 따라 각기 알고 있는 인물을 천거하였는데, 공이 곽재우(郭再祐)ㆍ이순신(李舜臣)ㆍ김덕령(金德齡) 등의 재주가 장수가 될 만하다고 천거하였다. 덕령이 형을 받게 되자, 공이 적(敵)을 앞에 두고 명장을 죽여서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죽이고 말자 적들이 과연 술을 들며 서로 축하하였다.”

본래 김덕령이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거제도 왜적을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을 했다. 한번은 의병장 김덕령이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를 벌하다가 죽는 일이 생겼다. 김덕령은 투옥됐다. 정탁이 이야기를 듣고 구명에 나선다. 그는 “국가가 전란을 당했을 때는 한 명의 인재라도 아껴야 한다.”고 변호했다. 다행히 풀려났다. 그러나 후에 김덕령이 이몽학 역모에 휘말려 다시 체포되는데, 정탁이 이번에도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김덕령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정탁과 유성룡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나이는 정탁이 유성룡보다 16년 연장이다. 정탁이 태어난 곳은 외가인 예천 용문이지만 본가는 유성룡과 같은 안동이다. 정탁은 1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유성룡과 동문수학했다. 둘 다 퇴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약포는 1558년, 서애는 1566년 각각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갔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했다. 정탁은 좌찬성으로 세자(광해군)를 모시고 강계로 향했다. 최악의 경우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할 것에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눈 것이다. 임금이 있는 곳은 ‘원조정(元朝廷)’, 세자가 있는 곳은 ‘분조(分朝)’라고 했다.

정탁은 세자와 함께 종묘사직을 받들고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지를 잠행하며 정세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모병과 작전 지휘, 의병장 격려 등 국사를 처리한다. 그때의 기록은 <용사일기(龍蛇日記)>로 남아 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실상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또한 유성룡과 정탁은 공교롭게도 이순신을 발탁하고 소생시키는 역할도 맡게 된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다. 당쟁과 모함 속에서 명령 불복종이 파직으로 이어진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한 충무공을 제거하는 계략을 마련하는데, 바로 첩자를 내세웠다. 그가 부산을 왕래하며 조선어에 능통한 요시라(要時羅)다. 왜군과 조선군 사이를 오가는 이중간첩이었다. 왜의 지령을 받은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1급 정보를 흘린다. 왜장 가토가 모월 모일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올 것이므로 조선의 수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라는 내용이다. 김응서는 조정에 바로 보고하여 출정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왜적의 계략으로 판단하고 출정하지 않았다. 어떤 기록은 이순신이 출정했으나 이미 가토가 바다를 건너 싸우지 못했다고 돼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 중인 현지 사령관의 압송은 백성의 분노를 샀다. 왜는 동인·서인의 극렬한 당쟁 구도를 꿰뚫어본 것이다.

당시 조선의 국문은 혹독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국문을 받고 이미 반죽음 상태가 돼 있었다. 선조는 단호했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고, 적을 놓아 주고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까지 한 것 또한 엄중한 죄다. 이렇게 죄상이 허다하므로 용서할 수 없으니 법률로 다스려 죽여야 함이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내린 전교(傳敎, 임금이 내린 명령)다. 이순신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누구도 이순신을 변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두 처벌을 주장하는 분위기였다. 다시 국문을 앞두고 이순신의 목숨은 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때 72세 노대신이 상소문을 올렸다. 그가 우의정을 지낸 지중추부사 정탁이다. 죽음을 무릅쓰고서다. 정탁은 당시 지독한 감기에 걸려 직접 아뢰는 대신 병석에서 호소했다. 이순신의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유명한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이다.

 

“(…)이순신은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수륙전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을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무척 크고 적이 매우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고 조금도 용서할 구석이 없다고 판단해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의 사정을 규명하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정탁의 상소에 이어 유성룡·이원익 등도 이순신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선조의 반응에 모두 촉각이 곤두섰다. 놀랍게도 상소문은 선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이순신은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난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지 28일 만이다. 목숨을 건 신하의 바른 말이 장수를 살리고 이순신은 다시 명량대첩으로 나라를 구했다.

정탁의 구명으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선조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긴다. 전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13척이 전부였다. 한 달 뒤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의 각오로 명량에서 133척의 왜적을 맞아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대승을 거둔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은 유성룡이고, 위기에 빠진 이순신을 구한 사람은 정탁”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연으로 충무공 후손들은 얼마 전까지도 정탁의 제사 때 매년 참사하고 호칭도 ‘약포 할아버지’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앙시사매거진 2017년 4호

신동 이산해


신동 이산해

 

후대의 역사에 기록된 이산해의 평가는 높지 않다. 이는 이산해가 동서의 분당과 다시 동인의 남북 분당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 있으면서 매번 당의 영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산해는 광해조의 실정과 폐륜에 적극 가담한 대북의 영수였다. 또한 친구 사이였던 정철을 몰아낸 건저사건은 이산해를 음흉한 정치가처럼 만들었다.

이산해는 동서로 파당이 나뉘어 다투기 전에는 이이와 교분을 나누는 사이였다. <연려실기술> ‘이산해’ 조에 <석담일기>를 전재하여 이이가 이산해를 평한 글을 적었다.

 

“젊었을 때부터 글을 잘하여 명성이 있었으며 벼슬길에 나온 뒤에는 청요(淸要)한 관직을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나 기절(氣節)이 적고 유약하여 남의 말을 피하기 때문에 위아래에 거슬림이 없어 물망(物望)을 잃지 않았다. 당파로 나누어진 뒤 한결같이 동인의 논의를 좇아서 이이(李珥)와 정철(鄭澈)같은 이들은 모두 뜻을 같이하던 친구였으나 저버리는 것을 어렵게 알지 않았다. 이이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친구 여수(汝受 산해의 자)는 오래지 않아 반드시 정승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정승은 모두 근실하고 신중하며 재기(才氣)가 없어 시책하는 바가 없이 청렴한 이름만 가진 사람이 하는데 여수가 그 사람이다.’ 하였다.”

 

이이는 이산해가 글을 잘하고, 근실하고 신중하며 청렴하다고 보았다. 다만 재기가 없어 정승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시책하는 바가 없을 것이라고 박하게 평하였다.

그런데 같은 <연려실기술> ‘이산해’ 조에 전재한 <석담일기>에서는 이이가 이산해의 재기를 허여하는 것처럼 말한다.

 

“공이 이조판서가 되자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나오지 않으니, 이이(李珥)가 가서 보고,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직분을 다하여 보답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오기를 권하였다. 공이 일을 다스리고 정사(政事 인사전형)를 하는데 청탁을 듣지 않으니, 이이가 듣고 말하기를, ‘세상 풍속을 구할 수 있겠다.’ 하였다.”

 

“대사헌 이이가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산해가 평소 벼슬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이조판서가 되자 모두 공의(公議)에 좇고 청탁을 행하지 않아 뜰 안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의 집 같고, 다만 듣고 본 착한 선비로서 벼슬길을 맑히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이같이 몇 년만 해나간다면 세상 풍속이 거의 변화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산해가 재기(才氣)가 있으나 능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유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였다.”

 

이산해가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세상 풍속을 구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재상이 되어서는 재기가 없어 시책하는 바가 없다고 평한 데에는 필시 이이의 깊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풍속을 구하는 것은 재기가 아니란 말인가? 게다가 선조는 “산해가 재기(才氣)가 있으나 능력을 자랑하는 의사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유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라고 하니 전후의 말이 서로 조응하지 않는 데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이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성리학을 양분하는 거유로서, 젊어서 아홉 번 장원한 이른바 구도장원공으로 불린 당대의 천재였다. 이산해는 신동이었다. 예로부터 소년 천재들의 비범함은 그들이 지은 시에 드러난다.

이이가 9세에 지었다는 화석정(花石亭) 시는 임진강변의 화석정에 올라 가을의 정취를 노래한다.

林亭秋已晩 / 숲과 정자는 늦가을 지나

騷客意無窮 / 시 짓는 이들의 뜻이 한량없네.

遠水連天碧 / 멀리 흐르는 물 하늘에 이어 파랗고,

霜楓向日紅 / 서리 맞은 단풍 해를 따라 붉구나.

山吐孤輪月 / 산은 둥근 달 하나 토해냈고

江含萬里風 /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 머금었네.

寒鴉何處去 / 까마귀는 추운 날에 어디 가는고

聲斷暮雲中. / 저무는 구름 속으로 그 우는 소리 끊이는구나.

 

이산해는 5세에 계부 이지함에게 배웠다. 이지함이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치니, 한마디에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고 도(圖)를 가리키며 논설하였다. 일찍이 글을 읽으면 밥 먹는 것도 잊었다. 이지함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독서를 중지하게 하고 먹기를 기다리니, 이산해가 시를 지었다.

 

腹飢猶悶況心飢/
배 주리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마음이 주림이랴

食遲猶悶況學遲/
먹기를 더디하는 것도 민망커든 하물며 공부가 더딤이랴

家貧尙有治心藥/
집은 가난해도 마음 다스릴 약은 있으니

 須待靈臺月出時/
모름지기 영대(靈臺마음)에 달 뜰 때를 기다리소서

 

이산해는 4세 때 능히 독서할 줄 알았고, 5세에는 시를 짓고 병풍 족자를 썼다. 7세에 지은 시가 있다.

 

一犬吠
한 마리 개가 짖고

 二犬吠
두 마리 개가 짖으니

三犬亦隨吠
세 마리 개가 또한 따라서 짖는다

童言山外月如鏡
동자의 말이 산 밖에 달이 거울 같이 밝아서

滿庭樹影閒婆娑
뜰에 가득한 나무 그림자가 한가롭게 흐늘거린다

 

이산해는 문장에 능해 선조조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위인 이덕형이 이산해의 묘지명을 지으면서 소개한 내용이다.

“세상 물정에 대해 데면데면하였으며, 걱정스러운 일이 닥치거나 횡포(橫暴)한 일이 가해지더라도 그저 자신의 마음에 돌이켜보아 반성하고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그 유락(流落)하여 외지(外地)에 있을 때에도 간 혹 말 한 필에 동복(童僕) 하나만을 데리고 산수(山水) 사이에 왕래하면서 오직 외로운 구름이나 홀로 나는 새와 더불어 형해(形骸) 밖에 담연(澹然)하였으며, 때로는 경치와 시절에 감동하여 흥(興)을 일으키고 회포를 풀어 문득 시편(詩篇)에 나타냈다. 붓을 잡으면 빠르게 달리고 나는 듯이 움직여서 득의한 작품이 많았다.”

“수묵도(水墨圖)를 잘 그렸으나 남에게 보이지는 않았고, 때로 옛 그림을 보면 그림과 혼연일체가 되어 감상하였다. 글을 읽는 데는 열 줄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갔지만, 일찍이 글 읽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다.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 김인후(金麟厚))이 공의 시문(詩文)을 가리켜 말하기를, ‘비유컨대 마치 공중에 지어 놓은 누각(樓閣)과 같아서 천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일 착실하게 글을 읽었더라면 그저 그런 하찮은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였다. 평시에 저술(著述)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모두 병화(兵火)에 없어졌고 몇 편만을 수습해서 세상에 전한다.”

 

이충익은 <연려실기술> ‘이산해’ 조의 마지막에 현종 때 이선이 올린 소를 두고 이산해의 손자인 이무가 이를 반박하는 상소문의 대략을 기록하였다. 신동 이산해가 역사에서 사라진 전후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종(顯宗) 계축년(1673)에 이선(李選)이 올린 소 가운데 공의 이름 산해(山海) 두 자만을 쓰고 성과 벼슬을 쓰지 않았으며 이이첨(李爾瞻)과 아울러 칭하였다. 공의 손자 무(袤 전 사간)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첨은 죄인이요 신의 조부는 명상(名相)입니다. 나이 어린 사람이 본래 전고(典故)에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또한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신의 조부 산해는 5세 때에 기동(奇童)이란 이름이 있었고, 명종 때에 과거에 올라 선조(宣祖)께 신임을 얻어 광국(光國)ㆍ평난(平難) 두 공신에 함께 봉해졌으며, 거의 30년 가까이 이조판서와 영상을 지냈습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윤대관(輪對官) 김응생(金應生)이 신의 조부를 독단한다는 이유로 공격했을 때 선조께서 친필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조판서의 사람됨이 후한 덕, 높은 재주, 큰 기국, 바른 아량, 지극한 충성, 굳은 절개는 그만 두어 논하지 않고 다만 그 용모와 기상에 대해서만 논해도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덩어리의 진실한 기운이 혼연히 차고 쌓여서 한 점 가식과 궤변의 태도가 없으니, 진실로 군자 중에 군자인(君子人)이라 이를 수 있다. 저 응생이란 자는 내 뜻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고 이에 머리를 쳐들고 혀를 놀려 현혹시키고 이간질시키려고 드니, 그 행위를 살펴 보건데 해를 보고 짖는 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난해에는 경안령(慶安令) 요(瑤)가 유성룡을 참소(讒訴, 남을 해치려고 없는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일러바치는 일)하고 올해는 응생이 이산해를 참소하니, 이 두 사람은 곧 국가의 골간이요 주석(柱石) 같은 신하이거늘, 쉬파리 날뜀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다. 하셨습니다. 열 줄의 윤음(綸音)이 또렷이 어제 들은 것 같은데 어찌 뒤에 태어난 신진(新進) 무리가 용이하게 짓밟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한 바는 무신년간의 일을 가리킨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해에 인홍(仁弘)이 소를 올려 당시의 정승(유영경 柳永慶)을 죄에 빠뜨리려 하였는데, 일종의 뜬소문에 신의 조부가 원임 대신으로 물러나와 있었으므로 혹시 인홍과 통했는가 의심하였습니다. 신의 부친 경전(慶全)은 비록 날조된 무함의 화를 입었으나 그간의 시비는 스스로 사류의 공론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광해가 나라를 병 되게 하고 이첨이 집권하여 공훈을 책정할 때에, 사람들의 뒷공론을 두려워하여 신의 조부에게 이미 죽은 뒤에 억지로 훈적(勳籍)을 가하고 또 신의 부친까지 녹공하니, 신의 부친이 항장(抗章)을 올려 면제해 주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부친이 만약 인홍의 상소에 관여하여 알았다면 어찌 능히 오늘날 구실이 될 것을 예측하고서 당일의 부귀를 굳이 사양했겠습니까.’ 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송강 정철을 용납한 이탁


송강 정철을 용납한 이탁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상신’ 조에 이탁(李鐸)이 나온다. 선조 초년에 이준경(李浚慶)이 병으로 정승을 사직하자 오겸이 우의정이 되었으나 인망이 없다 하여 탄핵을 당했다. 그 후 이탁을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이탁이 하명을 받고 문을 닫아걸고 자책하기를, “나 같은 자도 정승에 이르니 국가의 일이 마침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근심이 안색에 역력하였다. 사은숙배한 뒤에 스스로 학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송(宋) 나라 장영(張詠)의 ‘창생(蒼生)이 복이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비로소 취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이탁의 특출한 기백은 심수경(沈守慶)이 묘비명에 밝힌 고사 한 토막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이 15세에 숙모(叔母)를 모시고 남쪽 시골로 내려간 일이 있었다. 역려(逆旅)에서 동복(僮僕)들이 이웃 사람들과 싸웠는데 이웃 사람이 구타를 당한 자가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묵는 집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니, 일행이 기가 죽었다. 공이 나가 승상(繩床)에 걸터앉아 불러서 그 이유를 묻고 즉시 그 종을 결박하여 이웃 사람에게 넘겨주면서 말하기를, ‘살인자(殺人者)는 법(法)이 상명(償命)에 해당된다. 그가 도망갈까 두려워서 지금 너희에게 넘겨 관청에 고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때린 것이 손상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너희들이 감히 난동을 부렸다면 너희들도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문을 닫고 동복들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계를 하니, 밤중에 이웃 사람이 몰래 그 종을 돌려보냈다. 의정공(議政公)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기를, ‘이는 그 형(兄)도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이 아이를 기필코 보낸 까닭이다.’ 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 학업(學業)에 힘써 공부를 하였고 사부(詞賦)를 잘했다. 벗을 사귀되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자를 택하였고 언동(言動)을 구차히 하지 않으니, 같은 무리들이 중히 여기고 감히 업신여기지 않았다.”

 

이탁이 이조판서를 맡고 있을 적에 정철이 낭관이 되어 공도(公道)를 힘써 주장하자, 말마다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하루는 웃으면서 정철에게 일러 말하기를, “오직 나만이 그대를 용납하지만 후일에는 반드시 용납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그 말과 같았다라고 심수경이 묘지명에 밝혀두었다.

 

이 일화를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좀 더 소상하게 적어두었다.

 

“이탁이 비록 높은 절조는 부족하였으나 너그럽고 후한 도량이 있었으며, 선비를 사랑하여 능히 그 직언(直言)을 용납하였다.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좌랑 정철(鄭澈)이 매번 벼슬자리의 후보를 천거하는 때마다 반드시 공론을 따르려 하여 공의 뜻을 어기고 번복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탁이 말없이 따랐다. 이윽고 웃으며 정철에게 말하기를, ‘나는 군을 용납하지만 뒷사람은 반드시 견디지 못할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담(洪曇)이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정철이 전과 같이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니, 홍담이 크게 노하였다. 정철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공의 도량은 남이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이 일화는 정철의 말처럼 이탁의 넓은 도량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도량이 넓어서만 되겠는가? 심수경의 말처럼 적폐를 바로잡고자 하는 뜻이 반영되었으리라.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거쳐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올랐다. 얼마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때에 권간(權奸)의 뒤를 잇게 되었지만 벼슬길이 흐리므로 공이 분연하게 적폐(積幣)를 바로잡고자 하여 관리를 뽑되 한결같이 공론을 주장하여 건백(建白)을 하였다. 재능과 행실이 있는 선비가 재능을 시험한 여부를 구애받지 않고 다 관직(官職)에 제수되니 식자(識者)들은 옳게 여겼으나 유속(流俗)들은 불평하고 더러는 새로 시작함을 허물로 여기기도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고질의 습관을 소통하여 척결할 수 없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사(明士)들이 아래에 침체되지 않고 서관(庶官)에 인재를 얻을 수 있었다. 근세(近世)에 전형(銓衡)을 맡은 자들이 공의 우(右)에 나가는 이가 없었고 선비의 인망이 더욱 무거웠다.”

 

심수경의 이 말은 실질에 가까운 듯하다. 이충익도 <연려실기술> ‘조선조 상신’ 조에서 이탁을 다루면서,

“이탁이 당시의 인망이 비록 박순(朴淳)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선비를 사랑하고 또 국량(局量)이 있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공도(公道)를 확장하는데 힘을 써서 인사 행정이 박순보다 나았다.”

라고 평한다.

 

율곡이 <석담일기>에서 “이탁이 비록 높은 절조는 부족하였으나 너그럽고 후한 도량이 있었으며, 선비를 사랑하여 능히 그 직언(直言)을 용납하였다.”라고 평했는데, 높은 절조는 부족했을지라도 너그럽고 후한 도량은 계구조신(戒懼操身)하는 일상의 삶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을 것이다.

 

“벼슬하지 않고 가정에 거처할 때는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복식(服飾)과 기용(器用)에 금옥(金玉)으로 장식한 그릇이나 능단(綾緞)의 옷이 없었다. 자제(子弟)를 교육하되 매번 청렴하게 할 것을 면려(勉勵)하였다. 본디 물건에 좋아하는 것이 없어서, 공퇴(公退)해서는 객(客)을 대하여 바둑을 두는 것뿐이었다. 가업(家業)이 본디 빈한하여 녹봉(祿俸)에만 의지했고 다른 경영이 없어서, 어떤 때는 양식이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盛)하고 가득 찬 것에 경계를 하여 자제들을 대하고 탄식하기를, ‘덕이 없으면서 높은 벼슬에 이르렀고 공(功)이 없으면서 후한 녹을 받고 있으니, 이는 화(禍)를 부르는 길이다. 너희들은 기뻐하지 말라.’ 하였다.”

 

이탁 평생의 삶은 다음의 말에 그대로 드러난다.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평생 한 일이 일찍이 사람을 대하고 말하지 못할 것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위(地位)가 매우 높아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따를 수 없었고 내가 내 한 집안의 일이지만 또한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숨길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평생 힘을 쓴 곳이다.’ 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