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 한문·한자 교육 – 격몽요결(초급1반) 2학기 4차수업


화요일(초급1반) – <격몽요결>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2학기 4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격몽요결(화요일) 인력양성강좌 2학기 4차수업

인성 한문·한자 교육 – 동호문답(고급반) 2학기 3차수업


목요일(고급반) – <동호문답>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2학기 3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동호문답(목요일) 인력양성강좌 2학기 3차수업

홍남립(洪南立: 1606~1679)


화곡 홍남립(洪南立: 1606~1679)                    PDF Download

 

그의 자(字)는 탁이(卓爾)이고, 호를 화곡(華谷)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과 교우(交友)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육경(六經)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1633년(인조11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하였으며, 그 뒤부터 벼슬길에 올라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을 거쳐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과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비롯하여 학정(學正)과 박사(博士)와 전적(典籍)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임금의 특별 배려에 힘입어 자기의 집에서 쉬면서 책을 볼 수 있는 사가호당(賜暇湖堂)을 명받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며, 연서도 찰방(延曙道察訪)을 거쳐 광양현감(光陽懸鑒)과 만경현령(萬頃縣令)과 평안도사(平安都事)와 보성군수(寶城郡守)와 서산군수(瑞山郡守)와 덕산군수(德山郡守) 등등의 외직(外職)을 역임하였으며, 형조좌랑(刑曹佐郎), 병조좌랑(兵曹佐郞),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결국 화의가 이루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면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의병(義兵)을 모아 활동하면서 군량을 모아 조달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는데 그의 부모가 돌아가자 묘소 옆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복(三年服)을 입는 기간 동안 여막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또 친구와도 우의가 매우 깊었다. 그는 친구 백석(白石) 유즙(柳楫)과 함께 과거시험을 보러가서 시험 답안지를 일찍 썼지만 백석이 미쳐 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하자, 그가 답안지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제출 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형제간에도 우의가 돈독하여 그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들이 밖에 나가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에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다 이들 동생들이 일찍 죽자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거두어 주며 보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계모가 계셨는데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똑같이 모셨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의 생모와 똑같이 3년 동안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상례를 마쳤다고 한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자녀들의 강학(講學)에 힘썼다. 또한 그는 문인(文人)들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여 문인들이 시(詩)와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항상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올바른 지적을 해주었고, 잘된 곳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문인(門人)과 자녀들을 강학하는데 힘쓰다가 1679년 세상을 뜨게 되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의 묘소는 완주 대승동(大勝洞)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덕행(德行)과 학행(學行)을 기리기 위하여 학천사(鶴川祠)와 대승사(大勝祠)를 짓고 여기에 그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서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가 저서인 《화곡집(華谷集)》 5권이 문집(文集)의 형태로 전해 오고 있다.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승리 대승서원(大勝書院) 앞에는 ‘일심공자시심명비(一生公字是心銘碑)’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진 돌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돌비는 대승서원에 주벽으로 모셔진 그가 임종 당시에 문인 제자들과 자손들에게 유훈(遺訓)으로 남긴 말을 2005년 9월에 세운 것으로 일종의 유훈비(遺訓碑)라고 한다.

그가 벼슬길에 나가서나 향리에 물러나 있거나 후학 문인들이나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공심(共心)과 공지(公志)이었다는 것을 이 유훈을 통해 알 수 있을 듯하다. 공(公)자 하나만을 마음에 새기라는 당부가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특별한 유훈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가 한 편생 공(公)이라는 글자 하나만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는 것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는 점에서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게다가 당대에 명망 높았던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등과 같은 분들이 평소 화곡의 인품에 대하여 품평한 것을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태산처럼 높으심이여

대하처럼 넓으심이여

달과 같이 밝으심이여

물과 같이 맑으심이여

진솔하신 성품이시여

고결하신 조행이시여

이 글이 돌비의 전면 왼쪽에 새겨져 있어 보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여운으로 남는다.

 

<참고문헌>
《사계전서(沙溪全書)》, 문인록(門人錄).
《월주집(月洲集)》, 소두산(蘇斗山).
《심석재집(心石齋集)》, 송병순(宋秉珣).
《국조방목(國朝榜目)》
《홍씨문헌록(洪氏文獻錄)》

홍상한(洪象漢:1701~1769)


홍상한(洪象漢:1701~1769)                                  PDF Download

 

조선 후기의 문신인 그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운장(雲章)이다. 이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기(洪重箕)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이며, 어머니는 승지 조의징(趙儀徵)의 따님이다. 어유봉(魚有鳳)의 문인이며 사위이기도 하다.

 

1728년(영조4)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734년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면직되고 1738년에 다시 예문관검열에 천거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1740년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관동지방(關東地方)의 어사(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냈으며, 1743년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올랐다. 그 이듬해에 아들 홍낙명(洪樂命)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하여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있다가 파직당하였으나 그 해에 곧바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복직되고, 이듬해에는 바로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었다.

 

1746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1748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어서는 법에 어긋난 장형(杖刑)의 남용을 금지시켰다. 1752년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754년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어 조헌(趙憲)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하고, 단종(端宗)을 복위(復位)시키려다 죽어간 분들을 봉안(奉安)한 창절(彰節)과 민민(愍民)의 두 서원을 중수하였으며, 황보인(皇甫仁) 등에게 증직(贈職)과 시호(諡號)가 내려지게 하였고, 사육신(死六臣)과 엄흥도(嚴興道)를 포향(褒享)하였다.

 

1755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1759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세손(世孫)의 사부(師傅)를 겸하였고, 1769년에 병이 심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는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풍산세고(豐山世稿)》와 《정혜공유고(靖惠公遺稿)》가 전해오고 있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국조방목(國朝榜目)》
《연천집(淵泉集)》
《지양담록(芝陽潭錄)》
《한국계행보(韓國系行譜)》
《풍산세고(豊山世稿)》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창랑 홍세태(洪世泰: 1653~1725)                    PDF Download

 

그의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과 유하(柳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서울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무관 홍익하(洪翊夏)이고, 어머니 강릉유씨(江陵劉氏)는 학생 유천운(劉天雲)의 따님이다.


생애

그는 어머니가 노비였으므로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종의 신분이었다. 이씨 집안의 종이였는데, 그는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7,8세에 글을 지었다고 한다. 그가 농사일을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아 주인이 죽이려고 하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1634~1684)김석주(金錫胄:1634~1684): 숙종의 외척이다.가 손을 써서 구해주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청성이 은자 100냥을 내고, 동평군(東平郡) 이항(李杭:1660~1701)이항(李杭:1660~1701): 인조의 손자이며, 숭선군(崇善君)의 아들이다.도 은자 100냥을 내어 속량(贖良)시켜 주었다는 일화가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청성군과 동평군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으니, 이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관념상으로 보더라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홍세태는 청성군과 동평군을 아버지처럼 여겼다. 이항이 옥사로 인하여 처형되었을 때, 홍세태는 은혜에 보답하고자 손수 그의 시체를 염하였다고 한다.

노비신분을 면한 중인신분으로 그는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고, 1675년(숙종1년)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관직을 제수 받았다. 당시 역관이 되려면 외국어를 배우는 사역원(司譯院)에서 공부를 하고,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치러야하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경쟁률이 높은 사역원이다 보니, 전·현직 고위 역관들의 추천이 있어야만 입학이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주로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집안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홍세태는 역시 이 시험에도 합격하여 중국 사행(使行)의 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682년에는 통신사를 따라서 일본에 다녀온 뒤, 문학에만 몰두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이문학관(吏文學官)과 승문원 제술관(承文院製述官)이문학관(吏文學官)과 승문원 제술관(承文院 製述官): 외국에 보내는 글을 담당하는 전문직. 이문(吏文)은 중국 외교 문서에만 쓰던 글로 조선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글이었다.을 여러 번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가난한 생활 속에 8남 2녀의 자녀를 모두 잃는 아픔도 겪었다. 중인 신분으로서 사회 제약에 대한 갈등 앞에서 실망한 뒤, 은거하며 자신이 지은 글을 정리하여 책으로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궁핍한 생활에도 그는 자신의 문집 출간을 위해 베갯속에 은전 70냥을 모았다. 그는 죽기 전에 부인에게 은전 70냥과 편집된 문집원고를 건네며, 간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자신이 탐욕 없이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이라며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그가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에 사위 조창회(趙昌會)와 제자들에 의해 그의 문집 《유하집(柳下集)》 14권이 간행되었다.


한시에 뛰어난 재능과 관련된 일화

1) 일본 통신사 수행길에 발휘한 그의 숨은 실력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일본인과 대화할 경우 한시와 그림을 매개로 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다보니, 서얼(庶孼)이나 상민(常民) 출신의 문인과 화가가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통신사절단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주로 선발되었는데, 홍세태는 시를 잘 짓는다하여 뽑혔다. 일본에 도착한 첫날, 일본인들이 자리다툼까지 하면서 시를 적어달라고 했다. 조삼(朝三)이라는 일본 승려는 첫 기착지인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안내하면서 틈만 나면 홍세태와 시를 지었다. 홍세태가 일본인들에게 시를 지어주고 받은 원고료가 화원의 그림 값과 같았다고 한다. 홍세태가 일본에서 활약한 일을 《유하집(柳下集)》 말미에 첨부된 정래교(鄭來僑)의 묘지명(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섬나라 오랑캐들이 종이나 비단을 가지고 와서 시와 글씨를 받아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그들이 담처럼 죽 늘어서면, 그는 말에 기대선 채로 마치 비바람이라도 치는 것처럼 써 내려갔다. 그의 글을 얻은 자들은 모두 깊이 간직하여 보배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문에다 그의 모습을 그리는 자도 있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모습을 문에다 그려두고 볼 정도라면 얼마나 그를 선망하고 존모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홍세태의 문장력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펼쳐들고 있는 종이나 비단에다 즉석에서 시를 읊어 적어주었다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순발력과 재치를 겸한 문장력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세태는 그런 일을 거뜬히 해내었다고 하니, 새삼 그의 문장력에 대한 탁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2) 중국 사신이 뇌물 대신 받아간 그의 시

중국에서 온 사신 행렬을 구경하던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돌을 던진 일로 조정이 한동안 소란하였다. 이는 중국 사신들이 많은 공물을 요구하여 귀한 것을 가져가려고 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돌을 던져 생긴 일이다. 중국 사신들이 범인을 잡아오라고 하며 화를 내자, 조정 대신들은 그들이 더 많은 뇌물을 요구해 올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때, 중국 칙사(勅使) 도란(圖蘭)이 부채를 내밀며 조선의 시 한 수를 적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시 한 수여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돌을 던져 마음을 굳게 했으니, 시로 풀어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조정대신들이 서로 미루고 있을 때,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홍세태를 천거하였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임금은 율시(律詩)를 지어서 칙사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은 던져지는 곳에 따라 다르다

돌이 물에 던져지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되어

그 퍼짐도 깊고 은은하다

이 시를 받은 중국 칙사 도란은 뇌물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경종실록(景宗實錄)》 3년 7월 11일조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뇌물을 받지 않고 돌아간 적은 근래에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공으로 홍세태는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선임되었다가 제술관(製述官)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중국에 보내는 주문(奏文)과 자문(咨文)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

 

3) 혹독한 가난도 꺾지 못한 시에 대한 그의 열정

그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8남 2녀의 자녀를 모두 세상에서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문집을 간행(刊行)할 비용을 착실히 마련했다. 문집을 내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문인(文人)의 시문을 간행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이 생기면 베개닛 속에다 묻어두었다. 이를 두고 《맹자(孟子)》를 팔아서 식구들의 양식을 구했던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저서에서

“어찌 살았을 적에 술과 고기를 사서 일생동안 주린 창자를 채우지 않았던가?”

라고 풍자 아닌 풍자를 한 적이 있다. 홍세태는 시를 쓴 것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시인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고, 그 들이 쓴 작품을 엮어 《해동유주(海東遺珠)》란 시집을 만들기도 하였다.

 

강직한 성품과 신분의 굴레

그가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천민출신이라는 신분의 장벽과 강직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머리를 숙이는 일이 없었다 한다. 처음 역관에 임명되었을 때, 동료들은 그가 미천한 출신이라 하여 멸시하였다. 중인들을 무시하는 양반들의 도움을 받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사대부들은 그의 신분이 천하다 하여 오만한 태도로 대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들에게 조정에서는 큰 상을 내렸지만, 그는 받지 못했다. ‘천민의 시’라는 이유였다. 그후 그는 역관을 버리고 문장을 짓는 일에 전념하였다. 한편으로는 마음에 맞는 이들과 시회(詩會)를 열고 교유하였다.

그의 성품과 관련한 사항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그는 남과 구차하게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먼저 교제를 청하는 이들과는 서로 자유롭게 교유하였다. 세력과 지위를 가지고 압박하는 이에게는 화를 내면서

‘내가 비록 남에게 빌어먹는 신세이기는 하나, 어찌 머리를 숙여서 남의 턱찌꺼기 취급을 당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그는 실권자로부터 외면을 당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신분의 한계와 강직한 성품으로 인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남다른 시론(詩論)으로 체계를 세워 조선조의 중인 문학을 대표하는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학계의 정평이다.

 

신분의 제약으로 인한 고통과 좌절의 세월

그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배척당하거나, 좌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시풍에도 영향을 끼쳐 솔직한 심정을 담아내는 소박한 분위기의 시를 많이 남겼다. 다음 작품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시제는 <잡흥(雜興)>으로 되어 있으며, 2수 중 제1수이다.

 

시골 전가에 기르는 늙은 암말은                           田家有老牝

애초 천마의 망아지로 태어났으니                       生得天馬駒

용의 갈기 오색 무늬 털을 지녔고                          龍鬐五花文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신골이건만                           神骨世所無

특이함을 볼 줄 모른 촌사람들이                           里閭不見異

서로 빌려가서 섶 달구질 끌게 하니                     爭借駕柴車

귀 늘어뜨려 우양 뒤를 쫓을 뿐이요                     垂耳逐羊牛

종일토록 몇 리 남짓 옮겨갈 뿐이네                     終日數里餘

장안에는 큰 길이 확 뚫려 있건마는                    長安有大道

이 말은 시골에서 생을 마치게 됐네                   此馬終村墟

이 작품은 농가에서 기르는 늙은 암말의 일생을 그려 놓은 것이다. 왜, 하필이면 암말인가? 암말의 이미지는 용맹을 과시하거나 외향을 추구하는 유형이 아니다. 그렇다고 보잘것없는 약해빠지 우양과는 근본적으로 부류가 다르다. 그래서 작자는 자신의 처지를 살짝 대입시켜 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용의 갈기에 오색무늬 털을 지닌 데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신골(神骨)을 지닌 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장안의 큰길거리를 활보하는 천리마의 삶을 살지 못하고 시골구석에서 섶이나 실어 나르는 달구지를 끌며 귀를 늘어뜨리고 하찮은 우양(牛羊)의 뒤를 따르는 생을 살고 있는 암말의 처지가 곧 자신의 처지와 너무 흡사한 닮은꼴인 것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 결구에서 이대로 생을 마쳐야 하는가 하는 한탄과 회한(悔恨)이 함께 담겨져 있는 것이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한 정황은 다음 작품에서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같은 제목의 제2수 작품을 다시 보기로 한다.

 

한 추녀가 시골 전가 살고 있는데                  田家有醜女

용모가 어쩜 그리도 볼 품 없는지                  容止何齟齬

그래도 비단만은 잘 짤 줄 알아서                  猶能織縑素

밤낮 없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네                 日夜弄機杼

어느 누가 알랴 알뜰살뜰 베를 짜                 誰知用心苦

임금께 가져다 드리고픈 그 마음을             持以獻王所

청루엔 어여쁜 여인 많기는 하여도             靑樓多艷色

남들 기쁘게 하는 말만 할 뿐이니                 工作說人語

이 여인이 추하다고 웃지들 말라                  莫笑此女醜

그대들은 비단일랑 짤 줄도 모르잖나        縑素不出汝

 

이 작품에서는 시골 전가에 사는 추녀를 등장시켰다. 이 여인은 추녀이긴 하여도 임금에게 드릴 고운 비단을 짤 줄 아는 중요한 인물로 설정해 놓았다. 이는 자신의 신분이 비록 낮기는 하여도 능력만은 제세경국(濟世經國)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는 의미를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후반부의 청루의 얼굴 예쁜 여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정작으로 임금에게 필요로 하는 비단 따위는 짤 줄 모른다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얼굴 예쁜 여인들이 상징하는 것은 어떤 대상일까 하는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음직하다. 위의 작품에서는 늙은 암말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 설파하고, 여기에서는 추녀와 어여쁜 여인을 등장시켜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읊은 것이다.

이 두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의 상당한 작품에서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울분과 한탄을 느끼게 한다. 이렀듯이 그는 길거리 백성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시를 썼다. 그는 늘 시는 쉽게 써야 하며 명리(名利)을 벗어던진 마음으로 시를 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려운 글자나 전고를 사용하지 않고 현실의 괴로움을 표현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임금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위항문학
(委巷文學)의 발달에 끼친 영향

어느 날, 대제학 김창협(金昌協)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 시 가운데 채집되어 간행된 것은 많으나, 위항(委巷)의 시만은 빠져 없어지고 전하지 않으니 애석하다. 그대가 채집해 보라.”

라고 제안을 하였다. 대제학 김창협은 홍세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홍세태는 시를 쓰고도 가난해서 책을 만들지 못하는 이들의 시를 모아 문집을 만들기로 하였다.

전국 각지를 돌며 시를 모으고, 시사(詩社)를 만들고 여항인(閭巷人)들의 시를 가려서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해동유주》라는 제목의 뜻은 ‘우리 동방에서 버림받은 구슬’이란 의미도 되며, ‘우리 동방에서 시선집(詩選集)을 낼 때에 빠뜨렸던 구슬’이란 의미도 된다. 빛도 이름도 없이 땅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위항시인들의 작품이 그의 덕분에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한편 <김부현(金富賢)과 함께 임준원(林俊元)의 무덤 아래서 짓다[和禮卿西翁墓下作]>라는 시제의 글이 《유하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거친 봉분 풀이 벌써 묵어버렸네                                 荒原草已宿

여길 자소 그대 무덤이라 하는데                                是謂子昭墳

말 멈춰 세워본들 누가 맞아줄까                                駐馬誰迎客

잔 잡아 홀로 그대에게 권하노라                                持杯獨勸君

평생 흔적이 짧은 비석 하나라니                                平生餘短碣

모든 일이 뜬구름과 같을 뿐이네                               萬事一浮雲

두견새도 산 나무 위서 울어대니                                杜宇啼山木

가슴 아파 차마 들을 수가 없네그려                         傷心不忍聞

이 시는 1698년 낙사(洛社)의 중심인물이었던 임준원이 죽은 지 1년이 지난 뒤에 김부현과 함께 그의 무덤을 찾아가서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임준원은 홍세태가 생계가 어려우면 양식을 대어줄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동료선배였기에 그의 무덤을 찾은 감회가 남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가 죽고 없는 그의 무덤에 술잔을 권하며 느끼는 감회를 소박하게 읊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일생의 흔적을 담은 짧은 비석하나가 외롭게 서있을 뿐이니 그저 떠가는 구름인 냥하여 허전한 심사를 가눌 길 없는데, 그러한 심정을 아는지 마는지 때마침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마치 보잘것없이 죽은 위항인의 한과 친했던 사람을 잃은 자신의 슬픔을 더욱 돋우는 것만 같아서이다. 아마도 임준원을 잃은 슬픔과 위항인의 신분적 한계에서 오는 한스러움과 슬픔이 컷을 것이기 때문에 두견새 소리의 파장은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그는 같은 처지의 위항인의 실정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자 정민교가 일자리를 찾아 떠날 때, 아래와 같은 글을 지어 주었다. 그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목은 <계통 정민교를 전송하며 지어준 서문[送鄭季通敏僑序]>으로 되어 있으며, 《유하집》 권9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군자의 도리를 배우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나에게 달렸고, 그 재주를 쓰고 쓰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렸다.
나는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실천할 뿐이니, 어찌 남에게 달린 것 때문에 궁하고 통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내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폐기해서야 되겠는가.

[嗚呼, 士生斯世, 不學君子之道則其何以爲人也. 才不才在我, 用不用在人, 吾且爲在我者而已. 豈可以在人者, 爲之窮通欣戚而廢我之所得於天者乎.]”

 

라고 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사람노릇을 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군자의 도리를 배워야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조 때 문신 조현명(趙顯命)은

“간이(簡易) 최립(崔岦)과 더불어 조선의 빼어난 위항시인(委巷詩人)으로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견줄만하다”

라는 평을 남겼고, 여러 사대부들과 돈을 모아서 홍세태를 위해서 묘표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창랑 홍세태의 묘는 흔적도 없고 묘표 또한 간 곳을 알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69세 되던 해에 자서전적인 시 <염곡칠가(鹽谷七歌)>를 지었는데, 그 첫번째 작품을 잠시 감상해 보기로 한다.

 

손이여! 손이여! 그대의 자가 도장이라지
有客有客字道長

제 말로는 평생 강개한 뜻을 지녔다는데
自謂平生志慨忼

일만 권 책 다 읽어서 어디에다 쓸 것인가
讀書萬卷何所用

늙어가니 웅대한 포부도 풀더미에 떨어졌네
遲暮雄圖落草莽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를 끌게 하였나
誰敎騏驥伏鹽車

태항산이 너무 높아 올라갈 수조차 없구나
太行山高不可上

아아! 첫번째 노래를 부르려 하니
嗚呼一歌兮歌欲發

밝은 해를 뜬 구름이 문득 가려버리네
白日浮雲忽陰結

 

이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와 같은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나 끌게 하는 사회가 바로 그가 인식한 현실이었다. 웅대한 포부를 지닌 데다 일만 권에 달하는 책을 읽어서 세상을 구제할 포부를 지녔다한들 쓸데가 없음에 대한 한탄의 읊조림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도 천기(天機)를 잘 보전하여 시를 지으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그 마지막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땅엔 풀도 없이 도시 근처 집이라서
地不生草宅近市

온종일 시끌벅적 귀가 먹먹할 뿐이네
終日嘵嘵錮人耳

아침나절 문을 나서 큰길에 임했더니
朝來出門臨大道

서로 만난 사람마다 이게 누구냐고 묻네
車馬相逢問誰是

짧은 옷이 겸연쩍어 더는 가지 못하고서
短衣怵惕不敢前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더니 노자가 있네
歸臥床頭有老子

아아, 일곱 번째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니
嗚呼七歌兮歌復歌

슬픔도 기쁨도 천명을 따를 뿐 무엇을 하랴
哀樂從天可奈何

이 글에서 보았듯이 그는 세상일에 대하여 완전히 외면하거나 생각을 끊어버린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쉽게 받아들여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천명이 정해 준 대로 따를 뿐이라는 말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 끝 구절은 마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맨 끝 구절을 연상케 하는 여운이 있다. 이렀듯이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혀 오던 신분적 한계와 가난이라는 굴레를 오로지 뛰어난 문학적 성취 하나로 타개해 왔던 듯하다. 그에 대한 정서는 그저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을 통해 어렴풋이 가늠할 뿐이다.

그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참고 기다려왔다는 것을 그나마 그의 작품 속에서 가슴 아리도록 체험할 수가 있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지하에서 그는 흡사 소금수레를 끌며 태항산을 오르는 천리마처럼 언젠가 백락을 만나 우렁찬 울음을 터트릴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잠시 해본다. 끝으로 그의 작품 <견흥(遣興)>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그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오늘도 예외 없이 저녁이 되었는데                  今日亦已夕

홀로 가는 구름은 어디로 가고 있나                 孤雲何所歸

문을 닫고 외려 홀로 누워 지내려니                 閉門還獨臥

세상과는 짐짓 거리를 둘 뿐이어라                  與世故相違

세밑 되어가니 수척해진 산이 많고                  歲暮山多瘦

숲이 깊어선지 국화도 드물게 피었네            村深菊亦稀

처마 난간에 잘 새가 날아와서는                       簷間有宿鳥

뜻을 정했는지 놀라서 나는 일이 없네           意定不驚飛

어느 날이고 저녁이 없는 날이 없다. 또한 아침이 없는 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작자는 굳이 저녁이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도 황혼이 왔음을 암시하였을 법하다. 게다다 떠가는 구름은 또한 어떤 의미인가. 역시 자신의 처지가 정처 없이 떠가는 듯한 심상을 가탁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그러나 세상과의 괴리감은 여전히 자신과의 좁혀질 수 없는 간격임을 작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홀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세상을 외면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렇다고 계절의 변화까지를 외면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겨울이 와서 수척해진 산의 모습이 의연한 기상으로 다가왔을 법하고, 몇 떨기 안 되는 국화꽃이 숲속에 피어서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모습을 포착했을 법하다. 무엇보다 작자가 여기에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감지하게 된 것은 미련(尾聯)에 잘 새가 날아와서 뜻을 굳히고 더 이상 놀라서 날아가지 않으려한다는 표현은 작자와의 교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이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깊은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성(文學性)을 내포하고 있다. 누구나 오랜 시간을 두고 음미해 볼 수 있는 글들이기에 주변의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아울러 그의 생애와 관련하여 천부적인 그의 재능이 발휘되지 못한 점에 대하여는 애틋한 연민의 정을 가져본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승정원일(承政院日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황재(黃梓).
《고산유고(孤山遺稿)》, 윤선도(尹善道).
《농암집(農巖集)》, 김창협(金昌協).
《동사록(東槎錄)》, 홍우재(洪禹載).
《동사일기(東槎日記)》, 이의현(李宜顯).
《만기요람(萬機要覽)》, 서영보(徐榮輔).
《명곡집(明谷集)》, 최석정(崔錫鼎).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서유문(徐有聞).
《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瀷).
《완암집(浣巖集)》, 정내교(鄭來僑).
《유하집(柳下集)》, 홍세태(洪世泰).
《임하필기(林下筆記)》, 이유원(李裕元).
《청성잡기(靑城雜記)》, 성대중(成大中)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덕무(李德懋).
《해동유주(海東遺珠)》, 홍세태(洪世泰).
《홍재전서(弘齋全書)》, 정조대왕(正祖大王).

한운성(韓運聖:1802~1863)


입헌 한운성(韓運聖:1802~1863)                      PDF Download

 

그의 자는 문오(文五), 호는 입헌(立軒)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라서 5세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종이를 사올 수가 없자, 그의 어머니가 나뭇잎을 따다가 글씨를 쓰게 하였는데, 글씨를 써서 모운 나뭇잎을 태운 재가 무려 5두(斗)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나뭇잎에다 글씨를 썼는가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특히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에 남다른 솜씨를 보이자, 주변에서 그의 글씨를 받아다 간직한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그가 12세 때에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 되었는데, 매산은 그의 행동거지가 장중하고 재주가 있어 보이는 것을 특이하게 여겨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초시(初試)에만 급제하였을 뿐, 더 이상 과업(科業)에 흥미를 갖지 못하자, 이를 체념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뒤 부모상을 마친 후에는 매산의 문하에서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는 동안 그의 명성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부터 널리 알려졌다.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이 그를 영남(嶺南)의 제일가는 인물로 평가한 사실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겠다.

매산(梅山)이 그에게 ‘입헌(立軒)’이라는 두 글자를 당호로 써주면서 ‘경의지덕불고(敬義之德不孤)’라는 말로 그를 권면한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그는 한평생 동안 매산을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다. 또 그는 매산이 별세한 후에 임헌회(任憲晦:1811~1876), 조병덕(趙秉悳:1800~1870) 등과 함께 《매산집(梅山集)》을 교정하는 일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스승과의 깊은 교분이 있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또 문인제자들 사이에서도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또한 그가 매산의 문하에서 제일인자로 지목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는 세거지인 경주(慶州)에서 주로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부하는 목적이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밝히는 것을 으뜸가는 의리로 여기는 데에 있다고 보았으며, 평상시에는 몸소 실천하는 것을 위주로 행동하였다. 그는 유학(儒學)의 경전(經傳)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주력하였다.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이 매일 같이 암송(暗誦)하기를 늙어서까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예학(禮學)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예설(禮說)에 대한 견해는 원류(源流)를 깊이 연구하고 상변(常變)을 두루 참작하여 변론하고 절충한 것이었으므로 시의(時宜)에 잘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남긴 글들은 대부분 그의 아들인 한석찬(韓錫瓚)과 한석관(韓錫瓘)이 잘 정리하여 1880년경에 16권 8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문집에는 그의 동문인 임헌회가 1865년에 지은 묘갈명(墓碣銘)과 조병덕이 1869년에 지은 행장(行狀)이 수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그의 동문 후배인 이응진(李應辰)이 1880년에 지은 발문(跋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1권부터 3권까지는 350제(題)에 달하는 분량의 시작품으로, 시체(詩體)의 구분 없이 저작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스승인 매산을 찾아 경주에서 한양을 오가는 도중에 지은 시와 스승의 곁을 떠날 때 명을 받고 지어 올린 시, 스승의 시에 차운한 시, 그리고 주자(朱子)와 우암(尤庵)의 시에 차운한 시, 권익(權翌)과 홍일순(洪一淳) 등등 당시에 교유했던 여러 사람들에게 지어준 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시작품도 있어 흥미롭다. 《입헌문집(立軒文集)》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사육신의 묘소에 배알하다[拜六臣墓]>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다.

 

노량 나루 산기슭에 개미둑 같은 무덤에
蟻封殘麓鷺江湄

여섯 충신 혼백 모두 여기에다 모셨구려
六箇忠魂盡托斯

서산아 높다 크다를 겨루려들지 말지어다
西山莫與爭高大

장사하던 그 당시엔 백이숙제였을 뿐이니
埋得當年一伯夷

 

이 작품은 그가 경주에서 상경한 어느날 노량진 근처의 사육신 묘소를 찾아가서 참배하고 그 감회를 적은 것이다. 여섯 충신의 혼백이란 단종복위를 계획했다가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을 포함한 여섯 분의 혼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서산(西山)은 바로 백이숙제(伯夷叔弟)가 고사리를 캐서 먹으며 연명하다가 생을 마감한 저 수양산(首陽山)을 지칭하는 말이다.

작자는 결국 백이숙제가 일개 평범한 사람으로 자연사하여 묻힌 수양산을 인격화하여 절의 높은 백이숙제가 묻힌 산이라고 우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의 절의라는 것은 훗날 추가로 설정된 것이었지 처음 묻힐 당년에는 보잘것없는 일개 평민이었을 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노량진 산기슭에 개미둑 같은 무덤이 게다가 여섯이나 되는 이 무덤들은 애당초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형을 받고 죽어간 충신들의 혼백을 묻은 무덤이라는 것을 대비적으로 묘사하여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여기에는 사육신의 절의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백이숙제와 비교하여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대하여 일갈(一喝)하여 제시한 의미도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또 몸 바쳐 이룩한 충절에 대하여 그들의 넋을 기리는 마당에 크고 작고를 따져 무엇 하겠는가라는 그의 견해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또 다른 한수의 시작품을 보기로 한다. 이 시는 《입헌문집(立軒文集)》 권2에 수록되어 있는 <생일날 감회를 적다[生朝書感]>라는 연작 4수 중의 첫째 수이다.

 

임술년 봄에 부모님이 이 몸을 낳으셨건만
父母劬勞壬戌春

이날 맞은 천애고아로 머리털만 세었구려
孤兒此日白頭新

풍수에 어린 그지없는 애통함을 알겠는 건
極知風樹無窮痛

고금의 사람 중에 이 몸이 가장 심하구려
今古人間最我身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생일이 돌아오면 부모를 그리는 마음은 고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모양이다. 더구나 그는 늙은 나이의 자신을 천애고아(天涯孤兒)로 지칭하면서 풍수지탄(風樹之歎)에서 오는 다함이 없는 애통함이 고금의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심하다고 묘사하였다. 이 작품 말고도 어버이를 그리는 시작품이 그의 문집에 상당수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효심이 남달리 지극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4권부터 13권까지는 주로 서간문(書簡文)을 수록하고 있는데, 스승인 매산에게 올린 편지 등등 무려 120여 인물에게 370여 통의 편지가 때로는 질문을 때로는 응답을 때로는 자신의 소회를 적은 내용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이 편지들이 담고 있는 내용을 대략 정리해보기로 한다.

그는 스승인 매산에게 부모의 상을 당한 데다 몸이 아픈 탓에 스승 곁에서 직접 모시면서 배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쓰기도 하였고, 《소학(小學)》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먼저 읽은 뒤 사서(四書)를 보라고 일러준 가르침을 되새기는 내용과, 모친의 상을 당한 13세 아들의 거상의절(居喪儀節)에 대한 자문을 담은 내용도 있다. 또 국상(國喪) 기간 중에 사가(私家)의 관혼상제(冠婚喪祭) 때 입는 복장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고, 생육신(生六臣)의 문집을 인출해 달라는 스승의 부탁에 대하여 인쇄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차후에 이행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충신(忠信)에 대한 가르침을 굳게 지키겠다는 내용과 심기질설(心氣質說)에 대한 문목(問目)에서는 그의 결연한 의지와 학구열을 새삼 엿볼 수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가관복(三加冠服)에 대한 질문을 담은 편지도 보이며, 《중용(中庸)》의 귀신장(鬼神章)에 대하여 질의한 내용도 있다.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포천(抱川)의 김치장(金穉章)을 위해 일깨우는 글을 내려주기를 청한 내용과, 졸작인 〈회근송(回巹頌)〉을 올리니 읽어달라는 내용 등에서는 스승과 제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그런 사제지간의 정의(情義)를 느끼게 한다.

김매순(金邁淳)에게는 그의 명성을 듣고 배알하려 했으나 일정이 여의치 않아 그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가 있고, 홍일순에게는 스승에게 멀리 경주에서 편지를 보내 함부로 가르침을 구하고 의문점을 질의했던 것이 돌이켜 보면 성의가 없고 경망스런 행동이었다고 자책하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이 둘은 막역한 친분관계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스승의 가르침과 홍일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진보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내용과 과거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내용과 홍수로 인하여 농사에 피해를 입지 않았는가 걱정하는 내용에서도 역시 그러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헌종(憲宗)과 철종(哲宗)이 종통(宗統)을 이은 측면에서 부자(父子)의 도(道)가 있다 하더라도 속칭(屬稱)을 따라 헌종 부부를 황질(皇姪)과 황질비(皇姪妃)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 등에서는 그의 예설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견해를 읽을 수가 있다.

이종상(李鍾祥)에게는 만년(晩年)의 처신이 더없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찍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권유하기도 하고,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들려 감축드린다는 등의 내용을 담아 보낸 편지가 있다. 그리고 조병덕에게는 편지를 보내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대하여 의문점을 질의하기도 하고, 《매산집(梅山集)》의 정본이 나오기도 전에 경향 각지에서 시비가 일어나고 있으나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교정을 정밀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도 있다.

또 스승의 묘문(墓文)을 다 지었는지 묻고, 다 되었으면 그 글을 보내달라는 내용과 《매산집》을 교정을 마치면 곧바로 인출하자는 소휘면(蘇輝冕)의 의견에 대해 그렇게 하다보면 정밀성이 떨어질 우려가 있으므로 우선 교정에 진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등의 내용을 담은 편지들이 있다. 이와 같은 편지를 통하여 그가 《매산집》의 간행에도 깊이 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역시 확인할 수 있겠다.

안영집(安永集)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미발시(未發時)에는 태극(太極)이 주가 되고 이발시(已發時)에는 음양(陰陽)이 주가 된다고 하는 견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고, <태극설주해(太極說註解)> 의문에 대하여 답한 내용도 보인다. 특히 임헌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승의 문집인 《매산집》을 얼마나 교정했는지 묻고, 오덕여(吳德輿)가 그 고을 수령으로 부임한 것은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간행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과 그가 교열을 맡은 스승의 시집(詩集) 2책을 산삭하여 정사(淨寫)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편지를 통하여 그가 스승의 문집 간행에 역시 깊이 관여하였다는 사실과 많은 고심을 하였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소휘면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산집》의 정본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서둘러 간행하지 말자고 설득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매산집》 간행을 둘러싼 갈등 양상이 적지 않았음을 역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또 그의 문집에 보이는 〈연명여제도동문인서(聯名與諸道同門人書)〉라는 제목의 글은 각지에 있는 동문들에게 보내어 스승의 문집을 인출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몇 명을 선발하여 일을 주관하게 하고 나머지 동문들은 비용을 협조하게 하는 방법을 제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그가 문집 간행에 드는 비용문제까지도 전반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문집 권14에는 서(序) 6편, 기(記) 16편, 발문(跋文) 6편과 1편의 전(傳)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 〈매산선생칠십수서(〈梅山先生七十壽序)〉는 공자(孔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와 우암(尤庵)의 70세 시절 일화를 들어 고희연(古稀宴)을 맞은 스승인 매산이 그 도통의 계승자로 적임자임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숙재조장주갑수서(肅齋趙丈周甲壽序)〉는 동문 선배인 조병덕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은 서문이다. 그리고 전찬명(田贊明)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지어준 서문도 있고, 홍경래의 난 때 동래(東萊)에서 창의(倡義)했던 운계(雲溪) 박처사(朴處士)의 실기(實記)에 대한 서문도 있다. 또 글공부하다가 세밑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와 호남으로 돌아가는 동문과 작별할 때 지어준 송서(送序) 등등이 있다.

그는 또 손영모(孫永謨)가 경주부(慶州府)에 방치되어 내려오던 시남시사(市南詩社) 건물에서 동몽(童蒙)을 가르치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 강학을 준비한 전말을 담아 〈몽양재기(蒙養齋記)〉를 지어 주었고, 또 그에게 지어준 〈지와기(止窩記)〉는 그가 40세에 불과한 나이에 경주 공목관(孔目官)의 관리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칭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스승인 매산의 강학 장소인 열락재(悅樂齋)와 홍일순의 거처인 만춘와(萬春窩)와 동문 임헌회가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지은 첨망헌(瞻望軒)과 우우현(禹又玄)의 낙지암(樂志菴) 등에도 기문(記文)을 지어 그 뜻을 기렸으며, 특히 조병덕의 장자 조명희의 부탁을 받고 소옹(邵雍)의 삼태평(三太平)에 관한 뜻을 취하여 지어준 〈삼평헌기(三平軒記)〉는 매우 흥미 있는 글이다. 또한 〈김효자정려기(〈金孝子旌閭記)〉는 김성집(金聲集)을 기리는 내용이며, 〈연거당기(蓮渠堂記)〉는 달성(達城) 서이재(徐彛載)에게 지어준 글이다. 문인 박문언(朴文彦)의 강학 장소인 윤남서숙(輪南書塾)에도 기문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시우의 〈석분종련기(石盆種蓮記)〉 뒤에 쓴 발문과 임헌회가 스승에게 받아 간직해 두었던 백간(白簡)에다 문인들이 각자 글씨를 써서 첩을 만든 일을 기록한 〈서임명로칠간첩후(書任明老七簡帖後)〉라는 발문과, 집안에 내려오던 우전(禹篆) 8폭을 임헌회에게 보내며 써준 〈경서우전후증임명로(敬書禹篆後贈任明老)〉와, 우암(尤庵)의 친필 <사물잠(四勿箴)> 모본첩(摹本帖) 뒤에 쓴 발문 등이 있다. 동래에서 장사로 크게 돈을 번 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헌신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인 김성우(金聲遇)에 대하여 쓴 전(傳)도 역시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스승인 매산 홍직필과 장인 오광순(吳光恂)과 백부인 한덕언과 여타 지인을 위한 제문을 19편이나 남겼으며, 임응만(任應萬)에 대한 애사(哀辭) 1편과 난곡서원(蘭谷書院)에 우암(尤庵)의 개모(改摹)한 영정을 봉안하고 올린 축문과 김창협(金昌協)을 추배(追配)할 때의 봉안문(奉安文) 및 성곡산신제(聖谷山神祭) 때 축문(祝文)도 수록되어 있으며, 묘갈문(墓碣文)과 묘표(墓表)와 시장(諡狀) 등도 있다.

그의 문집 마지막 권인 권16에는 2편의 상소(上疏)와 11편의 잡저(雜著)와 부록(附錄)이 수록되어 있다. 상소는 임진왜란 때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으로 태조의 영정을 지켜내고 아울러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운 손엽(孫曄)에 대한 증직(贈職)을 청한 소(疏)와 인산서원(仁山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이다.

그리고 잡저에 수록되어 있는 〈예설변(禮說辨)〉은 헌종(憲宗)의 숙부뻘인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종묘에 제사를 모시게 되었을 때에 호칭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자, 이에 대해 변론한 것이다. 당시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로 있던 홍직필이 종통(宗統)을 이은 측면에서 헌종과 철종이 아무리 부자(父子)의 도(道)가 있다 하더라도 당연히 속칭(屬稱)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순조(純祖)를 황고(皇考)라 하고 익종(翼宗)을 황형(皇兄)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헌종 부부를 황질(皇姪)과 황질비(皇姪妃)로 불러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한운성은 스승의 의견을 옹호하는 주장을 폄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논어(論語)》에 대하여 의문시되는 부분 7조항을 변석(辨析)한 〈논어원사(論語原思)〉가 수록되어 있다. 또 소식(蘇軾)의 <이백비음기(李白碑陰記)>에서 이백(李白)의 기상을 칭찬한 부분에 대해 도의(道義)와 접목되지 않은 사람의 기상은 대단할 것이 없다고 반론하는 잡록(雜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은 특히 도학(道學)을 지향하고 있는 한운성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임자곡침기(壬子哭寢記)〉는 스승 홍직필의 상장(喪葬)의 제반에 대해 기록한 글이며, 〈통태학문(通太學文)〉은 우암 송시열을 향사한 경주 인산서원(仁山書院)의 사액을 위해 성균관 제생들의 협조를 구하는 글이다.

조병덕이 1869년에 지은 행장과 임헌회가 1865년에 지은 묘갈명이 부록으로 실려 있고, 말미에는 이응진이 1880년에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밖으로는 크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실제로 그의 문집의 양으로만 보아도 적지 않은 분량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가 평소에 학문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입헌집(立軒集)》, 한운성(韓運聖).
《숙재집(肅齋集)》, 조병덕(趙秉悳).
《고산집(鼓山集)》, 임헌회(任憲晦).
《임재집(臨齋集)》, 서찬규(徐贊奎).

정인창(鄭寅昌: 1862~1928)


유몽 정인창(鄭寅昌: 1862~1928)                    PDF Download

 

그는 충청남도 천안 광덕면(廣德面) 금곡리(金谷里) 출신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도학자이다. 그는 일제 강점(强占) 이후 죄인을 자처하여 흰옷을 입은 채로 흰 갓을 쓰고 지냈으며, 강사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가 32세 되던 해에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나아가 사제의 연을 맺은 뒤로, 스승을 부모처럼 극진히 모셨으며 스승에게 보낸 간찰이 무려 29편에 달한다. 특히 그는 생면부지였던 간재와 함께 공자에게 제사 드리는 꿈을 꾼 뒤 간재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상간재선생(上艮齋先生)>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스승이 운명한 뒤 10일째 되던 밤 꿈에 스승을 만나고 이를 고하는 <고선생문(告先生文)>을 지었고,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점 등을 살펴보면, 그와 간재와의 사제 관계가 유별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는 <제선생문(祭先生文)>에서,

 

“비록 세상을 바로잡고 군왕을 보좌할 덕을 지니셨으나 한 시대에 쓰이지 못하셨고, 오직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학을 깨우쳐주는 일로서 스스로 한 몸의 과업으로 여기셨으니, 선생이 계심에 우리 도가 보존되고, 선생이 돌아가심에 우리 도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雖匡輔之德 不見用於一時 惟繼開之功 自爲任於隻身 先生之存 斯道之存 先生之沒 斯道之沒).”

 

라고 하며 스승을 추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시(詩)는 110여 수로서 그리 많지 않은데 <김을 매며 두 수를 짓다[耘二首]>와 같은 작품은 매우 흥미롭게 표현되었다. 첫째 수를 잠시 감상해보기로 한다.

 

두어 이랑 산밭에 씨 뿌리고 김매지 않아
數畝山田種不耘

가시넝쿨 엉키고 잡초만 구름처럼 덮였더니
荊蔓纏繞草如雲

마을 노인 소를 놓아 모두 밟았지만
村叟放牛來踏盡

게으른 영감 부끄러워 못 들은 척 하네
懶翁自愧若無聞

 

농부는 마땅히 농사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씨를 뿌렸으면 응당 김을 매고 잘 가꾸어야 할 터인데 잡초가 우거지도록 방치했다면 그 책임은 농부에게 있는 것이다. 노인이 소를 몰고 와서 우거진 잡초를 먹이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풍자와 자기 반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교훈적인 시작품으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둘째 수를 이어서 보기로 한다.

 

내년 봄 다시 씨 뿌리고 일찍 김을 매어
復種明春及早耘

우리 곡식 구름처럼 풍성하게 자라거든
須令我穀盛如雲

소를 놓으려 해도 응당 안 될 것이니
雖欲放牛應不得

오늘 못들은 체 함이 무슨 상관이랴
何傷今日若無聞

둘 째 작품 역시 자기반성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 김을 매지 않았다가 마을 노인이 소를 몰고 와서 먹여도 부끄러워 말을 못하던 경험을 살려 금년에는 일찍이 김을 매고 잘 가꾸어서 더 이상 우스꽝스런 꼴이 되지 않겠다는 자아 성찰적 의미를 담고 있는 유학자다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학문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거라는 것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닌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은근한 경계를 하고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조선 말기 호서와 호남 지역에서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종주(宗主)로 하는 학파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정인창 역시 그 문하에서 성리학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음을 그의 문집인 《유몽집(惟夢集)》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인성본선인개가이위요순설(人性本善人皆可以爲堯舜說)’에서 스승 전우의 학설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유몽집(惟夢集)》

<근현대 대전·충남 한학가의 문헌 해제>,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3.
<근현대 대전·충남의 한학가>,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4.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네이버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양(朴性陽: 1809~1890)


운창 박성양(朴性陽: 1809~1890)                    PDF Download

 

조선 말기의 문신인 그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계선(季善), 호는 운창(芸窓)이다. 서울 출신으로, 제일(齊日)의 아들이며,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운원(運源)의 딸이다. 천자(天姿)가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였던 그는 일찍이 외가에서 공부하다가 이지수(李趾秀)의 문하에 들어가서 경의(經義)를 배웠다.

1866년에 프랑스가 강화도에 침범하자, 그가 이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의 <벽사명(闢邪銘)>을 지어 사람들을 깨우쳤다. 송근수(宋近洙)의 천거로 그는 또 1880년(고종17)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호조 참의(戶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호조 참판(戶曹參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편저서로는 《운창문집(芸窓文集)》 15권을 비롯하여 《이학통고(理學通攷)》,《호락원류(湖洛源流)》, 《가례증해보유(家禮增解補遺)》, 《거상잡의(居喪雜儀)》,《속통감(續通鑑)》, 《국조기이(國朝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을 보면, 자의(諮議) 박성양(朴性陽)에게 타일러 말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예로부터 훌륭한 선비는 반드시 훌륭한 임금을 기다려서 일어나기 때문에 몸이 시골에 있어도 성인의 글을 항상 공부하면서 임금을 존경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스스로 맡아 도(道)를 실천하고 학문을 전개하다가 임금이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선뜻 나서는 것이 바로 그들의 본분이고 의지였다.

경은 이름 있는 집안의 대대로 벼슬을 지내온 후손으로서 나라와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해왔으며 병으로 초야(草野)에 있으면서도 공자(孔子)의 학문을 연구하고 정주학(程朱學)의 뜻에 통달하였다.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진실로 곤궁한데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므로 당대 선비들의 으뜸으로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유독 자신만을 좋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대궐에 나와서 임금을 돕는 계책을 말해 주어야만 한다. 내가 몹시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경이 기다렸다가 나서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세자(世子)의 슬기로운 자질이 날로 갖춰지고 사(師), 부(傅)의 상견례(相見禮)도 좋은 날을 받아놓았다. 경에게 자의(諮議)의 벼슬을 주었으니 경은 제때에 길을 떠나 빨리 와서 빛나게 바른 일과 바른 말로 세자(世子)를 돕도록 하라. 이것이 또한 내가 좌불안석(坐不安席)하면서 목마르게 기다리는 까닭이다.

가을철도 깊어가니 경이 그리워진다. 흰 말을 타고 올라와서 이 저녁을 함께 지내기 바란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기 바란다.”

이러한 하명이 있고난 뒤에 아마도 이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박성양(朴性陽)의 부주 서계(附奏書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초야의 미천한 신이 외람되게 이 큰 은혜로운 지시를 받았으므로 마음의 격정을 누르지 못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태연스럽게 지시를 받고서 스스로 참람한 죄를 범할 수 없기에 삼가 놀란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죽음을 무릅쓰고 하소연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박성양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비답(批答)을 내려 간곡한 마음을 피력하였다.

 

“지난번에 비록 부주(附奏)를 보기는 하였다마는 멀리 떠나가려는 마음을 애써 되돌려줄 것을 나는 기대했는데 지금 온 편지에 또다시 사양한 내용을 보게 되니 실망스런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나는 꼭 오게 하려는 마음이 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믿음을 보이지 못하였고, 경은 반드시 사양할 의리가 없는데도 고상한 뜻을 더욱 굳게 가지니, 그렇다면 어진 사람을 좋아한 시(詩)와 좋은 자리를 펴놓고 초빙하는 예법은 과연 오늘날에는 실현하기 어렵단 말인가.

대체로 선비의 글공부는 반드시 써먹을 데가 있어서 덕행과 정사를 4과(四科)에 병렬하여 놓았던 것이다. 경은 이 뜻을 필시 깊이 알고 익숙하게 연구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세자(世子)의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있는 만큼 모름지기 노숙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덕성을 길러주어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경은 선뜻 마음을 돌려먹고 즉시 조정에 나와서 이 두터운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그러나 박성양(朴性陽)은 여전히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옷을 하사한 은전(恩典)을 철회할 것을 청하니, 고종은 너그럽게 권면하는 비답(批答)을 다시 내렸다.

 

“경를 불러 오는 것을 단 하루도 마음속에서 잊어버린 적이 없다. 옛날의 어진 이들을 손꼽아 보아도 역시 세상에 나가서 쓰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실로 임금을 돕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방도가 시골에 있을 때부터 정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신하의 본의가 고상하게 벼슬하지 않는 사람과는 원래 다른 점이 있는 만큼 어찌하여 굳이 시골에 박혀있으면서 포부를 펴서 자기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 것을 생각지 않는가.

하물며 지금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않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단정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옳은 말을 하고 덕을 닦아서 유교를 부지하는 것이 눈앞의 급선무이기도 하려니와 또 가을철에 경연(經筵)과 서연(書筵)도 장차 열어야 하겠으니, 경은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조정에 나와서 나의 애타는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이와 같이 간곡하게 당부하였건만, 박성양은 또 다시 사직을 청하였고 고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다. 박성양이 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자,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해가 저물어가므로 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날로 더해지는데 사임하는 편지가 이런 때에 와서 줄곧 멀리 가려고만 하니, 나의 말이 졸렬하고 예의가 부족해서 경으로 하여금 은퇴하려는 마음을 돌려세우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벼슬해 온 후손이며 노숙한 학문을 지니고서도 그저 혼자만 살고 혼자만 좋게 하려 하면서 자기 임금과 백성들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공평하게 하는 방도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잘 꾸리는데 근본을 두었다는 말과도 어긋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서연(書筵)을 자주 열고 경이 참가하여 강론하는 것을 더욱 기대하고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지극한 뜻을 체득하고 빨리 조정에 나와 주기 바란다.”

고종이 끝까지 무려 몇 차례에 걸쳐 설득하고 타일러 조정에 나와 주기를 바라는 그의 간곡한 부탁이 절박하기까지 하다. 그 내용은 다음 글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어진 사람을 구하고 훌륭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급선무이고 포부를 드러내어 써먹는 것은 옛날의 명철한 사람들이 실행한 일이다. 경은 글을 읽어서 이치에 밝고 자신을 조심하여 행실이 독실하니 마땅히 스스로 중책을 맡아주어야 하겠는데 도리어 영영 시골에서 살 것을 맹세하기를 마치 은퇴한 선비가 자신만 보전하려는 것처럼 하고 세상에 나가서 쓰여서 애타게 도움을 받으려는 나의 기대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있다. 비록 나의 정성과 대우가 박해서 믿음을 사지 못한 탓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지난날부터 경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세자(世子)의 입학과 관례(冠禮)는 이미 내년 정월달에 길일을 정했으니 세자의 학문이 성취되고 예식이 성대히 진행되는 것은 경이 조정에 나오는 데에 달렸다. 그러니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며칠 내로 길을 떠나도록 하라.”

위의 몇 차례 주고받은 글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밀당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글에서 박성양이 고종 임금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신하가 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더할 데 없는 영광이 될 터인데 끝까지 이를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려는 박성양의 당시 처지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연구해 봐야할 듯하다.

 

<참고문헌>
《운창문집(芸窓文集)》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실록(高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