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인재를 보는 눈


율곡의 인재를 보는 눈

 

조선왕조의 위기라 칭해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회오리 속에서 수많은 위인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양란을 모두 몸소 겪으며 쓰러져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쳤던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다. 이원익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심을 잡고 바른 정치를 펼쳤으며,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이르러서도 청렴함으로 높이 칭송받은 인물이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이다. 태종의 아들 익령군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함천부사를 지낸 이억재(李億載)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관원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1573년(선조 6)에는 성절사 권덕여의 질정관(質正官: 사신과 동행하여 글의 음운이나 기타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이원익을 장차 크게 쓰일 인물로 점찍은 사람이 있다.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이다. 이준경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이준경의 눈에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건강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원익은 키가 3척(1미터 내외)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작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을 때는 몸도 약해서 관직에 오르기 전에 몸부터 챙기라는 주위의 걱정을 꽤 들었던 모양이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이준경이 이원익을 왕에게 추천하면서 몸이 허약해서 걱정이라고 하니 왕이 산삼을 내려 병을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원익을 직접 본 왕이 그 작은 키를 보고 “괜히 산삼만 내다버렸구나.” 하고 웃었다고 한다.

1569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이원익은 승문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서애 유성룡이 그를 자주 찾아와 교류했다. 이원익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지만, 유성룡은 그런 그가 믿고 의지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유광익이 쓴 『풍암집화(楓巖輯話)』에는 두 사람의 사람됨을 비교하여,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고 하였다.

이준경에 이어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아본 이는 율곡 이이였다. 1574년(선조 7)에 이원익이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을 때 마침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때의 일이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이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이가 서울에 들어와 숙배한 뒤에 부임해 상소하면서 도내의 폐막(弊瘼: 없애기 어려운 폐해)를 전부 개혁하겠다고 청했다. 그런 뒤에 학교를 크게 수리하고 학범(學範)을 신명하여 탐활(貪猾)한 자를 제재하고 선량한 자를 정표하며, 백성의 아픔을 보살피고 군정(軍政)을 닦으니 군사들과 백성이 감열(感悅)했으나, 그가 건의한 것을 조정이 많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유감으로 여겼다. 이때 도사(都事) 이원익은 명망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서관(庶官)으로부터 막직(幕職)에 보직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시했으나, 이이는 한 번 보고 그의 재주를 알아 마침내 정무(政務)를 맡겼다.

선조수정실록』권8, 선조 7년 10월 1일

 

황해도사 이원익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익은 젊어서 과거에 올랐는데, 조용히 자신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다가 황해 도사가 되었는데, 감사 이이가 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살피고서 감영의 사무를 맡기었다.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才器)와 조행(操行)이 쓸 만하다고 말하고, 드디어 홍문선(弘文選)에 기록하였다. 이윽고 정안에 제소되니 대신들이 제목(除目)을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재주가 있는데도 하급 관료로 침체해 있었는데, 이제야 현직(顯職)에 통하였으니 조정에 공론이 있다 하겠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권10, 선조 9년 1월 2일

 

이원익은 당시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처리를 잘해서 나이 많은 아전들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고 하는데, 이이는 이러한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웬만한 일은 모두 그에게 맡길 정도로 깊이 신임했다. 이이는 이때 이원익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서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이원익이란 젊은이가 참으로 쓸 만하다.”

고 칭찬하고 다녔으며, 그가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제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힘썼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이의 추천을 받은 이원익은 이듬해인 1575년(선조 8) 중앙 관직인 정언이 되었다.

이원익이 재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크게 명망을 얻지 못하다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해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다. 이원익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는 전쟁 직후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역임했으며 피난 가는 선조의 호송을 맡았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된 후 흩어져 버린 병사들을 수습하고 1593년 1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또한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을 보살피고, 모함으로 파직되었던 이순신을 끝까지 변호하여 다시 기용되도록 하였다.

1598년 좌의정에 오른 이원익은 명나라 장수 양호의 변무사(辨誣使: 중국에서 조선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밝히기 위해서 임시로 중국에 보내던 사절)로서 연경에 가서 주본(奏本: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올렸다.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는 영의정이 되었지만, 넉 달 만에 사직하였다. 이유는 유성룡이 이이첨 등에게 탄핵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북인 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남인과 서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도 이원익은 남인의 영수로서 광해군 대의 대북 정권에서 영의정을 지냈고, 서인 정권인 인조 대에도 영의정을 지냈다. 이원익이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던 당시에 이렇게 성향이 다른 정권에서도 영의정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물 그 자체로 본성이 정직하고 청렴해 당파를 막론하고 신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사람을 챙기려고 인사권을 남용하거나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도 않았다. 이런 공명정대한 태도가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광해군에서 인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에 원로대신으로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유난히 작은 키 때문에 다른 대신들 사이에 서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아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보일 정도였다는 이원익. 그러나 그는 작은 체구와 병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아 인심을 얻었고, 전쟁 중에는 전공을 세워 나라를 구했다. 또한 그는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에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 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고산구곡담기를 지어 율곡을 추억하다


고산구곡담기를 지어 율곡을 추억하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최립(崔岦: 1539~1612)은 율곡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약관의 시절부터 율곡과 벗으로 지낸 인물이다. 최립은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굴하지 않고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여, 1559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외직을 지낸 뒤 1577년 주청사(奏請使: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수시로 보내던 사신)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 문단의 대표적 문인인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했는데 그 곳 문인들로부터 명문장가로 격찬을 받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인인 석주 권필이 ‘이 세상에는 시로써 나에게 적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어느 날 최립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서 문(文)이라면 마땅히 선생을 우두머리로 모셔야하겠지만, 시(詩)는 누구를 우두머리로 추대해야합니까?”

하였다. 그 말 뜻에는 의례 자기에게 그 말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립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최립은 말하기를,

“늙은 내가 죽으면 당신이 계승할 것이다.”

고 하였다. 이에 권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현재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나를 당할 자가 없다는 자부심이었다.

 

율곡이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석담으로 낙향한 1576년~1580년의 5년 여 동안은 당장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재령군수로 있던 최립은 친구인 율곡이 석담에서 대장간을 차려놓고 농기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쌀가마니를 보냈다. 그러나 짐꾼이 등에서 쌀가마니를 풀기도 전에 율곡은 짐꾼에게 말했다.

“쌀을 내려놓지 말고 그대로 지고 다시 돌아가거라. 그리고 사또께 아뢰어라. 뜻은 고마우나 쌀은 받을 수 없다고.”

심부름을 온 사람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쌀가마니를 받아주길 청했다. 그러나 율곡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짐꾼은 쌀을 다시 등에 지고 돌아갔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율곡의 하인들은 아까운 듯 율곡에게 불평을 늘어 놓았다.

“대감님, 모처럼 성의로 보내 주신 것을 돌려보내시면 어쩝니까?”

그러자 율곡은 친구의 사정을 짐작이나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옛 친구가 보낸 사사로운 물건이라면 왜 안 받겠느냐. 아까 그 쌀은 관가의 물건이니 함부로 받아서는 죄가 되느니라.”,

“그것이 관가의 물건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신을 지낸 나도 이렇게 넉넉지 못한데 하물며 지방 수령을 지낸 친구야 오죽하겠느냐.”

그 후 율곡이 죽은 지 25년이 지난 1609년에 최립은 서경에서 율곡의 아들 경림(景臨)을 만났는데, 경림은 그에게 율곡이 머물던 해주 고산(高山)의 구곡담(九曲潭)에 대해 기문(記文)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최립은 율곡이 처음 그곳에 터를 잡을 때부터 이웃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자주 왕래하던 곳이라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가 지은 구곡담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곡(曲)은 관암(冠巖)이다. 해주성을 벗어나 골짜기로 들어가서 45리 지점에 있는데, 바다의 입구와는 2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산 정상에 관(冠)처럼 생긴 바위가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산의 형세가 구불구불 휘돌아 계곡물과 함께 나란히 뻗어 내려오는데, 갑자기 끊어져 벼랑을 이룬 곳마다 그 아래에는 반드시 맑은 못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은자(隱者)가 머물러 살기에 충분한 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대개 이쯤에서부터 산촌(山村)의 몇 가호가 비로소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제2곡화암(花巖)이다. 관암에서 5리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암벽이 벌어진 곳이나 바위 틈새마다 모두 진달래와 같은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 뒤쪽으로 가면 산촌 10여 가호를 볼 수가 있다.

제3곡취병(翠屛)이니, 화암에서 3, 4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기이한 바윗돌들이 더욱 많아지면서 마치 푸른 병풍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앞에 자그마한 들판이 펼쳐져서 산골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으며, 들판 가운데에 일산(日傘:볕을 가리기 위한 양산)처럼 서 있는 반송(盤松: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뻗어서 퍼진 소나무) 한 그루 밑에는 수백 인이 앉을 만한 자리가 있다. 취병 북쪽에는 사인(士人) 안씨의 집이 있다.

제4곡송애(松崖)이니, 취병에서 3, 4리쯤 떨어져 있다. 1천 척 높이의 석벽 위에 송림이 해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못 중앙에 배가 반쯤 드러난 모양의 바위가 솟아 있어서 선암(船巖)이라고 이름지었는데, 그 위에 여덟 명 정도는 앉을 수가 있다. 사인 박씨네 집이 이 선암을 마주 대하고 있는데, 그는 율곡 공을 따라서 이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이다.

제5곡은병(隱屛)이니, 송애에서 2, 3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높고도 둥근 석봉의 모양이 조촐하고 산뜻하여 특이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못 주위를 마치 계단처럼 돌로 모두 쌓아올려 내려오는 물을 담아 두고 있다. 병(屛)의 뜻이 앞서의 것보다도 은(隱)하기 때문에 은병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인데, 이와 함께 공이 자신의 가까이에서 취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쉬려는 뜻을 여기에다 부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공이 처음에 석담에 와서 집을 지을 때에는 간략하게 혼자서 서식할 공간만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공을 따라와서 배우는 이들이 많아지자 서로 더불어 머물 곳을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계하면서 선현을 존숭하고 후학을 인도하는 일에 하나라도 부족함이 없게끔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은병정사(隱屛精舍)가 세워지게 되었고, 그 뒤로 이 정사의 부속 건물들도 차례로 낙성되면서 어지간히 면모를 갖추었다.

조계(釣溪)라고 하는 곳은 은병에서 3, 4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침계(枕溪)의 바위 가운데 낚시터로 삼을 만한 곳이 원래 많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6곡이다.

풍암(楓巖)이라고 하는 곳은 조계에서 2, 3리쯤 떨어져 있다. 바위산 전체가 온통 단풍나무 숲으로 뒤덮여서 서리가 내리면 마치 노을처럼 현란하게 비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7곡이다.

그 아래쪽에 몇 가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데, 뽕나무와 사립문의 정경 등이 그야말로 은연중에 하나의 화폭을 이루고 있다. 금탄(琴灘)이라고 하는 곳은 여울물 소리가 그지없이 청랑하여 거문고 소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가 바로 제8곡이다. 문산(文山)이라고 하는 곳은 옛 이름 그대로 부른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9곡으로서 구곡의 끝이다.

최립은 이 구곡담기를 지으면서 ‘나는 예전부터 공을 알고서 함께 어울렸으나, 공이 이미 지하 세계에 들어가서 다시 일으킬 수가 없으니 어떻게 구곡의 맑은 물가에서 술잔을 나누며 노래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다만 함께 공부하며 문자의 교분을 나눈 이들이 있으니, 이들이 공을 위해 글을 지어 읊는다면, 추억 어린 구곡으로 공의 혼백을 다시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구곡담기를 지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인성 한문·한자 교육 – 동호문답(고급반) 1학기 5차수업


목요일(고급반) – <동호문답>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0월12일 목요일 인성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5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교육인력양성강좌 고급반(동호문답) 강좌모습

조선시대 독서광, 율곡과 이덕무의 책읽기


조선시대 독서광, 율곡과 이덕무의 책읽기

 

한 권의 책을 교감하고 소통하며 읽는 것은 인문학의 시작이다. 특히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삶과 죽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같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를 담고 있는 고전 읽기야 말로 더욱 그렇다. 오늘날 우리는 고전을 통해 성현들을 만난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상상한다. 그러다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까지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 가운데는 뛰어난 독서광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서광이 바로 율곡이다. 율곡은 평생을 자신의 말대로 ‘나랏일이 아니면 독서하고, 독서하지 않으면 나랏일을 하는 삶’을 살았다. 평생을 정사와 독서, 오로지 이 두 가지를 위해 산 것이다.

율곡은 정계 은퇴를 만류하는 박순에게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관직 생활을 한탄할 만큼 독서광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율곡의 일상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성혼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날 그믐에 율곡 마을에 있는 숙헌(叔獻: 율곡의 자)을 방문했다. 그는 책상 위에 『시전(詩傳)』국풍(國風)을 펼쳐놓고 있었다. 내가

“금년에는 어느 정도 책을 읽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숙헌은

“올해에 『논어』『맹자』『대학』『중용』의 사서를 3번씩 세 차례 읽었으니, 모두 계산하면 9번이네. 이제 또다시 『시전』을 읽기 시작해서 왕풍(王風)에 이르렀네.”

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항상 한가할 뿐만 아니라 집을 수리하고, 집안을 다스리며, 손님을 맞이하느라 늘 바쁜 숙헌보다 훨씬 일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생활하면서 도리에 대한 소견(所見)이 있기를 바란다면 뒷걸음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다. 비록 고질병 때문에 스스로 독서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지극한 마음으로 좋아한다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길게 탄식해보지만 후회가 밀려온다. 다만 앞으로 다소 오래 살아서 행여나 오늘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성혼, 『우계집 속집』<잡기(雜記)>

 

율곡은 독서란 죽어야 비로소 멈출 수 있는 평생의 과업이요 의무라고 생각했다. 일하지 않으면 독서하고 독서하지 않으면 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곡이 생각한 선비의 삶이었다.

“공부는 늦춰서도 안 되고 성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공부의 효과를 빨리 얻으려고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공부는 늦추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평생 동안 꾸준히 해나가야지 그렇게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가 물려준 이 몸이 형벌을 받고 치욕을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율곡전서』자경문)

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자못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구절이다.

 

율곡 못지않게 독서광이었던 인물은 조선후기 정조 때의 북학파 문인 이덕무이다. 그는 자신의 쓴 자서전 『간서치전(看書痴傳)』에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남산 아래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해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했으며,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더욱 몰랐다. 남들이 욕을 해도 따지지 않고, 칭찬해도 뻐기지 않았으며, 오로지 책만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 배고픔이나 아픈 것도 전연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손에서 고서를 놓지 않았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으나 동쪽, 서쪽, 남쪽으로 창이 있어 볕이 드는 방향을 따라 밝은 곳에서 책을 보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었는데,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구한 줄 알았다. 그는 두보의 오언율시를 특히 좋아해서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병자의 앓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깨치면 너무 기쁜 나머지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곤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看書痴)’라 부른데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간서치전(看書痴傳)』

 

간서치란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이덕무는 평생 읽은 책이 2만 권이 넘었고, 베껴 쓴 책이 수백 권에 이를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한 선비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였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을 뿐 아니라 서얼 출신이었다. 책을 읽는다 한들 벼슬길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는 책을 사 볼 여유가 없어 남의 책을 빌려 보았고, 책을 읽은 뒤에는 반드시 그 책을 베껴 썼다. 사람들은 비록 몰래 감추어둔 책이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빌려주기를 꺼려하지 않으면서,

“이군(이덕무)은 진실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빌려주면서

“이군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 있다면, 그 책을 무엇에 쓸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지난 경진년과 신사년 겨울의 일이다. 내가 거처하던 작은 띠집이 몹시 추웠다. 입김을 불면 성에가 되곤 해, 이불깃에서 버석버석하는 소리가 났다. 내 게으른 성품으로도 한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한 질을 가지고 이불 위에 죽 늘어놓아, 조금이나마 추위의 위세를 누그러뜨렸다. 간밤에도 집 서북편 모서리로 매서운 바람이 쏘듯이 들어와 등불이 몹시 다급하게 흔들렸다. 한동안 생각하다가 『논어』한 권을 뽑아 세워 막고는 혼자서 그 경제의 수단을 뽐내었다.

(을유년 겨울 11월 28일에 적다)

 

그는 초가집이 통째로 얼어붙는 엄동설한에 『한서』이불과 『논어』병풍으로 겨우 얼어 죽는 것을 면할 정도로 몹시 가난한 선비였지만, 그는 현실의 삶에 갇혀 살지 않고 책 속에서 자신의 삶을 끝없이 확장시켰다. 책으로 벗을 만나고 날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정조가 만든 규장각의 검서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평생 읽은 2만 권의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가 지은 책 『청장관전서』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백과전서로 꼽힌다.

율곡의 독서법


율곡의 독서법

 

요즘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이 다른 시대와 비교하여 특히 더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약간의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인터넷의 출현 이후 종이책의 위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정보 제공의 매체로서, 아니면 오락적 매체로서 책의 기능을 인터넷과 영상이 상당 부분 잠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종이책이 되었건 전자책이 되었건 책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고, 책 읽기 역시 인간 고유의 습성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학문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은 거창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답한 사람이 있다. 바로 율곡 선생이다. 율곡은 특이하게도 독서론을 남기고 이 물음에 대해 답하고 있는데, 율곡의 독서론은 자신을 반성하는 문장, 곧 <자경문(自警文)>에 피력되어 있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율곡에게 독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의 일과는 일과 독서로 구성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이 율곡의 일과다.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독서를 통해 옳고 그름을 분변하고, 그 분변은 일상의 일에서 실천돼야 한다.

<자경문>에 간단히 언급된 독서의 원리는 『격몽요결』에 더욱 상세히 언급된다. 『격몽요결』은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비결’이라는 제목과 같이 일반 학도들에게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편찬된 입문서이다. 여기서 율곡은 독서에 대해 보다 자세히 논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잘 간직하여 다른 일이나 물건에 정신을 파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반드시 이치를 추구하여 훌륭한 길을 밝히고 나서야 마땅히 가야 할 길이 환하게 앞에 있게 되어 그의 공부는 진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인들과 현명한 분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훌륭한 일과 악한 일 같은 본받아야 하고 경계해야 할 일들이 모두 책에 씌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인 책읽기는 왜 하는 것인가? 그것은 책을 통해 성인들의 마음쓰임을 알고, 또 그것을 통해서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하는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은 성인과 현명한 사람이 쓴 책이어야 한다. 성인이 쓴 책을 읽어야 성인과 같은 올바른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이 쓴 책을 읽어야만 현명한 올바른 판단력을 갖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책읽기를 통해서 성인의 마음쓰임을 터득하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게 되어야만 이치를 올바로 추구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이치란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리나 같은 말이다.

율곡은 책을 읽는 순서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어 부모님을 섬기고 형을 공경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하고 어른을 잘 모시고 스승을 존경하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도리에 관해 익힌 다음 그것을 실천하기에 힘써야 한다. 다음으로 『대학(大學)』과 『대학혹문(大學或文)』을 읽어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이치와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배우며, 『논어(論語)』를 읽어서 어짊을 추구하고 자기를 바르고 충실하게 하며 근본적인 바탕을 철저히 잘 닦는 공부를 잘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맹자』를 읽어 의로움과 이익을 분명히 분별하고 사람의 욕망은 막고 하늘의 이치를 잘 드러내는 설(說)을 밝게 살피며, 『중용(中庸)』을 읽어서 사람의 본성과 감정의 움직임을 잘 조절하여 가장 적절하고 조화되게 하는 공부와 하늘과 땅이 자리 잡히고 만물이 잘 자라나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 익히도록 한다.

다음으로는 『시경(詩經)』을 읽어 사람의 본성과 감정이 비뚤어지고 올바르게 되는 것과 착한 일이나 악한 짓을 해 상을 받고 벌을 받게 되는 일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예경(禮經)』을 읽어 하늘의 이치를 근거로 한 예절과 형식 및 올바른 몸가짐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법도를 연구하여 올바른 몸가짐을 지녀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서경(書經)』을 읽어 요임금․순임금과 하나라 우임금․상나라 탕임금․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천하를 다스린 위대한 원리와 법도에 대해 그 요점을 터득하여 근본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역경(易經)』을 읽어서 좋은 일이 있기도 하고 나쁜 일이 있기도 한 것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 및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는 것과 사라지기도 하고 불어나기도 하는 빌미에 대해 살펴보고 공부하여 그 근본을 추구해 알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춘추(春秋)』를 읽어서 성인께서 착한 일에는 상을 주고 악한 일에는 벌을 주며 억누르기도 하고 드러내 주기도 하면서 세상을 올바로 이끌려고 하여 은밀한 표현의 글로 담아 놓은 깊은 뜻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여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선현들이 지은 『근사록(近思錄)』․『주자가례(朱子家禮)』․『이정전서(二程全書)』․『주자대전(朱子大全)』․『주자어류(朱子語類)』와 성리학설을 정독할 것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율곡은 『격몽요결』에서 책 읽는 방법과 독서의 바른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제나 책을 읽는 사람은 두 손을 모으고 똑바로 앉아 공경히 책을 대해야 한다. 마음을 통일하고 뜻을 모아 골똘히 생각하고 깊이 두루 살펴 뜻을 철저히 이해하되 모든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할 방법을 찾도록 해야 한다. 만약 입으로만 읽어서 마음으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몸으로는 실행하지 못한다면 곧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가 될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책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올바른 자세로 앉아 공경스러운 태도로 책을 대한 다음 정신을 통일하여 읽음으로써 그 책에 쓰인 글의 뜻을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반드시 몸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단정히 앉아 엄숙한 자세로 텍스트의 뜻을 연구하고, 언제나 실천의 방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요즘의 독서와 크게 다른 모양이다. 현대인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독서의 형태이다. 율곡이 살았던 조선시대의 독서는 양반 신분만의 일이었다.

따라서 율곡의 독서론이 오늘날의 시대에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비록 율곡이 정한 독서목록과 근엄한 독서 자세에는 찬동하기 어렵지만, 그의 진지한 책 읽기에는 찬성해 마지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책 읽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간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율곡과 밤나무


율곡과 밤나무

 

이이는 자신의 호로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을 사용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율곡이다. 이이가 호를 ‘율곡’이라 정한 것은 고향인 파주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율곡 이이는 밤나무와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에는 ‘너도밤나무’, 또는 ‘나도밤나무’에 관한 설화가 여러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내용은 거의 비슷비슷한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율곡선생과 나도밤나무의 설화이다. 그 설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원수 공이 늦은 나이에 율곡을 낳아 애지중지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지나가던 도사가 어린 율곡의 얼굴을 보고는 관상이 좋기는 하지만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사주를 타고 났다면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호환(虎患: 호랑이의 습격으로 인한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이원수 공은 도사의 말대로 뒷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 정성껏 가꾸었다. 마침내 율곡이 스무 살쯤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율곡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원수 공은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 정성을 다했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 사람과 함께 밤나무 수를 세어 보니 한 그루가 모자랐다. 그때 옆에 있던 나도밤나무가 나서서 자기도 밤나무라고 하니 그 사람은 호랑이로 변해 죽었다. 그 후 율곡은 호식을 면하고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

 

나도밤나무는 아이가 타고난 호환 운명을 예언하는 사람에 따라 시주승이나 도사가 예언하는 경우와 주모가 예언하는 경우로 나뉜다. 시주승이나 도사가 등장하여 예언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인 형태이며, 주모가 예언하는 경우는 율곡을 잉태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판관대(判官垈: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위치) 전설과 연관이 깊다. 결말도 호환을 막는 데 성공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나도밤나무의 유래담이나 율곡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많고 많은 나무 중에서도 하필 밤나무였을까? 갈잎큰키나무 참나뭇과의 밤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독특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바로 밤나무의 열매인 밤송이다. 밤송이는 다른 나무에서 볼 수 없는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다. 밤나무가 엄청난 가시를 가진 밤송이를 만든 것은 밤 알맹이 자체가 씨방이기 때문이다. 밤송이의 가시는 씨방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밤송이는 유교를 믿었던 중국과 한국의 문화에 아주 특별하다. 제사 때 반드시 올리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래 예(禮)의 어원적 의미는 신들에 대한 제사에서 찾을 수 있다. 예는 보일 시(示)와 풍성할 풍(豊)이 합해진 글자이다.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놓고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이다. 인격적인 유일신 사상이 없었던 우리 민족의 제사 대상은 하늘과 조상이었다. 먹을 것을 새로 수확할 때마다 하늘과 조상에게 먼저 바쳤던 것은 비록 자신이 땀 흘려 얻은 결과라고 하더라도 하늘과 조상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사 때 밤을 이용하는 것도 밤의 특성과 관련 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틔워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지만, 밤나무는 종자의 껍질이 뿌리가 내려가고 줄기가 올라오는 경계 부근에 아주 오랫동안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밤나무를 자신의 근본, 즉 선조를 잊지 않는 존재로 여겼다. 아울러 밤은 자식과 부귀를 상징한다. 혼례에 밤이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갑골문에 등장하는 율(栗)은 나무 위에 밤송이가 달린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가시가 달린 밤송이를 율자(栗刺)라 부른다. 율(栗)은 가시 때문에 ‘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밤송이의 특징 때문에 생긴 한자가 바로 전율(戰栗, 혹은 戰慄)이다. 전율은 두려워서 떠는 모습을 말한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로 신주(神主)를 만들었다. 밤나무로 만든 신주를 ‘율주(栗主)’라 한다. 조선시대 왕가의 제사 때도 밤나무로 만든 신주와 신주를 모시는 궤를 사용했다. 가시를 지닌 밤송이를 통해 경건한 자세를 갖추기 위함이며 밤나무가 단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주에는 제사를 모시는 분의 이력을 모두 적어야 하고, 오랫동안 보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씨를 적을 만큼 결이 고와야 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단단해야 한다. 신주의 재료인 밤나무의 길이는 한 자 두 치, 너비는 네 치, 두께는 팔 푼이다. 위쪽은 반달 모양이고, 나무의 면은 희게 해서 글씨는 먹으로 썼다. 글씨를 쓴 다음에는 옻을 두 번 칠했다. 후손들이 조상의 신주를 밤나무로 만든 것도 조상에 대한 공경의 태도이다.

고산구곡가와 은병정사


고산구곡가와 은병정사

 

율곡은 29세가 되던 1564년(명종 19)에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후 율곡은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 3년간 호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이조좌랑을 지냈다. 이 벼슬은 모두 정6품직이지만,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이른바 청직(淸職)과 요직(要職)이었다. 육조의 낭관(郎官)은 요직이고, 사간원 정언은 청직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를테면 엘리트 코스의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32세의 장년에 들어선 율곡은 16세의 선조를 새 임금으로 만났다. 선조는 비록 후궁의 소생이지만 품성도 바르고 공부도 많이 하여 그가 임금이 되자 신민의 기대가 자못 컸다. 선조를 새 임금으로 모시게 된 율곡도 이제야말로 횡포를 부리던 척신(戚臣: 왕비 집안 권력자)들이 모두 제거되고 선비가 꿈꾸는 왕도정치가 꽃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선조 또한 율곡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을 인정했다. 율곡은 18년간 조정과 향리를 오가면서 간헐적으로 벼슬살이를 이어갔는데, 율곡이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파주, 해주의 석담 등지로 은거한 것은 선조가 율곡의 말을 옳게 받아들이면서도 실천을 게을리 하고 개혁을 두려워하여 율곡을 실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율곡이 비록 충성스럽고 똑똑한 선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언사가 너무 과격하고 개혁에 대한 열망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를 견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음)의 관계를 가지면서 숨바꼭질을 하듯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다시 말해 율곡을 불러들이면 골치 아프고, 율곡이 물러나 있으면 그의 경륜이 필요한 것이 선조의 입장이었고, 임금을 만나면 직언으로 정치를 비판하고 임금이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는 것이 율곡의 몸가짐이었다.

율곡이 서른다섯의 나이에 해주로 물러나 있을 때는 야두촌(野頭村)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처가 노씨의 전장(田莊: 경작지)이 있었다. 율곡의 학문적 명망이 높았기에 해주까지 내려가 배움을 청하는 서울 선비들도 많았다. 이듬해 해주의 고산(高山)에 있는 석담구곡(石潭九曲)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구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특히 제4곡을 송애(松崖)라 이름하고 기문을 지었다. 이때부터 율곡은 이곳에 복거(卜居: 살 곳을 정함)할 뜻을 세웠다.

그러나 석담에 살고자 한 뜻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이듬해인 37세 때 병이 생겨 부득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선조가 부응교의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부르자 가까운 파주의 율곡(栗谷)으로 몸을 빼서 가버렸다. 그 후 선조가 다시 사간원 사간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홍문관 응교와 전한, 직제학 등 벼슬을 올려가면서 거듭 부르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동부승지, 우부승지, 대사간 등을 지냈다. 그 사이사이 벼슬을 그만두고 율곡으로 돌아가 쉴 때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정치와 사회의 개혁안을 지속적으로 내어놓았다는 점에서 우국애민의 선비정신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은 43세가 되던 1578년 해주 석담의 청계당 동쪽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삶을 본격화하였다. 석담은 수양산 지맥이 서쪽으로 달려 형성된 선적봉과 선적봉 서쪽 수십 리에 있는 진암산 사이에 있었다. 물길이 두 산 사이로 흘러나와 아홉 번 꺾이며 40리를 달려 바다로 들어가는데, 꺾이는 곳마다 못이 있어 배를 띄울 정도로 깊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대부분의 조선 선비들이 동경하던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우연히 닮아 있었다.

율곡은 이곳에 은병정사를 세우면서 석담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이것이 우리 시가사에서 길이 빛나는 「고산구곡가」이다. 이는 송나라 주자가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가」를 지은 것을 본뜬 것이다. 「고산구곡가」는 한글로 지었으나 뒷날 송시열이 이를 한문으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이렇게 석담에 청계당과 은병정사가 세워지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더욱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율곡은 은병정사 북쪽에 주자사(朱子祠)를 세우고 여기에 조광조와 이황을 배향하려고 계획하여 규약까지 만들어 놓았으나 건물을 세우기 전에 세상을 떠나니, 2년 뒤에 제자들이 유지를 받들어 세웠다.

은병정사는 율곡의 사후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604년 해주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중수하고 신흠(申欽)이 지은 기문을 붙였다. 이와 함께 석담의 유적을 그림으로 그려 전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권섭의 <제고산구곡도(題高山九曲圖)>와 「고산구곡도설(高山九曲圖說)」에 따르면, 율곡의 서현손인 이석이 가장 먼저 고산구곡도를 그렸고 이를 평양의 화가 조세걸이 모사하여 김수증이 소장하고 있었다 한다.

이석이 그린 그림은 후에 원만령이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동방 도통의 적자임을 자부한 송시열이 다시 모사하게 하였다.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 차운하여 이이의 「고산구곡가」의 뜻을 담은 시를 짓고, 자신의 문인에게 구곡을 분배하여 한 편씩 시를 짓게 한 다음 이를 김현성의 글씨로 적어 <고산구곡도>와 함께 장정하였다. 이 일은 송시열의 고제자 권상하가 실무를 맡았다. 권상하를 비롯한 김수증․김수항․송주석․송규렴․김창흡․이희조․정호․이여 등 아홉 사람이 구곡에 대한 시를 지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송시열과 권상하가 대를 이어 이룩한 이 「고산구곡도」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율곡과 그의 풍도를 흠모한 후인들은 지속적으로 석담을 그림으로 그려 이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영조는 1760년 석담서원과 율곡이 살던 옛 집터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도록 명하였으며, 정조도 1781년 고산구곡을 그려 올리도록 명한 바 있다. 정선이 <석담도(石潭圖)>를 그린 바 있고, 김홍도․김득신․이인문 등이 구곡을 나누어 그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의 그림에는 율곡의 생전에 없던 소현서원과 요금정(瑤琴亭)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다. 소현서원은 율곡을 제향하기 위해 은병정사가 있던 곳에 세운 것이니 은병정사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요금정은 이희조가 해주목사로 나간 1699년에 세운 정자이다. 이희조의 「석담요금정기(石潭瑤琴亭記)」에 따르면 율곡은 거문고를 좋아하였는데 율곡이 죽은 후 최립이 그 거문고에 잠(箴)을 지어

“은병이 그윽하니 선생이 마음을 깃들인 곳이요, 금탄이 시원하니 선생이 소리를 의탁한 곳이다. 은병 아래 금탄 위에 선생이 거문고를 매만졌으니, 나는 선생이 음(音)을 얻은 것은 얕지만 마음에 안존한 것은 깊다고 생각한다.

선생은 명(銘)을 지었고 나는 좇아 잠(箴)을 짓노라. 은병 위와 금탄 아래 달빛이 잠기고 바람이 그치면, 선생이 계실 때처럼 나를 위해 거문고 한번 울려주었으면 좋겠네.”

라고 하였다. 그 후 이 요금정은 1739년에 홍수로 허물어진 것을 고을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1742년에 중수되었다. 그래서 18세기 석담을 그린 그림에는 모두 요금정의 모습이 보인다.

퇴계와 율곡, 같은 시대 다른 삶


퇴계와 율곡, 같은 시대 다른 삶

 

퇴계와 율곡이 처음 만난 것은 1558년(명종 13) 율곡이 처갓집이 있는 경상도 성주에서 강릉의 외조모 댁으로 가는 도중에 안동에 들려 퇴계를 찾아가 이틀 밤을 묵었을 때였다. 두 사람은 그 후 1567년(명종 22) 6월 퇴계가 임금의 부름에 답해 서울로 올라오자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부터 따져본다면 9년째가 되는 해였다. 이때는 율곡이 벼슬길에 나선 지 4년 째 되는 해로, 호조와 예조의 좌랑을 지내고 나서 사간원 정원을 거쳐 이조좌랑으로 일하던 때였다.

그전까지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여러 차례 거절하고 오랫동안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명에서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고, 조정에서는 사신을 접대하는 제술관으로 퇴계가 적임자라고 추천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문장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을 발탁하여 그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퇴계는 이미 여러 차례 임금이 부르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아 난처한 입장이었고, 또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사신이 머무는 동안만 필요한 임시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따라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퇴계가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명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신을 영접하는 일을 맡기 위해 올라왔지만, 퇴계는 임금의 장례를 눈앞에서 맞게 되었다. 퇴계는 국장을 맞아 명종의 행장을 지어 올렸고 곧이어 예조판서의 자리를 맡으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퇴계는 예조판서를 맡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마침내 해직되자 다음 날 새로운 관직이 내리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당시는 명종의 장례가 아직 끝나지도 않은 때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퇴계의 처신을 놓고 크게 물의가 일었다.

율곡은 퇴계가 서울에 있을 때 힘써 조정에 남도록 설득했고, 또한 따로 편지를 보내 낙향하려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이때의 사정이 율곡의 『경연일기』에 보인다.

 

이이가 이황을 뵙고서 말했다.

“어린 임금이 처음 서시고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보더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황이 대답했다.

“도리로는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능력도 또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요.”

그때 성혼을 참봉으로 삼았으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물었다.

“성혼은 왜 오지 않소?”

그러자 이이가 대답했다.

“성혼은 병이 많아 관직을 맡지 못하오. 만약 강제로 벼슬하라 하면 그것은 그를 괴롭히는 일이오.”

이황은 웃으면서 말했다.

“숙헌(이이의 자)은 성혼은 두터이 대접하면서 어찌 나는 그리 야박하게 대접하오?”

그러자 이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한 몸의 사사로운 계책을 생각해줄 여지가 없습니다. 낮은 벼슬로 성혼을 바쁘게 한다고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경연 자리에 계신다면 이익이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이 대답했다.

“벼슬은 진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일 남에게는 이로움을 미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에게 근심이 절박하다면 할 수 없소.”

이이가 말했다.

“선생이 조정에 계신다면 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임금이 마음 깊이 의지하고 사람들도 기뻐하며 힘입을 것이니, 이 역시 이로움을 남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은 퇴계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서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율곡은 당시 조선의 형세를 서서히 허물어져 가는 만 칸의 큰 집에 비유하면서 ‘지금 여러 해 동안 손질하지 않는 바람에 옆으로 기울고, 위로는 빗물이 새고, 대들보와 서까래는 좀이 먹어 썩어가고, 단청은 모두 벗겨졌는데 임시방편으로 손을 보아 간신히 아침저녁을 넘기고 있는 신세와 같다.’고 보고 있었다. 율곡은 개혁의 긴급함과 현실의 답답함 속에서 번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나라가 고질병에 빠진 것이 20년이 넘었습니다. 아래위가 모두 옛 관습만 따를 뿐, 한 올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의 힘은 이미 말랐고 나라의 저축도 이미 비었습니다. 만약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벼슬하는 선비는 곧 허물 천막에 집을 지은 제비 신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 생각만 하면 한밤중에 저도 모르게 일어나 앉게 됩니다. 저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선생께서는 새 임금의 은혜를 입고 벼슬이 육경에 올랐는데 이에 대해 무심하실 수 있겠습니까?

율곡전서』9, 「퇴계선생께 올림(上退溪先生)」정묘(1567) 6월

 

율곡은 퇴계에게 다시 한 번 ‘문을 닫고 병을 다스리면서 대궐 일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서울에만 계시면 선비들의 기개가 저절로 갑절이나 될 것이요,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퇴계가 물러나려 하면서 내세운 논리, 곧 병이 많고 능력이 부족하여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율곡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이러한 퇴계의 처신을 놓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들끓었다. 퇴계를 ‘산새’와 같다고 하는 이도 있고, 이단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율곡도 퇴계의 처신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율곡은 낙향한 퇴계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벼슬길에 나오도록 권유했다. 율곡은 이 편지에서 퇴계에게 조정에 나와 임금을 도우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여기서 두 사람 사이에는 관직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퇴계나 율곡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림이라면 누구나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출처의 의리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때문에 고민했다. 임금의 은혜를 입은 신하요 큰 뜻을 품은 사대부로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보살펴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바치는 것은 어릴 적부터 꿈꾸어오던 그들의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임금이 어둡고 세상이 혼탁하면 부귀와 영화에 홀리지 않고 초연히 은거하여 스스로를 기르는 것 또한 선비가 가야 할 길이었다. 조선 중기를 사는 양반 사대부라면 누구나 두 가지 길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그리고 자신이 하늘에게서 부여받은 임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갈리게 될 터이다.

퇴계나 율곡도 이 문제로 늘 고민하고 갈등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 이러한 고민과 갈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살펴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어느 한 길만이 옳은 길이며 그 길만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길이 모두 가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다만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좀 더 가치 있고 올바른 길인지 끊임없이 고민했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심했을 따름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판단에 달린 문제였다. 이에 대해 퇴계는 자신의 소명을 은거와 학문에서 찾았고, 율곡은 관료로서 나라에 헌신하는 데서 찾았다.

퇴계와 율곡이 세상을 떠날 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은 이러한 가치의 갈림길이 과연 어떤 것인지 웅변으로 들려준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제자들과 생활을 같이 하고 있었다. 1570년 12월 퇴계는 병세가 악화되자 세상을 마칠 준비를 했다. 유언을 구술하여 조카에게 적게 하고, 제자들을 불러 만나보며 마지막 길을 정리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던 날을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2월 8일 아침 선생께서 분매(盆梅: 매화나무 화분)에 물을 주라고 명하셨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조카 교를 불러 말씀하기를,
“내 머리 위에서 비바람 소리가 들린다. 너도 들리느냐?”

하므로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하였다.

선생에게서 편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유시(酉時:오후 5~7시)에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들어 지붕 위에 한 치 가량의 눈이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께서 누운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하시고는 붙들고 일어나 앉아서 돌아가셨다. 곧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개었다.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하, 「기선생임종지명(記先生臨終之命)」

 

반면 율곡은 벼슬길의 어려움을 절감하면서도 퇴계와 같이 떨쳐 벗어나지 못했다. 좀처럼 사림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선조의 태도를 되돌리고, 동서로 갈라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던 사림세력을 화해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다가, 1584년 1월 49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것도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러 찾아온 관리에게 병을 무릅쓰고 방략을 일러주다가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이 순무어사로 관북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를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만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이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만약 이 일로 병이 더 심해진다면 그 역시 운명이다.”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죽었다. 향년 49세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17년(1584) 1월 1일 기묘(己卯)

인성 한문·한자 교육 – 격몽요결(기초2반) 1학기 5차수업


화요일(기초2반) – <격몽요결>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0월10일 화요일 인성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5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