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 한문·한자 교육 – 소학(기초2반) 1학기 6차수업


금요일(기초2반) – <소학>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0월 20일 금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6차 강좌를 이성호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 교육 – 동호문답(고급반) 1학기 6차수업


목요일(고급반) – <동호문답>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0월19일 수요일 인성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6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 교육 – 성학집요(중급반) 1학기 6차수업


수요일(중급반) – <성학집요>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0월18일 수요일 인성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6차 강좌를 김종서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인성 한문·한자 교육 – 격몽요결(기초1반) 1학기 6차수업


화요일(기초1반) – <격몽요결>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강좌 모습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인성 한자·한문 지도자 양성 1학기 6차 강좌를 함현찬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하였습니다.


율곡의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율곡의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조선 중기 이후 지방에서 학문을 연구하면서도 중앙의 정계에서 막후의 실력 행사를 했던 인물 혹은 학자군을 지칭하는 말로 ‘산림(山林)’이란 용어가 있다. ‘산림’은 학문적 능력을 갖추고 지방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중앙 정계에 발탁되어 정치적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들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로서 관직에 참여하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6세기 사림파의 성장이 활발해진 이후 학문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다. 16세기 말 성혼(成渾), 정인홍(鄭仁弘) 등이 과거를 통하지 않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19세기의 학자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광해군 시대에 활약한 정인홍을 산림의 연원으로 파악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은

“국혼을 놓치지 말고 산림을 높이 등용할 것
[勿失國婚 崇用山林]”

을 표방하면서 특히 산림의 지지를 얻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성균관에 산림직(山林職)인 사업(司業, 종4품)을 설치하고 신망 받는 학자를 안배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으로 등용된 이들, 이른바 산림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

산림은 공자의 학문 곧 도통(道統)을 잇고, 세도(世道: 세상의 도리)를 실현하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적어도 학문이나 사상 방면에서는 국왕조차 압도하는 권위가 있었다. 산림의 중용은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조선 정치의 또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제자 송시열과 송준길은 모두 서인 산림으로, 17세기 조선의 정계와 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라부터 조선까지의 수많은 유학자 가운데 단 18명만이 배향된 문묘에 그들이 모두 올라있음은 그 학파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산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산림정치의 본격화는 인조대에 이루어졌으며 그 선두에 김장생이 있었다. 그럼 율곡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김장생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장생은 1548년(명종 3)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예조참판까지 지냈던 김계휘였고 모친은 우참찬을 지낸 신영의 딸이었다. 김장생의 5대조 김국광은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으로 성종대에 좌의정까지 역임했으며 광산부원군에 봉해진 대표적인 훈구 재상이었다. 그의 후손은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대에 이르러 사림이 되었다. 김계휘는 서인인 심의겸․기대승․이이․성혼․정철 등과 절친했다.

김장생은 13세에 송익필에게 배웠다. 송익필은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학문이 고명했던 율곡과 성혼도 예에 관한 문제는 그에게 물었을 정도로 대가였다. 그러나 서얼이었던 부친 송사련이 안당 부자를 고변하여 멸문시킨 신사무옥 때문에 송익필은 사대부, 특히 동인에게 질시받았다. 그 후 그는 동인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의 제소에 따라 환천(還賤: 양민으로 해방된 노비가 다시 천인이 됨)되었다가, 기축옥사로 신분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이후 송익필은 유배와 사면을 거듭하다 말년에는 불우하게 여생을 마쳤다.

김장생이 율곡을 찾아 배움을 청했을 때 나이가 스물이었다. 율곡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고 여러 차례 회고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컸다. 김장생이 30세가 되었을 때, 율곡은 송익필에게 서찰을 보내어 더 가르칠 게 없다 했으니, 그즈음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던 모양이다. 33세에는 성혼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배움이 늦었던 이유는 율곡에게 받은 영향이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 스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성혼의 풍모와 논의에도 심히 감복했다. 이로서 김장생은 서인 학문의 기초를 세운 3인의 학문을 고루 섭렵하게 된 것이다.

뛰어난 스승들을 두루 섭렵했으니 참 명민했을 법하건만, 김장생은 스스로 ‘굼뜨고 미련하다[魯鈍]’고 자주 자평할 정도로 재주가 없었다. ‘문장이 졸렬하고 식견이 꽉 막혔다.’는 다소 조롱 섞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문집 『사계유고(沙溪遺稿)』에 시가 단 세 수만 실려 있을 뿐이고, 그를 기리는 글들에 문장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이 없는 것을 보면 확실히 문장에 대한 재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장이 졸렬하고 식견이 막혔다는 비난을 뒤집어 보면 약삭빠르지 않고 허식을 부리지 않는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는 스승인 율곡이나 송익필처럼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대신 꾸준한 독서로 단점을 보완해 나갔다. 송익필이 『근사록』을 가르칠 때, 남들도 자기처럼 알겠거니 하며 한 번 읽고 넘어가 버리자, 멍해진 김장생은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읽는 일을 자나 깨나 반복했다고 한다. 성실한 독서만큼은 따를 자가 없으리라고 자부했으니, 하늘은 명민함 대신에 돈후함과 성실을 내려준 셈이었다.

김장생은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30대에 경학(經學: 경전의 고증과 해석)과 예학에 일가를 이루어 이름을 날렸고 그로 인해 천거되어 관직에도 올랐다. 그는 과거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요직과는 거리가 먼 한직을 전전했다. 임진왜란 때 맏아들 부부와 손자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활은 평탄한 편이었다. 율곡의 수제자로서 명성은 높았지만, 관인으로서의 극적인 장면도 없었고 지방에 은둔하는 고고함도 없었다.

이처럼 착실한 학인 김장생이 서인의 산림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생애 최대의 시련 때문이었다. 1613년(광해군 5)의 계축옥사에 그의 서제(庶弟) 두 명이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다. 당시 광해군이 김장생의 연루 여부를 탐문했을 정도로 그는 주목 대상이었다. 사건 이후 그는 선대 이래 연고가 있던 충청도 연산(현재 논산군 연산면)에 내려가 두문불출하며 제자를 교육했다. 이후 김장생은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10여 년간 학문 연마에 몰두했고, 강학을 통해 수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김장생이 생전에 거둔 문인은 아들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정홍명, 조익, 윤순거, 임숙영, 최명길, 김류, 이시백, 이경석 등이었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문인 중에 일부는 인조반정을 주도해 국가 지도층이 되었다. 또 다른 일부, 특히 연산 강학 때에 형성한 그룹은 향후 서인의 체질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선조 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할 무렵 서인은 동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장층이었고 관료적 성향이 짙었으므로 학문을 매개로 한 결속력은 미약했다. 서인 학문의 원조는, 동인의 원조인 서경덕․이황․조식 등에 비해 한 세대 뒤인, 율곡과 성혼이었다. 생전의 율곡은 사림의 분열에 반대하며 동인과 서인의 고른 등용을 위해 노력했지만, 사후 자연스럽게 서인학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 후 도통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서인 내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율곡과 성혼의 행적을 두고 약간의 알력이 싹트기 시작했다. 김장생은 성혼이 임진왜란 때 선조에게 대일(對日) 유화책을 건의했던 일을 들어 비판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별다른 의미를 둔 발언은 아니었지만, 훗날 노론과 소론이 각기 율곡과 성혼의 학맥으로 도통을 정할 때에 노론 측에서는 이 발언을 들어 율곡-김장생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정립했다. 결과적으로 김장생은 서인-노론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정체성을 형성시킨 산파가 된 셈이었고, 후대에 노론에서는 이이-김장생-송시열로 도통을 정리하게 되었다.

유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김장생이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분야는 예학이었다. 예학은 치밀한 고증과 성실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가를 이루기 힘든 분야였고, 그런 점에서 김장생의 성실함은 예학 탐구에 잘 맞는 기질이었다. 김장생이 이룬 예학은 훗날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19세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덕치(德治)는 조광조, 도학(道學)은 이황, 학문은 이이, 의리는 송시열, 그리고 예학에서는 김장생을 동국제1인으로 꼽을 정도였다.

김장생은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천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엘리트 관료의 필수 코스, 사가독서(賜暇讀書)


엘리트 관료의 필수 코스,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 학문이나 예술이 발전하는 기세)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사가독서’ 제도를 시행하였다. 조선에서 사가독서제를 최초로 실시한 임금은 최고의 학자 군주였던 세종대왕이었다.

세종대왕은 학술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1420년)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된 선비들 중 유능한 자를 선발하여 업무를 보도록 하였으며, 세종 8년(1426) 12월부터는 이들에게 별도로 휴가를 주어 집에서나 사찰 등에서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사가독서자로 발탁된 자는 권채․신석조․남수문 등 세 사람으로, 세종은 이들에게 일정기간 휴가를 주고 집에서 글을 읽는 ‘재가독서(在家讀書)’를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가독서’는 친구들의 빈번한 왕래 때문에 독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사찰에서 독서하는 ‘산사독서’를 하게 하게 하였다. 당시 ‘산사독서’를 한 선비들로는 『대동야승』에 박팽년․신숙주․이개․성삼문․하위지․이석형 등이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를 하였고, 『용재총화』에서는 홍응․서거정․이명헌 등이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세종 때 시작된 사가독서제는 인재양성의 토대가 되었고, 문종 때에도 이 제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가독서제는 세조 때 큰 위기를 맞는다.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집현전 학사들의 목숨을 내던진 저항에 부딪쳤던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면서 사가독서제까지 폐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종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부활하기에 이른다. 조선 개국 이후 제도와 문물 정비에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가졌던 성종이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따라서 성종 7년(1476)에 새로이 사가독서를 할 젊은 문신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계속된 가뭄 및 기근 등으로 사가독서가 정지되기도 하였다가, 성종 22년(1491)에 다시 부활되었다. 이때 사가독서를 부활하면서 독서의 장소를 사찰로 정하려고 하였다가 나라를 이끌 동량(棟樑)들이 독서하고 학문을 닦는 곳이 허름하고 또한 이름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여론이 크게 일었다. 이에 이듬해 성종은 용산의 빈 절을 대폭 수리하도록 한 다음 ‘독서당(讀書堂)’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당시 독서당은 20칸 규모에 시원한 대청마루와 따뜻한 온돌방이 모두 갖춰져 여름과 겨울에도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사가독서자의 대우 문제는 국가에서 모든 식량을 공급하였으며, 수시로 독서권장을 목적으로 사가독서자에게 임금이 직접 술과 안주를 내리기도 하였다. 성종 24년(1493) 8월 18일에는 성종이 독서당에 술과 수정배(水精杯)를 하사하자 홍문관의 관원이 도금으로 수정배의 받침대를 만들고 김일손이 수정배에 글을 지어 새기기도 하였다. 이 수정배는 연산군 11년(1505)에 홍문관을 혁파하면서 승정원으로 옮겨졌는데 중종 때 사가독서의 부활과 함께 다시 독서당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영조가 독서당에 소장된 수정배를 들여오라고 명하고 친필로 ‘이제야 옛날 물건을 보니 팔순에 좋은 구경을 하였다. 특별히 술잔 셋과 함께 보관하라.’고 써서 내리고, 전 대제학에게 발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성종은 사가독서자에게 식량과 술 및 물품 등을 내려주며 독서를 권장하였고, 과제를 주어 수시로 그 결과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가독서자는 강혼․권건․권경유․권오복․김감․김상건․김일손․박증영․신용개․신종호․양희지․유호인․이경동․이승건․이의무․이종준․조위․조지서․채수․최부․허집․허침 등이었다. 연령별로 보면 10대가 1명, 20대가 12명, 30대가 7명, 기타 연령 2명으로 20대가 가장 많았다.

이렇게 용산에 터를 잡은 독서당은 연산군이 들어서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신진 관료와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혐오한 연산군이 사림을 대거 죽인 갑자사화 이후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그 뒤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사가독서제는 부활했지만 용산의 독서당은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중종 12년(1517) 두모포(豆毛浦: 현재 성동구 옥수동)에 독서당을 지어, 이곳에서 사가독서를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용산의 독서당을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라 하고, 두모포의 독서당을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불렀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의하면,

“한강 북쪽 기슭에 자리한 동호당은 규모가 남호당보다 넓고 꾸밈도 더 화려하며, 국가에서 제공하는 식량 및 공급물도 더 많고 훌륭하다. 그래서 모두가 독서에 열중하였으므로 독서당은 항상 빈집처럼 조용하였다.”

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참화는 또다시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에 위기를 불러왔다. 전란의 와중에 동호독서당은 불타 버렸고, 사가독서제 또한 있으나 마나 한 제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대제학 유근의 요청으로 한강별영(漢江別營)을 임시로 사용해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나,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정치 혼란과 전란을 겪으면서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더욱이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사가독서제가 폐지되어 독서당은 그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렇게 사라져 버린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은 정조 임금에 와서 새로이 설치된 초계문신제와 규장각으로 말미암아 본래 뜻과 의미를 되살릴 수 있었다.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했을 때 그 권위와 학문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조선의 관제(官制)상 고위 관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몸을 담아야 했던 홍문관 못지않은 인재 양성 기관이 독서당이었다. 따라서 사가독서에 뽑히는 것은 곧 탄탄한 관직 생활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주 엄격한 과정을 거쳐 매우 적은 인원만을 사가독서로 선발하는 제도를 마련해, 한 번에 여섯 명 가량의 신진 관료만을 뽑았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아야 오를 수 있었던 문형(文衡: 대제학)의 경우는 반드시 사가독서를 거친 사람 중에서 나오도록 제도화되어 있을 정도였다.

율곡 이이의 정치사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로서 왕도정치의 이상을 문답의 형식으로 서술하여 올린 『동호문답(東湖問答)』또한 율곡이 34세 되던 1569년(선조 2) 홍문관 교리로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하면서 지은 것이다.

조선 최고의 기남아, 백호 임제


조선 최고의 기남아, 백호 임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난이
잔(盞)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백호집(白湖集)』)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지은 유명한 시다. 『해동가요』에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이 노래를 지어 조문하다.’라는 기록이 있는 작품이다. 임제가 1583년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해 가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잔을 올리고 이렇게 시를 읊으며 넋을 달랬던 것이다. 사대부가 일개 기생의 묘를 참배하고 시까지 읊다니. 과연 조선이라는 유교사회에서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조정에서 큰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고, 그는 삭탈관직을 당해야 했다. 이처럼 세속의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임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549년 전라도 나주의 문무를 겸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남달랐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비온 뒤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글을 지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에 그는 다음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푸르고 붉은 몇 필 되는 비단을
직녀의 베틀에서 끊어내어
견우의 옷을 짓고자/ 비 온 뒤 씻어 하늘에다 걸었도다.

(『백호집』)

 

과거시험 위주의 글에는 흥미가 없던 그는 22세 때 속리산에 있던 재야학자 성운(成運)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성운은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시와 학문과 거문고를 함께하며 각처에서 학문을 배우러 온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등 많은 학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큰 선비였다.

스승은 격정적이고 분방한 임제의 성격을 바꿔보고자 중용을 1천 번 읽을 것을 주문했다. 임제는 지리산의 한 암자에서 중용을 800번 읽는 등, 그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6년 동안 이렇게 공부하다가 속리산을 떠나면서 다음의 시를 읊었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멀리하네
[山不離俗俗離山]

 

임제는 1577년 1월 속리산에서 하산한 후 그해 9월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홍양현감, 서북도병마평사, 예조정랑 등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

그의 호방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술을 좋아했던 그가 벗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말을 탄 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시중을 들던 하인이

“대감마님, 취하셨나 봅니다. 신발이 왼쪽은 가죽신이고, 한쪽은 짚신이옵니다.”

라고 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왼편에서 보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그게 무슨 탈이냐?”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자 했던 그의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검과 퉁소, 거문고를 항상 지니고 다녔던 임제는 풍류남아이고, 자유분방한 시인이었다. 가는 곳마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시가 있었다. 모르는 기생이 없고, 발길이 가지 않은 명승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하는 이들에게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 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후에 이리저리 유랑하다 고향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1587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주변 오랑캐 나라들이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도, 유독 우리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의 내가 살아간들 무엇을 할 것이며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울 일이 아니니 곡을 하지 마라.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는 유언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물곡의 유언 ‘물곡사(勿哭辭)’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임백호(林白湖) 제(悌)는 기개가 호방하여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가 병이 들어 장차 죽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슬피 부르짖으니 그가 말하기를, ‘사해(四海) 안의 모든 나라가 제(帝)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방(陋邦)에서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하며, 명하여 곡(哭)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또 항상 희롱조로 하는 말이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였다.”

(『성호사설』권9, 인사문)

사학자인 호암 문일평 선생은 그의 유언에 대하여,

“임백호의 멋진 생애에서 가장 감격적인 장면은 그의 위대한 임종이다.”

라고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조선의 대문호 신흠(申欽)은 『임백호집』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를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컬었고, 또 시에 있어서는 그에게 90리 이상 훨씬 뒤떨어져 그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하였다.

미련 없이 벼슬에서 물러나노라.


미련 없이 벼슬에서 물러나노라.

 

중국 초나라 항우는 키가 8척에 힘이 세고 장수의 풍모를 지녔으며 재기가 뛰어나고 군사적인 전략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그는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이었고, 그러다보니 점점 오만해져 자기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이 없어졌고 결국 전횡을 일삼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만일 그가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알았다면 초나라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미덕이긴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특히 지금과 같이 무한경쟁사회에서 양보란 마치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누구든 밟고 올라서야만 성공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무조건 양보만 하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관료가 되어 자신과 집안을 빛내는 것이었다. 입신양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벼슬을 서슴없이 양보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물론 양보하는 마음조차 성인군자의 자세라고 치부했지만 실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조대의 명신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대단히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전라도 나주 출신인 박순은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성우윤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육봉(六峰) 박우(朴祐)의 아들이자, 조선 제일의 시인으로 불리는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그는 젊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는데, 동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이에 퇴계․율곡․우계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가장 존숭하는 당대 제일의 인물로 그를 꼽기도 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16세의 어린 나이로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대제학이란 어떤 벼슬보다도 가장 명예로운 벼슬로 ‘문형(文衡)’이라고 불렸다. 문형이란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의미이다. 대제학은 정이품으로 판서와 동등한 품계였지만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나 육조 판서보다도 높은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대제학이란 벼슬을 제수 받았다는 건 개인으로서나 가문으로서나 크나큰 영광이자 명예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 없는 벼슬을 퇴계 이황에게 양보하였다. 퇴계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퇴계는 당시 예순여섯의 나이로 대제학의 아래인 제학에 제수되었다. 박순은 자신이 학문과 도덕이 높은 퇴계의 윗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자신과 퇴계의 벼슬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퇴계가 여러 모로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학식으로나 도덕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수 받은 벼슬을 바꿔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시의 일이 『선조수정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황에게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게 하였다. 그때 박순이 대제학, 이황은 제학이었는데 박순이 사양하기를, ‘나이 많은 석유(碩儒:큰 선비)가 차관(次官) 자리에 있고 신이 후진(後進)의 초학으로서 그 위에 있는 것은 맞지 않은 일이니 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여 이 명이 있었다. 그러나 황이 다시 굳이 사양하여 갈리었다.”

선조수정실록』선조1년(1568) 8월 1일(무진)

 

결국 선조는 박순의 뜻을 이해하고 퇴계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 오르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벼슬에 큰 뜻이 없었던 퇴계는 오래지 않아 사퇴하고 낙향하면서 박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숙(和叔: 박순의 자)과 마주하고 있으면 한 덩어리 맑은 얼음과 같아 정신이 아주 상쾌하다.”

고 하였다.

이듬해 박순은 이조판서가 되고, 1572년에는 우의정, 그 다음해에는 좌의정을 거쳐 1579년 마침내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1586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4년 동안 정승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는 당쟁의 시기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불이 붙자 그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추천하여 나라를 바로잡고자 했다. 특히 율곡은 당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해서 사림의 분열을 극복하고 결속을 다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율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갈등만 심해지고 그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지자 그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고 만다. 이에 율곡과 도의지교를 맺은 우계 성혼은 탄핵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선조는 박순에게 성혼의 상소문과 율곡의 죄의 유무를 물었다. 박순은

“지금 사람들이 이이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니 탄핵한 것은 공론이 아닙니다.”

라고 율곡을 두둔하자, 선조는 율곡을 탄핵한 자를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를 두고

“박순이 바로 이이요, 이이가 바로 성혼이라, 이 세 사람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는 비난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 후 박순은 동인의 공격으로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는 등 거센 비판에 힘든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쟁이 점점 가열되어 가는 시점에서 겸양을 미덕으로 알았던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그는 14년간의 영의정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강호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렸다.

그가 떠나는 날, 선조는 동대문 밖 보제원까지 나와 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14년간 정승으로 지냈던 신하에 대한 예우이자 진정으로 그를 존중하는 배려였던 셈이다. 그는 영평으로 물러나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우들과 함께 시를 지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시를 읊다가 갑자기 베개를 베고 신음하더니 부인 고씨를 찾았다. 그리고는 “나 가오.”라는 단 한마디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우레 소리가 진동했으며, 밤에는 백기(白氣)가 하늘에 뻗쳤는데, 그 광선이 땅에 비쳐 밝은 달과 같아서 산중 사람들이 바라보고 놀라며 의아해했다는 일화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해학으로 절망의 시대를 헤쳐 나간 명재상, 이항복


해학으로 절망의 시대를 헤쳐 나간 명재상, 이항복

 

조선시대 기지와 해학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오성 이항복. 그는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혼란하고 어려운 상황을 호방한 기개와 지혜로 헤쳐나간 명재상이었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이고, 권율의 사위이다.

이항복은 큰 인물답게 신비스러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태어나서 사흘 동안 젖도 먹지 않고 울지도 않아서 박견이라는 소경 점쟁이를 불러 보이니

“정승이 될 사주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라고 했다고 전한다.

돌이 되기 전에 우물에 빠질 뻔한 얘기도 전해진다. 유모가 우물가에서 어린 항복을 안고 있다가 잠시 졸았는데, 꿈에 얼굴이 긴 백발의 남자가 나타나 지팡이로 그녀의 종아리를 때렸다.

“어째서 어린아이를 보지 않느냐?”

유모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어린 항복이 우물에 막 빠지려는 찰나였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항복을 구했지만 꿈에 지팡이로 맞은 종아리가 며칠 동안이나 아파서 유모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항복의 선조인 고려 말 명신 이제현의 제사가 있었는데, 제사상에 오른 영정을 보고 유모는 깜짝 놀랐다. 우물가에서 졸고 있을 때 종아리를 친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기지가 넘쳤던 이항복은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열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을 겪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이때 함께 등과한 이덕형과 함께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 대제학 율곡 이이의 천거로 이덕형과 함께 사가독서를 받았으며 그 뒤 정자, 저작, 박사, 봉교, 수찬, 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측근에서 호종했다. 또한 정유재란까지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지내며 전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이항복과 그의 죽마고우 이덕형은 오랫동안 인구(人口)에 회자될 만큼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들이 어린 날부터 즐긴 재담과 해학은 ‘오성과 한음’이라는 어린이용 만화까지 나와서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특히 이덕형이 차분하고 위엄 있는 성품이었던 데 반해 이항복은 쾌활하고 호방한 기개가 넘쳐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이항복이 8세 때 하루는 아버지가 ‘칼과 거문고’로 글귀를 지으라고 명하니 그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올렸다.

“칼은 장부의 기상이 있고
[劍有丈夫氣],

거문고에는 천고의 소리가 담기었네
[琴藏千古音].”

이 시를 본 아버지는 아들이 장래에 큰 그릇이 되리라 믿었다.

이항복은 도량이 넓어 열두 살 무렵 이미 의(義)를 좋아해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남을 구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항복이 새 옷을 입고 외출을 했는데, 헤진 옷을 입은 이웃집 아이가 그 옷을 가지고 싶어 하자 즉시 벗어 주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남에게 주고 맨발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섯 살에 어머니마저 잃어 외로운 소년 시절을 보낸 이항복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했다.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손녀이자 권율 장군의 딸이었다.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가 된 후 공부에 매진해 진사시에 합격하고 스물다섯 살에는 알성시 병과에 급제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이항복의 해학과 기지는 그대로였다.

이항복이 병조판서이고 그의 장인인 권율 장군이 도원수이던 어느 해 여름의 일이다.

“장인어른, 날씨도 무덥고 하니 오늘 조회에는 의관속대를 다 갖춰 입고 가실 게 아니라 베 잠방이 위에 융복을 걸치고 가시지요.”

권율 장군은 고지식하게도 사위 이항복의 말을 따라 집에서 입는 베 잠방이 위에다 융복을 걸치고 대궐 조회에 참석했다. 물론 이항복은 병조판서의 조복을 제대로 차려 입었다. 그 날 조회에서 이항복이 선조 임금에게 주청했다.

“전하, 날씨가 너무 무덥사옵니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선조가 너그럽게 응락했고, 조회에 임한 모든 대신이 관복을 벗었다. 그랬으니 권율 장군이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위의 말을 따라 관복 밑에 짧은 베 잠방이를 걸치고 나왔는데, 바로 그 사위라는 자가 임금에게 관복을 벗고 조회하자고 청하는 게 아닌가. 난감하지만 권율 장군은 관복을 벗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은 긴 옷이 없는가? 어찌하여 짧은 베 잠방이를 입었는가?”

대답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장인을 대신하여 이항복이 대답했다.

“전하, 권 도원수는 집이 가난하여 여름에는 항상 짧은 옷만 입고 지낸다고 하옵니다.”

선조는 좋은 옷 한 벌을 권율에게 하사하였다. 이항복의 의도는 전쟁 중임에도 모시옷이나 명나라에서 수입한 비단으로 옷을 해 입는 다른 대신들을 비판하고 장인의 검소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또 이런 일화가 있다. 비변사 회의가 있던 어느 날 이항복이 유난히 늦게 도착했다. 누군가 “어찌 늦었습니까?” 하고 물어보자 이항복이 대답했다.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늦었소.”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환자(宦者: 환관)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하니 여러 정승이 배를 잡고 웃었다. 이항복은 익살스러운 말로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풍전등화와 같은 전란 속에서 번뜩이는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일화도 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와 평양성을 탈환한 후 연회가 열렸다. 이항복은 병조판서, 이덕형은 접반사로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 도중 이여송은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라는 것을 알고 몹시 놀라며 물었다.

“조선은 어찌 사대부에서 동성 혼인을 했습니까? 이는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 아니오?”

은연중에 조선을 깔보는 기색을 내비친 것이다. 연회에 참석한 조선 대신들은 조선은 본이 다르면 동성도 혼인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그때 이항복이 재치 있게 말했다.

 

“이덕형은 본래 성이 계(季)씨로 계덕형이 이산해의 사위가 된 것이오. 헌데 계덕형이 조정에 머물며 공로가 많아 우리 임금께서 특별히 어성(御姓)을 하사하시어 그때부터 이씨 성이 된 것이라오.”

 

이여송은 고개를 끄덕였고 여러 대신들은 이항복의 번뜩이는 기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계덕형이 된 이덕형은 이항복을 짐짓 흘겨봤으나 곧 이항복의 재치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항복은 율곡 이이의 문하로 서인에 속하였고, 이덕형은 남인에 속하였으나 서로 당색에 연연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항복은 도승지, 이덕형은 대사헌이었는데 함께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고비마다 힘을 합해 국난을 헤쳐나갔다. 또한 군사의 일을 관장하는 병조판서를 서로 번갈아 맡았고, 전란이 끝날 즈음에는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직을 번갈아 맡았다.

이항복은 한평생 해학과 웃음 속에 살아가면서, 조선 왕조 최대의 위기 상황이던 임진왜란에 슬기롭게 대응하고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이었다.

충의와 절개의 상징, 청음 김상헌


충의와 절개의 상징, 청음 김상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1570년(선조 3) 서울 출생으로 돈령부 도정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의 양자가 되었다. 21세인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입격하고 27세인 1596년에는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부수찬, 좌랑, 부교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한 뒤, 교리, 응요,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이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김상헌은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등에는 반대하면서도 인조반정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 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김상헌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엄격했다. 우스갯소리를 잘하던 그의 아버지조차 친구들과 놀다가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는 기척을 느끼면 손을 저어 그치고 “우리 집 어사또 오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였다. 『효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했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50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했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김상헌의 자)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라고 하였다.’

김상헌이 대사헌의 직책에 있을 때의 일이다. 장약관(掌藥官) 박시량이 진흙이 신발에 묻을까봐 조회 때 큰 덧신을 신는 범법 행위를 했고, 부유한 역관 장현이 집을 지으면서 국법에서 금하고 있는 부연(附椽: 처마 서까래 끝에 덧얹는 짧은 서깨래)을 달았다. 김상헌이 죄를 물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박시량의 처가 남편의 선생인 고관 오윤겸에게 구명 운동을 하러 찾아가지만 허사였다. 오윤겸이 거절한 것이다.

“내 아들이 범법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시량의 일을 부탁할 수 있겠는가.”

김상헌과 오윤겸은 절친한 사이였지만 공사 구별이 상호 추상 같았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처벌받았다.

광해군 대에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취해 중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과의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국면은 크게 바뀌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대북 정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반후금(親明反後金) 정책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후금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후금과 조선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명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후방 공격을 우려하고 있던 후금은 1627년(인조 5) 1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평양에 도착한 후금군은 화의를 청해 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갔고 후금의 사신이 다시 와서 화의를 청하니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강화에 응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정세는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다하라고 통보해 왔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다시 사신을 죽여 조선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척화파와 힘이 부족하니 화의를 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가 우유부단하게 왔다갔다하는 사이 청이 요구한 최후의 시한을 넘겼고 급기야 병자호란이 터지고야 말았다.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고,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50여 일째인 1637년 정월 23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진다. 의병의 원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강화도로 피난한 세자와 세자빈 강씨, 두 왕자와 역대 왕의 옥새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성내에 전해진 것이다. 주화론이 척화론을 압도하고, 인조의 지지를 얻은 주화론자들은 청나라와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명길이 항복의 국서를 작성했는데 김상헌이 그 국서를 찢어버리고 통곡하였다.

“신이 국서를 찢은 죄, 죽어 마땅하나 오늘의 의론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소신을 먼저 죽여서 인심을 하나로 하십시오.”

인조는 김상헌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면서 말했다.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하니 주변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소현세자 또한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결국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젊은 언관들이 속죄양이 되어 청나라에 잡혀가 척화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지만, 실제 척화론을 주도한 핵심 인물인 김상헌은 주화론의 핵심 인물인 최명길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 이들의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후 김상헌은 안동으로 내려가 학가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목석헌이라는 초옥을 엮어 은거했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해 오자 김상헌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싸우다가 안 되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의를 지켜야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김상헌은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예순아홉 노구의 몸으로 끌려간 김상헌을 청나라 사신 용골대가 심문했다.

“정축년의 난에 국왕이 성을 나왔는데도 유독 청국을 섬길 수가 없다 했고,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용골대의 물음에 김상헌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병으로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주사(舟師:수군)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했는가?”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나의 임금에게 고했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

용골대를 비롯한 청인들이 감탄했다.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후 이듬해 세자와 봉림대군들과 함께 돌아올 때 청의 장수 용골대는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을 끌어당기면서 함께 절하자고 했으나 김상헌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절을 하지 않았다. 최명길만 4배를 하니 용골대는 김상헌을 노려보다 물러갔다.

때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데도 의리만을 내세우며 척화를 주장한 척화파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청나라는 김상헌은 물론, 척화론자로 청에 잡혀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의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고

“조선을 정복할 수는어도 통치할 수는 없다.”

고 감탄했다고 한다. 왕이 항복을 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화파의 적절한 대응력에 더해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의 꼿꼿한 선비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