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현(閔冑顯)-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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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08(순조 8)∼1882(고종 19).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학자로써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교(穉敎), 호는 사애(沙厓)이다.

작년에 이어 여기서는 민주현의 사승 및 교우관계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사승과 교유관계는 문집의 연보를 기준으로 기술한 것이다.

민주현은 30세에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잠시 수학하였으나 그 이듬해 봄에 돌아가시게 되자, 가서 영좌에 곡하고 돌아왔다. 송치규는 송시열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黙)의 문인이다. 학문은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빈궁실천(貧窮實踐)을 목표로 삼아, 평생 이이․김장생․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데 전념하였다.

민주현은 33세에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 1783~?)를 찾아가 배우게 된다. 장헌주는 송치규(宋穉圭)에게서 수학하였다. 37세에 증광별시에 응시하여 급제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고, 조정의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와 교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향촌사회에 올바른 예법이 보급될 수 있도록 앞장섰다. 특히 신암(申巖)과 더불어 12동지회를 결성하고, 상가(喪家)에 만연된 허례허식과 방비의 폐습을 고치기 위해 향음례(鄕飮禮)를 제정, 검소하고 실용적인 상례․장례․제례를 보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권장하였다. 이때 저술된 「초학지남(初學指南)」1권은 학동들의 교육지침서가 되었다.

민주현은 39세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도 배웠다. 기정진은 유학에 전심하여 34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강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성균관에 머물며 학업에만 몰두하였다. 그에게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그가 살았던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수학하였다. 그의 사상은 손자인 김우만(金宇萬)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으며, 46세에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저술하였고 이후 송대의 철학자 주돈이․장재․정이․주희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였다.

민주현은 예전부터 기정진을 크게 우러르고 있었는데, 기정진을 뵙고 글을 강론함에 있어 민주현의 식견이 남다름을 알고 기정진이 존경하고 우러러보게 되어 도의로써 교우를 허여하였다. 평소에 기정진은 많은 사람들과 교우관계를 갖지 않았는데, 특별히 민주현을 허여하고 절실한 우정을 나타낸 뜻으로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민주현은 40세 때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 배움을 청하였는데, 홍직필은 1801년 사마시에 실패한 뒤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814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장흥고봉사․지평․부사직․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학문연구에 주력한 인물이다. 민주현이 41세에 홍직필을 찾아가서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내용인즉

“사람의 도리를 말할 때는 성인에게 배운 것으로써 뜻을 두니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자기의 뜻을 정하여 성인이 세운바가 어떤 뜻인지 알기를 구해야 한다. 학자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를 알아서 뜻과 기운을 발하여 글쓰기에 힘쓰고 이치를 연마하며 자신을 단속하고 지키며 늘 행동에 힘써야 한다. 이렇듯 늘 내 마음을 밝히고 내 몸에 있도록 해야 한다. ‘도’라는 것은 날마다 행하는데 있으니 어떤 일을 하게 될 때는 각각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본분에 의해 선인(善人)이 되는 길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려 하는데 한 순간이라도 중지하게 된다면 사람의 도가 그치게 된다.”

2개월 동안 홍직필 선생에게 수학하면서 강의하고 질의한 말들을 모아 「북학록」이라 하였다. 이것은 맹자의 ‘올바른 선생을 찾아가서 배운다’는 뜻으로 북학이라 한 것인지 아니면 홍직필이 있던 경기도를 북쪽으로 보고 홍직필에게 배웠다는 의미로 북학이라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홍직필의 아들 오곡(鰲谷) 홍일순(洪一純, 1804~1856)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홍직필에게 인사하고 돌아올 때에 홍직필이 민주현에게 시를 지어 주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영달을 구하여도 큰 학자는 영달을 쫓지 않는 법이니 참다운 즐거움은 공부에 매진하는데 있다’는 뜻이 그 안에 담겨있다.

 

斯文天欲喪(사문천욕상)
우리 유학을 하늘을 망치려는지

正路八荊榛(정로팔형진)
올바른 길에 가시나무 그득하네

逐逐求榮達(축축구영달)
모든 사람들 영달을 구하고

廖廖學聖人(료료학성인)
성인을 배우려는 길 적막하기만 하네

苟傳心法正(구전심법정)
진실로 올바른 신법 전한다면

何患姓名湮(하환성명인)
어찌 성명이 묻히는 것 걱정하랴

 

민주현은 65세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1811~1876)에게 수학하게 된다. 임헌회는 1858년에 효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으며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임헌회는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로 민주현과는 동문으로 친한 친구였다. 민주현이 아들 부(埠)를 선생에게 맡기면서 부모로써 자식을 걱정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아래의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자식이 몽매하여 가르침 받는 일을 감당치 못할 바인데 큰 도량을 입어 문하에 머물게 되니 그 고마움을 차마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의 자질은 본래 심하게 노둔한 것은 아닌데 소생이 객지에서 벼슬살이 하느라 이른 나이에 자식의 학문을 놓쳐버렸고 자식 놈의 지력 또한 강하지 못하여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려는 의지가 없으니 선생님께 수고로움을 끼칠 생각을 하니 부끄러움에 땀이 나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만약 때에 맞는 비와 같은 교화를 입어 하수를 마시고 양을 채울 수 있다면 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우러러 바랄 뿐입니다.”

이외에 교우관계를 살펴보면, 홍직필 문하에서 교유하던 소휘면(蘇輝冕, 1814~1889)은 홍직필을 사사하였고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었으며 전라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 인물로 민주현과는 이기론을 논할 만큼 학문적으로 막역하였다. 이 밖에 박이휴, 고제성, 민형재, 안사응, 송기수 등도 민주현과 교분이 두터웠던 인물들이다.

[참고문헌]: 「역주 沙厓集 書札類」(이진영,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애집(沙厓集)」

김명희(金命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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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dorpcap}17[/su_dropcap]1788(정조 12)~1857(철종 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도인(山泉道人) 또는 산천(山泉)이다. 김노경(金魯敬)의 아들이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동생이다. 송계간(宋啓榦)의 문인이다.

작년에 이어 여기서는 치원(巵園 황상(黃裳, 1788~1863)의 시에 대한 김명희의 해석을 소개한다. 황산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가르친 읍중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정약용의 유배기는 읍내시절과 초당시절로 구분되는데, 시기에 따라 모여든 제자들의 성격도 달랐다. 읍중 제자들은 아전가 출신이었으며, 초당 제자들은 해남윤씨를 주축으로 하는 양반가 출신이었다. 황상은 15세에 장약용 문하에 들어가 매우 성실하게 수학하였고, 정약용으로부터 남다른 촉망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약용의 시학을 계승한 황산에 대한 김명희의 평가를 소개한다.

황상의 시가 사가(四家)와 흡사하다는 세인의 평가에 대하여 김명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가’는 두보(杜甫)․한유(韓愈)․소식(蘇軾)․육유(陸游)를 말한다.

 

“황상이 50년 동안 오로지 네 사람에게 마음을 쏟았다는 점에서 멀리서 구해보면 두보와 같고, 한유와 같고, 소동파와 육유와 같고, 가까이에서 구하면 다산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 지은 것이 없으니 황상의 시가 될 뿐이다.”

 

김명희는 황상이 50년간 두보․한유․소식․육유를 진심으로 따랐다는 점에서 일단 그의 시가 ‘사가’와 흡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생인 추사 김정희도

 

“심지어 사람들이 칭송하는 두보와도 같고 한유와도 같으며 소식과 육유와도 같다는 것을 장황히 늘어놓아 찬양하였다”

 

고 말하여, 김명희가 세인들의 평에 전적으로 동의한 듯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명희는 세인의 평에 만족하지 않고 황상의 시가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두보도 아니고, 한유도 아니고, 소식과 육유도 아니고, 아울러 다산의 시도 아니다’라고 하여 ‘사가’나 다산의 시와 같다는 세인의 평을 부정하는 결과로 나아간다. 김명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50년간 네 사람에 전심하여 이 네 사람에게서 침식을 하였으니 이른바 ‘다른 것을 보지 않으면 자연히 그곳으로 옮겨간다’라는 것이다. 감정과 뜻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시간적․공간적 환경이 외부에서 닥쳐오면, 네 사람에게서 능히 심신(心神)으로 깨달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체가 있는 말이 앞으로 달려 나오고 뿜어져 나와 능히 작품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두보의 시도 아니요, 한유의 시도 아니요, 소식과 육유의 시도 아니요, 아울러 다산의 시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네 사람을 잘 배운 것이며 또한 다산을 잘 배운 것이 아니겠는가?”

 

황상이 50년간 네 사람을 따른 것에 때해 김명희는 ‘다른 것을 보지 않으면 자연히 그곳으로 옮겨간다’는 관자(管子)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관자는 사농공상이 섞이지 않고 따로 모여 살게 하면,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되어 각각 전공하는 바가 자연스럽게 전수된다고 주장하였다. 김명희는 황상이 어려서부터 네 사람의 시만을 익혀 그 속에서 인격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시재(詩才)도 체득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서 시를 짓게 되면 심신(心神)으로 네 사람과 소통하는 가운데, 자신의 감정과 의식, 그리고 자신이 처한 현실들이 자신도 모르게 시로 분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명희는 시인의 진실성이란 원칙론에 입각해서 황상 시의 독자성을 설명한다.

“대저 사람이란 각자 감정이 있고, 또 각자 뜻이 있으며, 만나는 때와 처하는 경우가 또 각각 같지 않다. 그러나 뒷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앞사람과 다 똑 같지 않는 것은 그 말에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김명희는 말(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시인마다의 정이 있고, 또 각기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후대 시인의 시는 앞 시대 시인의 시와 당연히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어느 시인이 어느 시인과 같다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 된다. 그 이유에 대하여 김명희는 「주역」의 ‘말에는 실체가 있다(言有物)’는 말을 근거로 든다. ‘언유물’이란 언어가 어떤 실체나 실상에 근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성이 있으면 실체가 있고, 정성이 없으면 실체가 없다
(誠則有物, 不誠則無物)’

는 말을 참조한다면, 시인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 자신이 처한 시대와 현장에 진실로 충실하다면 그의 시는 실체가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 되며, 따라서 어느 누구의 시와도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명희가 시인의 진실성이라는 원칙론에 입각하여 황상 시의 독자성을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란 반드시 자기에게 절실하고 시대에 절실하고 사실에 절실하여서 하나하나가 다 실지의 것을 갖춘 뒤에야 점차로 화공(化工)에 가까워질 수 있다.”

 

즉 자기 자신과 시대와 사실에 절실해야만 자연의 조화와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명희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 자신이 처한 시대와 현장에 충실해야 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이처럼 김명희가 시인의 진실성을 강조한 점은 황상이 다산의 ‘시사(詩史)’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다산과 황상은 동일한 시기, 강진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혹 동일한 사건을 다루기도 하였지만 황상이 자신의 처지와 정서에 진실했다면 황상의 시는 다산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명희는 ‘황상의 시가 다산가문의 규범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김명희는 황상을 사법 대상으로부터 독자성을 획득한 개성적 시인이자, 자신의 감정과 의식 그리고 자신치 처한 시대와 현실에 충실한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다산 시학의 계승자 黃裳에 대한 평가와 그 의미-추사 김정희와 산천 김명희의 巵園遺稿序 분석-」(이철희, 「대동문화연구」제53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