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영(鄭胤永)


정윤영(鄭胤永)                                                           PDF Download

 

181833(순조 33)∼1898.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이다.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아버지는 현풍(鉉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시면(時冕)의 딸이다. 큰아버지 정현택(鄭鉉澤)에게 입양되었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정윤영은 화성시 동탄면 금곡리 출생으로 39세되던 1871년 안성으로 이주한 후 죽을 때까지 안성에서 활약한 당대를 대표하는 화서학파 유학자다. 화서학파는 화서 이항로를 따랐고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운동을 주도했다. 정윤영은 1889년 수십명의 관동(冠童, 남자 어른과 남자아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들과 청룡사에 모여 강회를 열었고, 이때 필요한 절차를 모아 서운강안(瑞雲講案, 1889년)이라는 책도 남겼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시점이 1889년으로 조선후기이고 그 장소가 청룡사라는 것이다. 고종의 조상의 묘가 있는 마을에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당대의 학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하는가 하면 수 십명의 남자들이 모여 강학회를 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말기 안성의 유림동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임과 동시에 당시의 청룡리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청룡리는 기울어가는 왕조의 왕실 후손들이 모여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울어가는 나라와 왕조를 지키겠다는 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시를 읊던 마을인 셈이다.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李恒老) 학파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과도 교유하면서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을 주기론의 입장에서 피력하였다.

1881년(고종 18) 유생들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에 경기도에서는 유기영(柳冀榮)과 신섭(申㰔)이 소수(疏首, 여러 명이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로 활동하였는데, 정윤영은 「척사만인소(斥邪萬人疏)」를 작성하여 경기유생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이원현(利原縣)에 정배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1893년의 금부도사,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학행으로 특지(特旨)에 의하여 사간원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처의(處義)에 있어 신하들은 마땅히 나가서 죽어야 하고 선비들은 자정(自靖)해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다. 단발령이 내리자 「자정명(自靖銘)」을 지어 맹세하였다. 저서로는 「후산문집(后山文集)」·「위방집략(爲邦輯略)」·「화동연표(華東年表)」 등이 있다.

후산문집」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정윤영의 시문집이다. 16권 8책으로 필사본이다. 1899년 아들 정수용(鄭秀容)에 의해 필사되었다. 서울의 정재길(鄭載吉)이 소장하고 있으며, 1994년 보고사(寶庫社)에서 상하 2책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권1∼3에는 부(賦) 5편, 사(詞) 3편, 시 343수, 권4에는 소(疏) 3편, 권5에는 서(書) 35편, 권6·7은 서(序) 18편, 기(記) 15편, 제발(題跋) 14편, 잠(箴) 5편, 명(銘) 17편, 찬(贊) 7편, 권8∼권12에는 혼서(昏書) 6편, 상량문 1편, 축문 6편, 제문 12편, 애사(哀辭) 6편, 잡저 22편, 수록(隨錄) 67조, 권13에는 세가(世家) 2편, 전(傳) 7편, 권14에는 묘표·묘갈 각 1편, 묘지 6편, 행장 2편, 권15~16은 부록으로 연보·가장·묘지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 중에는 「척사만인소」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전자는 1881년 경기의 소수인 유기영(柳冀榮)을 위해 지은 것이고, 후자는 두 번째 소수인 신섭(申㰔)을 위해 지은 것으로,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서 가운데 전우(田愚)·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유중교(柳重敎)·신기선(申箕善)·홍재구(洪在龜) 등에게 보낸 편지들은 당시 임헌회학파와 이항로학파 간에 전개된 학설상에서의 명덕(明德)의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논쟁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명덕’을 주리로 볼 것인지 주기로 볼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이 19세기의 심설논쟁이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을 리와 기가 결합된 구조로 해석한다. 마음에는 리에 해당하는 성이 근거하고 있지만, 그 성은 기의 작용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나서 정이 되니, 이러한 의미에서 리와 기 모두를 심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리와 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마음을 리의 측면에서도 볼 수 있고 기의 측면에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의 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는 일군과 마음의 기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심즉리(心卽氣)’를 주장하는 일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심설논쟁’이다. 또한 주희는 마음과 명덕을 모두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응하는것(具衆理 應萬事)’이라고 동일하게 해석함에 따라 ‘명덕논쟁’으로도 불린다. 명덕논쟁은 마음의 본체에 해당하는 명덕을 리로 규정할 것인지 기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이러한 명덕논쟁에서 정윤영은 주기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대소유여영남소수이만손(代疏儒與嶺南疏首李晩孫)」과 「대소유여호서소수한홍렬(代疏儒與湖西疏首韓洪烈)」은 ‘신사척사론’ 때 경기 유생을 대표해 쓴 편지이다. 당시 유생들의 상호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잡저 가운데 「사평(史評)」에서는 저자의 역사관을 살필 수 있다. 「의만언봉사(擬萬言封事)」 상하 2편은 22조에 걸쳐 시무개혁론을 제시한 것으로, 정윤영의 현실 인식을 극명하게 표출한 작품이다. 「기자세가(箕子世家)」는 저자의 유교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창의대장유인석전(倡義大將柳麟錫傳)」은 을미의병과 유인석의 당시 활동을 전한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후산문집(后山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국(救國)의 마지막 제언-후산 정윤영의 학문과 실천」(오영섭, 김자운 공저, 화성문화원, 2010)

조병덕(趙秉悳)


조병덕(趙秉悳)                                                             PDF Download

 

181800(정조 24)∼1870(고종 7).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문(孺文), 호는 숙재(肅齋). 동지중추부사 최순(最淳)의 아들이다. 일찍이 홍직필(洪直弼)과 오희상(吳熙常)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다. 1852년(철종 3) 음보(蔭補)로 지평이 되고, 1859년 경연관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동문의 임헌회(任憲晦) 등과 병칭되던 한말의 거유였으며, 성리학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홍직필에게서 이어받아 문하의 김병창(金炳昌) 등에게 전수한 중심인물이었다. 저서로 「숙재집(肅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숙재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조병덕의 시문집이다. 26권 13책으로 고활자본이다. 서문·발문이 없어 간기(刊記)는 자세하지 않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 시 184수, 소 10편, 서계(書啓) 6편, 의(議) 2편, 권3∼18에 서(書) 596편, 권19·20에 잡저 13편, 서(序) 10편, 기 8편, 발 12편, 권21∼23에 고축문(告祝文) 11편, 제문 22편, 신도비명 1편, 비(碑) 3편, 묘갈명 6편, 묘표 1편, 광지(壙誌) 1편, 권24∼26에 묘지명 6편, 시장(諡狀) 2편, 전(傳)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는 모두 재야 학자로서 국왕의 부름을 사양하는 글로, 당시 국왕이 선비를 중하게 여긴 일과 선비가 겸양의 덕을 나타내고자 함을 알 수 있는 글이다. 「경연계강책자품정의(經筵繼講冊子稟定議)」는 경연에서 강론할 책을 품정(稟定: 왕에게 여쭈어 의논하여 결정함)하는 의론으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가 제왕이 행해야 하는 학문을 구비하고 있으므로 경연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 글이다.

서(書)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반수가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저자의 경륜과 학문의 총정리라 할 수 있다. 「상매산선생(上梅山先生)」은 매산 홍직필과 29차에 걸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동(動)과 정(靜)의 구분과 양자의 관계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논변하고 있다. 또한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에서 호연한 기운이 줄어드는 데 대한 원인과 경위, 「시경」의 「주남편」에 투영된 인정(仁政)의 효과와 백성들이 스스로 주나라의 덕화를 따르게 된 의미에 대해 자세히 묻고, 처첩의 관계, 적서의 분류 등 광범위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답이경학면재(答李景學勉在)」는 이면재(李勉在)와 7차에 걸쳐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성리학에 대한 질문에 답한 것으로, 이이·송시열·김창협의 설과 고전을 인용해 이기이원론의 원리를 설명하고, 자기의 뜻은 김창협의 이론을 지지하며 여타의 설은 따르지 않는다고 변명하였다. 이것은 당시 성리학으로 빚어진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시비와 성리 논쟁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자료가 된다.

잡저 가운데 「변임명로생지위성설(辨任明老生之謂性說)」은 임헌회(任憲晦)가 ‘생(生)이 곧 성(性)’이라는 말을 추가 보충한 것으로, 생이란 성의 본연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정호의 설이요 또 하나는 김창협의 설로, 비록 둘이 다른 것 같지만 실은 일맥상통하여 끝에 가서는 부합된다고 설명하며 임명로의 성리설을 두둔한 글이다.

 

[참고문헌]: 「전고문헌(典考文獻)」, 「철종실록(哲宗實錄)」,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종우(李鍾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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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문신·서화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여(大汝), 호는 석농(石農). 조원(肇遠)의 아들이다. 1851년(철종 2)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853년 부사과·예방승지, 1856년 강원도관찰사, 1859년 우참찬·이조판서를 지냈다. 1860년 판의금부사, 이어 병조판서, 1862년 함경도관찰사로 있다가 함흥민란으로 파면되었다.

시문과 서화에 뛰어났고, 글씨는 독특한 필체를 이루어 세칭 석농체라 한다. 그의 행서나 초서는 신위(申緯)와 김정희(金正喜)의 필법이 어우러진 글씨로 필력이 있으며 짜임새도 뛰어나다. 그림은 산수화를 잘하였다. 강원도 삼척의 「산양서원묘정비(山陽書院廟庭碑)」를 썼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신고한국서예사(新稿韓國書藝史)」(김기승, 정음사, 197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신환(兪莘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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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01(순조 1)∼1859(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경형(景衡), 호는 봉서(鳳棲). 1801년 9월 28일에 서울에서 아버지는 현감 유성주(兪星柱)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덕보(德普)의 딸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대사헌을 지낸 유언술(兪彦述)이고,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한순(兪漢純)이다.

아버지 유성주는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독실한 군자풍의 인물이었다. 유신환이 정리한 「선고복원재연보후기(先考復元齋年譜後記)」를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몸가짐과 효행이 남달랐고 글에 있어서도 명말(明末) 이후의 문자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당시 점차 밀려오던 서양문물에 대하여 매우 배척적인 태도를 지닌 전통적인 명분론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젊어 파주의 봉서산(鳳棲山) 아래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이를 높여 ‘봉서’선생이라 일컬었다.

유신환이 태어날 때 어머니 유부인은 황룡이 등운(騰雲)하는 꿈을 꾸었는데, 타고난 자질이 단정하고 중후하여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어른과 같았다. 다섯 살 때부터 숙부인 유무환(兪茂煥)에게 나아가 배우니 성취가 빨랐고, 글 읽는 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이 울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효경⌋과 ⌈소학⌋을 통한 뒤로는 한 글자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의문이나 어려운 곳이 있으면 작은 책자에다 써서 깨우칠 때까지는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어린 시절부터의 독학의 자세를 이에서 볼 수 있다.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오희상(吳熙常)을 스승으로 섬겼다. 1844년(헌종 10)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선공감감역이 되고 감찰·사직서령·영희전령(永禧殿令)을 역임하였다. 전의현감으로 부임해서는 황구(黃口)·백골(白骨) 등의 가렴주구의 민폐를 없애고 유학의 학풍을 일으키는 데 힘썼으나, 감찰사의 모함으로 홍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윤병정(尹秉鼎)·서응순(徐應淳)·김낙현(金洛鉉)·윤치조(尹致祖)·김윤식(金允植)·남정철(南廷哲) 등의 학자를 길러냈다.

그는 이기신화론(理氣神化論)을 주장한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학의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뿐만 아니라 율력·산수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학문에 정통했으며 정치·경제·군사 등의 분야에도 박학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이기신회론’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리는 하나이고 기는 둘이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은 신(神)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은 화(化)이다.”

 

그는 현상세계의 근원적 원리인 리는 하나이고 현상에서 작위하는 기(음양)는 둘임을 전제하고, 구체적인 현상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음양이 리라는 하나를 드러내는 것은 ‘신’이고 리가 음양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화’리고 규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율곡이 이기관계를 설명하면서 강조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것을 ‘신화’의 개념으로 해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이기관계를 동태적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리와 기를 단순히 근원적 실체와 현상 세계의 변화 주체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근원적 실체가 현현하는 것에 주목하여 이기관계를 구체화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리를 말하고 神을 말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神을 말하고 리를 말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다”

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근원적 실체로서의 리에만 주목하고 현상세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며, 현상세계의 변화에만 주목하여 근원적 원리로서의 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리는 근원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현상세계에 편재하며 변화 속에 드러나는 것인 셈이다.

당시 유림에서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논쟁이 격화되었다. 호서의 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인 인물성부동론(人物性不同論)을 천명하기 위해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묘정에다 송시열(宋時烈)의 말인 ‘밀개성신(蜜豈性信)’이라는 문장으로 비를 세우려 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이 문구가 반드시 ‘인물성부동론’의 논증이 될 수 없으며, 이 논쟁의 귀추가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님을 들어 비석의 건립을 반대해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유신환이 강학할 때에 학자들과 강론하며 토론했던 문회당(文會堂)을 소개한다. 문회당이란 이름은 「논어연」 「안연」편의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의 문구에서 두 글자를 딴 것이다. 실제 이곳에 명문의 자제들이 모여 학문을 담론하였다. 그는 38세 이후 세상을 뜰 때까지 20여년 가운데 벼슬에 몸담았던 몇 해를 빼고는 줄곧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논하였으니 날마다 문밖에 신이 늘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드나들던 인사들은 대개 당대의 덕업과 문학으로 세상에 일컬어진 인물들로, 윤병정(尹秉鼎)․윤병익(尹秉益)․서응순(徐應淳)․박홍수(朴洪壽)․이응진(李應辰)․김락현(金洛鉉)․민영목(閔泳穆)․윤치조(尹致祖)․윤치담(尹致聃)․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김만식(金晩植)․김윤식(金允植)․한장석(韓章錫)․남정철(南廷哲) 등이 그 두드러진 인물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박홍수․서응순․윤병익․윤치담 등이 더욱 두각을 드러내 ‘유문사현(兪門四賢)’의 이름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관료층의 문인학자들로 대부분 유신환의 ‘문회당’에서의 강론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문인의 예를 갖추었다. 저서로는 「봉서집」·「패동수언(浿東粹言)」·「동유연원(東儒淵源)」 등이 있다.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봉서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유신환의 시문집이다. 8권 4책으로 석인본이다. 1909년 문인 서응순(徐應淳)이 교정하고 김윤식(金允植)이 편집한 것을 아들 유치병(兪致秉)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학진(金鶴鎭)의 서문과 권말에 김윤식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서(書) 50편, 권3·4에는 서(序) 12편, 기 5편, 발 2편, 제(題) 7편, 인(引) 1편, 명 4편, 잠 1편, 제문 5편, 애사 2편, 잡저 9편, 권5·6에는 잡저 29편과 독서기(讀書記), 권7·8은 독서기·묘지·묘갈·행장·연보후기·사행기(事行記)·전서(傳書)·시, 부록으로 행장·묘지명·시장(諡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서(書)는 주로 경전의 훈고(訓詁)와 학문에 관한 논답(論答) 및 성리학에 관한 논변이 대부분이다. 잡저 중 「대학호오의리설(大學好惡義利說)」·「중용귀신대(中庸鬼神對)」·「천인찬(天人囋)」·「설시소서(說詩小序)」·「홍범연(洪範演)」등의 글은 모두 「대학」·「중용」·「시경」·「서경」 등의 경서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경세학(經世學)에 있어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졌다. 「책문(策問)」 두 편은 전정(田政)과 관방(關防)에 관한 이론이다. 「시무편(時務篇)」에서는 개혁하여야 할 급선무가 군정징색(軍丁徵索)과 서얼금고(庶孽禁固)의 폐단이라 하여 상당히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참고문헌]: 「봉서집(鳳棲集)」,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한국철학사」(유명종, 일신사, 198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서 유신환의 철학사상 연구」(「민족문화연구」제54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1),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권오영, 돌베개,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승택(沈承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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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1(순조 1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의진(宜晋)의 아들로 사직서제조 심상한(沈相漢)의 양부이며 김협순(金協淳)의 외손자이다.

1829년(순조 29)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래 관직에 올랐다. 29세 1840년(헌종 6) 7월 16일 평안북도 암행어사로 지방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신석붕(申錫朋) 등의 지방관을 처벌하게 하였다. 1867년(고종 4) 도승지에 올랐으며, 1869년에는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870년에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어 장안의 시정을 관장하였으며, 1874년에는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어 관리들의 형정(刑政)을 관장하였다. 1876년에는 사은 겸 동지정사로 임명되어 부사 이용학(李容學), 서장관 윤승구(尹升求)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7년 11월에는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880년까지 재임하였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1·2(국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규택(沈奎澤)


심규택(沈奎澤)                                                             PDF Download

 

181812(순조 12)∼1871(고종 8).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치문(穉文), 호는 서호(西湖). 아버지는 의생(宜生)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재선(在選)의 딸이다. 오희상(吳熙常)·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학에 힘써 「태극명의설(太極名義說)」·「중용기의(中庸記疑)」·「대학서문분절(大學序文分節)」·「대학경전기의(大學經傳記疑)」·「대학혹문경일장분절(大學或問經一章分節)」·「태극도군서구해기의(太極圖群書句解記疑)」·「근사록기의(近思錄記疑)」 등을 저술하고, 남이목(南履穆)·유신환(兪莘煥)·심의덕(沈宜德)·강진(姜溍)·조병덕(趙秉悳) 등과 서신을 통하여 학문을 논의하였다. 성리학은 율곡 이이의 설을 따랐고, 학문의 방법은 퇴계 이황을 본받으며, 위정척사는 송시열(宋時烈)을 따르려 하였다. 저서로는 「서호문집」이 있다.

심규택은 해동악부(海東樂府)의 저자인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의 9대손이며 선산 사람이다. 선산은 경치가 좋은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비봉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오산(金烏山)이 그림처럼 서 있는데 끝이 뾰족하여 붓끝 같았으므로 선산사람들은 예로부터 이를 필봉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 때의 인재 반은 영남사람이고 영남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할 만큼 선산에는 문학하는 선비가 많아 급제자와 명현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 중에서도 유명한 명필인 초성(草聖) 황기로(黃耆老, 德山 사람)는 명종 임금으로부터

‘천하의 초성이 왕희지 뒤의 일인이다
(天下之草聖 羲之後一人)’

이라 칭찬받기도 하였다.

선산에서는 선현들이 모여 시를 많이 지은 곳이기도 하였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海平 사람), 백암(白巖) 김제(金濟, 一善 사람),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一善 사람),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碧珍 사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一善 사람), 신당(新堂) 정붕(鄭鵬, 海州 사람), 송당(松堂) 박영(朴英, 密陽 사람),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晋陽 사람), 옥산(玉山) 이우(李瑀, 德水 사람), 주촌(注村) 김효정(金孝貞, 一善 사람), 진악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 善山 사람), 죽월헌(竹月軒) 노계정(盧啓禎, 慶州 사람), 서호(西湖) 심규택(沈奎澤, 靑松 사람), 춘하(春下) 심연택(沈淵澤, 靑松 사람), 소봉(小鳳) 심정섭(沈廷燮, 靑松 사람), 수당(睡堂) 강걸(康傑, 信川 사람) 등 많은 선현들이 이곳 선산에서 많은 시를 지었다. 여기에서 심규택이 지은 선산에 있는 오산(烏山, 지금의 금오산)과 관련된 시를 소개한다.

 

<登烏山: 금오산에 올라>

螺鬟一抹入雲寄  (라환일말입운기)
쪽머리 봉우리에 구름이 걸려

怱憶天公造化時  (총억천공조화시)
자연의 조화가 아름답구나

長江綠水鐵鐵帶  (장강녹수철철대)
장강의 푸른물은 철철 흐르고

大野群山點點碁  (대야군산점점기)
군산(群山)의 너른 들은 바둑판 같네

剩喜遊心千里遠  (잉희유심천리원)
저 멀리 구경하니 아주 즐거워

却憐多病一登遲  (각연다병일등지)
늦게 사 올라 온 것 후회스럽네

滿目無煙無限處  (만목무연무한처)
청명함에 절경이 끝없이 펼쳐지니

何人到此不留詩(하인도차불류시)
누구인들 여기 와서 시(詩)가 없겠나

 


<烏山雜詠: 오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天半烏岑恁麽靑  (천반오잠임마청)
이 맑은 날 우뚝 솟은 오산(烏山)에 올라

後人爲起古人亭  (후인위기고인정)
옛사람이 남겨둔 정자에 앉았으니

千古不滅西山節  (천고불멸서산절)
언제나 불멸(不滅)의 서산(西山)의 절개가

長使忠臣淚滿纓  (장사충신누만영)
긴 세월 충신(忠臣)의 갓끈 적시네

 

서호문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심규택의 시문집이다. 20권 10책으로 석인본이다. 1923년 손자 심기섭(沈起燮)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전우(田愚)의 서문, 권말에 김재경(金在敬)이 쓴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6에는 시 819수, 권7∼14에는 서(書) 201편, 권15∼16에는 서(序) 6편, 기(記) 6편, 제발(題跋) 19편, 잠명(箴銘) 2편, 고문(告文) 4편, 제문 24편, 권17∼19에는 묘표 1편, 행장 1편, 유사 1편, 잡저 11편, 권20은 부록으로 행장·묘갈·제문·만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자연을 노래한 시가 대부분이지만 선현들의 시에 차운한 것도 많다. 서(書)는 이기설(理氣說)에 관한 것이 많으며, 주로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인하고 있다.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게 하는 소이는 리이다
(發之者氣也, 所以發者理也)”

라고 하는 율곡 이이의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설을 따르고 있다.

중용⌋의 허령지각(虛靈知覺)과 지각에 대해서 마음의 체와 용에 대입시켜 설명하고 있다.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 대해서도 율곡의 이론을 따르고 퇴계의 학설이 이원(二元)의 모순을 가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단은 측은․수오․사양․시비의 도덕적 정감을 말하고, 칠정은 기쁨(喜)․분노(怒)․슬픔(哀)․즐거움(樂)․사랑(愛)․미움(惡)․욕망(欲)의 일반적 정감을 말한다. 심규택에 따르면, 사단과 칠정이란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이 아니라 하나의 정인데, 다만 이름이 다를 뿐이다. 정의 전체를 통틀어 말하면 칠정이요, 그 가운데 선한 정만을 가리켜 말하면 사단이다. 다시 말하면, 칠정의 중절한 것이 사단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정이란 칠정 하나가 된다.

그러나 퇴계는 사단의 정과 칠정의 정을 별개의 정으로 구분한다. 사단은 선한 정이요 칠정은 악한 정은 아니지만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퇴계는 선한 사단과 악으로 흐르기 쉬운 칠정을 서로 다른 별개의 정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그래서 선한 사단은 확충이 필요하고, 악으로 흐르기 쉬운 칠정은 단속하거나 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정의 근원인 성이 하나인데 어찌 두 개의 정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에 대한 해석이 이원의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중용기의(中庸記疑)」와 「대학경전기의(大學經傳記疑)」에서는 「중용」과 「대학」을 배우는데 있어 어려운 문제점을 제시하고, 선현들의 학설을 인용하여 설명한 뒤 미진한 것은 자기의 사견을 첨가하여 알기 쉽게 해석하였다. 이밖에도 태극의 명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태극명의설(太極名義說)」과 그때까지 저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던 「명심보감」의 저자를 밝힌 「명심보감발(明心寶鑑跋)」이 있다. 그리고 「대학」의 차례를 세분한 「대학서문분절(大學序文分節)」과 이황의 「사서질의(四書質疑)」에 대해 난해한 곳에 해석을 추가한 「퇴계선생사서질의기의(退溪先生四書質疑記疑)」가 있다.

이 책은 이이의 이기설을 따르는 조선 말기의 철학사 연구에 일차적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서호문집(西湖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명벽(朴命璧)


박명벽(朴命璧)                                                           PDF Download

 

171773(영조 49)∼1827(순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계립(季立), 호는 금호(錦湖)·습재(習齋).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박사섭(朴師燮)이다. 오희상(吳熙常)의 문인이다.

181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816년 의릉참봉에 제수되고 능침(陵寢)을 잘 수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례원인의로 승진하였으며, 뒤이어 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겨우 ⌈소학⌋과 ⌈사기⌋를 배울 때 벌써 선현의 가훈을 써서 벽 위에 붙여놓고 항상 보고 익혔다.

그는 자기의 고향에서 배울 곳이 없으므로 남으로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송환기(宋煥基)의 문하에 들어갔고, 다시 한성에 올라와 박윤원(朴胤源)에게 글을 배웠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를 비롯하여 홍직필(洪直弼) 등과도 깊이 사귀어 학문을 서로 익히고 닦았다. 박명벽의 학풍을 앙모하여 사방에서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주집(老洲集)⌋

홍이우(洪理禹)


홍이우(洪理禹)                                                             PDF Download

 

181815(순조 15)~1880(고종 17)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문표(文杓), 호는 만백(晩柏)이다. 저서로는 「만백문집(晩柏文集)」이 있다.

만백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홍이우의 시문집이다. 8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897년 홍주후(洪疇厚)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준영(金駿榮)의 서문과 권말에 홍건(洪楗)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11수, 권2∼4에는 서(書) 66편, 권5에는 잡저 1편, 권6·7에는 잡록(雜錄) 9편, 서(序) 4편, 기(記) 2편, 제문 5편, 애사 1편, 행장 2편, 권8에는 어록(語錄)과 부록으로 집촉록(執燭錄)·행장·묘갈명·제문·만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끝에 저자의 아우인 홍이호(洪理鎬)의 송서유고(松墅遺稿)가 합본되어 있다.

서(書)는 스승 홍직필(洪直弼)·조병덕(趙秉悳)·임헌회(任憲晦)와 신응조(申應朝)·박원길(朴元吉)·전우(田愚) 등 당시 석학들과 주고받은 서한으로, 경전 및 성리학에 관한 논술이 많다. 잡저의 「만록(漫錄)」은 체계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것인데, 주로 경전의 요지를 인용해 서술하였다. 그는 명덕(明德)의 본체는 사람과 짐승이 같으나 기질의 온전함과 치우침의 차이가 있음을 도표와 아울러 설명하였다.

잡록의 「양반설(兩班說)」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양반의 명칭을 현인을 위주로 하지 않고 지체가 높은 귀인을 위주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풍수설(風水說)」에서는 묘지를 택해 죽은 부모를 안장하는 것은 그 목적이 ‘종족을 보존하고 가정을 마땅하게 하는데(保族宜家)’에 있는데, 풍수설을 전적으로 믿고 무례하게 망동하면 설령 길지(吉地)를 얻는다 해도 도리어 해를 받게 되니 사욕을 이기고 선의에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그밖에 「송서유고」 가운데 잡저의 「변실욕허욕설(辨實欲虛欲說)」·「논천지인물(論天地人物)」 등은 심성철학(心性哲學)을 이해하는데 참고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백문집(晩柏文集)」,「송서유고(松墅遺稿)」

한운성(韓運聖)


한운성(韓運聖)                                                             PDF Download

 

181802(순조 2)∼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문오(文五), 호는 입헌(立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씨를 잘 썼다. 초시(初試)에는 급제하였으나 과거시험에는 실패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버리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침잠하였다. 부모상을 마친 후에 매산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 1799~1870)과 편지왕래로써 심성설(心性說)을 논하였다. 이종상은 경주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장릉참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돈녕부주부·한성부판관·용궁현감·강원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62년에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농민들이 크게 일어났을 때, 그는 세상이 피폐한 것을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철종 13년에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을 전국의 선비들에게 문의했는데, 이때 한운성이 환폐(還弊)·결폐(結弊)·군폐(軍弊)의 시정대책을 올렸을 때는 왕으로부터 책자를 상으로 하사받았다. 그는 서양학문이 국내에 확산되자 이를 사설(邪說)이라고 규정하고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운성의 저서로는 「입헌문집(立軒文集)」이 있다.

입헌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한운성의 시문집이다. 16권 8책으로 활자본이다. 아들 한석찬(韓錫瓚)과 한석관(韓錫瓘) 등이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이응진(李應辰)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성암고서 박물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는 시 354수, 권4∼13에는 서(書) 366편, 권14에는 서(序) 6편, 기(記) 16편, 발(跋) 6편, 권15에는 제문 14편, 애사 1편, 축문 5편, 묘갈문 2편, 묘표 1편, 시장(諡狀) 1편, 권16에는 소(疏) 2편, 잡저 12편, 부록으로 행장·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시체별로 분류되지 않았고, 대체로 저작 연대순으로 배열되었다. 「과삼탄(過三灘)」·「춘야유감(春夜有感)」·「강상만음(江上謾吟)」·「차공암팔영(次孔巖八詠)」·「석지정사28운(石芝精舍二十八韻)」 등이 역작이다. 칠언율시가 대부분이며, 자신의 빈한하고 불우한 신세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는 애써 고심하며 읊은 흔적이 많고, 독특한 풍취가 있다기보다는 무미건조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書)는 이 책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130여 명에게 보낸 편지다. 스승인 홍직필에게 보낸 편지는 스승을 받들어 그 뜻을 지키겠다는 다짐과 학문하는 방법, 예법에 대해 질문, 토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저자는 사서 외에 백가서(百家書)에도 두루 정통하였다. 「중용」과 「대학」에 더욱 공을 들여 늙어서까지 매일 독송하였다고 한다. 특히 예론에 조예가 깊었다.

잡저 가운데 「예설변(禮說辨)」은 당시 논란거리였던,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의 헌종 등에 대한 칭호 문제를 해명한 것이다. 2,500여 자에 이르는 방대한 이 글은 저자의 예학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입헌문집」

최경휴(崔敬休)


최경휴(崔敬休)                                                           PDF Download

 

181814(순조 14)-?. 조선 후기 유학자. 호는 남전(藍田)으로 경주 사람이다. 유학자로 글을 잘하여 낭해(朗海) 이휴(李烋)와 더불어 해남삼학사(海南三學士)로 이름났다. ⌈남전유고(藍田遺稿)⌋ 2권이 전해지고 있다. 유고집은 친구인 낭해 이휴가 편집하고 가선부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최익현(崔益鉉)이 썼다.

유고집의 내용은 용산 38영 등 많은 시편과 서, 행장, 제문, 서, 기, 잡록 등 걸출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친구의 이휴의 시문집으로는 낭해집이 있다. 1893년(고종 30년) 그가 지은 해남현 현이면 향약계안의 서문과 규약이 전해오고 있다.

여기서는 ⌈남전유고⌋에 나오는 시 몇 편을 소개한다.

山下出寒泉  (산하출한천)
산 밑 하천에서 물이 솟는데

源分天一派  (원분천일파)
본래 한 줄기 근원에서 갈라지고

嘶醐謚玉蘭  (시호익옥란)
단 술 같은 물이 옥잔에 넘치는데

去入長江邁  (거입장강매)
흘러가서 장강(長江)에서 만나겠네

 

이 시는 최경휴의 용산38영(龍山38詠) 중 1경인 ‘몽천(蒙泉)’이다. 다음은 천운대(天雲臺) 정자에서 지은 것으로 2경이 된다.

蕩蕩天光回  (탕탕천광회)
크고 넓은 하늘빛이 돈다

悠愈雲影到  (유유운영도)
멀고 먼 구름그늘이 온다

. 雲歸天宿然  (운귀천숙연)
구름은 돌아가고 하늘은 숙연한데

何事臺中老  (하사대중로)
돈대의 중늙은이 무슨 일인가

 

이어서 3경으로는 어연정(漁鳶亭)을 꼽았다.

展翼飛盤旋  (전익비반선)
솔개연은 날개를 펴 둘굴게 돌며 날고

遊鱗從起伏  (유린종기복)
물고기는 일어낫다 엎디었다 하며 논다.

風烟一鑑多  (풍연일감다)
풍연은 한 겨울에 비추어보기에 많다

喚醒人心目  (환성인심목)
도리에 밝은 사람의 마음 눈을 부른다.

 

4경은 정우당(淨友堂)에서 지은 시이다.

退老嘗稱揚(퇴로상칭양)
이퇴계 선생도 일찍이 칭찬한바 있고

廉翁爲說出(廉翁爲說出)
주염계(주돈이) 선생도 설교하러 나옴직 하네

如何百美中(여하백미중)
백미(百美) 중에 무엇이 으뜸이냐 하면

偏淨名於 (편정명어)
정우당(淨友堂)의 편액이 제일이라네

 

5경으로는 화서(花嶼)다. 화서는 바위 곁에 작은 못을 뚫어 영소(暎沼)라 하고, 못 가운데 세 봉우리를 쌓아서 ‘화서’라 하였다.

一辯水中央(일변수중앙)
꽃잎파리 하나가 물 가운데

浮香停翠玉(부향정취옥)
비위구슬이 머문 듯 향기가 떴네

水君彩屋成(수군채옥성)
그대는 집을 지어 꾸미고 모름지기

把酒聽雲曲(파주청운곡)
술병 쥐고 선계의 노래를 들을지고

 

그의 6경도 정우당(淨友堂) 앞 부평초(浮萍草)를 보고 지은 시이다.

援毫賦綠萍(원호부녹평)
붓 잡고 푸른 부평초 노래를 지으랴

策仗臨池水(책장임지수)
지팡이 짚고 못가에 이르니

待我經舟回(대아경주회)
나를 기다리는 작은 배가 도는데

百年同止止(백년동지지)
백년 같이 더디 고야

 

[참고문헌]: 해남의 서당, 해남문화원(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