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상(吳熙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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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63(영조 39)∼1833(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이다. 작년에 이어서 여기서는 「오희상금보(吳熙常琴譜)」 상편의 「여오금사설(與吳琴師說)」과 하편의 「창탄선후변(唱彈先后辨)」의 내용을 중심으로 오희상의 음악관을 소개한다.

먼저 「오희상금보」 상편의 「여오금사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희상은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함을 언급하며, 채옹(蔡邕, 132~192)의 거문고 초미(焦尾)와 혜강(嵇康, 223~262)의 <광릉산(廣陵散)> 그리고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무현금(無絃琴)>을 통해서 신묘한 경지에 오른 유가 성현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어서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도 신묘함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김사명(金士明)이란 인물이 신묘한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다고 아쉬워하던 차에, 지금 ‘오금사’의 거문고 연주를 감상하니 그가 신묘한 경지에 오른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희상은 「수선조(水仙操)」에 기록된 백아의 고사에 근거하여 오금사도 일찍이 부안의 변산 바닷가에 우거한 적이 있다고 하니, 거기에서 거문고의 신묘함을 얻은 것 같다고 추측한 바 있다. 이처럼 오희상은 「여오금사설」에서 시종일관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한 경지에 오르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이어서 오희상은 오금사의 신묘한 연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선생이 옷을 펼치고 갓을 바로 하고서 즐겁게 거문고를 안고 앞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더디고 느리며 소리가 성글고 절주가 드물어서 큰 구슬이 아직 쪼개지지 않은 듯하였다. 장차 중간쯤을 연주할 때는 눈썹이 올라가고 눈꺼풀이 떨리며 어깨가 솟고 손가락이 춤을 추어 터럭 하나 머리카락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용히 움직이는 기운이 있어서 몸과 마음이 모두 깊이 잠겨 성음(聲音)의 사이를 뛰어넘었다.

그리하여 궁성으로써 우성과 치성의 울림을 통어하고, 각성으로써 궁성과 상성의 음을 머금어서 율려(律呂)가 연주되고 조리가 어지럽지 않아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을 구르게 하였다. 곡조를 마치려 할 때는 빠르게 이어져서 돌아가는 기러기가 높이 나는 듯하고, 가늘고 길게 이어져서 헤엄치는 고니가 홀로 우는 듯하며, 빙빙 돌며 날아오르는 듯하여 고요하고 한가로워서 사람의 마음이 환하게 트이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렇다면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함이란 무엇인가? 거문고 연주에 있어서 신묘하다는 것은 본질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본질을 온전히 구현한다는 것은 음악에 담고자 하는 사물에서 이탈하지 않고 음악 자체가 그 사물인 것이니, 내 마음의 간곡한 정성이 거문고 연주를 통해서 천지자연의 이치와 하나가 되어 그 본질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거문고 연주의 신묘함은 마음과 손이 조화하여 움직이는 것이기에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가에서 수신을 통해 도달하려는 궁극적인 이상은 성인(聖人)이다. 유가의 성인이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한 자이기에 신묘불측(神妙不測)하고 천지의 법칙을 이어받은 그 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실현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오희상은 인격수양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거문고 연주를 주목하고, 거문고 연주를 통해서 유가 성인의 신묘한 모습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오희상금보」 하편의 「창탄선후변(唱彈先后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래가 거문고 연주를 따라가는 것인가? 반대로 거문고 연주가 노래를 따라가는 것인가? 이것은 오희상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음악계의 화두였다. 당시의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가 거문고 연주를 따라간다고 말하였고, 거문고 연주가는 연주가 노래를 앞세운다고 말하였다. 혹자는 노래와 연주는 어우러지며 서로 의지하지만, 손가락의 움직임(연주)은 입술의 움직임(노래)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오희상은 노래와 거문고 연주의 선후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창탄선후변」을 지었다.

우선 오희상은 「창탄선후변」에서 노래가 거문고 연주보다 먼저인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변증한다. 즉

 

“시를 읊는 것이 현악기를 타는 것보다 먼저이고, 현악기를 타는 것이 시를 읊는 것보다 나중이므로 악기 연주법은 모두 장구의 3점을 먼저 보내고서 제4점부터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소리가 이미 목에서 나와서 시를 읊는 것이 거문고를 타는 것보다 먼저인 까닭은 화(和)하는 자로 하여금 육율(六律)의 맡은 바를 분변하길 원해서이다. 이미 음율(音律)을 분변한다면, 노래하는 자가 맑거나 탁하게 창(唱)하면 화(和)하는 자가 맑거나 탁하게 응하고, 높거나 낮게 창하면 높거나 낮게 화(和)한다.”

 

거문고 연주가 노래보다 나중인 이유에 대해서 ‘화’하는 사람, 즉 거문고 연주자가 노래 소리를 듣고 선율(음율)을 분변하기를 원해서라고 한다. 선율을 분변한다는 것은 거문고 연주자가 노래를 따라 가며 연주할 수 있다는 의미로, 거문고 연주자는 맑거나 탁한 노래에 맑거나 탁하게 호응하고 높거나 낮은 노래에 높거나 낮게 화답한다는 설명이다. 오희상은 이것이 양(陽)이 음(陰)보다 먼저이고,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노래하는(夫唱婦隨) 이유라고 주장한다.

실례로 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를 때 악기 연주는 장구의 3점을 먼저 보내고 제4점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주법은 오늘날 성악곡의 반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가곡을 부를 때 1장에서 장구점의 첫 3점(5박)까지는 장구를 치지 않고 노래만 부르다가, 제4점(6박)부터 장구를 치고 제6점(9박)부터 거문고를 비롯한 악기들의 합주가 시작된다. 그리고 가사의 수성가락 반주접이나 판소리에서 소리를 처음 낼 때에 처음부터 북을 치지 않는다.

더불어 오희상은 노래함에 장단이 있고, 악기로 화답함에 느리고 빠름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례를 들어서 변증하였다. 결국 느린 노래에 거문고 반주가 느리게 화답하고 빠른 노래에 거문고 반주가 빠르게 화답한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서경」「우서」에서 ‘소리는 길게 읊는 것에 의지한다(聲依永)’에 근거한 것이다. 즉 악기가 내는 소리는 시를 길게 읊는 노래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결국 노래의 장단에 의지하여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해석이다. 오희상은 이것이 「중용」에서

 

‘군자는 중용에 의지한다
(君子依乎中庸)’

 

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중용에 의지할 수 있는 것 역시 성인만이 그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희상은 시종일관 자신의 음악관을 유가 경전을 인용하여 고증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고증적 고찰은 <진악해>에서도 나타난다. 본인의 음악관이 옛 성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유가의 문헌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혔고, 「예기」의 「악기」 등을 인용하여 악(樂)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주역」의 하도와 낙서 등을 인용하여 옛날과 오늘날의 ‘악’이 겉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그 원리는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희상금보 편찬의 근거 역시 「시경」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노주 오희상의 음악적 배경과 음악관」(최선아, 「한국음악사학보」53권, 한국음악사학회, 2014), 「老州集」, 「吳熹常琴譜」(「한국음악학자료총서」제39권, 국립국악원,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직필(洪直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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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이다.

여기서는 홍직필이 영월을 유람하면서 남긴 글을 소개한다.

홍직필은 1820년 3월 아버지인 판서공(判書公)이 부사(府使)로 있는 영월에 간다. 영월에서 판서공을 모시고 나연(羅淵)․옥순병(玉筍屛)․자연암(紫煙巖)․금강정(錦江亭) 등을 둘러보았고, 4월에는 절친한 임노(任魯)․오희상(吳熙常) 등과 함께 다시 금강정․청령포 등을 둘러보고, 당양과 청풍까지 유람한다. 단종(端宗)의 자취가 남아있는 영월은 홍직필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평소 절의를 강조하던 홍직필에게 영월은 그만큼 의미있는 고장이었다. 영월과 관련하여 그가 남긴 글은 「관란정기(觀瀾亭記)」, 「청령포기(淸泠浦記)」, 「창열암기(彰烈巖記)」, 「상동민전(上東民傳)」, 「기경춘전(妓瓊春傳)」 등이다. 이 글들은 모두 1820년 같은 해에 지어졌다. 이들의 내용을 살펴본다.

관란정기」는 단종이 손위(遜位)에 따라 영월로 몸을 숨겼던 원호(元昊)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구성을 보면, 서두에서 생육신(生六臣)에 대한 평가와 함께 관란정의 유래를 소개하였고, 두 번째로는 매일 동쪽 행재소(行在所)를 향해 한탄을 그치지 않는 원호의 행위에 감복하여 개가(改嫁)를 단념하게 되는 여인의 일화를 소개하고, 세 번째로는 영월을 유람하면서 이러한 일들을 들었다는 것과 이에 대한 감탄과 평가가 이루어진다. 아래의 다른 기(記)에 비해 원호와 여인의 일화를 다룬 서사(敍事) 부분이 비중 있게 서술되어 있다. 의론의 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단종의 폐위를 주도한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아아! 정난을 일으킨 이들은 혹 이 과부의 행실을 들었을까? 조정의 군자들이 시골의 천한 여자보다 못하다고 하겠구나.”

 

이것은 조정의 실권자들을 시골 과부와 비교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청령포기」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에 대한 기록이다.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사건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운데 청령포에 대한 묘사와 인상을 표현한 대목이 주목을 끈다.

“이에 이르러 더욱 폭이 커지는데, 깊은 물살이 돌아들어 산기슭 3면을 감싼다. 잔잔한 곳은 깊어서 어둡고 물살이 높은 곳은 흰 거품이 들끓어서, 오싹하고 애처롭게 만들므로 ‘청령포’라 부른다고 한다. 그 위로 산이 있는데 험준하고 가팔라서 칼과 창을 빽빽이 진열한 듯 살기가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 ‘도산(刀山)’이라고 한다. 도산 아래 무너진 담장과 주춧돌이 잡풀 속에 묻혀 있으니, 즉 단종이 머물던 유적지이다.”

여기에서 홍직필은 청령포 물살과 도산의 험준함을 묘사함으로써 단종이 거처했던 곳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사실 요즘 청령포의 물폭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배를 타야함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좀 내리면 꽤나 넓은 물길을 이룬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은 당시의 분위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창열암기」는 단종의 죽음에 따라 궁인(宮人)들이 투신한 곳에 대한 기록이다. 내용을 보면, 배은망덕하고 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모두 고관들이고 절개를 중시하여 목숨을 가벼이 여긴 이들은 천한 여인들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소위 경사대부는 이해로 그 마음이 어지럽고 화복(禍福)에 위협을 당하여 피하는데 교묘하다. 그리하여 하늘과 사람을 속임이 여기서 극에 달했다. 여종의 경우엔 의리의 양심을 온전히 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계산하지도 않아서 위급한 때에 목숨을 결단하였으니, 피하지 않는 바가 있다.”

 

고관들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에 대한 욕망이 본심을 가렸기 때문에 하늘과 사람을 속였고, 여종의 경우엔 양심을 온전히 하였기 때문에 위급한 때에 과감히 목숨을 결정할 수 있었다. 부귀를 누리지 않은 이들이 절의를 수립한 사건들을 보여줌으로써, 부귀로써 사람을 판단하는 일반적 견해를 반성하게 한다.

상동민전」은 영월 상동면(上東面)에 사는 이름 모를 백성에 대한 전기이다. 그는 청령포에서 단종에게 음식을 바쳤던 인물이다. 단종이 승하하던 날, 상동민은 이 사실을 모르고 여느 때처럼 단종을 배알하러 가는데, 단종이 백마를 타고 이르러서는 태백산으로 간다고 하였다는 전설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홍직필이 장릉(莊陵)에 갔을 때, 홍직필에게 당시의 일을 전해준 노인이 단종을 ‘우리 주상(吾主上)’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는 ‘단종의 지극한 덕이 사람에게 깊이 스며들었음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기경춘전」은 영월의 어린 시생이었던 경춘의 비문(碑文)을 보고 쓴 것이다. 그 구성은 서문, 경춘의 열행(烈行), 천덕산인(天德山人)의 평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이익을 보아도 의리를 훼손하지 않고 겁을 주어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이 ‘유행(儒行)’인데, 그것을 천한 여자로서 감당해 내었으니 이야말로 ‘참된 열녀’라고 하였다.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는 종사(從死)가 아니라 자기의 지키는 바가 위협받는 가운데 그것을 고수하는 것, 그것이 ‘열(烈)’의 적극적인 의미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여자보다 천민인 경춘이 더 낫다고 칭찬하였다.

경춘은 영월의 기생인데, 부사였던 이만회(李萬恢, 1708~1784, 자는 仲容, 본관은 延安)의 사랑을 받고서 두 마음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만회가 떠나간 후에 ‘지부지객(知府之客)’이 경춘의 미모에 빠져서 수청을 들라고 강요하게 되고, 이를 모면할 방법이 없는 경춘은 결국 금강(지금의 동강)에 투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부지객’의 경춘에 대한 협박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에 ‘지부지객’이 보고는 좋아하여 위엄으로 겁주고 좋은 말로 구슬려 뜻을 빼앗고자 하였다. 경춘은 긑내 듣지 않았다. 여러 번 매질을 당하여 다리에는 피가 흘렀다. 경춘은 결국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이 글에서 ‘지부지객’이는 표현은 의미가 모호하다. 부사의 친구(客)인지, 바로 ‘부사’를 가리키는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비문에서는 후임관원이 왔을 때 강요하였다고 하였고, 「향토지」에는 ‘새로 부임한 사또’가 강요하였다고 하였다. 현재도 영월에는 경춘의 비석이 남아있다.

이러한 글을 통해 눈에 띄는 것은 홍직필의 지배층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하층민에 대한 포용적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적 근거는

“사람은 천지의 정수를 받아서 태어나니, 고금(古今)과 존비(尊卑)의 차이가 없음을 더욱 경춘에게서 볼 수 있다”

 

는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계열에 속하는 홍직필의 사상적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것이 곧 신분차별의 철폐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지만, 홍직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그가 제자를 받아들일 때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점 등을 관련시켜 보면, 그에게 신분상의 차별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내재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홍직필의 영월 유람과 節義의 형상화」(이대형, 「한국문화연구」권8,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직필(洪直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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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긍필(洪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이다. 서울 출신이며, 병마절도위 홍상언(洪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홍선양(洪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이간(洪履簡)이다.

작년에 이어서 여기서는 홍직필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임헌회는 홍직필의 시문에 대해 그의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장이 끝없이 넓고 성대하여 어떤 이가 그 요령을 묻자, 선생께서

‘유학자의 문장은 막힘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 문장에 빠진 자들은 기량이 정밀할수록 심술도 무너진다. 경계로 삼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시도 아건(雅健)하고 충담(冲淡)하며 조탁을 즐기지 않았다. 쉽게 미칠 경지가 아니라고 모두들 말한다.”

임헌회에 따르면, 홍직필의 시는 강하의 물줄기가 성대한 기세로 하류를 향해 거침없이 흘러가듯이 문장이 막힘없는 기세로 시원스럽고 기운차게 이어져 내려간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고 평가한다.

아래의 시는 1823년에 창작한 「고한(苦寒)」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食不充腸衣不完  (식불충장의불완)
밥이 부족하고 옷도 부족하니

雪中凍殺幾袁安  (설중동살기원안)
눈 속에서 몇 원안이 얼어 죽었을까

安得邊生九州被  (안득변생구주피)
어찌하면 변생(邊生)의 구주(九州) 이불 얻어

帲幪寒士破愁顔  (병몽한사파수안)
한사(寒士)를 덮어 시름을 풀어줄까

 

시 속에 나오는 원안(袁安)은 후한 때의 선비로 낙양에 많은 눈이 내리자 굶주려 집안에 쓰러져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폭설로 양식이 귀해진 백성들이 음식을 구하러 동분서주하는데, 차마 이런 어려운 시절에 자기까지 남을 찾아가 양식을 구할 수는 없다고 하여 배를 곯았던 것이라고 한다. 홍직필은 당시 조선 사회에 이 원안처럼 기근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는 기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다. 홍직필이 이에 대해 실천 가능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당시의 힘겨운 시대 현실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부정부패로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하던 19세기 전반은 실제로 기근에 괴로워하는 가난한 백성들이 살던 곳을 이탈하여 유리걸식하다가 반란을 꿈꾸는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비록 도학과 예학에 침잠하고 있지만, 시사를 등져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홍직필에게 이런 시대의 시련은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홍직필은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 보편 교육과 하층민까지 아우르는 적극적인 문학적 응대를 통한 계몽으로, 이런 난국을 타개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던 듯하다.

아래의 시는 1845년에 지어진 「애채신(哀採薪)」이라는 시이다.

 

原上荷鎌者  (원상하겸자)
언덕에서 낫을 들던 그 사람

採薪終夕還  (채신종석환)
나무해서 밤늦게 내려와

擔肩向城市  (담견향성시)
메고서 저자로 향해 가는데

妻子自呼寒  (처자자호한)
처자는 추워서 울부짖겠지

 

1845년이면 홍직필이 「고한」을 지은 뒤로 다시 22년의 세월이 흐른 70세 때이다. 긴 세월의 간극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고단함에 지친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무하는 나무꾼이 정작 자신의 집에는 군불을 지피지 못해 처자(妻子)를 추위에 떨게 만들어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담담하게 노래하였다. 시 속에서 주인공 나무군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로 풀어내지도 않고 구체화된 사건으로 보여주지도 않지만, 위의 상황은 충분히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1840년에 원나라 장양호(張養浩, 1270~1329)의 「애유민조(哀流民操)」를 본떠 12절로 창작한 「속유민조(續流民操)」도 홍직필의 현실 인식을 잘 보여준다. 한 부분만 소개한다.

 

哀哉流民   (애재유민)
가련하다 유민들이여

顔貌不忍覩  (안모불인도)
얼굴을 눈뜨고 볼 수 없고

號咷不忍聞  (호도불인문)
울음을 차마 들을 수 없네

世無汲長孺  (세무급장유)
세상에 급암(汲黯)이 없는데

誰復發倉囷  (수복발창균)
누가 다시 나라의 창고를 열까

 

홍직필은 시의 서문에서, 장양호가 지은 「유민조」의 글 뜻이 애절하여 정말 오늘날의 광경을 말한 것 같아서 그 체를 본받아 이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고단한 백성의 삶을 목도하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 노래의 형식을 빌렸음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의 광경이란 무엇인가? 곧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유민들의 가련한 모습과 처량한 울음소리이다. 홍직필은 1840년 4월에 심능용(沈能容)에게 보낸 편지에서, 심각한 기근으로 팔도의 백성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먹여주기를 기대하지만 한 사람도 구제되지 못하고 길과 들에서 굶어죽고 있다고 하였다. 더욱이 이를 해결할 의지를 가진 위정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절망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홍직필은 부족하나마 시를 통해 이들의 아픔을 대변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홍직필은 1843년에 지은 「원맥(原麥)」에서는 추수할 때가 가까워진 보리밭에서 보습을 잡고 일하는 농부가 정작 그 보리로 양식을 삼을 수 없는 현실의 모순을 노래하였고, 1845년에 지은 「애구작(哀驅雀)」에서도 논에서 참새를 쫒는 농부의 굶주림을 노래하면서 농부의 배에서 우레 소리 같은 배곯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여러 시에서 당대의 모순과 백성의 아픔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홍직필은 시를 통해 가난과 추위에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대변하고 위정자를 경계하였던 것이다. 홍직필이 전적으로 문학에 전념했던 문인은 아니지만, 문학적 의미를 갖는 많은 분량의 작품을 남겨두었다. 그는 학자로서 학문 탐구에 매진하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다하면서도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홍직필은 유학의 도가 미약해지고 풍속이 쇠퇴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그의 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매산 홍직필의 儒道 존숭과 警世의 시문창작에 관한 고찰」(신영주, 「한문고전연구」제30집, 한국한문고전학회, 20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진현(金珍鉉)


김진현(金珍鉉)                                                             PDF Download

 

181878(고종 15)~1966. 근대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경유(景儒)이며 호는 운파(雲坡)이다. 아버지 김재화(金在華, 호 晩圃)와 어머니 하동정씨 동욱(東旭)의 딸 사이에서 1878년(고종 15) 10월 13일에 광주 서방(瑞坊)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시문집으로 「운파유고(雲坡遺槁)」가 전해진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 전도(田島)가 와서 유적(儒籍)에 날인하면 식전(息典)이 있을 것이라며 날인을 청하자, 분개하며 호통을 쳐서 돌려보내기도 했다. 89세가 되던 1966년에 사망하였다.

운파유고」는 근대의 유학자 김진현의 시문집이다. 6권 6책으로 석인본이다. 1978년 김진현의 아들 김영도(金永燾)와 조카 김영만(金永滿)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가원(李家源)의 서문과 권말에 노문영(盧文永)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전남대학교 도서관, 단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부(賦) 4편, 시 553수가, 권2에는 서(書) 185편이, 권3에는 서(序) 18편, 기(記) 23편, 발(跋) 23편이, 권4에는 잡저 35편, 제문 20편, 상량문 2편이, 권5에는 비문 6편, 묘갈명 8편, 묘표 12편, 행록 6편, 행장 14편, 전(傳) 2편이, 권6에는 부록으로 설(說)·의(意)·하(賀)·기(記)·만사 각 1편, 서(序) 3편, 축(軸) 2편, 행장, 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존주해(尊周解)」는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주나라를 대신하여 명나라를 존숭할 것을 주장하여, 망국의 실의 속에 민족 주체성에 대한 각성이 엿보인다. ‘존주대의’는 제후가 천자의 나라를 높이는 의리이다. 공자는 「춘추」라는 책을 지어 중국 주 왕실을 높였다. 또한 중국 송나라 때의 주자가 존주대의를 중시했다. 조선조에 이르러는 통상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척하자는 논리의 근거로 썼다. 「민위귀론(民爲貴論)」은 존귀한 것으로 인군(人君) 같은 이가 없지만, 인군은 백성이 아니면 존귀할 수 없기 때문에 백성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며 백성의 귀중함을 역설한 논설이다.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천하태평을 이룩할 수 있음을 강조하여 정치하는 위정자들의 각성을 시사하고 있다.

공사변(公私辨)」은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인물변(人物辨)」은 인간은 귀천의 차이 없이 도덕적 품성을 갖추는 것만이 진보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언행변(言行辨)」은 언행을 삼가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삼산재배송사선생수의문목(三山齋陪松沙先生隨疑問目)」은 1897년 기우만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기록한 것이다. 경전 연구 중에 의심나는 곳을 간추려서 질의응답한 내용이다. 경의(經義)뿐만 아니라 상례와 제례의 호칭 문제도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경술기사(庚戌記事)」는 1910년 경술국치 후 당시 덕망 있는 인물의 회유책으로 자행되던 일본 천황의 은전(恩典)이라는 대장에 날인하라는 일본 경찰의 회유와 여기에 대처한 자신의 태도를 기술한 것이다. 「신담록(薪膽錄)」은 1911년 기우만이 남원시 서림주재소에 출두하여 일본 경찰에게 문초받은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그밖에 우사(寓舍)에서 발견된 의병장과 주고받은 서신 및 의병활동․의관․복식․학문․은전 등에 걸쳐 진행된 문답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김진현과 관련되는 채국계(採菊契)의 내용을 소개한다.

‘채국계’는 교유계(交遊契) 또는 풍류계(風流契)로, 지금의 전남대학교 뒤편 반룡부락에 거주하던 김진현을 위하여 이철종(李哲琮) 등이 1933년 중구일(重九日)에 동료 제자들과 스승의 지우(知友) 등 300여명을 모아 계를 만들었다. 김진현은 이미 강의계(講誼契)를 만든바 있고, 채국계가 계를 만드는 것을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 난심계(蘭心契)까지 결성하는 등 시문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채국계’라는 계명을 붙인 것은 중양절(음력 9월 9일)과 관계가 깊다. 지금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구구절, 구일날 또는 궐날이라고도 하는 중양절은 추석 못지 않은 큰 명절이었다. 햇곡식으로 조상께 천신(薦新)하고 누런 국화를 따서 국화전을 부치고 국화주를 빚어 시식(時食)으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1에서 10까지의 기본수 가운데 기수(奇數)를 양수(陽數)라 하여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수의 극이라 믿는 9가 겹치는 날을 중양(重陽)이라 하여, 양기를 존중하는 사상에서 큰 명절로 삼아왔다.

한나라와 위나라 시대부터 국화를 감상하고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는 상국등고(賞菊登高)의 습속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래로 중구절을 숭상하여 군신(君臣)이 설연창화(設宴唱和)하였고,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쓰고 단풍과 국화를 감상하며 하루를 즐겼다. 조선조 이래 중구절은 일반 백성들의 명절이라기보다 양반들, 특히 남자들의 명절이었다. 중양절의 의미를 살려주는 국화를 계명에 붙인 것은 이와 같은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계절감 및 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준다. 1968년 김진현 사후 채국계는 받드는 대상을 상실하고 소멸하였다.

채국계는 성년이 된 운파 김진현의 문인과 친우들로 구성되었는데 거주지는 서방․용봉 지역이었다. 창계시 계원이 300명이 넘었으니 김진현을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의 높은 학식과 문장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 한학의 대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므로 단결력이 튼튼하고 스승이 생존해 있는 기간 동안은 별다른 계원의 변동없이 잘 유지되어 왔다.

채국계의 강신일은 매년 음력 9월 10일이었다. 강신일이 되면 20여명의 유사가 200명 이상이 참석하는 계회의 음식물을 각자의 자비로 부담하여 준비하고 가마솥, 땔감, 그릇 등을 터가 넓은 정자나 냇가의 나무숲 아래로 가지고 나가 직접 밥을 지어먹었다. 같은 솥의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하나라는 일체감을 더욱 다진 것이다. 채국계도 강의계와 유사하게 스승을 받들고 교제를 넓히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국등고(賞菊登高)는 못하였지만 지참한 지필묵으로 운에 맞춰 한 편의 싯구를 읊으며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표출하는 장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본계의 중요한 대목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서 직강에 의해 한시 짓는 법이 강의되었고, 서로 앞다투어 시문을 써내 주고받으며 필력을 향상시키고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계비는 창계시 20전, 해방이후 30원씩의 계비를 각출하는 등 최소 운영비용만을 거두었을 따름이며, 계원에 대한 상조 기능은 거의 없었고 그때그때 계원 상호간 부조만 있었다. 김진현 사후 유족과 그를 따르는 몇몇 제자에 의해 「운파유고문집(雲坡遺稿文集)」이 발간되었다. 지금까지 채국계를 통해 선인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해방 후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우리의 의식이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참고문헌]: 「光州의 契」(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진기(金鎭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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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63(철종 14)~1944. 근대말 현대초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성옥(聖玉)이며, 호는 운곡(雲谷)으로 부안에서 출생하였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의 유고는 「운곡사고(雲谷私稿)」라는 이름으로, 최선(崔璿)의 서문과 아들 김종희의 발문을 붙여 1944년 목활자본 2권 2책으로 간행되었다. 내용으로 권1에는 서(書)․잡저(雜著)가, 권2에는 축문(祝文)․제문(祭文)․묘갈(墓碣) 행장(行狀)․어록(語錄)조(操) 시(詩), 부록으로 되어 있다.

김진기는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이다. 다만 1876년 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成夏)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최초의 개신교 신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의주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이 활동한 의주란 곳은 한국 개신교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뜻 깊은 고장이다.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신자인 백홍준(白鴻俊)․이성하(李成夏)․김진기(金鎭基)․이응찬(李應贊) 등이 의주 사람이며, 그 후 뒤따라 신자가 된 서상륜(徐相崙)과 서경조(徐景祚) 형제도 의주 사람이다.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에 남쪽으로는 인천, 즉 당시 이름인 제물포를 통해 많이 들어왔다. 서울에서 가까운 항구였으니까 당연히 그랬다. 또한 북쪽의 경우는 의주를 통로로 해서 기독교가 들어왔다. 의주의 경우는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의주의 청년들이 중국대륙 동북지역에 갔다가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에게 전도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 청년들은 중국대륙 동북지역에서 세례를 받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도 하였다. 남쪽의 경우는 외국 선교사들이 중심이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의주를 통로로 한 북쪽의 경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선교의 주체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 교회 초기의 기둥이었고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서상륜․서경조 등이 모두 의주 출신이다.

이들은 1876년(고종 13) 행상으로 만주 우장(牛莊)에 갔다가, 로스(Ross,J.) 선교사의 전도로 김진기․이응찬․백홍준 등과 함께 기독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았다. 1882년 선양 고려문에서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 그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다가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이응찬․백홍준․이성하․김진기는 1876년에, 서상륜은 1879년에, 김청송은 1883년 세례를 받았다. 이 여섯 명의 의주 청년들은 한민족 개신교의 선구자들인 것이었다. 지금 황량하고 작은 도시로 바뀌고 존 로스목사가 머물던 여관 등은 자취조차 없지만, 변문진으로 바뀐 고려문은 아직도 한민족 개신교의 시작이었고 우리민족을 사랑한 하나님이 존 로스라는 푸른 눈의 서양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곳이기도 하다. 1882년 로스 선교사와 함께 최초로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만주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약전서」의 한글 번역서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한다.

로스(Ross,J.)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의 목사로서 1872년 이래로 만주에서 선교하였고, 특히 한국의 선교를 구상하여 만주 동북지방에 있던 한국인들의 촌락을 다니면서 전도하여 최초의 한국인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유식한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1877년부터 신약성서의 한글 번역을 시작했는데, 그들은 김진기․서상륜․이응찬․백홍준․이성하 및 이익세 등이었다. 로스는 성서의 한글 번역을 위해 우선 자신이 이들에게서 한글을 배워야 했고, 이들은 우선 한문 성서를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김진기를 비롯하여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로스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먼저 이들은 한문성경의 우리말 번역작업에 착수하여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최초로 간행되었다. 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마가복음」·「마태복음」, 1885년에는 「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에베소서」가 간행되었다.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제목으로 신약성서 전권이 출간되었는데 흔히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불린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전도, 75명의 신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1883년에는 국내전도를 위하여 잠입, 의주·삭주·강계 등지에서 전도한 끝에 10여 명의 신자를 얻고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직교회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초의 개신교 집회를 만들었다. 1887년 9월에 언더우드(Underwood, H.G., 元杜尤)가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 놓고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서상륜과 더불어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었다. 1889년에는 의주에 언더우드를 초빙하여 압록강에서 33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계속해서 로스와 연락을 취하여 1890년 의주에 와서 한 달 이상 신앙을 지도하도록 하였고, 다음 해에는 목사 마페트(Moffett,S.A., 馬布三悅)와 게일(Gale,J.S., 奇一)의 순회전도를 주선하는 등 외국선교사들의 길잡이 구실을 하였다.

그리하여 1882년 가을에 처음으로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요안나 복음전서」를 각각 낱권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인쇄기는 상해로부터 사들였고, 한글 활자는 그의 한국인 도역자들이 만든 목활자를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아연활자로 만들어서 1881년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에 설치하였다. 출판소는 심양의 문광서원이었다. 로스는 그와 매부관계인 선교 동역자 매킨타이어(MacIntyre,J.)의 협력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번역한 낱 복음서들을 만주의 한국인 교회에 널리 반포하면서 계속 번역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1883년에는 「예수성교전서말코복음」을, 그 이듬해에는 「예수셩교젼서마⋅복음」을 간행하였고, 서상륜은 이 성서들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고향인 황해도 솔내에서 전도함으로써 1884년 최초의 한국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뒤 번역을 계속했는데, 로스가 안식년으로 본국에 귀국한 동안에 매킨타이어는 번역 원고들을 네 차례씩 원어 성서와 대조해가면서 번역을 수정하였다. 드디어 「신약성서」가 완역되었을 때 로스는 영국 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재정 원조를 얻어서 이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글 성서로는 최초로 간행된 것이요,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성서의 한글 번역을 시작하여 「신약전서」를 발행한 해(1900년 5월)보다 13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로스 역의 「예수성교전서」가 한국에 일찍 들어와서 널리 읽히게 되었고, 외래 선교사들의 한글 공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 이 책은 한글 연구의 한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기독교가 선교되는 곳에는 어디서나 성서의 국역이 반드시 이루어져 그 나라의 국문학 발달에 기여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였다. 성서의 한국어 번역으로 생긴 새 어휘들도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들이 보급되어 통용되었다.

김진강(金振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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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43(중종 22)~?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김응복(金應福)의 아들이며,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어록(語錄)」을 기록한 것이 「율곡전서」에 실려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원종공신’은 조선시대에 큰 공을 세운 정공신(正功臣) 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공신 칭호이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의 정공신으로 1등은 이순신․권율․원균 등 3인이 있고, 2등에 이억기 등 5인이며, 3등은 이운룡 등 10인으로 모두 18명이다. ‘원종공신’은 원공신 이외의 공신을 말한다.

율곡은 당대의 많은 학자와 친교를 맺었다. 우계 성혼, 송강 정철, 사암 박순, 구봉 송익필 등이 그의 지기이자 동학이었다. 그는 선생 없이 한 시대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일가를 이루었고,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주도 세력인 서인의 원조가 되었다. 그의 문도로서 대표적인 학자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정엽, 이귀, 황신, 박여룡(朴汝龍), 김진강(金振綱) 등이 있다. 율곡의 학통은 김장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을 거쳐 우암 송시열로 이어졌고, 그것은 바로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끈 학문의 계보였다. 이들이 서인 정파로서 이끌어간 조선후기 사회는 성리학에 기초한 도덕 국가를 지향했으니, 율곡의 포부와 이상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진강과 관련된 내용은 「율곡전서」권31~32의 「어록」에 보인다. 김진강과 박여룡 등이 율곡의 말을 기록한 것이 많고,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 실려 있는 율곡의 말을 채집해 놓은 것도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어떤 사람이 묻기를,

“리가 비록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다고 할지라도 간혹 형체가 있어 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리에는 기 밖의 리가 없다. 그러므로 유형한 사물로 인하여 리의 광대한 것을 볼 수 있다”

라고 하였다.

 

(2)어떤 사람이 묻기를,

“천지가 비록 끝이 아니더라도 원기(元氣)는 일찍부터 없어지지 않는다고 함은 어떤 것인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천지가 마지막으로 끝날 때에 원기도 또한 따라서 소진한다면, 후천지의 기는 어떤 기에 근원하여 나오겠는가? 비유하면 나뭇잎이 비록 말라 떨어지더라도 근본의 기는 오히려 존재함과 같다. 그러므로 내년 봄의 잎을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3)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이 인(仁)을 할 때에 어떤 이는 그 한 부분만을 얻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전체를 얻기도 한다. ‘인’의 지위차등이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인이란 것은 마음의 완전한 덕(德)이다. 본래 크고 작은 차별이 없는 것인데, 사람의 조예가 얕고 깊음이 있으므로 ‘인’의 치우침과 온전함의 같지 않음이 있다. 또 ‘인’을 하는 것은 태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산꼭대기에 머물고 어떤 이는 산기슭에 머문다. 산기슭에 서 있는 자가 태산을 낮다고 한다면, 이것은 ‘인’을 모르는 자이다”

라고 하였다.

 

(4)어떤 사람이 본체(本體)의 기를 물었다. 진강이 대답하기를,

“사람과 사물에서 천지를 보면 천지의 기는 본체이며, 천지에서 원기를 보면 원기는 본체이다”

라고 하였다.

 

(5)어떤 사람이 묻기를

“주자가 물의 성질은 차고 불이 성질은 뜨겁다고 한 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물이란 것은 양이 안에 있고 음으로 바탕을 삼기 때문에 성질이 차고, 불이란 것은 음이 안에 있고 양으로 바탕을 삼기 때문에 성질이 뜨겁다”

라고 하였다.

 

(6)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덕(四德)을 원․형․이․정이라 말하고, 오상(五常)을 인․의․예․지․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언인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사덕은 유행의 순서를 말한 것이고 오상은 그 대대(對待)의 체(體)를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7)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할 때에는 마음이 사물 위에 있는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마음의 본체는 항상 속에서 주재하고 있으나 그 작용은 밖으로 드러난다”

라고 하였다.

 

(8)어떤 사람이 묻기를,

“마음은 뱃속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밖에 조금만 틈만 있으면 이 틈으로 달아난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물건에 대한 욕심이 밖에서 아름답게 느끼면 마음이 문득 달아나는 것이니 이것을 밖에 조그마한 빈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9)어떤 사람이 묻기를,

“재(才)는 기(氣)에서 나오는 것이니 ‘재’와 ‘기’는 같은 것인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기’가 맑으면 ‘재’도 맑고 ‘기’가 탁하면 ‘재’도 탁하므로 ‘재’는 기의 용(用)이고 기는 체(體)이다”

라고 하였다.

 

(10)어떤 사람이 묻기를

“하늘과 사람의 하나의 이치이다. 그런데 천지에는 혈기(血氣)가 없고 사람에게는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천지의 기운이 합하여 만물이 화생하여 각각 그 형상을 이룬다. 혈육의 물건은 각각 하나의 기가 있다. 그런 까닭에 소는 소를 낳고 말은 말을 낳을 뿐이다. 천지가 만약 혈육이 있는 하나의 물건이 된다면 만물을 만들어 낼 수 없어서 조화의 공용은 그치고 말 것이다”

라고 하였다.

 

(11)어떤 사람이 인의(仁義)를 말하면서 예지(禮智)를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진강이 대답하기를

“인(仁)은 예(禮)를 포함하고 의(義)는 지(智)를 포함한다”

라고 하였다.

 

(12)어떤 사람이 혼(魂)과 백(魄)의 동정(動靜)을 물었다. 진강이 대답하기를

“혼은 양으로써 동(動)을 주관하고, 백은 음으로써 정(靜)을 주관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혼’이 하는 것이고, 보는 것이 능히 밝게 할 수 있고 듣는 것이 능히 총명하고 능히 기억하는 것은 ‘백’이 하는 것이다. 대체로 혼이란 것은 양의 신(神)으로서 지각의 밝음이 밖으로 발하는 것이고, 백이란 것은 음의 신으로서 지각의 신령함이 안에서 함양되는 것이다. 물과 불에 비유하면, ‘백’은 물의 속이 밝은 것과 같고 ‘혼’은 물의 밖이 밝은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국역 율곡집」(민족문화추진회, 1968), 「율곡집해제(栗谷集解題)」(정종부, 「율곡집」, 대양서적, 1972),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8), 「규장각한국도서해제」(서울대학교도서관, 1979)

 

김직순(金直淳)


김직순(金直淳)                                                             PDF Download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청부(淸夫)이며, 호는 실암(實庵)이다. 문간공(文簡公) 김양행(金亮行)의 손자이며, 자연와(自然窩) 김이구(金履九,1746~1812)의 아들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를 지냈다. ‘유일’이란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지방관의 천거를 받아 등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은일편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아들 김인근(金仁根)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정헌(靜軒)이다. 아들 역시 유일로 천거되어 장령(掌令)을 지냈다.

그리고 아버지 김이구의 자는 원길(元吉), 호는 자연와(自然窩)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후손으로 산림학자인 미호(美湖) 김원행(金亮行, 1702~1772)의 아들이다. 음직(蔭職)으로 사옹원 첨정을 지냈다. 여기서 ‘음직’이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부모나 조부모의 공으로 벼슬살이를 하는 것으로, 요즘말로 말하면 가문의 빽으로 관직에 진출한 것을 의미한다. 저서로는 「실암집(實庵集)」이 전해진다.

실암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김직순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연도를 알 수 없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91수가, 권2에는 소(疏) 2편, 서(書) 42편, 기(記) 2편, 제문 5편, 애사 1편, 묘지 5편, 잡저 1편, 잡록(雜錄) 1편, 전(箋)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반 이상은 민치복(閔致福)에게 기증하거나 그를 생각하고 추앙하며 지은 것이다. 「신륵사기유(神勒寺紀遊)」는 여주 신륵사의 경개를 장편으로 묘사한 것이다. 「송죽연국매오영(松竹蓮菊梅五詠)」은 소나무·대나무·연·국화·매화 등의 특수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내용으로, 저자의 고상한 지조를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당시(唐詩)를 차운한 것이 많다.

서(書)도 민치복과의 문답이 대부분으로 수학과 면학을 강조한 내용이다. 「영사감기(榮賜龕記)」는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이 내각(內閣)으로부터 사서삼경을 하사받아 장서하기까지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국가의 융성은 교학(敎學)의 밝음과 유학의 흥기에 있다고 하였다. 잡록은 처세(處世)·수신(修身)·강학(講學)에 관하여 적은 글이다.

이어서 김직순의 아버지와 아들의 시문집을 아울러 소개한다.

자연와집(自然窩集)」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며 김직순의 아버지인 김이구의 시문집이다. 모두 6권 3책으로 필사본이다. 이 책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 시기는 알 수 없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82수, 권2에는 서(書) 4편, 권3에는 잡저(雜著) 14편, 권4-5에는 차록(箚錄), 권6에는 잡지(雜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권1에 실려있는 시에는 「회고(懷古)」․「만흥(謾興)」․「백운산(白雲山)」․「종국(種菊)」․「사선정(四仙亭)」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권2의 서에는 제문․유사․명(銘)이 있는데, 이 중에 「육육와명(六六窩銘)」은 그 문장이 뛰어나다. 민이현에게 답한 편지는 대공(大功)․복제(服制) 등 예제 6조목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고, 혹인(或人)에게 답한 편지는 상제례(喪制禮) 등 16조목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이다. 제문(祭文)은 장인 유언수(兪彦銖)와 외삼촌 권진응(權震應) 등에 대한 것이다. 「유사(遺事)」는 부친 김양행의 행적 24조목이다. 김양행이 당대의 권력자인 홍봉한(洪鳳漢)․홍국영(洪國榮) 등과 거리를 두며 청론(淸論)을 주장하였던 면모 등이 실려 있다.

권3의 잡저에는 「제한남당기문록(題韓南塘記聞錄)」이 있는데, 이것은 남당 한원진이 스승 권상하(權尙夏)의 어록을 자의(自意)로 기록하였기에 오히려 스승에게 누가 되었다고 우려한 글이다. 그리고 「심설(心說)」․「혼백설(魂魄說)」․「성도설(性道說)」․「기질지성설(氣質之性說)」․「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성리학에 대한 일련의 논설들이다. 호론(湖論)의 학설을 비판하는 몇 대목은 낙론(洛論)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공이(公移)」 4편과 「하첩(下帖)」 2편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 부세와 재정, 흥학(興學) 등의 변통책을 주장한 것이다.

권4는 「중용차록(中庸箚錄)」이다. 원래 27세에 쓴 것을 1799년(정조 23)에 다시 개작하였다. 권두에 「중용위학도(中庸爲學圖)」와 「위학도설(爲學圖說)」이 있고, 이하에 「서문(序文)」·「편명(篇名)」·「편제(篇題)」와 제1장에서 제30장에 대해 본인의 견해를 서술하고 있다.

권5는 「대학자록(大學箚錄)」과 그에 부속된 「도량설변(都梁說辨)」, 「위학도설(爲學圖說)」이다. 「대학차록」의 체제는 「중용차록」과 유사하다. 「공문전수심법(孔門傳授心法)」․「중용위학도설(中庸爲學圖說)」 30장과 「대학」의 서문에 대한 논설이 들어있다. 권6은 「논어」·「대학」·「중용」에 대한 잡지이고, 권7은 「맹자」에 대한 잡지이다. 이처럼 잡지에는 「논어」·「대학」·「맹자」·「태극도설」에 대한 해설이 있어 저자의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김양행․김이구․김직순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안동 김문 가운데서도 산림을 지속적으로 배출한 가계로서 낙론 학계의 큰 줄기이다. 특히 본집은 태반이 경설(經說)로서 낙론의 경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정헌집(靜軒集)」은 조선후기의 학자이며 김직순의 아들인 김인근의 시문집이다. 4권 2책으로 필사본이다. 1876년(고종 13) 아들 김병우(金炳愚)가 간행을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권두에 이형보(李馨溥)의 서문과 권말에 작은아버지 김명부(金明夫)의 발문이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 시(詩) 3수, 소(疏) 2편, 서(書) 37편, 권2에 서(書) 19편, 서(序) 2편, 기(記) 2편, 제문 10편, 권3에 제발(題跋) 5편, 애사 2편, 묘지명 9편, 잡저 1편, 권4에 부록으로 정헌기(靜軒記)·행장 각 1편, 유사 44편, 제문 14편, 만사 15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가운데에는 친구인 이형보와 주고받은 것 19편이 있는데, 주로 학문과 처신에 관한 내용이다. 사상과 학풍에 있어서는 다분히 실학적 경향을 띠고 있다. 잡저의 「서신김뇌경(書贐金雷卿)」은 김성묵(金聲默)에게 노자 대신으로 준 격려사로서, 도덕·인의(仁義)가 강조된 서적이 아닌 자(子)·사(史)·시(詩)·문(文)을 공부하더라도 그 책 자체보다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허명이나 허세보다 매사를 실지에 착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볼 때, 역시 저자의 학문이 실천적 경향이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끝으로, 조선후기 문인이자 여항시인으로, 방랑자의 삶을 살았던 정종한(鄭宗翰)이 김직순에게 보낸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것은 김직순이 정종한을 방문했을 때 지은 시이다.

 

驪鄕三秀竹菴名  (려향삼수죽암명)
여주 고을의 세 분의 뛰어난 수재로써 죽암이 알려졌는데

想見天姿鍾地英  (상견천자종지영)
짐작해보니 타고난 자태가 명예로운 땅에 모였네.

曽是先生生長處  (증시선생생장처)
오래전부터 선생이 성장한 곳,

山容如畵水心淸  (산용여화수심청)
그림 같은 산의 모습에 강물도 맑구나.

 

 

[참고문헌]: 「여주읍지」(189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