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행(金砥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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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716(숙종 42)~1774(영조 50). 조선후기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유도(幼道)이며, 호는 밀암(密庵)으로 김시정(金時淨)의 아들이다. 병계 윤봉구(1681~1767)에게서 수업을 받았으며, 학문도 「소학(小學)」·「심경(心經)」 및 사서(四書)․육경(六經) 등에 두루 통달하기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밀암선생문집」이 전해진다.

밀암선생문집」은 조선후기의 학자인 김지행의 시문집이다. 18권 9책으로 필사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찬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판본의 내제지에 ‘원본소장자(原本所藏者) 경성(京城) 김인진(金寅鎭), 등사년월(謄寫年月) 소화(昭和) 14년(1939)’의 기록을 통해, 6대 종손인 김인진(생몰 미상)이 소장한 원본을 1939년에 등사한 판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로, 아들 김이수(金履脩)가 아버지 김지행의 언행(言行) 140여 편과 문경(文經) 5권을 채록하고, 조카 김이홍(金履弘)이 보유(補遺) 42장, 시 90여 수, 부․제문․잡저․서 40편을 채록하였으나 간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밀암선생문집」은 6대 종손 김인진(金寅鎭)이 소장한 등사본(謄寫本)으로, 저자의 아들 김이수와 조카 김이홍이 정리한 것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권1·2에는 시 97수가, 권3∼6에는 서(書) 68편이, 권7∼9에는 「사문질의(師門質疑)」로 어록조품(語錄條稟)·어록조대(語錄條對)·강설문대(講說問對), 권10에 잡지(雜識), 권11∼15에 잡저 26편, 제문 4편, 행장 2편이, 권16에는 서(書) 1편, 잡저 1편이, 권17~18은 부록으로 권17에는 「계하견문(溪下見聞)」, 권18에는 제문 8편, 만사·묘지명·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 등사기(謄寫記)가 있다. 특히 「사문질의」나 제문 등은 18세기 지식인들 간의 상호 교류와 학문경향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주목된다.

시는 스승 윤봉구(尹鳳九)의 심성(心性)을 논한 시에 화답해 지은 시 23수,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글을 읽고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 주희의 도설(圖說)과 성리학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 등이 있는데, 이것은 김지행이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시에는 대개 서문을 붙여 그 시를 짓게 된 동기를 밝혔으며, 성현의 말을 인용할 때는 세주로 달아서 전거를 밝혔다.

특히 「화정구암선생논심성시(和呈久菴先生論心性詩)」에는 각 수마다 장편의 해설을 덧붙여, 저자의 성리학설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밖에 한거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읊은 시와 윤봉구의 동생 윤봉오(尹鳳五)와 윤계정(尹啓鼎)·윤심위(尹心緯)·홍양명(洪陽明) 등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있다.

서(書)는 윤봉구·윤심위·윤창정(尹昌鼎)·임성주(任聖周)·임정주(任靖周)·홍주종(洪柱宗)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성(性)·리(理)·오상(五常) 등 성리학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한 장편의 편지가 많다. 「사문질의」는 스승으로부터 성리학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내용과 질의·응답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잡지는 성리학의 중요한 개념들에 관한 주희·정호(程顥)·장재(張載) 등의 설을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내용이다. 또한 종형 김원행에게 보낸 편지에는 화양서원(華陽書院) 묘정비(廟庭碑) 건립 건에 대한 장문의 글이 있다. 당시 윤봉구가 죽고 발견된 화양 비문(碑文)의 내용을 두고 시비 논쟁이 벌어졌는데, 화양서원 원유(院儒)들은 건립을 주장하는 반면, 원장이던 김원행은 이를 중지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김지행은 이 편지에서 비문 새기는 것을 중지시킨 처사의 부당함을 논하고 스승을 위해 변론을 하고 있다.

권11∼14의 잡저에는 「이정전서」·「주서절요」·「주자어류」 등의 성리학 서적과 만동묘(萬東廟)의 비문의 구절에 해설을 붙이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권익관(權益寬)의 성설(性說)과 왕양명(王陽明) 등의 글을 읽고 비판한 글, 그리고 일상생활 및 학문하는 가운데 꼭 지켜야 할 사항을 모아놓은 글 등이 있다.

권15의 잡저에는 자서(自序)·부(賦)·찬(贊)·잠(箴)·명(銘)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설은 아들 김이수(金履修)의 이름을 풀이한 글과, 송나라 고종의 세실(世室)에 대한 주희설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다. ‘찬’은 심학(心學)과 주역에 관한 글이다. ‘잠’은 신독(愼獨)·존덕성(尊德性) 등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것을 경계하여 지은 것이다. ‘신독’은 「중용」에 나오는 구절로 홀로 있을 때라도 삼감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공부방법이다.

‘존덕성’ 또한 학문을 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도문학(道問學)과 대조된다. ‘도문학’은 글자 그대로 묻고 배우는, 즉 이목기관으로 보고 듣고 사고하여 객관대상을 고찰해나가는 공부이다. ‘존덕성’은 마음의 덕성을 보존하는, 즉 마음속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본성을 자각해나가는 공부이다.

권16의 서(書)는 윤창정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별지로, 오상에 대해 논의하였다. 부록의 「계하견문」은 아들 김이수가 아버지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 아버지의 언행과 가르침 등을 적어 놓은 글이다. 이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밀암문집(密庵文集)」

김지백(金之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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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23(인조 1)~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자성(子成)이며, 호는 담허재(澹虛齋)이다. 조부는 증 이조참판 김익복(金益福)이고, 아버지는 성균관진사 증 동몽교관 도촌(陶忖) 김연(金沇)이다. 모친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이며 현감(縣監) 송처중(宋處中)의 딸로, 4남 1녀를 두었다.

인조 때의 명현 신독재 김집의 제자로써 스승의 총애를 받았으며, 동창생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1648년(인조 26)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1위로 합격하였고, 생원(生員)이 된 뒤에 덕행으로 교관(敎官)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1667년(현종 8) 중국인 임인관(林寅觀) 등 95인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상륙하자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두려워하여 이들을 본국에 압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선생은 중형 김지중(金之重)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의 불가함을 힘써 주장하였다. 평생 명나라의 숭정(崇禎) 연호를 썼으며, 문장이 아담하기로 이름 높았다. 만년에는 고향 남원에서 후생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많은 훌륭한 제자를 길렀다.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었고, 남원의 요계사(蓼溪祠)에 제향되었다. 산동면 목동리 요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아버지 김연(1596~1661)의 자는 장원(長源)이며, 호는 도촌거사(陶村居士)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오증광사마시(戊午增廣司馬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 15) 이후부터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 속에서 시를 읊조리고 살며 스스로 자신의 호를 ‘도촌거사’라고 하였다.

맏아들 김지명(金之鳴)은 1639년(인조 17)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에 진사 부장원으로 합격하였고, 김지성(金之聲)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문과(戊子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지중(金之重)은 1651년(효종 2)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김지백(金之白)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사마시(戊子式年司馬試)에 생원 부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딸은 사간(司諫) 이상형(李尙馨)의 아들 이문원(李文源)과 혼인하였다.

또한 맏아들 김지명(1607∼1684)의 자는 자겸(子謙), 호는 양망재(兩忘齋)이다. 품성이 준수하고 기상이 온아하며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나이가 많아질수록 덕도 따라서 높아지니 세인이 모두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학문은 중부(仲父)인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에게서 수학하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의하면, 그가 진사에 합격하던 해에 상소하여 임진왜란에 순절한 증 찬성 황진(黃進)과 증 판서 이복남(李福男)의 사당에 이름을 내려줄 것과, 당시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증전(贈典)을 내려줄 것을 청하고 그 답을 받았다. 만년에는 거처하는 곳을 양망(兩忘)이라 편액하고, 후진을 기르며 주위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양망유고(兩忘遺稿)⌋는 ⌈부안김씨세고(扶安金氏世稿)⌋에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김지백은 1655년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를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시문집으로는 ⌈담허재집(澹虛齋集)⌋이 전해진다.

담허재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김지백의 시문집이다. 6권 3책으로 활자본이다. 1895년(고종 32) 후손 김종술(金鍾述)이 편집, 송병선(宋秉璿)이 교열, 8세손 김낙린(金洛麟)․김낙리(金洛鯉)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민종현(閔鍾顯)의 서문과 권말에 김낙리 등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167수가, 권2에는 소 2편이, 권3에는 서(書) 24편이, 권4에는 잡저 8편이, 권5에는 서(序) 4편, 기 7편, 발 1편, 축 2편, 제문 17편, 전(傳) 6편, 행장 3편이, 권6에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유사·요계사축(蓼溪祠祝)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오언절구 22수, 칠언절구 57수, 오언율시 12수, 칠언율시 41수, 오언고시 5수, 만시(輓詩) 29수, 부(賦) 1수 등 각체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김집(金集)에게 보낸 ⌈심경(心經)⌋·⌈가례(家禮)⌋ 등에 관한 문목(問目)·별지(別紙)가 상당수 있다.

잡저 가운데 「독서차기(讀書箚記)」는 모두 8개 항목으로, 1∼3항목은 정(靜)·동(動)·동정교양(動靜交養) 등에 관한 논설이다. 4∼6항목은 심통성정(心統性情)·심지체용감처(心之體用感處)에 관한 것이다. 7항목은 혼실(昏失)의 병(病)을, 8항목은 ⌈논어⌋ 가운데 의심나는 점을 논한 것이다.

심통성정설」에서는 사람의 본성(性)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고, 이러한 성이 대상과 감응하여 드러난 것이 정(情)이다. ‘성’은 고요한 속에 갖추어져 있고, 정은 감응하여 드러나는데, 이때는 반드시 주재자로써의 심(心)이 있어야 한다는 ‘심통성정’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끝에는 도표가 제시되어 있다. 그밖에 「정완책(頂頑策)」 등 4편은 모두 과문(科文)이다. 그 가운데 「사자입언(四子立言)」은 차중(次中), 「역상마(易喪馬)」는 감시이하(監試二下)로 합격한 작품이다.

이어서 1656년(효종 7)에 유유상종한 사우들과 은일자중하며 이안정(怡顔亭)에서 읊은 시 한편을 소개한다.

 

茅軒蕭灑壓淸川  (모헌소쇄 압청천)
띠집(茅軒)의 청결함이 맑은 시내보다 나으니

專壑生涯得百年  (전학생애득백년)
이 골짜기에서 마음껏 한 백년(百年)은 살겠네.

報秋登催善釀  (보추등최선양)
하인이 결실을 알려니 술 잘 빚기를 재촉하고

鳥傳春信覓新篇  (조전춘신멱신편)
새소리가 봄소식을 전하니 새 시편을 구하네.

一庭梧月閒宵裡  (일정오월한소리)
오동나무 뜰에 달빛은 밤 중 내내 한가하고

半畝荷風暮雨邊  (반무하풍모우변)
저녁 비 내린 끝에 작은 연못가에 바람 인다.

靜認主人標額意  (정인주인표액의)
고요함 속에 주인이 내건 편액의 뜻을 알지니

開顔隨處卽怡然  (개안수처즉이연)
얼굴 펴고 사는 것이 곧 기쁨이 아니겠는가.

갈치방을 흐르는 수려한 요천 물가에 비록 소박한 띠집이지만 청결한 분위기가 맑은 시내를 압도하는구나. 이러한 청정 골짜기라면 고고한 마음으로 한 백년은 넘게 살겠네. 일하는 하인이 정자에 와서 가을 곡식을 거둘 것을 알린다. 주인은 먼저 술 담그는 것부터 서둘러 챙긴다. 벌써 늦은 가을이면 생명의 기운은 쇠잔하고 이제 새봄을 기다려야 한다. 벌써 봄소식을 알리는 새소리를 듣는 것 같다. 새로운 시편을 구해야겠다. 뜰 안 오동나무에 걸린 밝은 달은 밤중 내내 외롭다. 저녁에 잠깐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뜰 안의 작은 연못을 스쳐간다. 조용하기만 한 밤. 주인이 걸어 놓은 ‘이안정’이란 편액의 뜻을 헤아려 본다. 세상사 넉넉한 인심으로 과연 얼굴에 근심 없이 사는 것이 큰 기쁨이구나.

[참고문헌]: 호남지, 남원지, 조선호남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조인물고」, 「양망유고」, 「효종실록」

김준영(金駿榮)-2


김준영(金駿榮)-2                                                       PDF Download
181842(헌종 8)~1907(융희 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병암(炳菴)이다. 전편의 내용을 이어서 여기서는 김준영의 예학을 소개한다.

스승인 전우가 김준영을 위해 지은 「행장(行狀)」에서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

 

“그는 예학에 있어서 특히 힘을 다했다. 주장하는 것마다 모두 근거가 있고 명확하였으며 억지로 끌어 붙이는 일은 절대로 없다.……예를 바꾸는데 있어서 특별히 신중히 했다. 김준영이 말하기를, 권(權)이란 도를 깨달은 군자가 아니면 함부로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약 배움이 부족하면서도 ‘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학문은 병들은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원칙을 지킬 다름이다.”

 

그의 문집인 병암집에서 예와 관련된 서술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김준영은 특히 각종 예제(禮制)에 대한 연구에 세심했는데, 이와 관련해 때때로 스승인 전우와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예제에 대한 김준영의 서술은 비교적 구체적인데, 여기서는 그의 예론만을 언급한다. 김준영의 예론은 시대적 특징이 뚜렷하며 그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존화양이’는 중국(명나라)을 존중하고 오랑캐(청나라)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중화사상의 일부 관념이다. 줄여서 화이론(華夷論)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원래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춘추」에서 나온 말로, 공자가 주나라를 존중해야 한다고 한 존주론(尊周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리학에서는 이를 춘추대의(春秋大義)라 하여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또한 ‘위정척사’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정도(正道)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위정),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서 배격하는(척사) 운동이다. 이 운동을 하는 정치세력을 ‘위정척사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교 학파이기도 하다. 또한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했으므로 수구당(守舊黨)이라고 불렸다.

그의 예론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예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예는 사회구성원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그것들이 고정되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예기」에는

 

“예가 아니면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어른과 어린이의 지위를 분별할 수 없다. 예가 아니면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의 친함, 혼인이나 서로 왕래하는 사귐을 분별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또한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의 분수도 예가 아니면 정해질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유가의 전통적인 예론이 주로 정치에서의 군신․상하, 윤리에서의 부자․형제․부부․장유․친소 등의 구별을 통해서 ‘예는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다’를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예론에서 예를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데 쓰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매우 드문 일이다. 조선이 서양 오랑캐와 일본 오랑캐의 침략을 받고 있을 때, 심지어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시대를 살았던 김준영은 특별히 예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경계임을 강조했다.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는 것’이 예의 사회적 기능임을 강조한 것이 김준영의 예론이 가지는 뚜렷한 특징이다.

예의 이러한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의제설(衣制說)」 세 편을 썼다. 예는 사회의 전장제도(典章制度)이고, 의제(衣制)는 그것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이라고 보았다. 중화의 성왕은 ‘반드시 사대부 복장에 대한 제도를 만들어 천하에 대대로 가르침을 전하지만, 오랑캐들은 안장과 말을 집으로 삼고 사냥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은 옷이 짧고 소매가 좁다. 즉 ‘의제’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만약 사람이 옷을 입지 않는다면 소나 말과 다름없다. 옷을 입었더라도 소매가 짧으면 오랑캐와 같다. 당시 사람들이 조정의 명령에 굴복하여 오랑캐처럼 복장을 바꾸는 것에 직면하여 김준영은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넓은 소매와 좁은 소매 사이는 부모의 유해가 중화가 되느냐 오랑캐가 되느냐 이므로 즉각 결정해야 한다.”

 

둘째, 예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사회의 전장제도로서의 예는 ‘국가를 다스리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하는 국가의 근본이다. 김준영이 이런 작용을 갖고 있는 예에 대해 논한 것도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입장에서 전개한 것이다. 김준영은 예란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 보고

“정치에 있어서 예로써 풍속을 지도하는 것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

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가 나라의 근본이라는 것은 중화와 조선에서의 근본을 가리킨다. 중화가 중화의 나라가 되고, 조선이 조선이 되는 이유는 바로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오랑캐의 것으로 중화를 변화시키면 조선도 더 이상 조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예법이 땅에 떨어지면 기강이 끊어진다. 이렇게 되고서도 국가가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지금 그 소매를 제거하니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세상의 도를 떠나 더욱 오염되어 국가가 국가가 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김준영의 예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서의 사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민족의 예의풍속과 민족적 독립성을 보호하여 조선이 일본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이론이다.

셋째, 예의 변화에 신중해야 한다. 김준영의 예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의 개혁에 있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예제의 개혁에 완전히 반대한 것은 아니다.

 

“고수해야 하면 고수해서 굳세게 계속 따르고, 변통해야 할 때에 변통하는 것 또한 계속 따르는 것이다.”

“전 세대의 그릇된 예에 고쳐야 할 것이 있는데, 고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고쳐서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효(孝)를 행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서술들이 그의 예제 개혁에 대한 융통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난이 눈앞에 닥쳐있는 이때, 예를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만약 ‘오랑캐로써 중화를 변화시킨다’면, 이것은 바로 조선 뿌리의 상실과 조선 민족의 독립성 상실을 의미한다. 이 점을 고려해 김준영은 함부로 변례(變禮)를 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예의 개혁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시 조선의 통치자가 의복개량과 단발령 등을 명령한 것을 겨냥하여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군주의 ‘변례’는 이렇지 않고 오랑캐로써 중화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김준영은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이 임금과 신하의 구별보다 엄하다”

 

는 유가의 원칙에 근거해서 당대의 왕의 혼미한 유언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당대 왕의 명령 때문에 폐를 끼치게 되는데도, 그것을 쫒아 짧고 좁은 옷을 입는다면, 이것은 진실로 오랑캐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병암집(炳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암 김준영 학문의 계승성과 독립성」(마진탁, 「간재학논총」제3집, 간재학회, 2000)

김준영(金駿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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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42(헌종 8)~1907(융희 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덕경(德卿)이고, 호는 병암(炳菴)이다. 아버지는 김상억(金相億),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찬(瓚)의 딸이다. 공주 현암(玄岩)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이 거의 성숙한 뒤에 간재 전우의 문인이 되었으며, 전우의 여러 제자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의 동문 오진영(吳震泳)은 그를 위해 쓴 「묘갈명」 서문에서 “스승 간재선생 문하에 재덕이 뛰어나고 독실하며 신중한 선비들은 나라가 기울어갈 때 현명한 자이든 우매한 자이든 그 재능에 따라 각기 자질이 더해졌다. 그 덕과 학문의 순수함을 구하고,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성인의 법도를 전하는 것을 보좌하는 후세의 학자 중 병암선생 김공을 넘을 수 있는 자는 없다”라고 썼다. 이는 김준영의 위상을 적절히 나타낸 말이다. 김준영의 학문이 전우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세가 극도로 곤궁하여 주경야독을 하였으나, 워낙 독실하게 공부하여 임헌회(任憲晦)·신응조(申應朝)·송병선(宋秉璿)·박운창(朴芸牕)·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인정을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3번씩이나 찾아가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

김준영은 전우를 추종하였으며, 전우는 그의 스승 전재 임헌회를 추종하였다. 전재의 학문은 매산 홍직필에서 나왔고, 매산 홍직필의 학문은 근재 박윤원에서 나왔고, 박윤원의 학문은 미호 김원행을 근원으로 하며, 김원행의 학문은 농암 김창협․삼연 김창흡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며, 김창협․김창흡의 학문은 우암 송시열을 종주로 하며, 송시열은 율곡 이이 제자의 제자이다. 따라서 김준영 성리학은 율곡과 기호학파에 가깝다. 김준영의 이기론(理氣論)과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설은 일치한다.

이기설(理氣說)과 예학(禮學)에 특히 주력하였으며, 이항로를 중심한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主理說)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한원진 계열의 학설을 비판하였으며, 반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전우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 사이에는 한국 성리학사에 있어서 유명한 ‘인물성동이’논쟁이 있었다.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 논쟁에서 외암은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동론(同論)을 주장하였고, 남당은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이론(異論)을 주장하였다.

논쟁의 결과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양파로 분열되었다. 김준영은 스승인 전우처럼 낙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김준영은 기질지성은 등급이 가지런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본연지성은 인간이나 사물, 성인이나 보통 사람이 모두 같다고 보았다. 만약 성인과 보통 사람의 본성이 다르게 설정된다면 그들은 덕을 이루어 성인이 되는 희망을 포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이 본래 다르다면 보통 사람들을 넘어 성인으로 들어가는 길이 없으며, 선비는 현자를 희구할 필요가 없고 현자는 성인을 희구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였다.

또한 정부의 개화정책과 천주교에 대하여 적극 반대하는 시국관을 갖는 학자였다. 저서로는⌈병암집(炳菴集)⌋이 전해진다.

병암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김준영의 시문집이다. 3권 3책으로 석인본이다. 1958년 김준영의 손자 김문호(金文鎬) 등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권두에 전우의 서문과 권말에 오진영(吳震泳)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서(書) 200편, 권2에는 잡저 43편, 권3에는 서(序) 24편, 기 40편, 발 15편, 명·찬(贊) 각 1편, 고축 8편, 제문 13편, 묘갈 5편, 행장 9편, 전(傳) 3편, 시 6수, 부록으로 행장·묘갈·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의 「여김판서(與金判書)」에는 이기설에 관한 그의 학문적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치중화(致中和)와 미발(未發)·이발(已發)을 설명함에 있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이·김창협·이간(李柬)·이재(李縡)의 설을 제시한 끝에

 

“내가 본 것과 믿는 것은 이밖에 다시 다른 설이 없다”

 

라고 하여,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모두 같다
(人物性俱同)’

는 낙론 학자들을 지지하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인물성에 대한 견해는 「답조경헌(答趙景憲)」 등에도 나타나 있다. 「답임자경(答林子敬)」에는 ‘의병에 참여하는 것이 옳으냐 산중에 숨어서 보발(保髮)하고 학문을 닦는 길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변한 내용이 있다. 이것은 당시 선비들의 현실 참여에 관한 논쟁에서 스승인 전우의 처지를 해명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밖에 예학(禮學)과 경의(經義)에 관한 문답이 많다.

잡저의 「유집변(柳集辨)」·「유집여기사김씨왕복서의의(柳集與其師金氏往復書疑義)」·「유집심설정안의의(柳集心說正案疑義)」·「독퇴계선생집(讀退溪先生集)」 등은 성리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항로를 중심으로 이른바 벽문학자(檗門學者)들의 주리설을 집중적으로 논박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간졸수임창계이설(看拙修林滄溪二說)」에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비판한 조성기와 임영의 학설을 논박하고, 이들의 학설을 은근히 인정한 김창협·김창흡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으며, 이들의 학설에 적극 찬성한 이항로와 기정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하였다. 「독송연재잡저(讀宋淵齋雜著)」에서는 천주교와 개화 정책에 반대하며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성리설에 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조선 말기 성리학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병암집(炳菴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암 김준영 학문의 계승성과 독립성」(마진탁, 「간재학논총」제3집, 간재학회, 2000)

 

김준업(金峻業)


김준업(金峻業)                                                             PDF Download

 

생몰년 미상. 인조(仁祖) 때의 사람이다.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여수(汝修). 호는 동계(東溪)이다. 전주 출신이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직제학 김영(金英)의 후손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분연히 항소하였다. 이것이 ‘인목대비 폐비 또는 인목대비 폐모’ 사건으로, 1618년 조선 조정에서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西宮)에 감금,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

1614년에는 일곱 명의 서자들이 강도가 되어 상인을 약탈하는 ‘칠서의 변’이 발생했는데, 이때 이이첨 일파는 사건을 확대시켜 이들이 김제남과 연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를 근거로 김제남은 처형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형 당한다. 그 뒤 역적의 딸이며 역적의 어머니인 인목왕후가 대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여론이 나오면서 1617년부터 인목대비의 폐비론이 나타나게 된다. 이후 경연과 정청에서 인목대비 폐비론의 가부를 논하게 된다. 이때 이이첨과 허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폐비 여론을 주도하였다.

1년간의 논의 끝에 인목왕후의 폐비가 결정되었다. 이때 곽재우, 정구, 송갑조, 이여빈, 이항복 등은 전은설을 주장하여 친모자는 아니지만 선조의 후비와 아들들이므로 친모, 친형제의 의와 다름이 없다며 인목대비 폐비 반대와 영창대군을 구명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또한 남인이었으나 친북인계 인사였던 이덕형 등도 폐비론에 반대하였다. 고산 윤선도와 미수 허목 등도 인목왕후 폐비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다가 과거 시험 응시자격을 박탈당한다. 같은 북인대북이었던 기자헌 역시 폐비론에 반대하다가 같은 북인의 공격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에 감금되었고, 인목왕후의 폐비에 저항한 서인 선비 송갑조는 비밀리에 서궁의 담을 넘어와 인목대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정죄당하게 된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항소(抗疏)하여 그 그릇됨을 극언하고 과거에는 응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유일(遺逸)로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24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고 난이 평정된 뒤에 남은 곡식을 모두 국가에 반납하였다. 고향 전주에서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교육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이괄의 난은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반란이다.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3년 음력 3월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반정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이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또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로 행재소(行在所)에 나갔고,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에 앞장섰다. 정묘호란은 조선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이며, 이로 말미암아 후금은 명나라와는 불가능하였던 교역의 타개책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최명룡(崔命龍)·김동준(金東準) 등과 강학하여 삼현(三賢)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보광사(葆光祠)에 배향되어 있다. ‘보광사’에는 동계 김준업 이외에 오무당(五無堂) 류정(柳頲), 이락당(二樂堂) 이지도(李至道), 연독재(聯牘齋) 이지성(李至誠), 모암(慕庵) 이언핍(李彦愊)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삼현’ 중의 하나인 최명룡(1567∼1621)은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윤(汝允), 호는 석계(石溪)이다. 이우기(李迂棋)의 문하에서 많은 서책을 섭렵하였다. 변산사(邊山寺)에 들어가 10여년을 밖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역학에 깊고 수학에도 정통하였다 한다.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렸으나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유작으로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국립중앙박물관소장)는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偏頗構圖)에 주제가 되는 신선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어서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浙派系)의 소경산수인물화풍(小景山水人物畫風)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동준(1573∼1661)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김동기(金東起). 자는 이식(而式), 호는 봉곡(鳳谷)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김구수(金龜壽)이고, 아버지는 생원 김희지(金熙止)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사건이 일어날 무렵 전주에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광해군의 처사에 부화뇌동하여 찬성하는 소를 올리려 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였다. 161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의 추천으로 의금부도사로 임명되고 감찰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고, 적군이 후퇴한 뒤 경기도 양성현감·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전주의 석계사(石溪祠)와 인봉사(麟峯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사계집(沙溪集)」,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조선호남지, 호남지, 전북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