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守義) – 정의롭게 행동하라


정의롭게 행동하라

 

어느 설문조사에서 돈 10억 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교도소에서 1년간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고등학생들의 응답이 2012년 44%에서 2015년 56%로 올랐다고 하여, 적잖은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이익이 크다면 불명예나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차지하고 싶은 현대사회 보통사람들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만약 이 경우 1년이 아니라 20년의 감옥생활을 제안했더라면 어떤 응답이 나올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응답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불이익이 더 크다면 대개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을 하게 된다. 이 이익을 달리 인간의 욕망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인 이상 누구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비록 그 욕망이 기본적인 욕구 수준일수도 있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과욕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인간도 동물적인 몸을 지닌 이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욕망의 추구는 생물적 인간 본성의 실현과 상당한 관련이 있고, 남을 해칠 정도로 과도하지 않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이런 욕망과 관련된 이익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義)를 내세웠는데, 보통 의리라고 부르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준칙이다. 의의 원초적 의미는 ‘일이 알맞고 마땅한 것’으로 오늘날 국가나 사회적으로 말하는 정의 개념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흔히 조직폭력배들이 말하는 그런 의리가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이득을 보거든 의에 맞는지 생각하라
(見得思義).”

고 말하였고, 맹자 또한

“오직 인(仁)과 의(義)만 있을 따름입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라고 하여, 의와 이익이 서로 상반되는 것임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더 나아가 송대의 성리학은 맹자의 이론을 계승하여 인(仁)·예(禮)·지(智)와 함께 의는 천리(天理)로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본성인 의리를 어떻게 잘 발휘할 것인지 고민하였다. 대신 이익은 인욕(人欲)이라 일컫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천리인 의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율곡 또한 기본적으로 이런 견해를 따랐다. 『학교모범』의 열두 번째 주제는 이런 의리를 지키라는 수의(守義)이다.

 

배우는 자에게는 의와 이익을 구분하는 일이 매우 시급한 일이다.

의란 그 자체 외에 무엇을 의도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것 외에 의도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이익을 도모하는 도둑의 무리이니,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선한 일을 하면서도 명예를 구하는 것 또한 이익을 도모하는 마음이니, 군자가 볼 때 이것은 남의 집 담장을 뚫어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하물며 나쁜 짓을 하면서까지 이익을 취하는 자이겠는가? 배우는 자는 한 터럭만큼의 이익을 위한 마음을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

 

선생 또한 이렇게 이익과 의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특히 나라의 정의 그 자체보다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속한 정당과 기득권을 지닌 부자들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며, 국민이 아닌 자신을 공천해준 권력자의 눈치만 보았던 작금의 우리나라 일부 정치가들은 도둑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또 현대의 정치가들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이러한 선생의 주장이 현실에 맞지 않는 말인가?

또한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과도 멀지 않는 일이며, 특히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고 추구하는 체제인데, 그것을 부정하고 오로지 의리만을 어떻게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생업을 가지고 이익을 추구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익을 멀리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선생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오늘날에 적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현대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렇다면 애초에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에게 이익과 의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 논리에 되돌아 가 보자.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다. 우선 의와 이익 가운데 무엇을 앞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우선순위가 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의를 취하면 모두에게 좋을 수 있지만, 이익을 앞세우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게 되어 사회가 더욱 혼란스럽게 된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이익의 본질이 그렇다고 날카롭게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의는 공유(共有)할 수 있지만, 이익은 공유하기가 쉽지 않고 되레 독점하기 쉽다. 이런 이익만 인간행위의 동력이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렇듯이 사회는 삭막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이익을 추구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군자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이익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익만 너무 앞세우면 사회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또 하나 이익과 의가 양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점은 지도자의 역할에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지도자는 만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거나 사사로이 이익을 챙기기보다 나라의 정의를 앞세워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유지되고 다스려진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우리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정의보다 사적 친구의 이익을 도와주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본인도 불행하고 나라의 정의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기업의 지도자인 최고 경영자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이 비록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이기는 하지만, 그 마저도 기업의 이익을 추구해야지 기업가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적인 이익은 기업의 이익 가운데서 극히 일부이고 그것마저도 정당하게 취해야 한다. 또 직장에서 부서장이나 기관장이 자신의 안위와 승진에만 신경 쓰고 조직의 발전에 힘쓰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우리들의 경험으로 봐서 그 조직이 절대로 잘될 리 없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아닌 일개 자연인으로서 사적인 이익 추구는 멀리해야 할 일일까?

 

선생은 앞에서

“배우는 자는 한 터럭만큼의 이익을 위한 마음을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

 

고 했는데, 오늘날 맞지 않는 말일까? 선생이 살았을 당시의 다수의 사대부들과 백성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별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더라도 땅이 내주는 대로 정직하게 먹고 만족하며 살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생산적 기반이 없는 소시민적 삶은 이익을 추구해야 생계를 잇고 노후생활을 보장할 수밖에 없으니, 절대로 이익을 멀리할 수 없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차이이다. 더구나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현대적 삶과 군자나 성인을 지향하는 전통의 유학에 비록 시대적 차이가 있음은 어쩔 수 없으나, 선생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사양하거나 받거나 취하거나 주는 것에서 마땅한지 부당한지 깊이 살피고, 이득을 보면 의에 맞는지 생각해보고 터럭만큼도 구차하거나 지나쳐서는 안 되다.”

 

는 주장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뇌물 수수나 부정청탁 등이 심하여 오죽하면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으로 그것을 막으려고 했겠는가? 정작 선생의 이런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지켰더라면 그 법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삶에서 이익추구를 부정할 수 없으나, 선생의 이런 가르침은 정의를 벗어나서 지나치게 부당한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