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심(存心) –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라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라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스스로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

하루 동안 아니 한 순간에도 가만있지 못하고 온갖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할 것이다. 심지어 잠잘 때 꿈속에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청소년기에 집중적으로 떠오르는 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당장의 학교공부, 상급학교 입시, 미래의 꿈, 가족사이의 갈등, 외모나 신체조건, 이성에 대한 그리움, 또래 친구들의 관심과 갈등, 연예인처럼 인기를 끄는 것 등 온갖 것들이 번갈아 가며 마음을 가득 채울 것이다. 성인의 경우라면 돈 모으고 버는 일, 투자, 은행대출과 빚, 직장일, 건강, 승진과 해고, 자녀의 교육, 부부나 가족 간의 갈등, 부부관계, 부모 모시기, 불확실한 미래, 직장동료와 갈등, 주택마련, 여행 등 온갖 일로 청소년들보다 다 많은 일들이 마음을 채울 것이다.

정말이지 이렇게 마음을 가득 채운 일은 사람을 즐겁게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게 힘들 때도 있다. 이렇게 여러 일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중심을 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굳이 모든 일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음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음을 바르게 하거나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교모범』의 다섯 번째 주제는 마음을 보존하라는 존심(存心)이다.

사실 마음에도 종류가 많은데 여기서 간직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 가운데 양심을 말할까? 잘 알다시피 마음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정심(正心)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존심은 이처럼 바르게 한 마음일까? 또 『서경』에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도 등장하는데, 인심은 육체의 욕구와 관련된 마음이고, 도심이란 일종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마음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 마음의 안의 일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서로 다른 마음일까? 그렇다면 선생이 간직해야 한다는 마음은 육체적 욕망과 관련된 것이 아닌 도덕적인 마음일까? 그것도 아니면 보존해야 할 특별한 마음을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선생의 말을 살펴보자.

 

다섯 번째는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자기 몸을 닦으려면 반드시 안으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그런 다음에 마음이 편안하여 온갖 나쁜 생각이 물러가고 참된 덕에 나아간다.

 

이 글만 보면 보존해야 할 마음이란 바르게 하여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바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처음부터 바른 마음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부터 바른 마음이었다면 바르게 할 이유가 없다. 그 마음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잘못된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바르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선생의 의도를 보면 사람의 마음에 처음부터 바른 마음과 바르지 못한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인데 바르게 될 수도 바르게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 것 같다. 만약 처음부터 바른 마음과 바르지 못한 마음이 있다고 여겼다면, 착한 마음을 잘 보존하라고 하면 되지 굳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할 것인가?

 

가령 한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선악의 조짐을 살펴서, 선하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의 원칙을 탐구하고, 악하면 그 싹을 잘라 버린다.

 

어떤 생각이 마음에 떠오를 때부터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구별하여 보존하거나 잘라내야 한다고 한다. 특히 선할 경우 그것을 가지고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의 원칙을 탐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어떻게 선한지 악한지 구별할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 여기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다. 유학에서는 그런 선악판단이 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여긴다.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능력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맹자(孟子)의 주장에 따르고 있다. 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옳고 그름을 따질 줄 안다. 비록 그 옳고 그름이 객관적이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것을 따질 줄은 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옳고 그름이 사람이나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살인이나 효도는 누가 보더라도 쉽게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지만, 가령 개고기를 먹는 일처럼 각자의 이익이나 문화를 놓고 갈등할 때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이처럼 나의 생각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나의 욕심과 관계되더라도 정당한 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은가? 또 나는 정당하게 생각해도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대학』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 곧 사물을 탐구하여 앎을 이루는 가르침을 두었고, 유학에서는 공부와 강학(講學)을 매우 중시하였다.

아무튼 마음을 보존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이렇게 바른 마음을 잘 간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그 방법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부터 선악을 살피여서 보존하거나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가? 더구나 청소년기에는 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다반사이이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고, 놀고 싶으면 놀려고 한다. 대부분의 성인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단지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돈이 없거나 그럴만한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이나 옛 성현들이 되지도 않을 괜한 헛소리를 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대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산다. 청소년의 경우 일반 성인보다 이런 욕망의 지배를 크게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이성적인 가르침이 잘 먹히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지나치게 추구하다보면 사회가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해당되는 사람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역사의 한 페이지만 넘겨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성현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해 대안을 제시하거나 가르침을 남긴 것은 이러한 인간 각자의 과도한 욕망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여 도덕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유학자들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엄숙을 강조한 고리타분한 인사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는 일은 과거만이 아니라 특히 복잡한 일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어서, 과도한 욕망과 그로 인한 부도덕한 행위나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생존전략이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성공의 지름길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비록 오늘날 도덕적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한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성공적인 고귀한 삶의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작은 대가라고 보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