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학(居學) –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라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라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지만 이 『학교모범』은 1582년(선조15) 율곡 선생이 왕의 명에 의하여 지은 책으로 당시 교육제도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청소년·청년 교육을 새롭게 하기 위한 여러 주장들이 들어 있다.

총1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그 순서에 따라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다만 내용상 유사한 독서와 독서의 방법의 항목만 통합하여 총15개의 주제로 소개했는데, 이 글이 마지막에 해당된다.

그런데 당시의 문화적 배경 그리고 교육과 학문의 목적 그리고 그 방법이 오늘날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그 시간적 틈새를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오늘날의 청년이나 청소년들에게 선생이 말하는 글의 요지를 오해 없이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몇 가지 주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그것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유학 그 가운데서도 성리학의 학문적 성격과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만족할 수준인지 모르겠다. 이제 쉽고 가벼운 주제로서 이 글을 맺으려고 한다.

학교모범』의 열다섯 번째 주제는 학교생활과 관련된 거학(居學)이다. 이것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우리 청소년들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선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여 짜여 진 시간표대로 공부하다가 집에 돌아온 다음, 학원에 가서 또 공부하다가 밤늦게 돌아와 자는 일이 요즘 다수 청소년들의 생활이다. 수업은 교사의 설명을 듣거나 문제를 풀기도 하고, 때로는 토론과 발표를 하며 필요에 따라 실습을 하거나 견학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다양한 교과를 학습하기 때문에 수업방식이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도 있지만, 대체로 해당 학교의 정해진 프로그램(교육과정)과 규칙(규정)에 따라 진행된다. 문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학입시 때문에 수업이 다양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입시위주의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전인적(全人的) 인격함양과 다양한 체험의 기회가 줄어들고,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력을 기르는 데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취업을 위한 입시준비 때문에 대학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본래의 교육목표에 충실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대학은 취업준비 학원의 역할이 더 강조된 ‘취업의 전당’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른바 학문의 전당이란 말은 겨우 대학원에나 진학한 학생들과 교수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이 살았을 그 당시 학교 사정을 어땠을까? 또 어떤 생활태도가 요구되었을까?

 

학교에 있을 때에는 배우는 자의 행동이 모두 한결같이 학교규칙을 따라야 한다.

글을 읽거나 글을 짓거나 식후에 잠깐 노닐며 산책하면서 정신을 한가롭고 여유롭게 만든다.

돌아와서는 하던 공부를 다시 익히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그렇게 한다.

 

이 부분은 학생의 개인생활에 관한 내용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교의 규칙을 지켜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또 이 내용을 보면 학교는 기숙학교이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의 학생들은 대부분 자기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는 향교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려면 기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향교나 성균관의 구조를 보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는데, 그것이 당시 학생들의 기숙사였다. 또 식사도 공동으로 하였는데, 성균관에는 지금도 ‘진사식당’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

개인적인 공부는 독서와 작문이었다. 독서의 교재는 대개 유교의 경전과 사서(史書)였고, 작문의 경우는 시와 문장을 짓는 일이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공부의 내용이 인문학에 국한되는 것이지만, 이 또한 대단한 독서량이 필요했다. 참고로 앞서 독서를 주제로 말할 때 소개했듯이 선생이 제안하는 독서의 순서는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근사록』·『논어』·『맹자』·『중용』에 이어 오경(五經)과 『사기』 등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유학과 역사에 관련된 책이다.

그 종류와 내용면에서 오늘날 학생들이 읽는 책과 꽤 거리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학이나 한국철학과 동양철학 또는 고전문학이나 중국문학 또 한국사나 중국역사를 전공한 대학생 이상은 아직도 이런 책을 한문으로 공부하고 있다. 결코 골동품 같은 책들이 아니다. 관심이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읽어두면 좋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처럼 공부 시간 틈틈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독서는 독서로서만 끝내서는 안 된다. 그 독서한 내용에 대한 사색이 필요하다. 그래서 산책을 하면서 그 내용을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을 텅 비게 하여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제 선생은 수업현장에서 여럿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한다.

 

여럿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강론(講論)으로 서로 성장하게 하고 예법에 맞는 몸가짐으로써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한다.

만약 선생으로서 스승이 학교에 있으면 읍(揖)을 행한 후 질문하여 편안히 앎을 보태되 마음을 비우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여 응용해 본다.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나 책에 대해서는 질문하여 심력(心力)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강론으로 서로 성장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듯하다. 이것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과 관계되는데, 가르치고 배우다보면 배우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게 된다는 뜻으로 서로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또 바른 자세와 예법에 맞는 몸가짐은 비록 예법은 조금 다를지라도 오늘날도 학교에서 강조하고 있다. 스승에게 읍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 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할 때 반장이 ‘선생님께 경례’하는 것과 유사한데, 손을 앞으로 모아들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는 옛날 식 인사이다.

여기서 인상 깊은 점은 질문을 하라는 내용이다. 요즘 학생들은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적 호기심이 없기 때문인데, 아마도 지나친 입시교육으로 이미 가공되고 만들어진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에 지친 탓인지 모르겠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어떤 문제를 고민해서 질문할수록 머릿속에 깊이 남고, 그 답을 찾아냈을 때의 희열 때문에 공부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 맛에 또 공부를 하게 되었다. 유명강사의 강의가 실제 큰 도움이 안 되는 이유는 너무 설명을 잘해준 탓에 들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학생이 스스로 고생하거나 노력해서 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한 후 듣는다면 효과가 크겠다.

끝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나 책은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유학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예컨대 불교나 노자나 장자 또는 기타 잡술에 관계된 책이며, 또 유학 안에서도 양명학(陽明學)처럼 성리학이 아닌 학문이 그것이다. 모두 이단(異端)이나 외도(外道)로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독서에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성장과 학습에 해로운 것은 피해야 한다.

이상은 비록 조선시대의 학교생활에서 지켜야 할 내용이지만, 우리가 참고할 것도 적지 않은 것은 중요한 교육적 원리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옛날사람의 지나간 말로만 여기지 말고, 옛것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발견한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독경(篤敬) – 자기 마음을 감독하라


자기 마음을 감독하라

 

보통의 어린이들은 세상 물정을 몰라서, 대개 행동의 준칙을 외부적인 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을 따라 행동한다.

그러다가 청소년이 되면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거나 거기에 반항하기도 하며, 자신이나 동료의 감정이나 생각에 충실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예인과 같은 우상으로 여기는 인물을 따라 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그 양상은 더 복잡하다. 어떤 경우는 그 행동의 준칙이 비록 부모나 교사의 가르침에서 종교나 철학 또는 특정한 어떤 사상의 그것으로 대체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그것을 추종한다는 의미에서는 그 기준이 외부에 있다. 이보다 한 단계 진전된 사람의 경우는 그런 사상이나 철학 또는 종교의 가르침을 내면화하여 마치 자신의 생각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자기행동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기준의 여전히 자기 외부의 종교나 사상에 있다. 또 드물게 어떤 이들은 자기 행위의 입법자와 심판관이 모두 자기 자신인 사람도 있다.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자율적으로 정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바로 이때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감독 또는 심판하는 정신의 기능 또는 역할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처럼 인간은 어렸을 때는 대개 부모나 교사를 공경(恭敬)하고, 자라면서 인류의 훌륭한 스승을 존경(尊敬)하며, 종교를 가짐으로써 경천(敬天)·경배(敬拜)하여 신을 섬기며 동시에 경건(敬虔)한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와 달리 앞서 말한 자기 자신이 자기 행위의 입법자요 심판자의 경우에는 무엇을 공경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떤 경건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윤리적·도덕적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중요한 질문이다. 유학은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많은 변모를 하였는데, 특히 송대의 성리학이 완성된 이후 앞서 말한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학의 세계관에서는 그리스도교와 같은 절대적인 인격신이 없으므로 자율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감독하거나 살피거나 유지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한 학문적 태도 또는 자세를 경(敬)이라 불렀다. 이렇듯 경이란 내 마음의 검찰이요 심판관과 같다. 당시의 유학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敬)이라는 글자를 대개 ‘공경(恭敬)하다’라고 풀이하는데, 그 뜻이 대체로 공손히 섬긴다는 의미여서, 철학적으로 변화된 의미를 다 담지 못한다. 경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낱말은 존경(尊敬)·경천(敬天)·경로(敬老)·경애(敬愛)·경배(敬拜) 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敬虔)·경외(敬畏)·외경(畏敬) 등의 엄숙하거나 삼간다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모범』의 열네 번째 주제는 바로 이 경(敬)을 돈독히 하라는 독경(篤敬)이다. 이 말은 앞장에서 말한 충(忠)이 포함된 충신(忠信)과 함께 『논어』에 ‘행동이 독경하다’는 ‘行篤敬’이라는 말에 등장하는데, 이 독경의 풀이를 놓고 여러 학자들의 다른 주장이 있다.

그 요지는 독(篤)과 경(敬)을 독립된 두 개의 술어로 보아 ‘행동이 중후하고 공경하다’로 볼 것인지, 아니면 독(篤)만을 술어로 보아 ‘행동이 경에 돈독하다’라고 볼 것인지 크게 구별된다. 율곡 선생은 ‘독경은 경에 돈독한 것[篤敬者, 敦篤於敬]’으로 풀이한 남송의 장식(張栻)의 견해를 따랐다. 선생이 이를 따른 데는 조선 유학사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 등이 경을 중시하여 논의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배우는 자들이 덕에 나아가고 학업을 닦는 일은 오로지 경을 돈독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경에 돈독하지 않으면[不篤於敬] 다만 이것은 빈말일 뿐이다.

그래서 속의 마음과 겉의 행동이 하나같아야 하고, 이 경을 돈독히 하는 자세에 조금도 멈추거나 끊어지는 틈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하는 것이 있고 밤에는 얻는 것이 있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도 보존되는 것이 있고 쉴 때에도 길러지는 것이 있게 된다.

비록 공부하는 노력을 오랫동안 하더라도 그 효과를 섣불리 보려고 하지 말고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힘쓰다가 죽은 뒤에라야 그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학문이다.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않고 단지 변설을 잘하고 박식함을 가지고 자신을 꾸미는 도구로 삼는 자는 유학을 해치는 도적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용문의 맨 앞 첫 문장은 조선 초 학자 김종직도 했던 말이다. 전체 내용을 보면 선생이 말한 경이란 단순히 외적인 대상만을 두려워하거나 공경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송대 이후 조선까지 이 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송대에는 경을 주일무적(主一無適) 곧 마음이 하나에 집중하여 다른 데로 옮겨감이 없는 상태로 해석했다.

그래서 공부태도에서 경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치를 찾을 것을 요구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주장했고, 행동하기 전이나 그 이후에도 틈이 없게 경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요구했다. 조선의 김굉필은 마음을 하나에만 집중시키는 것으로 풀이하였고, 조광조는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로 보았으며, 이언적(李彦迪)은 활동하거나 머물러 있거나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행동을 꿰뚫어 적용되는 마음의 상태를 일컬었으며, 특히 이황은 경을 그의 학문의 중심에 놓고 논의하였는데, 인간다움을 실천하려는 인간의 자율적 정신에 해당된다.

이런 맥락에서 율곡 선생의 경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이 경만 말하지 않고 『논어』에 있는 말을 끌어와 독(篤)이라는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더욱 강조하였다고 하겠다. 그래서 마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에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며 사람이 죽은 뒤에라야 경을 할 필요가 없느니, 경이란 마음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기를 감독하고 심판하는 마음의 고등기능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교(儒敎)는 신이 필요 없는 고등종교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유학자들이 불교는 물론이고 서양의 그리스도가 전파되었을 때도 그것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완벽한 도덕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재물을 구하기도 명예를 탐하기도 한다. 설령 선생의 주장처럼 살아온 선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조선이나 지금의 사회가 이상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모두가 이러한 경을 돈독히 함으로써 학문을 한다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않고 단지 변설을 잘하고 박식함을 가지고 자신을 꾸미는 도구로 삼는 자는 유학을 해치는 도적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한탄을 한 것 같다. 모든 철학이 그렇듯이 그 논리대로 모든 사람이 이상적 인격자가 되기 어렵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 한계는 모든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 수 없는 이유와 관계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대는 문화도 다양하고 종교도 다양하며 철학도 다양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문화나 철학 그리고 종교를 섬기고 따르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자율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거나 감독하는 또 다른 마음이 요청된다. 그것이 자신이 경외하는 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양심의 소리일수도 있으며 달리 초자아(super ego)나 참나[眞我]든 뭐가 되었든 간에 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렇다면 결국 제일 두렵고 조심해야할 상대는 타자가 아니라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다.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가?

상충(尙忠) –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라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라

 

옛날 선비들은 학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이 그것이다.

원래 이 구별은 『논어』에 등장하는데, 직역하면 전자는 자기를 위한 학문, 후자는 남을 위한 학문이다. 얼핏 보아 전자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학문이고 후자는 남을 위한 좋은 학문일거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 있겠다. 그러나 뜻은 정반대이다.

본래의 뜻은 전자는 쉽게 말해 참된 자기를 위한 학문 곧 자신의 인격이나 덕을 위한 학문이며, 후자는 남에게 인정받거나 보이기 위한 또는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런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한 사람이 어찌 남을 가르치는 일이 없겠냐마는 그러니까 공부하는 동기자체가 다르다 하겠다.

이렇게 학문의 동기나 목적에서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을 해석해 보면, 위기지학이 되는 동기는 자기 안에 있고, 위인지학의 그것은 자기 밖에서 온다. 가령 내가 왜 공부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좋은 성적을 얻어 부모에게 칭찬을 받고, 또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이웃과 친척들로부터 인정받고 부러움을 사며, 그 대학을 졸업하여 사람들이 선망하는 지위에 올라 명예를 얻고, 좋은 수입으로 행복하게 보이며 살려고 한다면, 그 동기는 분명 가족이나 친지 이웃 그리고 남의 시선이라는 외부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동기는 대개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외부의 인정이나 평판보다는 바람직한 자아실현이나 인격완성에 관심을 갖고 남이 보든 안 보든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 공부의 동기가 자기 안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성인(成人)이 되어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다.

비단 공부만이 아니라 직장일이나 사회생활에서 나의 행동의 동기가 이렇게 외부의 평판이나 시선에 있느냐 아니면 내부의 성실성이나 추구하는 가치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행위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특히 현대는 상업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능력도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되어 자기를 홍보해야만 제대로 대우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력서나 프로필 등을 통해 실제의 능력이나 경력을 과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남의 눈에 띄거나 실제보다 잘 보이게 꾸며서 제시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내면의 성실성이나 충실함을 배제하고 오로지 외적인 것만 숭상하다 보니, 꿋꿋한 원칙 없이 권력자나 부자 앞에서 한없이 비위를 맞추거나 비굴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반면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면 거만하고 야박하게 구는 풍토가 자리 잡게 된다.

바로 이런 전형적인 모습이 이른바 최근의 ‘최〇〇 국정농단 사건’에서 보이듯 최〇〇 앞이나 권력 실세에게 보여준 공무원들의 아첨하고 비굴한 행동과 또 일부 재벌회장이나 그 가족이 자신들의 돈만 믿고 보여준 인간 경멸과 모욕의 거만한 ‘갑질’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내면의 성실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과연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런 문제는 비단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논어』에서 두 종류의 학문을 제시하였고, 율곡 선생 또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등장하는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였다.

이 『학교모범』의 열세 번째 주제는 바로 이런 문제와 관련된 문제로서 충(忠)을 숭상하는 상충(尙忠)이다. 여기서 말하는 충이란 충실·성실하거나 참마음·정성·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럼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자.

 

충실한 마음과 꿋꿋한 절개는 서로 속과 겉이 된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는 절개가 없이 두루뭉술한 것을 충실한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근본적인 덕이 없이 과격한 것으로 꿋꿋한 절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선생은 충을 다루면서 그것을 내면적인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내면과 외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이것은 내면적인 덕과 외적인 행동의 문제로서 내용과 형식의 문제와 유사하다. 형식이 없으면 내용이 무질서하거나 애매하고 내용이 없으면 형식 또한 공허하기 때문이다. 곧 행동에 절개가 없으면 그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알 수 없으며, 덕이 없이 행동하는 절개는 조폭의 의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나 신념에 충실하거나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충이고, 그런 가치의 실현을 위해 외부의 유혹이나 협박 따위에 넘어가지 않는 꿋꿋한 행동이 절개 또는 지조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렇듯이 그 옛날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에도 이런 내면적 성실함이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선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명색이 학문을 한다는 선비들이 재주와 현명함을 핑계로 남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것은 그 피해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비들의 행동을 보면 내면이 충실하지 않다. 다시 말해 내적인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자신의 학식이나 인격이 완성될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이니, 지적되는 선비들은 아직 학식이나 인품이 보잘 것 없다고 하겠다. 그러니 내면이 성실하거나 충실할 수도 없고 그 때문에 꿋꿋한 절개는커녕 남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거만함만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충(忠)을 달리 충성(忠誠)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잘못 알고 사용하는 일이 더러 있다. 가령 맹목적으로 윗사람을 섬길 때 ‘충성을 다 바친다.’고 말하는데, 조폭의 부하가 두목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도 충성인가? 또 잘못된 지도자의 결정에 앞 다투어 따르는 것도 충성인가?

물론 지도자가 잘 할 때 따르는 것도 충성이지만, 잘못할 때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조언하는 것도 충성이다. 과거 선비들 가운데는 왕이 정치를 잘 할 때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된 길을 가면 목숨을 걸고 간(諫)하는 것도 충성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런 내면적 충성이 있었기에 목숨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 있는 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충성이다.

오늘날 옛날처럼 충성과 절개 또는 지조를 강조하지도 않고, 또 그런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면, 그만큼 중요한 가치도 별로 없다. 단지 우리가 충성이니 절개니 하는 말 따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내면의 성실함 그리고 그 성실함에서 우러나오는 일관된 행동을 소유한 사람이 어디나 없겠는가?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도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고, 시험의 답을 몰라서 고민할 때 누가 답안지를 보여줘도 커닝을 안 하는 학생들도 있다. 더구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벼슬자리마저도 사양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해 각자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가치를 실천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다. 그러나 한편 거액의 돈이 생기고 직장에서의 승진을 한다면, 아무 줏대 없이 비굴해지거나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그 돈의 액수가 크고 승진하려는 자리가 높을수록 그러해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사람들이 만약 고위직 공무원이거나 정치가라면, 나라는 그만큼 더 잘못되어 갈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된다.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어찌 중요하지 않은가?

수의(守義) – 정의롭게 행동하라


정의롭게 행동하라

 

어느 설문조사에서 돈 10억 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교도소에서 1년간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고등학생들의 응답이 2012년 44%에서 2015년 56%로 올랐다고 하여, 적잖은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이익이 크다면 불명예나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차지하고 싶은 현대사회 보통사람들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만약 이 경우 1년이 아니라 20년의 감옥생활을 제안했더라면 어떤 응답이 나올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응답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불이익이 더 크다면 대개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을 하게 된다. 이 이익을 달리 인간의 욕망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인 이상 누구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비록 그 욕망이 기본적인 욕구 수준일수도 있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과욕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인간도 동물적인 몸을 지닌 이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욕망의 추구는 생물적 인간 본성의 실현과 상당한 관련이 있고, 남을 해칠 정도로 과도하지 않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이런 욕망과 관련된 이익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義)를 내세웠는데, 보통 의리라고 부르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준칙이다. 의의 원초적 의미는 ‘일이 알맞고 마땅한 것’으로 오늘날 국가나 사회적으로 말하는 정의 개념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흔히 조직폭력배들이 말하는 그런 의리가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이득을 보거든 의에 맞는지 생각하라
(見得思義).”

고 말하였고, 맹자 또한

“오직 인(仁)과 의(義)만 있을 따름입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라고 하여, 의와 이익이 서로 상반되는 것임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더 나아가 송대의 성리학은 맹자의 이론을 계승하여 인(仁)·예(禮)·지(智)와 함께 의는 천리(天理)로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본성인 의리를 어떻게 잘 발휘할 것인지 고민하였다. 대신 이익은 인욕(人欲)이라 일컫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천리인 의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율곡 또한 기본적으로 이런 견해를 따랐다. 『학교모범』의 열두 번째 주제는 이런 의리를 지키라는 수의(守義)이다.

 

배우는 자에게는 의와 이익을 구분하는 일이 매우 시급한 일이다.

의란 그 자체 외에 무엇을 의도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것 외에 의도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이익을 도모하는 도둑의 무리이니,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선한 일을 하면서도 명예를 구하는 것 또한 이익을 도모하는 마음이니, 군자가 볼 때 이것은 남의 집 담장을 뚫어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하물며 나쁜 짓을 하면서까지 이익을 취하는 자이겠는가? 배우는 자는 한 터럭만큼의 이익을 위한 마음을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

 

선생 또한 이렇게 이익과 의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특히 나라의 정의 그 자체보다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속한 정당과 기득권을 지닌 부자들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며, 국민이 아닌 자신을 공천해준 권력자의 눈치만 보았던 작금의 우리나라 일부 정치가들은 도둑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또 현대의 정치가들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이러한 선생의 주장이 현실에 맞지 않는 말인가?

또한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과도 멀지 않는 일이며, 특히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고 추구하는 체제인데, 그것을 부정하고 오로지 의리만을 어떻게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생업을 가지고 이익을 추구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익을 멀리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선생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오늘날에 적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현대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렇다면 애초에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에게 이익과 의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 논리에 되돌아 가 보자.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다. 우선 의와 이익 가운데 무엇을 앞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우선순위가 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의를 취하면 모두에게 좋을 수 있지만, 이익을 앞세우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게 되어 사회가 더욱 혼란스럽게 된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이익의 본질이 그렇다고 날카롭게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의는 공유(共有)할 수 있지만, 이익은 공유하기가 쉽지 않고 되레 독점하기 쉽다. 이런 이익만 인간행위의 동력이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렇듯이 사회는 삭막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이익을 추구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군자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이익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익만 너무 앞세우면 사회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또 하나 이익과 의가 양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점은 지도자의 역할에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지도자는 만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거나 사사로이 이익을 챙기기보다 나라의 정의를 앞세워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유지되고 다스려진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우리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정의보다 사적 친구의 이익을 도와주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본인도 불행하고 나라의 정의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기업의 지도자인 최고 경영자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이 비록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이기는 하지만, 그 마저도 기업의 이익을 추구해야지 기업가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적인 이익은 기업의 이익 가운데서 극히 일부이고 그것마저도 정당하게 취해야 한다. 또 직장에서 부서장이나 기관장이 자신의 안위와 승진에만 신경 쓰고 조직의 발전에 힘쓰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우리들의 경험으로 봐서 그 조직이 절대로 잘될 리 없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아닌 일개 자연인으로서 사적인 이익 추구는 멀리해야 할 일일까?

 

선생은 앞에서

“배우는 자는 한 터럭만큼의 이익을 위한 마음을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

 

고 했는데, 오늘날 맞지 않는 말일까? 선생이 살았을 당시의 다수의 사대부들과 백성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별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더라도 땅이 내주는 대로 정직하게 먹고 만족하며 살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생산적 기반이 없는 소시민적 삶은 이익을 추구해야 생계를 잇고 노후생활을 보장할 수밖에 없으니, 절대로 이익을 멀리할 수 없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차이이다. 더구나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현대적 삶과 군자나 성인을 지향하는 전통의 유학에 비록 시대적 차이가 있음은 어쩔 수 없으나, 선생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사양하거나 받거나 취하거나 주는 것에서 마땅한지 부당한지 깊이 살피고, 이득을 보면 의에 맞는지 생각해보고 터럭만큼도 구차하거나 지나쳐서는 안 되다.”

 

는 주장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뇌물 수수나 부정청탁 등이 심하여 오죽하면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으로 그것을 막으려고 했겠는가? 정작 선생의 이런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지켰더라면 그 법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삶에서 이익추구를 부정할 수 없으나, 선생의 이런 가르침은 정의를 벗어나서 지나치게 부당한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응과(應科) –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 마라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 마라

 

공부의 목적은 무엇일까? 만약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좀 딱딱한 질문이 되겠다. 차라리 ‘공부를 왜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것 같다.

공부의 목적은 그 사람의 경험이나 지적 능력, 또는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말하겠지만, 청소년의 경우 대개 대학입시에 합격하기 위해서라거나 중간·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그럴까? 공부를 먼 미래의 자신의 삶과 연관시키기보다는 당장에 성적을 올려야 하는 현실의 중압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좀 어처구니없지만 초등학생들 가운데는 엄마가 공부하라니까 한다는 대답도 종종 있다.

이런 압박감이 덜할 경우 직업을 갖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좀 고상하게 말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러나 후자의 답은 잘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 진술처럼 그 꿈이 무엇인지 잘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되물어야 할 형식적 답에 불과하다. 또 어른들이 말하는 이런 형식적인 답 가운데는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사실 공부의 내용은 자신의 꿈이 무엇이냐에 따라 만족스러울 수도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누구나 거의 똑같은 교육과정을 밟아야 하고, 또 그것에 따라 입시에 통과해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 현실보다 이상에 가깝다면 입시위주의 공부에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입시공부란 당장의 해당 단계나 과정을 밟기 위해서 필요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그 각각의 단계가 쌓여 꿈을 향해 나아가게 되지만, 그 단계에 오르기 위한 입시자체로만 보면 이상적인 꿈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령 어떤 소년의 꿈이 율곡 선생처럼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면 실제 입시공부는 성인이 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비록 성인은 아니더라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점수 따기에 영악한 사람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그래서 입시공부와 좋은 인품을 기르는 공부가 서로 배치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입시공부가 인성을 함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믿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공부 잘 한다고 반드시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것은 아니라고 믿게 되는데, 그런 주장을 현실에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이른바 일류대학 출신의 고위 공직자의 비리나 범죄를 종종 접할 때면, 사람들이 보라는 듯이 공부 잘하는 놈들은 모두 이기적이라고 판단해 그 주범이 마치 지나친 입시교육인 것처럼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못난 사람의 범죄는 소수의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끼치지만, 잘난 사람의 범죄는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끼치므로, 공부 잘 했던 사람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이 크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입시위주의 공부가 훌륭한 인품을 기르는데 방해가 될까? 이런 고민은 오늘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모범』의 열한 번째 주제는 과거에 응시하는 문제인 응과(應科)로서 과거는 관리가 되는 시험이므로 오늘날 공무원 입시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선생은 성인이 되는 것을 공부의 목표로 삼으라고 했는데, 얼핏 보면 이런 과거시험과 성인이 되는 공부는 서로 배치되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선생의 견해가 어떠한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과거는 비록 뜻있는 선비가 골똘히 매달려야 할 일은 아니지만, 요즈음 벼슬하기 위해서 통용되는 규정이다.

만약 도학(道學)에 오로지 뜻을 두고 예의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선비라면, 과거를 숭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와 교화가 잘 되어서 나라의 성덕(盛德)이 빛나는 것을 보아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면, 또한 마땅히 성실한 마음으로 공부해야지 부질없이 세월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과거(科擧)의 득실 때문에 자신이 지키는 지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도학(道學)이란 쉽게 말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그런 공부를 제대로 한 선비라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초빙하는 것이 오래된 옛날의 전통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시험을 통해 뽑는다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선비에게는 과거는 숭상할 바가 못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가 잘 다스려져 정의롭다면 과거에 응시해야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성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과거공부 자체는 성인이 되는 공부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보통의 선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시험을 보지 말고 오로지 성인이 되고자 하는 도학에만 매달려야 하는가? 아니면 임금을 도와 백성들을 교화하고 잘 살게 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거시험에 매달려야 하는가?

 

만약 도학에 뜻을 두어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면 일상생활이 이치를 따르지 않음이 없으므로, 과거시험 또한 일상생활 가운데 한 가지 일이어서 실제의 공부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여기서 이상과 현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성인이 되는 공부인 도학이란 멀리 있는 고원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므로, 과거시험이 그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입시공부가 바른 인성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다만 그 전제 또는 조건은 공부하는 사람의 꿈이 도덕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이 되는 데 두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조건을 충족한다면 입시공부가 훌륭한 인격을 함양하는 데 방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평소에 착한 학생은 입시공부가 착한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 논리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도 당시 선비들 가운데는 과거시험 때문에 도학이 방해를 받는다고 여겨서 도학도 제대로 못하고 과거시험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한 가지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면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선생은 한탄하였다.

선생의 이런 논리는 오늘날 입시위주의 교육 때문에 인성을 제대로 함양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 나아가 공부만 잘한다고 해서 훌륭한 인품을 보장할 수 없다는 세인들의 생각과도 맞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이것은 공부의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선생의 논리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도학에 뜻을 두어 그 공부에 게으르지 않고 과거시험을 준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나, 오늘날 공부는 그런 훌륭한 인품을 기르는 것보다는 학부모나 학생이 인기 있는 직업을 갖는 것만으로 공부의 목표로 삼아서 오로지 입시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입시공부와 인격공부는 별개의 것이 되고, 학생들의 인간성이 잘못되는 것은 지나친 입시교육 때문이라는 평가는 어쩌면 당연하다.

아무튼 우리의 현실은 미래의 직업이나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도외시하고 훌륭한 인격함양만을 위한 공부에만 매진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격함양을 무시하고 입시공부에만 매달리는 것도 문제임은 분명하다. 양자를 조화시키려면 나름의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 뜻에서 율곡 선생이 제안하는 논리도 그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고 준수하는 습관과 태도를 기르는 일이 그것이다.

접인(接人) – 남을 올바르게 대하라


남을 올바르게 대하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남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로빈손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고, 우리나라도 이른바 ‘자연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도 있어서, 혹 누가 혼자 살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로빈손 크루소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살다가 훗날 사회에 복귀하였고, 자연인 또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통해 만들어 놓은 물건을 사용하기도 하고 가끔씩 산에서 내려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정해진 질서가 있다. 그 질서 가운데 강제적 규범으로는 법이 있고 자율적 규범으로는 윤리나 도덕 그리고 예법과 관습 등이 있다. 누가 자율적 규범을 어겼을 때 비록 법적인 구속력이 없더라도, 비난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청소년들 사이에도 나름의 질서를 세우는 규범이 있는데, 가령 선배와 후배의 구별, 또래 사이에서 잘 난 척 하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재학 시절에는 대개 같은 나이 많아야 한두 살 차이 나는 학생들과 생활하지만, 일단 사회에 나오면 여러 연령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나이가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또 조선시대라면 신분이나 덕(德) 또는 벼슬이 거기에 추가 되었다.

오늘날은 그런 신분은 철폐되었고, 벼슬 또한 하나의 직업으로서 직위 또는 지위 개념에 속한 문제라 같은 직장 안에 있는 구성원들에게는 사람을 대하는 나름의 기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는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에게는 거기에 알맞은 예우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다. 또 덕이 기준이 되는 경우는 이제 매우 드물다.

어쨌든 나이만은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사람을 대하는 강력한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나이든 노인에게 반말을 쓰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반면에 노인이 젊은 사람에게 반말을 써도 크게 흉이 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을 배울 때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높임말·예사말·낮춤말의 표현이라는 점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가 나이든 사람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면, 버릇없다거나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비속어로서 비난받기도 한다. 우리 속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안다.’라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의 부정적인 전통 가운데 하나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때문에 ‘나이가 무슨 벼슬이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이 『학교모범』 속에서도 나이에 따른 사람을 대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열 번째 주제로서 접인(接人)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이 나이에 따라 사람을 대우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 현대적 관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일인가? 일단 선생의 주장을 들어 보자.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예의를 준수해야 한다. 나이든 사람을 섬길 때는 동생처럼 대하되, 잠자는 것과 먹는 것과 걷는 것은 모두 나이든 사람보다 뒤에 해야 한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이면 형으로 섬기고, 두 배 이상이면 더욱 공손하게 대우한다.

 

일단 여기까지 보면 선생이 사람을 대우하는 기준이 확실히 나이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전제가 있다. 남을 대할 때 예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예의였고 선생의 주관적인 생각은 아니다. 이런 전통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다. 『예기』나 『논어』나 『맹자』 같은 고전을 보면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열 살 이상이면 형으로 섬겨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열 살 이내에는 친구로 사귈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격몽요결』 「접인」장에서는 다섯 살 이상이면 약간의 공경을 더한다고 하여 친구로 여기기는 좀 어색하다.

어쨌든 친구로 사귈 수 있는 대상은 나보다 다섯 살이 넘지 않는 상대이니, 나보다 어린 사람도 해당되므로 앞뒤 열 살 이내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또 『격몽요결』에서는 나보다 갑절이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더욱 공손하게 대우한다는 말이 그 뜻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회생활 가운데 굳이 나이로만 따지기에는 의미 없는 경우도 있다. 어린이나 친족 그리고 이웃 간의 생활원리 등이 그것이다. 나이가 종적인 규범의 기준 가운데 하나라면 횡적인 기준내지 원리도 필요하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어린이를 자애롭게 어루만지며 친족과 화목하고 이웃과 잘 지내서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어야 한다.

매양 덕이 있는 일을 서로 권장하고
[德業相勸],
허물이 있으면 서로 바로잡고
[過失相規],
관혼상제 예법의 풍속을 서로 이루어주며
[禮俗相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서로 도와서
[患難相恤],

남이나 상대를 돕고 이롭게 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남이나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마음에 가져서는 안 된다.

 

횡적인 기준은 어린이와 이웃사랑인데, 그것으로 남이나 상대를 잘 대우하라는 뜻이다. 특이한 것은 향약(鄕約)의 내용이 여기에 들어갔다는 점인데, 이것은 향촌사회의 자치규범이므로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약의 내용상으로 보면 나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나, 공동체가 와해된 오늘날 우리들의 도시적 삶에서 그 실행에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다만 어린이를 사랑하고 이웃과 잘 지내야 하는 점은 여전히 우리가 항상 지켜야 할 것들이다.

자,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나이가 과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나이든 사람을 공경했던 옛날에는 나름의 실용적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의 경험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고, 권력과 재산권을 가진 사람도 나이든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그런 규범이 중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면서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거나 창출하는 일은 대개 젊은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은 직장에서 내몰리거나 가족 내에서도 은근히 무시를 당하는 경향이 있다. 다행이 나이든 사람에게 많은 재산이나 권력이 있을 경우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 한다. 게다가 나이든 사람들이 사회에서 지탄받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어 젊은이들로부터 공경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나이만으로 공경 받는 시대는 이제 저물어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일부 뜻있는 노인들은 그 점을 알아차려 나이만으로 대접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은 제4차 산업혁명이 눈앞에 닥친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바로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그것이다. 당분간 기계 또는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대신할 수 없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은 단연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이 제시한 이웃사랑과 남이나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이런 태도는 이 시대에 새로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곧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을 상대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이런 태도 위에 구성한 인적 네트워크는 그 사람만의 자산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가정생활의 도리


가정생활의 도리

 

학교모범』의 아홉 번째 주제는 가정생활이다. 청소년들에게 가정생활을 말한다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요즘은 결혼조차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청년들이 늘어나서,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가정생활을 말한다는 게 지금보다는 어린 나이에 누구나 혼인했던 옛날과 다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어떻든 간에 누군가 혼인하는 사람은 계속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가정이 없어지기야 하겠는가? 어떤 공상소설이나 아나키스트의 주장처럼 아이가 생기면 국가에서 모두 길러주고, 부모는 육아나 교육 더 나아가 가정생활에서 자유롭게 해방되어 산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혹 먼 미래에는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가정이 소멸하기까지 하겠는가?

따라서 가정을 이루게 될 경우 가정생활의 도리를 미리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옛날에는 이렇게 가정생활의 도리를 미리 가르쳐서 부모나 부부의 도리를 다 하도록 했는데, 요즘 학교에서는 이런 것을 좀처럼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부부의 도리나 자식을 올바르게 양육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 부모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로인해 시행착오를 겪는 일은 어쩔 수 없고, 그 때문에 종종 나이든 부부 가운데 본인들이 젊었을 때의 자녀양육과 부부생활에 대해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어버려서 어쩔 수 가 없다.

필자도 솔직히 말하는데, 이런 가정생활의 도리를 미리 배워서 부모가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아이가 태어난 뒤였지만, 전통학문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하면서 자녀교육과 부부생활에 도움을 받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나이도 들고 경험도 쌓였기 때문에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을 보면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가령 전철을 타고 가거나 어떤 장소에서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 영어단어를 외게 하는 것을 가끔씩 볼 때가 있다. 못 외면 야단까지 쳐 가면서 말이다. 차라리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면 단어보다 말을 가르치는 게 훨씬 낫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굳이 과거 자기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의 영어 공부방식으로 단어를 외게 하는 것은 아이에게는 비교육적이다. 정작 아이는 단어가 문장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는데, 그걸 외게 하면 훗날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기성세대들이 과거 잘못 배운 영어교육이 아니던가?

또 이런 사례도 있다. 국회에서 인사청문회 하는 과정을 보면 해당 후보자 개인의 경우에는 큰 하자가 없다가도, 그의 부인의 잘못이나 자녀의 일로 곤욕을 당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또한 간접적으로 후보자가 평소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로서, 전통의 유교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서는 그 후보자의 부덕(不德)의 소치로 여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한 야당국회의원들의 집요한 지적은 국민들에게 일정하게 먹힌다고 봐야 한다.

자 그렇다면 율곡 선생은 가정생활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졌을까?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도움이 될까? 가정생활로 옮긴 원문은 거가(居家)이다.

 

가정생활에서는 도리를 다하여 형은 동생을 우애(友愛)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하여 한 몸 같이 하여야 한다.

남편은 온화(溫和)하고 아내는 유순(柔順: 부드럽게 따름)하여 예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바른 도리로써 자녀를 가르치되 지나친 애정으로 아이의 총명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아랫사람을 부리는 선생의 말은 더 있지만 생략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노비와 같은 하인이 없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먼저 가정의 관계를 보면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의 도리란 관계에서 나오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정 내에서도 관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먼저 형과 아우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도리가 형과 아우에 따라 조금 다르다. 형이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전통적으로 우애라 불렀고, 동생은 형을 공경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이런 도리는 형이나 동생 모두 지켜야 하는 문제이지, 한쪽이 지키지 않으면서 상대더러 지키게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아내에게 따뜻하고 화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부드럽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남편이 학문과 도리를 익혀 가정을 이끌어야 했지만, 오늘날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교육을 받아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기 때문에 모두가 상대에게 온화하게 해야 하고 누구를 따르기보다 서로 의논해서 일을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는 고금의 시대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다.

끝으로 자녀의 교육방식은 바른 도리로써 하되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녀의 총명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요즘 젊은 부부들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선생의 가르침이 될 것 같다. 어느 부모인들 바른 도리로 자녀를 가르치면서 사랑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랑이 지나치다보면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자녀의 잘못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듯 자식이 잘못했는데도 훈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요 되레 자식을 망치게 한다.

 

그래서 『명심보감』에도

“자녀를 사랑하면 회초리로 때리고, 자식을 미워하면 밥을 많이 주라.”

고 하였는데, 이 말은 자식을 사랑할수록 잘못이 있을 경우 훈계하라는 뜻이다.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이런 가르침을 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아마도 『학교모범』은 선조의 명에 따라 학교교육의 미비점을 올리는 글이기 때문에 요점만 간단히 진술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격몽요결』을 참고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이렇게 봤을 때 선생이 말하는 가정생활의 도리는 여전히 현대인의 삶에서 참고해야 할 요소가 있다. 비록 전근대적인 조선사회와 근대화된 오늘날의 시간적 간격에 따라 당시에는 마땅했지만 오늘날에는 불필요한 것이 있어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도 분명히 있다.

예컨대 형제 사이의 우애와 공경도 여전히 필요하다. 어릴 때에는 비교적 잘 지내다가도 성인이 되어 각자 독립된 가정을 이루면 우애와 공경이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놓고 서로 싸우고 왕래까지 끊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부부사이도 서로 공경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특히 나이든 남편의 경우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아내나 젊은 자식들로부터 지탄을 받거나 심지어 따돌림을 당하는 가장도 있다. 가족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므로 공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식의 교육이야 말로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광복 후 최근 몇 십 년 동안 대부분의 가정을 살펴보면 남편은 자녀의 교육을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과 달리 산업이 근대화되고 보니 직장일로 바빠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지만, 자녀의 교육을 아내에게만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내가 교육을 잘못시켜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바른 도리로써 자식을 가르치자면 자신도 바른 도리로써 사회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모범이 못되는 가장이 어찌 밖에 나가서 남에게 좋은 역할을 하겠는가?

아무튼 청소년들이 당장 가정을 갖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가정생활의 도리를 제대로 가르쳐야 개인은 물론 사회든 국가의 장래도 밝아질 것이다.

택우(擇友) – 친구를 잘 선택하라


친구를 잘 선택하라

 

당신에게는 친구가 몇 명이 있는가? 그 친구들이 당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직장이나 학교 또는 동창회나 동호회처럼 같은 모임에 나가기 때문에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그리고 사귀는 목적이 무엇인가? 친선도모나 공통의 취미나 취향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학교나 고향출신이라서 사귀는가?

이처럼 성인의 경우라면 대개 학교, 직장, 출신지역, 동호회, 사업, 종교 등을 매개로 친구를 사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학교나 출신지역으로 보자면 오래된 친구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경우는 서로 간 나름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사귄다. 사귀는 목적은 대개 친선이나 친교, 상부상조 등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학문이나 예술 또는 사회봉사나 종교적 실천의 동반자로서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들은 어떤 기준에서 사귈까? 상대의 외모, 집안 배경, 뛰어난 자질이나 능력 등도 한 몫 할 것이다. 예컨대 집안이 부유하여 돈을 잘 쓴다든지, 외모가 출중하여 남의 시선을 끌거나 탁월한 운동기능이나 예능이 있을 때 친구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상대가 마음이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아야 한다. 아무리 이런 조건을 갖추어도 마음이 옹졸하고 이기적이면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사실 그보다도 청소년들에게는 같이 놀아주는 상대가 친구가 되는 경우가 가장 훨씬 많다. 운동이나 취미활동 및 여행 등은 물론이고, 음주나 흡연처럼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조차도 함께하고 호응해야 친구가 된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잘못 사귀어 탈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2014년에 개봉했던 영화 ‘피 끊는 청춘’에서도 보이지만, 이른바 ‘일진’을 중심으로 친구들이 몰려다니고 패싸움 따위를 하기도 한다. 친구의 잘못을 말하기는커녕 같이 행동하고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는다. 비록 대등한 관계의 친구가 아닐지라도 같이 어울려 다닌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이종석(중길 역)과 박보영(영숙 역)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렇게 좋게 끝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당시는 어떠했을까? 율곡 선생이 권하는 친구사이는 어떠한가? 『학교모범』의 여덟 번째 주제는 택우(擇友) 곧 친구를 골라서 사귀는 일이다.

 

학문을 갈고 닦아 인(仁)을 돕는 일은 실로 친구로부터 힘을 얻는다.

 

선생의 이 말에는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들어 있다. 그 목적은 인(仁)을 돕는 곧 보인(輔仁)에 있다는 것이다. 보인이란 말은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인데,

“군자는 학문을 익히면서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니까 친구를 사귀는 목적은 친구들끼리 바른 도리를 서로 권하여 인덕(仁德: 어진 덕)을 쌓는 데 있다.

그런데 착한 덕을 쌓기 위해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요즘 청소년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친구를 사귀는 동기자체가 덕을 쌓는 것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거리가 있는가? 이것은 청소년들이 대체로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에, 육체적이고 감각적이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극적인 일에는 쉽게 반응하고 관심을 보이지만, 이성적인 덕이나 도덕은 좀처럼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수의 성인(成人)들도 그러할진대 청소년이나 그 이하의 어린이들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바로 여기서 윤리나 도덕에 관련된 교사나 교수 그리고 인성교육을 바라는 학부모들의 세심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 현대사회는 청소년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비도덕적인 유혹이 너무 많아서, 그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일단 이런 청소년들의 경향을 이해하고 인성교육이든 도덕교육이든 이들에게 먹힐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율곡의 이런 친구사귀는 목적이 자칫 현실에서 하나의 이상론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어떠할까?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충성과 신의, 효도와 우애가 있고, 강직하고 방정하며, 돈독한 사람을 가려 친구로 사귀어야 한다.

잘못이 있으면 서로 경계하고 선행(善行)을 함으로써 서로 충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함으로써 친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만약 마음먹은 것이 독실하지 못하고 자기 몸을 단속하는 일이 엄숙하지 못하여 경박하고 방탕하며 즐겁게 노는 것만 좋아하고 말 잘하는 것과 기운만 숭상하는 자는 모두 벗으로 사귀지 말아야 한다.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그러하듯, 사귀는 방법도 도덕적인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친구에게 잘못이 있을 때 충고할 수 있어야 한다. 『논어』에서는 충고하여 잘 인도해야 하는데 친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으며 그만 두라고 한다. 그러니 방탕하고 경박하고 덕이 되지 못하는 일을 숭상하는 사람이야 친구로 사귈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이 우리 조상들 특히 선비들의 친구 사귀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의 친구사귀는 것이 오늘날 통할까? 청소년은 물론이고 성인사회에 있어서도 상당이 난처해 보인다. 우선 같이 놀아야 친구가 된다. 오락실도 같이 가고 운동도 경우에 따라서는 탈선도 같이 해야 친구가 된다.

보통의 성인의 경우도 같이 노는 것은 물론이고 각자에게 이득이 되어야 친구로 두려고 한다. 사업이나 승진 또는 출세하거나 아니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심지어 남에게 자랑이라도 할 수 있는 지위나 명성을 지닌 사람을 친구로 두려고 하지, 내게 손만 벌리고 늘 도움만 받으려고만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친구로 사귀려 들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러한 도움 없이 그 사람의 인품만 훌륭하다고 해서 쉽사리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더욱이 그런 분이 가난하다면 더욱 멀리 할 것이다. 그나마 나은 경우라면 서로가 필요할 때 돕는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리가 적용되는 친구사이이다. 성인사회의 친구사귀는 동기는 실제로 도덕보다 이런 이익이 지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의 친구 사귀는 목적과 방식에 비추어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친구사귀는 목적이나 방식을 비난할 수 있을까? 혹 우리가 이익을 떠나서 살 수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목적은 서로의 이익을 포함하여 서로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며, 같은 목표를 실천하는 동지로서, 때로는 가족처럼 필요할 때 서로 돕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목적의 외연이 선생이 말하는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더 넓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도덕적 덕을 쌓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더라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떻든 아무나 함부로 친구를 사귀어서는 안 되겠다. 그 점은 예나지금이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

는 말이 있듯이 친구 때문에 내가 잘못될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에 유학을 따르던 옛날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사회나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이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오늘날 유학의 가르침도 수많은 가르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사(事師) – 스승을 잘 따르라


스승을 잘 따르라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스승의 날에 부르는 노랫말의 일부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은 정말로 노랫말처럼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지나가는 행사이나 아무 생각 없이 부를까? 그 답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사회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저 필요에 따라 인용하는 옛말일 뿐이고, 스승을 존경하기는커녕 비난하거나 대드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학교 급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심지어 ‘스승은 종업원 학생은 고객’이 되어, 스승은 고객의 진상에 쩔쩔매는 종업원의 신세로 전락한 느낌마저 든다. 이제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이나 정보를 파는 사람, 그 지식이나 정보가 하잘 것 없으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마는 처지에 놓였다. 고매한 인격과 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이런 현상이 개탄할 일이라고 목청 높여 말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는 지식과 정보가 일부 사대부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배우려면 그들은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보통의 지식과 정보를 가질 수 있으니 그런 지식을 소유했다고 해서 존경스러운 일도 아니리라. 더구나 돈 되는 지식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지 않겠는가?

게다가 스승이 얼마나 많은가? 학교나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강사, 교수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 가운데 혹 누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실제로 권력의 시녀가 되거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는 스승들도 있어서, 줄곧 스승의 권위가 점점 땅에 떨어지는 데 일조하였다. 참된 스승이 어딘들 없겠냐마는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을 점점 찾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학교모범일곱째 항목에서 율곡 선생이 스승을 섬기라는 사사(事師)가 그저 당시에만 통용되고 오늘날 불필요한 말일까? 게다가 율곡 선생은 맹목적으로 스승을 섬기라고만 했을까? 선생이 스승을 섬기라는 내용은 어떤 것일까?

 

배우는 자가 성심으로 도에 뜻을 두었다면 먼저 반드시 스승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 사람은 임금·스승·어버이 세 분 덕에 태어나고 가르침을 받고 길러지니, 하나같이 섬겨서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금·스승·어버이를 교육적 차원에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로 여겨 그 은혜가 같다고 여겼다. 옛날에는 이렇게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임금이 없으니 임금대신에 국가나 사회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거나 국가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니, 은혜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 당시와 지금의 시대적 문화 차이 때문에 선생의 이런 발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이 부모님이나 스승의 은혜, 그리고 국가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일이 있다면 매우 가상한 일이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 보살핌과 가르침을 자신의 권리라고 여겨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은 구체적으로 스승을 어떻게 섬기라고 했을까?

 

평상시에 모시고 받들 때 존경을 다하고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고 명심하여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한다.

스승의 언행에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조용히 질문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지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스승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또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스승의 말만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율곡 선생도 가르치는 스승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도 인간인 이상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이 있을 수 있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존경하고 가르침을 믿고 명심하라고 하였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사실 스승은 가르침을 위해 존재한다. 학생이 스승을 찾는 것은 배우기 위해서이다. 만약 배움을 주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하물며 배우는 학생이 사리가 분명한 성인(成人)도 아니고 청소년이라면, 더구나 그가 존경할 수 없고 심지어 비난받아야 할 스승으로 여긴다면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순자(荀子)도

“스승을 비난하면 스승이 없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학생이 스승을 존경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스승을 위해서라 아니라 배우는 학생자신을 위한 일이다. 스승을 잘 섬기는 것은 학생이 제대로 배우는 지름길이었다. 예컨대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닮으려고 한다. 옷차림은 물론 언행까지도 모방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승을 존경해야 스승의 가르침이 먹히기 때문이다.

그럼 스승의 잘못을 그냥 보고 넘어가자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단지 비난하지 말고 조용히 질문을 하라고 한다. 그 질문에 스승이 자신의 잘못을 알아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학생의 오해일 수도 있어 그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질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학생의 머릿속에는 스승의 잘못만 기억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해야 한다.

이렇게 율곡 선생의 스승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스승의 잘못에 대해 학생들끼리 수군거릴 뿐 아무도 질문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학생이 스승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한다고 싶으면 다짜고짜 항의부터 하려 드는데, 선생이 말한 이러한 정중한 질문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 아닐까? 물론 스승 된 자도 이런 질문에 솔직해야 하고 화를 내서도 안 된다.

아무튼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확인되지 않은 나쁜 소문이나 평판만 듣고 가르치는 사람을 평가한다든지, 때로는 작은 오해로 스승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 또한 제대로 배울 수 없는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사람 곧 스승이 된 사람은 항상 언행에 조심하고 학생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단지 직업으로 가르치는 일에만 종사하고 평소 자신의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교육적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스승의 권위가 조선시대만 못한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만약 어떤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보통의 가르치는 사람에게 없는 특별한 지식과 기능과 인품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제자를 골라 가르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없이 단지 도덕적 교훈 따위로 스승을 잘 섬기라고 해서 잘 섬기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인간은 대개 자기보다 특출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사친(事親) – 어버이를 잠 섬겨라


어버이를 잠 섬겨라

 

자식이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른 범죄가 종종 보도되고 있다. 부모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비록 패륜은 아니더라도 나이든 부모를 잘 모시지 않거나 심지어 홀로 방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생활형편이 어려워 모실 수 없는 경우도 있겠고, 무관심과 부부나 형제사이 의견의 불일치로 모시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홀로 사는 독거노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어느 지역에 홀로 사는 노인 가운데서 하루사이 세 건이나 고독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고독사한 노인들 가운데는 자식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죽어서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젠 남의 일이 아닌 듯이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돈 없는 부모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존재일 뿐일까? 아니면 함께 살 수 없는 피치 못할 어려운 여건 때문이었을까?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예전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 줄어든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효도를 해야 하며, 또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는가? 아니 효도랄 것도 없이 어떻게 하면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까?

학교모범』의 여섯 번째 주제는 어버이를 섬기는 사친(事親)이다. 옛 사람들의 효도의 이유와 방법을 알아보자.

효도는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에도 있을 정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덕목이지만, 특히 유학에서 강조해 왔다. 부모께 효도해야 하는 이유는 보통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으로서 도리이자 천리(天理)라고 가르쳐 왔다. 그래서 율곡 선생도 삼천 가지 죄목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다는 옛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다.

사실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조건적인 규범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유학은 인간이 되는 근거 가운데 하나를 효도에 둠으로써 그 실천의 당위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런 유교문화 때문에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효도가 잘 먹힌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은 아래와 같이 효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평소에 반드시 극진하게 공경하여 명을 받들어 따르는 예(禮)를 다하여야 한다.

봉양할 때는 즐겁게 하여 음식으로 받들며,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근심하며 치료해 드리고, 돌아가시면 슬퍼하며 상례를 치루며, 제사를 지낼 때는 엄숙하게 추모의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일단 공경(恭敬)을 먼저 말하고 이어서 봉양과 질병의 치료, 그리고 상례와 제례를 말하였다. 그러니까 살았을 때만 아니라 돌아가셨을 때도 효도가 필요하였다. 봉양만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공경해야 해야 한다는 점은 공자가 일찍이 강조한 일이기도 하다. 공경이란 쉽게 말해 공손히 섬기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봉양을 잘해도 공손히 모시지 못하면 진정한 효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은 종교에 따라 장례 방식도 차이가 있고 또 점차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런 분들을 불효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선생의 가르침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법으로 정한 일도 아니고 관습도 변하고 있으니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제사는커녕 살아있는 부모를 제대로 모시는 것만도 훌륭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 하는 효도의 방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겨울에는 따뜻하게 모시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며 아침에는 문안으로 살피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알리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뵙는 것까지도 모두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다.

부모에게 혹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정성을 다하여 은근히 말씀드려서 점차 도리로써 깨닫게 해야 한다.

자식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몸을 돌이켜 보아 바른 행동이 갖추어지게 하고 시종일관 덕을 온전히 하여,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고서야 능히 어버이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한부모의 자녀로서 오늘날 실천하는 데도 손색이 없다. 특히 부모에게 잘못이 있을 때 간(諫)하는 것이나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여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는 점은 오늘날 더욱 필요한 일이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이렇게 부모를 모셨으니 효도하는 본인 또한 훗날 그 자식으로부터 이렇게 효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효도는 어쩌면 상부상조하는 훌륭한 사회보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혼인을 못해서, 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직장 때문에, 또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해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또 사회적 분위기가 예전같이 않아 자신의 배우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효도를 제대로 할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혼인을 해도 자식을 낳을 생각도 안한다. 양육비와 교육비가 많이 드는 까닭도 있지만, 어차피 낳아서 길러봐야 효도를 받기는 글러서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도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아무리 효도를 강조하고 또 어떤 철학적·윤리적 근거를 가지고 효도를 주장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자식들은 늘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부모가 돈이 많이 드는 중병이나 치매 같은 난치병에 걸리면 모시기가 쉽지 않다. 병원 치료비도 문제지만, 직장일로 잘 보살필 수도 없다. 단지 효도하려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민으로서 제대로 모시려니 생활자체가 파탄에 이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보니 이제 자신도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든 자식이 더 나이든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럴 경우 모두 국가에서 해결해주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세태가 그러해도 여전히 효도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 가운데에는 가문의 전통과 관습이나 의무감 또는 도덕적 양심 때문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간혹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계산적이지 않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이 있고 싶고 잘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사랑하는 방법이 훌륭한지 졸렬한지 다를 뿐이다. 사랑하는 방법이 훌륭하다면 자식의 가슴속에 부모의 사랑이 전달될 것이지만, 그 방법이 졸렬하다면 반항심과 증오만 키울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데도 올바른 방법이 필요하며, 그 경우에 간혹 효도를 강조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알아서 효도하게 된다. 자식이 혼인한 이후의 그 배우자인 며느리와 사위도 자기 자식처럼 그렇게 사랑한다면 먼 훗날 그 며느리나 사위도 친부모처럼 사랑하지 않겠는가?

이치가 이러하나 요즈음 나이든 중년 이상의 부모들을 보면 아예 자녀의 효도 따위를 체념해 버리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일이나 고독사는 이제 피치 못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아니면 그게 싫어서 돈으로 면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인생의 끝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