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愼言) – 말조심하라


말조심하라

 

말을 잘못하여 낭패를 본 일이 있는가?

말실수나 험담을 하여 당사자와 얼굴을 보면서 직접 싸우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상대를 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과 무관한 터무니없는 글을 올려 상대방이나 특정인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거짓이나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 일이다. 그 때문에 종종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당하여 손해배상금을 물기도 한다. 정작 말하는 사람은 장난처럼 했으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정치인의 말실수는 치명적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성차별과 종교적 편견과 노인폄하와 관련된 발언, 또 특정 지역이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지지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정치인생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꼭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비속어나 상스런 말을 사용하여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상대방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정치인도 있고, 각종 집회에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향하여 온갖 과격하고 살벌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말은 그 사람의 거울이다.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품이 값싸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품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사이다’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인기를 얻기 위한 전략일까? 아무리 인기를 얻는 것도 좋지만 품위 없는 말을 막 써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그 옛날 율곡 선생이 살았을 때는 말조심을 어떻게 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은 어떤 것일까? 『학교모범』의 네 번째 주제는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신언(愼言)이다.

 

배우는 자가 선비의 행실을 조심하려면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사람의 잘못은 대부분 말 때문인데, 말은 반드시 충직하고 믿음직하게 해야 하고 승낙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말투를 정숙하게 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지 말며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야 한다. 단지 학문이나 도리에 유익한 말만 해야지 허황되거나 잡스럽거나 괴상하거나 신비한 말, 시정잡배들이 하는 상스런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가령 동료들과 잡담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현재의 정치를 함부로 논하거나 남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따위는 모두 공부에 방해되고 일을 해치는 것이니 일체 경계해야 한다.

 

말을 충직하게 하라는 것은 내면의 성실성을 담보해서 하라는 얘기다. 믿음직하게 하라는 것은 남이 신뢰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고, 승낙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은 당사자가 믿음직한지 판단한 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는 태도의 덕목은 충신(忠信)으로서, 보통 충성(忠誠)과 신의(信義)로 풀이하는데 정확하게 이해될지 미지수다. 사실 충과 신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해당되는 사람의 내적인 성실성이 없으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충성의 결과가 드러난 것이 신의라 하겠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윗사람을 잘 모시는 따위가 충성이 아니라, 어떤 바람직한 가치나 신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것이 충성이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성실성이 담보된 충직한 말은 그러한 신뢰를 가져온다. 그러니 믿음이 안 가는 말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특히 정치나 사업이나 종교나 교육현장 등에서 그러하다.

말투 또한 정숙하게 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지 말며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야 하며, 허황되거나 잡스럽거나 괴상하거나 신비한 말, 시정잡배들이 하는 상스런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로 봐서 학문적 엄숙주의가 선비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예법이나 도리를 중요시하여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원칙이 문화의 저변에서 통용되었다.

또 선생의 말에서 사람의 잘못은 대부분 말 때문이라는 주장에는 주의를 기울일 만 하다. 당시는 당쟁이 막 시작하던 때였고, 그래서 남의 말의 꼬투리를 잡아 상대를 비판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신중하게 말하는 태도가 중시되었다. 선생이 살았던 이전시대에 일어났던 사화(士禍)에 대한 역사적 경험도 물론 이런 말조심의 태도를 강화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조심을 하면서 농담 한마디도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누군가 매사에 이런 식이라면 그 사람은 뭔가 모르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따돌림 당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필요에 따라 농담을 할 줄도 알고 유머 감각도 있어야 한다. 특히 남의 윗사람이 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윗사람이 늘 원리원칙 대로 도덕적이고 엄숙한 말만 한다고 어떤 조직이나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까? 그것만이 아니다. 때로는 허황되고 괴상하거나 신기한 얘기도 할 줄 알아야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깐깐하면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없는 농담이나 유머가 필요할 때도 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개인적인 모임이나 친구사이 또는 가족 모임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경우에도 가능한 모임의 자리를 가려서 농도를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유머나 농담도 대상에 따라 수위를 달리해야 한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속한 말이나 상스런 말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공인(公人)들도 있다. 참으로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세대에 따라 다르게 통용되는 말이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도 많다. 더 나아가 성차별적 발언이나 장애인과 노인 비하,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나 세력을 불순한 집단이나 사람으로 딱지 붙이는 발언, 남을 비난하여 단순히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추종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한 발언, 출신지역의 편견이나 문화와 관련된 발언 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정치가나 종교인이나 교육자 그리고 인기연예인 등에겐 대단한 금물이다.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여 훗날 낭패를 보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특히 남의 주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고약한 말을 하여 비록 더러운 이름이라도 사람에게 알리려고 뻔뻔하게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기 이전에 애처롭기까지 하다. 인생을 꼭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측은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청소년들이 말의 절반 이상을 욕을 섞어 쓰는 경우 또한 훗날 그 습관으로 이런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무서운 일이다.

만약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투가 거칠든 저속하든 상소리를 잘하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단지 그 사람의 인품만 손상되고 주변 사람들을 다소 불편하게 할 뿐이다. 사실 살다보면 상소리나 저속한 표현이 꼭 어울리는 상황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평소에 말을 신중하고 조심하여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게 좋다. 자신의 말에 신뢰를 얻는다면 그 또한 보너스다. 게다가 때와 장소에 맞게 유머와 농담까지 섞어 쓴다면 금상첨화다. 이러니 말이란 하기 나름이고,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율곡 선생의 말을 때와 장소와 상대에 맞게 되씹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