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愼言) – 말조심하라


말조심하라

 

말을 잘못하여 낭패를 본 일이 있는가?

말실수나 험담을 하여 당사자와 얼굴을 보면서 직접 싸우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상대를 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과 무관한 터무니없는 글을 올려 상대방이나 특정인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거짓이나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 일이다. 그 때문에 종종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당하여 손해배상금을 물기도 한다. 정작 말하는 사람은 장난처럼 했으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정치인의 말실수는 치명적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성차별과 종교적 편견과 노인폄하와 관련된 발언, 또 특정 지역이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지지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정치인생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꼭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비속어나 상스런 말을 사용하여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상대방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정치인도 있고, 각종 집회에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향하여 온갖 과격하고 살벌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말은 그 사람의 거울이다.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품이 값싸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품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사이다’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인기를 얻기 위한 전략일까? 아무리 인기를 얻는 것도 좋지만 품위 없는 말을 막 써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그 옛날 율곡 선생이 살았을 때는 말조심을 어떻게 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은 어떤 것일까? 『학교모범』의 네 번째 주제는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신언(愼言)이다.

 

배우는 자가 선비의 행실을 조심하려면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사람의 잘못은 대부분 말 때문인데, 말은 반드시 충직하고 믿음직하게 해야 하고 승낙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말투를 정숙하게 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지 말며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야 한다. 단지 학문이나 도리에 유익한 말만 해야지 허황되거나 잡스럽거나 괴상하거나 신비한 말, 시정잡배들이 하는 상스런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가령 동료들과 잡담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현재의 정치를 함부로 논하거나 남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따위는 모두 공부에 방해되고 일을 해치는 것이니 일체 경계해야 한다.

 

말을 충직하게 하라는 것은 내면의 성실성을 담보해서 하라는 얘기다. 믿음직하게 하라는 것은 남이 신뢰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고, 승낙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은 당사자가 믿음직한지 판단한 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는 태도의 덕목은 충신(忠信)으로서, 보통 충성(忠誠)과 신의(信義)로 풀이하는데 정확하게 이해될지 미지수다. 사실 충과 신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해당되는 사람의 내적인 성실성이 없으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충성의 결과가 드러난 것이 신의라 하겠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윗사람을 잘 모시는 따위가 충성이 아니라, 어떤 바람직한 가치나 신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것이 충성이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성실성이 담보된 충직한 말은 그러한 신뢰를 가져온다. 그러니 믿음이 안 가는 말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특히 정치나 사업이나 종교나 교육현장 등에서 그러하다.

말투 또한 정숙하게 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지 말며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야 하며, 허황되거나 잡스럽거나 괴상하거나 신비한 말, 시정잡배들이 하는 상스런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로 봐서 학문적 엄숙주의가 선비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예법이나 도리를 중요시하여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원칙이 문화의 저변에서 통용되었다.

또 선생의 말에서 사람의 잘못은 대부분 말 때문이라는 주장에는 주의를 기울일 만 하다. 당시는 당쟁이 막 시작하던 때였고, 그래서 남의 말의 꼬투리를 잡아 상대를 비판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신중하게 말하는 태도가 중시되었다. 선생이 살았던 이전시대에 일어났던 사화(士禍)에 대한 역사적 경험도 물론 이런 말조심의 태도를 강화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조심을 하면서 농담 한마디도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누군가 매사에 이런 식이라면 그 사람은 뭔가 모르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따돌림 당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필요에 따라 농담을 할 줄도 알고 유머 감각도 있어야 한다. 특히 남의 윗사람이 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윗사람이 늘 원리원칙 대로 도덕적이고 엄숙한 말만 한다고 어떤 조직이나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까? 그것만이 아니다. 때로는 허황되고 괴상하거나 신기한 얘기도 할 줄 알아야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깐깐하면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없는 농담이나 유머가 필요할 때도 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개인적인 모임이나 친구사이 또는 가족 모임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경우에도 가능한 모임의 자리를 가려서 농도를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유머나 농담도 대상에 따라 수위를 달리해야 한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속한 말이나 상스런 말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공인(公人)들도 있다. 참으로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세대에 따라 다르게 통용되는 말이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도 많다. 더 나아가 성차별적 발언이나 장애인과 노인 비하,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나 세력을 불순한 집단이나 사람으로 딱지 붙이는 발언, 남을 비난하여 단순히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추종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한 발언, 출신지역의 편견이나 문화와 관련된 발언 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정치가나 종교인이나 교육자 그리고 인기연예인 등에겐 대단한 금물이다.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여 훗날 낭패를 보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특히 남의 주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고약한 말을 하여 비록 더러운 이름이라도 사람에게 알리려고 뻔뻔하게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기 이전에 애처롭기까지 하다. 인생을 꼭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측은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청소년들이 말의 절반 이상을 욕을 섞어 쓰는 경우 또한 훗날 그 습관으로 이런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무서운 일이다.

만약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투가 거칠든 저속하든 상소리를 잘하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단지 그 사람의 인품만 손상되고 주변 사람들을 다소 불편하게 할 뿐이다. 사실 살다보면 상소리나 저속한 표현이 꼭 어울리는 상황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평소에 말을 신중하고 조심하여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게 좋다. 자신의 말에 신뢰를 얻는다면 그 또한 보너스다. 게다가 때와 장소에 맞게 유머와 농담까지 섞어 쓴다면 금상첨화다. 이러니 말이란 하기 나름이고,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율곡 선생의 말을 때와 장소와 상대에 맞게 되씹어 보라.

독서(讀書) – 독서와 그 방법


독서와 그 방법

 

요즘 청소년들은 책을 얼마나 읽을까? 학생들의 독서 상황을 보면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부모의 권유나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그런 대로 책을 읽는 편이다. 그러나 정작 5학년만 되면 학원이나 과외 때문에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책 읽는 일이 드물다. 상급학교 입시를 위해 책을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펴내는 아동 대상 도서는 대개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을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불행한 일이다. 다행히도 일부 소수의 학생들만 상급학교 올라가도 계속해서 책을 읽고 또 독서토론에 참여하고 있어서, 큰 기대를 걸어본다.

 

명심보감』에 보면

‘독서는 가정을 일으키는 근본이다
(讀書起家之本).’

는 말이 있다. 그 말의 의미는 물론 그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글을 읽어 훗날 관리가 되어서 가정을 흥하게 하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먼저 본인이 바르게 되어 자손을 올바르게 양육하여서 훌륭한 가문을 만든다는 의미도 있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독서를 강조하는 것도 가까이는 입시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멀리는 자신의 교양과 인격을 함양하고 더 나아가 삶의 지혜를 얻어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가정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그래서 『학교모범』의 세 번째 주제는 독서이고 열여섯 번째 주제는 독서의 방법인데, 여기서 이 두 주제를 통합하여 살펴보겠다. 독서와 그 방법은 『격몽요결』과 중복되니 그 책을 참고하면 더 좋겠다(본 누리집의 “인성교육교재-『격몽요결』-초급편(하)-4.독서의 방법”을 참조바람).

먼저 독서의 목적은 의리(義理)를 밝히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리란 조직폭력배의 의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준칙이며, 옛사람들이 말하는 천리(天理)이다. 쉽게 말해 독서의 목적이 도덕적 실천을 위한 원리의 탐구이다. 독서의 목적을 이렇게 좁혀서 본 것은 율곡 선생이 종사한 학문이 성리학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성리학은 도덕적 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청소년들이 책을 읽는 목적에는 도덕적 사람이 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입시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또 하루가 멀다 하고 생산되는 각종 지식과 정보가 본인의 성장이나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꿈으로 여기는 직업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독서의 목적이 다르다고 해서 옛날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회나 학문이 지향하는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만 취하면 된다. 따라서 선생이 말한 의리를 밝히는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어려서 아직 경험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판단하려면 평소의 경험 못지않게 많은 독서량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리분별이 분명해져 실수와 손해를 줄여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독서가 당장에 써먹을 지식이나 실용적 목적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독서의 방법에 대해서 선생은 이렇게 권유한다.

 

글 속에 깊이 잠겨 자맥질 하면서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하기를 스스로 약속한다. 글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태도를 정숙하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마음과 뜻을 한 곳으로 모은다. 한 책을 숙독(熟讀)한 다음에 다른 책을 읽고, 이 책 저책 섭렵하는 것에 힘쓰지 말고 억지로 기억하는 것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

 

먼저 글 속에 푹 빠져서 반드시 이해하기를 힘쓰라고 한다. 이해되지 않은 글은 읽으나마나한 일이어서 독서의 흥미를 잃게 만들고 짜증나게 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수준에 맞거나 수준보다 약간 높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책을 굳이 읽으려면 함께 읽고 설명해주는 스승이 있어야 한다. 옛날의 유교 경전의 공부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

또 책을 읽을 때 태도나 주위가 정숙한 것이 좋고 단정히 앉아서 읽으면 마음과 의지를 한 곳으로 집중하기 쉽다. 그래서 조용한 도서관이나 독서실을 찾기도 하는데, 예전 청년들은 큰 시험을 앞두고 책 보따리 들고 절에 가서 책을 읽기도 했다. 그리고 자세가 나쁘면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바른 자세를 요구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한 책을 완전히 숙독할 때까지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숙독이란 무엇인가? 자세히 읽는 것을 말하는데, 요즘말로 거의 이해해서 읽는다는 뜻이다. 사실 학생들이 책을 읽다보면 백퍼센트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지적 수준이 저자의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책만 평생 읽을 수도 없다. 아무튼 그 이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읽은 사람의 수준에서 말하는 이해일 뿐이다.

그래서 같은 책도 성인이 된 뒤에 읽어보면 이해하는 깊이가 다르겠지만, 청소년들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면 좋겠다. 또 하나 선생이 제안하는 중요 포인트는 억지로 외려고 하지 말하는 점이다. 억지로 외면 힘들고 피곤하다. 만약에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전제한다면 이렇게 외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의 책 읽는 독특한 방법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공부든 삶의 문제든 질문이 있게 마련이다. 삶이나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질문이 없을 수 없다. 아무튼 질문이 있다면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으면 효과가 좋다. 책에서 답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더 읽게 된다.

또 선생이 제안하는 독서의 순서는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근사록』·『논어』·『맹자』·『중용』에 이어 오경(五經)과 『사기』 등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유학과 역사에 관련된 책이다. 그런데 오늘날 청소년들은 이렇게 읽을 수 없다. 아무튼 동서고금의 고전을 분야별로 선택하여 읽고, 현대인들이 쓴 책도 틈틈이 읽어야 하니, 옛날 사람보다 읽어야 할 게 더 많다는 게 또 하나의 불평이 될지 모르겠다.

끝으로 선생이 제안하는 것에는 당시의 학교에서 실시하는 일종의 독서토론이나 좌담회와 유사한 것이 있다. 그 방법은 매월 초하루나 보름에 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스승과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당자가 긁을 읽고 나면 뜻을 밝히거나 토론하면서 질문한다. 만약 의논할 일이 있으면 이런 강론(講論)을 통해 결정하고, 학생들이 의논할 일이 있으면 스승이 먼저 밖으로 나간 뒤에 한다.

그러나 언제나 글만 읽을 수는 없는 법, 틈틈이 여가를 즐겨야 한다. 사실이지 여가나 휴식은 독서나 공부의 능률을 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선생은 거문고 연주, 활쏘기 연습, 투호(投壺) 등을 적절하게 방해되지 않은 범위에서 하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 등과 같은 것은 공부에 방해되어 권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들은 머리를 많이 쓰거나 승부에 집착하여 독서에 방해가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청소년들도 노는 것에 너무 빠져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검신(檢身) –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학교모범』의 두 번째 주제는 몸가짐을 단속하는 검신(檢身)이다. 이 내용은 선생의 아동교육의 입문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지신장(持身章)의 내용과 중복되는 것이 많다.

그런데 현대의 청소년들에도 몸가짐이 중요한가? 기껏해야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는 일만 강조하지 않는가? 두발이나 복장이나 얼굴의 화장을 비롯하여 행동을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침해(?)로 간주하여 학생들의 자율적인 의사에 맡긴 듯하다.

학교 내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그런 느낌이 든다. 심지어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어린 남녀학생들이 백주대낮에 남이 보건말건 상관없이 포옹하고 심지어 입 맞추는 일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옛날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부끄럽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제 성인사회나 직장에서도 일의 능률을 높이고 업무에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복장이나 몸가짐을 자유롭게 하는 추세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옛 사람들이 말한 바른 몸가짐이란 게 케케묵고 시대에 맞지 않는 유교적 잔재라 여길 법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그 가운데 자칭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마저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다짜고짜 유교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가령 남녀차별은 물론이요, 잘못된 관습 심지어 한국축구가 세계수준에 못 미치는 것도 유교 탓이라는 연구도 있다. 어떤 지역 어떤 문명이든 나름의 폐단이 있다. 그 폐단의 원인을 모두 전적으로 그곳의 전통문화의 탓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 과거 서양인들이 아프리카의 노예를 사냥하여 팔아먹은 것이 그리스도교의 탓이 아니듯 어떤 폐단에는 분명히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다.

자, 어쨌든 백문불여일견이라 했으니 율곡 선생이 말한 바른 몸가짐이 어떤 것인지 보자.

 

평상시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고, 의관을 정제하며 용모를 장중하게 하고 보고 듣는 일을 단정하게 해야 한다.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걷거나 서 있을 때는 똑바르게 하고 음식은 절제해야 한다. 또 글씨는 조심해서 쓰고 책상주변을 정리정돈하며 집과 실내는 청결하게 해야 한다.

 

우선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는 일은 요즘 청소년들도 잘 하고 있다. 비록 대학입시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 배움에 좋다. 또 책상주변을 정리정돈하고 집과 실내를 청결하게 하는 것도 지당한 말씀이다. 문제라면 입시공부를 위해서 부모가 집안청소를 안 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적어도 자기방 청소는 본인이 해야 좋다. 윤리·도덕적 문제에 앞서 청소를 자주 하다보면 일하는 요령도 생기고 깨닫는 것도 있게 된다.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또 걷거나 서 있을 때 똑바르게 하는 것도 굳이 패션모델의 워킹을 배우지 않더라도 건강이나 바른 자세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된다. 필자 또한 젊었을 때 어릴 때의 습관 탓으로 팔자걸음을 걸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단히 노력하여 이제는 똑바로 걷게 되었다. 더구나 음식 절제는 오늘날 딱 어울리는 말이다. 율곡 선생이 신통력이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탐욕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겠지만, 오늘날은 음식물 과다섭취 때문에 생기는 비만이나 그에 따른 성인병 예방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글씨를 조심해서 쓰라는 것은 당시는 연필이나 볼펜 또는 글자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먹물을 찍어 붓으로 써야 했으니 얼마나 조심성이 필요했겠는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단정하게 앉아서 집중해서 보고 듣는 것이 학습효과에 좋다. 또 거처할 때 곧 일상생활 속에서는 공손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보편적으로 통한다. 남에게 좋은 인상과 태도를 보여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살아가면서 남으로부터 배울 때도 크게 도움이 된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고전과 종교적 경전 내용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를 말하라면 필자는 겸손 또는 공손이라고 본다. 왜 이것을 강조했을까? 대부분의 고전이나 경전의 저자들이 나이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겸손하거나 공손하지 않으면 남으로부터 배울 수 없어 자기발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손하지 않는 자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도 않지만, 정작 본인이 존경 또는 공경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제대로 배우겠는가? 특히 한창 배우는 청소년들에게 공손이 필요한 것임은 두말한 필요가 없겠다.

그렇다면 의관을 정제하라는 주장은 어떠한가?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관정제란 복장을 단정하게 하는 일이다. 대체로 교복은 물론이요 평상복도 단정하게 입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 가운데서 헤어스타일이 특별하고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 입는 모습을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 사복을 입으면 성인과 구별이 안 될 때도 있다. 사실이지 필자가 청소년 시절에도 이와 유사했다. 그 때도 교복을 입었고 남학생들은 모자를 썼다. 게다가 학교규칙도 엄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규칙을 비웃듯이 모자를 짓이겨 쓰거나 단추를 풀어 헤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서 연예인의 흉내를 내는 학생들이 당시에도 있었다. 대개는 한 때의 반항심이나 호기심 또는 치기어린 마음에서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불량배들도 섞여 있었다. 케이블 티비 덕문에 옛날 영화 속의 그런 장면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이렇듯 청소년들의 복장이 성인의 시각에서 삐딱하게 보이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젊은 연예인을 닮고 싶어서 모방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아니 청소년 자신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스스로 그렇다고 여길 테지만, 이 시기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성인이나 학교의 입장에서 막는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필자 또한 단지 단정하게 입으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단정하게 입어야 할 논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청소년들에게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용모를 장중하게 하라는 주장이다. 장중으로 옮긴 한자 원문은 장(莊)이다. 이 한자가 지닌 뜻은 상당히 넓다.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뜻에는

씩씩하다,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단정하다, 바르다, 엄격하다, 장중하다, 정중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옮긴이가 ‘장중하다’

라는 말만 편의상 대표로 삼았는데, 이렇게 뜻이 넓다. 하나하나 살펴보아도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말들이다. 다만 시대적 간극을 고려한다면 이것 외에 상냥하다, 친절하다 등이 포함되면 더 좋겠다. 왜냐 하면 인간의 행동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형편 또는 자신의 내적인 감정에 따라 제각기 적절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곡 선생이 말한 몸가짐을 현대적 상황에서 분석해 보았다. 그때와 지금의 시대적 차이가 꽤 있으나 오늘날 도덕적으로나 실용적인 면에서 볼 때도 대체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다만 그 대상이 자아가 완전히 확립되지 못한 미성숙한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성인의 입장에서는 그 적용에 아량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지 못한 구용(九容: 원래 『예기』에 나오는 9가지 용모) 등은 『격몽요결』에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본 누리집의 “인성교육교재-『격몽요결』-초급편(하)-3.아홉가지 생각”을 참조바람). 그러나 몸가짐의 주체가 성인이라면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