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상(吳允常:1746년∼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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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사집(士執), 호는 영재(寧齋)이다. 대제학(大提學) 판서(判書) 순암(醇庵) 오재순(吳載純)의 맏아들로, 김원행(金元行)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웠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특히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올린 서간문을 통해서 그의 성품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 그의 아버지가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아들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간문이 남아 있어서 참고가 된다.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아버지에게 집안이 평안하니, 남은 여정도 무사하시라는 문안의 편지이다. 이 편지글에서 먼 길을 갔다가 돌아오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집안 소식을 전하며 아버지의 걱정을 살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차기(箚記)하였다. 호남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이는 오윤상이라며, 동문 박윤원(朴胤源)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를 기록하고 있다.
박윤원이 오윤상에게,

“윤상이여, 공자(孔子)께서 ‘위편삼절(韋編三絶)’했다고 하는데 대단하지 않은가?”

하자, 그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성인도 반드시 나처럼 많이 읽지는 않았을 걸세! 공자께서 ‘위편삼절’했다지만 익숙하게 읽었다는 것일 뿐, 1만 번씩 읽지는 않았을 걸세! 성인은 지나치거나 모자란 일이 없으니[過猶不及], 책을 읽는 횟수도 중도(中道)에 맞았으리라!”

하였다.

실제로 그는 《상서(尙書)》는 2만 번,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은 1만 번을 읽었다고 한다. 학문에 뛰어나 두 아우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였고 여러 경전(經傳) 중에서는 《논어(論語)》를 제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 《중용차기(中庸箚記)》와 《대학차기(大學箚記)》가 있다. 37세에 요절하였다.

그의 아내도 성품이 남달라서 성년이 되기 전부터 모두들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칭찬하였다. 금슬(琴瑟)이 서로 좋았던 남편이 죽자, 그의 아내는 성복(成服)을 마치고 물 한 모금 미음 한술도 먹지 않다가 죽었다.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아내의 이야기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문집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오윤상이 죽자, 유인은 애통해함이 도를 넘지 않았으며 염하고 입관할 때 쓰는 수의와 이불을 손수 재봉하니, 집안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가 따라 죽을 뜻이 초혼(招魂)하던 날에 이미 굳어져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성복(成服)을 하자마자 시부모에게 청하여, 처소를 밀실로 옮기고 이로부터는 이불을 쓰고 누워 다시는 하늘의 해를 보려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과 말도 하지 않고 물 한 모금 미음 한 술도 입에 넣지 않았다. 시부모가 울며 거듭거듭 타이르면 마지못해 슬픈 빛을 거두고 몇 모금 마시고는 곧바로 생강탕을 복용하여 위장의 작용을 제거하니, 날이 갈수록 목숨이 꺼져 갔다. 주위 사람들이 비록 그가 창졸간에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목숨이 사그라지는 것은 누가 지키고 막는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댁 쪽의 한 부인이 마음 돌리기를 바라고 달래며 말하기를,

“시부모님은 이미 늙으셨네. 자네가 따라 죽는 것도 옳은 일이나 남편의 평소 효성을 어찌 생각하지 않는가? 죽은 사람의 마음을 거듭 슬프게 하지 말게.”

하니, 유인이 울며 이르기를,

“내 어찌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리오마는 동서 두 사람이 있으니 봉양을 맡길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시집올 때의 의상을 꺼내어 세탁하고 새로 꿰매어 수의를 갖추게 하고는, 마침내 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리고 집안사람에게 두루 영결을 고하고 얼굴 씻고 머리 빗기를 겨우 마치더니 마치 기름 다한 등잔이 꺼지듯 목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탄식하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열녀로다, 이 사람이여! 기어코 죽었구나.”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에 <김유인(金孺人) 사장(事狀)>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 《근재집(近齋集)》
– 《연암집(燕巖集)》
– 《매산집(梅山集)》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청성잡기(靑城雜記)》
– 오윤상 간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의철-2(李宜哲:1703~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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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명(原明), 호는 문암(文菴)이다. 1727년(영조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長陵參奉)과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등을 지내고, 1748년(영조24)에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에 검열(檢閱)이 되었다. 1752년(영조28)에 정언(正言)이 되어 언로확대(言路擴大)를 주장하는 한편, 이종성(李宗城)이 영의정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대정(大靜)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에 곧 풀려났다. 1769년(영조45)에 영조는 홍봉한(洪鳳漢)에게 이르기를,

“이의철은 고서(古書)를 많이 읽은 데다 성격 또한 침착하고 깔끔한데 너무 오랫동안 침체시켜두었다.”

라고 말하고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하였다.

그 해에 전라도 광주(光州)의 유생 유적(柳迪)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朴世采)의 문묘 종향(文廟從享)을 출방(黜放)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그 소장을 가져오게 하고는 유적은 영구히 청금안(靑衿案)에서 지워버리고, 삼수부(三水府)의 백성들로 하여금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게 하였으며, 소하(疏下)의 사람들은 아울러 청금안에 부첨(付籤)하고 방축(放逐)하여 서민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호남(湖南)의 유생으로 무릇 관학(館學)과 경성(京城)에 있는 자들도 또한 모두 방축하게 하였다. 당시 대사성이었던 이의철은 이 유생들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1775년(영조51)에 다시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이 때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의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을 짓기 위하여 찬집청(撰集廳)을 세웠는데, 이때 채제공(蔡濟恭) 등과 함께 당상(堂上)이 되어 이를 주관하였다. 그 뒤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실록》에 수록된 그와 관련된 기사를 좀 더 살펴보면, 영조가 친히 의주(儀註)를 지어 예조(禮曹)에 내리고서 승지 윤광의(尹光毅)에게

“조사(朝士)로서 파직되어 가난한 자도 마땅히 구휼하여야 할 것인데, 마땅히 스스로 와서 받겠는가?”

라는 묻자, 윤광의는 임금이 내리는 것인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 한림(翰林)이었던 이의철(李宜哲)은 단호하게

“옳지 않습니다. 임금이 내리시는 것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신하의 염의(廉義)도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어찌 조사(朝士)로서 쌀자루를 가지고 민오(民伍)의 사이에 끼어서 구차스럽고 천한 지경을 밟겠습니까?”

라고 하여 반대의견을 제시하자, 결국 영조는,

“좋다. 내가 이로 인하여 조사를 욕되게 할까 두렵다.”

라고 하면서 한발 물러섰고, 이어서

“영갑(令甲)을 밝혀 전의 조관(朝官)은 종들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영조실록》 25년조의 기사에 보인다.

그리고 그가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그는 언로의 개방을 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옛 법에는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면 형벌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신하가 말을 하면 죄를 면하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근년 이래로 조정에서는 기상이 수축(愁縮)되고 언의(言議)가 쓸쓸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좌우 근친(近親)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아부나 하고 뜻만 맞추면서 명위(名位)를 훔치고, 임금의 잘못을 잠자코 바라만 보면서 바로잡으려 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깊은 궁중에 고립되어 숱한 사람의 말을 도외시하고 국사를 홀로 운영하시니, 무릇 자신을 부지런히 하여 다스리는 것이 모두 허문(虛文)으로 돌아가고 볼 만한 실효(實效)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지난날 외람되게도 사직(史職)에서 청광(淸光)을 가까이 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가 보았더니 전하께서 단정한 선비의 곧은 말을 즐거워하지 아니하시고 소인들의 아부하는 말을 편안히 여기시는 것이 가장 절실한 큰 병통이었습니다. 신이 전하께서 스스로 힘쓰시기를 바라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였거니와 이와 같이 거침없이 임금의 과오를 지적하여 말한 것 때문에 영조를 자극한 것이 되어 결국 대정(大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1752년(영조28)조의 기록이다. 당시 동료였던 정언 황인검(黃仁儉)이 역시 그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체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뿐만이 아니고 예학(禮學)에도 힘쓰기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 그 기록은 역시 다음과 같다.

“신이 전후에 재직(在職)하고부터 이미 넉 달이 지났으나 강연(講筵)을 연 횟수는 겨우 한 번의 강연과 네 번의 소대(召對)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비록 예후(睿候)가 편찮으심으로 말미암아 점차 이렇게 되기는 하였으나, 뜻이 가는 곳에 기(氣)가 반드시 가니, 진실로 저하(邸下)께서 학문에 뜻을 도타이 하시면 잗단 병환이 공부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글을 읽는 공(功)은 중간에 끊기는 것을 가장 꺼리거니와, 이제 하루에 열 줄을 읽어 열흘을 쌓으면 1백 줄을 다할 수 있고 누적하여 함영(涵泳)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사리가 익숙해질 것인데, 이제 저하께서 글을 읽는 법은 중간에 끊기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고 또 뒤미처 채우는 것도 없습니다.

뭇 신하가 간언(諫言)을 아뢰면 문득 유념하겠다고 말씀하시나 끝내 유념하시는 실속을 보지 못하니, 도리어 유념하겠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잘못으로 인하여 그 경계를 받아들이시는 것만 못합니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따르고 고치지 않는다.’는 것이 혹 이것에 가까울 듯합니다.
혹 병환이 있어서 강연에 나아갈 수 없다면 궁관(宮官)을 침소에 불러들여 조용히 강론하시는 것이 또한 늘 학문에 종사하는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날마다 부지런하여 예학(睿學)을 새롭게 하기에 힘쓰소서.”

 

이는 1753년(영조29)조의 기록인데, 이 상소에 대하여

“아뢴 바가 절실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비답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문암집(文菴集)》, 《사서강의(四書講義)》, 《의례훈의(儀禮訓義)》, 《주례요의(周禮要義)》, 《춘추정의(春秋精義)》, 《역전정설(易傳精說)》, 《주자전요(朱子典要)》, 《주서차의후어(朱書箚疑後語)》, 《한림비사(翰林秘史)》, 《백두산기(白頭山記)》 등이 있다.

그 중에 《백두산기》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백두산(白頭山)에서는 화산 폭발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고 하니, 백두산 등정에 선뜻 나서기가 용이치 않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부터 차츰 백두산 유람에 나섰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의철(李宜哲) 이외에도 김진상(金鎭商), 박종(朴琮), 홍계희(洪啟禧) 등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양반들 산행에는 여러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신분제사회이고보니 백성들에게는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의철은 산행하기 며칠 전부터 100여명을 보내 산길을 닦고 숙소를 마련한 다음, 포수와 장교를 포함하여 40명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던 것이다. 그가 이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당시 형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탓에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했던 일을 솔직하게 반성하고서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이 다음에 산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고자 하여 이 《백두산기》를 남긴 것이다.

“백두산에 들어갈 때 길을 안내하는 백성 20여 명 정도를 선발하여 3일 전에 먼저 보내면 임시 숙소와 길을 닦는 것 등은 충분히 해결된다. 그런데 처음에 산 속의 형편을 알지 못하였던 까닭에 백성을 지나치게 많이 동원하였다. 다음에 유람하는 자들은 마땅히 삼가길 바란다.”

이와 같이 실제로 체험한 것을 진솔하게 적은 것만큼 설득력을 얻는 글은 없다. 그리고 비록 산행을 다녀와서 그 경험을 적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특히 이 글이 전문은 아니지만 이 짧은 글을 통해서 그가 당시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그는 강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바른 말을 서슴없이 하는 신하, 백성들의 애환을 어느 정도 어루만져 살필 줄 아는 관리로 인상 깊게 기억될 수 있을 것만 같아 다행이다.

<참고 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중회(趙重晦:1711~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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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字)는 익장(益章), 호는 독락재(獨樂齋),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다. 조선 전기 생육신(生六臣)인 조려(趙旅)의 10세손이며, 유수공 영복(榮福)의 아들이다. 일찍이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1736년(영조12)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제수받았으며, 1739년(영조15)에는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743년(영조19)에는 정언(正言)정언(正言): 간쟁(諫爭)을 맡았으며, 다른 관원들과 함께 간관(諫官), 언관(言官) 또는 대관(臺官)으로 불리었다.이 되었다. 이때 영조가 사묘(私廟)인 육상궁(毓祥宮)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을 이른다.에 참배(參拜)하는 것이 부당함을 직간(直諫)하였다가 처형될 뻔하였다. 실록에 실려 있는 그 기록을 잠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조가 육상궁으로 거둥하려하자, 그가 앞을 가로막고 다음과 같이 직간하였다.

“새해에 태묘(太廟)에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사묘인 사당에 먼저 거동하시는 것은 예법이 아닙니다.”

하자, 이 말에 영조는 크게 노하여 곧장 홍화문(弘化門)을 나가 육상궁에 당도하여 눈물을 흘리며 손발을 차가운 연못에 담갔다. 정월 초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눈물을 흘리며 간하자, 영조는 조중회의 머리를 가져오라 일렀다. 세손이 대신들에게 영조의 말을 전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아뢰길,

“조중회는 죽어야 할 만한 죄가 없습니다. 어찌 죄 없는 신하를 죽이려 하십니까? 저하께서는 성의를 다하여 전하의 뜻을 돌리도록 하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영조는 여러 대신들의 간언으로 조중회에게 내린 참수(斬首)하라는 명을 거두고, 대신 그를 흑산도(黑山島)로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하고 환궁(還宮)하였다. 그 날로 조중회를 귀양 보내면서 보통 사람의 세 배의 길을 걸어가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흑산도에 도착하기 전에 조중회를 석방하라는 명이 다시 내려져 한양으로 돌아왔다.

다른 기록을 보면, 그가 1743년(계해)에 영조의 사묘(私廟) 참례와 사행(使行)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는 글을 올리자, 영조는 진노하여 6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고, 조중회는 18일이나 석고대죄를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도암 이재는 혼자 이르기를,

“직언한 것이니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조중회는 수일 후에 풀려났다.
영조실록》 19년(1743)조에 ‘언로, 종묘 행사, 심양 문안사와 관련한 존명(尊明) 등에 관한 조중회의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어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언로가 막힌 것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어서 장주(章奏)의 사이에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전하께서 문득 당론(黨論)으로 의심하여 찬출(竄黜)하고 천극(栫棘)하는 것이 앞뒤에 연달았고, 심지어는 항양(桁陽)과 질곡(桎梏)으로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대각(臺閣)에서는 결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고, 조정에서도 풍도와 기절이 사라지고 꺾였는데, 점차 변하여 풍속이 허물어지고 세도가 점점 낮아졌으니,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천재지변이 나날이 더하여 사직단(社稷壇)의 나무에 벼락을 친 변괴는 더욱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인애(仁愛)하신 하늘의 경고(警告)가 깊고 간절한데,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구언(求言)하는 거조를 보지 못하였고, 정원과 옥당의 진계(陳戒)도 매우 적막하여 들을 길이 없으며, 비지(批旨) 또한 범연히 수응(酬應)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돌리고 재앙을 소멸할 수 있겠습니까?
종묘를 봉심하고 수개하는 것은 으레 봄가을 중월(仲月)에 행하는 것이 국전(國典)에 실려 있는데, 금년 가을에는 무슨 연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초순 전에 행했어야 할 봉심을 공연히 그믐께로 미루어 수개를 9월로 연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종묘사직보다 막중한 일이 없는데, 대관(大官)이 이러하니 서료(庶僚)들을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게으른 관원을 신칙하고자 하면 대관(大官)들부터 먼저 사직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유의하여 정성으로 자신을 책망하려 하고 숨기는 바가 없어야 하며, 널리 언로(言路)를 열어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소서.
…..중략….
돌아보건대, 오늘날 천하에 예의(禮儀)가 바른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 저들이 사해(四海)를 석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편방(偏邦)에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홀로 그 풍속에 따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니라, 조신(朝臣)과 위포(韋布) 가운데 충신(忠臣)ㆍ의사(義士)가 가끔 나타나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세교(世敎)가 여지없이 허물어졌으니, 이로부터는 3백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예의의 나라가 장차 모두 오랑캐의 지경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저 황단(皇壇)에 드리는 규벽(圭璧)마저 장차 거의 성실하지 못한 허위(虛僞)에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영고(寧考)께서 대보단(大報壇)으로 명칭한 본의(本意)이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신은 몹시 마음이 애통합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임종할 때 그 문인(門人)과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인통함원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巳)라는 여덟 글자를 죽음으로 지킴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에 진실로 느낀 바가 있어서 감히 무릅쓰고 올립니다.”

이 상소문을 통하여 그의 종묘사직을 위한 충성심과 그의 성향을 확연히 인식할 수 있겠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로를 활짝 열어놓아야 국가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사실은 고금의 진리인 듯하다. 그가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할 듯하다.

그는 1748년에 부수찬으로 복직되어 부교리(副校理)와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는 윤급(尹汲)을 변호하다가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751년에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부수찬(副修撰)과 겸 필선(兼弼善) 등을 지내고, 1753년 승지(承旨)를 거쳐 1757년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어 승지, 병조참의(兵曹參議), 영변부사(寧邊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에 다시 승지로 재직하던 중에 왕세자(王世子)인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폐위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관을 벗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극간(極諫)하였다.

“예로부터 세자가 임금께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어찌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신은 만 번이라도 죽겠나이다.”

이에 영조는 진노하여 그를 무장(茂長)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곧 풀어주었다. 1770년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고 이듬해에 도승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1775년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에 정조가 즉위하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전직했다. 1779년(정조3)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이듬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위 홍낙빈(洪樂彬)이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의 숙부이므로 한 때, 그에게 아부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성품이 고결하여 이를 모두 배척하고 지조를 지켰다.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영조가 자신의 측근에게 일러준 회한이 담긴 몇 마디 말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일을 곧게 처리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게 한 자는 이 사람이 가장 으뜸이었다. 당시 뜰을 메운 많은 신하들이 증기에 찐 곡식처럼 입을 연 자가 한사람도 없는 중에 유독 조중회는 진언을 하였으니, 만약 이러한 자가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저 지경에 이르지는 안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옛말에 ‘모진 바람 앞에 굳센 풀을 알고 난세에 충신을 안다’고 하더니, 오늘날의 조중회를 두고 이른 말이로다.”

위의 기록은 비록 임금에게 직간(直諫)을 하여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이렇듯 그를 충직한 신하로 여겼으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씻을 수 없는 후회를 설토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인 《입조일기(入朝日記)》는 그가 45년간의 관직생활을 기록하여 남긴 생생한 기록이다. 이 《일기(日記)》에서 자신을 비판하거나 혹은 탄핵한 상소까지도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왕조실록》과 같은 관찬(官撰) 기록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을 담고 있어서 당시 정치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사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관료의 일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으며 당시 관직 임명 실태를 알아보는데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받고 있다.

끝으로 죽음도 불사하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던 그에 대하여 함안조씨(咸安趙氏) 대종회(大宗會) 홈페이지에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매산선생문집(梅山先生文集)》 권34에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강한집(江漢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어계집(漁溪集)》
– 《병산집(屛山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정존겸(鄭存謙:1722~1794)


정존겸(鄭存謙: 1722~1794)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이다.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8대손이며,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의 5대손인 그는 정문상(鄭文祥)의 아들이다. 그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대제학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751년(영조27)에 30세 나이로 문과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부제학(副提學) 등 여러 관직을 거쳐 3년 만에 횡성 현감(橫城縣監)으로 나아가 고을을 다스리고,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승지(承旨)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을 때 1761년(영조37)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조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나들이를 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영조는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하여 처벌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비롯한 유한소(兪漢簫)와 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시켰다.

정존겸도 세자의 이 일을 눈감아 준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으나, 그 뒤에 곧바로 복직되었다. 그는 다시 1772년(영조48)에 영조가 의욕적으로 펼친 탕평책에 반기를 든 특정 정파의 당론을 부추겼다하여, 이번에는 멀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풀려나 이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는 영조가 승하하기 1년 전인 1775년(영조51)에 사도세자의 아들로 장차 왕위에 오를 세손의 목숨을 노리던 벽파(僻派)의 거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등을 거세게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함께 세손보호에 나섰다.

이 일로 인하여 정존겸의 정치적 입지가 굳어졌다. 이듬해 3월에 마침내 영조가 승하하고, 드디어 정조가 보위(寶位)에 올랐다. 그리하여 세손을 모해하려 했던 홍인한의 일당은 몰락하고, 정존겸은 세손의 보호막이었던 시파(時派)의 선봉으로서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정존겸은 영의정 김양택(金陽澤)과 함께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고, 좌의정 김상철(金尙喆)도 파직되니 3정승이 동시에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1777년(정조1) 5월에 정존겸은 다시 좌의정에 복직되고, 김상철도 영의정 자리를 되찾았으며, 우의정에는 정조를 위해 한몫 하였던 판돈녕 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앉았다. 1781년(정조5)에 정존겸은 실록청 총재관(實錄廳總裁官)이 되어 《영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 편찬을 지휘하고, 이듬해 10월에 동지사(冬至使)동지사(冬至使): 매년 동지를 기하여, 우리나라 특산물인 인삼, 호피, 수달피, 종이, 명주 등을 공물(貢物)로 중국황제에게 바치러 가는 사신이었다.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3년(정조7) 6월에, 정존겸은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가 62세로 그가 관직에 몸을 담은 지 32년 만이었다. 그 뒤 1791년에 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정조를 세손시절부터 누구보다도 보호에 앞장서왔지만, 탕평책에 대해서만은 미온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철저한 시파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조의 재위 기간 동안 재상을 지낸 인물이 20여 명인데, 이 중 영의정들에 대하여 정조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권37에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다.

“국가에 정승을 두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해야 할 일이고, 영의정은 일반 대신과는 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나 소자가 왕위에 있은 20여 년의 세월 동안 영의정의 직책을 맡겼던 자를 꼽아 보면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구름을 밀치고 어두운 거리를 해와 별처럼 밝힌 자로는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善)이 있고, 기미를 환히 알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 일어난 자로는 문안공(文安公) 정존겸(鄭存謙)이 이에 가깝다. 효제(孝悌)를 독실히 행한 자로는 문정공(文貞公) 김익(金熤)이 있고,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자로는 효안공(孝安公) 홍낙성(洪樂性)이 있고,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자로는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있으며, 인릉군(仁陵君) 이재협(李在協)의 경(敬)은 한마디 말로 서로 감격하는 것보다 더 무게 있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제각기 근거한 바가 있다고 할 만하다.”

정조의 이 회고는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내린 돈유(敦諭)의 글이다.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에 대하여 환히 꿰뚫고 있는 정조의 안목도 놀랍다. 특히 정존겸에 대하여

“기미를 환히 알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 일어난 자”

로 평가하고 있는 데에는 그가 수많은 일을 몸소 겪으면서 슬기롭게 처리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면이기도 하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42권에 수록되어 있는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면직을 청한 상소에 대한 비답’의 내용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그의 정치적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답하노라. 소를 살펴보고 경의 진심을 잘 알았다. 거듭 경을 재상에 임명할 때에 승지를 보내어 마음속에 쌓인 말을 전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별유(別諭)가 사양하는 글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 예가 매우 드문 까닭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임금이 되고 나서 덕망 있는 재상을 간택하였는데 경이 그때 맨 처음 이 간택을 받았으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아, 이제 경을 재상으로 세운 지가 겨우 7년인데, 세상의 도리와 조정의 기상은 몇 단계 아래로 떨어진 정도만이 아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는데 누가 능히 붙들어 세우겠으며, 기강이 시들고 쇠미해졌는데 누가 능히 진작하여 쇄신하겠는가. 묘당은 날로 잗달아지고 대각은 점점 흐리멍덩해지니,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온갖 병이 마구 침범하였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방치한 채 모른 척하면서 약을 쓰지 않는 셈이니, 이는 진실로 어떠한 때이겠는가.
다스려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두루 자문할 만한 곳이 없으니,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나라를 다스리는 효과가 막연한 실정이다. 매양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벽을 돌면서 방황을 하곤 하는데, 비록 경처럼 오직 나랏일을 염려하는 정성으로도 또한 어찌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재상은 어느 것인들 중요한 직임이 아니겠는가마는 영의정은 좌의정이나 우의정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 근년 이래로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헤아려 보면 겨우 한두 원로(元老)뿐이었다.
지난번에 경의 사직을 허락해 준 것은 경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번에 새로 임명한 것은 결정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러한 때의 이러한 직임을 경이 아니면 누가 맡겠는가. 상참(常參)을 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경은 부디 즉시 일어나 일을 살피도록 하라.

임금이 신하에 대하여 이처럼 진심어린 요청의 글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듯싶다.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정조의 정성어린 당부와 요청의 마음이 행간에 넘쳐흐른다. 그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몇몇 기록을 통해서, 그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말수와 웃음이 적었으며 삼가고 검약하는 점이 선비와 같았으나 강직한 기풍은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죽자, 정조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가장 먼저 이 대신을 정승으로 뽑았던 것은 을미년에 올린 상소가 호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삼가고 두려워하는 한 마음은 옥을 잡고 있듯이 하고 가득한 물그릇을 받들듯이 하여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어도 사람들이 비난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남들보다 한 등급 높은 것이 아니겠는가. 몇 해 동안 앓은 탓에 못 본 지 오래 되었는데 이번에 죽었다고 하니, 애통함과 상심함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서 제사를 지내주고 녹봉은 3년 동안 보내줄 것이며 장례 치르기 전에 시호를 내리라.”

이 내용은 《정조실록》의 1794년(정조18) 8월 6일조에 보인다. 신하된 처지에서 임금으로부터 이러한 총애를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이며, 이러한 조상을 둔 후손들은 더할 나위 없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죽어서 이러한 예우를 받는 줄 알았다면 지하에서도 감격해 마지않았을 법하다. 신하의 죽음에 애통해하고 상심하는 정조의 애틋한 심경이 행간에 묻어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또 조선의 박물학자 황윤석(黃胤錫)과의 일화도 있다. 황윤석은 조선후기 성리학자이면서 실학자요 박물학자이다. 1769년 영조는 백과사전류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간행토록 명하였다. 이를 위해 당상관들은 방대하고도 세밀한 작업에 필요한 각 분야 전문가를 물색하였다. 당상관중 한사람인 정존겸은 황윤석의 학식이 깊은 것을 알고 그에게 각종 책의 교정을 보고 발췌한 부분에 표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황윤석에게 교정과 교열을 맡겼다. 그리하여 그는 근무를 하는 시간 외에 퇴근 후에도 밤늦게까지 책을 붙들고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눈이 침침해서 안경을 구하고 싶어도 귀한 물건이라 구할 수가 없었다. 황윤석은 눈병을 앓아서 요청을 들어드릴 수 없다면서 정존겸에게 안경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정존겸은 늘 꼼꼼한 교정에 감동하여 가장 좋고 구하기 힘든 안경을 구하여 선물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고 중구 회현동(會賢洞)에 가면 명당터에 전해오는 은행나무전설이 있다. 회현동은 말 그대로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 근처 은행나무 길에 서울시의 지정 보호수로 480여 년이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중종 때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집 앞에 심었다고 하는데, 어느날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서대(犀帶)서대(犀帶): 종1품 이상의 관복에만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코뿔소나 물소의 뿔로 만들어 왕의 옥대 다음으로 귀히 여기는 제품이다.12개를 은행나무에 걸게 되리라.”

고 일렀다고 한다. 그 후 실제로 이 명당터에서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는데, 정광필의 후손인 정존겸이 그 12명중 한 사람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사마방목(司馬榜目)》
– 《상신고략록(相臣考略錄)》
–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 실(鄭實:1701~1776)


정 실(鄭實:1701~1776)                                          PDF Download

 

관은 연일(延日)이며 자는 공화(公華), 호는 염재(念齋)이다. 1701년(숙종27) 충주(忠州)에서 출생하였다. 정철(澈)의 후손으로, 경연(慶演)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호(澔), 아버지는 순하(舜河)이고, 어머니는 김익항(金益炕)의 딸이다.

이재(李載)의 문인으로, 1733년(영조9)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1739년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교리(校理), 장령(掌令), 정언(正言)을 거쳐, 1748년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과 응교(應敎),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1756년에는 안동부사(安東府使), 1761년에는 좌유선(左諭善), 1762년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764년에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이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과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대제학(大提學)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767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1768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70년(영조46)에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임금에게 바른말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이 된지 한 달여 만에 올린 상소에서 언론 탄압의 실상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각(臺閣)의 직임은 조정(朝廷)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시(國是)를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위임하여 예우하는 바가 중한데, 오늘날을 보면 과연 어떠합니까? 몇 자의 글을 관례에 따라 써도 문득 방형(邦刑)을 바루라는 명을 내리고, 한 마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장해(瘴海)에 천극(栫棘)하는 법을 가하는 일이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잇달았으며, 금정(禁庭)에 붙잡아 들여 고략(拷掠)을 가하기까지 하시니, 이는 성덕(聖德)으로 보아 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지나친 거조입니다.”

그는 이것 말고도 그 뒤에 국가 운영의 핵심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어 근본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임금이 잘 다스리려면 모두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지극한 공부로 삼지 않을 수 없고, 신하의 진언(進言) 역시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요결(要訣)을 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게다가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치시는 것도 모자라서 언관(言官)을 나국(拿鞫)하기까지 하셨으니”라고 하여 언관에 대한 탄압을 집요하게 지적하였다. 또한 “이것은 이른바 분노하여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부에 뜻을 더하여 치우치는 흠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여 영조에게 열심히 수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 그는 이 상소를 통해 임금께 도학(道學)을 숭상할 것, 신하를 예로서 대우할 것과 더불어 언로(言路)를 존중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각(臺閣)을 중하게 여겨서 언로를 넓히소서. 전하께서는 고언(苦言)하는 자를 싫어하여 욕하고 배척하여 내쫓으시므로, 위에서는 언관(言官)으로 대우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언관으로 자처하지 않습니다. 이러고도 어찌 언로가 열려 임금의 궐실(闕失)이 들리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지난 과실을 깊이 경계로 삼으시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더욱 넓히시어 뭇사람의 뜻이 위에 전달되게 함으로써 언로가 크게 열리게 하소서.”

정실(鄭實)의 이러한 강직한 태도가 영조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실이 한 대신을 논핵한 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하여 1744년(영조20)에 정언 이형만(李衡萬)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실(鄭實)은 한 대신을 논했다가 장기(瘴氣)가 있는 바닷가로 귀양가서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의당 성세(聖世)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민백상(閔百祥)이 귀양간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또한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한 것이었습니다. 아! 대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예모로 대우하는 사람이며 정실은 전하의 삼사(三司)이고 민백상은 민형수(閔亨洙)의 아들입니다.
대신의 지위가 높은 것을 돌아보고 두려워하여 삼사에 있는 사람이 감히 그 일에 대해 논하지 못하고 아들이 된 사람이 감히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중회(趙重晦)를 죄준 이래로 한 사람도 다시 조중회의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는 데 대해 신은 실로 상심하고 있습니다.
대저 조중회의 상소는 어리석어서 성인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의 마음만은 성실하여 다른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 한마디 하교하시기를, ‘너의 말은 지나친 것이다.’ 하였다면, 상하가 모두 무사했을 것인데 도리어 천고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하심으로써 일국의 신민들로 하여금 놀라운 나머지 죽고 싶게 만들었으니, 아!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옛날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일 때문에 김홍욱(金弘郁)을 죄주면서 구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사죄로 다스리겠다고 한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는데도 이내 다시 마음이 편치 않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떤 간신(諫臣)이 대각에 나와서 간하니, 효종께서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국가가 비로소 망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이 세도(世道)를 걱정하고 언관을 격려하는 뜻으로 전고(前古)에 으뜸인 일입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조중회에 대해 노하신 것은 본디 성조(聖祖)께서 당일 노하였던 것만 못했는데도 여러 신하들은 혼이 나가고 기가 죽어서 전하께서 ‘사죄에 해당시켜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사죄에 해당시켜야 합니다.’라고 하고, 전하께서 ‘마땅히 살려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살려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국가에 급박한 일이 있으면 다시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세 신하의 죄를 사면하여 주시어 일세(一世)로 하여금 성의(聖意)를 환히 알게 하소서.”

영조는 이 상소문을 읽고 대노하여 이형만까지 기장현(機張縣)으로 귀양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 상소를 받아들였다 하여 승지까지 체직시켰다. 이를 보면 정실에 대한 정조의 노여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뒤에 정실을 구명하려는 신료들의 노력은 계속 이어졌는데, 같은 해 비변사 회의에서 조현명(趙顯命)이 문언박(文彦傳) 문언박(文彦傳:1006~1097): 북송(北宋) 때의 재상. 자(字)는 관부(貫夫).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있다가 어사(御史) 당개(唐介)의 탄핵으로 지방으로 쫓겨났으나, 재차 재상으로 복귀하였다. 뒤에 문언박이 당개를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이르기를 “당개가 비록 풍문을 잘못 들은 것은 있어도 또한 신의 병통을 많이 맞추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의 고사를 원용하여 정실(鄭實)과 민백상(閔百祥)을 방면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이때에도 영조는 민백상만 방면하고 정실의 방면은 거절하였으니, 정실에 대한 분노가 쉬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정실에 대한 영조의 분노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좋은 사부(師傅)에게 교육시키려는 마음에서 누그러진 듯하다. 1748년(영조24)에 사도세자가 14살 때 세자의 스승을 새로 정하는 의논이 있었다. 이 때 좌의정 조현명이 정실 등 6인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할 것을 청하자, 영조가 윤허하였다. 이는 학자로서 정실의 능력이 당시에 크게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정실은 보덕(輔德), 문학(文學), 응교(應敎), 필선(弼善)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세자의 교육에 힘썼으며, 세자에게 네 조목(條目) 네 조목(條目): 과정(課程)은 반드시 엄격하게 하고, 송독(誦讀)은 반드시 입에 익게 하며, 남에게 묻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자, 동궁이 가납하였다는 기사를 말한다. 《영조실록 69권, 영조25년 2월 18일 병신조(丙申條)》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실이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다음 몇몇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정실이 관직에서 쫓겨난 뒤에 그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일 명분으로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에 적임이자라는 점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정실은 1749년(영조25)에 서장관(書狀館)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청나라 사신으로 기용되는 관리는 뛰어난 학문을 지녀야 했으니 이러한 사실 역시 그의 학문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51년(영조27)에는 낙향하는 정실에 대해 신하들이 그가 강연(講筵)에 적합한 인물이기에 정실이 조정에 올라오기를 재촉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정실에게 임금에게 경서를 강연하는 일을 맡겨야 한다고 임금에게 주청했으니, 그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훗날 순조조(純祖朝)에 그의 시호를 문정(文靖)으로 한 것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능력을 보여주는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실은 지방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는데 이때 백성의 안정과 국방의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1756년(영조32)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재직할 때 수재(水災)와 흉작(凶作)으로 고을이 어려움에 처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조정에 세금을 나누어 낼 수 있게 해달라고 주청하여 고을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또한 1763년(영조39)에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재직했을 때

“강도(江都)는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으로 진양(晉陽) 진양(晉陽): 동안우(董安于)와 윤탁(尹鐸)이 성주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 국방을 튼튼히 했던 곳으로, 조간자(趙簡子)의 유언에 따라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의 난리를 피신해 간 곳이기도 하다.
에 해당되는 곳인데도 저장해 놓은 군량(軍糧)이 전혀 없어 앉아서 빈 창고만 지킬 뿐입니다.”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에 힘을 실어줄 것은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초지진(草地鎭)은 실로 해로(海路)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데 진졸(鎭卒)이 단약(單弱)하고 수비가 허술합니다. 이는 대개 목관(牧官)이 나뉘어 거처하고 있어 목자(牧子)로 들어간 진졸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면서 국방의 강화책으로 초지진의 허술함을 해소할 대책을 내놓는 등 관리로서 자신의 직책에 소홀함이 없었다.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그의 성품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1764년(영조40)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과 토론하였던 그는 상소를 올려

“아랫사람이 하는 말이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목소리와 기색을 돋우지 말고 부드럽게 처리하셔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로 인해 갑자기 크게 노하시어 말씀을 예사롭지 않게 하신단 말입니까? 대소 신료들이 두려워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으니, 실로 위대한 성인의 화평한 기상에 흠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로 인해 격노하여 심기를 너무 부린다면 결국 섭양(攝養)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보령(寶齡)이 8순을 바라다보는 시점에 임하셨으므로 서둘러 심신(心身)을 보양하고 정력(精力)을 아끼셔야 하는데 갑자기 일시의 번뇌로 인하여 지나치게 언성(言聲)과 기색(氣色)을 돋우시니, 삼가 몸을 보존하고 정력을 아끼는 방법에 해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임금의 건강이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의 상소가 영조의 귀에 조금은 부드럽게 들렸을 듯하다.

그는 도승지(都承旨), 부제학(副提學), 대제학(大提學),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으며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몇 차례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의 요청으로 복귀하였던 그가 나이 70에 벼슬을 그만둘 것을 진정으로 청하자, 이에 영조는 봉조하(奉朝賀)라는 명예직을 부여하기도 하였으니, 그를 예우하는 영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1776년(영조52)에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실록》의 정조 즉위년 4월 18일조의 기사에 보면 그의 졸기(卒記)가 수록되어 있다.

“전 판서 정실(鄭實)이 졸(卒)하였다. 정실은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이고, 고 상신(相臣) 정호(鄭澔)의 손자이다. 영묘(英廟)기미년(1739) 에 등제(登第)하여 차례차례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 지내고, 동전(東銓)의 장관이 되었다. 문형(文衡)을 맡아 보았으며,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자 치사(致仕)했는데, 물러서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가 적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염약(恬約)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처럼 역사 기록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를

“물러서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가 적으므로 염약(恬約)하다고 칭찬하였다.”

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의 한평생에 대한 삶의 궤적이 천추에 길이 빛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의 편저서에 《송강연보(松江年譜)》가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성주(任聖周1711~1788)


임성주(任聖周(1711~1788)                                 PDF Download

 

의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으로, 충북 청풍(淸風)에서 태어나고 만년에는 공주의 녹문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은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지낸 임적(任適)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그의 조부인 임의백(任義伯)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동문이기도 하다.

녹문은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손꼽힌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대한 동질 여부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다. 녹문은 초기에 스승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같다는 이론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고, 다르다는 이론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조선시대에 이로 인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전자의 인물성동론을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후자의 인물성이론을 호론(湖論)이라 하였다.을 따랐으나 10여 년의 연구를 통해, 호론(湖論)과 낙론(洛論)호론(湖論)과 낙론(洛論):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는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낙론(洛論)이라 하였고,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충청도지방에 살고 있어 호론(湖論)이라고 지칭하였다.을 지양하고, 생의(生意)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또 사람은 모두 같은 기를 타고 나며,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사물을 평가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호락(湖落)의 양론을 기일원론(氣一元論) 입장에서 종합하여 기일분수(氣一分殊)라는 독특한 이론체계로 자신의 학설을 수립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공부에 뜻을 두었으며, 16세 때에는 율곡(栗谷)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에 깊이 감명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부친으로부터 직접 글을 배웠는데, 한 번 가르쳐주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보고 집안을 융성케 할 것이라며 그의 부친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그는 또 3세 때, 사랑채 벽에다

임사동임사동(任獅同): 녹문의 어릴 적의 이름이다.의 뱃속에 글자 오백 자가 들어있다[任獅同腹中書五百字入]”

라고 크게 썼는가 하면, 13세 때에는 공자의 모습을 그려 집안에 모셔놓고 새벽에 일어나 절을 하고, 부모님께 문안을 올린 뒤에 공부에 임하곤 하였다. 15세 때 아버지의 부임지인 함흥(咸興)에 따라갔다가 관아(官衙)에 있는 기생들의 아리따운 자태를 보고 돌아와 책상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놓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도(道)를 밝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마음속에서 기생을 없애자. 원컨대 요부(堯夫)요부(堯夫): 중국 송나라 학자 소옹(邵雍)의 자이다.를 배우자. 눈은 요사스럽고 간특한 것을 멀리하자.”

이 글을 보면, 조숙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엄숙한 면이 없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16세 때는 <자서(自序)>라는 글을 지어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한편, 자아의 성찰의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율곡 선생의 글을 여러 편 읽고 나서 여태까지의 내 생각이 너무도 엉뚱했다는 것을 알았고, 선비의 당연한 일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날의 죄는 비록 죽음을 당한다 치더라도 도망할 바가 없다.”

그의 부친이 함흥판관(咸興判官)으로 있을 당시, 기생을 매질한 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의 가족들은 친인척의 집에서 잠시 기거(寄居)하고 있었는데, 이 때 부친이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18세 때 부친상을 당한 후,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고뇌에 빠져 맏형 임명주(任命周)의 허락을 받아 홀어머니를 모시고 청주 옥화대(玉花臺)로 낙향하였다. 이때 그의 맏형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형제들의 교육은 둘째인 그가 맡았다. 그의 형제자매 5남 2녀 중 여동생 윤지당의 재능을 간파하고 유학경전과 역사서 등을 가르쳤다. 그의 여동생은 당대 이름을 떨친 여성 성리학자로 조선말까지 알려졌던 인물이다.

녹문은 19세 때, 서울 근교에서 강학하던 도암(陶菴) 이재(李縡)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부친을 여의고 청주에서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를 시작했을 때, 주변 학자들과 교유(交遊)를 하였다. 33세 때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사마시(司馬試)에 응시를 하여 합격함으로써 관직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제수 받은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는 세자의 경호를 맡은 말단직이었으나, 종종 세자를 위한 강연에 입시(入侍)하곤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이 서로 녹문의 학행(學行)이 뛰어난 것으로 천거하자, 영조(英祖)가 세손(世孫)을 교육하도록 하였다.

이 후, 외직(外職)으로 발령을 받아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했던 고을은 규모도 작고 오지여서 토호(土豪)들의 횡포가 심한 곳이었다. 부임 직후, 녹문은 백징(白徵)백징(白徵): 백골징포(白骨徵布)의 준말로, 농지가 아닌 곳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던 일을 일컫는다.을 가하는 폐단을 해결하는데 나섰다. 이외에도 진상품(進上品)을 나르는 부역과 수행원들을 접대하는데 따른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등 여러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민생안정(民生安定)을 위한 행정과 함께 교육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또 군자당(君子堂)을 설치하여 고을 유생들에게 학문을 독려하는가 하면, 관청 서리(胥吏)들에 대한 교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지방행정의 문란으로 여러 폐단을 목격했던 터라, 부임한 첫 해에 당장 서리들에게 전횡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게시하였다. 녹문의 행장(行狀)에서 그의 치적(治績)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교화시키기 어렵다던 아전과 백성들이 또한 죄를 부끄러워하고 선을 귀히 여길 줄 알아서 송사가 점차 줄어들고 옥의 감방이 여러 번 비게 되었다.”

이는 비록 작은 오지(奧地)의 고을수령을 맡았지만, 적극적으로 책무를 다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임실현감(任實縣監)으로 재직할 당시, 그의 형과 동생의 연이은 죽음으로 낙향을 결심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서 다시 녹문에 은거하고 말았다. 그의 저서로는 <녹려잡지(鹿廬雜識)>, <산록(散錄)> 등의 작품이 수록된 《녹문집(鹿門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 《녹문집(鹿門集)》
– 《임성주의 생의 철학》, 한길사, 199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휘지(李徽之:1715~1785)


이휘지(李徽之:1715~1785)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미경(美卿), 호는 노포(老圃),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조선조 5대 명문가의 출신인 이경여(李敬輿)의 종손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민서(敏敘)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관명(觀命)이며, 어머니는 권중만(權重萬)의 딸이다. 그는 또 3대(代) 째 대제학(大提學)대제학(大提學):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주무 장관으로서 당대의 유림과 학자를 대표하는 수장이다. 관직(官職)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직이며, 청직(淸職)으로서 삼정승 육판서 전부를 배출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여겼다.을 배출한 가문의 출신이기도 하다. 1741년(영조17)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사(蔭仕)로 목사(牧使)가 되었다가 1766년(영조42)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바 있다. 그 뒤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성절사(聖節使)성절사(聖節使):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 또는 그 사신을 이른다.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제수 받았다.

그의 관직생활의 대략을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나타난 대화를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의 건강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사현합(思賢閤)으로 이어(移御)하여 다시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균역청(均役廳)과 선혜청(宣惠廳)에 쌀과 포목(布木)과 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유언현(兪彦鉉)과 이휘지(李徽之)에게 물으니, 각각 실제의 수효(數爻)를 들어서 대답하였다.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김치일(金致一) 이후로 이 두 낭관이 가장 잘 직임을 거행하였으니, 결코 다른 데로 이직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자, 영조 임금이 이르기를, “

그렇다. 이휘지는 또 성질이 꼼꼼하고 자세하며 모두 쓸 만한 사람들이다.”하였다.

이 내용은 《영조실록》 1761년(영조37) 조의 기록에 보인다.

그는 1755년(영조31)에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거쳐, 1779년(정조3)에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이 되었으며,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이 때 정조 임금은 그에게 아래와 같은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수를 지어 주었다.

喬木白江宅
교목세신 백강의 가문이며

文衡冢宰孫
대제학 이조판서의 손자로세

出爲關西伯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나가니

休忘二字言《弘齋全書》卷5, 詩1 “贐原任提學李徽之出按關西”
두 글자의 당부를 잊지 마오

 

이 시에서 말하는 백강(白江)은 이휘지의 증조부인 이경여(李敬輿)의 호인데, 그는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연간의 명재상이었으며, 대제학(大提學)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민서(李敏敍)는 백강의 아들로 이휘지의 조부이다. 이 시에서 말한 ‘이자언(二字言)’이란?

그가 곧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간다 하여 ‘평안(平安)’이란 두 글자를 취하여 이른 말이다. 정조는 이 시를 통하여 이휘지에게 의미 있는 당부를 한 것이다. 앞의 기·승(起承) 2구에서는 이휘지의 가문이 내역이 있는 집안임을 언급함으로써 다시 한번 선조(先祖)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을 상기한 것이며, 뒤의 전·결(轉結) 2구에서는 관찰사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민생안정(民生安定)을 도모하는 데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당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임금이 신하를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사례임을 알 수 있다.

또 이휘지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우의정 이휘지에게 함께 국사를 돌볼 것을 하유(下諭)하였다.”

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경에게 고굉(股肱)의 직임을 준 까닭은 시끄러운 풍속을 두루 다스리고 도리에 어그러진 의논을 조정하여 우리 세신(世臣)을 보전하려는 데에 있다. 경의 굳은 지조와 변치 않는 덕성(德性)은 사랑과 정성으로 구제할 것이며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마음은 나라가 있을 뿐이고 공(公)이 있을 뿐이었다는 데에 대해 과인(寡人)이 늘 경을 허여(許與)하는 바이니, 이 마음으로 거조(擧措)하면 명에 따라서 보좌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으며 바로잡아서 보필하기가 무엇이 걱정되겠는가? 대저 이렇게 하면 우리 선왕(先王)께서 50년 동안 탕평(蕩平)하신 성대한 교화를 계술(繼述)할 수 있고, 또 내 일념(一念)으로 보합(保合)하려는 고심(苦心)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니, 경은 나와서 베풀어 함께 우리 국가를 안정시키라.”

 

이는 《정조실록》 제9권 1780년(정조4) 조의 기록이다. 이어서 그는 곧 우의정에 올랐으며, 1781년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을 겸하여 《영조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듬해에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1784년(정조8) 10월에는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 동지를 전후해서 조정에서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니 동지사(冬至使)라 했다.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는 그 이듬해 정월에 건륭제(乾隆帝)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건청궁(乾淸宮) 앞뜰에서 개최하는 천수연(千叟宴)천수연(千叟宴): 천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고위 대신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노인들을 불러 베푸는 연회를 이른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70세가 넘은 사신을 파견하라는 황제의 명이 전달되어 조정에서는 평소의 건강과 시문의 역량을 헤아려서 정사로는 70세인 이휘지와 부사로는 72세의 강세황(姜世晃)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한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먼 사행길에 오르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70세의 노인에게는 힘든 여정이었다. 사행길에 강세황이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 풍경을 화폭에 담고, 이 화폭에 함께 갔던 이휘지가 시를 읊어 시화첩(詩畫帖)으로 꾸민 것이 전해진다. 사행을 다녀와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이해에 그는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이기경(李基敬:1713~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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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湖南)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백심(伯心)이다. 1713년(숙종39)에 나주(羅州) 도림의 외가(外家)에서 태어났고, 전주 오목대(梧木臺, 고려 우왕 6년(1380)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하던 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 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로 이 곳으로 옮겨 세웠다.<위키백과사전>)

아래에 있는 본가(本家)에서 성장하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의 사연이 있었던 오목대 아래에 산다하여 아호(雅號)를 스스로 목산(木山)이라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장(文章)에 조예가 있었으나 일찍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꺼려하여 24세 때 도암(陶菴) 이재(李載)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덕에 그의 스승으로부터 정치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 핵심 내용은 곧 관직에 집착하지 말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시세(時勢)를 헤아려서 처신할 것 등이었다.

그는 27세가 되던 다소 늦은 나이로 1739년이 되어서야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1746년(영조22)에 병조 정랑(兵曹正郎)에 임명되고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吏曹正郎),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사간(司諫), 좌부승지(左副承旨), 대사간(大司諫), 충청감사(忠淸監司), 황해감사(黃海監司), 대사간(大司諫),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또 영조(英祖)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였지만, 영조는 그를 특별히 총애하였다. 영조가 자신과 이기경을 후한(後漢)시대 광무제(光武帝)와 엄자릉(嚴子陵, 광무제와 유년기에 동문수학하였던 절친한 친구였다. 광무제가 그의 재능을 높이사서 관직을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면서 여생을 마친 사람이다.) 에 비유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영조가 그를 얼마나 아끼고 총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그가 3도(三道) 감사(監司)를 역임한 뒤에 낙향(落鄕)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영조는 간간히 그의 근황을 묻곤 하였는데, 측근에 있던 신하가 아뢰기를,

“목산은 고향에서 글을 읽으며 지낸다고 합니다.”

라고 아뢰자, 영조가 크게 노여워하여 이르기를,

“어찌 그러한 인재가 한가하게 글만 읽고 지낸단 말인가? 즉시 조정의 빈자리를 찾아 목산에게 제수하라.”

라고 엄한 분부를 내렸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영조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은 탓에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동안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함께 등용하는 것은 부당하며, 의도적 형식에 치우쳐서 붕당(朋黨)으로 인한 화가 커졌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정책(蕩平政策)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상과 소신을 밝힐 때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강직함을 나타내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있다. 영조가 특별히 아끼는 마음으로 벼슬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특별채용이 아닌 정당한 시험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던 것이다.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재임할 당시에 겨우 4일이 지났는데, 우윤(右尹)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를 두고 목산은 부당한 처사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임금의 명을 거부하였다는 죄목으로 금오(金烏)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다음날 그를 다시 등용하였다. 그럼에도 연거푸 제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다른 신하들은 다시 등용을 거절하는 중죄임을 거론하였다.

이를 두고 영조는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쉽게 여긴다
[難進易退]’

가 분명한 사람이니, 너무 강박하지 말라고 이르며 특별히 그를 불러 격려하였다. 여기에서 소신을 위해 자신의 관직을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목산의 고집스러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겠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동료 관원을 구원하는 경우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의리에 입각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우윤(右尹)으로 있을 때 권진응(權震應)을 구원하는 상소에서도 그러한 면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영조실록》 47년 4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 조정은 전적으로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중세(中世)에는 명유(名儒)가 배출(輩出)되어 나라의 보배 구실을 하였으며, 울연(蔚然)하여 한 시대의 현인(賢人)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공명과 이익을 추구하는 학설이 성행하자 세속(世俗)으로 전해지는 피해가 심해져 지금은 독서(讀書)하는 종자(種子)가 끊이지 않아 겨우 보존하기는 하지만 밑바닥에 있는 치양(穉陽)과 같은 격이니 이를 부지하게 하고 보호한 연후라야 거의 원기(元氣)를 만회(挽回)할 수 있게 되어 망하여 없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병인년에 전하(殿下)께서 유현(儒賢)을 초연(招延)하여 특별히 총재(冡宰)로 임명하였는데, 신이 그 당시 연중(筵中)에서 소환(小宦)에게 부축하여 궁전(宮殿)에서 내려가도록 명하는 일을 직접 보고서 신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감탄하기를 전하께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융성함이 여기에 이르렀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에 이르러 또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산림지사(山林之士)를 예(禮)로 대우함이 아주 끊어졌다고 하며 또 지난해와 같은 대우에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며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애석합니다.

그 말하는 바가 성상의 마음을 씻지 못하여 은혜와 예우를 끝까지 못하도록 만들게 되어 미워하고 냉대하며 사기를 꺾이게 하여 일생을 마치게 하였고, 기타 남의 죄에 연좌된 것을 지금까지 석방하지 않아 경의(經義)를 연구하며 도(道)를 지닌 인사(人士)로 하여금 다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전하의 평소 유술을 숭상하던 마음이 어찌하여 앞뒤가 그렇게도 판이(判異)하며, 미워하고 좋아함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어긋나서 행동거지가 합당함을 잃어버린 데로 돌아가게 되셨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말이 나의 뜻에 거스름이 있거든 반드시 도(道)에 구하며
〈마음에 거슬린다는 것으로 거절하지 말며〉

말이 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도가 아닌 것에 구하라.
〈뜻을 따른 것이라 하여 들어주지 말라〉’

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인군(人君)이 말을 듣는 성대한 절차입니다. 더구나 산야(山野)에서 진언(進言)하는 체모는 자체가 조신(朝臣)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대체로 그들이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예우(禮遇)에 감격하여 숨김이 없는 의리를 다하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의 본심(本心)이므로 성실하고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이니 진실로 용서하셔야 하고 처벌해야할 일은 아닙니다. 신은 아마도 일월(日月)이 우연히 비춤을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도 천지(天地)에는 오히려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을 듯합니다.

지금부터 이뒤로는 암혈(巖穴) 사이에서 빛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면서 거침없이 유자(儒子)라는 이름을 버리고 숨기게 되니, 이런 풍토를 자라게 하고 그치지 않게 한다면 사학(斯學)이 어떻게 끊어지지 않겠으며, 세상의 도의가 쇠약해지고 허물어지며 사람의 마음이 잘못된 곳으로 빠져드는 것을 장차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지나친 계교로는 오늘날의 국사(國事)는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한 가닥의 머리털까지도 병(病)이 들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중에서도 원기(元氣)가 떨어지고 빠뜨려진 것이 현재의 가장 위태롭고 나쁜 증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하께서 한번 마음을 바꾸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초선(抄選)하는 제도를 설치하고 예(禮)로써 용서하는 것은 바로 국조(國朝)의 아름다운 제도이니 설령 한마디 말의 망발(妄發)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갑자기 최절(摧折)을 가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듯한데, 더구나 이번에 진언(進言)한 사람의 본래 마음은 다만 스스로 그의 뜻을 편 것에 불과할 뿐인데, 먼 바다 가운데로 귀양을 보내어 형극(荊棘)을 더함으로써 광경이 근심스럽고 기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산수(山藪)가 독충(毒蟲)과 악수(惡獸)를 포용해 주는 아량을 성조(聖朝)께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충언을 했을지라도 임금의 심기를 거슬려 귀양을 가게 된 사람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거들다가는 자칫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동료 관료의 발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역설하였다. 설령 그가 한 말이 망발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그의 포부를 편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를 저 먼 해도(海島) 위로 귀양을 보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승지에게 이 상소문을 읽도록 명하고, 그 내용이 《유곤록(裕昆錄)》(1764년에 영조의 명에 의해 간행한 책으로,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당파와 상관없이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겠다는 영조의 의지가 담긴 책이다.) 을 범(犯)한데다 권진응(權震應)의 죄가 없음을 변명하며 구원하였다는 것으로, 그의 관직을 해임하도록 명하고, 당일로 고향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다시 삭직(削職)하도록 명하고, 상소를 받아들여 올린 승지도 함께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황만 보아도 영조가 이 일로 인하여 얼마나 노여워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기경의 이러한 성품 때문에 전북 익산(益山) 사천리를 포함하여 해남 등 모두 4번의 유배(流配)와 복권(復權)을 거쳤으며, 정조(正祖) 때에는 정조 음해라는 모함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 뒤 정조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복권(復權)을 시켜주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소임을 다하면서도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마다했던 것은 그의 소신과 스승의 가르침도 있었지만,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직접 가르친 서연관(書筵官)으로써 당쟁(黨爭)의 제물로 희생된 사도세자의 처참한 최후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그의 저서 《음빙행정력(飮氷行程曆)》은 1756년 청(淸)나라에 서장관(書狀官)(사행(使行) 수행원의 기강을 감독하고 매일 기록을 작성하여 정리해서 국왕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으로 다녀와서 쓴 일기체 여행기로, 청나라의 정치동향과 사회실상이 담겨있으며, 분량이 많고 정보가 정밀하다.

이 글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보다 10년 앞선 것으로 북학자(北學者)들의 《연행록(燕行錄)》이 나오기 이전 조선 지식인들의 대외인식을 잘 보여준 기록으로, 후대 《연행록》들과 비교연구하기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일기에는 만주족인 청(淸)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명대(明代)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고 감격하기도 하고, 중화(中華)의 정신을 찾고자 애썼던 기록으로 보아 그의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의식이 보다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그의 생애의 전반에 걸쳐 60권에 달하는 문집을 남겼다. 특히 그 중에 <서연록>과 <목산록(木山錄)> 등은 사적(史籍)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으며 그의 6대 후손이 그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그는 북경(北京)에 머물면서 남천주당(南天主堂) 외 여러 곳을 탐방하여 청나라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국자감(國子監)에서 태학생(太學生)과 필담(筆談)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 기록에는 남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 유송령(劉松齡)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파이프 연주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만났던 유송령 신부는 10년 후 홍대용이 다시 만난 신부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고급편 – 만언봉사


율곡의 국가개헌론 – 만언봉사

 

율곡의 국가개헌론
율곡의 국가개헌론

 

속표지

발간사 /머리말

차례

해제

 

 

임금의 교지

글을 시작하면서

 

시대에 맞는 폐단의 개혁

  1.  중국의 사례
  2. 우리나라의 사례

실질적 노력

  1.  상하가 서로 믿는 실질적 노력이 없음을 논함
  2.  맡은 일에 실질적 노력이 없음을 논함
  3. 경연에서 성취되는 실질적 노력이 없음을 논함
  4. 현인을 등요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음을 논함
  5. 재이에 대응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음을 논함
  6. 여러 정책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음을 논함
  7. 인심에 선을 지향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음을 논함
  8. 실질적 노력이 없음에 대해 맺는말

 

자기 몸을 닦고 백성을 편안케 함

  1. 자기 몸을 닦음
  2. 백성을 편안하게 함

맺는 말

고급편 – 동호문답


율곡의 이상국가론 – 동호문답

 

textbook-2016-1_01c
율곡의 국가이상론

속표지

발간사/ 머리말

차례

해제

 

 

 

1. 임금의 도리를 논함

2. 신하의 도리를 논함

3. 좋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기 어려움을 논함

4. 우리나라에서 도학을 실행하지 못함을 논함

5. 조선이 옛 도를 회복하지 못 함을 논함

6. 현재의 시세를 논함

7. 실질에 힘쓰는 것이 수기의 요령임을 논함

8. 간사한 자를 분별하는 것이 현인을 등용하는 요령임을 논함

9.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논함

10.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논함

11.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 다스리는 도리의 근본이 됨을 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