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사직


 

율곡의 사직

 

<연려실기술> “이이가 사직하다” 항에는 선조 초년 몇 번에 걸친 율곡의 사직을 기록하였다.

곡은 외조모를 극진히 모셨다. 선조 1년 11월에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외조모의 병환이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간원(諫院)에서는 본래 법전에 외조모 근친하는 것은 실려 있지 않고 직무를 함부로 버리고 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파직을 청하였지만 선조가 비록 외조모일지라도 정이 간절하면 가 볼 수도 있는 것이며, 또 효행에 관계된 일로 파직시킬 수는 없다 하고 듣지 아니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외조모에 대한 율곡의 각별한 정은 어린 시절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외조모와 함께 보낸 정도 깊으려니와 모친을 이른 나이에 떠나보낸 그 아픔이 외조모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다음해 선조 2년 6월에 율곡은 홍문관 교리로 취임하는데 10월에 휴가를 받아 외조모를 봉양하다 상을 당한다. 그런데 율곡이 휴가를 받아 외조모를 봉양한 데에는 연로한 외조모를 간병하려는 데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최고 통치권자인 선조에 대한 일종의 실망감이 작용했음을 <연려실기술>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사년(1569, 선조 2년) 9월에 이이가 경연에서 《맹자》를 강론하다가, ‘임금이 좌우를 둘러보고 딴소리하였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에게 여쭙기를,

“오늘날 민생이 곤궁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사방 국경 안이 다스려지지 않음이 매우 심하니, 만일 맹자가 전하께,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고 물으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까.”

하였더니,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이는 임금이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뜻이 없음을 알고 마침내 물러갈 뜻을 품었는데 마침 외조모의 병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를 청하고 돌아갔다.

선조가 즉위 초년에 학문에 정신을 쏟고 정사에 최선을 다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연려실기술>의 본 기사는 통상적인 이해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선조가 즉위 초년에 선정을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본 기사는 임금이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뜻이 없음을 알고 율곡이 물러날 뜻을 품었다고 적고 있다. 전후의 간극은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선조 6년 7월에 율곡이 직제학을 사면하는 그 무렵의 기록을 통해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임금이 이이에게 이르기를,

“한(韓) 나라 문제(文帝)가 어찌하여서 가의(賈誼)를 쓰지 않았는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문제가 비록 어진 임금이지만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의 말이 큰 것을 의심해서 쓰지 못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은 큰 뜻이 있은 연후에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주인이 두어 칸 오막살이를 지으려 하는데 목수가 큰 집을 지으려고 하였다면 어찌 그 말을 듣겠습니까.”

하였다.

율곡이 답한

“문제가 비록 어진 임금이지만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의 말이 큰 것을 의심해서 쓰지 못한 것입니다.”라는 말을 가지고 설명하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선조가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한 것은 문제가 어진 임금인 것과 같다. 그러나 문제가 가의를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은 문제의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조가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원대한 포부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정을 구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이다. 율곡이 “비유하자면 주인이 두어 칸 오막살이를 지으려 하는데 목수가 큰 집을 지으려고 하였다면 어찌 그 말을 듣겠습니까.”라는 말은 이런 뜻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군주는 현실적인 미봉책을 구사하는데 멈추지 않고 더욱 근본적인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바로 이 무렵 율곡이 직제학으로서 향약 시행과 관련하여 선조에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말처럼 말이다.

이이(李珥)가 직제학이 되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향약은 삼대(三代)의 법인데 전하께서 시행하도록 명하시니, 진실로 근대에 없던 경사입니다. 그러나 다만 무슨 일이든지 근본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니, 임금은 마땅히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고서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고서 만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몸소 행하여 마음에 얻고 나서 시행하시어 조정의 정치가 모두 다 바르게 된 연후에야 백성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흥기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직은 곧 공직에서 내려오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사직을 하게 되면 녹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사직의 행위는 형식적 예의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라면 그래도 비교적 자유롭겠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상당한 결심을 요구하는 행위다.

율곡이 선조 6년에 직제학 사직을 허락받고, 유몽학과 나눈 대화는 사직이라는 행위의 본래적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계유년(1563년, 선조 6년) 7월에 직제학 이이가 본직을 사면하고자 소를 세 번 올리니, 그제야 물러갈 것을 허락하였다. 삼사가 번갈아 소를 올려 이이를 만류하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유몽학(柳夢鶴)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물러갈 것을 청하여서 물러가게 되었으니 유쾌한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사람들마다 모두 물러갈 마음이 있으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겠는가”

하니, 이이가 웃으며,

“만일 위로는 삼정승으로부터 아래로는 참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물러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형세가 자연히 태평하게 될 것이니, 국가를 부지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