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과 율곡


 

향약과 율곡

 

<한국민족대백과> “향약” 항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약은 넓은 의미로는 향촌규약,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약계(鄕約契), 향안(鄕案),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안(洞安), 족계(族契), 약속조목(約束條目)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원칙적으로 향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숭유배불정책에 의하여 유교적 에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었다.

향약(鄕約)이라는 용어가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체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전국적으로 시행, 보급되면서부터이다.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 남전현(陝西省 藍田縣)에 거주하던 도학자 여씨(呂氏) 4형제(大忠, 大防, 大釣, 大臨)였다. 이 중 여대림은 일명 여박사(呂博士)로 불리는 이정(二程)의 고족이다.

이들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내걸고 시행하였는데, 이것을 후대에 남전향약이라고 불렀다. 그 후 주자가 이 향약을 가감 증보하여 보다 완비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그의 문집인 <주자대전>에 수록하였다.

조선 향약의 대표적인 역할을 한 것은 퇴계 이황(李滉)의 예안향약(禮安鄕約)과 율곡의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이다. 특히 율곡은 「서원향약」을 비롯한 4종류의 향약을 제정하고 일생을 향약과 관련하여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청년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향리 교도에 진력한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그런데 <연려실기술> “향약의 시행을 정지하다” 항목을 살펴보면, 선조 초년 율곡은 향약 시행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갑술년(1574) 1월에 이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근일에 여러 번 신하들이 향약을 시행하고자 급하게 청하였으므로 전하께서 시행하라고 명하시었으나, 신의 뜻에는 향약을 시행하는 것이 너무 이른가 합니다. 백성을 기르는 것이 먼저 할 일이고 가르치는 것은 그 뒤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민생의 곤궁이 오늘날보다 심한 때가 없사오니, 빨리 폐단을 제거하여 먼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져낸 후에야 향약을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교화는 쌀밥과 고기에 비할 수 있는 것인데, 만일 위장이 몹시 상해서 미음이나 죽도 내리지 못한다면 쌀밥과 고기가 아무리 좋아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나도 그 시행이 어려운 줄을 알았으나 이제 이미 시행하라고 명하여 놓고 중지시킨다면 어찌 될까.”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백성을 기른 연후에는 향약을 시행할 것이니, 이것은 중지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지시켜야 한다 하기도 하고 정지시킬 수 없다 하기도 하였는데 임금이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갑술년(1574)은 선조 7년이다. 두 해 앞서 임신년(1572) 10월에 대사간 허엽(許曄)이 향약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오활하며 해괴한 풍속일 뿐이다.”

하고 듣지 아니하였는데, 다시 계유년(1573) 9월에 삼사가 번갈아 소를 올리고, 8도의 군ㆍ읍의 선비와 백성이 향약 시행을 여러 번 청하자 선조가 시행을 허락하였다. 이때 율곡은 직제학으로 선조에게 향약 시행과 관련하여 간언을 하는데, 갑술년의 입장과는 달리 향약 시행을 동의하였다.

이이(李珥)가 직제학이 되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향약은 삼대(三代)의 법인데 전하께서 시행하도록 명하시니, 진실로 근대에 없던 경사입니다. 그러나 다만 무슨 일이든지 근본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니, 임금은 마땅히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고서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고서 만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향약은 만백성을 바르게 하는 법이니, 조정과 백관이 바르게 되지 아니하였는데 먼저 만백성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만 다스리는 것입니다. 일이 반드시 성과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이제 이미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중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몸소 행하여 마음에 얻고 나서 시행하시어 조정의 정치가 모두 다 바르게 된 연후에야 백성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흥기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근거하면, 임신년(1572) 10월에 대사간 허엽(許曄)이 향약 시행을 요청하는데 선조는 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다가, 해가 바뀌어 계유년(1573) 9월에 향약 시행을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계유년에 선조가 향약 시행을 윤허했을 적에 율곡은 향약 시행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는데, 다시 다음 해인 갑술년에는 향약 시행을 연기할 의사를 내비친다. 율곡의 이러한 입장 변화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는 <연려실기술>의 내용만으로는 알 길이 없지만, <석담유사>에 기록된 율곡의 글을 통해, 율곡이 시기상조론을 펼친 이유를 대강이나마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가 살피건대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은 그 강령이 바르고 조목이 갖추어졌으니, 이것은 사군자(士君子)가 서로 규약을 정하여 예법을 행하는 것이요, 가히 범범하게 무식한 백성에게 시행시키지 못할 것이다. 주자(朱子)가 동지를 거느리고 그것을 실행하려 했다가 못했거늘, 하물며 오늘날은 말세여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그 항심(恒心)을 잃고 애비와 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흩어지는데, 급히 결속시켜 유자(儒者)의 품행으로 몰아넣으려 하니, 참으로 옛말에 이른바 결승(結繩)하는 정치로 어지러운 진(秦) 나라의 뒤를 이으려는 것이요,

간우(干羽 요순 시대에 하던 군중(軍中)의 춤)의 춤으로 평성(平城 한 고조(漢高祖)가 평성에서 흉노(匈奴)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경우를 당하였다.)의 포위를 풀려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하물며 약정(約正) 직월(直月)은 적당한 사람을 얻기 어려워서 시골의 호족들이 반드시 백성들에게 폐만 끼칠 것이다. 허엽과 같은 오활하고 망녕된 선비는 한갖 예전 일이 좋은 줄로만 알 뿐 시대의 급무도 모르고, 정치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천천히 할 일과 급히 서두를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향약을 시행하여 말세의 풍속을 만회하려고 하니 틀린 소견이 아닌가.

율곡은 향약이 백성들의 삶을 돕기 보다는 도리어 삶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또한 갑술년에 선조에게 아뢴 시기상조론을 보면, 향약의 기능이 경제적 요소보다는 교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율곡은 맹자 왕도정치론을 원용하여, 먼저 의식주를 해결한 후에 향약(교화)을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고중세사사전>에“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향약을 만든 사람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후 영조·정조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실시된 향약은 이이의 향약으로, 그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향약은 본질적으로 피지배계급을 엄격한 봉건적 질서와 신분질서에 얽매고 억압하는 조직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라고 한 설명에서 “경제적으로 착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라는 설명은 율곡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