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행(金文行, 1701-1754)


김문행(金文行, 1701-1754)                                  PDF Download
문행은 자는 사빈(士彬)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증조부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고, 조부는 김창국(金昌國)이며, 부친은 돈령도정(敦寧都正)을 지낸 김치겸(金致謙)이다.

김수증은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그 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공은 1726년(영조 2)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음해인 1747년 수찬(修撰), 겸사서(兼司書), 겸문학(兼文學), 부교리, 응교(應敎)를 역임했다. 1748년에는 사간(司諫), 보덕(輔德), 익선(翊善) 및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했다. 1753년에는 승지(承旨)에 올랐고, 좌승지(左承旨)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문행이 부교리가 되는 과정이 영조 22년 “홍문관 도당록 회권” 항에 나온다. 영조가

“오직 인재를 가려 쓰는 과정에서 저절로 비율이 맞는다면 좋겠지만, 만약 서로 비율을 맞추려는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곧 색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문벌만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아주 옳지 못하다. 권점을 받은 사람이 그 직책에 걸맞지 않을 것 같으면 경들을 문책하겠다.”

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회권을 했는데, 6점에는 정순검(鄭純儉)·민백상(閔百祥)·김양택(金陽澤)·윤동도(尹東度)·김문행(金文行)이 뽑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6점이 최고점이다.
부교리로 임명 받은 김문행은 영조 22년 12월경에 종조부인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을 신원하는 소를 올렸다. 김창집은 김수항의 아들로,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해, 김대비(金大妃 : 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김문행의 상소는 문제가 되었던 “삼자(三字)”와 “삼변(三變)”에 대한 신원이 나온다. 삼자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신택군(臣擇君)’이라는 말이다. 삼변은 경종 원년(1721) 세제(世弟)의 대리 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측에서 처음에 대리 청정의 하교를 거두어 달라는 정청(庭請)을 베풀었다가, 경종이 뜻을 굽히지 않자 대리 절목(代理節目)을 정하여 연명으로 차자[聯箚]를 올리고, 소론의 조태구(趙泰耉)가 경종을 알현하자 이를 따라 들어가 대리 청정의 하교를 환수할 것[反汗]을 청하였는데, 소론측에서 이러한 정청·연차·반한을 삼변(三變)이라 하여 노론의 죄목으로 삼았다.

“신의 종조(從祖) 충헌공(忠獻公) 신 김창집(金昌集)이 4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선대왕의 두터운 신임과 백발 단충(白髮丹忠)의 포장을 가장 많이 입어, 지우(知遇)에 감격한 나머지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위중하고 후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음에 이르러서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불안해 하다가, 마침내 두세 대신과 동심협력하여 위로 우리 자전(慈殿)과 경묘의 뜻을 받들어 드디어 큰 계책을 결정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화를 당하였습니다. ……

‘신택군(臣擇君)이라는’ 세 글자의 죄인은 신으로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만, 삼종(三宗: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송사를 하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오히려 우리 임금의 아드님이라며 추대를 하였는데, 더구나 신의 종조(從祖)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일찍이 민진원에게 대책을 결정한 일로써 말하기를, ‘오늘날 왕자가 많았다면 사변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겠으나, 우리 임금의 아드님은 오직 한 분뿐이고 또 천명과 인심이 이미 이리로 쏠리었으니,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민진원이 일찍이 이 말을 가지고 어전에 앙달하였으니, 대저 민진원의 충직한 성품으로 반드시 사사로이 아부하여 임금의 귀를 속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삼변(三變)의 설에 있어서는 그 때의 사세는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대개 대리 청정의 교명이 세제 책봉 초에 갑자기 내려졌으므로, 백관을 거느리고 감히 도로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는 것은 사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비답이 간절하여 ‘〈세제가 옳은가?〉 좌우의 〈신하들이〉 옳은가?’라는 전교가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곧바로 정청(庭請)을 철회하고 성명(成命)을 받드는 것 역시 사세로 보아 당연한 처사였으니, 이것이 정청을 연차(聯箚)로 바꾸게 된 동기입니다. 북문을 몰래 열고 역적 조태구가 갑자기 들어가니, 또 무슨 모양의 화를 일으킬지 몰라 다급하여 호흡을 다투는 판이었으니, 앞뒤로 함께 들어간 것은 뜻밖의 변고를 막자는 의도였으며, 절목(節目)을 작환(繳還)한 것 역시 눈앞의 다급한 사태를 미봉하자는 의도였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한결같은 정성은 참으로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얼굴을 찌푸리고 길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지금의 세태를 보건대, 설령 성명을 봉행했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변고가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우선 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단서를 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하였습니다. 아! 앞뒤로 청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며 사세에 따라 대응한 것들이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하자는 의도였고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을 보위하자는 의도였으니, 실로 일분의 사심도 그 사이에 개입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해가 함께 밝혀 주고 있습니다. ……

전하께서 신의 종조를 표창한 일이 또한 많기는 하나, 오직 이 ‘세 글자’ 및 ‘삼변’의 설만은 지금까지 분변하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경신년(영조 16년, 1740)의 비망기에 아직도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이 많이 있으니, 지난날의 흉당들이 이를 구실로 삼아 무고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논하는 자들도 오히려 그때의 처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과거를 깨끗이 씻어버리려는 성상의 초심(初心)에 손상이 되지 않겠으며, 또 지하에서 품고 있는 억울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내가 깊이 알고 있다.”

하였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김면행(金勉行, 1702-1772)


김면행(金勉行, 1702-1772)                                  PDF Download

 

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증조부는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수익(金壽翼)이고, 조부는 호조정랑을 지낸 김성후(金盛後)이다. 부친은 진산군수였던 김시민(金時敏)이고, 생부는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김시서(金時敍, 1681-1724)이다. 김시서는 문중의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에게서 수학했다. 그는 1721년(경종 1) 증광사마시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남인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어서 벼슬 생활을 포기하고 은거하였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 2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아들 김이정(金履正)은 1765년(영조 41) 식년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 4등으로 급제하여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영조 32년에 정언이 되고, 35년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에 공이 있다하여 가자(加資) 되었다. 35년에 승지에 제배되어 소임을 다 하던 중에 38년 6월에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은 건으로 찬배(竄配)의 처분을 받았다.

영조가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가뭄을 민망히 여겨 비가 오는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헌납 박치륭(朴致隆)이

“신이 지난번 듣건대, 용안현감 이정(李瀞)이 상소를 안고 와서 올리다가 후원(喉院, 승정원)에서 물리침을 당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뽑아 정원 문 밖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합니다.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궁궐 안에 이처럼 변괴의 일이 있었는데도 끝내 보고하지 않았으니, 거의 옹폐(壅蔽)하는 데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때의 정원에 있던 승지(承旨)는 아울러 삭직을 명하소서.”

라고 하자, 영조가 죄가 삭직에 그쳐서는 안 된다.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의 해방(該房) 승지가 김면행이었다.

 

그러나 8월에 영조는 처분이 지나쳤다고 하고, 다음해 영조 39년에 대사간에 임명한다. 이후 승지와 대사간을 교대로 역임하던 중, 영조 47년 대사간으로 재임 중에 조엄(趙曮, 1719-1777)에 관한 일로 체직 당한다.

조엄은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하여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다. 후에 제주도에서는 그의 성을 붙여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불렀다.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영조 46년(1770) 조엄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 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다.

이 건과 관련하여 영조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조엄의 함답(緘答)을 읽도록 명하였다. 비국 당상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신이 관서(關西)에서 온 사람에게 상세하게 물어보니 3자의 설은 실제로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대신(大臣) 및 여러 비국 당상들도 모두 신회의 말과 같았으나 영조가 여전히 의심스럽게 여겨 태천현감 이종영(李宗榮)과 전 의주부윤 홍억(洪檍)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하문하였는데, 모두가 이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또 전 서장관(書狀官) 이명빈(李命彬)을 불러다 사행(使行) 때 백성들이 정말로 눈물로서 간절히 하소연했는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이명빈 또한 울부짖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을 한다.

이때 김면행이

“3자의 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놀랍고 비참하게 합니다만 풍문은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마땅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청컨대 암행어사를 가려 보내어 염찰하고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라고 한다. 영조는 암행어사를 보내는 것이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대신이 청할 바가 아니라고 책망한다. 이를 두고 정언 남주로(南柱老)가 김면행이 암행어사를 청한 것은 사체(事體)가 경솔하다고 하면서 파직을 요청하자 그대로 했는데, 조금 있다 김면행을 다시 우윤에 제배한다.

 

훗날 정조 8년에 정조가 하교하기를,

“기묘년(1759, 영조35) 책례 때의 상례(相禮)는 바로 참의 김면행(金勉行)이었는데 그의 아들 김이정(金履正)이 마침 승품(陞品)할 대상에 올랐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직 후임이 차출되지 않은 상례에 전 교리 김이정을 의망(擬望)하여 들이라고 분부하라.”

라고 하였다.

 

정조는 효의왕후와의 사이에 자손이 얻지 못했다. 그러다 나인 출신인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를 얻는다. 이때가 1782년 9월로 정조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만 22개월째인 1784년 7월 세자책례를 올린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에 해당한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단명한 세자가 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영조실록⌋
⌈일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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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李縡, 1680-1746)


이재(李縡, 1680-1746)                                           PDF Download

 

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심정진은 「제미호선생문(祭渼湖金先生文)」에서 사도의 도통을 논하면서 중국에서는 맹자 이후로 이정과 주자를 들고 동방에서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을 이어서 도암 이재를 들었다. 그의 문하에 미호 김원행, 역천 송명흠, 녹문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숙종 경신년(1680) 9월 28일에 태어났다. 임신 중에 민부인이 달이 수중에 드는 꿈을 꾸었는데 광채가 방에 가득하였다. 5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중부(仲父) 충숙공이 가르침을 심히 부지런히 하셨고 안으로는 민부인의 인도가 또한 엄격하였다. 일찍이 베틀에 임할 때 실을 짜서 쌓아야만 한 필을 이룬다고 하여 학문도 중간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니 명심하여 실추하지 않고 육예(六藝)와 학업을 일찍 성취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 1) 예조참판, 강화부유수,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산릉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토목의 일을 감독하여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의대부에 가해졌으며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신축년(1721) 겨울에 경종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 측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대신들이 백료를 이끌고 명을 거두기를 정청(庭請)했는데 참여하지 않고, “우리 왕께서 만일 병이 없고 후손을 낳을 바람이 있다면 진실로 후사를 미리 세울 필요가 없지만 이미 병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참결(參決, 세제인 영조에게 국정에 참여하여 결정하라는 명)하라는 명을 하였으니 다만 마땅히 받들어야 할 것이지, 어인 일로 억지로 다투어 論執하는가?”하였다. 얼마 후에 신임옥사에서 중부 충숙공 이만성(李晩成)이 조옥(詔獄)에 유폐되어 죽자 예로써 염장(斂葬)하고 인제 골짜기로 들어가 더욱 경전에 힘써 날마다 과정을 두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여러 해 풍비(風痹)를 앓다가 병인년(1746)에 화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치료에 좋겠다고 하여 이에 가까운 고을의 벗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별하였다. 발행(發行)하여 광주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서 낙생촌사(樂生村舍)에서 영명했는데, 이때가 10월 28일이었다.

항상 율곡의

‘한 터럭이라도 성인에게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마치지 않은 것이다.’

라는 말을 애송하고

“율곡은 나의 스승이시다.”

했다. 율곡의 明通하고 쇄락한 운치에 스스로 묵묵히 계합한 바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일찍 아버지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여 모부인을 섬김에 깊은 사랑이 뜻을 봉양하는 효성에 드러났다. 거상(居喪)에 미쳐서는 채소만을 먹고 흡혈(泣血)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하여 노쇠한 나이라고 하여 스스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례를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날마다 선영에 올라가 둘러보며 슬프게 살펴보았다. 말년에는 행보를 하지 못해 매번 견여(肩輿)를 타고 집 뒤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묘소를 바라보고 부복하였는데 그 언덕을 첨경대(瞻敬臺)라고 불렀다.

예학(禮學)에도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영조 을미년(1775)에 정조가 서무를 대신해서 들을 때 특별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하사하여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이 이재의 묘표를 짓고 그 마지막에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다.

“적이 논하건대 유자(儒者)의 일은 세 가지가 있으니 바른 진퇴, 정밀하게 발휘함, 크게 창명(倡明)하는 일이다. 셋이 갖추어진 연후에 비로소 성덕(成德)의 대현에 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선생은 비록 구학에서 뜻을 감추고 은거하였으나 종국(宗國)에 대한 근심은 간절하여 출사와 은거, 말과 침묵이 시대의 오륭(汚隆)에 관계되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윤리강상이 서지 않으면 차라리 죽더라도 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에 안주함)하여 후회하지 않았다. 민락(閩洛)이 이미 멀어 미언(微言)이 손상되자 이기와 심성에 대해 어지럽게 쟁송이 모이니, 이에 본원을 연구하고 진체(眞諦)를 지시하여 여러 어지러움을 꺾고 뭇 사람들의 미혹을 열어주었다.

이에 사도(師道)를 높이 들어 가르침을 널리 열고 순순히 인도하사 문채를 성대하게 일으켜 모범은 당시에 성행하였고 공리는 무궁한 후세에 미쳤으니, 체용을 겸전하고 중선을 다 갖추어 진실로 명세(命世)의 유종(儒宗)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즉 선생은 비록 조정에서 예복을 입고 바르게 서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초심은 이루지 못했지만 필경에 성취한 바는 이와 같이 탁연하니 과연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옛날 장경부(張敬夫)가 이르길 ‘회옹부자(晦翁夫子)가 한가한 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궁구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하였으니 거의 먼 후세에도 부절을 합친 듯하다. 오호라 성대하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김동준, 「도암 이재의 삶과 시문학」,「한국한시작가연구」 14호, 2010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