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李采)


이채(李采)                                                                       PDF Download

 

이채의 초상화. 이 그림은 보물 제14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채의 초상화. 이 그림은 보물 제14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채(李采, 1745∼1820)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대사간을 지낸 이제원(李濟遠)의 아들이며, 숙종에서 영조 시대까지 낙론(洛論)을 대표한 이재(李縡, 1680∼1746)의 손자이다.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정조가 전국에 농업에 대한 의견을 구하였을 때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농지의 제한, 농지세의 균등 부과, 상공업 억제 등의 정책을 건의하였다. 순조에게 맹자를 강의하기도 한 그는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745년(1세, 영조 21년)
본관은 우봉(牛峯), 즉 지금의 황해도 금천이다.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다.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이제원(李濟遠, 1709∼1752)이며, 할아버지는 이재(李縡, 1680∼1746)이다. 이재는 숙종에서 영조 시대까지 노론(老論)의 낙론(洛論)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의 저서 도암집(陶菴集)은 이채가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1752년(7세, 영조 28년)
부친 이제원(李濟遠)이 사망하였다. 부친은 1736년 알성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이후 세자시강원 문학, 승문원 교리,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등을 역임하였다. 1749년, 즉 이채가 4살 때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대사건 재직시 그는 노론과 소론의 당론을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신임사화로 사형을 당한 노론파 김창집 등을 복권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파직당했다. 이후 3년 만에 향년 43로 사망하였다.

 

1774년(29세, 영조 50년)
과거시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진사가 되어, 다음해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 후 사헌부, 호조, 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주부를 지냈다.
음죽현감에 재직시 모함을 받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그 뒤 학문에 전념하면서 할아버지가 남긴 문장을 모아 편찬하는 등 가업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778년(33세, 정조 2년)
할아버지 이재(李縡)가 남긴 시문을 모아 편찬 작업을 하였다. 할아버지의 문집 간행 작업은 그동안 제자들이 시도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지지부진하였다. 이 채는 할아버지 제자 중 생존해 있던 이의철(李宜哲)에게 연락하여 같이 작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의철이 곧 사망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1790년(45세, 정조 14년)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홍릉령(弘陵令), 지례현감(知禮縣監), 선산 부사, 상주 목사, 충주 목사, 익위사 위수 등의 관직을 거쳐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지례 현감 재직시에는 농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둑을 쌓았는데, 주민들은 그 둑을 이공제(李公堤)라 불렀다.

 

1796년(51세, 정조 20년)
윤시동(尹蓍東)에게 편지를 보내, 할아버지 유고의 편집 작업이 아직 지체되고 있음을 전했다.

 

1798년(53세, 정조 22년)
정조는 이 해에 전국에 농업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는 칙명을 내렸다. 이채는 이에 응해서 장문의 농정 상소문 「농서(農書)」를 올렸다. 이 글은 그의 『화천집(華泉集)』에 실려있는데, 그는 농정의 4대 요건으로 한전(限田, 농지를 제한해야한다), 균부(均賦, 농지세를 균등히 해야 한다), 금유수(禁遊手, 빈둥거리며 노는 일을 금해야한다), 억말리(抑末利, 상공업을 억제해야한다) 등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정책을 건의하였다.

 

1800년(55세, 정조 24년)
우사어(右司禦) 즉 세자익위사 소속의 종5품 문관으로 있을 때인 3월부터 5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세자(순조)에게 『맹자』를 강의하였다. 이 강의 내용은 『화천집(華泉集)』제3권 「서연독맹자(書筵讀孟子)」에 실려 있다.

 

1803년(58세, 순조 3년)
드디어 할아버지 문집 정리 작업을 완료하고, 편집을 마쳤다. 결과물을 「도암집(陶菴集)」 50권 25책으로 완성하여 활자로 간행하였다.

 

1806년(61세, 순조 6년)

4월, 할아버지의 제자 양응수의 선산에 알 수 없는 묘가 만들어져서 이의 제거를 남원부사에게 부탁하는 편지를 쓰다.

 

1820년(75세, 순조 20년)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 『화천집(華泉集)』 16권 8책이 있다. 「화천집」은 모두 16권 8책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1886년, 고종 23년에 손자 이희(李熙)가 간행하였다.

제1권과 제2권에는 시가 모두 261수 실려 있다. 제3권은 소(疏) 2편, 강의(講義) 1편, 서(書) 6편, 제4권과 제8권은 서 81편이, 제9권에는 서(序) 8편, 기(記) 10편, 전(傳) 1편, 제발(題跋) 19편, 명(銘) 1편이, 제10권은 잡저 13편, 책(策) 1편, 전장(箋狀) 10편, 상량문 1편이 실려있다. 특히 이 10권에는 당시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각지의 향교와 서원에 보낸 유서(諭書)가 실려 있다.

제11권은 고문(告文) 15편, 제문 20편이 실려 있으며, 제12권은 제문 28편, 애사 2편이 실려있다. 제13권은 비(碑) 2편, 묘갈명 11편, 묘표 9편, 그리고 제14권은 묘지명 14편, 제15권은 묘지 8편, 제16권은 행장 6편이 실려있다. 부록에 묘표·후지(後識) 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이채의 글 가운데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농업 등 다방면에 걸쳐 깊이 있는 글이 많다.

 

참고문헌)
도암집(陶菴集) 해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천집(華泉集)』 해제

최신지(崔愼之)


최신지(崔愼之)                                                             PDF Down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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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崔愼之)는 호남의 유학자로, 자(字)는 우신(又愼), 호(號)는 황파(黃坡)이며,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다. 최송덕(崔宋德)의 아들로,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년∼1772년)의 문인(門人)이다.

김원행은 김창집의 손자이며, 담헌 홍대용의 스승이기도 하다. 김원행 집안은 노론으로,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정권의 핵심에 있었으나 집안의 어른들이 사형을 당한 뒤로, 평생 서원에 은거하며 제자를 키웠다. 최신지는 그에게서 배우고, 문집 황파유고(黃坡遺稿)를 남겼다.

 

1748년(1세, 영조 24년)
정월 8일, 유등곡면(柳等谷面) 황산리(黃山里)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광주 광역시 남구 지석동에 해당된다. 최신지는 어려서 이웃마을에 사는 박찬혁(朴纘赫)에게 글을 배웠으며 나중에 김원행(金元行)에게 가서 유학을 배웠다.
스승 김원행은 최신지에게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그 내용은 마음을 한 곳, 즉 경(敬)에 집중하고 다른 일에는 마음을 두지 말라는 뜻이었다. 스승이 사망하자, 스승의 아들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을 따라 배우며 사귀었다. 김이안의 삼산재집(三山齋集)(卷之六)을 보면 최신지에게 보낸 글(「答崔愼之」)이 보인다. 부모의 장례와 관련된 글이다.

 

1797년(49세, 정조 21년)
광주목사 서형수(徐瀅修)의 추천으로 ⌈어정대학연의(御定大學衍義)⌋를 교정(校正)하였다. 이 교정작업은 정조가 직접 지시한 것으로 호남 지역 유생들이 참여하였다. 정조는 ⌈어정 대학연의(御定大學衍義)⌋외에 ⌈연의보(衍義補)⌋, ⌈어정 주자대전절약(御定朱子大全節約)⌋ 등을 저술한 뒤에, 특별히 호남지역 유생들에게 교정을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정조는 이해 겨울에 광주목사 서형수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겨울 들어 연말까지 73일 동안 스물일곱 번 큰 눈이 내렸다. 세밑 전에 큰 눈이 내렸으니, 내년에는 큰 풍년이 점쳐져 속으로 기뻤다. 매서운 추위가 아교도 꺾을 정도인데 한결같이 편안한가? 한 해가 곧 넘어가려 하니 그대가 보고 싶은 마음이 평상시보다 곱절이나 더하다. 여기서는 나날이 마음과 마음이 초가집에 누더기를 입은 백성들에게 향한다. 그들을 품고 보호하는 방법이 그릇되어 유랑하는 자들이 길에 이어졌다고 남쪽에서 전해오는 소식에 귀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이하 생략)”

1798년(50세, 정조 22년)

국왕 정조는

“(교정을 보아) 올려 보낸 글들을 보니 뛰어난 구절과 훌륭한 작품이 많았다. 지금 이 재능을 살피고 장점을 비교하는 일은 곧 호남의 재능 있는 선비들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라고 하면서, 호남 지역 유생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직접 과거 문제를 내서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시험장소는 광주(光州) 명륜당(明倫堂)이었는데, 장원을 차지한 사람은 고정봉(高廷鳳)과 임흥원(任興源)이었다. 최신지는 「어제경의조문책(御製經義條問策)」을 지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빈번히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는 부모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었을 때는 고기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평소에는 속된 말을 잘 하지 않았으며,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816년(68세, 순조 16년)
직지 조만영이 그를 특별히 추천하였으나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22년(74세, 순조 22년)
정월에 사망했다. 1921년 손자 최상정이 남긴 글을 모아 유고를 편집하였으며, 증손자 최윤환이 황파유고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黃坡遺稿』는 4권 2책 7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권에는 부와 시문, 서(書)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권에는 「어제경의조문공대(御製經義條問貢對)」가, 제3권에는 기(記), 잠(箴), 제문 등이, 그리고 부록에는 묘지명,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