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의 경연 공부


 

1775년 4월 19일 : 이날의 경연 공부

 

동안 1775년 4월 19일의 경연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 배경이 되는 여러 가지 사정을 살펴보았다. 영조와 정조시대가 예술 분야를 살펴보면, 조선의 미술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던 진경산수의 시대였다는 점, 그리고 실학의 시대였으며, 실학과 서학이 유행하고 있던 시대였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1775년의 내외적으로 국가가 평온하였던 시기였으나, 사실상 서구 문명의 폭풍, 즉 천주교가 밀려오기 직전의 시기였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궁중에서는 영조와 정조의 정권 교체기에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암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시기에 영조와 정조는 경연에서 어떠한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날의 경연 내용은 일성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은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기록한 것이다.(중간 중간에 설명문을 삽입하여 재구성하여 읽어보기로 한다.)

임금(영조)께서 이어서 홍문관에 나아가셨다. 나(왕세손 정조)도 따라가서 모시고 함께 앉았다. 임금께서 ⌈소학(小學)⌋의 제사(題辭)를 강하셨다.(여기에서 소학의 제사란 ⌈소학⌋의 첫머리에 붙인 글을 말한다.)

임금께서 가르침을 내려 말씀하셨다.

“이는 경연에 참가하는 유신(儒臣, 유학자 신하)이 먼저 읽을 부분이다.”

그래서 두 유신이 먼저 읽고 나서 내(정조)가 명을 받들어 읽었다.
그러자 임금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부지런히 일어나는 사단(四端)이 느끼는 대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는가?(藹然四端, 隨感而見, 何以見之乎)”

설명) 이러한 질문을 영조가 하게 된 것은 유신들과 정조가 읽었던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元亨利貞, 天道之常,
원형이정은 천도의 변함없는 상(常)이다.

仁義禮智, 人性之綱.
인의예지는 인간 본성의 벼리다.

凡此厥初, 無有不善.
무릇 처음에는 착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藹然四端, 隨感而見.
부지런히 일어나는 사단은 느낌에 따라서 드러난다.

愛親敬兄,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忠君弟長,
임금에 충성하며 어른께 공손함은

是曰秉彛, 有順無彊. 그
것은 천품이니 저절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4단은 선(善)을 싹틔우는 4개의 단서 즉 실마리를 말한다. 말하자면 측은지심(惻隱之心, 측은하게 느끼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남에게 사양하고 겸손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사단은 다시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사덕으로 발전한다. 영조의 질문은 사단이란 마음의 상태인데 그것을 어떻게 볼 수 있냐는 질문이다.

정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단서가 느끼는 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조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영조는 이러한 대답이 다소 부족하다고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힌트를 준 것이다.)

“느낀다는 글자에 뜻이 있다.”

정조는 그래서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한 가지 단서로 말씀드리면,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나니 바로 인(仁)이 느끼는 대로 발현된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나머지 세 가지의 느낌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은 또 이렇게 물었다.

“물을 뿌려 땅을 쓸고 부름이나 물음에 응대하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인데도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근본이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설명) 이러한 질문이 나온 것은 앞서 읽은 소학 제사의 글에 “어린이의 공부 방법은 물을 뿌려 청소하고 부름이나 물음에 응대하며 집안에서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행동 하나하나 어그러짐 없는 것이다(小學之方, 灑掃應對, 入孝出恭, 動罔或悖)”라는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정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을 뿌려 땅을 쓸고 부름이나 물음에 응대하는 일은 최초의 공부이기 때문에 먼저 이러한 데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로부터 큰 일에 이르며 아래로부터 잘 배워야 위로 통달하는 공부가 되기 때문입니다.”(말하자면 작은 일을 잘할 수 있어야 큰일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금이 다시 이렇게 물었다.

“⌈소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 이와 같은데, 사람은 모두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데도 삼대(三代, 중국고대의 하은주 시대) 이후로는 더 이상 성인이 나오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설명) 이러한 질문을 영조가 하게 된 것은 앞서 읽은 문장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의 본성은 넓고 넓은 하늘이니, 더 할 것 없이 온갖 선을 갖추었다.
(惟聖性者, 浩浩其天, 不加毫末, 萬善足焉.)

보통사람들은 어리석어 물욕이 앞을 가려, 그 기본을 무너뜨리고 자포자기해버린다.
(衆人蚩蚩, 物欲交蔽, 乃頹其綱, 安此暴棄)

그래서 성인께서 측은히 여겨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 그 뿌리를 북돋아주고 그 가지를 뻗게 했다.
(惟聖斯惻, 建學立師, 以培其根, 以達其支.)

영조와 정조 사이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졌다.

정조: 삼대 이후로 ⌈소학⌋의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았으니, 성인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영조: 그렇다면 어떻게 공자(孔子)가 나오게 된 것인가?

정조: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알았던 성인입니다.
영조: ⌈소학⌋의 편제(篇題)에는 ‘회암(晦庵)’이라고 쓰고, ⌈대학⌋에는 ‘신안(新安) 주희(朱熹)’라고 쓴 것은 무슨 뜻인가?

정조: ⌈대학⌋은 경전이기 때문에 주희라고 쓴 것입니다. (여기서 ⌈대학⌋이란 주자, 즉 주희가 편집한 ⌈대학장구⌋를 말한다.) ⌈소학⌋은 주자가 직접 편집하여 아이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회암(주희의 호)이라고 썼습니다.

영조: ⌈소학⌋은 사도(師道, 선생님의 도)로 자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대학⌋과 ⌈소학⌋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크고 어느 것이 더 작은가?

정조: ⌈소학⌋이 ⌈대학⌋의 근본이 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비중으로 말한다면 ⌈소학⌋이 작습니다.

영조: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정조: 좋습니다.

영조: 어째서 좋은가?

정조: 성현(聖賢)의 말씀이기 때문에 좋습니다.

영조: 옳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내가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어찌 꼭 성인(聖人)만을 스승으로 삼을 것이 있겠는가. 춘방(왕세자 교육 담당 관청)의 관원도 스승이다. 지금 네가 나를 따라와서 여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즐거운가?

정조: 즐겁습니다.

이어서 영조는 같이 참석하는 관원들에게 글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보덕 유의양(柳義養)과 설서 조상진(趙尙鎭)이 차례로 읽었다.
읽기가 끝나자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세 살에 ⌈소학⌋ 공부에 들어갔고, 열아홉 살에 대학 공부에 들어갔다. 오늘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앉아 이미 소학을 외웠으니 또 ⌈대학⌋을 외울 것이다. 경(經) 1장(章)을 진강(進講)하라.”

대학 경1장은 소위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정조는 영조의 명을 받들어 그 부분을 읽었다.
영조는 또 이렇게 질문했다.

영조: 이미 ‘밝은 덕〔明德〕’이라 해 놓고 또 ‘명(明)’ 자를 그 위에 더한 것은 어째서인가?

정조: 밝은 덕은 본래 밝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타고난 기질이 고르지 않아 물욕(物慾)이 번갈아 밝은 덕을 가려 본체(本體)가 때로 어두워지기 때문에 이를 밝히는 것입니다.

영조: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종시(終始)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정조: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본(本)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말(末)이며, 앎을 지극히 하는 것이 시(始)이고 능히 터득하는 것이 종(終)입니다. 본과 시가 우선이고, 말과 종이 나중입니다.

영조: 궁관들에게 질문해 보라.

정조: (유의양을 향하여)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종시(終始)가 있는데, 물에서는 본(本)을 먼저 말(末)하고 말을 나중에 말하였으면서 일에서는 종(從)을 먼저 말하고 시(始)를 나중에 말하여 순서가 다르니, 어째서인가?

유의양: 물은 형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말이라고 말하였고, 일은 움직여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시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시종이라고 말하였다면 그것이 종에서 그쳐 버리게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종시라고 말하여 끝났어도 다시 시작하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영조: 춘방(유의양)도 세손(정조)에게 질문해 보라.
유의양: 밝은 덕(明德)을 심(心)이라 하기도 하고 성(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어디에 속해야겠습니까?

정조: 성(性)이라고 한다면 심(心)과 정(情)을 빠뜨리게 되고 심(心)이라고 한다면 뜻이 갖추어지지 않을 듯하다. 선정(先正) 율곡(栗谷)이 설한 대로 본심(本心) 두 글자로 보는 것이 좋겠다.(이어서 조상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의 주석에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밝은 덕을 밝힐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윗사람으로 하여금 밝히게 한다는 것인가, 아랫사람이 스스로 밝힌다는 것인가?

조상진: 윗사람이 밝히는 것입니다.

영조: ⌈소학⌋에서 말한 물을 뿌려 땅을 쓰는 일을 잘하게 되면 대학에 있어 쉬운 것인가?

정조: ⌈소학⌋에 힘쓴다 해도 ⌈대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어찌 쉽겠습니까?

영조: ⌈대학⌋과 ⌈중용⌋ 중에서 어느 것이 어려운가?

정조: ⌈중용⌋과 ⌈대학⌋은 서로 표리 관계이니 어찌 쉽고 어려움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조: 너도 나이가 삼십에 가까워 안으로는 근시(近侍, 가까운 시종자)로부터 밖으로는 춘방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다. 인심과 세도(世道)가 옛날에 비해 어떠한가?

정조: 신이 옛날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정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진다.

임금께서 이러한 나의 답변에 칭찬하셨다. 이어 어제(御製) 한 구절을 쓰라고 명하셨는데, 나와 신하들이 명을 받들어 화운(和韻)하여 올렸다. 상께서 가르침을 내리시기를,

“그 관원들은 화운하여 낸 뒤에 상전(賞典)을 내릴 것이고, 홍문관의 이례(吏隷)들에게 먼저 호조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상을 주게 하라.”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아, 오늘 이렇게 거행한 것은 만년의 깊은 뜻이 있으니, 어찌 그럭저럭 돌아갈 수 있겠는가. 화운하라, 화운하라. 상전, 상전 또한 어찌 화운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오늘 나온 춘방 중에 준직(準職)인 자들은 숙마(熟馬) 1필씩을 주고, 나머지는 모두 한 자급씩 올려 주며, 지금 참하(參下)로 있는 자는 6품으로 올려주라”

고 하였다.

이날 영조는 정조와의 경연을 몹시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이제 자신의 대를 이어 국왕이 될 정조가 소학과 대학, 나아가 중용 등 주요 유학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왕세손 정조의 유교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들에게 상으로 말 1필씩 내리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 시대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영·정조 이후 서양에서 밀려온 근대문명에 의해서 완전히 서구화되어 있다. 당시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수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할 정치가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오히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것 같다.

정조가 조상진에게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다면 그 일을 누가 먼저 하는가 묻자, 조상진은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윗사람이 밝히는 것입니다.”

1775년 4월 봄날 영조와 정조가 유교 경전을 가지고 공부를 했던 그날, 조선의 두 지도자가 가슴에 새기고 있었던 지도자 상은 자기 스스로 밝은 덕, 즉 순수하고 지고한 덕을 스스로 닦은 일이었다.

조선은 비록 시대의 흐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서양문명의 파도에 휩쓸려 멸망의 길을 걸었지만, 존경받는 조선의 국왕들이 가졌던 정신은 높이 평가해야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도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였으나, 왕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백성을 생각하게 하고, 당신이 만인의 공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도덕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도록 요구하고, 그러한 요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제도까지 부정할 일은 아니다.

서구적인 대통령제의 미숙하고도 잘못된 운영으로 파탄 나버린 오늘의 국정을 지켜보며, 조선시대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영조와 정조 시대의 하루를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