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등장


 

1775년 4월 19일 : 율곡의 등장

 

1775년 4월 19일 ⌈일성록⌋ 기록을 보면 갑자기 율곡 이야기가 이렇게 등장한다.

 

유의양이 물었다.

“밝은 덕(明德)을 심(心)이라 하기도 하고 성(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어디에 속해야겠습니까?”

왕세손 정조가 답했다.

“성(性)이라고 한다면 심(心)과 정(情)을 빠뜨리게 되고 심(心)이라고 한다면 뜻이 갖추어지지 않을 듯하다. 선정(先正) 율곡(栗谷)이 말씀하신 대로 본심(本心) 두 글자로 보는 것이 좋겠다.”

대학⌋을 가지고 강연 공부를 하다가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화에서 우선 궁금한 것은 어째서 갑자기 ‘선정(先正) 율곡(栗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선정’이란 뜻은 ‘앞선 바름’ 즉 앞서 이전에 활동한 현명한 ‘신하’를 뜻한다. 신하는 유학 관료, 혹은 유학자라고도 바꿀 수 있다. 조선시대에 현명했던 유학자가 율곡뿐이었을까? 그리고 대학에 대해서 율곡만이 밝은 덕, 즉 ‘명덕(明德)’을 논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정조는 수많은 학자들 중에서 율곡을 특히 존경했으며, 율곡은 그 시대에 조선의 손꼽는 현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율곡은 이렇게 유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정조의 존경을 받게 되었을까? 일본학자 야마우치 코이치(山内弘一)가 2006년도 제19회 율곡문화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던 논문을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야마우치는 율곡의 사상적인 측면보다는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추이를 지켜보면서 율곡이 조선의 국가적인 학자가 되어가는 과정, 즉 문묘에서 종사(從祀)되는 과정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조선 왕조에서 유학자에게 최고의 영예는 문묘종사(文廟從祀), 즉 문묘에서 종사(從祀, 제사지내 모심)되는 일이다.
문묘종사는 조선의 국왕이 ‘유학자를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며(崇儒重道), 문치를 훌륭하게 치장하고(賁飾文治)’ 나아가 ‘유학의 도를 밖으로 드러내며(表章儒道), 문치를 늘려서 꾸미는(増飾文治)’일을 말한다. 유교의 정신에 따라 시행하는 문치정치(文治政治) 혹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의식이 문묘종사였다.
그러나 종사되는 유학자에 대한 평가는, 종사가 행해졌던 시대의 가치관에 근거한다. 그 시대의 평가이며, 그 유학자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율곡이 문묘에 종사되는 것은 율곡이 종사되는 시점에서 율곡의 평가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율곡은 1584년 선조 17년에 병으로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는 이조판서(吏曹判書)였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다. 선조 24년에는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추존되었다. 그에 대한 당시의 존중은 이 정도에 그쳤다.

그가 후세에 전해진 것과 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광해군(光海君) 15년 즉 1609년(인조 원년)에 서인(西人) 세력이 주동이 되어 광해군을 폐위하였다. 그리고 능양군(綾陽君, 후일의 인조)이 추대되었는데, 이 사건이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이때의 서인 세력은 율곡 이이의 제자들과 밀접히 연결된다. 따라서 율곡은 친구였던 우계 성혼과 함께 새로운 인조 정권에서 특별히 존중되었다. 유교에 근거하는 문치정치 그리고 왕도정치를 표방하기 위한 중요한 인물로서 율곡과 우계 성혼이 이때부터 특별히 부상되었다.

인조반정 직후에 반정에 성공한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광해군이나 그를 지지한 북인(北人) 세력에 대한 제거 처분이 분주하게 이루어졌다.
이 해 3월에 이정구(李廷亀)가 경연의 장소에서, 율곡을 유종(儒宗: 유학에 정통한 권위 있는 학자)으로서 특별히 포상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율곡에 대해서 영의정(領議政) 등의 관직과 작위를 주고 국왕의 사절에 의해서 제사가 행해졌다.
인조실록(仁祖實錄)⌋ 3월 25일 기록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즉, 경연의 자리에서 지사(知事) 이정구(李廷亀)가

“근래의 유생 중에는, 이이와 성혼만큼 학문상의 계보가 올바른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절을 보내서 제사를 행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이와 성혼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그리고 정통성이 있는 학자로서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27일, 경연에서 율곡의 문묘종사가 제안되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특진관(特進官) 류순익(柳舜翼)이 이렇게 주장했다.

“군주가 ‘숭유중도(崇儒重道), 분식문치(賁飾文治)’하기 위해서 선현 율곡 이이를 문묘에 종사한다면, 선비들의 의견에 찬성한다.”

하지만 인조의 의견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별로 긍정적이지 못했다. 인조는

“문묘종사라고 하는 중요한 문제를 경솔하게 행할 수는 없다”

고 하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사실상 율곡의 문묘종사를 주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광해군 2년, 즉 1610년 10월에, 유생 변취정(邊就正)이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에 대한 문묘종사의 상소를 올렸다. 다만 당시는 북인(大北)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에 대한 문묘종사는 실현되지 않았다.
인조가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보이자 경연에 참가하고 있던 시독관(侍読官) 이민구(李敏求), 검토관(検討官) 유백증(兪伯曽), 헌납(献納) 이경여(李敬輿) 등이 각각 다음과 같은 발언했다.

이민구: “이이는 보기 드문 유생입니다. 신속하게 종사를 해야 합니다. 전하는 이이의 학문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경솔하게 행할 수는 없다고 하시지만, 이이의 문집을 보면 탁월한 그의 학문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백증: “이이의 종사는 나라에서 공동으로 의논할 일입니다. 이전에는 공론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전하는 문집을 볼 필요도 없이 당장 종사를 해야 합니다.”

이경여: “율곡 이이에 대한 종사 논의가 공론인 것은 전하가 이미 들은 바대로 입니다. 총명한 전하는 이이의 문집을 이미 읽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의리나 도학이 분명하지 않고, 유생의 목표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해결을 위해서라도 당장 종사를 행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 인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사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중대한 일이니까 경솔하게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이의 문인 제자나 지인들의 의견에 따라 갑자기 종사를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부터 2주 정도 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공론을 내세우며 이이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는 신하들에 대해 인조는 당황해하였다. 물론 공론이라고는 해도 이 때 나선 사람들은 인조 등극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의 공론이었다.
광해군 시대에 이러한 공론이 통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는 다른, 즉 북인(大北) 세력이 공론의 공론장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조의 말에 따르면 인조는 이러한 부분의 사정에 대해서는 당연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조의 말에 대해서, 이경여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의 요청은 나라의 공론이고, 종사해야 할 진정한 선현을 알고 있는 것으로, 호의를 가진 인물(즉 율곡)에게 아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이날의 경연관들은 인조를 설득하지 못했다. 이이의 문묘종사가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서인 세력의 인조에 대한 설득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이듬해 8월에 이이가 문성(文成)이라고 하는 시호를 수여 받았다. 이정구(李廷亀)가 저술한 「묘표음기(墓表陰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보인다.

“인조가 즉위한 초기에 경연관은 이이의 행장(行状)과 저작인 『성학집요(聖学輯要)』를 인조에게 올렸다. 인조는 이것들을 읽고 감탄하면서 이이에게 영의정(領議政)을 내려주고, 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문(文)은 ‘도덕전문(道徳博聞)’의 뜻이며, 성(成)은 ‘안민입정(安民立政)’의 뜻이었다.”

율곡에게 조정에서 영의정이라고 하는 직책을 추증(追贈)한 것은 인조 원년에 있었던 일이다. 시호의 추증과 동시에 행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추증이 실현된 것은 서인 세력이었던 경연관들이, 율곡 이이의 저작 등을 올림으로써 인조에게 율곡이 보기 드문 그리고 훌륭한 유학자임을 이해시킨 결과였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율곡에게 시호를 수여한 인조 2년 8월에 행해진 경연의 자리에서,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이이는 치국의 근본을 아는 사람인데, 조정에서 오랜 시간 활약할 수 없었던 것은 유감이다.”

이러한 발언은 이정구가 저술한 ⌈모표음기⌋에서 볼 수 있다. 문성(文成)의 성(成)은 ‘안민립정(安民立政)’의 뜻이라고 한 것과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율곡에 대해서 후세까지 이어지는 대표적인 평가, 즉 율곡은 뛰어난 경세가라고 하는 평가는 바로 이때에 공식적인 견해로 확정되었다.
그 후 이괄(李适)의 난이나 정묘(丁卯) 호란(胡亂)을 거쳐 인조 13년, 즉 1635년 5월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관학(館学) 유학자 들, 즉 송시형(宋時瑩) 등 270여명의 상소가 제출되었다.
인조는 이러한 상소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은 착한 사람이지만, 도덕은 아직 높지가 않아서 비판을 받을 만한 결점이 있다. 종사라는 중요한 문제를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라고 대답하며, 문묘 종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조의 율곡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인조의 평가 뒤에 다음과 같은 사관(史官)의 논평을 실었다.

“도학(道徳)이 고명한 이이와 실천이 독실한 성혼은 백세(百世)의 유종(儒宗)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종사의 논의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당론(黨論)이 격렬해진 이래로 현자(賢者)를 질투하고 정의를 싫어하는 소인(小人)이 잇달아 나타나서 근거도 없이 비방하는 사태가 되었다. 인조가 “도덕은 아직 높지가 않아서 비판 받을만한 결점이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도 이러한 소인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송시영 등이 신중하지 못한 채 상소를 하여, 이이와 성혼이 오히려 소인들의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어버린 것은 매우 유감이다.”

율곡에 대한 반대파들(주로 남인들. 이들은 주로 퇴계 이황을 존숭했다.)의 입장을 인조가 받아들였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럼 이 사관(史官)이 말하는 ‘소인들의 비방’이란 어떠한 것일까?
먼저 생원 채진후(蔡振後)는 율곡 자신이 쓴 문장에서 ‘일찍 어머니를 잃고 너무 슬픈 나머지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다’, ‘자신만큼 불교에 중독된 사람은 없다’라고 한 것을 문제 삼았다. 율곡이 젊었을 때 불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문묘 종사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조는 채진후의 이러한 비판을 접하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율곡 이이 등의 종사를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주제넘은 짓이니 나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진사(進士) 권적(権蹟) 등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지금의 논자가 이이와 성혼을 공맹(孔孟) 정주(程朱)의 학문적인 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다. 조선의 유종(儒宗)은 이황이 으뜸이지만, 이황의 이기설은 이이와 차이가 있다. 또 이황은 나정암(羅整庵)을 선(禅)이라고 해서 배척했지만 이이는 자기 스스로 얻은 설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이이가 불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소인들의 비방’은 율곡이 불교에 관여하였던 점과 퇴계 이황과 이기론이 서로 차이난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율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지사(知事) 조익(趙翼): 소인들은 이이와 같은 대현(大賢)조차도 미워하고 결점을 찾아, 젊었을 때 불교로 흐른 점을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예로부터 현인이 도를 추구하는 당초에는 이런 잘못된 사례가 많다. 분명하게 버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좌의정 오윤겸(呉允謙): (인조의 ‘비판 받을만한 결점이 있다’, ‘지극히 주제 넘는 짓’이라는 등의 언급에 대해) 지금 이러한 말을 발표하는 것은, 경모존신(敬慕尊信)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전하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인조실록⌋에 첨부된 안문(按文):

율곡 이이의 이기설은 탁월하여, 퇴계 이황도 살아 있었다면 인정했을 것이다. 나정암의 이기론은 몹시 뛰어난 자득설(自得說)로서, 그가 선(禪)으로 흘러갔다고 해서 그 논의의 좋은 부분을 버릴 수는 없다. 권적 등이 이 말을 붙잡고 비난하는 것은 도를 어지럽히는 소인의 논의로 취할 가치가 없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관학 유생 송시영 등의 상소를 계기로, 유생으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논의가 일어났다.
성균관 유생들의 의견도 분열되고, 그들의 처분 등을 둘러싸고 유생들이 일제히 성균관을 퇴거하여 성균관이 텅비어 버리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송시영 등의 입장을 동정했던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최명길(崔鳴吉)이 사직을 청해서 해직되기도 했다. 인조는 끝까지 종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후도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상소가 많이 나왔다. 숙종 7년(1681) 9월 27일에 종사에 반대하여 나섰던 박성의(朴性義) 등 두 사람의 상소에 의하면,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시대에는 유생의 상소가 수십 통이나 되었다. 하지만 효종과 현종도 허락하지 않았다.
효종은 경연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조시대에 종사 논의가 있었지만 인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나를 꺼리지 않고 언제나 이런 곤란한 행동을 일으킨다.”

“인조가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 사려함의 높이는 내가 미치는 바가 아니다. 인조는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경솔하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현종도 율곡과 우계를 문묘 종사하자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서 “효종이 곤란하다고 한 것을 너희들은 왜 상소를 하여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인가?”라고 짜증을 냈다.
효종과 현종의 시대에도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숙종 6년,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즉 경신환국(庚申換局)에서 남인 세력이 몰락하여 율곡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던 상황이 일변했다.
그 다음 해인 7년 9월에 관학(館學)의 학생들과 팔도유생(八道儒生) 이정보(李廷普) 등 오백여명이 송나라 양시(楊時), 나종언(羅從彦), 이동(李侗) 등 세 명과 함께 조선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두 사람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구했다.
숙종(경종과 영조의 부친)은 일단 신중한 자세를 보였지만, 다음날 경연의 장소에서 검토관(檢討官) 송광연(宋光淵)이 종사를 재촉하고 또 이정보 등이 다시 상소한 것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율곡과 우계) 두 사람의 학문은 모든 사림의 존경과 자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누가 안 된다고 할 것인가? 역대 국왕이 허락하지 않고 나도 곤란하다고 한 것은 모두 신중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림의 소원은 절실하기에 거절하는 것은 어렵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대신(大臣)들더러 도모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대신 김수항(金寿恒), 김수흥(金寿興), 정지화(鄭知和), 민정중(閔鼎重), 이상진(李尚真) 등이 모두 인정했다. 이 때문에 율곡의 문묘 종사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 해 9월 25일 경연 때에는 영의정 김수항이 숙종에게 이이의 서간이나 상소문(上疏文) 외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을 것을 권하고 동지경연(同知經筵) 이민서(李敏叙)의 청으로 이이와 성혼의 저작이 진강(進講)되게 되었다.
숙종이 내린 종사의 명령을 반대한 것은 9월 27일에 나온, 앞에서 말한 박성의(朴性義) 등의 상소다.
그들이 반대하는 논점은 다음과 같았다. 즉 율곡이 불교에 대한 관여하였으며, 이기설이 현사(賢師)인 이황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점은 인조시대 이래 율곡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남인들의 논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새롭게 더해진 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조, 효종, 현종의 3대 국왕이 내린 불허가라고 하는 결정이었다. 박성의 등은 인조가

“도덕은 아직 높지가 않아서 비판받을만한 결점이 있다”

라고 한 말은 만세 불변의 말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효종과 현종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단호한 결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였다. 숙종이 말하였듯이 우선 신중을 기해서 장래에 문묘종사를 허가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준비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숙종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파들의 주장에 대해서 율곡의 문묘종사를 찬성하는 유학자들의 반론은 다음과 같았다.
불교 관여에 대해서는 숙종이

“주자도 당초는 불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이의 결점이라고 할 수 없다”

고 한 말처럼, 이점에 크게 개의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기설에 대해서는 송광연(宋光淵) 등이 상소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생각건대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에 이르러 많이 명백해졌지만, 이황을 평생동안 존경하고 믿었다는 점에서 이이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 단지 이기설에서는 리기호발설(理気互発説)에 약간 결점이 있어……도리를 철저히 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데, 리통기국(理通氣局), 리기불상잡(理気不相雑)을 주장하고 지당한 설을 추구했을 뿐이었다.”

이 역시 인조시대의 반론과 기본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다.
3대 국왕이 내린 불허가라고 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승정원(承政院)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오늘 전하가 역대의 국왕이 행하지 않았던 것을 실현하고, ‘숭유중도(崇儒重道: 유학을 존숭하고 도를 중시한다)’의 의도를 분명히 하려고 하는데, 박성의 등이 한때 잠정적으로 제시된 3대 국왕의 왕명을 들어 전하가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허락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의 분개를 금할 길이 없다.”

인조, 효종, 현종 3대의 국왕이 내린 왕명이 율곡이나 우계를 문묘 종사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에 따랐던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애매한 결정을 한 것인가 하는 것은 당파에 따라서 의견이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사실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승정원은 박성의를 “한쪽으로 치우친 당파의 논의를 계승하여 흉계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성의 쪽도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즉 그는 숙종이 종사의 가부(可否)를 대신들에게 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는 공의(公議)를 구하도록 대신들에게 위임한 것이라 하시겠지만 오늘날 대신은 이전에 (율곡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상소를 낸 유생이고, 오늘 상소를 낸 대표는 그 대신의 아들이어서 대신과 유생이 서로 기맥이 통한다.”

말하자면, 이번 종사의 결정이 율곡 문묘종사를 지지하는 당파의 당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였던 박성의는 결국 유배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듬해인 숙종 8년 5월, 송나라 3현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합쳐 5현의 문묘종사가 행해졌다.

그런데 다시 7년 후에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 노론(老論) 소론(少論) 세력의 대부분이 배척되고, 남인 세력이 정권에 복귀하였다. 환국 후인 숙종 15년 2월에는 유학(幼學) 안전(安壂)이, 그리고 3월 12일에는 진사(進士) 이현령(李玄齢) 등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로부터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제출했다.
숙종은 이러한 상소를 접하고, 일단 축출을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15일에 이현령 등이 세 번째로 상소를 하자, 숙종은 “사림이 문묘에서 이이와 성혼의 축출을 요구하는 것은 역대 국왕의 명확한 명령의 말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答曰, 我朝儒賢従祀文廟, 輿望洽然, 終無異議, 獨於此両臣, 多士必冀黜享, 盖所以遵□列聖之明教也(『肅宗実録』巻二〇, 一五年 三月 壬午)
라고 대답하고 축출할 것을 인정했다.
그 다음 17일에 축출에 반대하는 진사 심제현(沈斉賢) 등 상소가 제출되었다. 그래서 숙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이이와 성혼은 종사해서는 안 되는데도, 나 때문에 문묘가 더럽혀져서 지금은 통절하게 후회하고 있다. 관학의 유생과 사림이 이이와 성혼의 출향을 요구하는 상소 내용은, 나의 마음에 꼭 맞기에 즐거이 인정한다.”

축출 반대를 주장하는 심제현에게는 유배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인 18일에는 이이와 성혼을 문묘로부터 축출해버렸다.

 

또한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안문(案文)이 첨부되어 있다.

“종향(従享)은 ‘표장유도(表章儒道), 증식문치(増飾文治)’를 위한 것이며, 문묘종사는 국왕으로서는 성절(盛節)라고 하더라도 종사되는 유현(儒賢)의 도덕성이 거기에 따라 증감하는 것은 아니다. 숙종은 진심으로 유현을 존중하고 믿은 것이 아니고, 단지 시류에 따라서 허례(虛禮)를 유현에 더했다. 이것은 유현에 있어서 영예가 아니고, 군주에게 덕이 갖춰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때문에 조정의 신하가 바뀌면, 종향(従享)으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아 출향(黜享)을 행했다. 후에 복향을 했지만, 그것도 사림의 요구에 내키는 대로 응한 것일 뿐이지 숙종에게 ‘숭유중도(崇儒重道)’의 아름다운 뜻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이이와 성혼은 나중에 숙종이 문묘에 다시 복향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안문에서 밝혔듯이 숙종이 두 사람의 종사를 행했던 것도 진심으로 그들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각 당파의 주장을 기초로 한, 말하자면 조정에서 일어나는 공의공론(公議公論)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숙종 20년(1694) 정월에 숙종 다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문묘종사는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종사해야 할 사람을 종사하지 않는 것은, 한때의 결례로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렇지만 종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종사해 버린 것은 문묘나 사림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이이와 성혼의 경우 도덕이 아직 갖춰지지 않아서 덮기 어려운 결점이 있다는 점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종사했다.”

말하자면 자기반성이었다. 그리고 숙종은 향후 공의 공론을 분별하지 않고 이이와 성혼의 종사를 요구하는 사람은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전국의 학교에 포고하였다.
그런데 이 해에 이른바 갑술환국에서 남인 세력이 몰락해버렸다. 그리고 4월 20일에 유학 신상동(辛相東)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의 복향을 요구했다.

숙종은 그러한 주장에 이해를 표시했지만, 문묘제도가 뒤집힌다고 하여 일단 유보했다. 그러나 21일의 충청도 유학 임봉선(林鳳珍) 등의 상소를 계기로 숙종은 “정의를 증오하는 무리에 속아서 이이와 성혼을 출향한 것을 나는 후회하고 있다. 문묘의 제도가 뒤집히는 것을 심려하여 즉시 행하지 않으면 결례가 된다.”라고 말하고 복향을 명했다. 다시 율곡과 우계가 문묘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숙종 자신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공론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으로서는 공론이 변하면 그러한 논의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4월 25일에 복향에 반대하여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상소했다. 그 다음날 한종석은 숙종 15년에 출향을 요구하는 상소를 제출했던 안전(安壂)이나 이현령과 함께 유배 처분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문묘에서 두 사람의 복향이 행해져 숙종은 전국에 복향을 고하는 교서(敎書)를 반포했다. 이 교서를 제작한 것은 병상에서 상소문을 제출해 인조를 충고한 좌의정(左議政, 후에 領議政)오윤겸의 손자였다. 율곡 문묘에 대한 대를 이은 지지였다.

율곡 이이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그의 사후 역사적으로 변천해왔다. 율곡의 문묘 종사 과정을 살펴보면 각 시대의 가치관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즉 집권 세력이 주장하는 ‘공론’이라고 하는 가치관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이 본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율곡의 문묘종사를 둘러싸고 논의를 일으킨 어느 쪽도 보편성을 가진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보이는 각종 왕조실록은 사실 율곡 이이의 문묘종사를 찬성하는 서인파, 즉 노론과 소론의 작품이었다. 따라서 반대파 즉 남인세력의 공론에 대해서는 사관(史臣)들이 만하듯이 ‘소인들의 비방’으로 평가절하되었다. 현대의 우리가 본다면 이러한 사관들의 의견 역시 편향되었거나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 이후 영조시대에 율곡은 이미 조선의 대표적인 현인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퇴계 이황과 함께 견줄 수 있는 유학자로 위상이 격상되어 있었다.
일본 유학자 야마구치 고이치의 율곡 종사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율곡에 대한 사상적인 평가는 아니다. 그와는 별개 차원의 다른 이야기다. 율곡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주목한 것이다. 율곡이 한사람의 유학자에서 조선유학의 대표적인 한 축이 되기까지는 이렇게 기나긴 시간의 치열한 평과 과정이 있었다.
1775년 4월 19일 일성록 기록에, 경연 장소에서 갑자기 율곡이 등장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